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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D] 해외네티즌 "5분안에 보는 2천년이 넘는 한국의 역사" 해외반응
등록일 : 18-03-25 16:43  (조회 : 46,355) 글자확대/축소 확대 축소 | 프린트

유튜브에서 유명한 역사물 영상 제작자가 
한국역사  고조선~한국전쟁 까지 다루고 있는
역사물을 만들어 "5분안에 끝내는 2천년이 넘는 한국의 역사" 란 
제목으로 3월 19일에 올렸는데 조횟수 5만3천이 넘고
댓글이 840개나 달리며 화제를 모으고 있습니다.
예상하듯이.. 
한국에 관심있는 제3자인 외국인들과
당사자인 한국인, 중국인들이 이에 대해서
피를 튀기면 댓글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어쩌다가 쓸데없는 일본 우익이 튀어 나오기도 하구요.
하지만,
대부분의 외국인들은 한국역사에 대한 좋은 자료라고 칭찬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들어봐도 몇몇 미흡한 면이 있지만 상당히 객관적으로 한국의 역사를
간단하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한번 보시죠.







<댓글>



Reuben A
사용한 그림과 지도가 훌륭하네요!


JtheKproduction
한국 역사 모범생이 인정함 ! 짧지만 정확한 훌륭한 작업 !


Learn Korean with GO! Billy Korean
나이스 ! 마침내 또 한편의 한국 역사에 대한 비디오 자료. 
이런 자료들이 더 필요해..


Rolitabun
조심하삼. 세뇌된 화난 중국인들이 곧 몰려 올거임 !


Sokol Ru
훌륭한 영상 자료. 한국은 확실히 흥미로운 역사를 가진 나라. 
다른 나라도 이런 식의 자료를 볼수 있기를..


Parker Brooks
발음 아주 좋은데!(역주- 고구려 신라등 한국어 발음이 좋다는 것임.) 
난 원래 당신(영상 만든 사람)이 한국계 미국인인줄 알았어.
난 몇년동안 한국에서 살았고 수많은 박물관에 간적이 있고 왠만한 한국말도 할줄아는데
넌 아주 훌륭한 일을 해냈어.


SerumCell
이 댓글 게시판은 진짜 짜증난다. 
그래서 나는 내 채널에서는 아시아 역사는 절대 취급하지 않아.
사람들이 정말 등신들이야. 스크롤 해서 주욱 읽어보면 자신감 부족, 
역사에 대한 무지함으로 서로 싸우는 한국인들과 중국인들.. 
그리고 일본애들도 갑자기 끼어들고..


WhiteHorizon 22
세상에 !!! 고대 한국의 역사 장난 아니네.. 
진짜 과소평가 됐었구나. 이런 잘못된 사실을 밝혀줘 고마워.


War Master
크메르 제국 역사도 좀 해주지..(역주-캄보디아 사람인듯..)


Andrew Andy
중국여권은 비자없이 66개국에 입국할 수 있어
한국여권은 비자없이163개국을 입국할 수 있어
미국여권은 비자없이 160 개국을 입국할 수 있지.
(역주- 비자 없이 얼마나 많은 국가를 여행할 수 있는지는 어떤 면에서
국력의 척도가 될 수 있음.미국이 우리보다 더 강하지만 중동등에 적도 많다는 것을 위의 사실은 보여주고 있음.)


Nigrum Romanum
마침내 한국역사에 대한 정확한 자료가 올라 왔군!


bloody KIM
혹시 이거 알아 ? 중국 정부가 고구려가 중국 역사의 일부라고 주장하며 
한국의 역사를 왜곡 하려고 하는 것... 이게 세상에 말이되..........


Korean Peninsula
잘 했어요. 짧지만 정확한 작품!!! 아마도 한국역사에 대한 최고의 영상자료인듯..


