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요청으로 올립니다. 한국인, 일본인 유저 몇명이 들어와서 댓글이 대부분 건질만한게 없이 진흙탕이네요;;
today20080523 와우, 장난아닌걸!!! 13척배로 100척의 적선을 상대하다니, 이순신 장군은 정말 영웅이야.
hyoboy81 영상 자막은 누가 만들었냐? 끔찍하다.
mehdan2 못된 일본놈들은 대포조차 없었지. 한국과 중국은 모두 가지고 있었는데 말야.
AzureSky317 고양이를 집어 던지는 방식 너무 맘에 들어!
lcddg 저 당시는 동양이 서양보다 훨씬 낫구만.
primal114 나 이 드라마를 DVD로 모두 가지고 있어. 이 드라마는 내가 한국이 지닌 유산을 사랑하게 만들었지.
noobzaebot 천부적인 전략이다. 인정할만해!!
stanislaw84 쇠사슬을 사용하는 조선군의 전략을 이해 못하겠어.
DNAz5646 저 쇠사슬은 배의 진로는 막는 벽과 같은 역할을 하지.
xuckers 쇠사슬 전략 꽤나 영리한걸?
Shirasonie 1 우린 단지 조국이 침략당하는 것으로 부터 지키길 원했을뿐이지. 내가 생각하기엔 일본은 항상 침략자이기만 하고 행복하고 평화로운 섬국가 될수 없을 듯 해. 왜 그들은 제발 다른 이들은 내려두지 못하는 걸까? 이 드라마는 외국영화 300과 같이 우리나라와 가족들을 지키기 위한 내용이야. 일본은 늘 약탈과 착취를 위해서 싸웠지. 우리의 역사와 예술을 불태우고 말야.
NKSK007 그리스와는 달리 한국은 이 전투에서 완벽히 승리했군.
gopaul1234 일본은 히틀러와 다를게 없어.
tokyocityrat 이 댓글은 반대 표를 너무 많이 받았습니다. 표시 숨기기 응 우리는 거의 성공할 뻔(조선을 점령할 뻔)했지. 슬프게도 히데요시는 군사를 일본으로 보낸후에 죽어버렸어. 만약 노부나가가 한국을 정벌했다면 한국은 거의 일본이 됐을거야. 하지만 마침내 20세기되어서 한국을 겁탈했지.
invalide014 이건 그냥 영화일 뿐이자나. 재밌게 즐겨보고 역사는 역사대로 받아들이라고 이 영화에서 조선군과 일본군 둘중에 누가 더 나은지 상관없어.
tokyocityrat 있잖아. 많은 한국인들은 수십년동안 일본 앞에서 머리를 조아렸지. 심지어 지금까지도 말야. 내가 친절한 제안을 너희 들에게 해주지. 역사 공부좀 해 하하하!
ㄴNKSK007 지네 인종이 다른 인종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하는 또 하나의 인종주의자 나셨군.
keiya1955 한국은 중국의 속국이었어. 그러므로 이제 중국왕조에 굴복할 시간이 됐어. 조공을 요구하면 순순히 복종해야했지. 하지만 일본은 중국의 요구를 항상 거부했지.
ㄴmekon11 그래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 맞아. 하지만 그때 뿐이었지. 일본은 수나라, 당나라는 물론 아시카가 쇼군 시절동안엔 명나라의 속국이었지.
*아시카가 요시미쓰 : 무로마치 막부 3대 쇼군으로 일본역사상 유일하게 '일본왕'으로 불린 사람입니다. 중국과 외교문서에서 중국을 자극하지 않기위해 늘 '천황'에 대한 언급을 제외했는데, 이를 모르는 중국황제는 그를 '일본왕으로 책봉한다' 국서를 내렸는데 이에 감동하여 중국 방향으로 엎드려 절한것은 물론 '신하로서 중국황제에 충성을 다하겠다'라는 답서를 보낸것으로 유명합니다.
ㄴkeiya1955 일본과 중국의 관계는 주종관계가 아닌 무역파트너 정도였어!
ㄴmekon11 뭔 개소리야, 와(Wa : 倭, 왜-일본)는 그들의 이름이 왜 니폰(日本, 일본)으로 바뀌었는지를 인정해야 돼. 기억은 하냐? 일본이 조공바치는 사신을 수나라에 보냈던거? 일본은 수나라, 당나라, 명나라, 심지어 쿠다라(백제)의 개였을 뿐이야.
이후로 수 페이지가 넘는 두 사람의 속국에 대한 논쟁이 길게 이어져서 생략하겠습니다.
vphuongdktdbk 낮은 계급의 장군들이 전투동안 상관에게 수시로 질문하는게 웃기다.
PrUnEJuIcEtHeThIrD 대포VS조총?
Daniel4646 7분 14초 쯤에 고양이가 불쌍하다.
s455164 가엾은 고양이 :(
ManjuSu 의심의 여지없이,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장군이다.
RoninShinobi88 동영상에 나오는 여자들이 부르는 노래는 뭐야?
ironknight5990 내가 알기로 저 고양이는 시간을 알기위해 사용된거야. 근데 겨우 그것때문에, 저런 값비싼 페르시아 고양이를 수입했을까? 야스하루는 나에게 있어서 굉장한 악역은 아닌것 같아. 하하
picknana 많은 사람들이 저 고양이 눈이 시계로 사용됐다는 사실은 잘 모를거야.
taishotono 저 원을 그리는 춤을 추며 아낙네들이 부르는 노래는 강강술래야
jk10thirtyone 하하하, 2분 12초 쯤에 '내가 어찌 알아 X끼야?(how the fuck should i know?)라는 멘트 정말 웃긴걸
세계 4대해전
ㅡ B.C. 480년 그리스의 데미스토클레스(themistocles)제독의 살라미스(Salamis) 해전
ㅡ 1588년 영국 하워드(Howard)제독의 칼레(Calais) 해전
ㅡ 1597년 판옥선 13척으로 왜선 133척을 물리친 이순신 장군(제독)의 명량대첩(鳴梁大捷)
ㅡ 1805년 영국 넬슨(Nelson) 제독의 트라팔가(Trapalgar) 해전
명량대첩이 세계4대 해전에 포함되는 것이 외국에서는 정설이나 윤지강 저 『세계4대해전』에서 명량대첩대신 한산대첩을 포함한 뒤로 국내에서는 한산대첩이 4대해전으로 포함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영국인, 독일 등 유럽 해군사관학교에서는 지금도 명량대첩의 극적승리를 놀라워하며 격전지인 울돌목 해협을 일생에 꼭 한번 가보고 싶어한다고 합니다.
