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말, 만주족 팔기군 병사가 한족 성주(시장)을 구타한 사건이 있었지만, 팔기군 병사는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을 정도로 청나라 내내 만주족들은 정복자이자 지배자라는 신분적 특권을 누리고 살았다.
서구 열강의 공세에 몰려 위험한 상황에서도 청나라의 지배층들은 "나라를 외국에게 넘겨줄 지언정, 집안의 종(한족)에게는 절대로 줄 수 없다."라고 단언했을만치, 청나라는 엄연한 정복 왕조였다.
1850년대, 한족들로 구성된 태평천국의 반란이 일어났을 때 남경을 지키던 만주 팔기군 병사들이 태평천국군에게 모조리 살육당하자, 분노한 청나라 조정은 태평천국에 가담한 반란군 병사들이 항복해와도 절대로 항복을 받아주지 말고 전부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고 그 바람에 태평천국의 난은 16년이나 오랫동안 계속되고 말았을 정도로 만주족과 한족 사이의 민족적 갈등은 심각했다.
- 청사 저자 임계순 -
당시 일개 만주족 병사가 미국으로 치면 주지사(웬만한 나라의 대통령)급에 해당하는 성주
를 구타할 정도로 만주족은 소수였음에도 피지배 서토인을 강점 지배하는 정복자의 지위
를 누리고 있었고 이들은 서토인과 구분되는 그들만의 독자적 만성이라는 주거공간에서
생활하며 서토인에게 세금을 착취해서 생활.
(후기로 가면 만주 팔기군중에서 초기 청에 복속, 서토 정복에 동원되어 수백만 자국 짱개들
그래 더 짖어봐
한자가 짱개의 문자라는 것부터가 되도않는 소린데ㅋㅋ
고구려가 한자를 써서 중국의 영토?
그럼 러시아는 키릴문자쓰니깐 그리스&동로마의 영토냐?
팩트폭행 좀 더 하자면
고조선 고구려 부여 백제 등은
식생활 발견토기 주거형태 주술문화 의복 등이 계승되고 있어
짱개놈들 산둥반도에 소국꾸려서 놀던 문화랑은 동떨어져 있다고.
지들이 고구려를 동이족이라 기록해놓고 이제와서 우리민족우리땅!
염치가 있긴한거여?
삼국지 읽어봐라 손권이 고구려에 사신보냈다가 귓싸대기 쳐맞고 돌아가는데ㅋㅋㅋ
Jun Lin
고구려와 발해는 한국 역사의 일부가 아니야. 다른 나라의 역사를 훔쳐가지 마라.
현대 한국은 남쪽에 있던 삼국(역주-백제,신라, 가야)의 형성체일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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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넴만 봐도 짱깨인걸 알겠네 하여튼 짱깨 ㅅㄲ들은 답이 없어
고(구)려(KOREA)가 오늘날 대한민국(KOREA) 역사인 이유(지금의 대한민국이라는 국호 자체가
고종황제의 대한제국 즉 고구려, 백제, 신라의 대삼한을 아우르는 국호를 이어받아 오늘날 대한국민
이 국가의 주인이라는 대한민국 국호로 당당하고 도도히 계승 발전.)
1.한국인의 혈통
한국인은 백제와 신라 외에도 많은 고구려인의 피를 이어받았다. 남북국시대 신라의 9주 중 3주(오늘날 경기도, 황해도, 강원도 일대)가 고구려의 옛 지역에 설치됐고, 이 지역 주민들은 대부분 고구려 왕조의 지배를 받던 고구려인이었다. 고구려인의 인구가 적어도 통일 신라 인구의 1/3 즈음에 육박했다고 볼 수 있는 증거로 경주를 지키던 9서당 중 3서당인 황금서당, 벽금서당, 적금서당이 고구려인으로 구성된 부대였다는 사실을 들 수 있을 듯하다. 이 수치는 오히려 백제인의 서당 부대였던 흑금 서당 개수보다 훨씬 많은 것이다. 남국 신라 인구 중 고구려인의 비율이 백제인보다도 오히려 많았다고 까지 조심스럽게 추측해 볼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도 든다. 물론, 서당의 숫자로 인구 비율을 추측하는 것은 분명한 증거가 있는 것은 아니므로 이것을 분명한 논거로 삼기에는 무리가 있다.(고려 전성기나 조선 시대를
보면 남북국시대의 신라보다 훨씬 세력권이나 지배영역이 확장된건 말할 필요 없을 것이고)
남북국 시대 신라 시기 고구려인들은 9주와 패강진을 제외한 신라 남부 지역에도 많이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전라북도 익산(금마저), 경상남도 진주(강주의 중심지)에는 당시 고구려 유민들이 상당 수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보덕국왕이자 보장왕의 아들이었던 서자 고안승은 신라왕에게 김씨 성을 하사 받고 경주에 거주하였다. 이 사실은 오늘날 한국 성씨의 다수를 차지하는 김씨 성 중에도 상당수 고구려 유민 특히 고구려 왕족 안승의 후손도 있다는 증거인 셈이다. 발해 멸망 후에도 많은 고구려 혈통이 고려로 귀순하여 오늘날 한국인의 조상이 됐으며, 이후 고려, 조선조가 평안도, 함경도 지역을 수복하면서 그 지역에 살던 다수의 고구려인의 후예들도 우리 역사 무대에 다시 들어와 오늘날 한국인의 조상이 됐다고 보아야 옳을 것이다. 오늘날에도 한국에는 고구려인을 조상으로 삼는 성씨가 여럿 있다. ㅡ 물론 조선조를 거치며 성씨가 많이 뒤바꼈기 때문에 성씨로 조상을 따진다는 것은 아주 믿을만한 것은 아니다 ㅡ 오늘날 진주 강씨, 횡성 고씨, 봉성 온씨, 협계 태씨 등은 고구려인들을 시조로 모시는 성씨들이다. 이러한 혈연적은 계승은 한국인이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직접적인 증거인 것이다.
2.한국어
한국어에는 많은 고구려어의 흔적들이 남아있다. 고구려어 수사가 현재 한국어 수사와 일치하지 않는 문제는 있지만, 그래도 한국어가 고구려어의 큰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2000년 임병준이 제작한 자료에 따르면 현재 남아 있는 고구려어 어휘 70여개 중 50개 내외의 단어가 현대 한국어와 관련성을 갖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정도의 관련성은 한국어가 고구려어의 직접적이고 강한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사실을 볼 때, 고구려어가 일본어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고, 한국어와 관련이 적다는 말은 기존의 일부의 주장은 옳다고 볼 수 없다. 한국어는 분명 고구려어를 계승한 언어이다.
3.국호 Korea
세계에 고구려의 국호를 나라의 국호로 사용하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 Korea는 고려에서 나왔고, '고려'는 고구려 중엽 이후 고구려인들이 직접 사용했던 고구려의 국호였다. 오늘날 '고려'라 하면 왕건의 고려만을 생각하는 경우가 많지만 이는 잘못된 것이다. 삼국유사에서 일연은 고구려라는 단어 대신 '고려'라는 말은 고구려라는 의미로 썼고, 오늘날 한국과 중국에 남아있는 많은 지명들에서는 '고려'라는 명칭이 고구려의 뜻으로 많이 쓰이고 있다. 한국은 오늘까지도 고려(고구려)라는 나라 이름을 쓰는 나라이다.
