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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D] 해외네티즌 "화려한 한국의 전통적인 건축 양식" 해외반응
등록일 : 18-03-03 16:51 (조회 : 40,472) 글자확대/축소 확대 축소 | 프린트

해외 포럼에 한국의 전통적인 건축물이라는 제목으로 사진이 게재 되어 
해외네티즌들이 의견을 내고 있습니다. 아래는 해당 댓글입니다.


001.jpg




<댓글>


kitsune_no_chi
그리고 그 건물에 있는 전통적인 코리안 감시 카메라




ㄴProtoMonkey
아주 전통적인 카메라군




ㄴAKADriver
저긴 이제 CCTV가 한국인보다 많아.




ㄴstae1234
음, 노숙자 한명이 국보 하나를 불 태웠어.....




Scordare
이건 마치 알록달록한 스타 디스트로이어 전함이닷




ㄴScottDubery
너무 과했다.




lifestrong04
난 이게 마인크래프트에서 만든 건축물인줄 알았어.




ㄴfarfelchecksout
난 레고로 만든거길 바랬음




thetupilak
X나 어지럽네. 
이건 모든 문화권들의 문양이랑 같네, 페르시안 양탄자 같은거




snorlz
이게 일본이랑 중국의 건축 양식과 어떻게 다른지 쉽게 설명해줘.




ㄴlactosehater
전통적인 일본 건축 양식은 대개 
중국 예술의 황금기라 여겨지는 당나라 양식을 많이 빌렸어.




ㄴjugularjuice
비슷비슷해, 
그들 모두 애매모호하게 비슷한 지붕에 비슷한 지붕 끝자락까지.
왜 그런지 알고 싶어...




ㄴsnorlz
난 한국과 일본의 건축은 중국의 건축을 기반으로 한다고 생각해.
그들이 얼마나 다른지 잘 모르겠어.




ㄴMJWood
지붕 윗부분이랑 박공이 곡선인 부분이 다르고 색상도 달라. 
일본 지붕은 직선이고.




ㄴTejasEngineer
전문가는 아니지만 일본은 목재를 주로 쓰는 경향이 있는 반면 중국은 목재 일 수도 있지만
벽돌이나 석재인 경우가 많아. 또 중국 건물은 빨간색, 노란색, 검은색을 주로 쓰고.




MakkaCha
네팔인으로서 다른 나라의 탑 모양을 보는게 좋아.
https://en.wikipedia.org/wiki/Pagoda#History




csimonson
저기가 그 미술관 같은게 있는 공원이었나? 거기 이름을 까먹었는데
맞다면 나도 갔었어. 꽤 멋진곳이었음




ㄴlehighdave
아마 그 이름이 경복궁일거야. 맞아 엄청난곳이지.
그 길 건너편에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만두집이 있어. 35% 정도는 확신이 없지만




ㄴcsimonson
크으으으으 그 만두 진짜 쥑이지!!! 그리고 아마 경복궁은 아닐거야.




ㄴyompk
이건 불교 사원의 지붕이야. 이 절이 니가 생각하는 서울의 절 일수도 있지만,
전국적으로 분표해있고 다 비슷하지만 그들만의 독특한 특징들이 있어.




ㄴYserbius
난 대부분의 건물이 현대에 복구된 것들이라고 알았을때 조금 실망했어. 그럼에도 아름답지.
숭례문은 서울의 번화가 한가운데에 서 있고




musicmogulnow
끝내주는 사진이다!




Dramatical45
이 디자인이 실용적인 목적이 있는지, 아니면 대부분 그냥 장식용인지 궁금해.
이 진지한 질문에 답해줄 지식인이 있니? :)




ㄴCharlieJuliet
음..실제로 나무 기둥이 실용적이야 지붕을 완벽히 받혀줄 수 있거든.
그리고 도색은..나무 구조물을 약간 보호해줄 수 있어 물론 대부분은 데코용이지만




PoopMagruder
눈 요기로 즐겁다. 근데 생각해봐 저렇게 칠하기 위해 얼마나 오래 걸릴지
하, 난 내 단순한 나무 집을 칠하는것도 귀찮은데.




Altazaar
언뜻보고 이게 마인크래프트에서 만들어진줄 알았어.




jalen1992
나도 우리집 페인트질은 내가 하는데. 이건...페인트질한...노동자에게...조의를....




retag10
한국은 건축 예술 분야에서 독창적인 존재인가




FromRussiaWithBalls
어찌되었간에 저 건축가는 끝나고 담배 한 대 태웠을거야.




Gonstackk
저 건축물의 모양과 지진에도 견딜 수 있는 힘에 대한 간단한 영상이야 (3분 짜리)
https://www.youtube.com/watch?v=w78Yb_aotH0
이게 중국 자금성의 비밀의 일부지.




ㄴDudedude88
너 한국 건축물이 중국과 다르다는건 아니?




ㄴS-Nada
나니?!




VanDoodah
한국 전통 건축이 중국과 어떤면에서 다름?




ㄴPark1ng
잠재적으로 니 질문에 대답 할 수 있는 링크를 찾았어:
https://www.reddit.com/r/korea/comments/4jrrac/what_makes_korean_architecture_different/




ㄴPlatypuskeeper
지붕 처마 밑에 그려진 꽃들도 특히 한국적인 요소야.
온돌 가열 시스템은 꽤 중요한 요소고.




ㄴMJWood
저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그들은 자신들만의 전통적인 디자인을 가지고 있어.




AtomStomper
네덜란드의 힌데로펜 아트랑 비슷하다.




Kratovil_lavelle
아니 아들아. 저건 카일로 렌의 기함이란다.




littlebunnyfoofoo11
난 이 사진을 퍼즐로 만들면 어떨까 상상했어...




SSLOdd1
기분이 별로 안 좋아, 
난 진지하게 저게 스타크래프트 스크린샷인줄 알았단말이야...




Mclevius-Donaldson
마인크래프트라 생각해버렸어




joekangazha
한국인을 사랑하는 벨이 -캘리포니아 산 페드로에서-




HipsterMonk
이건 전통적인 한국의 건축이 아니야. 특별한 한국 불교 사원의 건축이지.
한국의 다른 건축물들은 전통적으로 이렇게 보이지 않았어.




deathlybeeping
이제 전세계의 현대 대도시들의 우울한 회색 콘크리트랑 비교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전통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해줘! 모더니즘이 너의 영혼을 갉아먹게 하지마렴




iamlurkerpro
이건 컬러 연필을 조각해서 만든 프라모델 같아. 그럼에도 너무 멋있다


해외 네티즌 반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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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다가 18-03-03 16:54
 
잘 봤습니다.
B형근육맨 18-03-03 16:55
 
번역 잘보고 갑니다
박달배달 18-03-03 17:02
 
얼마나 멋진데...별로 알아주지 않네요
더 예쁜 사진을 보면 반응이 다르려나?
케리건 18-03-03 17:06
 
중화병 짱개들이 우리나라오면 조선족의 여행가이드가 중화병에 흠뻑취하게 중국의 영향을 받아따고 개구라침 ㅋ
빨간사과 18-03-03 17:06
 
마인크래프트로 만든 거 보면 더 놀랄 사람들일세..
인생사 18-03-03 17:10
 
고려가 화려함의 극치였는데.
조선은 검소함을 추구해서 단일 해지면서 여백을 많이 주는쪽으로..........
     
강낭콩콩콩 18-03-04 05:46
 
아니에요.... 반대입니다
고려 건축양식이.오히려 단순한 반면 조선시대 오면서 화려해집니다
          
가스칼 18-03-04 14:09
 
기와 기술도 퇴화해 장식기와는 만들지도 않고 기와 마감도 와당이 아니라 아구토로 마감하는데다 단청 자체를 사치로 생각하고 단일 건축물 규모도 줄어들고 지붕이 화려해봤자 청기와 수준인 조선이랑 난간까지 구리꽃 장식을 하고 3층 대전 5층 종탑 실상사 탑등 초대형 건물들을 쏟아내고 민간도 열집에 하나는 2층 이상이었으며 흥왕사같은 절은 3천칸에 달하고 귀족집(이자겸)도 수백칸에 달한 고려가 화려함에서 비교가 되나요? 조선은 고려의 사치와 낭비를 개혁하고 검약하자고 태어난 국가입니다. 조선대에 고려보다 화려해진다는게 어이가 없네요. 당장 그림만 놓고봐도 조선으로 오면 얼마나 그 묘사 기법이 초라해지는데
qufaud 18-03-03 17:20
 
절이면 단청을 안한 나무 그대로 마감한 건축물도 아름답더군요
우리나라에 몇군데 안되고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단청을 아예 안한 절들도 있죠
일반 가옥에서는 단청을 안하니까 특별하지는 않지만요
인히스플 18-03-03 17:27
 
말대로 일반적인 건축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특별한 불교건축물사진이네요.
우리나라의 자랑이지요.
맥구 18-03-03 17:31
 
중국은 명청대부터는 벽돌 조적을 많이 해서 2층 3층 이상의 큰 규모의 건물을 많이 지었고 일본은 키가 크고 곧은 삼나무 수종이 풍부해서 목재로도 큰건물을 쉽게 지을 수 있는 반면 한국은 삼국시대 이후로는 온돌 문화덕에 점점 목재 부족에 큰나무도 없어서 계속 건물은 작아지고 조선대 이후에는 2층 이상의 건물이 거의 보이지 않게 됐죠.. 건축은 규모가 주는 아름다움이 무시할 수 없는데 임팩트 있는 건물이 거의 남지 않아 아쉽네요.
계속 자연과의 조화, 검소함, 소박한 아름다움만 강조하고..
     
이불몽땅 18-03-03 18:14
 
헐.. 무슨말을 하시는지..

온돌이 오히려 난방 연료를 절감 시켰는데요??

다른나란  나무 안썻을꺼 같나요??

우린 오히려 온돌쓰면서 난방과 요리를 같이 해서 엄청난 절감 효과를 가져왔는데요


그리고 높은 건물을 많이 안지은 이유도 난방에 온돌을 썻던 이유가 큽니다

서양이나 중국처럼 큰건물 지어놓고 추워서 디질려고 했던것보다 훨 나은데요?
          
맥구 18-03-03 18:40
 
무슨말씀? 온돌이 조선의 산을 황폐화 하는 주범이라는건 조선대의 인식이기도 하고실제로 지금도 온돌은 엄청난 먹성을 자랑합니다. 왜 우리네 전통설화에 나뭇꾼이라는 직업이 그렇게도 많이 나오는지 모르시는군요. 청나라 건물은 온돌을 사용하고도 2층 3층 5층까지 지었습니다. 어치피 2층 이상부터는 주거용이 아니라 다락으로서 창고용도거나 상업적 용도였습니다. 전문지식이 없으면 느낌만으로 사실인 양 말씀 마세요. 온돌 쓰던 삼국시대 고려 초에는 왜 그리 높은 건물을 많이 지었을까요?
               
드뎌가입 18-03-03 19:10
 
따뜻한 영국애들도 난방 때문에 배 건조할 나무가 없다고 난리쳤습니다.
게다가 열효율이 좋은 게 온돌난방인데 온돌 때문에 그렇다구요?
나뭇꾼이 많은 건 온돌 때문에 아니라 추위때문이겠죠.
               
북창 18-03-03 19:10
 
온돌이 조선의 산을 황폐화 하는 주범이라는건 조선대의 인식??????
팩트나 제시하고 떠드시길...
상식적으로 군불 한 번으로 밤새도록 난방이 되는 온돌이 무슨 산을 황폐화 시킴? 거기에 난방과 취사가 동시에 되는 혁신적인 기술이구만...
그리고...조선시대때도 수목법이 있어서...큰 나무는 아예 베지도 못했음. 백성들은 작은 잔챙이 나무들이나 베면서도 온돌이라는 획기적인 난방 시스템 때문에 다른나라에 비해서 유독 추운 우리나라 겨울도 다들 무사히 날 수 있었던 것임.
               
이불몽땅 18-03-03 19:16
 
이분 진짜 머지..

중국 캉 보고 온돌 주장을 하시네 ... 침상만 데우는게 우리 온돌이랑 같다고 주장하시네

훠캉은 그냥 침상만 데우는겁니다 바닥 전체가 아니고

그리고 우리 온돌은 최소 3천년이 넘어요 짱깨들  꺼랑 비교 자체가 안됩니다

님이야 말로 지식은 하나도 없는거 같네요

얼마전 캉이 우리 온돌 원형이라고 주장 하시던 분이신가 ..기껏 몇백년 된 캉으로

몇천년전 부터 있던 온돌의 초기형이 이랬을꺼다 망상 하면서  원조 주장하시던..
                    
맥구 18-03-03 19:57
 
캉(갱)은 온돌을 최초로 기록한 글자이며 온돌의 원형이 맞습니다. 장갱이라고 쓰는데 고구려의 쪽구들입니다. 긴 구멍이란 뜻이고 당서 이전 사서에서도 고구려나 읍루 숙신의 난방방식으로 기록하고 있고 삼국시대 주거지에도 고르게 나타납니다. 수백년은 대체 무슨 근거로 말씀하시는지? 북쪽지방에 가장 적합한 온돌 방식이고 가장 이른시기에 발견되는 온돌의 원류도 맞습니다. 논문은 고사하고 전문서 한번도 안보고 인터넷 댓글로 배운 역사지식으로 전공자한테 배웠다 못배웠다 하지 마시길.
                    
맥구 18-03-03 20:03
 
그리고 침상만 데운다구요?심양고궁 가보셨나요? 그 침상이라는것이 웬만한 조선시대 양반집 방만합니다. 쪽구들방이든 전체 구들방이든 구조나 원리는 같고 2층 이상부터 적용 못하는건 똑같습니다. 캉은 2층에도 적용 가능할것 같나요?
                         
검은북극곰 18-03-03 20:10
 
편협한 지식에 묻혀버리면 이렇게 무식한데다가 신념까지 가진 추한 모습이 나타납니다.
                         
맥구 18-03-03 20:24
 
담담한 진실을 열등감과 패배감에 의해 형성된 국수주의로 제대로 마주할 수 없는것만큼 추한것도 없죠. 입맛대로 골라담는 역사의식이라니.. 중국인같은..
                         
