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인이 우리나라 역사인 임진왜란을 총 9편에 걸쳐 편집하여 상세하게 소개한 다큐형식의 동영상입니다.
한국,중국,일본 다큐와 드라마를 영상 곳곳에 줄거리로 적절히 배치하였고 내용들을 직접 모두 번역하고 편집했다고 합니다,
또한 각 장면마다 직접 내레이션으로 자막이 나옵니다.
이 영상을 제작하는데만 8개월이란 시간이 소요되었고 왠만한 한국인들보다 임진왜란에 대해 훨씬 더 자세하게 아는거 같습니다.
감히 말씀드리지만, 지금까지 외국인이 제작한 임진왜란과 이순신장군에 대한 영상중에 역대급이라고 할수 있을것 같습니다.
마지막 장면은 정말 감동적이고 전율을 느낄정도입니다. 절대 스킵하지 마시고 반드시 마지막편까지 모두 보시기 바랍니다.
<아래는 제작자가 남긴 말 요약입니다.>
추가하면 동아시아 역사에 관심있는 코넬대학생으로서 자료조사를 위하여
백지에서부터 한국어 일본어를 습득하면서 하루 4시간 수면의 8개월 작업으로 제작했다고 합니다.
쉬운 말조차도 어려운 외국어인데 전문용어가 많은 역사책을 몇개월 안에 습득해서
이러한 고품질의 영상을 제작했다는 것이 진정 믿기질 않습니다.
"I made these videos with a great respect for those heroes. I studied East Asian history at Cornell, and back in 2005, I found about this war but there were not many books about this subject so I learned how to read Korean and Japanese. It took a lot of time but it was worth it. I collected these clips from 5 different historical documentary dramas from S.Korea, Japan, China. I mined only historical facts and put more information I know, like what's really happened in the real battles, I had to read the real battle reports and had to put more maps and tactics, so It took over 8 months to make these videos. There were no English subtitles so I had to translate everything myself. It took a lot of time and I also had to work so I couldn't sleep more than 4 hours a day. But it was fun. Hope you guys enjoy it.
- With a great respect, Matthew.
<참고문헌 및 자료>
The Annals of the Joseon Dynasty of Korea.
Toyotomi Hideyoshi's Record, 朱印狀.
The Annals of the Ming Dynasty of China
Jingbirok the Book of Corrections from prime minister Ryu Seong-ryong.
War Diary of Admiral Yi Sun Shin.
And many battle reports written in the 16th century.
Names of the documentary dramas and others sources in this episode.
불멸의 이순신 KBS (2003)
징비록 KBS (2015)
임진왜란 1592 KBS & Chinese CCTV (2016)
軍師官兵衛 NHK (2014)
江〜姫たちの戦国 NHK (2011)
And a clip from "The Admiral : Roaring Currents (2014)"
밤 12시에 우연히 보기시작하여 지금 아침 7시19분이다.. 이거 보면서 흘린 눈물딱는다고 휴지 2마디는 젖었다. 임진왜란동안 조선땅에서 코가 베이고 , 유린당하고, 처참히 짓밟힌 선조들이 너무 불쌍하고 안타깝고 화가나고 분통터져서..흘린눈물이 휴지 1마디를 적시고, 이순신장군의 위업에 감동받아 흘린 눈물과 이를 이제서야 알아주는 그 미쿡사람이 고마워서 흘린눈물로 1마디 휴지를 적셨다.
마지막 에피소드는 3시간동안은 내가 직접 네이버켜놓고 영어단어 하나하나 찾아가며 해석하면서 마무리했다. 그랫더니 위에 해설이 있었다. 그런데.. 정말 몰랐던 것이 많이 있다.
언제가 꼭 일본정벌할 날이 와야 한다.. 지금 심정이라면 일왕는 내가 죽인다. 내목숨걸고서라도.
임진왜란이 터지고 조선은 당연히 국력이 쇠약해졌고 마찬가지로 명나라도 엄청난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래서 그 여파의 스노우볼이 굴러가는데 동아시아가 평화로웠던 이유가 조선과 명이 만주족(여진족)을 함께 억눌러놓고 있었는데 견제할 힘이 없어진거죠 그래서 누르하치가 빠르게 부족들을 통일해서 후금을 세우고 조선에 형제관계를 요구한거죠. 거기서 그 유명한 광해군이 중립을 지켰습니다. 누르하치가 명을 멸망시킬 걸 예견했거든여.. 그래서 청나라가 세워지고 빡대가리같은 서인들이 반정일으켜서 인조가 나오고 그 유명한 남한산성에서 머리 세번 땅에 찧고 사대관계 맺게 됨..