4.계승 의식
고구려 멸망 후 통일 신라, 발해 시대에도 고구려 계승 의식을 유지했고, 이는 고려 시대를 거치면서 더욱 강화되어 오늘날 한국에 까지 이어졌다. 고구려 계승 의식이 계속 전승될 수 있었던 큰 이유 중 하나는 고구려 계승 의식을 가진 고구려 유민들이 통일 신라 사회, 발해 사회에서 영향력 있는 귀족의 지위를 어느 정도 유지했다는 점이다. 발해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남북국시대 신라에서도 고구려 귀족은 백제 귀족들보다 더 높은 대우를 받았다. 백제 귀족이 4, 5두품으로 몰락한 반면 고구려 귀족은 6두품 신분을 계속 유지했고, 고구려인의들의 탄탄한 세력은 이는 결과적으로 태조 왕건의 고려라는 나라가 세워질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고려 건국의 주축 세력이 과거 고구려의 영역이었던 패서 출신이었다는 점을 본다면 적어도 초기 고려의 귀족들은 상당수가 고구려 혈통을 지닌 사람들이었다고 보아야 옳다. 패서 지역은 고구려 시기 고구려 3경(평양, 국내, 한성) 중 한 곳이었던 한성(재령, 장수산성)이 있었던 곳이고, 고구려 계승 의식이 매우 강했을 수도 평양과 강 하나를 두고 있는 지역인 만큼 순수 고구려 혈통을 지닌 사람이 많은 곳이었다. 이들은 고구려 변방의 고구려 계승 의식이 적었던 거란, 말갈(여진)인들과는 달랐다. ㅡ 이런 까닭에 오늘날에도 만주족들은 발해에 대한 계승 의식은 밝힐 지언정 고구려에 대한 계승 의식은 거의 갖고 있지 않다. ㅡ태조 시기 황해도 평산, 봉산 지역을 뿌리로 삼으며 등장하여 이후 고려의 귀족들이 된 성씨들의 경우 고구려인의 혈통과 상관이 있다고 보는 것은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발해 멸망 후 발해의 유민들이 고려 귀족들에 합쳐지면서 이런 고구려의 계승 의식은 한층 강화되었다. 오늘날 한국인들이 고구려의 후손을 자처하는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4.평양이라는 도시
평양은 한국 역사에서 가장 유구한 전통을 지닌 도시이다. *오늘날 학계 연구를 보면
평양은 고유 명사보다 일반명사로 보이면서 여러 군데가 존재하는 듯 하며* 평양은 동천왕 시기 일시적으로 고구려의 수도인 적도 있었고, 고국원왕 시기에도 잠시 수도로 삼은 적이 있었다. ㅡ 물론 고국왕왕 시기 평양 동황성을 오늘날 평양이라고 확정할 수는 없다 ,ㅡ 427년 장수왕이 평양으로 천도를 한 후 평양은 한국 역사상 최강국이던 고구려의 전성기 시절을 보낸 곳이었다.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고구려의 유명인들인 연개소문, 을지문덕, 온달, 영양왕, 보장왕, 연남생 등의 고구려인들은 평양을 무대로 활동했고, 고려 시대에는 평양을 수도 중 한 곳인 서경으로까지 삼아 매우 중시하게 됐다. 조선조에도 평안도 지역에서 오늘날로 치면 광역시, 거점 중심 도시일 '부'(평양부)의 자위를 받은 평안도 지역의 유일한 도시이기도 했다. 이러한 정서는 오늘날 한국인에게까지 고구려의 수도이자 북방 지역의 중심지 '평양'이라는 인상을 강하게 각인시키고 있다. 분단된 북한 지역의 수도가 평양이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평양이 한반도 북방의 중심지였던 것은 적어도 수천년 전인 고조선, 고구려, 고려의 서경 시기와 그 연원이 닿아있는 것이다. 오늘날의 평양은 분명 고구려가 한국에게 물려준 큰 고구려의 유산임이 분명하다.
5.거문고
한국 국악의 양대 현악기는 거문고와 가야금이다. 가야금이 남방의 가냘프고 여성적이며 섬세한 음률은 내는 악기라면, 거문고는 북방인의 단단하고 거칠고 투박한 음을 내는 악기이다. 왕산악이 만든 이 악기는 고구려의 소리를 전해주는 악기이다. 오늘날까지 한국인들은 거문고를 한국의 중심 전통 악기로 계승 발전시켜왔다. 고구려 멸망 후 거문고는 전라북도 남원 지역에 거주하던 고구려 유민에게서 전수돼 온 한반도로 퍼져나가 계승됐다고 한다. ㅡ 출처 : 위키ㅡ 옥보고는 고구려의 거문고에 많은 곡들을 붙여 명실상부한 한반도 전체의 악기로 확립하는 역할을 했다. 고구려의 악기를 사용하는 나라는 세계 어디에도 없다. 오직 한국뿐이다. 한국은 분명 고구려의 음악을 계승한 나라이다.
6.해서탈춤(복식)
한국의 황해도 일대에서 전승돼 오는 봉산 탈춤과 같은 춤들은 본래 해서 탈춤에서 유래했다고 알려져 있다. 봉산탈품은 약 200년 전 생겼지만 그 연원은 훨씬 오래 전인 고구려까지 추측해볼 수 있다. 봉산 탈춤의 춤사위는 무용총에 그려진 한삼을 손목에 잡고 춤을 추는 고구려인의 춤사위와 매우 닮아있다. 한국 춤에만 남아있는 한삼은 부드러운 선을 표현하는 춤 도구로서 한국 이외에는 없는 매우 독특한 춤 도구이다. 어떤 방식으로든 한국인의 느린 3박자의 전통 춤사위는 고구려인의 춤과 관련이 있다고 보아야 옳을 것이다.
7.온돌
오늘날 세계적으로 퍼져있는 온돌은 본래 부여와 고구려 등 만주와 북부 한반도에서 쓰이던 난방 장치였다. 이후 한반도 전역으로 전파됐다. 이 특이하면서도 매우 효율적인 장치 온돌은 일본이 빼앗아간 조선 건물에 하룻밤을 묵던 미국인이 너무나 효과적으로 난방을 하는 조선 건물의 온돌이라는 장치를 보고 오늘날 현대식 보일러의 영감을 얻었다고도 알려져있다. 전 세계인이 지금은 향유하는 이 온돌은 중국, 일본에는 본래 없는 고구려인의 요소를 계승한 한국의 전통적인 난방 장치이다.
*오늘날 고고학적 상황에선 고조선시대 우리 열국중 하나인 북옥저에서 온돌의 기원으로
보는 비중의 무게가 높으며 이 북옥저는 이후 고구려에 흡수되어 고구려의 전통 난방양식으로 나아가 오늘날 우리 고유의 난방으로 현대에까지 이름.
8.별주부전
별주부전은 한국의 대표적인 전통 서사 작품이다. 이 이야기는 김춘추가 연개소문을 만나러 평양을 방문하여 위기에 처했을 때, 목숨을 건질 수 있게 귀띔을 해준 고구려 사람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이다. 별주부전이 고구려에서(아마 신라에서도) 널리 퍼져있는 이야기였던 것으로 보이며, 이후 별주부전은 한국 서사 문학 작품으로 고려, 조선 시대를 거쳐 오늘날 한국에까지 이어져왔다.
이밖에도 문학면에서 고구려는 한국 한문학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한시 황조가, 여수장우중문 시 등 뛰어난 고구려의 한시 작품은 오늘날 한국 한시의 거의 시조격으로 평가받는 작품들이다. 한국인들의 고려, 조선 시대 시기 뛰어난 한문학 실력은 고구려인에게도 물려받은 면이 있다고 할 것이다. 고구려인은 매우 문학적인 사람들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들이 입으로 아님 글로 남긴 여러 서사 문학 작품들과, 벽화에 나타나는 별과 천체에 대한 고구려인의 상상력은 한국인의 우수한 언어 감각, 과학적 상상력 등으로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다고 볼 수 있다.
9.한국성의 '치'
조선조 까지 한국 성에는 ‘치’라는 독특한 구조물이 있었다. 치는 본래 고구려의 성에 있는 시설로 적을 사방에서 포위하여 공격할 수 있는 시설이다. 이러한 시설은 조선조 시기 지어진 수원 화성에도 잘 나타나는데, ‘치성’이라는 구조물로 남아있다. 한국 축성술에는 과거 우수했던 고구려의 축성 기술이 이어져 왔다고 볼 수 있으며, ‘치’와 같은 축성법은 중국, 일본성과는 차별되는 한국의 전통 축성 기술이다. 이러한 축성술의 계승은 당연히 통일 신라, 고려 시대 고구려 축성술을 아는 고구려인들을 통해 전수됐을 것으로 생각된다.
*치는 앞선 요하 고조선 선대 신석기 홍산문화에서 이미 그 원형이 나옴.
