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이 바다에서 성공을 거둔 동안 한국 육군은 끔찍한 손실을 입었다. 한때 이순신의 과실을 비난했던 이일(李鎰)이 육군을 이끌었지만 거듭 패배하고 마침내 충주에서 정규군이 전멸되어버린다. 한국을 통치하던 조선 궁정은 평양으로 달아나고, 국외 도피를 고려해야 되는 상황에 놓인다. 그러나 같은 날, 이순신 장군은 옥포해전에서 일본 함대를 짓밟았다. 그는 사천으로 건너가 일본 사령관을 함정에 빠뜨리고 여기서 거북선이 데뷔한다. 무적 거북선이 이 날 작전을 리드했고, 이 전술을 반복해서 사용하여 일본 함대를 파괴하고 이순신 함대는 손실을 입지 않았다. 마침내 히데요시는 해군 지휘관에게 이순신의 함대 사령부가 있는 전라도를 접수하라고 명령했다. 유감스럽게도 히데요시의 부하 와키자카 야스하루 (Wakisaka Yasaharu)는 의욕이 너무 넘친 나머지 이순신 함대에 달려들어 견내량 해협으로 후방지원없이 유인됐고 이로서 더욱 세련된 이순신의 미끼 전략에 현혹되었다 : 와키자카의 함대는 학익진이라고 불리우는, 사방팔방으로 포위 조준되어 공격당하는 형태에 분쇄된다. 역사상 가장 큰 해전 중 하나에서 이순신은 결정적인 승리를 거뒀으며 여기서도 그는 한 대의 함선도 잃지 않았다. 그는 히데요시의 남은 장군 두 명을 공격하기 위해 안골포로 향하고, 승리를 이어가고자 했지만 그들은 미끼가 되기를 거부했다. 그는 장거리 대포사격과 함께 부하 병력들이 부상당하는 것을 대가로 치르면서 이를 해결해야 했다. 결국 그는 일본 선박 몇 대를 제외한 모든 선박을 파괴했으며, 이를 통해 일본군에게 도주 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했다. 그러나 그는 목표를 달성했다 : 히데요시는 부산포를 지키는 것 외에 모든 해군 작전을 중단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명령이 아니었다면, 일본군은 그들 군대를 재보급할 수도 없었을 것이고 한국의 국왕을 한국에서 내쫓아버리기 위한 공격을 재개를 노릴 수도 없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