이게 임진왜란 스노우볼임
그리고 통신사가 이와같이 중요한 것이 그 뒤에 도쿠가와는 전쟁이 아니라 본인 정권 지키기 위해 통신사를 이용했습니다. 왜냐하면 저기도 나왔듯이 통신사가 엄청난 규모이기 때문에 한번 지나가면 지방경제가 박살나거든요 그래서 일본 지방세력들이 반란할 생각을 못하도록 통신사 보내달라고해서 지방견제하고 본인은 또 조선에서 저렇게 온다고 백성들한테 과시하는 거구요.. 조선은 통신사 보냄으로써 물자교류랑 일본 이색기들 감시하는 용이고요
그리고 일본이 이순신에 대해서 엄청나게 연구합니다. 그 뒤에 일본이 그걸 써먹는데 그것이 러일전쟁에서 유럽상대로 최초로 학익진을 쓰고요.(그때 독도에서 싸웟는데 지좃대로
독도를 지네땅이라고 선포하고 싸웟습니다. 그러고 지금까지 우기는거) 그 후로 학익진이 전세계 모든 해군이 학익진을 사용합니다. 일본이 그뒤 강대국이 되죠. 원래 러시아랑 일본이랑 국력차이는 지금 한국과 러시아 정도? 이상일걸요 근데 영국이 좀 도와주고 해전 이기고 난 이후로 우리나라 빼먹으면서 급속도로 성장하죠. 그래서 일본새끼들 보면 영국도 오지게 빨아재끼잖아요 ㅋㅋㅋ 지금도 ㅋㅋ
동북면 1도(道)는 원래 왕업(王業)을 처음으로 일으킨 땅으로서 위엄을 두려워하고 은덕을 생각한 지 오래되어, 야인(野人)의 추장이 먼 데서 오고, 이란 두만(移闌豆漫;이란 투멘)1도 모두 와서 태조를 섬기었으되, 언제나 활과 칼을 차고 잠저(潛邸)에 들어와서 좌우에서 가까이 모시었고, 동정(東征), 서벌(西伐)할 때에도 따라가지 않은 적이 없었다
금나라에서 발해부흥운동이 없었던 원인은 무엇인가? 이에 대하여 劉肅勇은 금나라가 발해유민을 다스리는 통치술이 뛰어 났기 때문이었다고 한다.30) 그러나, 요나라의 통치술이 결코 금나라보다 못했다고 단정할만한 어떠한 근거도 없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이러한 설명은 납득하기 어렵다. 금나라에 맹안모극제가 있었던처럼 거란에도 남북원제가 있었다. 거란이 발해유민을 통제키 위해 실행했던 동단국의 요양 이동과 같은 강제 사민정책은 강력했다. 금나라에서도 발해인들에 대한 사민책이 있었다고는 하나,31) 이것은 어디까지나 거란에서처럼 발해유민의 부흥운동에 대한 대처였던 것은 아니다. 금초에 있었던 발해인에 대한 화북·산동으로 사치는 고영창의 대발해국이나 고욕의 난에 가담하였던 발해 세력, 또는 후발해 조정에 있던 무리가 아니었나 한다. 당시의 발해인이 고영창 세력이었을 가능성은 대발해국 당시 고영창이 금나라와 협상하면서 ‘황제’를 고집하다가 금에 의해 참살되었던32) 사정에서 찾을 수 있다. 또한 올야 정권의 후발해 조정과 연결된 세력이었을 가능성은 금나라를 건국한 세력과 올야 정권은 일정하게 같은 ‘일가’이면서도 금나라 조정에서는 누구보다도 강력한 견제세력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금나라에서의 발해인 사치라는 의미는 거란초의 발해유민 사치와는 그 의미가 자못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거란과 이민족의 입장에 있던 발해의 부흥운동에 대비한 것이 거란의 사치정책이었다면, 금나라에서의 그것은 ‘일가’안에서의 반대세력을 소개시키기 위한 정책이었다는 차이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금나라 조정에서 여진과 발해가 ‘본동일가’였음에도 불구하고, 발해인을 특별히 구별하였던 것은 거란내에 있었던 고영창 등의 발해유민 세력이거나 후발해 조정안의 지배층과 변방의 피지배 여진의 관계에서 비롯된 것이다.
요컨대, 발해와 여진의 역사적 관계에서 금나라에서 발해유민의 부흥운동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즉, 여진이 세운 금나라는 발해와 일정하게 ‘본동일가’로 볼 수 있는 것이기에, 금나라는 한편으로 발해의 민족적 정통성을 계승한 왕조였기 때문이다.