세계4대해전이란 책도 있습니다.
http://book.daum.net/detail/book.do?bookid=KOR9788988296974 [<세계 4대 해전>은 세계 역사의 흐름을 바꾼 4대 해전을 살펴보는 책이다. 세계 4대 해전은 기원전 480년의 살라미스 해전, 1588년의 칼레 해전, 1592년의 한산도 해전, 1805년의 트라팔가르 해전을 말한다. 세계 3대 해전인 살라미스 해전, 칼레 해전, 트라팔가르 해전에 우리의 한산도 해전을 더한 것이 세계 4대 해전으로, 역사의 물줄기를 돌려놓은 큰 전투들이다. ]
세계4대 해전을 왜 4대 해전이라 하면... 바다위의 전술에 대한 내용을 다루기 때문입니다. 이순신의 학익진 진법은 1:9의 효과를 낳는 매우 효과적인 진법으로 아군 100척이 적군 900척과 똑같은 화력의 효과를 낳기 때문에 집중 조명된거죠....
그리고 한가지 덛붙이자면 명량해전은 13척으로 133척을 박살낸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적군의 배의 숫자가 133척이라고 잘못 알고 계시는 분들이 계신데...
그게 아닙니다.
완파(30여척)하거나 수리가 불가능할 정도로 반파(90여척)한 배의 숫자가 133척 이란 뜻입니다.
전투에 동원된 적의 배의 숫자는 133척이 아니라 333척입니다. 역사스페셜에도 나왔죠....
하지만 이것은 조선의 기록일 뿐입니다.
일본의 역사 기록을 보면 333척이 아니라 500척입니다.
그리고 한산도 대첩이 집중 조명 받게 된 또하나의 이유는....
바로 세계최초로 원거리 사격포를 최초로 선보였기 때문입니다.
현대 해상전에서나 볼수 있는 원거리 사격포를 무려 400년 전에 선보인것이죠.조총의 사거리가 20미터 인데 당시 조선의 화포 사거리는 50미터 정도였고 무기의 종류에 따라 더욱 사거리가 먼것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이를 최대한 이용해 이순신 장군은 사거리를 50미터로 유지해 가며 전투를 펼친겁니다. 그렇기에 22번의 해전에서 단 1척의 배도 박살이 나지 않았죠.... 병사들은 죽의 공포로 부터 자유로울수 있었고 일본군은 죽음의 그림자위에서 전투를 펼치게 된겁니다.
그런데 여기에 바다위의 탱크라는 거북선까지 있었으니... 오히려 지는게 이상할 정도네요...
일반적인 M-16소총의 정확도는 약 250미터 입니다. 250미터가 넘어가면 정확히 맞추기가 힘들죠... 하지만 총 날아가는 거리 ..즉..최대 사거리는 약 4키로 미터 입니다.
일본의 조총도 마찬가지입니다. 20미터 이내에 목표물이 있어야 명중률이 높습니다. 그래서 20미터 라고 한겁니다. 실제로는 훨씬 멀리 나가죠...
화포 사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실제 사거리는 50미터보다 훨씬 멀지만.. 일반적으로 일정한 요격률을 보장하는 사거리가 당시에는 50미터 였습니다
해서 이순신 장군은 늘 일본의 안태선과 조선의 판옥선과의 사거리를 50미터로 유지하며 뒤로 빠지며 화포를 쏴서 적을 궤멸시키는 전술을 많이 썼습니다. 가장 일정한 파괴력을 유지하기 위해 일자진을 많이 썻습니다. 맨 앞의 적선을 먼저 파괴하면 뒤의 적선의 진형이 흐트러 지기 때문이죠....
나중에 거북선이 동원되면서 이러한 진법도 약간의 모양을 달리합니다. 거북선이 먼저 적의 한가운데로 뛰어들어 360도로 화포를 발포하고 진형을 무너 뜨린후 빠져나오면 판옥선에서 일정한 사거리로 화포를 발사해서 궤멸시켰죠...
못된 일본놈들은 대포조차 없었지. 한국과 중국은 모두 가지고 있었는데 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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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의 수군이 처음에는 군선에 함포를 싣지 않고
조총과 백병전으로 싸우는 전술을 하다가..
해전에서 계속 패하니깐 나중에는 함포를 실었다고 알고 있는데..
명량해전에서는 당연히 함포까지 싣고 왔을테죠..
명량해전 당시는 일본도 이어진 패전으로 화포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고 칠천량에서 원균의 조선수군이 대패한 후니까 노획한 화포가 있었을겁니다. 일본측 기록화에도 일본배에 화포가 나옵니다.
다만 당시 일본 수군의 전투선인 안택선 같은 경우 선체가 약해서 조선의 판옥선 같이 다수의 화포를 갑판에서 운용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일본측 전투화에 보면 화포를 돗대 같은데 매달아 놓은 모습이 보이는데, 갑판에 놓고 발사하면 발사충격 때문에 선체가 손상되기 때문이라는게 정설입니다. 결국 일본도 전쟁 후반에는 화포 사용 흉내를 냈지만 실제 전투에서 효과적으로 사용하지는 못했습니다.