10.씨름, 태권도(수박도)
고구려 각저총 벽화에는 현재 한국의 전통 투기 종목인 씨름으로 보이는 힘겨루기 경기 장면이 나온다. 각저총에 나오는 자세로 겨루기를 하는 경기는 한국, 중국, 일본에서 한국의 씨름이 거의 유일하다. 세계에서 고구려의 각저총에 나오는 씨름을 하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 요새 침체기를 맞고 있는 전통 씨름은 본래 한반도 전역에서 널리 행해졌던 전통 투기 종목이었다. 한국의 전통 씨름은 분명 고구려에서 유래한 것이 분명해 보인다. 한국의 국기 태권도의 기원 역시 고구려에서 찾을 수 있다. 안악3호분 벽화에는 마치 오늘날 택껸을 하는듯한 자세로 손으로 무예를 겨루는 장면이 나온다. 수박도는 고려, 조선 시기에도 행해졌고, 오늘날 태권도의 성립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1.삼국, 삼한 -역사기록
중국, 일본의 어느 전통적인 사서도 고구려를 자국의 역사로 기술한 역사서는 없다. 한국의 삼국사기, 제왕운기, 삼국유사 등 고려 시대 쓰여진 사서에서는 고구려를 분명한 한국사의 일부로 기술하고 있다. 이렇듯 사서에 고구려를 자국사로 서술한 것이야말로 고구려가 한국사의 부정할 수 없는 역사의 일부이며 20C 후반에 들어와 중국에 내새운 고구려가 중국사라는 논리가 얼마나 허구적인 것인지를 분명히 꼬집는 증거이다. 이런 사서의 증거 때문에 중국에서도 고구려가 한국사가 아니라는 것을 완전히 부정하지는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ㅡ 가령 중국인들이 쓴 중국어판 위키백과를 보니 조선의 역사의 일부로 고구려를 분명히 기술해 놓았더라.
고종실록 36권, 고종 34년 9월 29일 양력 2번째기사 1897년 대한 광무(光武) 1년
김재현 등 716명이 황제로 칭할 것을 연명으로 상소문을 올리다
우리나라는 지역 경계가 중국과 잇닿아 있고 나라가 나누어지고 통합된 것이 일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신라(新羅), 고구려(高句麗), 백제(百濟) 세 나라는 각각 그 땅의 주인으로 다같이 왕의 칭호가 있었으며 심지어 송양(松讓), 가야(伽倻), 예맥(濊貊), 여진(女眞), 탐라(耽羅) 등의 작은 나라들도 각기 왕으로 불렀습니다. 고려 때 통합하여 다만 묘호(廟號)만 썼으며 본조(本朝)에서는 옛 관습을 그대로 물려받았습니다. 이것은 당(唐) 나라와 송(宋) 나라 이후 그 나라들이 멀리서 존호(尊號)를 견제하였기 때문입니다.
.
그러나 우리나라는 삼한(三韓)의 땅을 통합하여 영토는 사천리를 뻗어있고 인구는 2천만을 밑돌지 않으니 폐하의 신민(臣民)된 사람치고 누군들 우리 폐하가 지존(至尊)의 자리에 있기를 바라지 않겠으며 지존의 칭호를 받기를 바라지 않겠습니까? 옛 것을 인용하여 오늘에 증명하고 여정(輿情)을 참작하고 형세를 헤아려 보아도 실로 시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라건대 폐하는 여정(輿情)을 굽어 살피셔서 높은 칭호를 받아들여 만국에 공표하여 천하에 다시 새로운 관계를 세우신다면 종묘 사직(宗廟社稷)을 위하여 더없이 다행하고 신민에게 더없이 다행이겠습니다."
고종실록 36권, 고종 34년 10월 13일 양력 2번째기사 1897년 대한 광무(光武) 1년
국호를 대한으로 하고 임금을 황제로 칭한다고 선포하다
반조문(頒詔文)에,
"봉천 승운 황제(奉天承運皇帝)001) 는 다음과 같이 조령(詔令)을 내린다. 짐은 생각건대, 단군(檀君)과 기자(箕子) 이후로 강토가 분리되어 각각 한 지역을 차지하고는 서로 패권을 다투어 오다가 고려(高麗) 때에 이르러서 마한(馬韓), 진한(辰韓), 변한(弁韓)을 통합하였으니, 이것이 ‘삼한(三韓)’을 통합한 것이다.
우리 태조(太祖)가 왕위에 오른 초기에 국토 밖으로 영토를 더욱 넓혀 북쪽으로는 말갈(靺鞨)의 지경까지 이르러 상아, 가죽, 비단을 얻게 되었고, 남쪽으로는 탐라국(耽羅國)을 차지하여 귤, 유자, 해산물을 공납(貢納)으로 받게 되었다. 사천 리 강토에 하나의 통일된 왕업(王業)을 세웠으니, 예악(禮樂)과 법도는 당요(唐堯)와 우순(虞舜)을 이어받았고 국토는 공고히 다져져 우리 자손들에게 만대토록 길이 전할 반석같은 터전을 남겨 주었다.
짐이 덕이 없다 보니 어려운 시기를 만났으나 상제(上帝)가 돌봐주신 덕택으로 위기를 모면하고 안정되었으며 독립의 터전을 세우고 자주의 권리를 행사하게 되었다. 이에 여러 신하들과 백성들, 군사들과 장사꾼들이 한목소리로 대궐에 호소하면서 수십 차례나 상소를 올려 반드시 황제의 칭호를 올리려고 하였는데, 짐이 누차 사양하다가 끝내 사양할 수 없어서 올해 9월 17일 백악산(白嶽山)의 남쪽에서 천지(天地)에 고유제(告由祭)를 지내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국호를 ‘대한(大韓)’으로 정하고 이해를 광무(光武) 원년(元年)으로 삼으며,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의 신위판(神位版)을 태사(太社)와 태직(太稷)으로 고쳐 썼다. 왕후(王后) 민씨(閔氏)를 황후(皇后)로 책봉하고 왕태자(王太子)를 황태자(皇太子)로 책봉하였다. 이리하여 밝은 명을 높이 받들어 큰 의식을 비로소 거행하였다. 이에 역대의 고사(故事)를 상고하여 특별히 대사령(大赦令)을 행하노라.
결론> 중세 고려(KOREA)는 이미 삼국시대 고려(고구려) 계승 의식으로 역사관과 영토,문화, 천하관을
가지고 국호를 통해서도 분명히 드러내었고 이후 조선시대에 와서도 고조선 단군과 삼국 시조의
사당을 모시어왔고 이후 근대 시기 고종의 대한제국의 이 대한(大韓)
역시 고구려 백제 신라의 큰 삼한을 이어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이후 임시정부의 대한민국은
이런 대한제국의 국호를 다시 계승해서 오늘날 국민이 주인인 대한민국으로 도도히 이어져 왔군
요. 서토 역시도 지금의 일당 독재 공산당의 동북공정질 쳐하기 이미 고대부터 고구려를
우리 역사로 인식해왔고 이는 여러 문헌 및 금석문등 고고학적 부분에서도 다르지 않는 주지의 사실.
또한 <그 유명한 안양 인쉬(殷墟) 유적 발굴을 총지휘했던 푸쓰녠(부사년·傅斯年)은 일찍이 “상나라는 동북쪽에서 와서 흥했으며, 상이 망하자 동북으로 갔다”고 단정했다. 중국 학계도 이런 쑤빙치와 푸쓰녠의 관점이 가장 정확한 것이라고 인정하고 있다
인쉬 유적에서는 상나라 귀족들의 묘가 발견되었는데, 발굴된 대다수의 시신들이 동북방 인종의 특징을 갖추고 있었어요. 인골들의 정수리를 검토해보니 북아시아와 동아시아인이 서로 혼합된 형태가 나타난 거지. 이것은 황허 중하류의 토착세력, 즉 한족(漢族)의 특징과는 판이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됐어요.”
또하나, 인쉬(은허) 발굴자들이 인정했듯 상나라 사람들이 동북방의 신앙을 존숭했다는 것이다. 즉 상나라 왕실에서 고위층 귀족들에 이르기까지 동북방향을 받들었는데, 이는 고향에 대한 짙은 향수와 숭배를 나타난 것이라는 해석이다.
고려라는 나라. 아울러 지금 영어명으로 불리는 코리아 자체조차 고구려에서 온건데 대체 뭔 개소리냐고 저 미개한 놈들은 . 중국어가 아니고 한자겠지 언어랑 문자도 구분 못하는 븅쉰들 아이고 진짜 삼족오도 모르는 것들이 무슨 고구려를 넘봐 . 주몽 방송할때 이해나 갔냐 볍진들 ㅋ 지네나라 고대 역사사극이니 왜 이해해 보지?ㅋ ㅋㅋ
우리나라는 문물과 예악이 흥행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으며 장삿배가 연이어 내왕하여서 값진 보배가 날마다 들어오니, 중국과 교통하여도 실제로 소득이 없을 것입니다. 거란과 영구히 절교하지 않을 터이면 송 나라와 교통함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하니 따랐다.
