태화 4년 5월 16일 병오일의 한낮에 백 번이나 단련한 철로 된 칠지도를 ○○○○가 만들었다. 온갖 적병을 물리칠 수 있으니 제후국의 왕(侯王)에게 주기에 알맞다. 지금까지 이런 칼이 없었는데 백제 왕세자 기생성음이 일부러 왜왕을 위하여 정교하게 만들었으니 후세에 전하여 보이라.
“이나리야마”에 새겨진 백제의 열도 지배
이두로 이 글을 다시 풀어보니 놀랍게도 이것은 고구려가 남침한 369년 당시 백제 땅이던 하동에서 후왕으로 있던 장수 집안이 동경까지 망명온 뒤 이곳에서 다시 백제 후왕으로 책봉된 내용을 담은 집안 이야기 였던 것이다.
이두로 풀이한 칼 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서기 471년에 “고” 확고는 조상이름을 적어 둔다. “오호 비꼬”어르신, 그 아들 “다가리 쪽니”어르신, 그 아들 “고리 확고”, 그 아들 “다사기 확고”. 그 아들 “바라 고비”, 그 아들 “가사 비리”, 그리고 그 아들은 “고 확고”이다. 오늘날까지 우리는 장수로서 대대로 섬긴바 그 임금님은 사기궁에 마실을 차리고 천하를 다스리시는 크신 확가 개로 대왕이시니라. 온 번 불리고 달구어 만든 이 칼에 우리 집안 내력과 뿌리를 적어두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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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이 이나리야마 쇠칼의 글은 5세기 가운데 즈음에 옛 일본의 관동, 관서, 규슈 등 세 곳에 백제가 다무로를 다스리고 있었으며, 왜 왕실은 백제 왕실에서 갈라져 나왔음을 밝혀주는 귀중한 역사자료인 것이다
성덕왕(聖德王) 30년,
일본국 병선 300척이 바다를 건너 우리의 동쪽 변경을 습격하였는데, 왕이 장수를 시켜 군사를 내어 이를 크게 깨뜨렸다. (日本國兵船三百?, 越海襲我東邊, 王命將出兵, 大破之.)
- 제대로 상륙도 하지 못하고 박살난 일본, 결국 용서를 빌기 위해 서기 742년에 사신을 파견하지만‥
애장왕(哀莊王)
5년 여름 5월에 일본국이 사신을 보내와 황금 300량을 바쳤다. (五年夏五月, 日本國遣使, 進黃金三百兩.)
- 이를 기특하게 여긴 신라는 드디어 일본을 용서하고 속국으로서 인정한다. 서기 806년 속국에게 하교하는 신라.
애장왕(哀莊王) 7년,
봄 3월에 일본국 사신이 왔으므로 조원전(朝元殿)에 불러 접견하였다. 교서를 내려 말하였다. 『절을 새로 짓는 것을 금하되, 다만 수리하는 것은 허락한다. 또 수놓은 비단을 불교 행사에 사용하는 것과 금과 은으로 만든 그릇의 사용을 금한다. 마땅히 담당 관청으로 하여금 이를 널리 알려 시행하도록 하라.』(七年春三月, 日本國使至, 引見朝元殿. 下敎禁新創佛寺, 唯許修葺. 又禁以錦繡爲佛事, 金銀爲器用, 宜令所司, 普告施行.)
- 사찰을 수리하는 것조차 '종주국' 신라의 허락이 없으면 감히 하지 못했던 일본. 이후 '속국' 일본에 대한 종주국 신라의 사랑은 계속되고… 신라의 어버이와 같은 사랑에 감동한 일본은 서기 882년, 보답한다.
헌강왕(憲康王) 8년,
여름 4월에 일본국 왕이 사신을 보내 황금 300량과 야광주[明珠] 10개를 바쳤다. (八年夏四月, 日本國王遣使, 進黃金三百兩·明珠一十箇.)
근자에 사신이 그곳에 가서 물어보고 알았지마는, 임천각(臨川閣)에는 장서가 수만 권에 이르고, 또 청연각(淸燕閣)이 있는데 역시 경(經)ㆍ사(史)ㆍ자(子)ㆍ집(集) 4부의 책으로 채워져 있다 한다.국자감(國子監)을 세우고 유관(儒官)을 선택한 인원이 완벽하게 구비되어 있었으며, 횡사(黌舍 학교를 말함)를 새로 열어 태학(太學)의 월서계고(月書季考)하는 제도를 퍽 잘 지켜서 제생(諸生)의 등급을 매긴다. 위로는 조정의 관리들이 위의가 우아하고 문채가 넉넉하며, 아래로는 민간 마을에 경관(經館)과 서사(書社)가 두셋씩 늘어서 있다. 그리하여 그 백성들의 자제로 결혼하지 않은 자들이 무리지어 살면서 스승으로부터 경서를 배우고, 좀 장성하여서는 벗을 택해 각각 그 부류에 따라 절간에서 강습하고, 아래로 군졸과 어린아이들에 이르기까지도 향선생(鄕先生 자기 고장의 글 가르치는 선생)에게 글을 배운다. 아아, 훌륭하기도 하구나!