금나라 황릉의 모델은 고려 황릉(왕릉)이었다.’ 12세기 북중국을 장악했던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1115∼1234) 황릉이 고려 황릉과 형제처럼 꼭 닮았다는 비교 연구가 국내에서 처음 나왔다. 금 태조 완안아골타(1068∼1123)가 10세기에 건국한 고려를 ‘부모의 나라’라고 불렀던 것을 감안하면, 당대 사회적 문화적 역량을 총집결시켰던 국책사업인 황릉 조성을 한반도에서 벤치마킹했던 것이다
장경희 한서대 문화재보존학과 교수는 최근 학술지 ‘동방학’에 게재한 논문 ‘12세기 고려·북송·금 황제릉의 비교 연구’에서 “고려와 금 황릉은 양식적으로 매우 유사하며 같은 시기 북송 황릉과 뚜렷이 구별된다”고 주장했다.
이 미친 일뽕새끼 지가 일본인 좋아한다고 남들이 싫어하면 반사회 인격장애?
일본에서 혐한서적이 베스트셀러고 헤이트스피치 지껄여도 강제로 금지할 법적 구속력도 없는 중세 쨉랜드의 현실은 니 눈깔에 안보이지? 일본인들의 왜곡된 역사관에 따르면 지들처럼 반일서적이 베스트셀러가 되어야 하는데 반일서적이 없어서 쪽리둥절 했던건 모르냐?
님 말에 동의해요. 다만 반사회적장애는 아니지만요. 그건 보통 사람들이 '자주'갖는 '실수'에요. 솔직히 우리가 빵쯔니, 조센징이니 하면서 욕먹을 때는 화내면서 짱깨니 섬숭이니같은 말을 서슴없이 쓰는 것은 분명히 문제가 있어요. 그건 분명 인종차별이고 일본이나 중국이라는 국가를 겨냥하는게 아니니까요.
1.유럽에서 조선으로 현장중계갔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소리
2. 임진왜란은 동아시아사에서 절대 저평가되는 전쟁이 아님. 다만 일반인들의 관심이 적어서 그런 것일뿐. 역으로 중왕조-베트남전쟁과 한자동맹이 각 지역권에 가져온 영향에 비해서 일반인들은 알지도 못하는 경우가 많음. 이건 상대적인 문제임.
3. 일본의 중세이후의 성장이 가속화된 것은 영토내에서의 식량생산량 증가와 다이묘 휘하의 기술공들의 자영상업화로 인해 발생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함. 18세기 중반까지 동아시아국가간의 경제적 교역은 매우 고립적이고 소극적이여서 대부분 내수경제를 기반으로 작동되었음. 게다가 페리개항전까지도 서방과 일본의
교역은 제한국가(네덜란드)에 단일항 교역으로 이루어져있어서 일본 전체의 경제적 영향력은 적었음. 다만 새로운 문물과 철학을 들여오는데는 유리했을 뿐. 일본의 안정적인 지정학적인 위치로 안보적 이익을 본 것은 사실이지만 반도에 빨대를 꽂았다는 것은 강화도 조약 전까진 힘든 일임. 게다가 조선 중반까지 일본은 분열되있었고 내전을 거듭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음.
4. 전근대 한반도와 열도 사이의 격차는 지리적 요인으로 인한 영향으론 설명하기 불충분함. 당시 조선의 정치구조나 상황과 일본의 정치상황을 비교하면 명확한 사실.
그렇죠. 차라리 우리나라는 호위함과 구축함 위주의 전투함정과 핵잠이 훨씬 낫죠. 솔까 독도함마저도 운용할 헬기가 없는게 현실. 지형 또한 독도함이 들어갈 군항이 많이 없어요. 그래서 부산으로 해작사를 옮기고 제주에 신항을 건설했고요. 지금은 모르겠지만 제가 군 생활할 땐 독도함이 진기사 소속이였는데 진해 육전을 사용할 수가 없어서 부산에서 계속 살았죠. 부사관 이상 간부들한테 출동수당 주는게 발전기 돌리는것보다 싸게 먹히니..
외국인에 의해 소개되는 한국 역사는 항상...왜곡되었거나 축소된 거 투성이라...첨에는 니가 뭘 안다고? 하는 맘으로 보는데...이건 뭐...ㅋㅋㅋㅋㅋ
나보다 더 잘아네? ㅋㅋㅋㅋㅋㅋㅋㅋ
특히 5부에서 고니시의 거짓 정보로 알고만 있었던 게...실은 실제 정보였다는 설은 정말 소름이...ㄷㄷㄷ
물론, 팩트 체크는 더 필요하겠지만...말만 들어보면...정말 그랬을 거 같다는 느낌이 들더군요.
사실...ㅄ들도 아니고...뻔한 거짓 정보에 조선 정부가 그리 쉽게 동요했겠냐란 생각을 항상 가지고 있었던 터라...