뚜리뚜바 18-03-03 23:07
 
심양고궁이 언제껀데 등신아 온돌 원형이라면서 온돌 이전에도 있었다는걸 증명해야지 청나라 고궁 들고 양반집 만하다고 ㅈㄹ이여

온돌의 원형이 맞습니다 <<< 먼 대가리로 이딴 소릴 하는지 모르겠네
                         
굿잡스 18-03-04 00:31
 
"온돌의 기원 ' 열국시대의 북옥저說' 타당성

http://damool.net/scp/board_v.asp?intno=4371&page=41&ikno=3

B.C 27년에 고구려는 북옥저(北沃沮)를 정벌하였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북옥저

한국 고대의 부족국가.

《삼국지》에 의하면 읍루의 남쪽, 남옥저의 북쪽 800리 되는 곳에 있었다고 하는 바, 그 위치는 대략 지금의 함경북도 북부와 간도(間島)지역으로 추측된다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XXE0024696


명말청초의 만주족에 의한 짱국 서토인 대규모 학살
 
 [양주십일기],[가정을유기사],[강변기략]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95273&sca=&sfl=wr_subject%7C%7Cwr_content&stx=%EC%B2%AD%EC%A0%9C%EA%B5%AD&sop=and



19세기 말, 만주족 팔기군 병사가 한족 성주(시장)을 구타한 사건이 있었지만, 팔기군 병사는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을 정도로 청나라 내내 만주족들은 정복자이자 지배자라는 신분적 특권을 누리고 살았다.
 
  서구 열강과 일본의 공세에 몰려 위험한 상황에서도 청나라의 지배층들은 "나라를 외국에게 넘겨줄 지언정, 집안의 종(한족)에게는 절대로 줄 수 없다."라고 단언했을만치, 청나라는 엄연한 정복 왕조였다.
 
  1850년대, 한족들로 구성된 태평천국의 반란이 일어났을 때 남경을 지키던 만주 팔기군 병사들이 태평천국군에게 모조리 살육당하자, 분노한 청나라 조정은 태평천국에 가담한 반란군 병사들이 항복해와도 절대로 항복을 받아주지 말고 전부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고 그 바람에 태평천국의 난은 16년이나 오랫동안 계속되고 말았을 정도로 만주족과 한족 사이의 민족적 갈등은 심각했다.
 
- 청사 저자 임계순 -

당시 일개 만주족 병사가 미국으로 치면 주지사(웬만한 나라의 대통령)급에 해당하는 성주

를 구타할 정도로 만주족은 소수였음에도 피지배 서토인을 강점 지배하는 정복자의 지위

를 누리고 있었고 이들은 서토인과 구분되는 그들만의 독자적 만성이라는 주거공간에서

생활하며 서토인에게 세금을 뜯어서 생활.

(후기로 가면 만주 팔기군중에서 초기 청에 복속되어 정복에 동원되었던 일부의 서토인 조

차 세금만 쳐먹는다 팔기군에서 빼버림)
                         
굿잡스 18-03-04 02:17
 
17세기 이전까지

지금의 한반도 북부를 만주니 만주족이니 하는 족명 따위는 없었군요.

수천년 대대로 한반도를 아우르는 북부는 요동이나 삼한(三韓), 고려, 해동, 동방등으로 불리

며 우리 고조선 고구려 이후 남북국시대

그리고 발해 부흥국과 고려로 금으로 이어졌고. 이런 가운데 말갈이니 하는 족명은

여러 부족들이 존재했지만 이들은 부여 고구려 발해 시대 우리의 백성이나 신속된 부용세력으로

고수 고당 전쟁시기에는 함께 싸웠고 때론 건국의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기도 하군요.

이후 1644년 청이 명의 산해관에 입관하기전  1636년 홍타이지가 후금을 청(淸)으로  개칭하면서

이런 여진족을 주축으로 하는 요동민과 내몽골 세력을 합하여 만주족이라는 아이덴티티를

정립하면서 이후 이 일대를 만주라 불리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만주족의 실질적 힘이자 구성원인 팔기 구성의 요동민 중에서 눈여겨 볼

부분은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세조 14년(1468년) 기록에 “동녕위(현재의 요양시 태자하)의 고려인은 명나라 홍무제(1368-1398)때는 3만명, 영락제(1403-1424)때는 4만명이었다. 요동인구중 고려인이 30%를 차지하며, 서쪽은 요양, 동쪽은 개주, 남쪽은 해주에 집중되었다”
 
이미 전 고려시대 이 요동일대를 고려왕은 심양왕을 겸하고 있었고

이후 다른 고려 왕계가 이어받아

분리되었다고 하지만 여전히 고려민들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고려말 공민왕의 요동정벌

역시 고려사에서 새로운 지역을 개척하는게 아니라 고려 백성을 안녕케 하기 위한 중앙

정부의 출정으로 보았으며 이후에도 이 요동 일대는 명시기에도 조선인들의 이민자가 상당히

많았고 이들은 용맹해서 정예병으로 또한 우리 고구려의 풍속을 잊지 않고 있다는 기록들이

보이군요. 그외에도 병자호란 당시 끌려간 상당한 조선인 백성들 하며

이를 통해 만주의 실질적 중축 힘이되는 팔기 구성원에는 42개의 고려성씨가 확인되는 상황.


그리고 만주족은 산해관 입관 후 만주족의 변발과 복식을 따르지 않을시 즉결 처형,

본보기로 수백만의 서토인을 도륙하면서 피로 점철된 정복왕조로 군림했고 이후 말기까지

고도의 기만 내치술과 엄격한 이원적 정치 지배 아래 정복자로 군림.

女真酋長乃新羅人 (송막기문- 남송기록)
("여진의 지도자는 신라인이다")
"其初酋長本新羅人" (몽골  금지(金志))
(여진의  초기지도자는 신라인이다.)
"金之始祖諱函普,初從高麗來,年已六十餘矣" (금사 (金史))
(금의 시조  함보는 처음에 고려에서왔을 때  60세였다.)


  "만주족은 신라로부터 나와..."
  因滿族自新羅、
  "신라성씨 김이 금나라의 원류이다."
  新羅王金姓則金之遠派
  "금의 시조 함보는 처음에 고려로부터 왔다."
  金之始祖諱哈富(舊作函普)初從髙麗來

-청황제 칙령의 만주원류고 중
                         
가스칼 18-03-04 04:00
 
뚜리뚜바// 심양고궁이 왜 나왔는지 맥락을 이해 못하는 난독증이 좀 있으신듯 ㅋㅋ 머리에 쌍소리만 가득차서. 온돌을 사용하고도 중층건물을 지을 수 있다는 얘기잖아요.
                    
맥구 18-03-03 20:10
 
한반도 중남부의 온돌방식이 쪽구들에서 방구들로 변형된 이유는 남부지방의 여름 습기로 인한 마루식 고상식 건축구조와 바닥층위를 높여 맞추기 위한겁니다. 쪽구들(장갱,캉)이 열등하다거나 구들과 다른거라고 보면 삼국시대 한반도 중부 윗지방의 역사를 모두 부정하는거죠.
                    
맥구 18-03-03 20:19
 
땔감이 귀한 탓에 산은 도끼행렬이 날로 침범하니 재목이나 관재가 마음에 드는 것이 없다. - 조선말 실학자 서유구 <임원경제지>

나라에서 규제한들 도처에서 성목으로 자라기 전에 모두 베어버리니 황폐하기가 이를데 없다
                         
맥구 18-03-03 20:32
 
국가가 태평하여 30~50년을 지나는 사이에 사치와 검약이 완전히 갈라졌다. 내가 매양 어렸을 때에 보면, 사람의 집에서 말똥을 동그랗게 쌓아서 온돌방에 불을 때어 미지근하게 만들었다. 어른들의 말을 들어보면 “이 먼저는 사람들이 흔히 마루에서 잠을 자고 오직 늙고 병든 자만 실내(온돌)에 거처했다.” 하였는데, 지금은 사방의 산이 씻은 듯이 벗겨져서 서울 안의 장작이 계수나무처럼 귀한데 비록 천한 종들까지라도 따뜻한 방에서 잠을 자지 않는 자가 없으며, 또한 말똥을 땔감으로 하는 것도 보지를 못했으니, 산에 나무가 어찌 고갈되지 않을 수 있으랴! - 이익, <성호사설>
                         
새코미 18-03-04 02:12
 
지금 일본이 사랑받는 일본인을 외치고
우리나라사람이 헬조선이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어느모로 보나 일본이 훨씬 미래가 없는데두요.
특히나 학자들이 써 놓은 글은 걸러 보고 여러사람것을 보아야 합니다.

지금우리가 미투운동한다고 몇백년후에
한국남자들을 싸잡아 욕하는 것과 같습니다.
학자가 고갈될것이라고 걱정을 써놓은거죠.
                    
가스칼 18-03-03 21:21
 
박지원 열하일기에 봐도 조선의 온돌이 청나라꺼보다 열효율이 나빠 땔감을 많이 먹고 만듦새가 엉성하다며 조선의 온돌 방식을 개선해야한다는 지적이 있죠
               
노비킴 18-03-03 19:33
 
못 배운 사람이 자기 주장을 가지면 이렇게 무섭습니다.
                    
가스칼 18-03-03 21:37
 
배운지 못배운지도 구분할 수 없을정도로 못배운분들이 목소리 내는게 제일 무섭죠
                         
뚜리뚜바 18-03-03 23:08
 
ㅇㅇ 님 같이요
               
솔오리 18-03-03 20:30
 
맥구님...온돌에 대한 다큐 많이 있습니다. 시간 나실때 보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 당시 온돌시스템이 엄청난 에너지 절감을 하였구요.
님 주장대로라면 그 시절엔 전세계가 난방을위한 재료로써 목재or동물의 변(마른 똥)을 사용하였습니다.
고로 님의 주장은 전혀 맞지 않는 것입니다.
단편적인 지식으로 고집부리는건 좋게 보이질 않네요.
                    
맥구 18-03-03 20:36
 
온돌의 우수성에 초점을 맞추고 움직이는 피디들의 편집은 믿을게 못될뿐더러 위에 제시한 여러가지 기록을 봐도 조선대 일반적 인식이지 제 사견이 아닙니다. 겨우내 때우는 온돌이 먹는 목재의 양은 필요할때만 불때는 화로에 비해 엄청나며, 어릴때 온돌집에 살아보신지 모르겠지만 거의 사람이 견디기 힘든수준까지 온도를 올리고 두꺼운 이불을 덮어 열을 오히려 경감시킵니다. 한번 달구면 한없이 땔감을 넣어야 하는 구조입니다
                         
솔오리 18-03-03 20:52
 
온돌 집에서 살아봤습니다
게다가 온돌 시스템의 가장 놀라운점은 뜨거운 공기가 한번 돌고 밖으로 빠지는 것에 그치는게 아니라
다시 열기가 거꾸로 반복적으로 오랫동안 돌기 때문에
열기가 밖으로 잘 빠져나가지 않는 시스템입니다.
그래서 온돌이 대단하다는 겁니다.
그러면 일반적인 온돌에 대한 정보와 지식을 전파한 학자들은 다 사기꾼 입니까?
                         
솔오리 18-03-03 20:56
 
정말 온돌집에서 살아보셨나요?
전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어릴적 산골에서 자랐기 때문에
아침에 한번 저녁에 잘 때 한번 목재를 넣으면 새벽나절까지 방에 온기가 돌았습니다.
얼마전 다녀온 할머님집에 가도 역시 마찬가지구요
                         
맥구 18-03-03 20:56
 
누가 온돌이 열등하다고 했나요? 건축용 관목으로 쓰일 목재마저 깡그리 잘려나갈정도로 산을 황폐화시킨 주범이라고 했는데 논점에서 벗어난 이야기를 하시는군요. 역사스페셜이든 뭐든 피디의 입맛대로 전문가의 말을 취합니다. 장점을 말하고 단점을 말할때에는 잘라내는거죠. 경험자로서 말씀드리는거고 전문가들이 거짓말을 하진 않죠.
                         
맥구 18-03-03 20:58
 
조선인들이 그당시를 기록한 명백한, 그것도 성호 이익수준의 인물이 쓴 기록까지 무시하며 온돌의 우수성에만 매몰되어 현실 부정에 열을 올리는 이유를 모르겠군요.
                         
리기붕 18-03-03 22:34
 
이모집 지금 나무 떼는 방 있는데 팔팔 끓어도 못견딜 정돈 아니고 저녁먹기전에 떼면 담날 까지 계속 열오르는데요.... 안 살아보신 듯
                    
가스칼 18-03-03 21:22
 
연암 박지원도 열하일기에서 조선의 온돌이 청나라에비해 열효율이 엉망이라며 낭비가 심하다고 까는 구절이 있습니다
                         
새코미 18-03-04 01:38
 
다른 사람들이 쓴 글을 더 읽어보세요.
그런데 댁 글을 읽으니 너무 무식한대다 한쪽으로만 치우쳐서
그렇게 무식하게 계속 살라는
글밖에 쓰고 싶지 않군.
     
순대천하 18-03-03 18:42
 
온돌 문화는 그닥 목재 부족과는 상관없어요. 차라리 추위와 상관이 있죠.

온돌이 아니면 어떤 방법으로 추위를 버틸까요.

오히려 온돌이 아닌 난로 같은걸로 난방을 했다면
열효율 측면에서 나무 소모가 더 많아지고 더 모자랍니다.
          
순대천하 18-03-03 19:41
 
그리고 또 좀 어이없는게 고려시대나 삼국시대는 건축양식이 조선시대와 다르고 더 화려했다고 말하는 분들이 계신데 그런 결론을 끌어낼 만한 아무런 근거가 없어요.

한반도 건축양식이 중국처럼 민족이 바뀌는 것도 아니고 경제성장이라는 것도 없던 시절이라 막 시대에 따라 크게 바뀌지 않는다는게 합리적이죠.

고려 건축 양식이라고 추측되는 그림으로 남아있는게 있지만 별 차이 없음. 오히려 단청 부분에서 약함.
금장식은 더 있을 수도 있겠네요.

황룡사 9층 목탑보고 또 신라시대는 특별히 다를거라 예측하는 경우들이 있는데
당시 그 목탑 하나가 수십년 걸린 국가 프로젝트 였어요..

짓고 나서도 무너질까 전전긍긍..

요즘 몇몇 삼국시대 복원들 보고 왜 다 조선시대 양식이냐 하지만 조선시대 양식으로 하는게 가장 원형에 가깝고 적합함.