DuckRevenge
수많은 중국인들이 독설을 해대는군.. 항상  한국이 이것 저것들을 훔쳤다고 하지.. 하지만 
난 한국인들이 그렇게 얘기하는 것을 한번도 들은 적이 없어.. 제발 중국인들 흥분 좀 하지마..


The Resurrection
한국 역사가 꽤 흥미롭군..


Elias Frahat
항상 그랬듯이 아주 짧지만 정보가 훌륭해 .. 잘했어 ;)


OddJars
 죽이는 영상자료다. 발음(역주- 고구려 신라등 한국 발음이 좋다는 것임.) 
아주 좋아. 내 조상의
나라에 대한 영상을 보니 반갑네. 한국은 세계에서 작은 나라라 
한국의 역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잘 모르지. 
하지만 만일 동아시아 역사광이라면 한국의 역사는 매우 흥미로울 거야. 


Larsanator
나는 항상 한국 애호가인데.. 한국의 역사 정말 흥미롭네.. 잘 했어..


Derek zhao
중국이 한국을 일본으로부터 구해준 것을 감사히 여겨라. 
조선은 명나라의 딸랑이 국가였지.ㅋ 


??????? ???
조심 !! 역사적으로 민감한 족속들인 중국인들이 곧 몰려 올거임..


Lupsastta
이 댓글 게시판에 글 달고 있는 저의 중국 친구들을 위해서 내가 대신 사과할께..


SerumCell
이 게시판에 댓글 단 모든 중국인들과 한국인들은 자신에 대해 좀 쪽팔린 줄을 알아야만 해..


Anime watch
한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어라


Apollon Lv
하하하하. 중국인들만의 환상은 정말 재밋어. 중국역사는 중국제품하고 똑같아 :)


Jun K
좋은 작품 ! 세뇌된 중국 트롤들을 조심해.. 
그들은 모든 동아시아의 역사가 자기들 것이라 주장하길 좋아해. 
중국인 조상들은 항상 몽고, 만주, 여진 그리고 일본인들의 피지배민들 이었는데도 말이지..


Alea iacta est
아주 인상적이야...칭찬해드림 !


Elias Frahat
이라크 역사도 좀 만들어 주세요.


Jr B
불쌍한 한국인들 ;-;


Kochigachi
중국인들은 고구려의 후손들이 결국 전 중국을 정복했기 때문에 아주 당황해하지. 
그래서 지금 고대 한국이 중국이라고 주장하는데... 이 무슨 개소리냐..


Lawrence Lee
한국어는 2천년이상동안 중국어로 쓰여졌어. 
그 말은 중국의 한국에 대한 영향이 크다는 거야.


Vinny JKY
훌륭해, 친구!


Kishan T
너 목소리가 세스 로건 같다.
(역주- 세스 로건은 유명한 캐나다의 배우이자 감독)


芮力
그럼 왜 고대 한국의 역사책은 중국어로 쓰여있냐?


Warriors of Athens
놀라운 영상, 설명이 잘되있음


Super - rinno
제발 베트남 왕국도 좀 만들어주라.


Emma Avelar
멋진 작품. 심지어 정확하기까지 !


abcde fghij
팔레스타인 역사도 좀 만들어 주셈..


Ejnar Agathe
좋은 정보 감사. 훌륭한 영상.


Alvin Jean
니가 이 분야에선 최고 같아..


cheerfulerik
와우 판타스틱 하다. 이런 비디오 계속 만들어줘. 
정말 감사하고 지금 막 구독자 됬음. 감사 !!


dimsum9797
이것 정말 흥미로운데.. 다음 작품은 일본역사도 좀 만들어 줄래?


Jiffy Cornbread
한국 드라마가 왜 그렇게 광대한지 이유를 알겠네.


?琪
근데 말이지.. 고구려는 한국과 아무 관련이 없어. 
한국역사를 설명하는 방법 ; 아빠.살려주세요!
(역주-전형적인 중국인)


Alex Lopez
드디어 유투브에  인간의 역사를 다루는 멋진 채널 등장. 계속 잘해 주삼. 


tamarin
필리핀 역사도 좀 만들어 줘요.