그리고 9편 다 보고 마지막 멘트를 보는데...눈물이 왈칵 나오더군요. 뭔가 고맙다고 해야하나...ㅠㅠ 그런 감정이 올라오더군요.
실제 비슷한 시기 가토 기요마사가 조선에 건너왔으니까 꼭 거짓정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걸 그대로 믿고 군을 움직이기에는 위험부담이 너무 컸죠.
이순신과 조선 해군 입장에서는 절대 패하면 안되는 입장이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합니다. 패하지 않고 위험에 빠지는 정도도 용납 불가인 상황이었죠.
풍신수길 정도면 몰라도 장군 하나 죽인다고 전쟁이 끝나는 것도 아닌 만큼
이런 불확실한 정보에 조선의 운명을 걸 수는 없었다고 봅니다.
이런 정보에 휘둘려 허둥대는 선조와 조정이 한심하다는 사실은 변할 수 없고,
사건의 본질을 보지 못하고 자신의 권위만 내세우며 이순신 장군을 처벌한
선조의 뻘짓은 정보의 사실 여부와 관계 없이 비판받아야 합니다.
여기 나이 있으신 분 중에 어렸을 때 사용한 말 중,
예를들어, 징그러운 거나 무서운 거를 볼 때, 에비~, 에비~ 하셨던 분 있으신가요?
저는 어릴 때 이런 소리를 많이 듣고 말하고 했는데 나중에 학교에서 배우거나 사용하지 않아 사투리인가보다 생각했죠.
나중에 TV에서 에비란 말의 유래가 일본놈들이 코, 귀를 짤라가서 생긴 말이라는 소리를 듣고 깜짝 놀랐던 기억이 있네요.
수백년이 흘렀는데 그 때 얼마나 참혹했으면 아직 그 말이 남아있는지....
그러게요 저희 부모님이나 조부모님도 많이 쓰셨는데 간혹 밖에서 오래 놀다 오거나 밤늦게 다니면 코베어간다고 하셨는데 그게 625나 전쟁때 있었던 일인가 했었더랬죠 근데 이순신 드라마 보면서 알게 되었는데 에비가 거기서 유래되었는지는 처음 알았네요. 근데 에비가 무슨 뜻일가요?
'에'는 '에그머니나' '에(아)이구'할때와 같이 경고 놀람의 의미를 담은 접두사고 비는 한자로 코비자죠. 즉 요즘말로 하자면' 아~!(너의)코~!(를 조심해라)' 이런 경고를 함축적으로 담은 줄임말이죠.(급박한 상황에 빨리 경고하기위해 만든 축약어) 물론 생긴 이유는 위에서 말하다시피 임진왜란때 왜놈들 잔학행위때문이구요.화냥년(환향녀) 못지않게 슬픈 역사적 어원을 지닌 말입니다.
화냥년은 그냥 발음이 비슷해서 나온 민간 어원설이고 실제로는 그전부터 화냥년이라고 사용했던 기록이 있습니다. 화냥은 중국에서 온 말이라고 합니다. 화냥자체가 몸을 파는 낭자라는 뜻입니다. 화류계처럼요. 실질적으로 잡혀간 여자를 굳이 데리고와서 화냥년이라고 부를이유도 없구요. 화냥년은 잘못된 속설입니다.
조총의 생산과 비축을 결정하는 관리(무관)들이 조선활은 세계 제일이고, 지들은 활을 잘 쏘니, 매력을 못 느끼고 평가절하해버림..그런데 정작 전쟁 중엔 착출된 일반 백성들이 활을 쏘는데, 그들은 활을 자주 쏴
보니 않았기에 서툴렀고, 상대적으로 조총은 초보자도 쉽게 배워 맞출 수 있기에 우후죽순으로 밀리게 되고, 일본의 조총은 품질이 세계 최고였고 최대 생산지였지요. 먼나라인 유럽에서도 사갈 정도였슴.
이건 윗분말이 맞습니다
정규군인 관군이나 조선무관이면 당연히 조총보다 활이 사거리 정확도 연사력 유지비 탄약수 모든면에서 더 뛰어났던게 맞습니다
문제는 조총이란건 배우기가 너무 쉽고 근거리사격전이 되면 아무리 총한번 안쏴본 농사꾼이 대충 쏴도
사람을 죽일만한 화력이 보장됐죠
도검창활을 배운 정규군이 아닌한 조총만큼 빠르고 확실하게 사람을 죽일 무기가 당시엔 없었습니다
영국 프랑스의 백년전쟁에서도 비슷한 양상이 있었는데 바로 석궁의 도입이었죠
중세 유럽최강의 중기병으로 명성이 자자하던 프랑스 중기병이 일반농민이 쏜 석궁에 한방에 관통을 당했으니 전략이 성립되지않은거죠
그 당시 일본은 다른 서양 국가에 대량 수출할 정도로 최고의 화승총을 가진 나라로 세계 최고의 육군을 가진 나라..