한반도 건축 양식은 무슨 특별히 조선시대 유교의 검소 그런게 아니라 기후와 석재 목재 양과 질에 의해 결정되는 겁니다.
다른 국가들도 마찬가지.
그리고 매일 봐서 그렇지 충분히 화려하고요.
               
가스칼 18-03-03 21:50
 
건물터 초석배열 규모나 각종 대형 치미 청자기와들 전돌(바닥타일)들 금동토수같은 장식들 금입택 기록들이나 송나라 서긍이 고려 건물을 보고 말한 금동꽃 기록이나 규모에 대한 기록들은 다 어디갔나요? 근거가 없는데 주장만 있는 현상이 있나요
                    
새코미 18-03-04 01:47
 
장식에 금을 입히고 청기와 사용이 규모를 이야기 하는 것은 아닙니다.
큰 치미도 형태가 바뀌었고 취향이 바뀐것이지 건물의 크기와 상관없구요.
글을 보니 일본 되게 좋아하는데 치미는 엄청큰데 치미 올린 건물이 크던가요?
치미만 큽니다. 좋아하시는 금칠도 하구요.
                         
가스칼 18-03-04 03:51
 
규모 뿐 아니라 건축양식의 변화를 말하는 글에 대한 답글인데요. 그리고 치미 크기는 초석배열과 함께 건축물 크기를 알려주는 중요한 척도입니다. 황룡사와 안학궁 정전의 치미가 2미터가 넘는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전혀 모르시는군요. 치미는 조선대에는 별로 쓰이지도 않습니다. 일본을 좋아한다는것은 무슨 말씀이신지?
     
가스칼 18-03-03 21:31
 
온돌때문에 조선말기 산이 다 민둥산이 된건 사실이지만 조선 건축이 작은건 애초에 목재 크기 자체가 작기 때문이고 중국이나 일본 대비 경제의 곤궁함으로 다층 건물 수요 자체가 민간에 없어서 일겁니다. 일본은 삼나무라는 일본 고유수종이 지름만 2미터에 50미터 높이까지 자라고 수천만그루가 넘습니다. 그리고 고려시대 후기에는 고려는 원나라의 수탈과 왜구의 수탈로 경제가 마비되었는데 반해 이미 일본은 화폐도 민간까지 통용되고 민간 상점까지 2층 다락구조를 가질정도로 경제 규모에서 앞서갑니다. 세종실록에 보면 일본은 여행자가 동전 몇개만 지니면 모든 의식주에 목욕까지 해결되는데 반해 조선은 그렇지 못한걸 한탄하는 기록이 있죠. 조선 중기가 넘어가면 그 차이는 조선인 통신사들이 저 금수만도 못한 오랑캐가 이렇게 누리고 살다니 하며 분개할정도로 벌어지고요.
          
굿잡스 18-03-04 01:17
 
고려시대 후기에는 고려는 원나라의 수탈과 왜구의 수탈로 경제가 마비되었는데 반해 이미 일본은 화폐도 민간까지 통용되고 민간 상점까지 2층 다락구조를 가질정도로 경제 규모에서 앞서갑니다>?? ㅋㅋ 헛소리 주구장창이구만

후지키 히사시(藤木久志)의 <잡병들의 전장 – 중세의 용병과 노예사냥(新版 雑兵たちの戦場

中世の傭兵と奴隷狩り>에 의하면  전국시대(유럽의 대항해 시기와 맞닿은 15세기 후반에서 16세기를

관통하는 일백여년의 왜국(JAP) 상황) 전형적 비인권적 헬 시대로 왜국내에 성행하는 약탈, 인간 노

예사냥부터 그런 왜국내 지들끼리 사냥해서 외국으로 50만 이상의 인신매매에 의거한 수출를 통

한 조총 수입에 혈안이 된 영주들의 전형적 후진상.(이런 인신매매는 마리아 루즈호 사건같은 메

이지 시대에도 개버릇 못고치고 자국민을 인신매매질 해서 서양에서 무기 수입에 혈안이 되

어 쳐했던 나라가 왜국)


에도시대(1603년부터 15대 쇼군 요시노부가 정권을 조정에 반환한 1867년까지)

 - 자기 자식을 죽여야했던 일본인들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106486&sca=&sfl=wr_subject%7C%7Cwr_content&stx=%EC%97%90%EB%8F%84%EC%8B%9C%EB%8C%80+%EC%95%84%EC%9D%B4&sop=and




대화재와 전염병으로 신음하던 에도의 백성(닭장주거) -성장점 최저점 시대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82613&sca=&sfl=wr_subject%7C%7Cwr_content&stx=%EC%97%90%EB%8F%84%EC%8B%9C%EB%8C%80+%EB%8B%AD%EC%9E%A5&sop=and


19세기 말 일본의 일반 서민 사진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commu07&wr_id=374741&sca=&sfl=mb_id%2C1&stx=mooha1870


JAP,아리타 도자기의 시조(始祖)격으로 조선인 사기장 이삼평.

『일본 도자기의 신, 사기장 이삼평』

http://cafe.daum.net/gwansan/KAN1/516?q=%C0%CF%BA%BB%20%B5%B5%C0%DA%B1%E2%C0%C7%20%BD%C5%20%C1%B6%BC%B1%C0%CE%20%C0%CC%BB%EF%C6%F2

즉 우리 조선 도공에 의해 17세기 중엽 쨉에서 도자기가 본격 생산이 되기 전까지 왜국은

무겁고 거친 토기그릇이 주류.(임진왜란 시기 오줌 누는 옥같은 반짝 반짝한 조선의 요강에도 왜군

장수들의 눈깔이 돌아간게 단순히 유머가 아님), 이것도 귀족층에서고 대다수 왜인 백성들은

여전히 목기식기류와 나무수저가 이후도 주류.
 

(일본)백성들이 고생스럽고 인색한 것은 아마 천하에서 최고일 것으로

비록 우리 배를 끄는 격졸(格卒)로 말한다 하더라도 매일매일 익힌 고구마 뿌리를 두 번 먹고

그 뒤에 밥을 먹는 사람은 오분의 일에 불과하다.

또한 수저질 몇번에 나무 그릇 바닥에 닿는 것에 지나지 않으니,

비록 같이 앉아서 먹는 사람이 (밥이)없다고 해도 양식 한 톨도 나누어 주지 않는다.
(우리)여섯 배에 타고 있는 왜의 사공들은 예에 따라 우리가 음식을 먹이는데, 모두 큰 통을 가지고 와서 반드시 음식을 많이 달라고 한다.

(우리)격군들이 그들의 음식을 탐하는 것을 비웃으며 질책을 하여도 또한 부끄러움을 알 지 못하였다.

백성들은 날로 번창하는데(숫자는 많아지는데)살아가는 형편이 이와 같이 심하게 고통스러우

니, 만일 그들의 배를 만드는 능력이 우리의 열배가 된다면 우리 앞날에 닥칠 근심이 또한 적

지 않으리라 저어된다.

마을은 가히 백 호쯤 되는데 모두 초가집이었고 사는 것이 궁핍했으며 모두 남루했고 빗질도 안 했으며 씻지도 않았다.

여자들은 나오는 사람이 한명도 없었으니 의복이 깨끗하지 않아 다른 사람을 만날까 부끄러워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널로 덮은 3층짜리 집들이 있었는데 모두 신사(神舍)와 승사(僧舍)라고 한다.

고공사 아래에 머물렀을 때 작은 배에 나무 손잡이가 있는 둥근 어망을 실은 어부가 그 아내와 더불어 배를 저어 오징어를 잡고 있었다.

어부는 한 자쯤 되는 베로 음부를 가리었고 그의 아내도 한 자쯤 되는 베로 치마폭을 만들어 앞뒤를 가리었으니,남녀가 온몸을 벌겋게 내놓고 있었다.

-승사록(乘사錄, 18세기)-


에도막부, 조선통신사 일행에 극빈 대접

“한해 쌀 수확량 12% 접대비로 사용”

옥스퍼드大 루이스 교수 논문

“일본이 조선통신사의 한 차례 방문에 쓴 접대비용은 (일본의) 한 해 쌀 수확량의 12%를 넘었다.”


http://news.donga.com/3/all/20090202/8690797/1


동아시아 선진 조선의 불꽃축제

정종 1권, 1년(1399 기묘 / 명 건문(建文) 1년) 6월 1일(경자) 6번째기사
일본국 사신들에게 군기감으로 하여금 불꽃놀이를 베풀게 하여 구경시키다
   
 
일본국(日本國) 사신이 예궐(詣闕)하니 주식(酒食)을 하사하고, 날이 이미 저물게 되자, 군기감(軍器監)으로 하여금 불꽃 놀이[火戲]를 베풀게 하여 구경시켰다. 왜사(倭使)가 놀라서 말하였다.
“이것은 인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천신(天神)이 시켜서 그런 것이다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67036&sca=&sfl=wr_subject%7C%7Cwr_content&stx=%EC%A1%B0%EC%84%A0%EC%9D%98+%EB%B6%88%EA%BD%83%EC%B6%95%EC%A0%9C&sop=and

◈성종 32권, 4년( 1473 계사 / 명 성화(成化) 9년)
일본국 인백단 삼주 태수 원교풍이 양영서당을 보내어 선물과 글을 올리다

일본국(日本國) 인백단 삼주 태수(因伯丹三州太守) 산명전(山名殿) 소필(少弼) 원교풍(源敎?)이 양영 서당(亮瑛西堂)을 보내어 와서 토의(土宜)를 바치고, 아울러 사서(四書) 각각 1건(件)씩을 바쳤다. 그 서계(書契)에는 이르기를,
 

“공경히 생각하건대, 황제 폐하(皇帝陛下)께서 보위(寶位)에 오르시어 천운(天運)을 이어받으시니, 구방(舊邦)이 유신(維新)하며, 덕(德)이 하(夏)나라·은(殷)나라의 초정(初政)보다 뛰어나시고 도(道)가 요(堯)임금·순(舜)임금보다 위에 짝하시니, 지극히 축하하고 지극히 축수합니다. 신은 선조(先祖) 이래로 가세(家世)에서 상국(上國)3198) 에 빙문(聘聞)을 통하지 아니한 적이 없기 때문에, 경인년3199) 가을에 일개 암자승(菴子僧)과 석도문(奭都聞) 등을 차견(差遣)하여서, 옛날의 맹세를 닦으며, 또 토의(土宜)의 미미한 정성을 바쳤습니다. 다행히 금상 황제(今上皇帝)3200) 께서 왕위(王位)를 이어받으시는 초정(初政)을 만나서, 눈으로는 한(漢)나라 관리의 위의(威儀)를 보겠고, 귀로는 주(周)나라 시(詩)의 가송(歌頌)을 듣겠으니, 아아, 성대(盛大)합니다. 실로 문무(文武)의 나라인지라 영우(榮遇)하기가 너무나 크옵니다. 전사(專使)3201) 가 일을 끝마치고 동쪽으로 돌아오게 되매, 화로 동반(火爐銅盤) 1개와 동경(銅磬) 1개를 더하여 내려 주시니, 이미 후한 은혜를 받았으므로, 감격하고 기쁜 마음이 지극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지금 만복사(萬福寺)의 주지(住持) 양영 서당(亮瑛西堂) 등을 보내어 바다를 건너가서 박(薄)한 폐물(幣物)을 바치어 오로지 황제께서 왕위를 이으신 것을 배하(拜賀)하게 합니다.신은 비록 먼 하늘, 먼 바닷가의 땅에 있어서 위궐(魏闕)3202) 아래에 달려가 마음을 바치지는 못하나, 구구(區區)한 단성(丹誠)3203) 을 엎드려 예찰(睿察)하여 주시기를 빌며, 그리하여 주시면 천만 다행이겠습니다.
신의 봉지(封地) 안의 백주(伯州)에 만복 선사(萬福禪寺)라고 하는 옛 사찰(寺刹)이 있는데, 허물어져 무너진 지가 세월이 오래 되었으므로 장차 다시 영조(營造)하려고 하여, 저번 때에 상국(上國)에 조연(助緣)3204) 을 구(求)하였으나, 너그러이 용납하여 주심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바라는 바는 대왕께서 관인(寬仁)으로써 포금(布金)3205) 의 봉시를 속히 행하여 주시면, 불각(佛閣)과 승방(僧房)을 일시에 다시 옛날처럼 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길이 성수(聖壽)가 만안(萬安)하시도록 봉축(奉祝)하는 일단이 될 것입니다. 하정(下情)3206) 은 지극히 황공함을 이기지 못하여 변변치 않은 방물(方物)을 별폭(別幅)에 갖추었습니다.”


명사:

천순 3년 변경 장수가 보고하길 건주삼위의 도독이 몰래 조선과 결탁하였습니다. 이에 두려워하여 중국이 병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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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실록

야인과 왜인들은 모두 우리의 번리이고 우리의 신민이니 왕된 자는 똑같이 대우하고 차별을 없이하여 혹은 무력을 사용기도하고, 내가 즉위한 이후에 남만, 북적, 이것은 하늘의 끌어들이는 바이지, 나의 슬기와 힘이아니다. 흑룡강, 속평강, 건주위, 올량합, 이만주 동창등 심처 야인과 삼위 달자가 관문을 두드리고 입조하기를 청하거든, 그 종인을 줄여서 후대하여 올려보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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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실록


누가 조선을 일컬어 예의를 아는 나라라고 하였는가? 이 일은 태산을 끼고 북해를 건너뛰는 따위가 아닙니다. 어찌 무례하기가 이와 같습니까?