Jun Lin
고구려와 발해는 한국 역사의 일부가 아니야. 다른 나라의 역사를 훔쳐가지 마라. 
현대 한국은 남쪽에 있던 삼국(역주-백제,신라, 가야)의 형성체일뿐.


HoiNam Superior Southern Chinese
한국은 중국의 노예일뿐. 심지어 서양 매체들도 그렇게 말함..


Bie Zhang
1. 고구려는 자신의 공식 문자로 고대 중국어를 사용했음. 
반면에 오늘날의 한국인들은 한글이라
불리는 완전히 다른 문자를 사용하지. 중국문자에 대한 지식이 없는 한국인들은 심지어 고구려
문학작품을 읽을 수도 없음.
2. 고구려 영토의 반이상이 현재 중국 동북지방에 위치함.
3. 고구려의 첫 2개의 수도는 동북방의 중국영토에 위치함
결론 - 고구려는 서하/대리국/남월처럼 중국 역사의 일부임.


Zero Sum
한국이 계속 분단되 있기를 희망함... 그래야 우리가 계속 그 상황을 즐기지.. 감사


Jun Lin
고조선이란 존재하지 않음. 한반도의 최초의 국가는 중국인 기자가 세운 기자 조선이었음.
그리고 나중에 역시 중국인 위만이 세운 위만 조선이 존재했을뿐..


xXxSkyViperxXx
한국 나라명 발음은 훌륭해 하지만 중국 나라명은 
왜 그따위로 발음하냐? 보는내내 황당했음.


Shunsheng Li
한국이 자신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중국어로 된 역사자료를 찾아서 
엮어보려고 해도 찾기가 정말 힘든데.. 미안하지만 사실이야.. 


Justin Xie
사실 한국의 고대역사를 너의 긴 비디오 영상 대신에 
단 몇마디로 이렇게 결론내리면 되었는데..
- 사실 한국은 지난 수천년동안 사대주의에 함몰되 자신을 소중화 
(역주-작은 중국) 라고 이름 붙이는 것을 자랑스러워 했음- 


Hiroshi Fujiwara
한국은 약한 국가였지. 중국과 일본 만세 ! 
(역주- 이름보면 알겠지만 갑자기 끼어든 일본 우익.)


Dean Even Steven
수많은 중국인들이 평소처럼 말도 안되는 선동을 퍼트리고 있다고 생각해. 
중국인들은 중국 정부의 검열을 받지 않는 것이 필요해.;)


yuenhang fung
정신차려. 고구려는 한국을 침범했던 외부의 고대인들일 뿐..



Max-94
사실 고구려는 한국인들이 세운게 아냐. 따라서 고구려는 한국이 아니지.


jinse
한국 역사가들에 따르면 김치 먹는 사람들이 젓가락, 
한족 중국인은 물론 심지어 우주도 만들었다고 하지..
 

Bill Gouch
중국 한왕조의 영향은 마치 서양의 로마제국과 같아. 
북한 전체가 한왕조에게 정복되었고
 한국에 문명이 들어온 계기가 되었지.


TheGreen Jarret
간단히 말하면, 북한뿐만아니라  모든 한국인들은 미쳤어..


번역기자:Bri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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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디 18-03-25 16:47
   
짱깨들의 동북공정 세뇌.......
소년명수 18-03-25 16:49
   
역시 우리에게 짱개는 반만년의 주적.
BTJIMIN 18-03-25 16:52
   
번역 감사합니다.
ultrakiki 18-03-25 16:56
   
듕궈들 또 몰려와서 헛소리하네.

진심 한족이라는 것들이 노예족들아님 ?
     
굿잡스 18-03-25 19:13
   
19세기 말, 만주족 팔기군 병사가 한족 성주(시장)을 구타한 사건이 있었지만, 팔기군 병사는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을 정도로 청나라 내내 만주족들은 정복자이자 지배자라는 신분적 특권을 누리고 살았다.
 