<고려사절요 문종 12년>
"(우리나라 할때)나라의 ‘백제천(구다라강:百濟川) 옆에 백제궁(구다라궁; 百濟宮)과 백제사(百濟寺)라는 큰 가람을 지었다. 조메이왕이 구다라궁에서 살다가 서거했을 때 ‘구다라노오모가리(百濟大殯)’로 장례를 치렀다’"
-일본 서기
토쿄대 이노우에 교수
"일본은 고대 한국인이 세운 나라이다. 일본은 임나일본부 설치를 날조했을 뿐 아니라 오오진(應神)왕이 백제계 부여(夫餘) 후왕인 의라(依羅)이며, 기토라 고분의 40대 텐무(天武)왕은 신라 김다수(金多遂)임에도 일본인으로 변조했다. 최초로 일본을 지배한 천황은 백제인의 후손인 15대 오우진(應神·4세기)천황과 16대 닌토쿠(仁德·5세기)천황 부자다. 오우진 천황이 백제 복식을 입었다는 기록이 ‘일본서기’에 나온다. 이들 천황 부자에 의해 고대 일본의 가와우치(河內)왕조가 세워졌다.
USA캘리포니아대학 제러드 다이아몬드 교수
고대 한국인의 선조가 일본의 원주민 [조몬인],[야요이인(한국을 제외한 대륙민족)], [아이누족]을 정복하므로서 일본이라는 나라를 탄생 시켰다.
카큐슈우인대 오오노 스즈무 교수
"한국인은 일본인에게 금속 사용법을 가르치고, 야금·금공 기술을 전했으며,
염색·피혁제조·베틀 직조·기와 제조·의학·역법·천문학·조불(造佛)·사찰 건축·조탑 등 모든 것을 가르쳤다”(‘日本語の 世界’, 1980)
요즘보면 나라가 짱깨에 사대의 예를 지키려고 염ㅡ병을 하는 것 같음 진짜...
일본이 500년의 적이라면 짱깨는 한반도 역사의 처음부터 끝까지의 적일것임;
중국가서 굴욕외교하고 외교부가 국방부도 안통하고 지 맘대로 이것 안하겟습니다, 저것 안하겟습니다, 말 잘듣겟습니다. 이런 말 씨ㅡ부리고 오고 대통령은 짱꺠년들 앞에서 한국보고 작은나라라고 하지않나 ㅋ
성덕왕(聖德王) 30년,
일본국 병선 300척이 바다를 건너 우리의 동쪽 변경을 습격하였는데, 왕이 장수를 시켜 군사를 내어 이를 크게 깨뜨렸다. (日本國兵船三百?, 越海襲我東邊, 王命將出兵, 大破之.)
- 제대로 상륙도 하지 못하고 박살난 일본, 결국 용서를 빌기 위해 서기 742년에 사신을 파견하지만‥
애장왕(哀莊王)
5년 여름 5월에 일본국이 사신을 보내와 황금 300량을 바쳤다. (五年夏五月, 日本國遣使, 進黃金三百兩.)
- 이를 기특하게 여긴 신라는 드디어 일본을 용서하고 속국으로서 인정한다. 서기 806년 속국에게 하교하는 신라.
애장왕(哀莊王) 7년,
봄 3월에 일본국 사신이 왔으므로 조원전(朝元殿)에 불러 접견하였다. 교서를 내려 말하였다. 『절을 새로 짓는 것을 금하되, 다만 수리하는 것은 허락한다. 또 수놓은 비단을 불교 행사에 사용하는 것과 금과 은으로 만든 그릇의 사용을 금한다. 마땅히 담당 관청으로 하여금 이를 널리 알려 시행하도록 하라.』(七年春三月, 日本國使至, 引見朝元殿. 下敎禁新創佛寺, 唯許修葺. 又禁以錦繡爲佛事, 金銀爲器用, 宜令所司, 普告施行.)
- 사찰을 수리하는 것조차 '종주국' 신라의 허락이 없으면 감히 하지 못했던 일본. 이후 '속국' 일본에 대한 종주국 신라의 사랑은 계속되고… 신라의 어버이와 같은 사랑에 감동한 일본은 서기 882년, 보답한다.
헌강왕(憲康王) 8년,
여름 4월에 일본국 왕이 사신을 보내 황금 300량과 야광주[明珠] 10개를 바쳤다. (八年夏四月, 日本國王遣使, 進黃金三百兩·明珠一十箇.)
성종 28권, 4년(1473 계사 / 명 성화(成化) 9년) 3월 13일(계묘) 3번째기사
일본국 경극전 경조윤 좌좌목씨 등이 사람을 보내 와서 토의를 바치다
중국의 동쪽에 신라라는 나라가 있는데,
그곳에 들어간 사람은 공기가 맑고 부가 많으며 땅이 기름지고 물이 좋을 뿐만 아니라, 주민의 성격 또한 양순하기 때문에 떠나려 하지 않는다
-창세와 역사서<마크디시(al-Maqdi shi>
그곳(신라)을 방문한 사람은 누구나 정착하여 나오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곳이 매우 풍족하고 이로운 것이 많은 데 있다.
그 가운데서도 금은 너무나 흔해 그곳 주민들은 개의 사슬이나 원숭이의 목테도 금으로 만든다.
-이드리시(이슬람 지리학자)-1154년에 신라가 포함된 지도를 만듬
신라는 중국의 맨 끝에 있는 대단히 좋은 나라다.
그들의 집에 물을 뿌리면 용연향(龍涎香 - 아주 좋은 향기)이 풍긴다고 한다.
전염병이나 질병은 드물며 파리나 갈증도 적다.
다른 곳에서 병에 걸린 사람이 그곳에 오면 곧 치유된다.
-무슬림이 남긴 것이라고만 전합니다-
중국 저쪽에 산이 많은 ‘신라(Shila)’라는 나라가 있는데
금이 풍부하고 물 맑고 공기가 좋아
한번 간 무슬림은 돌아오지 않는다
후르다드베(Ibn Khurdadbeh)의 '제 도로와 왕국 총람' (이슬람)
신라 서라벌에는 약 17만호의 가구가 있었다. 이는 대략 90만-100만의 인구가 거주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훗날 조선의 한양보다 4-5배나 더 많은 인구가 살았던 것으로, 혹자는 콘스탄티노플, 바그다드, 장안과 함께 서라벌을 당시 세계 4대 도시로 꼽는다.
인구가 많다고 세계적 도시로 꼽는 것이 아니다. 신라, 특히 서라벌에는 초가집이 없이 모두가 기왓집이었다. 온통 금으로 뒤덮은 집도 수십채나 되었다. 그들의 부유함을 짐작할 수 있다. 여기서 또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신라는 차도와 인도가 나란히 잘 정비된 도로를 갖추고 있었다는 점이다. 인도 옆에 마차가 수월하게 다닐 수 있도록 바퀴 자국에 맞춘 도로의 흔적이 아직까지도 뚜렷이 남아 있다. 그리고 그 도로 옆으로는 배수구의 흔적도 함께 남아 있다.
우선 서민층 거주 지의 경우, 집집마다 우물 하나씩을 소유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발굴을 통해 밝혀졌다. 이처럼 서민층에서도 각 집마다 우물을 하나씩 갖고 있을 정도면, 당시의 서라벌이 얼마나 위생이 청결한 곳이었는지 충분히 짐작해 볼 수 있다. 당시에는 온돌을 사용하지 않고 숯으로 난방을 했는데 이를 뒷받침 해주기라도 하듯, 대규모의 숯 가마가 발견되기도 했다. 숯으로 난방을 할 경우, 매캐한 냄새가 나지 않고 그을음도 생기지 않으니 당시 사람들의 주거환경은 상당히 쾌적했을 것이다. 상류층 거주 지역의 경우에는 본채 건물 외에도 별채와 화장실까지 구비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처럼, 계획적으로 잘 정비된 도시였던 서라벌은 마치 바둑판과도 같은 형태로 도시 주거지를 이루고 있었는데, '방'으로 나뉘어지는 이러한 거주 구역은 한 방당 약 8천평 규모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골목마다 출입문이 있어 치안상태도 좋았다. 그래서 '몇번째 골목, 몇번째 집' 하는 식으로 주소만 알면 집을 찾는 일도 매우 쉬웠다. 따라서 인구조사 또한 치밀하고 완벽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가구당 가축의 수까지 세세히 기록해 놓았다.
천년 전의 도시가 오히려 지금의 대도시보다 더욱 계획적으로 잘 정비되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KBS 역사 스페셜>
역사 전쟁 이거 장난아니에요. 한국식민빠 떼문에 고구려도 중국역사로 인식 되버렸어요. 그리고 환빠들도 도움 안됌. 일본.차이나. 그리고 미국.영국에서도 고구려가 한국역사 아니라고 합니다. 이거 심각한 문제임. 그냥 북칸을 이젠 중궈에 넘길날만 남았음니다. 벌서 부요.백제 도 한국역사 아니라고 식빠들이 외국에도 설쳐고 있네요. 신라역사도 한국역사 아니라고 하는 한심한 넘들도 있음. 그럼 남은역사는 고려.조선.