(명나라 사신이 조선한테서 박대받고 한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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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 10권, 2년(1454 갑술 / 명 경태(景泰) 5년) 1월 6일(무오) 5번째기사
김우을두합 등이 야인들이 세조를 알현하고자 원함을 아뢰다


요동 도사(遼東都司) 왕상(王祥)이 말하기를, ‘요동사람들이모두말하기를,

「수양대군(首陽大君)은 대장(大將)의 의모(儀貌)가 있었는데, 이제과연 발란 반

정(拔亂反正)2142) 하였다.’ 하고 탄상(嘆賞)하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그때 세조(世祖)가 농사에 힘쓰고 학교를 일으키고 군사를 양성하기를

일삼아서, 궁병(弓兵) 백만을 길러 오랑캐[夷狄]를 제압하려고 결심하고 진법(陣

法)을 익히고 군사를 훈련하니, 왜인과 야인들이 모두 위덕(威德)을 흠모하여 다

투어 와서 조현(朝見)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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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 40권, 12년(1466 병술 / 명 성화(成化) 2년) 11월 2일(경오) 3번째기사
 
시무8조에 관한 대사헌 양성지의 상소문


우리 나라의 인민(人民)은 무려 1백만 호(戶)나 되는데 그 중에서 활을 잘 쏘는

 병졸이 30만 명이고, 정예(精銳)한 병졸이 10만 명이며, 용감한 군사가 3만 명입

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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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잡스 18-03-03 21:31
 
중국은 명청대부터는 벽돌 조적을 많이 해서 2층 3층 이상의 큰 규모의 건물을 많이 지었고 일본은 키가 크고 곧은 삼나무 수종이 풍부해서 목재로도 큰건물을 쉽게 지을 수 있는 반면 한국은 삼국시대 이후로는 온돌 문화덕에 점점 목재 부족에 큰나무도 없어서 계속 건물은 작아지고 조선대 이후에는 2층 이상의 건물이 거의 보이지 않게 됐죠>?? ㅋ

온돌 장려가 땟감 수요를 증대시킨건 사실이나 삼국시대 이후로는 대형 건축물이 없었니 어쩌고는

역사적 팩트 역시 아니군요.

우선 17세기 즉 조선 후기로 가면 전세계적으로 본격적 소빙기를 맞게 되었고

유럽 역시도 아일랜드 대기근(프랑스 시민혁명도 이런 지구촌 기후변화와 맞물려 군주의 폭정과

대다수 백성들의 배고픔의 시대 상황에서 폭발되었던 것으로 이야기되기도 하는)과 옆

쨉도 아사자 속출,

조선 역시도 이런 한파를 견디고  백성들의 어려움과 노고를 덜기 위해

온돌의 전국적 장려와 대중화가 본격화 및 냉기에도 견딜수 있는 우수 볍씨 품종이나 방한복 개발등

을 국책으로 해서 힘써게 되는 시대 흐름.

다시 말하면 온돌 어쩌고로 산림 황폐화에 따라 목재 부족 어쩌고 이야기는 잘해야 조선

후기로 넘어가서 대동법 시행 이후 상품 화폐경제가 본격적으로 발달하고 세계최초의 공중보건서인

동의보감으로 인한 의료 대중화등으로 인구 급증, 소빙기로 인한  온돌도 본격적으로 대중화 되면서

점차  나타나기 시작하는 시대 흐름에서나 말할 시기.(온돌을 이용한 효과적 내부 보온 유지를 위해서

다층보다 단층화 선호도가 높아짐. 이후 구한말, 대한제국 시기로 가면서 다층구조나 석재 건축물

들이 다시 본격화)


한때 우리나라의 심각한 산림 황폐화의 본격적 주요인은 35년 쨉강점기 시절 쨉의 악랄한

식민수탈에 기인.


조선시대의 산림보호 정책, 금표와 봉표

일제의 남벌로 70%이상 벌거벗어
 

일제가 이 강산에서 자행한 수많은 수탈행위를 산림이라고 피해갈 수 없었다. 7억㎥에 달하던 금세기 초의 한반도 산림 총축적이 해방 직전에는 약 2억㎥로 줄어든 사실 하나만으로도 일제의 산림 수탈이 얼마나 극렬했는지를 알 수 있다.

이들이 베어낸 약 5억㎥의 벌채량을 식민지 기간 전체로 나누어보면 매년 1천4백만㎥에 해당한다. 이것은 산업규모가 엄청나게 늘어난 오늘날 국내에서 한 해 필요한 목재 총수요량의 1.5배에 달하는 양이다.

일제는 우리 숲을 수탈하기 위해서 '조선임정 전무론'(朝鮮林政 全無論), 즉 "조선에는 나무와 관련된 정책이 아예 없었다"라는 논리를 조작해냈다. 일제가 조선의 임업정책 부재를 강조한 이유는 근대 임업을 도입한다는 핑계로 전국에 걸쳐 강제로 임야 조사를 실시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 조사는 소유구분이 불분명한 마을 소유의 공유림을 국유화하기 위한 것으로, 이렇게 국유화한 산림에서 합법의 탈을 쓰고 목재를 약탈하려는 숨은 의도가 깔려 있었다.

그렇다면 과연 일제의 주장처럼 조선시대에는 우리 숲을 지키고 육성하기 위한 적절한 산림정책이 없었던 것일까? 절대 그렇지 않다. 최근들어 일제가 퍼트린 식민사관인 '조선임정 전무론'이 조작된 것이며, 그 이면에는 우리 숲을 수탈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는 연구 결과들이 속속 밝혀지고 있다.

<<금산은 오늘날의 그린벨트>>

새로운 연구 결과의 단초는 치악산 구룡사 입구 언덕의 작은 자연석이 제공했다. 이 자연석에는 음각으로 '황장금표'(黃腸禁標)란 네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이 네 글자는 구룡사 주변이 조선시대 질 좋은 황장목 소나무를 생산하던 숲임을 알려주는 귀중한 단서다. 아울러 이 명문(銘文)은 조선시대의 우리 조상들이 숲을 어떻게 관리해 왔는지 알 수 있는 몇 안되는 산림유적이기도 하다.

http://dl.dongascience.com/magazine/view/S199803N026


魏略曰:其國殷富,自先世以來,未嘗破壞。

위략 왈 그 나라는 매우 부유하며, 선대로부터 오늘날까지 한번도 파괴당한 적이 없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 부여조


(북위)세종이 이르기를,“고구려가 대대로 상장(上將)의 직함을 가지고 있으면서

해외(海外)를 모두 제압하여 사나운 오랑캐인 구이(九夷)를 모두 정벌하였다
 
《후위서》


고구려 초기 2대 유리왕시절 축조되기 시작한 환도성

앞 궁궐 건물지 무려 90미터.

http://mnews.joins.com/news/article/article.aspx?Total_Id=343393



고구려  5세기
 
<안학궁 남삼문(南三門) 중 남중문(南中門) 38m 앞면 7칸

안학궁 남궁 1궁전(정전) 62m 앞면 11칸

안학궁 중궁 1궁전(편전) 87m.  앞면 19칸 >
 
 
7세기에 세워지고 확장된 당나라의 최대궁전인 대명궁의 정전인 함원전 정면 길이가 67.33m
 
북경  자금성에서 가장 큰 건물 태화전 정면 64m


동대사 크기는 높이 48m, 가로 57m, 세로 50m라오. 안의 대불은 15미터  =>우리 백제인에 의해 건립.

고구려는 안학궁으로부터 750m 떨어져 있는 유사시를 대비한 배후 산성이
 
대성산성으로 전체 9km가 넘고 둘레는 7km가 넘으며 남문이 있는 골 안에서는 2
 
중으로,주작봉과 국사봉 골 안에서는 3중의 겹성에 내부에는 연못이 자그만
 
치 170여개가 존재.
 
http://blog.naver.com/bestchoi21/20018007630 -> 대성산성 사진



세계 7대 불가사의라는 인도의 타지마할의 기단 크기 94m, 건물 크기 57m

남북국 시대

우리 발해의 상경용천부 제2궁전 기단 크기 120m, 건물 크기 93.5m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56234&sca=&sfl=wr_subject%7C%7Cwr_content&stx=%ED%83%80%EC%A7%80%EB%A7%88%ED%95%A0&sop=and
 

7세기 신라 경주 남산에는 장창(長倉)-99미터 대형 무기고 건설(발굴)

-신라 문호왕


신라 장창

http://luckcrow.egloos.com/2589836


한 개의 무게가 19㎏에 이르는 세계 최대급의

남북국시대 초대형 기와 350여장이 남한산성의 대형 건물터에서 무더기로 출토.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071117008012#csidxbf937957793479c875b7e4da86be186


삼국시대 신라가 고구려 백제에 비해 국력이 약했지만 이건 상대적 국력 차이이지

신라의 수도 서라벌은 당시 이미 세계사적으로 유럽 최대 도시라는 로마급의 대도시문명을 구가하던

규모로 우리는 삼국시대 고구려 3경, 백제 한성시대 이후 사비성(열도에 아스카 문명 건설),

신라 서라벌로 로마급을 상회하는 대도시 문명의 규모를 5개 이상 이미 구축하고 있었고

남북국시대로 가면 신라의 수도인 서라벌은 전성기를 맞아 로마 이상의 세계 4대 대도시 위용을

보이면서 전국을 5소경 체재로

북국의 해동성국 대발해 역시 고구려 5부의 영향을 받아 5경체재의 대도시

문명을 구축하게 되군요.

(실제 상경용천부의 크기가 16㎢로 로마 13.7㎢보다 크며 동경용원부

와 서경압록부는 외성이 존재하고 중경현덕부도 외성이 존재한다는 소리가 나오면서 실제 더 컸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내성 역시 현재 단일규모로 세계최대라는 자금성보다 컸고 중심건물 역시 자

금성의 태화전보다 크다고 보고 되고 있군요.( 상경성은 756년, 발해 문왕 대흠무가 설계한 궁궐

로. 상경성은 실제 2009년 전면 19칸에 달하는 제 2 궁전지가 발굴되는데 도리어 당대 당나라 장안성

의 최대 건물인 함원전의 11칸보다 훨 컸어 해동성국 대발해가 당의 지방정권이라는

현 짱국 공산당의 동북공정의 날조 역사관을 무색케 함))


이런 거대 5부 도시행정 문명체계는 우리 고조선 고구려의 독자적 동방문명권에서

기인한 것으로 신성한 태왕이 거하는 축을 중심으로 사방을 다스리는 천하관을 바탕으로

남북국시대 이후에도 이런 우리 고구려 도시문명의 영향을 받은 북방의 패자가 된 요나라 역시

5경 체재 아래 요나라의 실질적 수도격인 중경대정부나 발해땅의 동경등은 우리 발해인 주도로

건설되었고 이후 요와 송을 멸망시키고 동북아 패자로 다시 오르는 신라계황제와 발해인 연합의

금나라 역시 서토를 지배하기 위해 북경에 세운 중도 역시 당시 금나라의 국무총리격인

고구려계 장호가 총지휘해서 건설.(이후 세계제국을 건설하는 쿠빌라이 역시

이런 서토 강북의 도시기반을 바탕으로 5대 칸에 오르면서 남송을 멸망시켜 서토인들을 노예로

삼고 본격적 세계경영)
     
굿잡스 18-03-03 21:54
 
우리나라의 고대 도시 축조 역량과 위엄.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111385&sca=&sfl=wr_subject%7C%7Cwr_content&stx=%ED%83%80%EC%A7%80%EB%A7%88%ED%95%A0+%EB%B0%9C%ED%95%B4&sop=and


세계 도시와 비교한 중세 고려의 도시규모 포스!!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137014


 중세 고려는 이런 남북국시대 남국의 패자였던 100만의 거대 서라벌을 전쟁없이 흡수하여

동경으로 삼고 오늘날 북쪽의 개성을 수도로하는 개경을 중심으로 평양을 서경으로 북방 정책을 위해

키우면서 더불어 조선시대 수도가 되는 서울을 남경으로 하는 로마급 이상의 4경 대도시문명 체재아

래 중소도시를 거느림.

당시 평양이던 서경의 성곽내 면적은 11.85㎢로 중세 유럽의 큰 대도시로 인식되었던 파리의

성곽 면적은 2.4㎢이였지만 실제 시가지가 형성된 면적은 약 1.5㎢로 도리어 고려의 서경처럼

중심 건물들인 대형 사찰이 도시 팽창으로 외곽까지 뻗어 나가 있는 규모와 비교해 보면 당대 세

계사적으로나 거대 목조 건축물에서 중세 고려 역시도 그 위용을 실감할 것이군요.

 

유럽의 최대 도시라는 로마를 상회하는 세계 4대 대도시인 신라 서라벌의 위엄.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jurassicgump&logNo=220915736774


중국의 동쪽에 신라라는 나라가 있는데,
그곳에 들어간 사람은 공기가 맑고 부가 많으며 땅이 기름지고 물이 좋을 뿐만 아니라, 주민의 성격 또한 양순하기 때문에 떠나려 하지 않는다

-창세와 역사서<마크디시(al-Maqdi shi>


그곳(신라)을 방문한 사람은 누구나 정착하여 나오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곳이 매우 풍족하고 이로운 것이 많은 데 있다.

그 가운데서도 금은 너무나 흔해 그곳 주민들은 개의 사슬이나 원숭이의 목테도 금으로 만든다.

-이드리시(이슬람 지리학자)-1154년에 신라가 포함된 지도를 만듬


신라는 중국의 맨 끝에 있는 대단히 좋은 나라다.

그들의 집에 물을 뿌리면 용연향(龍涎香 - 아주 좋은 향기)이 풍긴다고 한다.

전염병이나 질병은 드물며 파리나 갈증도 적다.

다른 곳에서 병에 걸린 사람이 그곳에 오면 곧 치유된다.
 
 
-무슬림이 남긴 것이라고만 전합니다-


중국 저쪽에 산이 많은 ‘신라(Shila)’라는 나라가 있는데

금이 풍부하고 물 맑고 공기가 좋아

한번 간 무슬림은 돌아오지 않는다

후르다드베(Ibn Khurdadbeh)의 '제 도로와 왕국 총람' (이슬람)


신라 서라벌에는 약 17만호의 가구가 있었다. 이는 대략 90만-100만의 인구가 거주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훗날 조선의 한양보다 4-5배나 더 많은 인구가 살았던 것으로, 혹자는 콘스탄티노플, 바그다드, 장안과 함께 서라벌을 당시 세계 4대 도시로 꼽는다.
 
 인구가 많다고 세계적 도시로 꼽는 것이 아니다. 신라, 특히 서라벌에는 초가집이 없이 모두가 기왓집이었다. 온통 금으로 뒤덮은 집도 수십채나 되었다. 그들의 부유함을 짐작할 수 있다. 여기서 또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신라는 차도와 인도가 나란히 잘 정비된 도로를 갖추고 있었다는 점이다. 인도 옆에 마차가 수월하게 다닐 수 있도록 바퀴 자국에 맞춘 도로의 흔적이 아직까지도 뚜렷이 남아 있다. 그리고 그 도로 옆으로는 배수구의 흔적도 함께 남아 있다.
 