  서구 열강의 공세에 몰려 위험한 상황에서도 청나라의 지배층들은 "나라를 외국에게 넘겨줄 지언정, 집안의 종(한족)에게는 절대로 줄 수 없다."라고 단언했을만치, 청나라는 엄연한 정복 왕조였다.
 
  1850년대, 한족들로 구성된 태평천국의 반란이 일어났을 때 남경을 지키던 만주 팔기군 병사들이 태평천국군에게 모조리 살육당하자, 분노한 청나라 조정은 태평천국에 가담한 반란군 병사들이 항복해와도 절대로 항복을 받아주지 말고 전부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고 그 바람에 태평천국의 난은 16년이나 오랫동안 계속되고 말았을 정도로 만주족과 한족 사이의 민족적 갈등은 심각했다.
 
- 청사 저자 임계순 -

당시 일개 만주족 병사가 미국으로 치면 주지사(웬만한 나라의 대통령)급에 해당하는 성주

를 구타할 정도로 만주족은 소수였음에도 피지배 서토인을 강점 지배하는 정복자의 지위

를 누리고 있었고 이들은 서토인과 구분되는 그들만의 독자적 만성이라는 주거공간에서

생활하며 서토인에게 세금을 착취해서 생활.

(후기로 가면 만주 팔기군중에서 초기 청에 복속, 서토 정복에 동원되어 수백만 자국 짱개들

학살하던 앞잡이 한족계열은 세금만 쳐먹는다 팔기군에서 빼버림)


명말청초의 만주족에 의한 짱국 서토인 대규모 학살
 
 [양주십일기],[가정을유기사],[강변기략]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95273&sca=&sfl=wr_subject%7C%7Cwr_content&stx=%EC%B2%AD%EC%A0%9C%EA%B5%AD&sop=and
 

애초에 서토의 수많은 왕조 역사 자체가 정작 서토 내륙 황하 하한족은 역사의 무대에 주체로서

힘을 제대로 써본건 얼마되지 않고 북방과 동방 즉 우리 고조선 고구려 문명권의 세력에

쳐발리거나 정복을 밥먹듯 당한 역사군요.(한마디로 이런 서토 내륙 하한족들은 이민족에

노예노동력을 제공당하면서 식민 착취로 점철. 지금도  짱국 독재 공산당이 대다수 인민들 감시 통제

하면서 국가 세금으로 호위호식하는거야 변함 없는 세상이긴 하지만)

세계 4대 문명 중 하나 어쩌고하는 황하 내륙의 앙소문화에서 나오는 채색토기 자체가

서토 학자인 쑤빙치(蘇秉琦)학자의 견해를 따르면 이런 채색토기는 우리 고조선 선대문명권인

만주 요하일대의 신석기 시대에 서토 내륙보다  500여년 앞서 출토되면서

북방의 ‘Y벨트’ 지형을 타고 서토 내륙으로 남하한 세력에 발리면서

영향을 받아 나온게 앙소문화의 채색토기.

그리고 서토 최초의 정치체 왕조인

상나라 은허 유적을 직접 발굴했던 이 쑤빙치는 상나라 자체도 동북방에서 내려온

정복 동이 이민족으로 결론 짓었고 이들에 의해 저기 본문 댓글에 짱개들 지들 한자 어쩌고

개소리 쳐하는 한자의 원형 갑골문등 다양한 도시문명을 발명, 건설하군요.

그리고 마지막 정복왕조 조차도 결국 만주족에 의해 서토인들은 초기부터 말기까지 수백만이

학살에 세금을 뜯기며 생활.