짱개 새1끼들 속국드립 또 나왔네 뭔 속국이야 병1신도 아니고 --그냥 명, 청나라가 크니까 어쩔 수 없이 조공을 바친거지 ㅉㅉ 그리고 한족은 송나라 말고는 5000년 내내 노예 아니였나? ㅋㅋ 청나라가 명나라 물리치고 드러섰을 때 한족이 100년동안 천만명도 넘게 학살, 강1간당해놓고는 다 지네 역사래ㅋㅋㅋㅋ
제가 해군에서 군생활할때 이순신장군 교육용 시디제작할때 그래픽담당으로 있었는데요
그 역사스페셜에 자주 나오는 이순신박사가 제 옆에서 난중일기를 직접 해석해주면서 해전 애니메이션을 만들었지요
제가 만든 동영상이 제대이후 역사스페셜에 사용된것도 본적있음
나름 당시 전투에 대해 잘안다고 생각하는데...
일본이 포가 없었던게 아니라 포를 배에서 사용할 기술력이 없었습니다.
배에서 포를 발사하면 배 바닥이 버티질못하고 박살났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일본에서 사용했던게 포를 배 천장에 매달아서 함포 사격을 했는데...
당연히 고정이 안되니깐 정확도가 0에 가까웠죠
그 당시 이순신장군의 전략전술도 대단했지만 정말 대단했던게 배 건조 기술이였다고 합니다.
13 vs 100이지만...
항공모함+이지스13 vs FF급 100의 싸움으로 보면 된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이순신장군의 가장 큰 업적은 바로 백병전없는 최초의 함포사격만으로 이뤄진 해전을 한 장군이기때문이라는 군요
저거보다 훨더 히트칠만하게 살수대첩...
대부분의 외국학자들조차 살수대첩을 무슨 환타지처럼 대하지.."아~ 그랬어~"
즉. 먼가 과장이 많이 섞였다고들 보고있음.. 그럴수밖에 없는게,, 서기 600년경
에 3백만을 동원하구, 그중 백만이 정규군으로 싸웠으며, 선발된 30만 별동대가
기어와 겨우 2~3천명이 살아돌아갔다는건.. 당시 1만명만 넘어도 대군이라하던
서양인들 상식으론 도저히 말이 안된다고들 생각함..
그누구도 인정한적이 없는데..그냥냥 자기 역사서에 혼자서 천황이라 쓴걸로..
그냥 자기들은 한번도 속국인적 없으며 황제국이란 드립임..
왜나라가 섬인데다가 당시 여건상 지리적인면이든 문화적인면이든 변방국인게 확실한데..
자기들만의 우월감에 혼자 찌들어 있는 망상에 지나지 않음.....그런 현상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죠...
왜국 본토를 직접적으로 처들어간게... 2차세계대전 이전에 내가 알기로 여몽연합에의한 침략이 처음인걸로 알고 있음...
게다가 제들이 근거라고 내세우는 역사서를 보면 죄다 자기들 역사서임...
주변국의 역사서를 근거라고 드립한적은 없음...
완전 망상민족임..
태조 2년 계유(1393) 6월 16일(경인) 일본 일기도의 중 건철이 포로 200여 인을 돌려보내고 방물을 바치다
태조 4년 을해(1395) 7월 1일(임진) 일본 구주 절도사 원요준이 중을 보내어 토산물을 바치다
태조 4년 을해(1395) 7월 11일(임인) 일본 일향주 사람이 토산물을 바치다
태조 4년 을해(1395) 7월 16일(정미) 일본 살마주 사람이 토산물을 바치다
태조 4년 을해(1395) 12월 16일(을사) 일본 대내전의 다다량이 토산물을 바치다
태조 6년 정축(1397) 6월 21일(신축) 일본 구주 절도사 원요준이 사람을 보내어 토산물을 바치다
태조 6년 정축(1397) 10월 1일(기묘) 일본 구주 절도사가 토산물을 바치다
태조 6년 정축(1397) 11월 14일(임술) 일본 육주목 의홍이 중 영범·영확 편에 토산물을 바치다
태조 7년 무인(1398) 7월 27일(경자) 일본 비전주 준주 태수 원경이 예물을 바치다
정종 1년 기묘(1399) 9월 10일(정축) 이달에 일본국의 절 주지가 사람을 시켜 예물을 바치다
정종 1년 기묘(1399) 11월 1일(정묘) 일본 서해도 준주 태수 정종(貞宗)이 사람을 보내어 토산물을 바치다
정종 2년 경진(1400) 8월 1일(계사) 일본이 사신을 보내 방물과 감자, 매화를 각각 한 분씩 바치다
태종 1년 신사(1401) 6월 18일(을해) 일본국 비주 태수가 말과 약재를 바치다
태종 1년 신사(1401) 9월 29일(을묘) 일본의 대마도 임시 태수 종정무 등이 말·석고·백반을 바치다
태종 2년 임오(1402) 9월 29일(기유) 일본 살주 산성의 태수 원뇌수와 일기주 지주 원양희가 예물을 바치다
태종 3년 계미(1403) 2월 27일(갑술) 일본 사자가 와서 토산물을 바치다
태종 3년 계미(1403) 1월 23일(신축) 일본에서 사신 12명이 와서 토산물을 바치다
태종 3년 계미(1403) 10월 8일(임자) 일본 사자가 잡혀 갔던 우리 나라 사람을 데리고 와서 토산물을 바치다
태종 4년 갑신(1404) 7월 30일(기사) 일본 국왕 원도의가 사신을 보내 내빙하고 토산물을 바치다
태종 4년 갑신(1404) 7월 17일(병진) 일본 전평전 원원규가 토물을 바치다
태종 5년 을유(1405) 6월 29일(계사) 일본 국왕 원도의가 사신을 보내 도적을 잡은 것을 보고하고 예물을 바치다
태종 5년 을유(1405) 6월 3일(정묘) 일본 지좌전이 중 도군 등을 보내 약재 등의 토산물을 바치다
태종 5년 을유(1405) 5월 24일(무오) 일본에서 예물을 바치다
태종 6년 병술(1406) 12월 21일(병오) 일본 단주 수와 비주 수가 사신을 보내 소목 등의 물품을 바치다
태종 6년 병술(1406) 8월 6일(임진) 일본 일기주 지주 원양희가 포로 76명을 소환하고 종정무도 토산물을 바치다
태종 6년 병술(1406) 4월 22일(임오) 일본 호자전 객인이 와서 토물을 바치다
태종 6년 병술(1406) 4월 16일(병자) 일본 서해도 단주 태수 원영이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치다
태종 6년 병술(1406) 2월 27일(무자) 일본국왕이 《대장경》을 청하고, 구주 절도사가 포로와 토물을 바치다