 우선 서민층 거주 지의 경우, 집집마다 우물 하나씩을 소유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발굴을 통해 밝혀졌다. 이처럼 서민층에서도 각 집마다 우물을 하나씩 갖고 있을 정도면, 당시의 서라벌이 얼마나 위생이 청결한 곳이었는지 충분히 짐작해 볼 수 있다. 당시에는 온돌을 사용하지 않고 숯으로 난방을 했는데 이를 뒷받침 해주기라도 하듯, 대규모의 숯 가마가 발견되기도 했다. 숯으로 난방을 할 경우, 매캐한 냄새가 나지 않고 그을음도 생기지 않으니 당시 사람들의 주거환경은 상당히 쾌적했을 것이다. 상류층 거주 지역의 경우에는 본채 건물 외에도 별채와 화장실까지 구비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처럼, 계획적으로 잘 정비된 도시였던 서라벌은 마치 바둑판과도 같은 형태로 도시 주거지를 이루고 있었는데, '방'으로 나뉘어지는 이러한 거주 구역은 한 방당 약 8천평 규모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골목마다 출입문이 있어 치안상태도 좋았다. 그래서 '몇번째 골목, 몇번째 집' 하는 식으로 주소만 알면 집을 찾는 일도 매우 쉬웠다. 따라서 인구조사 또한 치밀하고 완벽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가구당 가축의 수까지 세세히 기록해 놓았다.
 
 
천년 전의 도시가 오히려 지금의 대도시보다 더욱 계획적으로 잘 정비되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KBS 역사 스페셜>


해동성국 발해 영역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63072&sca=&sfl=wr_subject%7C%7Cwr_content&stx=%EB%B0%9C%ED%95%B4+%ED%8A%B8%EB%A1%9C%EC%9D%B4%EC%B4%88%EC%BD%94%EC%98%88&sop=and
     
소년명수 18-03-03 22:03
 
무슨 다른 나라는 그 시절에 이미 석유나 천연가스 땠나보죠?
     
굿잡스 18-03-03 22:37
 
중세 고려


고려 황궁 만월대 건축물의 위용

http://luckcrow.egloos.com/2028044



고려의 국립호텔 '혜음원'과 조선의 숙박시설.


혜음원지는 고려 예종 16년(1122년)에 착공을 하는 데 수도인 개경과 남경

(서울) 사이에 왕래하는 행인을 보호하고 편의를 위해 국가가 관리하는 시설로 만들었음. 그외 고려황

제가 쉴 수 있는 행궁 건물도 존재합니다.파주시 일대에서 2001년부터 발굴되었는데  혜음사, 행궁

지, 혜음원 등 3곳을 축으로 24동의 건물터와 더불어 각종 청자류 및 불구(佛具), 기와

 조각등이 출토되었는데 면적이 오늘날 축구장크기를 상회하여 당시의 웅장한 규모를 알 수 있음.

 그기에 조선의 본격적 수도인 한양이라는 도시가 이미 고려시대 남경으로

 중요하게 관리되고 있음을 알 수 있을 대목입니다.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74237&sca=&sfl=wr_subject%7C%7Cwr_content&stx=%EA%B3%A0%EB%A0%A4%EC%8B%9C%EB%8C%80+%ED%98%B8%ED%85%94&sop=and



축구장 규모의 고려시대 '저택' 유적지 발굴

대전 유성구 상대동서 2곳 확인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고려시대 중기 무렵 장원이나 대저택으로 생각되는 초대형 유적이 대전 유성에서 발견됐다. 그것도 두 곳이나 동시 확인됐다. 하나는 축구장보다도 크고, 다른 한 곳은 이보다 약간 작은 규모다.

매장문화재 전문조사기관인 백강문화재연구원(원장 서오선)은 한국토지공사가 대전 서남부지구택지개발사업을 추진하는 유성구 상대동 65-9번지 일원 20만7천㎡를 발굴조사한 결과 동서는 96m, 남북이 110-120m에 이르는 외곽에 담을 두르고, 그 안에는 각종 건물이 들어선 대규모 시설을 확인했다고 8일 말했다.

SD 1호 유구(遺構)라고 명명한 이 유적 외곽 담은 너비가 2m였다.

http://cafe.daum.net/sogoodpoem/J5oE/1446?q=%B0%ED%B7%C1%BD%C3%B4%EB%20%B4%EB%C7%FC%20%C0%E5%BF%F8



공경들의 저택이 10여리에 뻗쳐있는데, 어마어마하게 거대한 누각은 봉황이 춤추는 듯

이무기가 기어오르는듯.

서늘한 마루와 따스한 방이 즐비하게 갖춰져 있고, 금벽이 휘황하며 단청이 늘어섰네.

비단으로 기둥싸고 채전으로 땅을 깔고, 온갖 진기한 나무와 이름난 화초들,

봄의 꽃과 여름 열매, 푸른 숲에 붉은 송이, 그윽한 향내 서늘한 그늘이 한껏 곱고 아름다움을

뽑내어오네.

-최자 [삼도부] 중에서-



고려시대 초대형 사찰 굴산사터서 주요 부속시설 발굴

http://news.heraldcorp.com/view.php?ud=20101006000259&md=20101006141211_BL


실상사實相寺 초대형 고려시대 정원시설 발견 및 대형 목탑.

http://luckcrow.egloos.com/2476848



중세 고려

우리나라는 문물과 예악이 흥행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으며 장삿배가 연이어 내왕하여서 값진 보배가 날마다 들어오니, 중국과 교통하여도 실제로 소득이 없을 것입니다. 거란과 영구히 절교하지 않을 터이면 송 나라와 교통함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하니 따랐다.
  <고려사절요 문종 12년>


근자에 사신이 그곳에 가서 물어보고 알았지마는, 임천각(臨川閣)에는 장서가 수만 권에 이르고, 또 청연각(淸燕閣)이 있는데 역시 경(經)ㆍ사(史)ㆍ자(子)ㆍ집(集) 4부의 책으로 채워져 있다 한다.국자감(國子監)을 세우고 유관(儒官)을 선택한 인원이 완벽하게 구비되어 있었으며, 횡사(黌舍 학교를 말함)를 새로 열어 태학(太學)의 월서계고(月書季考)하는 제도를 퍽 잘 지켜서 제생(諸生)의 등급을 매긴다. 위로는 조정의 관리들이 위의가 우아하고 문채가 넉넉하며, 아래로는 민간 마을에 경관(經館)과 서사(書社)가 두셋씩 늘어서 있다. 그리하여 그 백성들의 자제로 결혼하지 않은 자들이 무리지어 살면서 스승으로부터 경서를 배우고, 좀 장성하여서는 벗을 택해 각각 그 부류에 따라 절간에서 강습하고, 아래로 군졸과 어린아이들에 이르기까지도 향선생(鄕先生 자기 고장의 글 가르치는 선생)에게 글을 배운다. 아아, 훌륭하기도 하구나!
 

-송나라 서긍의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 1123년의 내용)-

왜국은 일본국이다.
본래 이름인 왜를 부끄러워 했는데, 극동에 있어서 스스로 일본이라 부른다.
지금 고려에 신하로서 속하고 있다.

-도화견문지(1080년경에 송나라의 곽약허가 지은 책)


“옛 사서(역사책)에 따르면 고려의 풍속은 사람들이 모두 깨끗 하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지금도 여전히 그러하다. 

그들은 항상 중국인이 때가 많은 것을 비웃는다. 

(고려인들은) 아침에 일어나면 먼저 목욕을 한 뒤 집을 나서며, 

여름에는 하루에 두 번씩 목욕을 한다.”  -고려도경

그 경계선의 서북쪽은 당나라 이래로 압록강을 경계로 하였고, 동북쪽은 선춘령을 경계로 하였다.
대개 서북쪽은 고구려에 미치지 못하였으나 동북쪽은 고구려의 경계를 넘었다.
 
-《고려사》



 ‘고려비색(高麗翡色)  천하제일(天下第一)’

-송나라 태평노인의 ‘수중금(袖中錦)’ 중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soullaw&logNo=220476237900 (중세 고려청자 사진)


동아시아 독보적 경지에 올랐던 고려 회화(불화)

http://cafe.daum.net/indelamang/1SaH/538?q=%B0%ED%B7%C1%20%BA%D2%C8%AD%20%B1%E2%BC%FA%B7%C2

http://blog.daum.net/migiro/1210


세계 최초 고려 금속활자 (세계 활자 종주국 고려)

http://cafe.daum.net/mujuseonwon/2lvx/7406?q=%B0%ED%B7%C1%20%BC%BC%B0%E8%C3%D6%C3%CA%20%B1%DD%BC%D3%C8%B0%C0%DA



고려 조선의 발달한 천문학.

1073년과 74년 <고려사>는 서양에서는 관측하지 못한 ‘신성’ 기록을 남겼다. 그뿐이 아니었다. 1592~94년 사이에도 역시 서양인들의 눈에 띄지 못한 객성을 4개나 관측했다. 특히 한 개의 객성은 15개월간 두 번의 연속된 기간에 걸쳐 관측됐다. 이 객성을 끈질기게 관측한 조선 천문학자들은 이 별은 나타났다 사라지는 신성이나 초신성이 아니라 고정별(항성)이라 판단했다. 그 판단은 옳았다. 그 별은 신성이나 초신성이 아나라 자체적으로 별이 밝아졌다 어두워졌다를 반복하는 변광성이었다. 이뿐이 아니다. 조선의 천문학자들은 1572년 덴마크의 천문학자 티코 브라헤가 관측한 이른바 ‘티코 초신성’도 동시에 보았다. 또한 1604년 독일의 천문학자 요하네스 케플러가 발견했다고 해서 ‘케플러 초신성’이라 명명된 초신성도 관측했다. 오히려 케플러보다 4일이나 먼저 관측하는 개가를 올렸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709130916001&code=960100#csidx5886a16c17d6a568c85a6ae9120d139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kalefarmer&logNo=221094800169


왜구 500여척을 몰살시킨 세계 최초의 고려 화포함대해전-진포대첩

http://gunsan.grandculture.net/Contents?local=gunsan&dataType=01&contents_id=GC05700012


  "만주족은 신라로부터 나와..."
  因滿族自新羅、
  "신라성씨 김이 금나라의 원류이다."
  新羅王金姓則金之遠派
  "금의 시조 함보는 처음에 고려로부터 왔다."
  金之始祖諱哈富(舊作函普)初從髙麗來

-청황제 칙령의 만주원류고 중


续资治通鉴 卷二百一十四 元纪三十二》记载:“后亦多畜高丽美人,大臣有权者,辄以此遗之,京师达官贵人,必得高丽女然后为名家。自至正以来,宫中给事使令,大半高丽女,以故四方衣服、靴帽、器物,皆仿高丽,举世若狂。”
 
 

"황후도 역시 고려미인으로 삼아, 대신유권자는 곧 이를 귀하게 여겨, 수도

고관귀인은 반드시 고려여자를 얻은 후에야 명가가 된다. 그렇게 된 이래,

궁중급사사령, 대반이 고려여자이며, 이런 이유로 사방의 의복, 신발과 모

자, 기물 모든것을 고려를 모방해, 온 세상이 미친 것 같다.

[속자치통감 제이백일십사 원기삼십이]
     
fanner 18-03-03 23:07
 
이분 댓글보다 첫글 다시보니 논리가 웃기시네.
일본은 삼나무 수종이 풍부하다며 큰건물을 지을수 있었다면서 한국은 '온돌'을 예를 들어버리네요?
오히려 소나무 품종이 주로 많이 나와 곧은 큰 대들보를 구하기 힘들었다고 하면 이해라도 하겠습니다.

온돌때문에 목재가 부족해요?
무슨 백성이 동네 뒷산 나무를 마구 해서 땔감으로 쓰는줄 아십니까?
무슨 말같지도 않은 소릴 하세요.
그 당시 농사와 마찬가지로 임업이 굉장히 중요한 산업이었고 철저한 관리가 되어왔습니다.
산에 호랑이가 조선후기때 까지도 많을 수 있던건 산림에 대한 애착이 남달랐기 때문이에요.
그 단편으로 볼 수 있는게 현재 남아있는 고택을 볼때 산맥과 어우러져 집의 지붕을 세워진걸 볼수있어요. 청와대도 그렇구요.

반면 북한처럼 통제가 되지 않을 시 분단된지 몇백년이 된것도 아닌데 산들이 대부분 민둥산이
되었습니다. 남아 있는 나무가 거의 없어요.

이를 보면 온돌때문에 목재가 부족하다는 말은 어처구니 없는 소리입니다.
오히려 온돌이 없었으면 산림도 많이 안남았고 인구도 절반도 안됬을겁니다.
그리고 조선이 세워지기도 전에 중국에 병합되었거나 망했을겁니다.
     
굿잡스 18-03-03 23:14
 
근세조선

조선 도시의 포스와 에도시대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136980
 
조선 후기 상업의 발달과 성시(城市)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137001
 
18세기 평양 모습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94356&sca=&sfl=wr_subject%7C%7Cwr_content&stx=%EC%97%90%EB%8F%84%EC%8B%9C%EB%8C%80+%EB%8B%AD%EC%9E%A5&sop=and


오늘날 우리가 보는 조선의 5궁 중에서 대표적인 경복궁은 1395년에 창건되었다

임진왜란 때 불타 버린 것을 고종 2년(1865)에 재건한 것으로 조선 전반기의 건축물에 대해서는

그 원형을 정확히 알기는 어렵군요. (그기에 쨉은 이런 우리 대한제국의 정기를 끊기 위해

창덕궁을 동물원으로 경복궁의 수많은 건축물을 파괴하고 그기에 조선총독부를 짓는 등

문화재에서도 악랄한 파괴와 수탈짓거리를 쳐함)

그러나 앞서도 말했지만 이미 조선시대의 수도가 되는 서울 한양은 중세 고려 시절 이미

남경이라는 대도시 체계를 이루고 있었고 중요 다층건물이나 대형 사찰등 건축물들이

존재했던 도시군요.