노예의 역사는 한족의 역사고 ㅋㅋㅋㅋㅋㅋㅋㅋ 지금와서 그동안 오랑캐 취급을 하던 놈들을 중화민족이니 뭐니 하면서 허구의 개념으로 한족과 묶으려고 하는 것 같다만 역사적으로 계속 소수민족과 한족과 분리되서 봐줘왔으며 근대 시기에도 멸만흥한을 부르짖는 등의 부정할 수 없는 증거가 널렸구만 노예로서 한족의 역사에 대해서 부정하기 바쁘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일단 고조선이라는 말부터 고쳐야됨 정확히 시대를 구분하는 古자를 국호앞에 붙인게 잘못임 그럴려면 이성계가 세운 국호를 후조선이나 근대조선으로 해야 맞음 그러면 저 짱깨들이 말하는 고조선이나 고구려가 우리의 역사가 아니라는 뻘짓을 못함.
저 영상에서도 말하듯이 고조선이라 말하면 그게 국호인지 앎
처음부터 조선이라고 하면 후대의 조선을 보고 아~! 새로운 나라가 아니고 예전의 조선이 다시 부활했다는 생각을 하게 될것임
그리고 저기 짱깨가 말하는 한문으로 쓰여진 우리의 역사는 중국어가 아님 왜? 그건 지덜이 더 잘앎 지금의 일반짱깨는 한문으로 씌여진 고서를 읽을줄 모르는것은 매한가지임.
그 경계선의 서북쪽은 당나라 이래로 압록강을 경계로 하였고, 동북쪽은 선춘령을 경계로 하였다.
대개 서북쪽은 고구려에 미치지 못하였으나 동북쪽은 고구려의 경계를 넘었다.
-《고려사》
중세 고려
우리나라는 문물과 예악이 흥행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으며 장삿배가 연이어 내왕하여서 값진 보배가 날마다 들어오니, 중국과 교통하여도 실제로 소득이 없을 것입니다. 거란과 영구히 절교하지 않을 터이면 송 나라와 교통함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하니 따랐다.
<고려사절요 문종 12년>
근자에 사신이 그곳에 가서 물어보고 알았지마는, 임천각(臨川閣)에는 장서가 수만 권에 이르고, 또 청연각(淸燕閣)이 있는데 역시 경(經)ㆍ사(史)ㆍ자(子)ㆍ집(集) 4부의 책으로 채워져 있다 한다.국자감(國子監)을 세우고 유관(儒官)을 선택한 인원이 완벽하게 구비되어 있었으며, 횡사(黌舍 학교를 말함)를 새로 열어 태학(太學)의 월서계고(月書季考)하는 제도를 퍽 잘 지켜서 제생(諸生)의 등급을 매긴다. 위로는 조정의 관리들이 위의가 우아하고 문채가 넉넉하며, 아래로는 민간 마을에 경관(經館)과 서사(書社)가 두셋씩 늘어서 있다. 그리하여 그 백성들의 자제로 결혼하지 않은 자들이 무리지어 살면서 스승으로부터 경서를 배우고, 좀 장성하여서는 벗을 택해 각각 그 부류에 따라 절간에서 강습하고, 아래로 군졸과 어린아이들에 이르기까지도 향선생(鄕先生 자기 고장의 글 가르치는 선생)에게 글을 배운다. 아아, 훌륭하기도 하구나!
-송나라 서긍의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 1123년의 내용)-
왜국은 일본국이다.
본래 이름인 왜를 부끄러워 했는데, 극동에 있어서 스스로 일본이라 부른다.
지금 고려에 신하로서 속하고 있다.
-도화견문지(1080년경에 송나라의 곽약허가 지은 책)
“옛 사서(역사책)에 따르면 고려의 풍속은 사람들이 모두 깨끗 하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지금도 여전히 그러하다.
그들은 항상 중국인이 때가 많은 것을 비웃는다.
(고려인들은) 아침에 일어나면 먼저 목욕을 한 뒤 집을 나서며,
여름에는 하루에 두 번씩 목욕을 한다.” -고려도경
(윤 5월) 갑자일에 거란에서 오윤판관 야율골타를 파견하여 동북 여진으로 가는 길을 빌려달라 하였으나 이를 승인하지 않았다.
-고려사 5권, 현종 17년
(원풍 5년) '선조 시기에는 여진이 등주에 와서 항상 말을 팔았는데, 뒤에 마행도가 고려에 속하게 되어 막혀서 끊겨 오래도록 오지 않았다고 들었다.
지금 조정이 고려와 왕래를 하는 데, (고려)왕에게 조서를 내려 여진이 만일 중국에 말을 팔고자 하는 자가 있으면, 마땅히 길을 허락하도록 하겠다.'라는 조서를 내렸다. 그러나 끝내 여진의 사신은 오지 않았다.
-속자치통감장편
동북면병마사가 다음과 같이 건의했다.
“삼산·대란·지즐 등 9개 촌락 및 소을포촌의 번장 염한과 소지즐의 전리 번장 아반이와 대지즐의 여나기나오, 안무이주의 골아이 번장 소은두 등 1238호가 와서 호적에 편입시켜 달라고 요청해 왔습니다. 대지즐로부터 소지즐 요응포 해변까지는 700 리에 걸쳐 장성이 수축되어 있으며 지금 오랑캐들이 줄을 이어 귀부해오고 있는 마당에 관방을 설치하여 그들을 막아서는 안 됩니다. 해당 관리로 하여금 주(州)의 명칭을 정해 보고하게 한 후 밀봉한 공문을 내려 주십시오.”
왕이 이를 허락했다.
-《고려사》, 문종 27년 6월
한림원에서,
“동여진의 대란 등 11개 촌락에서 귀부해온 자들이 자기들의 거주 지역을 빈주·이주·복주·항주·서주·습주·민주·대주·경주·부주·완주 등 11개 주로 정해줄 것을 요청해 왔으니 그들에게 각각 밀봉된 공문을 내려 귀주와 순주에 소속시켜 주십시오.”
라고 건의하자 왕이 이를 허락했다.
-《고려사》, 문종 27년 9월
서북면 병마사가 아뢰기를,
"서여진의 추장 만두불 등이 동번(동여진)의 예에 의하여 주•군을 나누어 설치해 달라고 청하며
평로진 근처의 유원 장군 골어부 및 멱해촌의 요결 등 역시 부적하여 영원히 번병이 되겠다고 원하므로 호수가 35호이고 인구가 252명입니다. 청컨대 판도에 등재하소서."
-《동국통감》, 문종 27년 5월
동북면 병마사가 아뢰기를,
"삼산, 대란, 지즐 등의 마을 번장이 1238호를 가지고 와서 부적해주기를 청하니, 청컨대 유사로 하여금 주호를 아뢰어 정하게 하고 또 주기를 내리소서."
-《동국통감》, 문종 27년 6월
서북면 병마사가 아뢰기를,
"장성 밖에 개간한 전답 11494 경은 청컨대 가을 수확을 기다려 군량에 보태게 하소서."
하니, 제가하였다.
-《동국통감》, 문종 27년 2월
송을 멸망시키고 서토를 지배하기 위해
북경에 세운 중도(중도대흥부 (中都大興府)) 건설의 총지휘자.
금나라 국무총리격인 장호(張浩)
금나라 요양(遼陽) 발해(渤海) 사람. 자는 호연(浩然)이고, 본성은 고(高)씨다. 경사(經史)에 정통했고, 특히 시에 뛰어났다. 태조에게 책략을 올려 어전문자(御前文字)를 담당하도록 명받았다. 태종 천회(天會) 8년(1130) 진사급제를 인정받고 비서랑(秘書郞)에 올랐다. 해릉왕(海陵王) 때 호부상서(戶部尙書)와 참지정사(參知政事), 상서우승(尙書右丞), 평장정사(平章政事), 상서령(尙書令)을 역임했고, 연경(燕京)의 성곽과 변경(汴京)의 궁실을 증축하는 일을 전담했다. 세종(世宗) 때 태사(太師)와 상서령을 지냈다. 저서에 『화표산인집(華表山人集)』이 있다
러시아과학원 극동지소 역사학고고학민족학연구소 아르쩨미예바 연구원은 17일 인천광역시 인하대 60주년 기념관에서 인하대 고조선연구소 주최로 열린 학술회의 발표를 통해 "요(遼)나라나 금나라의 유적으로 알려졌던 수류봉(峰) 산성(山城)에서 전형적인 한국식 타날(打捺·두드림) 문양의 기와들을 발견했다"며 "이 산성은 출토 유물과 성벽 축조 기법으로 보아 조선 초기에 6진 설치로 북쪽 국경이 확정될 때 방어 전초기지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고 주장했다.