태종 7년 정해(1407) 10월 26일(병오) 일본 살마주 등원뇌구가 예물을 바치다
태종 7년 정해(1407) 11월 26일(병자) 일본 대마도 수호 종정무가 예물을 바치다
태종 7년 정해(1407) 5월 6일(기미) 일본 지좌전, 호자전이 예물을 바치다
태종 7년 정해(1407) 7월 21일(임신) 일본국 대내 다다량 덕웅이 예물을 바치다
태종 7년 정해(1407) 8월 5일(병술) 일본 전평전이 사자를 보내어 예물을 바치다
태종 7년 정해(1407) 2월 1일(병술) 일본 살마주 태수가 사자를 보내 토산물을 바치다
태종 8년 무자(1408) 2월 27일(병오) 일본 진서탐제장군 원도진이 예물을 바치다
태종 8년 무자(1408) 6월 3일(경진) 일본의 지좌전·어주전이 예물을 바치다
태종 8년 무자(1408) 10월 28일(임인) 일본 국왕 원도의가 좀도적을 금지시켰다고 알리고 예물을 바치다
태종 8년 무자(1408) 4월 19일(정유) 일본 구사전이 사자를 보내어 예물을 바치다
태종 8년 무자(1408) 7월 6일(임자) 일본의 대내전이 옥교자·병풍·약재·기명·능견 등의 예물을 바치다
태종 8년 무자(1408) 7월 20일(병인) 일본 살마주 태수가 예물을 바치다
태종 8년 무자(1408) 8월 21일 (병,신) 일본국 구주 절도사가 토산물을 바치다
태종 8년 무자(1408) 9월 29일(갑술) 일본의 축주 태수가 예물을 바치다
태종 8년 무자(1408) 12월 6일(기묘) 일본 구주 목 원도진이 예물을 바치다
태종 8년 무자(1408) 1월 26일(을해) 일본의 원만직이 예물과, 불로원이라는 약 1백 개를 바치다
태종 9년 기축(1409) 3월 6일(기유) 일본의 지좌전이 사람을 보내 예물을 바치다
태종 9년 기축(1409) 3월 26일(기사) 일본 일기주와 비주전에서 진위하고 예물을 바치다
태종 9년 기축(1409) 11월 8일(병자) 일본 축전주 객인이 와서 토산물을 바치다
태종 9년 기축(1409) 9월 6일(을해) 일본 일향주 사람이 토산물을 바치다
태종 9년 기축(1409) 윤 4월 11일(계축) 일본의 대내전 다다량덕웅이 중 주정을 보내 토산물과 관음화상을 바치다
태종 9년 기축(1409) 3월 26일(기사) 일본 하송포의 삼하 수 융군이 예물을 바치다
<중략>
세종 즉위년 무술(1418) 10월 14일(경인) 일본 일향주 태수가 표를 올려 신(臣)이라 칭하고 방물을 바치다
세종 즉위년 무술(1418) 10월 29일(을사) 일본 비전주 중·일향주 태수·관서도 축전주 석성 관부가 칼·향 등을 바치다
세종 즉위년 무술(1418) 10월 30일(병오) 일본 관서로 구주 도원수 원도진이 방물을 바치다
세종 즉위년 무술(1418) 11월 29일(을해) 일본 서해로 미작 태수 등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종 즉위년 무술(1418) 12월 6일(신사) 일본 대마도 종정성이 방물을 바치다
세종 즉위년 무술(1418) 10월 13일(기축) 일본 구주 총수와 서해로 미작 태수가 방물을 바치다
세종 즉위년 무술(1418) 8월 21일(무술) 일본 서해도 일향주 태수와 대마주 조율 산성수가 토산물을 바치다
세종 즉위년 무술(1418) 12월 29일(갑진) 일본 축전주 태수가 소목 백반 등을 바치다
세종 1년 기해(1419) 1월 3일(무신) 일본 대마도 만호가 토산물을 바치다
세종 1년 기해(1419) 3월 7일(신해) 일본 구주 도원수가 《대반야경》을 청구하고 토산물을 바치다
세종 1년 기해(1419) 4월 4일(무인) 일본국 비주 태수·장주 태수·대마도 화전포 도만호가 토산물을 바치다
세종 2년 경자(1420) 윤 1월 28일(정유) 일본 구주 총관 평종수가 토산물을 바치다
세종 2년 경자(1420) 12월 2일 (병,신) 일본 방장풍삼주 도호 다다량만세가 공물을 바치다
세종 2년 경자(1420) 11월 28일(임진) 일본 비주 태수 원창청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종 2년 경자(1420) 11월 25일(기축) 일본국 구주 총관 원의준이 공물과 토산물을 바치다
세종 2년 경자(1420) 10월 26일(신유) 일본국 구주 절도사 원도진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종 2년 경자(1420) 8월 9일(을사) 일본 전 서해도 구주 도원수가 사신을 보내어 토산물을 바치다
세종 2년 경자(1420) 1월 5일(갑진) 일본국 경도·구주 등에서 사람을 보내어 토산물을 바치다
세종 2년 경자(1420) 8월 2일(무술) 일본 서해도 비전주 평우진 준주목 원성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종 2년 경자(1420) 12월 8일(임인) 일본국 구주 도원수 우무위 원도진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종 2년 경자(1420) 12월 9일(계묘) 일본국 구주 총관 원의준 등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종 3년 신축(1421) 9월 9일(기사) 일본 평만경이 조공을 바치다
세종 4년 임인(1422) 7월 5일(경신) 일본인 삼주 태수와 대마도 좌위문대랑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종 4년 임인(1422) 3월 27일(갑신) 일본국 대마주의 좌위문대랑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종 4년 임인(1422) 2월 26일(계축) 일본의 원의준·등원뢰·원성 등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종 4년 임인(1422) 윤 12월 23일(병자) 일본 구주 총관이 사람을 보내 토산물을 바치다
세종 4년 임인(1422) 7월 23일(무인) 일본 도영·평만경·웅수·평민소조천·입도상가 등이 방물을 바치다