이때문에 고려에서 조선으로 왕조교체가 되면서 고려 호족의 정치적 입김이 강한 개경을 벗어나

남경을 본격적 조선의 새로운 수도로 정하지만 이런 조선의 전반기 도시 풍경이나 건축물에는

고려시대의 다층적 건축물의 색채 역시 여전히 남아 있었고 그런 기록들은 여러 방면에서 파악되는

상황.(조선 시대에 오면서 조선은 수도인 한양을 중심으로 고려시대 이미 주요 대도시였던 개성과

평양, 의주는 사신 접대등을 위해 그 중요성을 이어가면서 상업 대도시로 기타 남부의 진주등과

함께 5개 이상의 대도시 체재를 구축하고 있던 상황.  이 당시 섬나라 왜국의 수도인 쿄토는

굳이 조선의 수도인 한양과 비교하지 않더라도 조선의 여러 지방 대도시들과 비교해서도

여전히 협소한 규모)


종서를 불러들여 보고 말하기를, “내가 풍질(風疾)을 얻은 까닭을 경은 반드시 알지 못할 것이다.

저번에 경복궁에 있을 적에 그때가 바로 한창 더운 여름철이었는데, 한낮이 되어 잠시 2층에 올라

가서 창문 앞에 누워 잠깐 잠이 들었더니..."

 -조선왕조실록 세종 13년(1431년)-


 임진왜란 이전의 경복궁에 관해서 근정전이 단층이었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있는데 임진왜란 이

전의 근정전을 그린그림입니다. 2층이었음을 알 수 있죠.근정전 앞에 좌우 협문도 2층이며...사정

전, 강녕전, 교태전도 모두 2층입니다.(윗 조선도시포스 링크 참조)


세종실록 28권, 세종 7년 6월 23일 신유 6번째기사

전 판나주목사 정수홍(鄭守弘)의 진언은,

"전조(前朝) 사재(司宰)의 어물고(魚物庫)가 송도에 있었사온대, 겨우 단층 3간뿐이었사오나, 그래도 5백 년 동안 국가에서 소용되는 데 모자란 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사재감에는 이층 창고가 서너 채가 있어 높고 크기가 굉장하오나, 그래도 다 들여넣을 수 없어서 가창고(假倉庫)를 많이 짓기까지 하였습니다."


성중의 사찰이 민가보다 더 많았으며, 그 중에도 크고 웅장하며 높고 특출한 전각은

지금까지 오히려 그대로 남아 있으니 그 당시의 존숭함이 지극하였던 것을 상상할 수 있다.

-연복사탑 중창기(演福寺塔重創記, 1393년)-

 

십천교(十川橋)를 지나 연복사(演福寺)에 이르니 절 가운데 5층 누각이 높이 솟아

주위의 성문을 누르듯이 서 있었다. 누각의 벽면과 모서리에 채색 그림이

그려져 있는 참으로 웅장한 건물이었다.

-유송도록(遊松都錄, 1477년)-


 (5월 3일) 술시(戌時) 조선의 도읍 동대문으로 진입, 거기서 황성(皇城)의 모습을 바라보니 옥루금전(玉樓■x殿) 늘어선 기와집,

널따란 성벽들의 조형미는 극치에 달하고 수천만 헌(軒)과 늘어선 대문들, 보귀로운 모습은 이루 말로 다할 길이 없다.

그런데도 막아 싸우려는 병사들은 보이지 않고 대문은 굳게 닫혀 있어 온통 적막하였다.

(중략) 내리(內裏) 안으로 들어가 보니 궁전은 텅 비었고 사대문은 제멋대로 열려있었다.

그제야 전각을 자세히 살펴보니 궁궐은 구름위에 솟아있고 누대는 찬란한 빛을 발하여

그 아름다운 모습은 진궁(秦宮)의 장려함을 방불케 하더라.

(중략) 후궁(後宮)에는 화장품 향기가 감돌고 산호의 대상(臺上)에는 화려한 거울이 덧없이 남아있다.

난 향기는 전각 밖까지 풍기고 사람 살던 자취도 그렇거니와 하염없는 구슬로 장식한 침상들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건물마다 문이 열려 있고 궁문을 지키는 자 없으니 어디를 보아도 처량하기 짝이 없다.

그토록 용맹한 고니시도 천자(天子)의 옥좌(玉座)에 절을 하고 신성하고 고아한 분위기에 휩싸여 두 눈에 눈물이 괴니

소오스시마, 아리마, 오무라도 따라 눈물을 흘리었다.

-에도시대의 문헌 "조선정벌기 (朝鮮征伐記)"에서- 




대개 성곽을 쌓을 때 높은 산을 베고 있다. 가끔 언덕이나 산기슭을 나와,

또한 구불구불 둘러 있는 것이 보인다. 큰 것이 날아갈 듯 치첩이 솟아 있고,

작은 것도 우뚝하게 표관이 웅장하다.
 

환취(황해도 봉산군에 있는 누각)는 날아갈 듯 아름답고, 총수(산 이름)는 구름이 이어졌다.
 
보산(관<關> 이름)에는 서기가 날아오르고, 금암(관<關> 이름)에는 시내가 통과한다.
 

[개성은] 봄바람에 술집 깃발이 나부끼고, 달밤에 음악소리 들린다.

그 민물(民物)은 풍성하여 실로 다른 고을에 비길 것이 아니고,

풍기(風氣)는 밀집하니 또한 서경(평양)에 견줄 바가 아니다.
 


[서울은] 트인 길과 통한 거리는 바르고 곧아서 구부러짐이 없고,
 
잘라낸 듯한 처마에 우뚝 빛나는 집이다.

모든 집은 높은 담이 있어서 바람과 불을 막고,

방마다 북쪽 창을 뚫어 더위를 피한다.
 



[서울에는] 종고라는 다락이 있다. 성 안의 네거리에 있는데 매우 높고 크다.
 
서울 안에 우뚝 솟았고, 길가에 높고 높도다.

시끌벅적 수레와 말 소리가 울리고,  끝없이 어룡 유희가 나온다.
 
식기는 금, 은, 동, 자를 섞어서 쓰고, 품물(品物)은 바다와 육지의 진기한 것이 고루 많다.
 
경기 안의 경치로는 한강이 제일이다.
 
누대는 높아 구름을 막고, 물은 푸르러 거울처럼 비춘다.
 
나루로는 양화도가 있는데, 물산(物産)이 또한 번성하다.
 
활은 중국의 제도에 비하면 조금 짧다. 그러나 화살은 매우 잘 나간다.
 
 -명(明)의 동월(董越)이 1488년의 조선을 보고 1490년에 쓴 조선부[朝鮮賦]-

 
이 나라는 풍요하여 많은 쌀과 보리가 나고, 과일로는 배, 호두, 무화과, 밤, 사과, 잣,

그리고 무진장한 꿀, 약간의 비단, 다량의 면화와 베를 생산하고 있다. 지하자원으로는
 
금과 은 광산은 적다고 한다. 하지만 많은 말과 소, 양질의 노새, 당나귀, 게다가 전 국토에 걸쳐

수많은 호랑이가 서식하고, 그 밖에 갖가지 다양한 동물이 있다. 그들이 만든 공작품은

정교하고 아름다워서 그들이 솜씨가 좋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 사람들은 피부색이 하얗고
 
건강하고 대식가들이며 힘이 세다. 그들은 터키 인의 활과 같은 작은 활을 매우 잘 다루고,
 
독을 바른 화살을 사용한다고 한다.



역대의 조선 국왕들은 가장 훌륭하고 중요한 도시에 큰 궁전을 지었는데,

그곳에 수많은 가신을 거느린 관청이 있었다. 서민들의 집은 대부분 기와지붕이며,
 
그 밖에는 초가지붕으로 그다지 청결하지는 않다. 그렇지만 귀인과 부호들은
 
결이 고운 식물로 짠, 정교한 장식이 있는 극히 질 좋고 광택이 나는 돗자리를
 
집안에 깔고 있는데, 일본인이나 일본에 오는 포르투갈 인들은 그것을 매우 진귀하게 여겼다.
 


우리는 나가사키에서 조선으로부터 들여온 몇 벌의 백의를 보았는데, 그 옷에는
 
더할 나위 없이 섬세하게 공을 들인 자수를 해 놓았다. 그것은 어떤 부분은 짠 것인지
 
아니면 실과 바늘로 꿰맨 것인지 여간한 시력이 아니고서는 구별이 불가능 할 정도였다.
 
이상의 내용들이 조선을 여러 차례 방문했던 사람들을 통해 관백의 궁정이

조선에 대해 입수했던 정보의 요약이다.
 

 -루이스 프로이스(Luis Frois, 1532~1597년)의 일본사(Historia de Japam)-



[개성은] 봄바람에 술집 깃발이 나부끼고, 달밤에 음악소리 들린다.

그 민물(民物)은 풍성하여 실로 다른 고을에 비길 것이 아니고,

풍기(風氣)는 밀집하니 또한 서경(평양)에 견줄 바가 아니다.

 -명(明)의 동월(董越)이 1488년의 조선을 보고 1490년에 쓴 조선부[朝鮮賦]-


3,300여칸에(혹2600여칸) 달하는 시전행랑이 1414년에 완성했습니다.
 
이제 조선을 건국한 시점이고...조선 후기보다는 고려시대와 가까웠던 시절입니다.
 
그리고 동월이 본 술집깃발은 고려시대의 문화입니다. 그리고 조선 전기에도 짧은 기록에까지 남아있을 정도로 여전히 번성했음을 알 수 있고, 당시 개성이 매우 발달했음을 알 수 있군요.




1878년 일본을 여행한  gustafv kry torner가 남긴 동양기행기 에서 당시 일본인의 여러모습중 인상깊은 부분과 특히 수도 도쿄에 대한 설명.


[실제로 가면 기대한 것만큼 실망하게 된다  도쿄는 큰마을 정도의 느낌이다 그리고 도시에 널려있는 빈약한 목조주택  가운데 우뚝 솟아있는 왕의 거처도 궁전이라기 보다는 단순한 성벽같은 모습에 매우 초라했다.

그리고 이보다 더 심각한 모습은 바로 통치자의 행태이다 바로 민족의 낮은 수준을 그대로 방치하고 근절하는데 전혀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문화의 발전은 가장 핵심 공중도덕에 있다 하지만 일본인에게

공중도적은 조금도 존재하지 않는다 길거리에서 옷을 벗고 다니고 아무데서나 소변과 대변행위를 한다 한 마디로 공중도덕 완벽히 결여되어 있는것이다.

이런 점에서 일본인의 사고방식은 유럽인과 너무 차이가 난다 일본은 방문하는 사람들은 유럽과는 일거수 일투족이 전혀 다른 모습들을 늘상 목격하게 될것이다 어떤 도시든

마을이든 목욕탕이 있고 그곳에서는 어김없이 남녀가 한곳에서 목욕을 하는 모습을 발견할수 있다 그리고 특히 일본의 시골은 모두가 전혀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한다 그래서 너무나 비참한 모습들이다]


반대로 한국을 부정적으로 묘사했던 대명사로 알려진 이자벨라의 조선의 수도 즉 한양에 대한 구절

[지금 서울은 어느나라의 수도 에 비교하여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아름다우며 자신만의 모습을 보여준다 특히 근대 이 전통문화에서는 세계 최고의 수준을 간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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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잡스 18-03-03 23:40
 
근대국가로 박차를 가하던 대한제국과 고종황제의 광무개혁 및 근대 도시계획 추진(사진)

http://blog.daum.net/yo3oy7979/125


고려 '사개송도치부법' 서양보다 무려 2세기 앞선 근현대적 회계 복식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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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이미 와해되어 버린 신분제 (통계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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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7년 전 세종이 국민투표를 실시한 까닭은?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nec1963&logNo=220959591555
 
세계최초의 민중? 서명운동, 조선시대 만인소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117828&sca=&sfl=mb_id%2C1&stx=shrekandy&page=1
 
조선과 같은 먼 극동의 나라에서 우리가 경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아주 가난한 사람들의 집에도 책이 있다는 사실이며, 이것은 선진국이라고 자부하는 우리의 자존심마저 겸연쩍게 만든다. 조선 사회에서 문맹자들은 심한 천대를 받기 때문에 글을 배우려는 애착이 강하다. 프랑스에서도 조선에서와 같이 문맹자들을 가혹하게 멸시한다면, 경멸을 받게 될 사람이 허다할 것이다.
 
- 프랑스 해군 장교 주베, 『파란 눈에 비친 하얀 조선』,


조선시대 한글 활자 인쇄본들

http://decentliar.tistory.com/601
 

오늘날 책대여점같은 조선시대 세책점(아녀자도 소설을 읽고 오늘날 넷에서 댓글 달듯

책에 댓글 놀이도 한)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smcschool&logNo=220808791129
 
당시 이정도의 문명률(글을 아는 수준)이면 세계사에서도 탑클래스군요.

(비록 근세 조선이 말기에 우리가 일본이라는 국호와 도시문명까지 건설해주며

수천년 신속하고  살던 왜에 35년 잽강점기의 치욕의 오점을 남긴 왕조이지만

괜히 문에서 선진강대국이자 방대한 인쇄문화에 코리아가 세계활자 종주국이 아니군요)


조선의 과학수사 수준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95129&sca=&sfl=mb_id%2C1&stx=shrekandy&page=3
 



1577년 조선의 <민간인쇄 조보>, 세계 최초 '활판 상업일간신문'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328988&CMPT_CD=P0001
 
이외 근세 조선이 비록 서구의 기계동력 기술과 무기의 교류가 늦어진 부분은 크지만

사회 전반적 문화상은 이미 다방면에서 선진적이였군요.




이미 현금인출카드를 쓰던 조선왕조!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100154&sca=&sfl=mb_id%2C1&stx=shrekandy&page=2
 
중, 일, 베등 동아시아 의학에도 영향을 준 세계 최초 공중보건의서 '동의보감'

문화재청(청장 나선화)은 국가지정문화재 보물이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인 「동의보감(東醫寶鑑)」3건을 국가지정문화재 국보로 승격 지정 예고하였다.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99808&sca=&sfl=wr_subject%7C%7Cwr_content&stx=%EB%8F%99%EC%9D%98%EB%B3%B4%EA%B0%90&sop=and
 

이런 공중 의서의 편찬과 상업의 발달에 따라 조선은 이미 18세기에

의약 분업 즉 진찰은 의원에게 약을 약방에서 찾는 형태가 나오는데 유럽은 이런건

19세기 이후로 가서야 나타나기 시작하는 사회상


조선! 세계 최초의 음식 배달 문화를 시작하다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102181&sca=&sfl=mb_id%2C1&stx=shrekandy&page=2
 

조선시대의 맛집소개서 / 미슐랭 가이드 ‘효전산고’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100027&sca=&sfl=mb_id%2C1&stx=shrekandy&page=2
 


유럽따위 씹어먹는 조선의 빈민구제소 수준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103930&sca=&sfl=mb_id%2C1&stx=shrekandy&page=2



황태연 교수
동국대학교 정치외교학과

1800년까지 중국 또는 동아시아의 1인당 국민 소득은 영국과 유럽을 앞질렀다. 그렇다면 조선은?