그나마 한족 계열 어쩌고 떠들어 되는 왕조로서

한족이라는 아이덴티티를 처음 정립한 한나라 조차도 초기부터 건국자인 유방이 흉노제국의

묵특대선우에게 생포당하는 치욕을 겪으면서

수십년 속국으로 지냈던 역사에 송나라도 북방의 유목 요나라부터 돌리빵 당하다

우리 신라계황제와 발해유민 연합의 금나라에 의해 결국 멸망당했고 이후 내려와 다시 세운 남송

역시도 몽골에 의해 지워지면서 사고 팔리는 최하위 노예등급으로 전락.


짱국 애들이고 섬나라 열도 쨉 극우들이고 역사에선 동북공정에 식민사관으로 똘똥 뭉쳐

우리 역사에 대해 저열한 열등감에 유튜브고 여기 저기 들어가서

개소리 날조쳐하는 이유가 있군요. ㅋ
znxhtm 18-03-25 16:56
   
짱개들아 너네 뇌를 믿지마라.
made in china 잖아. ㅋ
잔트가르 18-03-25 16:57
   
짱개들과 역사이야기는 등소평의 문화대혁명만 말하면뎀ㅋㅋㅋㅋ
그리도 대단한 지들 역사를 지들손으로 다때려부시고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지들 역사를 말하면 안되지ㅋㅋ
booms 18-03-25 16:59
   
무식한놈들 개많네. 한자쓰니 자국역사면 동북아 전체가 중국이네.

대도않는 소리 지껄이면 다되는줄 아는 안하무인이 국가 종특인가..
ashuie 18-03-25 17:00
   
그래 더 짖어봐
한자가 짱개의 문자라는 것부터가 되도않는 소린데ㅋㅋ
고구려가 한자를 써서 중국의 영토?
그럼 러시아는 키릴문자쓰니깐 그리스&동로마의 영토냐?

팩트폭행 좀 더 하자면
고조선 고구려 부여 백제  등은
식생활 발견토기 주거형태 주술문화 의복 등이 계승되고 있어
짱개놈들 산둥반도에 소국꾸려서 놀던 문화랑은 동떨어져 있다고.
지들이 고구려를 동이족이라 기록해놓고 이제와서 우리민족우리땅!
염치가 있긴한거여?
삼국지 읽어봐라 손권이 고구려에 사신보냈다가 귓싸대기 쳐맞고 돌아가는데ㅋㅋㅋ
     
Sulpen 18-03-26 18:48
   
애초에 위촉오 삼국 이전부터 고구려를 욕해놓은 중국 역사서가 상당히 많지요.
오랑캐라서 약탈을 일삼느니 어쩌고 저쩌고 ㅎㅎ
달리다가 18-03-25 17:01
   
썩은 짜장냄새...
잘 봤습니다.
DakkaDakka 18-03-25 17:02
   
Jun Lin
고구려와 발해는 한국 역사의 일부가 아니야. 다른 나라의 역사를 훔쳐가지 마라.
현대 한국은 남쪽에 있던 삼국(역주-백제,신라, 가야)의 형성체일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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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넴만 봐도 짱깨인걸 알겠네 하여튼 짱깨 ㅅㄲ들은 답이 없어
꿀순딩 18-03-25 17:03
   
잘 봤어요
월드컵태생 18-03-25 17:04
   
중국애들 동굴에서 잘때 우리 조상님 고구려는 뜻뜻한 온돌에서 주무셨지
최근에 알레스카에도 온돌 흔적나왔더라 방향 틀었으면 중국땅 우리꺼 될뻔했노ㅋㅋ
니네 개토 발가락 핥아서 살려줬다
메론TV 18-03-25 17:05
   
참 중국놈들은 역사를 단순하게 보는구나 ㅋㅋㅋ

역사라는게 그 나라의 정체성, 문화 등등 종합적으로 봐야지

땅이 중국땅에 중국문자를 쓴다고 다 중국 역사냐 ㅋㅋㅋ
굿잡스 18-03-25 17:08
   
Max-94
 
사실 고구려는 한국인들이 세운게 아냐. 따라서 고구려는 한국이 아니지.