세종 4년 임인(1422) 7월 22일(정축) 일본국 대내다다량도웅·원도진·원의준 등이 방물을 바치다
세종 4년 임인(1422) 3월 26일(계미) 일본국 구주 총관 원의준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종 4년 임인(1422) 3월 5일(임술) 일본의 전 구주 총관 원도진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종 4년 임인(1422) 3월 5일(임술) 일본의 원의준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종 5년 계묘(1423) 10월 18일(을축) 일본국 구주 원의준 등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종 5년 계묘(1423) 10월 25일(임신) 일본국 원의준·평만경 등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종 5년 계묘(1423) 11월 24일(신축) 일본국 원도진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종 5년 계묘(1423) 5월 19일(무술) 일본국 관서도 원준신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종 5년 계묘(1423) 1월 12일(갑오) 일본국 축주 관사 평만경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종 5년 계묘(1423) 12월 25일(임신) 일본 국왕의 사신 규주·범령 등 135명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종 5년 계묘(1423) 10월 15일(임술) 일본 구주 다다량덕웅·평만경 등이 토산물을 바치다
<중략>
세조 1년 을해(1455) 10월 14일(병진) 일본국 오도 우구수 원승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조 1년 을해(1455) 10월 29일(신미) 일본국 상송포 구사도의 등원의영과 이세수 원문 등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조 1년 을해(1455) 11월 1일(임신) 일본국 살주 등희구·오도 우구수 원승 등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조 1년 을해(1455) 12월 9일(경술) 일본국 관제가 토산물을 바치다
세조 1년 을해(1455) 9월 20일(임진) 일본국 일기주 왜 호군 등구랑 등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조 1년 을해(1455) 8월 22일(을축) 일본국 비전주 상송포의 지좌원씨의 딸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조 1년 을해(1455) 8월 18일(신유) 일본국 대마주 왜 호군 정대랑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조 1년 을해(1455) 8월 17일(경신) 일본국 등원의영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조 1년 을해(1455) 12월 12일(계축) 일본국 비전주 전평우진 등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조 1년 을해(1455) 11월 27일(무술) 일본국 일기수 원고와 이세수 원문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조 1년 을해(1455) 11월 13일(갑신) 일본국 살주 등희구·오도 우구수 원승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조 1년 을해(1455) 11월 6일(정축) 일본국 오도 우구수 원승과 비전주 상송포 단후 태수 원성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조 1년 을해(1455) 10월 8일(경술) 일본국 관서로 축전주 냉천가무가 토산물을 바치다
세조 1년 을해(1455) 9월 29일(신축) 일본국 살주 이집원 우진 우주 태수 등희구 등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조 1년 을해(1455) 9월 2일(갑술) 일본국 살주 이집원 우진 우주 태수 등희구 등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조 1년 을해(1455) 윤 6월 16일(경신) 일본국 대마도의 종성직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조 1년 을해(1455) 윤 6월 21일(을축) 일본국의 원지직·상송포의 중 원우·대마주의 종성직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조 1년 을해(1455) 윤 6월 29일(계유) 일본국 상송포 파다도의 원납 등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조 1년 을해(1455) 7월 3일(병자) 일본국 대마주의 종성직·종성가가 각각 토산물을 바치다
세조 1년 을해(1455) 7월 21일(갑오) 일본국 원고·원영과 대마주 종성직·종성홍·종호웅와가 각각 토산물을 바치다
세조 1년 을해(1455) 7월 30일(계묘) 일본국 석견주의 등원·주포화겸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조 1년 을해(1455) 12월 15일(병진) 일본국 오도 우구수 원승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조 1년 을해(1455) 7월 1일(갑술) 일본국 비전주 종상군 지수 종상조신씨정 등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조 1년 을해(1455) 8월 3일(병오) 일본국 오도 우구수 원승·비전주 단후 태수 원성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조 1년 을해(1455) 7월 11일(갑신) 일본국 등원조신교뢰 등이 토산물을 바치다