◇ 숙련노동자의 실질임금 비교


- 조선(1780~1809): 쌀 8.2kg
- 밀라노(1750~1759): 빵 6.3kg
- 런던(1750~1959): 빵 8.13kg

◇ 경작면적기준 총요소생산성 비교(1800년)


잉글랜드 100, 조선 134, 중국(강소성, 절강성) 191.
중국전체의 평균 총요소생산성은 191 이하일 것이나 이 역시 잉글랜드보다 高.

◇ 1인당 GDP 비교(조선 vs. 중국)


1820년 1인당 GDP - 중국: 600달러, 조선: 600달러
┃중국의 1인당 GDP 추이
- 인구의 비약적 증가로 인해 1500년부터 320년간 600달러 수준.
- 1870년 530달러로 추락.
- 1920~30년대 550달러대에서 등락을 반복.
┃조선의 1인당 GDP 추이
- 1870년 604달러로 반등
- 1911년 777달러(아시아 2위)
- 1917년 1,021달러
- 1939년 1,459달러
조선의 생활수준은 16세기말부터 상승하여 18세기 영·정조시대(1724~1800)에 정점을 기록한 후 하락.
- 16~17세기에는 중국보다 낮을 수 있으나 18세기 중국을 추월.
- 19세기(1820년)에는 다시 중국과 비슷한 수준.

◇ 조선의 교육복지


┃세종치세(재위 1418~50) 이후 18세기까지 지방향교, 사학(四學), 성균관 등 모든 유생들에게 무상교육, 무상숙식, 학비지급, 학전(學田)지급, 면세 및 요역면제.
  - "가르침에는 차별이 없다"는 「논어」의 유교무류(有敎無類)의 원칙에 따른 것.
옛날 18-03-03 17:53
 
일본넘들  경복궁  아작내고  지금  반에 반도  복구못하고 있는 현실...  경희궁은  궁터만  남았을정도로  복구
불가능...    그리고  목조건물에    전쟁이  자주 일어났던  우리에게    목조건물이  아직도  남아 있다는거에 
위안을  삼아야 겠지요...
까만콩 18-03-03 17:53
 
저기에 못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걸 알면 더 놀랄텐데...
     
제주소년 18-03-03 20:12
 
한옥을 십오년 지은 사람으로 말씀드립니다.
못을 안쓴다고 알고있는건, 교사들이 잘 모르고 가르치라는대로 가르쳐서입니다.
팩트는 철물을 사용했습니다.
다만 장부결합의 경우에는 철물을 사용할 필요가 없는것이고, 기타 부분에서는 구조적 안정성이나, 접합 목적을 위해서 사용했습니다. 그러니 전혀사용안했다는 주장은 틀립니다.
그리고 대학교수, 건축공학과 교수들.. 한옥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자들입니다. 서양건축물만 압니다. 대중을 기만할정도의 지식만 있습니다. 제가 건축공학교수들을 만나고 대화해보고 내린 결론입니다.그러니 그들이 텔레비젼에 출연해서하는 말도 헛소리가 많아요
          
ㅣㅏㅏ 18-03-03 22:02
 
네 뭐. 건축공학교수들이 한옥을 잘 모른다? 뭐 그럴수 있다고 치죠...
근데. 개인적인 의문인데. 본인이 배우신 한옥 건축기법이 전통적인 것이라고 어떻게 아나요?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쪽바리들 방식이 접목되면서 쇠못을 썼는지...? 실제로 전통방식을 복원하면서 쪽바리 방식이 접목된 사례가 많거든요. 조선시대에 쪽바리들이 쇠못을 썼다는건 잘 알려져 있으니까요.

판옥선의 건조방식을 보면 우리 목공에서 쇠못을 쓰지 않고 못이 필요한 곳은 나무 못을 쓰는데. 굳이 목조건물에선 쇠못을 썼다는게 이상하지 않아요?
               
새코미 18-03-04 01:30
 
윗 분이 말씀하셨듯이 조립과정에서 못을 사용하지 않았을뿐이지 못이 들어갑니다.
일본은 쉽게 가자고 조립조차도 못을 사용하는 것이구요.
실제 건물을 짓고 포상하는 조선시대 문서들을 보면 쇠주물장인에게 상준것이 나오구요.
현대에 해체보고서를 보면 못을 사용합니다. 수십센치 되는  것도 있더라구요.
종류도 다양하고.

간단한 예로 손잡이를 쇠로 만드는데 어떻게 고정하겠어요.
예쁜연꽃모양 장식으로 못구멍을 만들어 달아야죠.
배처럼 물이 닿지 않는곳이라면 쇠못이 편하고 효용이 높을수도 있습니다.
학자분들은 조립과정 만을 말하는 것이고 - 한옥의 가장 큰 특징이며 중요하니까요.
실제 건축가 분들은 세세한 것 까지 전체를 보시는 거죠.
                    
발자취 18-03-04 02:07
 
간단한 예라고 말한 부분은 건축물의 외장에 못이 사용되었다는거지

건축구조와는 전혀 무관한 예입니다.
                         
새코미 18-03-04 02:34
 
제주소년님도 한옥의 가장큰 특징인 장부결합에서는
못이 사용할필요가 없다고 했는데
제가 어떤 예를 들까요?
님이 해주시죠.
                         
원형 18-03-04 16:51
 
한옥을 만들때 기본구조에서 못을 사용하지 않고 장식부분에서 사용할 경우 이것을 이유로 못을 사용 (위주라는 의미가 들어감) 한다. 라고 하면 맞는것은 아니죠

그런데, "한옥을 만드는데 장식이나 보강을 위해서 못을 사용하는 부분들이 있다." 라고 하면 다른 이야기가 되는것이죠.
          
라키쥬니어 18-03-04 08:08
 
장부결합에  못이 필요없습니다. 못을 박을수는 있지만  못을 박지 않아도
충분히 튼튼합니다. 못치는 사람들은 대부분 장부 결합이나 이음
대충 깎아놓고 못으로 치더군요.한마디로  무늬만 한옥이고 날림공사
이분은 못하고  꺽쇠를 구분 못하시는듯. 현장에서만 남이 하는거 따라 하시지마시고 대학전공 교육을 받아보세요. 대학 4년 공부가. 현장만 20년 노동자보다 대우받는 이유가 있습니다
               
원형 18-03-04 16:57
 
박사임네 하는 자칭 전문가들이 대목장 무시하면서  문화제 복원을 망치는 꼬라지를 보면 꼭맞는 말도 아니죠.
아집과 편견 (노동자도 마찮가지지만)에 사로잡힌 꼬라지에 틀린것을 고치는 모습도 없고

전문가가 대학을 나오지 않았다고 무시하는 꼬라지들이 대한민국에 많죠

과거 대학나오지 않은 20년이 넘은 인간문화재가 협회들어가기 어려웠던시절(지금은 어떤지) 대학나오면 간단했죠 ㅋ

백인 우얼주의 일본 숭배에 찌든 전문가들이 망친게 한두가지가 아니라서 썼습니디.
(대학물을 먹으면 이건 기본이긴함, 그러니 뉴라이트가 나오고)
               
제주소년 18-03-04 18:52
 
라키쥬니님은 어떤 근거로 제가 대학4년 공부를 안했다는 결론을 내리는건가요?

대학4년 공부가 더 대우받는다는 이야기는 뭔가요?

날림공사 업자들이 날림 시공 못치는 것은
논점에 어긋나는 상황인데 언급할 가치가 없는 이야기 아닌가요?
6시내고환 18-03-03 18:02
 
여기서도 중뽕 일뽕들이 날뛰네..
욜로족 18-03-03 18:14
 
깊이를 이해한다면 얼마나 과학적이고 아름다운지
깁스 18-03-03 18:26
 
잘봤습니다 감사합니다^^
로봇태껸V 18-03-03 18:31
 
서양 사람들은 자기들이 무식해서 이해도가 달리면 뭐든지 중국으로 귀결됨. ㅋㅋㅋㅋ
아리아링 18-03-03 18:36
 
조계사 대웅전같네요
멋진 고건물들이 남아있지 못한건 아쉽지만 남아있는걸 가꾸고 창의적으로 접목시키는건 더 중요하다고 보는데
요즘 지어지는 촌빨날리는 현대사찰들을 보면 안구에 습기가;
딸기파이 18-03-03 18:40
 
알쓸신잡에서 봤는데
동아시아 지붕모양의 차이는
각 지역의 위도와 관계있다고함

비가 오면 코너의 기둥이 많이 젖는데
처마가 길다 보니 햇빛이 잘 들어오지 않고,
결국 나무가 썩게 된다.

이를 막기 위해
힘들게 처마 끝을 들어주는 것이라고....

이 때문에 우리나라보다 남쪽에 있는 나라
(상하이 31.2도)(베트남 21.0도)의 추녀는 더 급하게 올라간다고함
비가 많이 오니 햇빛을 더 잘 받게 하기 위해 입사각이 급해지는 것
 
유 교수는
"처마 곡선의 라인이 우리가 가장 아름답다고 자꾸 우기는데
과학적으로 남쪽 지방으로 갈수록 곡선은 점점 급해지고
위로 가면 평평해진다. "

"곡선 자체는 기후를 극복하기 위한 것이라며
우리가 아름답다고 여기는 디자인의 대부분은
문제 해결을 위해 나온 답"이다라고함.
     
원형 18-03-04 16:59
 
그런데 일본은 다르죠.

추녀가 급하게 (노출) 올라가면 구조물 속으로 비가 들이칩니다.
전쟁망치 18-03-03 18:59
 
못 안쓴다는건 모르네
말그대로 레고 처럼 딱 딱 짜맞추어서 제대로 끼워지면 지진도 어느정도 견딜수 있게 효율이 좋아짐
그리고 약간 디자인 적으로는 우리껀 자연과 조화를 이루려는 디자인이 대세고
그래서 둥글고 뭉특한 특징이 두드러짐
     
royo 18-03-04 02:11
 
못 안쓴다는게 가장 대표적으로 잘 못 알려진 사실 중 하나인데
위에 새코미 님이 쓰신 글이 어느정도는 설명이 되어있긴 하네요
끼워맞추는 조립과정에서만 못이 안쓰였다고 하시는거면 맞는 말이지만
구조물 전체적으로 못이 아예 없는건 아닙니다

실제 한옥짓는 목수분이 쓰신 글 중
"옛날엔 연침이라하여 전면과 후면 서까래가 서로 만나는 부분인 마루도리위에서 굴비 엮듯 서까래에 구멍을 뚫어 칡줄기나 갈대줄기, 싸릿대로 꿰뚫어서 고정시키기도 하고, 대장간에서 연정을 하나 건너, 혹은 둘 건너 박기도 했다.    ... 생략 ... 결국 한옥도 못을 쓰지만 기본 골격인 구조체를 결구하는덴 못을 쓰지 않는다.

.... 생략 ... 롯데 낙천대아파트 안에 전통 팔모정을 지을 일이 있었는데 현장소장이란 양반이 마루깔고 치마널 붙이는데 못을 쓰는 걸 보고는 한옥엔 못을 안쓰는걸로 아는데 그렇게 쓰면 되냐? 라고 하기에 그럼 본드로 붙일까요? 라고 웃어넘겼는데 심지어 같은 건설 기술자들 사이에서도 한옥에 대한 이해가 이렇게 한참 모자른다 "
          
원형 18-03-04 17:01
 
지붕형태에 따라서 다릅니다.

단지, 한국의 한옥이 화려해서 그부분에 사용하는것이죠
               
royo 18-03-04 22:15
 
애초에 못을 쓸 필요가 없을 만큼 간단한 구조에 한해서는 당연히 못을 안쓰겠죠
그런데 못을 써야만 구현 가능한 형태에 대해서는 분명히 못을 사용함에도 불구하고
'한옥은 못을 안써' 라고 이야기 하는건 잘 못된 논리라는 거죠.
한옥이 그렇게 간단한 구조만 있을리가 만무합니다
갓네오 18-03-03 19:13
 
대학교 다닐때 교수님이 하신말씀이 생각나네요
한국 전통건축물의 미는 처마끝을 바라보면 알게 된다고
성운지암 18-03-03 19:23
 
중꿔가 건축양식이란게 있나?
su수 18-03-03 19:29
 
잘 보았습니다.
ashuie 18-03-03 19:42
 
한국의 모든 목조건물은 조립식이야
유럽이나 중국,인도같이 훼손된 문화유적을 드러내고 바닥부터 재창조한게 아니라
없는 부품을 기존 메뉴얼대로 새로 제작해 끼워넣어 복구한거지
실제로 고려나 조선시대에 똑같은 건물을 해체한후 다른도시로 이동해서
금방 몇달만에 재조립한 사례가 많아
이 목재건물들은 레고처럼 끼워맞추게 만들어져 있어서
못이나 송곳을 전혀 사용하지 않아.
이런게 못이 녹슬어서 건물이 휘고 부식하던 일본과 중국건물들과의 차이점이지.

성으로 넘어가면 한국적인 특색이 더 강해져
중국의 성은 완전 평지에 흙으로 쌓은 성벽을 둘러놓는거야
엄청나게 거대하고 웅장하지 이러한 도시는 고대 중동과 유럽의 도시국가들과
비슷한 양식을 띄고있어.
흙벽돌로 지어졌기에 공성전에서 성벽을 무너뜨리는 전술이 유효했지
삼국지를 읽어보면 줄기차게 이런 일화가 등장해.