그 당시 조선은 세계 최고의 대포를 가진 세계 최고의 해군력을 가진 나라였다고 tv에서 본 적 있네요.
세계 최고의 육군 vs 세계 최고의 해군이 붙은 전쟁이었답디다.
일뽕이 아니에요 ㅋㅋㅋ 좆본 존나 시러하는데 님은 머 알고 입터세요?
저기 영상에도 나왓듯이 명이나 조선이나 200년동안 전쟁이 없엇고 둘다 국경에 여진족들 막을 힘만 있었는데 일본은 수십년 수백년동안 분열되어있다가 도요토미가 통일하고 조총 들어오고 그 수십만의 전쟁경험 많은 군사들이 그때 가장 최신무기인 조총을 소유했는데 어떻게 보면 당연한건데요 ;; 그래서 동아시아 전체 침략할 야욕을 세우고 실현한 게 임진왜란이고 조선과 명이 연합해서 겨우 막은 건데요 ;;
좆본 편들기 싫어도 이런 사람 보면 존나 무식해서 실드치게 되네요 ;; 실제로 저기 위에서 글 썻듯 명나라 조선 연합군으로 겨우 일본막고 명이나 조선이나 타격이 심각해서 후금이
급성장해서 멸망했어요 좀 모르면 닫고 계세요 ㅎㅎ 체급같은 개솔하시네 ㅋㅋ 후금 10만 기병이면 100만이라도 뚤리는데요 ㅋㅋ괜히 둘이서 농담따먹기 하려고 북방 만주족 견제하던 게 아닌데 존나 무지하다 진짜;;
국력은 그 당시도 조선이 워낙 축적해놔서 일본보다 훨씬 위였습니다. 군사력은 선조가 멍청해서 대비 제대로 안한 게 컷기도 하고
ㅋㅋㅋㅋㅋㅋㅋㅋ 무슨 명나라가 청나라에 망합니까
명나라는 이자성의 농민 반군으로 자멸했어요. 그 잘난 청나라 누르하치는 산해관에 들이 박다가 전사했고 결국 명나라가 망하자 오삼계가 산해관을 열어줘서 간신히 들어올 수 있었죠.
그리고 임진왜란때 쓴거랑 보바이의 난, 양응룡의 반란 진압할때 쓴 돈 다 합쳐도 만력제가 아들 장가보낼때 쓴 돈만 못합니다.
그리고 일본? 조선 공격하고 얼마 안있어 공세 역량 바닥나서 지지부진하던 것들이 무슨 명나라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제대로 알고 계시네요. 임진왜란때 명군이 제일 황당해했던게 조선에 전쟁물품 다 있을줄 알고(왜냐면 다급한 조선조장에서 물자는 우리가 다 대겠다고 뻥카침) 은자를 들고 왔는데 식량이 없음..그래서 약탈하게 된거...물론 나중에 만력제가 쌀 백만섬을 배로 실어보내지만 그때는 이미 조선백성들이 왜구 이상으로 명군을 싫어하게 된 이후임..ㅋㅋ
반란도 잇지만 붙을 때마다 명이 졋는데 무슨 자멸이에요 님이 생각하는 거 이상으로 한족들은 이민족들 두려워합니다 명나라 이전에는 원이 있었고 금이 있었고 요가 있었고 5호 16국이나 남북국시대 등 짱개들은 전부 지네역사라고 우기지만 결국 한족은 이민족들이 뭉쳐서 크면 항상 지배되엇어요 괜히 조선이랑 명이 여진족들 모일 때마다 친 줄 아시나 임진왜란이후 명이 쇠약해지고 반란 일어나고 국력이 약해져서 누르하치 불러서 니가 통제해라고 한 건데 누르하치가 아예 통일해버리고 후금 세워서 명이랑 붙은거에여 이미 그때 명은 저물어가는 나라엿는데요
저도 들은 적 있습니다. 그때 당시 왜는 조총 최대 생산국이고 품질 또한 압도적이어서 유럽에서도 그 먼거리를 와서 사갈 정도였슴. 당시 왜넘들의 특산품이 뭐가 있겠습니까? 서양인들이 좋아 죽는 도자기 조차도 임진왜란 이후에 제대로 만들기 시작한 것들인데요. 그 정도로 품질이 좋았다 하더라구요. 지들끼리 오랜 내전으로 육지 전투는 수없이 오래 해왔으니 육지전은 도통했을 거고, 거기에 세계 최고 품질인 조총을 세계 최대 생산국답게 가장 많이 가진 나라였습니다. 세계 최고의 육군을 가진 나라라고 평하는 건 이리 보면 잘못된 것도 아닙니다. 명나라랑 붙어도 충분히 밀어버릴 정도였다고 그럽디다.