세조 2년 병자(1456) 7월 28일(을미) 일본국 비전주의 진궁 병부 소보 원영이 사자를 보내 토물을 바치다
세조 2년 병자(1456) 6월 26일(갑자) 일본국 대마주 종성직이 사람을 보내와 토물을 바치다
세조 2년 병자(1456) 6월 2일(경자) 일본국에서 사람이 와서 토물을 바치다
세조 2년 병자(1456) 5월 24일(임진) 일본에서 사람이 와서 토물을 바치다
세조 2년 병자(1456) 4월 22일(신유) 일본국 대마주 호군 정대랑의 아들 사정 정가문수계 등이 토산물을 바치다
<중략>
성종 즉위년 기축(1469) 12월 8일(정사) 일본국 구주 도원수 원교직이 사람을 보내와 토산물을 바치다
성종 1년 경인(1470) 1월 25일(갑진) 일본국 대마주의 종정국·종정수와 인위군의 종성가와 종성직이 토산물을 바치다
성종 1년 경인(1470) 4월 5일(계축) 일본국 축전주 종상군 지수 씨향이 사람을 보내와 토산물을 바치다
성종 1년 경인(1470) 6월 21일(무진) 일본국의 원승·종언팔랑무세·등희구·종정국 등이 사람을 보내 토산물을 바치다
성종 1년 경인(1470) 7월 19일(을미) 일본국의 종정국·종성가·종성홍·원만·등씨의 어미가 사람을 보내 토산물을 바치다
성종 1년 경인(1470) 7월 27일(계묘) 일본국 석견주의 등원주포좌근장감화겸과 귀해지국의 교공이 토산물을 바치다
성종 1년 경인(1470) 8월 24일(기사) 일본 국왕이 보낸 입도 등이 와서 서계와 토산물을 바치다
성종 1년 경인(1470) 10월 24일(무진) 일본국 관서도 구주 도원수 원교직이 사람을 보내 와서 토의를 바치다
성종 1년 경인(1470) 12월 18일(신유) 일본국과 올적합 등에서 사람을 보내어 와서 토산물을 바치다
성종 1년 경인(1470) 12월 27일(경오) 일본국 대마주 태수 종정국 등이 사람을 보내어 와서 토의를 바치다
성종 1년 경인(1470) 7월 13일(기축) 일본국 주방주 산구 소사 대삼하수 원홍안이 사람을 보내와 토산물을 바치다
성종 1년 경인(1470) 3월 12일(신묘) 일본국 일기주 수호 대관 진궁 병부 소보 원무가 사람을 보내 토산물을 바치다
성종 1년 경인(1470) 6월 23일(경오) 일본국의 종정국·종성가·종성홍·종조육성준 등이 사람을 보내 토산물을 바치다
성종 1년 경인(1470) 7월 6일(임오) 일본국의 종정국·종성홍·종무차·원승·원중실 등이 사람을 보내 토산물을 바치다
성종 1년 경인(1470) 12월 8일(신해) 일본국 대마주 태수 종정국 등이 사람을 보내 와서 토산물을 바치다
성종 1년 경인(1470) 11월 1일(을해) 일본국 구주 시소의 종언팔랑무세 등이 사람을 보내 와서 토의를 바치다
성종 1년 경인(1470) 10월 8일(임자) 일본국 풍주 태수 대우팔랑사능 등이 사람을 보내 와서 토산물을 바치다
성종 1년 경인(1470) 9월 28일(계묘) 일본국에서 사람을 보내 와서 토산물을 바치다
성종 1년 경인(1470) 9월 19일(갑오) 일본국에서 서계와 함께 토산물을 바치다
성종 1년 경인(1470) 8월 28일(계유) 일본국 세천 좌오두 지현이 사람을 보내어 와서 토산물을 바치다
성종 1년 경인(1470) 8월 25일(경오) 일본국에서 사람을 보내 와서 토산물을 바치다
성종 1년 경인(1470) 8월 23일(무진) 일본국에서 사람을 보내어 와서 토산물을 바치다
성종 1년 경인(1470) 8월 7일(임자) 일본국 여러 태수들이 사람을 보내어 와서 토산물을 바치다
성종 1년 경인(1470) 7월 19일(을미) 일본국 경성 관령 전산전 좌경 대부 원의승이 중 향양을 보내 토산물을 바치다
성종 1년 경인(1470) 7월 12일(무자) 일본국 종정국·종정수·종성홍·종성가·원덕 등이 사람을 보내와 토산물을 바치다 성종 2년 신묘(1471) 2월 28일(신미) 일본국 대마주 태수 종정국 등이 사람을 보내어 와서 토산물을 바치다
성종 2년 신묘(1471) 5월 22일(갑오) 일본국 비전주 원덕이 사람을 보내 와서 토산물을 바치다
성종 2년 신묘(1471) 6월 11일(임자) 일본국 장문주 적간관진수 충수가 사람을 보내 와서 토의를 바치다
성종 2년 신묘(1471) 6월 27일(무진) 일본국에서 사람을 보내어 와서 토산물을 바치다
사실 일본은 대포라는걸 가지고 있어죠. 그런데 문제는 조선술이 제대로 발달하지 못해서 대포를 걸어놓는 방식으로 싸웠기에 점점 필요가 없어졌어요.(백병전을 원했죠.) 그런데 외국상인들에게 조총이라는 신무기를 받고 침략을 시도했죠.(잘 생각해보니 자기들의 힘으로 제대로 싸운적이 없는 것 같네...... 조총은 외국한테 받았고 군함들도 외국의 기술 잔뜩 빨아들여서 만들었고)
참고로..
저 당시 일본의 해전 방식이 나쁜 방식은 아니였음.
쟈들도 나름 노하우로
조총과 활을 마구 쏴제끼고 도선해서 백병전 벌여서 불싸지르는 ㅌㅌㅌ 하는 방법이였으니.
실제로 잘 통하든 방법이였거덩.
이순신장군에게만 유독 개털렸든 것이지.
물론 이순신장군 휘하에 유독 백병전을 즐겼든 장수가 있었는데 기억이 가물가물...
조선수군이 선상백병전을 피했든 이유는
백병전을 하면 이기든 지든 아군의 피해는 엄청 생기는데 이걸 싫어 했었든 것 같음.
훈련도 엄청 빡세서 비전투 손실이 전투손실보다 엄청 높았었고, 부하들은 전투 나가면 신나서 노래 불렀다나.
"아우~~장군님에게 당한 갈굼을 왜군에게 풀자~~~"라면서
참고로 당파라든지 백병전 같은건 철갑선이 나왔을 때도 쓰였든 해전에선 아주 확실하고 유용한 전술임.
그래서 오직 인력만이 동력으로 사용되었든 저 시기에 화포를 주력으로 전투를 벌였든 용병술에 감탄을 금치 못하는 것이제.