수류봉 산성은 연해주 하산 지구의 중국과 러시아 국경에 위치해 두 나라에 걸쳐 있다. 전체 둘레 길이는 727.5m이고 높이는 1.5~2m이다. 러시아 조사단은 작년부터 남문 터 안쪽에 4개의 초석이 있는 구역을 발굴했다. 두드려 낸 반호(半弧) 모양의 문양을 가진 기와와 옹기 조각이 대량 나왔고, '대왕(大王)'이란 한자 명문(銘文)도 발견됐다. 아르쩨미예바 연구원은 "수류봉 산성은 연해주 일대의 요·금나라 성벽과는 구조와 유물이 다르다는 데 중국 학자들도 동의하고 있다"고 말했다
금나라 황릉의 모델은 고려 황릉(왕릉)이었다.’ 12세기 북중국을 장악했던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1115∼1234) 황릉이 고려 황릉과 형제처럼 꼭 닮았다는 비교 연구가 국내에서 처음 나왔다. 금 태조 완안아골타(1068∼1123)가 10세기에 건국한 고려를 ‘부모의 나라’라고 불렀던 것을 감안하면, 당대 사회적 문화적 역량을 총집결시켰던 국책사업인 황릉 조성을 한반도에서 벤치마킹했던 것이다
장경희 한서대 문화재보존학과 교수는 최근 학술지 ‘동방학’에 게재한 논문 ‘12세기 고려·북송·금 황제릉의 비교 연구’에서 “고려와 금 황릉은 양식적으로 매우 유사하며 같은 시기 북송 황릉과 뚜렷이 구별된다”고 주장했다.
1073년과 74년 <고려사>는 서양에서는 관측하지 못한 ‘신성’ 기록을 남겼다. 그뿐이 아니었다. 1592~94년 사이에도 역시 서양인들의 눈에 띄지 못한 객성을 4개나 관측했다. 특히 한 개의 객성은 15개월간 두 번의 연속된 기간에 걸쳐 관측됐다. 이 객성을 끈질기게 관측한 조선 천문학자들은 이 별은 나타났다 사라지는 신성이나 초신성이 아니라 고정별(항성)이라 판단했다. 그 판단은 옳았다. 그 별은 신성이나 초신성이 아나라 자체적으로 별이 밝아졌다 어두워졌다를 반복하는 변광성이었다. 이뿐이 아니다. 조선의 천문학자들은 1572년 덴마크의 천문학자 티코 브라헤가 관측한 이른바 ‘티코 초신성’도 동시에 보았다. 또한 1604년 독일의 천문학자 요하네스 케플러가 발견했다고 해서 ‘케플러 초신성’이라 명명된 초신성도 관측했다. 오히려 케플러보다 4일이나 먼저 관측하는 개가를 올렸다.
야인과 왜인들은 모두 우리의 번리이고 우리의 신민이니 왕된 자는 똑같이 대우하고 차별을 없이하여 혹은 무력을 사용기도하고, 내가 즉위한 이후에 남만, 북적, 이것은 하늘의 끌어들이는 바이지, 나의 슬기와 힘이아니다. 흑룡강, 속평강, 건주위, 올량합, 이만주 동창등 심처 야인과 삼위 달자가 관문을 두드리고 입조하기를 청하거든, 그 종인을 줄여서 후대하여 올려보내라
단종 10권, 2년(1454 갑술 / 명 경태(景泰) 5년) 1월 6일(무오) 5번째기사
김우을두합 등이 야인들이 세조를 알현하고자 원함을 아뢰다
요동 도사(遼東都司) 왕상(王祥)이 말하기를, ‘요동사람들이모두말하기를,
「수양대군(首陽大君)은 대장(大將)의 의모(儀貌)가 있었는데, 이제과연 발란 반
정(拔亂反正)2142) 하였다.’ 하고 탄상(嘆賞)하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그때 세조(世祖)가 농사에 힘쓰고 학교를 일으키고 군사를 양성하기를
일삼아서, 궁병(弓兵) 백만을 길러 오랑캐[夷狄]를 제압하려고 결심하고 진법(陣
法)을 익히고 군사를 훈련하니, 왜인과 야인들이 모두 위덕(威德)을 흠모하여 다
투어 와서 조현(朝見)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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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 40권, 12년(1466 병술 / 명 성화(成化) 2년) 11월 2일(경오) 3번째기사
시무8조에 관한 대사헌 양성지의 상소문
우리 나라의 인민(人民)은 무려 1백만 호(戶)나 되는데 그 중에서 활을 잘 쏘는
병졸이 30만 명이고, 정예(精銳)한 병졸이 10만 명이며, 용감한 군사가 3만 명입
니다.
대개 성곽을 쌓을 때 높은 산을 베고 있다. 가끔 언덕이나 산기슭을 나와,
또한 구불구불 둘러 있는 것이 보인다. 큰 것이 날아갈 듯 치첩이 솟아 있고,
작은 것도 우뚝하게 표관이 웅장하다.
환취(황해도 봉산군에 있는 누각)는 날아갈 듯 아름답고, 총수(산 이름)는 구름이 이어졌다.
보산(관<關> 이름)에는 서기가 날아오르고, 금암(관<關> 이름)에는 시내가 통과한다.
[개성은] 봄바람에 술집 깃발이 나부끼고, 달밤에 음악소리 들린다.
그 민물(民物)은 풍성하여 실로 다른 고을에 비길 것이 아니고,
풍기(風氣)는 밀집하니 또한 서경(평양)에 견줄 바가 아니다.
[서울은] 트인 길과 통한 거리는 바르고 곧아서 구부러짐이 없고,
잘라낸 듯한 처마에 우뚝 빛나는 집이다.
모든 집은 높은 담이 있어서 바람과 불을 막고,
방마다 북쪽 창을 뚫어 더위를 피한다.
[서울에는] 종고라는 다락이 있다. 성 안의 네거리에 있는데 매우 높고 크다.
서울 안에 우뚝 솟았고, 길가에 높고 높도다.
시끌벅적 수레와 말 소리가 울리고, 끝없이 어룡 유희가 나온다.
식기는 금, 은, 동, 자를 섞어서 쓰고, 품물(品物)은 바다와 육지의 진기한 것이 고루 많다.
경기 안의 경치로는 한강이 제일이다.
누대는 높아 구름을 막고, 물은 푸르러 거울처럼 비춘다.
나루로는 양화도가 있는데, 물산(物産)이 또한 번성하다.
활은 중국의 제도에 비하면 조금 짧다. 그러나 화살은 매우 잘 나간다.
-명(明)의 동월(董越)이 1488년의 조선을 보고 1490년에 쓴 조선부[朝鮮賦]-
이 나라는 풍요하여 많은 쌀과 보리가 나고, 과일로는 배, 호두, 무화과, 밤, 사과, 잣,
그리고 무진장한 꿀, 약간의 비단, 다량의 면화와 베를 생산하고 있다. 지하자원으로는
금과 은 광산은 적다고 한다. 하지만 많은 말과 소, 양질의 노새, 당나귀, 게다가 전 국토에 걸쳐
수많은 호랑이가 서식하고, 그 밖에 갖가지 다양한 동물이 있다. 그들이 만든 공작품은
정교하고 아름다워서 그들이 솜씨가 좋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 사람들은 피부색이 하얗고
건강하고 대식가들이며 힘이 세다. 그들은 터키 인의 활과 같은 작은 활을 매우 잘 다루고,
독을 바른 화살을 사용한다고 한다.
역대의 조선 국왕들은 가장 훌륭하고 중요한 도시에 큰 궁전을 지었는데,
그곳에 수많은 가신을 거느린 관청이 있었다. 서민들의 집은 대부분 기와지붕이며,
그 밖에는 초가지붕으로 그다지 청결하지는 않다. 그렇지만 귀인과 부호들은
결이 고운 식물로 짠, 정교한 장식이 있는 극히 질 좋고 광택이 나는 돗자리를
집안에 깔고 있는데, 일본인이나 일본에 오는 포르투갈 인들은 그것을 매우 진귀하게 여겼다.