아니 조총 자체가 포르투갈 총의 그냥 카피품인데 뭔 성능이 더 좋나요 ㅋㅋ 16세기 부터 서양의 화기 발달은 동양이 따라가지를 못했습니다. 그리고 일본은 한반도 전선 조차 유지하기 힘든데 어떻게 명나라를 밀어요? 공세종말점이나 보급 그런거 1도 모르고 역사책만 좀 읽어본 사람들이 그런 말도 안되는 소리 하는거죠. 애초에 근대이전에 유목민족말고 이민족이 중국왕조 본토를 접수한 적이 없습니다. 유목민족이 너무 쎈거였음.. 당장 가토군이 함경도서 소수의 여진족이랑 붙은 기록이 있는데 대판 깨졌죠.
일본놈들이 자찬하는거죠
일본 조총은 아르퀴부스를 일본인의 체형에 맞게 작게 만든 겁니다
사거리와 관통력 ,위력이 아르퀴부스에 못미칩니다
정운 장군이 전사한 이유가 머스킷 때문인데
당시 배위에 쌀 포대를 쌓아 총알을 방비했습니다
근데 조총은 화약량이 작아서 그 쌀 포대를 못 뚫지만
포르투칼 머스킷은 그걸 뚫습니다
쌀포대를 뚫은 흉탄에 정운 장군이 전사하셨습니다
지금으로 보면 m60과 m16의 차이겠죠
여기 댓글다는 사람들 다 일본을 싫어하는 사람들인데 '일뽕자제'라는 심히 자존심상하는 말을해서 왜 쥐똥님을 욕보이십니까? 나 같아도 기분나빠지겠습니다. 말 좀 가려서 하세요.
그리고, 일본이 조선을 먹었다면 전열정비하고 조선사람 징발하여 명나라 쳐들어갔습니다. 그러니, 기타별명님의 의견이 틀렸습니다.
일본이 중일전쟁으로 몇이나 죽었게요?
20만명입니다
중국은 천오백만명이라나 뭐래나 군인과 게릴라 시민이 죽었습니다
일본이 왜 헐노트 받고 중국에서 발을 못뺏냐면
투자?한 인적 물적 손해 때문이지요
도죠 히데키가 전쟁은 심장이다라고 하면서
결국 진주만을 폭격하는데
일본이 폭주한 원인중 하나가 바로 이겁니다
일본은 6-700킬로(부산 평양간 거리) 정도의 보급선 유지에도 애를 먹었는데
대륙으로 들어가면 그야말로 전멸입니다
일본은 섬나라에서 지들끼리 치고 박는데 특화된 전력입니다
자발적인 의병에게 곤욕을 치뤘는데
대륙은 더 힘듭니다
추격하다가 어느새 포위당해서 전멸한 구 일본제국군의 말로를 아십니까?
임진왜란 이전인 1525년 전장의 대세는 기병인 아닌 보병이 대세가 되는것을 보여준 전투가 있었죠
이탈리아의 파비아 에서 일어난 전투 입니다.
당대 세계 최강으로 불리어 지던 프랑스 장다르메 기병들이 독일&스페인의 장창+화승총 에 무참하게 전멸 되는 일이 발생 합니다 이전 까지는 그런일이 없었죠.(물론 여기에는 프랑스왕의 전략적 실패도 한몫)
이때부터 총의 시대가 도래 하게 됩니다.
물론 전쟁사에서 대포가 흐름을 좌우하긴 했지만 전투에서 총이 대세가 되는 계기가 된 전투가 파비아 전투인데요.
물론 활이 사거리나 발사속도가 더 우월 하지요.
하지만 파비아 전투 에서 보았듯이 효율적으로 운용하는 화승총 부대의 괴력을 보면서 총이 대세가 되어 가는것은 어쩔수 없었을 거라 봅니다. 쇠갑으로 온몸을 두른 중기병은 힘을 잃어간다는 것을 알게 해준 이벤트
우리나라 사학계랑 역사교육은 진짜 반성해야 됩니다.
일제컴플레스, 식민사관 컴플렉스에 미쳐가지고 모든 역사를 "식민사관을 극복" 하는 관점에서 서술하고 있죠.
애초에 식민사관이라는게 반박할만한 가치도 없는 개소리인걸, 그걸 굳이 반박하겠다고 역사를 이상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임진왜란은 세계기준으로 보더라도 중세 역사에서 가장 거대하고 임팩트 있는 전쟁가운데 하나입니다.