사실 불멸의 이순신은 거의 세세한 부분은 다 구라라고 봐도 됩니다. 덕택에 이순신장군님만 이상해진 드라마였죠.(물론 배우 김명민의 연기는 매우 뛰어났지만, 고증이 철저하게 잘못 되었죠.) 특히 선전관이나 선조가 땡깡 부리는 것은 역사서에서는 전혀 없는 기록으로 이순신장군 혼자서만 대단하고 다른 애들은 다 ㅄ이다 라는 일제 식민사관적 논리가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명군 장수가 출진을 불허하자 이순신장군이 너 ㅅㅂ 나한테 칼침 맞을래? 이런 장면 있는데 실제로는 장군님 제 전공 장군님께 드릴테니까 좀 출진좀 시켜 주세요 그리고 선전관에게는 명군 새끼들 때문에 출진을 못한다. 조정에 알려라. 이거죠.(만약 드라마에서처럼 명군 장수와 심하게 대립했더라면 이순신장군은 직위해제 당하고 감옥에 갇혔겠죠. 이순신장군이 진짜 대단한게 처세, 경영, 전술 이 모든 면에서 신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당시 왜군 장수들도 바보는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조선 기술력에서 넘사벽으로 차이가 나는 바람에 이순신 장군의 전술에 계속 끌려다닌 것이죠. 나중에 대형함선을 대량 건조해서 화력전으로도 대항할 생각을 해보지만, 결국 이순신장군에게 발렸죠. 명량해전의 경우 좁은 길목에서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의 대형함선은 기다리고만 있었고 소형함선으로 백병전을 시도 했는데 먹히지 않고 다 개발렸죠. 여기에서인지 어디에서인지 철로 만든 줄로 배들의 움직임을 막는 장면이 나오는데 전혀 고증이 잘못된 겁니다. 후대에 만들어진 괴담일 뿐이죠. 이 괴담 중 대표적인 것이 선조가 시기하여 이순신장군은 xx할수 밖에 없었다. 마지막 전투에서 xx한것처럼 나오는데 사실은 아닙니다. 그당시 이순신 장군은 왜군의 돌아가는 길을 막고 있어서 왜군은 돌아가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워야만 했고 전투가 상당히 격렬해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순신 장군을 비롯 상당수 지휘관이 이 전투에서 전사했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날 쏴 죽여라 하고 드라마처럼 들이댄적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선조가 이순신 장군을 질투할 이유도 전혀 없었습니다.(이순신 장군의 공은 모두 관군의 공으로 따지고 보면 이순신 장군은 선조의 수족 즉 선조의 공입니다. 이순신 장군의 공덕은 조선왕조을 굳건하게 해주었으면 했지 그 반대는 아니었죠. 이순신장군의 후손들은 이순신 장군 덕에 그 후손들은 특별히 대우 받아서 쉽게 무관에 오를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찾아보시면 아시겠지만 이순신 장군의 공을 조선시대 그당시에도 매우 엄청 높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단, 의병장들은 좀 사정이 달랐습니다. 관군의 통제를 받지 않은 독자적인 세력이었기 때문이지요.^^ 만약 이순신장군이 의병장이었더라면 당연히 숙청되었겠지만 관군이었으므로 전사하지 않았더라도 충분히 죽을때까지 영예로운 삶을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특히 명군장수한테 초라한 밥상을 주는 장면은 진짜 개소리이고 처음 왔을때 나름 호화찬란 스페셜하게 줬는데 명군장수한테 개까인 거지요. 그당시 이순신장군을 비굴하다고 생각했던지, 의도적으로 왜곡을 많이해서 요새 사람들은 이순신 장군하면 독불장군이지만 천재라고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 실제로는 처세술의 신이기도 했습니다. 아래 장수들 병사들에게도 존경을 받았고 그 위의장수들에게도 칭찬 받았죠. 명군 장수에게도 본국에 돌아갈때 이순신장군은 최고의 장수다라는 칭찬을 받았습니다. 이순신장군이 전쟁전에 출세해서 결과적으로 좋은 결과를 얻긴 했지만 사실 낙하산 인사죠., 그만큼 처세 정략의 달인이기도 했습니다.
살수를 막아서 대첩을 승리로 이끌었다는 건 전설이겠지... 짧은 시간 막는 것도 그렇거니와, 그걸 도강하는 적군을 섬멸하는 데 쓰려면 순식간에 보를 무너뜨려야 가능한데 그럴 방법이 없었다는 거... 결론은..그냥 전투에서 승리 요인은 있었을 것인데..사료에 과장 기재된 것이 아니겠는가...하는 짐작...
구글에서 ming dynasty 이미지 검색 해보면 아마 황당해 할껄..
1557년 에 포르투칼 마카오 점령. 포르투칼 식민지 확장 전쟁
포르투갈인=포르츄귀=풍신수길 포르투갈 식민지 검색해봐 ㅋㅋㅋ
포르투갈인 총를 갖었고 왜인이 포르투칼 식민지 확장 전쟁에
이용된거..왜란의 주무대는 현제 중국 남부해안지역 양자강임..내생각 ^^
그당시 베트남지역도 식민지였고 월남=베트남=비엣남=왜남
조선왕조실록에도" 왜" 에가는데 걸어 갈 수 있다고 나옴.현제 일본를 걸어 갈수 있나???
즉 왜는 현제의 일본이 아니다는거...전쟁후에 열도를 따라 현제일본에 유입된거고
그들과 그들의 후예들이 역사조작,일제시대 got it?????
1592년 임진년 왜란[1557 마카오 점령] 포르투갈인에게 총포기술 배운게 누구더라???
명=조선 이라는 거...
