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량해전에서 승리한 이순신은 해군을 재건하고 중국과의 동맹 관계를 강화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했다. 일본의 새 지도자들은 계속 전쟁을 하고싶지 않았다. 강화가 이뤄지지만 한국은 이제 우위를 점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학살한 원수들을 곱게 보내주지 않기로 결심했다. 이순신과 명나라 함대는 순천의 요새에서 일본군을 병목에 가뒀다. 일본군이 증원을 요청하고 이순신은 노량 해협에서 이를 막으려한다. 숫적으로 500 대 150으로 일본군 함선이 훨씬 많았지만 명군 지휘관은 이순신의 장거리 포격 작전 스타일을 아직 이해하지 못했고 근접전을 하러 접근했다가 포위된다. 이순신은 그의 동맹군 지휘관을 구하기 위해 그의 기함을 몰았고, 일본군이 그를 식별하자마자 그들은 기함을 집중하고 노렸다. 이로 인해 순식간에 잊혀진 중국 함선이 자유롭게 사격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일본군은 실수를 깨닫고 달아나려고 노력했지만 이순신은 그들을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그는 그의 함선들로 하여금 일본군을 쫓으라고 직접 북채를 잡고 독전고(督戰鼓)를 치면서 한국에서 벌인 학살에 대한 응징을 할 것을 독려했다. 그 순간 그는 치명적인 총상을 입었다. 그는 죽기 전에 아들과 조카에게 그를 대신해 전투를 지휘하라고 명령했다. 그들은 그가 죽었다는 사실을 숨기고 수군이 적을 격멸하는 것을 계속 독려하기 위해 그의 갑옷을 입고 전투를 지휘한다. 그렇게 함께 그날 치열한 전투를 승리로 장식하고 난 후에야 이순신의 비극적인 죽음이 밝혀진다. 이순신은 살아서 이를 보지 못하지만, 300척의 일본 함선이 그날 노획되거나 파괴되었고 침략군의 나머지 병력은 얼마 안가 사로잡히게 된다. 지칠 줄 모르는 군무(軍務)와 탁월한 지도력,한국에 대한 변함없는 충성심 덕분에 이순신은 충심(忠心)과 무덕(武德)의 표본, 충무공(忠武公)이라는 시호(諡號)로 불리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