일본의 성은 애초에 마을을 감싸는 형태가 아닌 마을에서 떨어진 영주의 집을 방어진지로 씌운거야
독일이나 영국의 작은 성들과 비슷한 느낌이지.
그래서 출입구는 주로 외길로 좁고 성채는 흙으로 2층,3층 단계별로 보루를 만들지
성벽은 따로없고 대나무 등으로 각층마다 간단한 방어구조물 정도만 배치하고
핵심인 최상층에는 길다란 목재성벽이 씌워져(규모가 아주작아)
그리고 가장 중심부에 멀리 적을 내려다볼수 있고 영주가 기거하는 높은 천수각을 올리지

한국의 성은 산성과 돌성벽의 특징이 있어.
방어에 용이하고 높은곳에서 적을 살피기 쉬운 가파른 산위에 성을 새우지
성의 규모는 중국보다 많이 작고 일본보다는 커
거의 모든 산성은 돌성벽의 특징을 가지는데 이는 화포가 나오기까지
성벽을 무너뜨를 방법을 아예 차단할수 있었던 비법이야.
중국의 통일제국인 수나라와 당나라는 공성병기로 흙성벽을 무너뜨리며 쉽게 통일제국을 세웠지만
고구려의 정교한 돌성벽은 그 어떤 공성병기로도 흠집하나 나지않아서
그들의 황제를 매번 좌절시켰었지.
이 돌성벽의 방어력이야말로 한국사에서 수많은 중화제국의 침략을
3천년동안 막아낸 열쇠라고 볼수있어.

전쟁과 화제만 없었다면 아직까지도 멀쩡히 웅장하게 서있을 많은 문화유산들을..
대부분 잃어버린게 너무 아쉬워.
     
룬희 18-03-03 20:24
 
성벽은 의견이 좀 다른듯.

튼튼해서가 아니라. 수성전에 능해서 잘버틴거고

무너진 성벽을 복구하는데 능해서 그런거지 성벽이 딱히 튼튼해서가 아님.

전투로 무너진 성벽을 하룻밤만에 복구해서. 당나라 군세가 좌절했다는 얘기도 있음.

유튜브 토크멘터리 전쟁사 당나라 고구려 전투 부분을 보면 잘 설명함.

판옥선의 높이가 높은 이유도 여기서 찾음. 우리민족은 전통적으로 수성전 마스터였음.

그리고, 전형적인 왜구의 온돌 디스 논리가 온돌이 목재 부족을 부추겼다는 것임.

목재가 부족할 정도로 황폐했다면. 은닉을 생존 본능으로 하는 호랑이가 그렇게 많을 수

없음. 그리고, 국토의 대부분이 산인데. 한국을 보지 못한 일본인의 구라에 넘어가선

인간구실 못함.

그리고, 중국은. 50여개 부족중 어디 문화를 말하는 것임?

서로 말이나 통하면서 하나의 중국을 외치던가. 문화를 말하던가 말던가.

섞어찌게의 맛을 논한다면 잘모르겠다가 정답이겠지.
          
가스칼 18-03-03 21:47
 
건축용 목재를 조달할수있는 민간주거지 근처의 황폐화를 말하는거지 목재운반 자체가 불가능한 백두대간까지 황폐화가 되었겠나요. 온돌로 죄다 민둥산 되었다 한 조선시대 많은 사대부들 단체 왜구행인가요
               
가스칼 18-03-03 21:48
 
그리고 실제로 산림의 황폐화로 도성에 호랑이가 내려와 호환이 발생했다는 기록들도 있습니다
                    
뚜리뚜바 18-03-03 23:12
 
와 진짜 할말을 잃었다 뇌가 똥으로 구성된건가;
                    
새코미 18-03-04 01:19
 
인구가 가장 많았던 도성조차도 산림이 무성했으니 호랑이가 살수있었습니다.
생각좀 하시고 이런 글을 쓰시죠.
               
ㅣㅏㅏ 18-03-03 21:57
 
상식적으로 좀 생각합시다. 당시와 당시 이전에 난방을 위한 열원이 목재말고 뭐가 있나요? 전세계적으로 당시 모든 난방은 목재로 이뤄집니다. 같은 양의 목재로 더 오래 더 따뜻하게 날 수 있는 난방방식이 온돌인거임. 인구는 늘고 목재수요량은 늘어나고. 인가 주변 산이 황폐화 되는건 우리나라만의 일이 아닌겁니다.
중요한건 수요에 비해 부족한 목재를 온돌이라는 방식으로 그나마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는 거구요. 현대 전세계 어딜 뒤져봐도 온돌만큼 열요율이 높은 전통 난방 방식은 없어요.
                    
왕두더지 18-03-04 16:41
 
빙고~~~
          
굿잡스 18-03-04 00:13
 
성벽은 의견이 좀 다른듯.

튼튼해서가 아니라. 수성전에 능해서 잘버틴거고

무너진 성벽을 복구하는데 능해서 그런거지 성벽이 딱히 튼튼해서가 아님.>??

유럽의 그리스문화등도 폴리스 도시국가 즉 언덕이나 구릉지에 일종의 산성같은 성이 존재하지만

이런 것들은 작은 규모에 불과했다면 삼국시대 고구려 3경중 남평양으로도 불리는

장수산성의 경우 둘레가 자그만치 10.5km에 오골성(봉황성)의 경우 역시 16킬로, 평양 일대

평지성인 안학궁의 배후 산성인 대성산성 또한  둘레 9km등의 이런 높은 산세나 구릉지

를 이용해서 수십미터 높이로 대형 도시형 산성을 축조하는 역량은

우리 고조선 고구려 문명권이 세계사적으로 독보적 역량을 가졌고(성곽등 건축물 하면 고대 로마

제국이 두말이 필요없는 역량을 가졌지만 이런 우리쪽의 특화된 대형

도시형 산성 축성술에는 밀리는 상황. 서토 역시도) 이런 거친 높은 지형을 바탕으로 성곽을 쌓는 자체가 대단

히 어렵고 뛰어난 축성술이군요.(이후 이런 유구한 전통은 조선시대에도 조선 수도인 한성에

전란을 대비한 대규모 북,남한산성으로 이어짐)

실제 만주일대 발굴되는 수많은 산성들은 그래서 서토 학자들도 우리 고구려 성곽으로 일단

생각하는 게 일반적.(지금도 천년이 훨씬 지난 풍파에도 이런 고구려 산성들을 실제보면

험준한 산세에도 그 규모와 높이의 위용에 놀람)

그외에 그랭이 공법으로 불리는 우리만의 독특한 자연석을 이용한 뛰어난 내진설계형

공법이나 품자형으로 쉽게 무너지지 않게 하거나 성 옆에서도 상대를 공격할 수 있는

독특한 치와 성문이 무너져도 이차 방어가 가능한 반월형 옹성등은 매우 뛰어난 건축술임은

두말이 필요없을 것 같군요.

또한 고구려는 이런 수성전뿐 아니라 초반 적의 대군을 효과적으로 방어 지연시키면

중앙에서 대군을 이끌고 와서 쓸어 버리는 야전 기동력과 육박전 싸움도 즐기고 대단히

뛰어났던 동북아 최강대국의 위용을 보였던 나라(로마제국이 유럽 전역을 지배하던 시기 상비군

이 30여만에 예비병력 합쳐 그 이상으로 말하지만 고구려 역시도 고당시기를 보면 상비병력 30여

만에 전시에 최대 50만 대군 이상도 뽑아냈던 나라에 로마가 보병 위주로 강한 편제 였다면

고구려는 개마무사라는 중장기병과 경기병 및 부용세력화된 기마전에서도

매우 뛰어나면서 사납고 거친 주변 유목세력(실위(후대 몽골), 거란(후대 요), 흑수말갈(후대 금,후금)

선비족등)들을 제압, 휘하 세력으로 거느렸던 나라였군요.)
BTJIMIN 18-03-03 20:01
 
번역 감사합니다...
리트머스 18-03-03 20:07
 
잘 봤습니다..
건축 기술들은 아시아 내에서 공유 할지 몰라도 표현에 관한 문화는 다 다를 진데
머.. 재네들 보기엔 다 똑같아 보이겠죠 ㅉㅉ
G마크조심 18-03-03 20:27
 
황룡사.. 경복궁.. 쩝 남아만 있었어도. 원숭이와 전쟁할일만 있으면 오사카성인지 금각사인지 다 부숴버리고 공구리 쳐 버린다음 이 자식들은 몇천년 전 문화재라며 공구리 넣어서 건물 지었다고 해야지. 맨날 그놈들이 쓰는 방법이니.
     
제주소년 18-03-04 18:26
 
금각사는 안가봐서 모르지만 오사카성은 2000년에 신혼여행가서 방문했습니다. 님이 원하는대로 전체가 콘크리트 건물이고, 실내에 엘리베이터 운행하더군요.
그러니 일본 전통 문화재가 아니고 오사카성이라는 건물을 새로 지은겁니다.
     
royo 18-03-04 22:17
 
오사카 성이 전통건물이라고 이야기하는 애들은 똥멍청이들이죠
그냥 현대건물입니다
fanner 18-03-03 20:28
 
저 궁 하나마다 온돌이 되어 있어서 바닥이 따뜻하다라는걸 알면 중국과 어떻게 다르냐는 멍청한 소리는 안할텐데.
가출한술래 18-03-03 20:59
 
잘 보고 갑니다...
sunnylee 18-03-03 21:10
 
잘봤어요..
셀틱 18-03-03 22:35
 
아는 만큼 보인다고,
일부 댓글중 템플스테이로 며칠 보고 간 사찰 단청과 궁의 단청을 구분 못하고 우기는 게 몇 개 보이네...
에테리스 18-03-03 23:34
 
전통느낌을 살린 현대식 건물 충분히 멋지게 만들 수 있는데..
발자취 18-03-04 02:15
 
잘 봤습니다~
royo 18-03-04 02:23
 
솔직히 우리야 우리의 자랑스런 문화니까 세세하게 뭐가 다른지 뭐가 우월한지 알지만
서양애들이 가진 보편적인 인식은 중국 -> 한국 -> 일본 이런식으로 문화나 기술이 흘러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애당초 그래서 중국꺼랑 뭐가 다름? 이 기본 베이스라 저런 반응은 어쩔 수 없습니다
물론 우리가 유럽애들보고 그래서 너네가 자랑하는 그게 옆나라랑 뭐가 다름? 이라고 하면 지들도 기분 나쁘겠지만
자기자신 18-03-04 03:07
 
잘 보고가네요
쇠고기 18-03-04 03:28
 
잘 봤습니다.
라키쥬니어 18-03-04 08:40
 
못을 사용  안하고 지을수는 있습니다.
근데 돈이 많이 들어가서 그렇지요. 목재를 끌로 파내서 끼워맞추는데
진짜 짜증나고 힘이 많이 들어가고 시간도  많이 걸립니다. 그거 하기 싫은 사람들이 못을 치는거구요. 소장이란 자들이 있는 현장은 100퍼센트 칩니다.
최순실 18-03-04 11:17
 
잘보고갑니다.....
갈천 18-03-04 12:10
 
굿잡스 저사람은뭐하는분이길래 항상 저런자료를 뿌리고다니지? 다소 말이안되는 기사들까지 다인용하시네
     
굿잡스 18-03-04 13:26
 
??

갈천>

본인은 잘 아는? 듯 한데 이참에 좀더 배우게

모가 말이 안되는 부분인지 합당한  근거를 가지고 이야기해보길 바라군요.
          
갈천 18-03-05 05:24
 
아뇨 저는 국수주의 사학자 같은 분과 토론하고싶지 않습니다. 이미 질려버렸으므로.. 그쪽을 무시하는것은 아니니 오해마시구요. 근데  그말투는좀오그라들긴하네요 ㅋㅋ
               
굿잡스 18-03-05 10:51
 
국수주의?? ㅋㅋㅋ

갈천>  정작 본인이 말 안되는 어쩌고 떠들고는 제대로된 근거 한줄 반론도 못하는

수준에서 국수주의?? ㅋㅋ 한심한.

(하긴 여기 수년동안 유명한 인디고부터 여러 국적불명의 익명성을 이용해서 수십개

아이디파서 어쩌고 매번 쉰소리에 부들부들  떠드는 인간들 상주하고 있긴 하더만 ㅋ.)


한글 쓴다고 다 한국인일까? 해외사이트 한국 욕하는 이들의 국적

http://principlesofknowledge.kr/archives/46706#_enliple


한국인 사칭하며 가코 공주 협박한 쨉인.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commu07&wr_id=2563051&sca=&sfl=wr_subject%7C%7Cwr_content&stx=%ED%95%9C%EA%B8%80+%ED%95%9C%EA%B5%AD%EC%9D%B8&sop=and
                    
갈천 18-03-07 04:58
 
ㅋㅋㅋ 기분이 많이나쁘셨나보네요 제 국적도 의심하시고.. 제가 사과드리지요.
이래뵈도 독립유공자의 후손입니다. 당신의 댓글분위기 자체에서 민족우월주의 냄새가 나는것은 사실이니 경계하였으면 합니다.
늙은이 18-03-04 14:14
 
100번째 댓글...잘 봤습니다.
하데스 18-03-05 02:04
 
잘 보고 갑니다.
헝그리댄서 18-03-05 08:09
 
잘 보고 갑니다.
직장인 18-03-05 13:02
 
번역 수고하셨어요

댓글 반응이 뜨겁네요 ㅎㅎ
명불허전 18-03-07 19:05
 
짱깨들은 어딜가나 숟가락 안 얹는데가 없구만
하늘나비야 18-03-12 16:19
 
이상하게 우리 나라 분들 중에서도 한국 전통이나 한국문화에 대해서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칭찬 하면 너무 국수주의적이다 민족주의적이다 라고 하면서 밀어 내는 분들이 있으신것 같네요 자기 나라 문화 전통 자랑스러워 하는게 이상한것은 아니죠  그렇다고 없는 걸 있다고 하거나 아닌 걸 맞다고 하는 것도 아니고 남의 나라 문화재 약탈해 가져가져서 내꺼다라고 자랑스러워 하는 일본 애들도 있는데 그거에 비하면 상당히 정상적인 반응 같은데 말이죠 중국이나 일본 혹은 다른 미국이나 유럽문화 찬양하면 아무 말도 없다가 갑자기 우리나라 전통이나 문화 찬양 좀 하면 나타나서 딴지 거는 건 좀.. 이상하게 보입니다 물론 겸양이겠거니 하고 넘어갈 수도 있지만  너무 격하게 민족주의니 국수주의니 하면서 비난 조로 말씀 하시는 것도 딱히 좋아 보이진 않는 군요  흠  내나라 문화 전통 내가 자랑스러워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으면 누가 사랑해 줘야 합니까? 타국인이요? 한번 쯤 이 점도 생각해 주셨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