우리는 나가사키에서 조선으로부터 들여온 몇 벌의 백의를 보았는데, 그 옷에는
더할 나위 없이 섬세하게 공을 들인 자수를 해 놓았다. 그것은 어떤 부분은 짠 것인지
아니면 실과 바늘로 꿰맨 것인지 여간한 시력이 아니고서는 구별이 불가능 할 정도였다.
이상의 내용들이 조선을 여러 차례 방문했던 사람들을 통해 관백의 궁정이
조선에 대해 입수했던 정보의 요약이다.
-루이스 프로이스(Luis Frois, 1532~1597년)의 일본사(Historia de Japam)-
[개성은] 봄바람에 술집 깃발이 나부끼고, 달밤에 음악소리 들린다.
그 민물(民物)은 풍성하여 실로 다른 고을에 비길 것이 아니고,
풍기(風氣)는 밀집하니 또한 서경(평양)에 견줄 바가 아니다.
-명(明)의 동월(董越)이 1488년의 조선을 보고 1490년에 쓴 조선부[朝鮮賦]-
3,300여칸에(혹2600여칸) 달하는 시전행랑이 1414년에 완성했습니다.
이제 조선을 건국한 시점이고...조선 후기보다는 고려시대와 가까웠던 시절입니다.
그리고 동월이 본 술집깃발은 고려시대의 문화입니다. 그리고 조선 전기에도 짧은 기록에까지 남아있을 정도로 여전히 번성했음을 알 수 있고, 당시 개성이 매우 발달했음을 알 수 있군요.
세종실록 28권, 세종 7년 6월 23일 신유 6번째기사
전 판나주목사 정수홍(鄭守弘)의 진언은,
"전조(前朝) 사재(司宰)의 어물고(魚物庫)가 송도에 있었사온대, 겨우 단층 3간뿐이었사오나, 그래도 5백 년 동안 국가에서 소용되는 데 모자란 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사재감에는 이층 창고가 서너 채가 있어 높고 크기가 굉장하오나, 그래도 다 들여넣을 수 없어서 가창고(假倉庫)를 많이 짓기까지 하였습니다."
성중의 사찰이 민가보다 더 많았으며, 그 중에도 크고 웅장하며 높고 특출한 전각은
지금까지 오히려 그대로 남아 있으니 그 당시의 존숭함이 지극하였던 것을 상상할 수 있다.
-연복사탑 중창기(演福寺塔重創記, 1393년)-
십천교(十川橋)를 지나 연복사(演福寺)에 이르니 절 가운데 5층 누각이 높이 솟아
주위의 성문을 누르듯이 서 있었다. 누각의 벽면과 모서리에 채색 그림이
그려져 있는 참으로 웅장한 건물이었다.
-유송도록(遊松都錄, 1477년)-
(5월 3일) 술시(戌時) 조선의 도읍 동대문으로 진입, 거기서 황성(皇城)의 모습을 바라보니 옥루금전(玉樓■x殿) 늘어선 기와집,
널따란 성벽들의 조형미는 극치에 달하고 수천만 헌(軒)과 늘어선 대문들, 보귀로운 모습은 이루 말로 다할 길이 없다.
그런데도 막아 싸우려는 병사들은 보이지 않고 대문은 굳게 닫혀 있어 온통 적막하였다.
(중략) 내리(內裏) 안으로 들어가 보니 궁전은 텅 비었고 사대문은 제멋대로 열려있었다.
그제야 전각을 자세히 살펴보니 궁궐은 구름위에 솟아있고 누대는 찬란한 빛을 발하여
그 아름다운 모습은 진궁(秦宮)의 장려함을 방불케 하더라.
(중략) 후궁(後宮)에는 화장품 향기가 감돌고 산호의 대상(臺上)에는 화려한 거울이 덧없이 남아있다.
난 향기는 전각 밖까지 풍기고 사람 살던 자취도 그렇거니와 하염없는 구슬로 장식한 침상들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건물마다 문이 열려 있고 궁문을 지키는 자 없으니 어디를 보아도 처량하기 짝이 없다.
그토록 용맹한 고니시도 천자(天子)의 옥좌(玉座)에 절을 하고 신성하고 고아한 분위기에 휩싸여 두 눈에 눈물이 괴니
소오스시마, 아리마, 오무라도 따라 눈물을 흘리었다.
-에도시대의 문헌 "조선정벌기 (朝鮮征伐記)"에서-
동아시아 선진 조선의 불꽃축제
정종 1권, 1년(1399 기묘 / 명 건문(建文) 1년) 6월 1일(경자) 6번째기사
일본국 사신들에게 군기감으로 하여금 불꽃놀이를 베풀게 하여 구경시키다
일본국(日本國) 사신이 예궐(詣闕)하니 주식(酒食)을 하사하고, 날이 이미 저물게 되자, 군기감(軍器監)으로 하여금 불꽃 놀이[火戲]를 베풀게 하여 구경시켰다. 왜사(倭使)가 놀라서 말하였다.
“이것은 인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천신(天神)이 시켜서 그런 것이다
◈성종 32권, 4년( 1473 계사 / 명 성화(成化) 9년)
일본국 인백단 삼주 태수 원교풍이 양영서당을 보내어 선물과 글을 올리다
일본국(日本國) 인백단 삼주 태수(因伯丹三州太守) 산명전(山名殿) 소필(少弼) 원교풍(源敎?)이 양영 서당(亮瑛西堂)을 보내어 와서 토의(土宜)를 바치고, 아울러 사서(四書) 각각 1건(件)씩을 바쳤다. 그 서계(書契)에는 이르기를,
“공경히 생각하건대, 황제 폐하(皇帝陛下)께서 보위(寶位)에 오르시어 천운(天運)을 이어받으시니, 구방(舊邦)이 유신(維新)하며, 덕(德)이 하(夏)나라·은(殷)나라의 초정(初政)보다 뛰어나시고 도(道)가 요(堯)임금·순(舜)임금보다 위에 짝하시니, 지극히 축하하고 지극히 축수합니다. 신은 선조(先祖) 이래로 가세(家世)에서 상국(上國)3198) 에 빙문(聘聞)을 통하지 아니한 적이 없기 때문에, 경인년3199) 가을에 일개 암자승(菴子僧)과 석도문(奭都聞) 등을 차견(差遣)하여서, 옛날의 맹세를 닦으며, 또 토의(土宜)의 미미한 정성을 바쳤습니다. 다행히 금상 황제(今上皇帝)3200) 께서 왕위(王位)를 이어받으시는 초정(初政)을 만나서, 눈으로는 한(漢)나라 관리의 위의(威儀)를 보겠고, 귀로는 주(周)나라 시(詩)의 가송(歌頌)을 듣겠으니, 아아, 성대(盛大)합니다. 실로 문무(文武)의 나라인지라 영우(榮遇)하기가 너무나 크옵니다. 전사(專使)3201) 가 일을 끝마치고 동쪽으로 돌아오게 되매, 화로 동반(火爐銅盤) 1개와 동경(銅磬) 1개를 더하여 내려 주시니, 이미 후한 은혜를 받았으므로, 감격하고 기쁜 마음이 지극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지금 만복사(萬福寺)의 주지(住持) 양영 서당(亮瑛西堂) 등을 보내어 바다를 건너가서 박(薄)한 폐물(幣物)을 바치어 오로지 황제께서 왕위를 이으신 것을 배하(拜賀)하게 합니다.신은 비록 먼 하늘, 먼 바닷가의 땅에 있어서 위궐(魏闕)3202) 아래에 달려가 마음을 바치지는 못하나, 구구(區區)한 단성(丹誠)3203) 을 엎드려 예찰(睿察)하여 주시기를 빌며, 그리하여 주시면 천만 다행이겠습니다.
신의 봉지(封地) 안의 백주(伯州)에 만복 선사(萬福禪寺)라고 하는 옛 사찰(寺刹)이 있는데, 허물어져 무너진 지가 세월이 오래 되었으므로 장차 다시 영조(營造)하려고 하여, 저번 때에 상국(上國)에 조연(助緣)3204) 을 구(求)하였으나, 너그러이 용납하여 주심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바라는 바는 대왕께서 관인(寬仁)으로써 포금(布金)3205) 의 봉시를 속히 행하여 주시면, 불각(佛閣)과 승방(僧房)을 일시에 다시 옛날처럼 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길이 성수(聖壽)가 만안(萬安)하시도록 봉축(奉祝)하는 일단이 될 것입니다. 하정(下情)3206) 은 지극히 황공함을 이기지 못하여 변변치 않은 방물(方物)을 별폭(別幅)에 갖추었습니다.”