임진왜란 하나로 박물관을 세워도 30층 빌딩을 세워도 될 정도고, 다큐를 만들어도 30부작을 만들수 있는 역사의 보고에요.
저런 중대한 역사적 사실을, 우리나라 고등교육에서는 단지 "조선이 왜놈의 침략을 받은 수치의 역사"정도로 폄하시키는가 하면, "명나라에게 지원을 받은 사실을 부인하기 위한" 매우매우 편향된 시각에서 가르치고 있죠.
고등학교에서 임진왜란을 가르치는 관점 자체가 틀려먹었어요.
"어떻게하면 일본에 침략 당한 수치스러운 부분을 축소할까" "어떻게 하면 명나라에게 도움받은 부분을 도려내고 가르칠까" 이런 컴플렉스에 똘똘 뭉쳐가지고 한심한 관점에서만 역사를 가르치니까 임진왜란의 진정한 가치를 알래야 알 수가 없는거죠.
임진왜란은 결론적으로 조선이 이긴 전쟁입니다. 평양까지 밀리고 왕이 도망치긴 했어도 결국 이긴 전쟁이고,
명나라의 도움을 받긴 했다지만, 명나라는 거의 전투를 안했습니다.
그리고 애초에 외교력도 국력에 포함되는 겁니다. 명나라한테 지원받은게 부끄러울게 뭐가 있습니까 명나라로부터 군사지원 끌어낸것도 결국 조선의 국력인건데.
부끄러울것 하나도 없는데 그게 뭐가 그렇게 부끄럽다고 흑역사 취급을 하고 축소하려 드는지 모르겠어요.
일제시대의 아픈기억 때문인건지 몰라도 사학계도 그렇고 TV사극도 그렇고 임진왜란을 제대로 다룬 적이 없죠. 우리가 흑역사 취급하고 홀대할 동안 오히려 서양에서 재조명하는 씁쓸한 현실이 참 안타까울 뿐입니다.
명나라 참전으로 얻은것도 있지만 잃은것도 많죠
왜군의 진격에 족쇄를 단건 맞지만 전쟁에 기간을 늘린것도 명나라고 왜넘들마냥 백성에 피를 빤것도 명나라죠 재수없었으면 그때 분단되었을 정도니까요 만약에 그때 4도를 왜에게 넘겼어도 그게 최선이었다라고 명나라 아니었으면 나라전체가 빼앗겼다고 역사를 가르칠지도 모르겠죠 개인적으로 명나라 없었어도 막을수 있지 않았을까라고 생각합니다. 대처가 늦은 감이 있지만 의병,육,수군 충분히 잘 싸웠다고 생각합니다. 정유재란도 시간끌어서 재침받게 만들고 방해한게 명나라라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명나라로 인해 류성룡의 업적이 더 가려진 느낌이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사실 명나라는 군사력으로 조선을 지원했다기 보다는, 외교적으로 지원했다고 봐야 합니다.
"명나라에서 병사가 수십만이 올테니까 덤비지 말고 후퇴해라"는 식으로 일본군에게 압력을 가하는 무력시위 정도였지, 실제로 전투는 그닥 하지 않았습니다. 실질적으로 일본과 싸운건 조선군이 8할 이상이었죠.
애초에 조선이 초반에 밀렸던 이유가 국력이 약해서가 아니라, 제승방략의 실패 때문이었습니다.
제승방략이라는게 전시상황이 되면 지방의 병사들이 한 지역으로 소집되고 중앙에서는 장군을 내려보내서 합류해서 거대한 집단군을 형성하는 작계인건데, 중세의 통신 교통의 한계로 인해 병사들과 장군이 만나지를 못했습니다. 지방에는 병사응 몇만명씩 있는데 지휘할 장수가 없고, 정작 중앙에서 파견된 신립, 이일 같은 장군은 병사를 못만나서 유생들 끌고 싸우는 불상사가 벌어진거죠.
조선이 지방 곳곳에서 의병을 일으켰다고 하는데, 사실 그 의병들은 민병대가 아니라 관군이었죠. 중앙의 장군을 못만난 우두머리 없는 정규군을 지역의 이름난 선비들이 이끌어서 군사집단화 한것이 조선의병의 정체였던 겁니다.
일본군이 파죽지세로 북진하다가 이순신한테 수군이 몰살당하는 바람에, 평양에서 돈좌되고 마는데, 조선에게 시간적 여유가 생기면서 제승방략의 실패를 극복하고 점차 흩어졌던 정규군을 모으기 시작합니다.
전라도가 지역방어에 성공하고, 연락이 끊겼던 경상도 통신이 가능해지면서 조선군이 반격에 나서는데, 이 시점에서 일본이 이길 가능성은 없었죠.