특히 저 드라마가 병맛인것은 진짜 ㅄ중 상 ㅄ인 겁쟁이 새퀴 원균을 용장으로 묘사를 했다는 점이죠, 작전이란 것이 왜군 보이면 도망가고 팀킬이나 안하면 다행이던 원균 새퀴.. 왜군의 평에 의하면 이런 ㅄ은 살다살다 첨본다는게 바로 원균인데 이런 색히들 후빨해주고 멀쩡한 선조랑 조정은 다 ㅄ만들고,,( 선조쉴드는 찔리긴 하는데,, ㅋㅋ 상대적으로 원균보다는 ㅄ이 아니고 정상적인 인간이라는 의미에서 봐주세요.ㅎㅎ)
ㅁㅁ// 선조가 땡깡 부린건 역사에도 나와 있어요. 역대왕중 가장 열폭심한 왕(왕이라고 부르기도 아까운놈)이었죠. 명황제가 광해군을 처음에는 인정하지 않았는데 전쟁동안 엄청난 능력을 보여주자 전쟁 후에 왕의 권한의 2할정도를 떼어서 주죠. 그것도 선조가 보는 앞에서 너는 무능한놈이고 광해군은 훌룡했으니 여기 저기 관할할 권한을 주겠다 이런식으로요. 다음날 광해군이 '세자 왕을 뵈옵니다 ㅋ' 하고 문안 왔는데 '나는 너를 세자로 책봉한적 없다.' 라며 쫓아냈죠. 그렇게 삐져 살다가 찹쌀인지 찹쌀떡인지를 먹다가 목이 막혀 뒈졌죠.
그리고 결정적으로 선조의 이순신에대한 열폭이 얼마나 심했는지는 난중일기에도 나옵니다.
이순신은 선조의 질투를 두려워해서 항상 실제 전과보다 낮춰 보고 하였습니다.
허위사실 정정
- 13척 + 지원 50척이 아니라 협선이라고 어선 수백척이 있긴했지만 실제 전력은 13척이 맞습니다.
12척 + 전투전에 겨우 한척 더 건조해서 = 13척
-항공모함 vs FF급? 판옥선이 우수하긴 했지만 일본도 한산도였나?? 이후 배를 대대적으로 개조하여 판옥선보다 크기가 커지고 함포도 장착 가능하였습니다. 그리고 칠천량 해전때 원균은 235척??정도를 수장 시켰습니다. 이순신 제독이 얼마나 귀신같은 전력을 써왔는지 확실히 비교 되는 전투지요
☆4대 해전은 한국에만 있습니다. 세계에서는 3대 해전만 가르칩니다. 이상 오류 없으시기를
ㅎㅎ//선조도 ㅄ짓 많이 한 건 인정하기 때문에 바로 님 윗글에서 정정한 것인데요. (제 생각으로는 그래도 인조나 고종보다는 낫다고 보지만,,)
선조가 이순신장군을 전쟁 끝난 후에 음해하려고 했다는 점에서는 생각이 좀 다릅니다.
이순신장군을 토사구팽하여 죽이려 했다고는 할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순신 장군은 수군절도사로서 존재하였기 때문에 육군 장수들보다도 쿠데타를 하기엔 불리한 위치입니다. 선조가 이순신 장군을 깎아 내리고 원균을 끝까지 높게 평가하기는 했지만.(원균찌질이 색휘랑 금단의 사랑에 빠졌나? 도대체 왜그래? 선조의 미스테리죠.ㅋ) 우겨서 원균을 1등공신 반열에 올린 것도 자기가 내린 판단착오를 끝까지 인정하기가 싫었던 일국의 왕으로서의 오기였다고 생각합니다.
선조가 이순신을 싫어했던것은 부산포를 공격하고 싶은데 이순신이 자기명을 따르지 않았던 탓이라고 생각합니다. 원균으로 교체되는 이유는 윤두수 때문이구요.
저도 임진왜란중 삽질을 가장 많이 한 인물 중에 선조와 원균을 꼽고 싶어요.
하지만 이순신장군이 xx했다는 것에는 단언코 반대하는 입장입니다.
이순신 장군이 노량해전에서 전사하셨는데 이때 자기가 죽고 싶어서 죽었다고 보기엔 아직도 한창 전쟁 중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언제 쳐들어올지 모르는데 이순신 장군을 감히 제거하려고 조정에서 생각을 하겠습니까? 즉 토사구팽당하겠다 생각하기엔 너무 이른 시간대에 돌아가셨고 이순신 장군이 돌아가실 정도로 치열한 전투였기에 돌아가신 것이지요.
당시엔 배타고 싸우면 수군, 땅 밟고 싸우면 육군이였습니다.
수군이라고 해서 전투력이 약하지는 않죠.
다만 일정 이상 훈련을 거쳐야 진형을 유지하고 싸우는데 유리하겠지만.
이순신장군이 군사훈련 빡시게 시킨거야 다들 아는 사실이고,
수군도 활쏘고, 포쏘고 할거 다 할 뿐만아니라.
원균이가 전투도 못해보고 한큐에 말아 먹는 칠량전...
이순신 장군이 그 때 부산 탈환하기 위해서 해병대 비스무리한 병과를 빡시게 굴리고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명나라 신종도 이순신장군 하면 하악하악..진린은 이순신빠돌이..명국체계에서 선조보다 이순신장군 벼슬이 더 높았든가.
백성들로부터 그 당시에도 절대적 지지를 받고 있었든 분이라.
항상 기함이 최일선에서 싸웠든 분이라 xx설은 설로만 보지만.
선조가 이순신장군에게 엄청난 열등감과 불안함을 가졌든 것은 사실이 아닐까 합니다.
더군다나 임란 중후반기로 가면 조선의 육상전력도 꽤 강해져서 왜군에게 우세를 보이고 있었습니다.
케관광 당한 건 임란 초기 뿐이거덩요.
사실 노량해전이 없었어도 임진왜란은 왜군의 철수로 끝나는 전쟁이였습니다.
왜도 더 이상 전쟁을 지속할 능력도 안될 뿐더러.
군사적인 측면에서 볼 때 조선도 홈그라운드면 왜랑 맞짱 뜨서 이길만큼 강해진 시기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