조선과 같은 먼 극동의 나라에서 우리가 경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아주 가난한 사람들의 집에도 책이 있다는 사실이며, 이것은 선진국이라고 자부하는 우리의 자존심마저 겸연쩍게 만든다. 조선 사회에서 문맹자들은 심한 천대를 받기 때문에 글을 배우려는 애착이 강하다. 프랑스에서도 조선에서와 같이 문맹자들을 가혹하게 멸시한다면, 경멸을 받게 될 사람이 허다할 것이다.
잉글랜드 100, 조선 134, 중국(강소성, 절강성) 191.
중국전체의 평균 총요소생산성은 191 이하일 것이나 이 역시 잉글랜드보다 高.
◇ 1인당 GDP 비교(조선 vs. 중국)
1820년 1인당 GDP - 중국: 600달러, 조선: 600달러
┃중국의 1인당 GDP 추이
- 인구의 비약적 증가로 인해 1500년부터 320년간 600달러 수준.
- 1870년 530달러로 추락.
- 1920~30년대 550달러대에서 등락을 반복.
┃조선의 1인당 GDP 추이
- 1870년 604달러로 반등
- 1911년 777달러(아시아 2위)
- 1917년 1,021달러
- 1939년 1,459달러
조선의 생활수준은 16세기말부터 상승하여 18세기 영·정조시대(1724~1800)에 정점을 기록한 후 하락.
- 16~17세기에는 중국보다 낮을 수 있으나 18세기 중국을 추월.
- 19세기(1820년)에는 다시 중국과 비슷한 수준.
◇ 조선의 교육복지
┃세종치세(재위 1418~50) 이후 18세기까지 지방향교, 사학(四學), 성균관 등 모든 유생들에게 무상교육, 무상숙식, 학비지급, 학전(學田)지급, 면세 및 요역면제.
- "가르침에는 차별이 없다"는 「논어」의 유교무류(有敎無類)의 원칙에 따른 것.
삼성경제연구소가 "2050년까지 외국인노동자 1159만명 이주시켜야 한다"고 주장한 이래
역대 정부가 그 말대로 외국인 정책을 실시해
국내 외국인 수가 연간 20만명씩 증가 추세입니다.
지금 추세대로 가면 국내 외국인 수는 2021년경 300만, 2030년경 500만, 2050년경 천만 돌파합니다.
반면 한국 연간 신생아 수는 노동시장 악화로 인한 미혼율 급감의 결과로, 90년대에 비해 50퍼센트 감소했습니다.
세계역사상 이토록 단기간에 연간 신생아 수가 감소한 나라는 1차 대전 시기 독일뿐입니다.
지금 추세가 이어지면 한국이 100년뒤 티베트처럼 안 되리라 장담할 수 없습니다.
노무현 정부 시기부터 재벌 세력이
"외국인 대량이주 = 시대의 대세, 진보 VS 외국인 대량이주 반대 = 파시즘, 제노포비아, 민족주의.... 민족주의 = 나치 독일처럼 망하는 길"
"일본은 인구 줄어서 망하고 있다. 독일은 외국인 많이 받아들여 잘 나간다. 한국은 일본처럼 안 되기 위해 독일처럼 외국인 대량이주시켜야 한다"
는 날조 프레임을 언론을 통해 덮어씌웠는데,
고구려가 중국의 역사가 되려면 제일 먼저 작업해야 할 내용이
중국의 교과서와 역사서를 모조리 날조해야 되는데 이 한심한 짱깨야 그건 어떻게 설명할꺼냐
일단 팩트는 중국 교과서와 역사서에는 분명히 고구려는 한국 역사라고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
중국의 교과서
중국의 중학교 역사 교과서 제2권 제1과, 고구려를 한국사로 기술
중국의 교과서 세계사 제2권 제 10과.. 고구려를 한국사로 기술
중국의 역사서
전한부터 명나라까지 총 24권에 기록된 중국의 역사서에 고구려는 모두 외국 열전이란 항목에 별도 포함.
중국 고대 역사서
삼국지, 진서, 송서, 남제서, 량서, 수서, 남사, 구당서, 신당서,의 외국 열전에
고구려.부여.동옥저.예.한.백제.신라가 외국열전에 포함되어 외국편에 실려있다.
당나라 고종이 백제 의자왕에게 보낸 편지에 해동3국이라고 고구려.백제.신라.라고 명기.
송나라 역사서 구오대사.오대사기의 외국열전에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 라고 기록.
송나라 서긍의 선화봉사 고려도경에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했다고 기록,
중국 측 문헌인 ’송사’(宋史)의 기록. 송사(宋史) 고려열전(高麗列傳)을 보면
“고려(高麗)는 본래 고구려(高句麗)라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신오대사’(新五代史)에 의하면 당나라 말기에 일어난 큰 혼란을 틈타 고구려 유민이
자립하여 나라를 세웠고 그 나라의 국왕의 성이 고씨라고 기록되어 있다
* 신오대사(新五代史)』중국의 구양수(歐陽修)가 저술한 사서(史書). 74권. 정사(正史)
고려사(高麗史) 제2권 세가2 태조 계사 16년(933) 기록되어 있는 그 내용을 보면
“아! 아! 권지 고려국왕사 ’건’(왕건)은 고구려의 주몽이 건국한 전통을 계승하여 그 곳의 임금이 되었으며..”,
“당신은 동방의 대족이요 해외의 강국으로서 문무의 재주를 가지고 그 지역을 장악하였으며..”,라고 하여
고구려 주몽과 고려의 왕건이 혈족관계에 있었다
이 기록은 중국 후당 명종이 말한 부분을 적은 기록이다
짱깨야 어디한번 날조해봐라! 왜놈처럼 어디 외국이라도 나가서 자국 역사서 토론하다가 쪽팔리는
경우를 당하기 싫으면 그냥 입다물고 살아
고구려는 한자쓰고 한국은 한글쓰니 고구려는 중국역사라고? 당시 백제.신라도 한글 안 썻는데 그 나라들도 중국의 역사냐? 한글이 언제 만들어졌는지 공부하고 짖어라 짱개야 누가보면 한글이 고대사에 만들어진줄 알겠네 지금 니네가 말하는 건 영국이 영어쓰는 모든 나라의 역사는 우리 꺼다 라고 하는거랑 같다 ㅉㅉ
왜곡오지네! 고조선이 한반도 북부일부라고? 그럴바엔 역사로 인정안하든지? 한자를 아직도 중국문자로 알고 있나? (한족도 인정하는 고대동이족문자임) 일부고대역사서엔 흉노를 고조선(고구려 계승)이라고 적고 있고 흉노의 면적만 한의 3배임. 그래서, 이후 선비,거란,몽골,중앙아시아등에서도 단군(약간씩 발음의 차이남),고구려건국신화등을 공유하는 것!
현재 제대로된 교육조차 받지못하고 독재자에게 휘둘려 행동과 생각을 지배당하고 객관적인 사고와 행동이 불가능한 민족이 어딜감히 세계가 어떻고 역사가 어떻고 다른나라에대해 얘기할수있는지 기가막히고 코웃음밖에 안나옴.
니네코가 석자인데 니들이나 걱정하세요. 엄청 큰 우물안에 갇혀서 지들이 최고라 부르짖는 11억마리의 개구리들아.
짜장이 설치고 쪽빠리가 간혹 튀어 나오는 건지.
쪽빠리가 짜장인 척 설치면서 한국인이랑 싸우니까 중국인이 튀어 나오는 건지는..
모를 일 아닌가?ㅋ
유투브에서 깝치는 놈들은 대부분 쪽빠리였는데 중궈들은 솔직히 한국인이 시비를 먼저 거는 측면이 많아서 한국인과 중국인의 분쟁은 사실 한국인 잘못임.
별 다른 이유 없이 중국인에게 시비 걸면서 욕하는 한국인(?)을 많이 봤고 한국, 한국계라는 이유만으로 욕하는 쪽빠리들을 많이 봤었지..
뭐 요즘은 예전보단 눈에 안 띄지만 ㅋㅋ 뭐 모를 일인가? 내가 요즘 인터넷을 많이 안 하니까..
중국 역사 그냥 지배당하는게 자기들의 자랑인 한의 역사 아닌가?
지배당하면서 매일같이 자기들의 역사가 없으면서 남의 역사도 내꺼다라고 웃기는 말만 하니 안타깝다.
니들이 그렇게 찬양하는 마오쩌둥이 중국 역사 다 파괴했는데 왜 니들이 그 파괴한것을 들쳐내면서 가지려고해?
마오쩌둥 무시하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