당시 일본군은 유럽에 갖다놔도 밀릴게 없다고 평가될정도로 강력했지만, 결국 바다건너온 원정대에 불과했고, 조선도 알려진것처럼 나약한 군대가 결코 아니었기 때문에, 일본군이 평양에서 멈춘 시점 이후로는 시나리오를 어떻게 짜더라도 조선이 지기 힘든 전쟁이었다고 봐야 합니다.
왜가 조선에게 했던 만행들을 잊지 말아야 하는건 분명합니다. 아주 악랄한놈들입니다. 수많은 조선의 백성을 학살하고 코와 귀를 잘라 본국에 돌아가 조선인 코무덤까지 만드는 미친 족속들이고 지금의 후손이 그 일본놈들이죠. 그리고 그 악랄함의 끝은 일제강점기에 더욱더 자세히 드러나구요. 절대 믿을 수 없는 인간들입니다.
그렇죠. 오래전 일이긴 합니다만, 그런 만행을 잊어서는 안되겠죠.
하지만, 저는 임진왜란을 아픔과 만행 상처로만 기억하는걸 반대합니다. 임진왜란은 조선이 초반에 실패했지만, 결국 극복한 전쟁이고 배울점도 많고 시사하는바도 정말 많은 냉엄한 역사적 현실이죠.
우리가 그렇게 흑역사 취급하고 홀대할 동안, 그동안 서양에는 임진왜란은 철저히 일본의 시각에서 다루어졌습니다.
저 영상은 그동안 오로지 일본과 중국의 시각에서 다뤄지던 임진왜란을, 거의 최초로 조선군 시각에서 임진왜란이 서양에 소개된 거의 최초의 영상입니다. 저게 히스토리채널이나 디스커버리에서 만들어진게 아니라 그냥 일반인이 만들었다는 사실에 우리는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우리 사학계가 상대할 가치도 없는 식민사관이나 임나일본부설같은 개소리에 목메고 환빠나 양성할 동안 세계사에서 조선의 역사는 철저히 외면받고 일본이나 중국 시각에서만 서술되서 보다못한 대학생이 저런 영상을 만들 정도니 말 다한거죠.
아픈역사일수록 외면하지 말고 더 냉철하게 바라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흑역사 취급하고 홀대할 동안 일본에서는 몇백년동안 임진왜란을 연구하고 자기들 식으로 승화시켜서 서양에 소개했죠.
징비록이 book of correction으로 일본에서 번역되어 외국에서는 일본사 카테고리에 꽂혀있는데, 그게 오늘날 조선사의 한심한 현실입니다.
사학계도 제발좀 각성하고 우물안 개구리에서 벗어나서 글로벌 마인드셋을 갖추었으면 좋겠네요.
역대 드라마 영화 이순신 역할에 가장 어울리는건 김무생이 아닐까 생각함... 김명민은 50대의 이순신을 연기하기엔 조금은 무게감이 떨어지지 않았나 생각함... 물론 연기력은 아주 아주 좋았지만 30대 초반 김명민보단 지금의 김명민이 했다면 정말 딱 맞아 떨어졌을 것 같다.
정확히는 진린의 손자가 귀화했죠. 전쟁 후 진린은 명에 돌아갔고 그 후로도 몇 차례 변방토벌에 더 종사합니다. 진린의 아들과 손자도 관직을 지냈는데, 명이 망한 후 진린의 손자가 일족을 이끌고 조선에 귀화해서 그 직계후손이 한국인으로 살고 있습니다. 1990년에 중국과 수교한 후에는 광둥성에 남아 있는 후손을 찾아가 제례도 올리고 했다더군요.
밤 12시에 우연히 보기시작하여 지금 아침 7시19분이다.. 이거 보면서 흘린 눈물딱는다고 휴지 2마디는 젖었다. 임진왜란동안 조선땅에서 코가 베이고 , 유린당하고, 처참히 짓밟힌 선조들이 너무 불쌍하고 안타깝고 화가나고 분통터져서..흘린눈물이 휴지 1마디를 적시고, 이순신장군의 위업에 감동받아 흘린 눈물과 이를 이제서야 알아주는 그 미쿡사람이 고마워서 흘린눈물로 1마디 휴지를 적셨다.
마지막 에피소드는 3시간동안은 내가 직접 네이버켜놓고 영어단어 하나하나 찾아가며 해석하면서 마무리했다. 그랫더니 위에 해설이 있었다. 그런데.. 정말 몰랐던 것이 많이 있다.
언제가 꼭 일본정벌할 날이 와야 한다.. 지금 심정이라면 내가 일왕잡는다. 내목숨걸고서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