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는 미국에서 영국으로 전해졌지...300년쯤전 영국이 미국의 지배를 받던시절에...
영어와 라틴어에 비슷한 어휘가 많은 걸로 봐서는 미국이 로마를 세웠을 지도 몰라 늑대 젖먹은 형제가 미국인이였을 수도 있겠지.......뭐 지금의 이태리는 미국과 조금 다른 나라니 너무 신경쓸 필요 없지만 말이야...
기하학은 그리스에서 만들어져서 이집트와 인도로 퍼졌고
바빌론에 지구라트 기록과 흔적으로 볼 때...고대 이스라엘인들이 페르시아를 지배했고 바벨탑을 세웠다는걸 알 수 있지..
18 지도만 봐도 답 나오는걸 왜곡하는 찐따들이나 그걸 맏다고 믿는 등신들이나....- -a
hyunah yoon
좋은 비디오야 근데 한가지 실수가 보임
불교는 인도에서 중국 일본을 거쳐 한국으로 전해진게 아녀
한국은 이미 6세기 무렵에 불교를 국교로 정했다고
======
6세기 무렵이 아니라 4세기 무렵아님? 고구려 소수림왕
그리고 혼자서 아무것도 할수 없던 왜인들에게 불교가 전파되어왔다고?? 이건 뭐 ㅡㅡ;;;;
내가 완전 충남 촌놈인데 평생 서울 30번 이나 가봤나 할 정도
서울가서 상당히 인상 깊었던게 63빌딩등 고층 건물 전혀 감흥 없었는데
드라마 에서 전혀 못 느꼈는데 우연히 지나가다 서울 도심속 절과 궁궐 보고 상당히 인상 깊었음
아 이래서 가장 한국적 인게 세계화 된거다 이말을 이해 했음
청와대 청내 도로에서 외국 정상 맞이 할때 조선 전투복에 칼차고 왼손 가슴쪽으로 올리고 고개 숙일때
너무 멋져보이고 인상 깊음 대폭 증원 했으면 좋겠음
열도내 제대로된 국가라는 개념 자체가 없던 시대에(동열도에 수렵을 하던 조몬인들이(이들은 근대 메이지시대까지도
수렵생활을 할정도 미개) 원주민으로 거주하고 있었고 부산과 가까운 대한해협을 사이에 둔 서열도에서
고조선 시대(이를 야요이문화로 지칭)부터 이후 삼국시대 가야, 백제, 고구려의
우리쪽 사람들이 들어가 서열도를 중심으로 문명을 꽃피우고 정치체재를 만들어감)
이후 우리 백제를 부르던 또 다른 지리명사가 백제 멸망후
본격적 백제 도래인의 서열도 진출이 본격화되면서 일본이라는 정식 국호가 생겨나고 도성이 돌연 만들어짐.
이전까지 열도내의 최초의 제대로된 문명이라는게 다름 아닌 해양대국이든 우리 백제에 의해 건립된 불교 사찰
인 <아스카 문명>이군요.
일본 최고의 수준, 아스카 문화
백제인이 만든 문화(593년 ~ 622년)
'아스카'라는 이름은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사람들이 당도한 땅을 '안숙(安宿)'이라고 부른 데서 유래한다. 한반도 남쪽 끝 해안에서 출발하여 오랜 항해와 모험 끝에 정착할 만한 땅을 찾은 안도감을 느낀 한반도인들은 편안히 도착했다는 뜻으로 안숙이라는 이름을 붙였고, 안숙이라는 말이 시간이 지나면서 아스카라는 말로 변한 것이다.
권력 투쟁에서 승리한 소가 우마코는 587년 백제에 사절을 보내 사원을 건축하려 하니 승려와 건축 기술자를 파견해 달라고 요청했다. 당시 일본은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도움을 고루 받았지만 아스카 문화는 유독 백제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백제는 다음 해에 혜총 등 승려와 목수, 화공, 기와 굽는 기술자 등을 일본에 보냈다. 당시로서는 최고의 기술을 지닌 사람들이 일본에 파견된 것이다. 한반도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절을 지을 때면 이미 일본에 이주해 있던 한반도인의 2, 3세 후손이 백제의 선진 기술을 배우기 위해 몰려들었다.
일본 최초의 절인 법흥사(飛鳥寺, 아스카지)는 이렇게 탄생했다. 당시 법흥사를 지키던 승려는 백제의 혜총과 고구려의 혜자였는데 혜자는 쇼토쿠 태자의 스승이었다.
쇼토쿠 태자는 사천왕사(四天王寺), 법륭사(法隆寺) 등 7개의 절을 세웠다. 우지들도 다투어 자신의 조상신을 모신 절인 우지데라(氏寺)를 세웠다. 624년 쇼토쿠 태자가 30년 집권하는 동안 사원이 46개 세워졌고, 거주하는 승려는 816명, 비구니는 569명이나 되었다. 불교 관계 기술자들뿐만 아니라 역박사, 의박사, 악인 등 수많은 사람이 백제를 중심으로 하여 한반도에서 들어왔다.
이두로 이 글을 다시 풀어보니 놀랍게도 이것은 고구려가 남침한 369년 당시 백제 땅이던 하동에서 후왕으로 있던 장수 집안이 동경까지 망명온 뒤 이곳에서 다시 백제 후왕으로 책봉된 내용을 담은 집안 이야기 였던 것이다.
이두로 풀이한 칼 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서기 471년에 “고” 확고는 조상이름을 적어 둔다. “오호 비꼬”어르신, 그 아들 “다가리 쪽니”어르신, 그 아들 “고리 확고”, 그 아들 “다사기 확고”. 그 아들 “바라 고비”, 그 아들 “가사 비리”, 그리고 그 아들은 “고 확고”이다. 오늘날까지 우리는 장수로서 대대로 섬긴바 그 임금님은 사기궁에 마실을 차리고 천하를 다스리시는 크신 확가 개로 대왕이시니라. 온 번 불리고 달구어 만든 이 칼에 우리 집안 내력과 뿌리를 적어두는 바이다
...................
이렇듯이 이나리야마 쇠칼의 글은 5세기 가운데 즈음에 옛 일본의 관동, 관서, 규슈 등 세 곳에 백제가 다무로를 다스리고 있었으며, 왜 왕실은 백제 왕실에서 갈라져 나왔음을 밝혀주는 귀중한 역사자료인 것이다
태화 4년 5월 16일 병오일의 한낮에 백 번이나 단련한 철로 된 칠지도를 ○○○○가 만들었다. 온갖 적병을 물리칠 수 있으니 제후국의 왕(侯王)에게 주기에 알맞다. 지금까지 이런 칼이 없었는데 백제 왕세자 기생성음이 일부러 왜왕을 위하여 정교하게 만들었으니 후세에 전하여 보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