-송나라 서긍의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 1123년의 내용)-
우리나라는 문물과 예악이 흥행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으며 장삿배가 연이어 내왕하여서 값진 보배가 날마다 들어오니, 중국과 교통하여도 실제로 소득이 없을 것입니다. 거란과 영구히 절교하지 않을 터이면 송 나라와 교통함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하니 따랐다.
<고려사절요 문종 12년>
“옛 사서(역사책)에 따르면 고려의 풍속은 사람들이 모두 깨끗 하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지금도
여전히 그러하다. 그들은 항상 중국인이 때가 많은 것을 비웃는다.
(고려인들은) 아침에 일어나면 먼저 목욕을 한 뒤 집을 나서며,
여름에는 하루에 두 번씩 목욕을 한다.” -고려도경
倭國乃日本國也. 本名倭旣恥其名. 又自以在極東因號日本也. 今則臣屬高麗也 - 郭若虛.『圖畵見聞志』 卷6. 高麗國
왜국은 일본국이다. 倭라는 원래 이름을 부끄러워했는데, 극동에 있다고 해서 스스로가 일본이라고 부른다. 고려의 속국이다
(조선)황제 폐하(皇帝陛下)의 수(壽)가 남산(南山)처럼 높고, 덕(德)은 동해(東海)에 젖으시어...
성종 28권, 4년(1473 계사 / 명 성화(成化) 9년) 3월 13일(계묘) 3번째기사
일본국 경극전 경조윤 좌좌목씨 등이 사람을 보내 와서 토의를 바치다
위에 사람들 논리면 이란 이라크 인도 우리나라 위치까지 올라가야함 더군다나 그 삼국은 해방후 우리나라보다 훨씬 공업화가 되어있는나라인데다가 입법 민주주의 까지 이룬 나라였음 근데 이걸 60년도안에 치고 올라와서 누군 수백년걸려이룬걸 반세기만에 이뤘다? 기적이라고 밖에 말할 수 어없음
싼인건비와 박정희 대통령의 산업화 노력이 있었죠. 하지만 박정희 대통령이 변고가 없이 살았있었다면 생각나는 사람이 카다피네요.
민주주의의 확립은 국민 스스로 이뤄낸 거라고 생각합니다. 교육열이 일어나니 깨어있는 사람이 생겨나고 그게 민주주의를 쟁취하는 원동력이 되었죠. 덕분에 산업화와 민주주의를 한꺼번에 이뤄냈게 아닐까 스스로 생각해봥용
흥미로운 반응들이 많네요.
박정희 시절에 미국으로부터 무역특혜가 있던건 사실이나
월남전에서 흘린 피의 댓가이구요.
인종 지능 드립은 모르겠으나
자원이라곤 개 코딱지만큼도 없는데, 이만큼 먹고사는건 오로지 인적자원뿐
교육열이 큰힘이 되었죠. 그게 부메랑이 되어서 지금 부작용이 생기긴 하지만요.
땅파먹고 나무 끓여먹던 시절에 박정희가 경제원조 얻을려고
저자세로 나간게 지금의 한국의 위상을 만들긴 했지만..
어쨋든 배 곪은 시절은 넘겼다는점에서..양날의 검인것 같습니다.
이건 쪽빨이에게 해당되는거죠
문화도 역사도 없던 쪽빠리가 갑자기 잘 살게 된게 오래 되질 않습니다
문화 역사가 깊은 우리나라는 최근에 잠시 망했다가 저력이 있기에 빨리 일어선 것일뿐
비유를 하자면 근본도 없는 천민이 수단과 방법을 거리지 않고 악행도 서슴치 않고 악착같이 돈벌어 부자가됨 -->쪽빨이
명문가였지만 가세가 기울어 망했다가 저력이 있어 스스로 다시 일어서는중 -->>대한민국
다른거도 다 맞지만.. 결정적인건.. 아무래도 자식에게 가난을 물려주고싶지 않았던 부모들의 노력이 발전의 토대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미국 지원? 맞습니다. 인정할건 해야죠. 하지만 그것만으로 이정도 성장했다? 그럼 필리핀을 비롯해서 냉전시대에 미국의 지원을 받았던 여러 국가들은 뭐가되는거죠? 지원도 중요했지만.. 그만한 노력도 중요했음. 다른나라 사람들은 그 노력을 안했던거고 우리나라 부모세대들은 이 가난을 대물림하지 않기위해 열심히 노력했던것임. 말이 쉽지. 정말 어려운 노력임. 전 세계 어느나라의 부모 모두 자식이 잘되길 바라지만, 자식들은 자기들처럼 굶지 않도록 자기들보다 더 잘살게 되길 바라면서 죽도록 일한 나라는 없을거임. 교육도 부모세대들의 노력 중 하나. 요즘에도 똑같죠. 부모들은 항상 자식들에게 입버릇처럼 '공부 열심히해서 나처럼 살지말아라' 라고 말하죠. 서양국가나 기타 아프리카. 남미, 동남아 국가 였으면 어땠을까요? 애초에 이런 생각조차 안했을거임. 너네 인생 너네가 살아라. 아니 애초에 신경조차 안썼을지도 모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