>>?????? ㅋㅋ쥐랄합니다.


고(구)려(KOREA)가 오늘날 대한민국(KOREA) 역사인 이유(지금의 대한민국이라는 국호 자체가

고종황제의 대한제국 즉 고구려, 백제, 신라의 대삼한을 아우르는 국호를 이어받아 오늘날 대한국민

이 국가의 주인이라는 대한민국 국호로 당당하고 도도히 계승 발전.)


1.한국인의 혈통

 한국인은 백제와 신라 외에도 많은 고구려인의 피를 이어받았다. 남북국시대 신라의  9주 중 3주(오늘날 경기도, 황해도, 강원도 일대)가 고구려의 옛 지역에 설치됐고, 이 지역 주민들은 대부분 고구려 왕조의 지배를 받던 고구려인이었다. 고구려인의 인구가 적어도 통일 신라 인구의 1/3 즈음에 육박했다고 볼 수 있는 증거로 경주를 지키던 9서당 중 3서당인 황금서당, 벽금서당, 적금서당이 고구려인으로 구성된 부대였다는 사실을 들 수 있을 듯하다. 이 수치는 오히려 백제인의 서당 부대였던 흑금 서당 개수보다 훨씬 많은 것이다. 남국 신라 인구 중 고구려인의 비율이 백제인보다도 오히려 많았다고 까지 조심스럽게 추측해 볼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도 든다. 물론, 서당의 숫자로 인구 비율을 추측하는 것은 분명한 증거가 있는 것은 아니므로 이것을 분명한 논거로 삼기에는 무리가 있다.(고려 전성기나 조선 시대를
 보면 남북국시대의 신라보다 훨씬 세력권이나 지배영역이 확장된건 말할 필요 없을 것이고)

  남북국 시대 신라 시기 고구려인들은 9주와 패강진을 제외한 신라 남부 지역에도 많이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전라북도 익산(금마저), 경상남도 진주(강주의 중심지)에는 당시 고구려 유민들이 상당 수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보덕국왕이자 보장왕의 아들이었던 서자 고안승은 신라왕에게 김씨 성을 하사 받고 경주에 거주하였다. 이 사실은 오늘날 한국 성씨의 다수를 차지하는 김씨 성 중에도 상당수 고구려 유민 특히 고구려 왕족 안승의 후손도 있다는 증거인 셈이다. 발해 멸망 후에도 많은 고구려 혈통이 고려로 귀순하여 오늘날 한국인의 조상이 됐으며, 이후 고려, 조선조가 평안도, 함경도 지역을 수복하면서 그 지역에 살던 다수의 고구려인의 후예들도 우리 역사 무대에 다시 들어와 오늘날 한국인의 조상이 됐다고 보아야 옳을 것이다. 오늘날에도 한국에는 고구려인을 조상으로 삼는 성씨가 여럿 있다. ㅡ 물론 조선조를 거치며 성씨가 많이 뒤바꼈기 때문에 성씨로 조상을 따진다는 것은 아주 믿을만한 것은 아니다 ㅡ 오늘날 진주 강씨, 횡성 고씨, 봉성 온씨, 협계 태씨 등은 고구려인들을 시조로 모시는 성씨들이다. 이러한 혈연적은 계승은 한국인이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직접적인 증거인 것이다.
 
 2.한국어

한국어에는 많은 고구려어의 흔적들이 남아있다. 고구려어 수사가 현재 한국어 수사와 일치하지 않는 문제는 있지만, 그래도 한국어가 고구려어의 큰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2000년 임병준이 제작한 자료에 따르면 현재 남아 있는 고구려어 어휘 70여개 중 50개 내외의 단어가 현대 한국어와 관련성을 갖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정도의 관련성은 한국어가 고구려어의 직접적이고 강한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사실을 볼 때, 고구려어가 일본어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고, 한국어와 관련이 적다는 말은 기존의 일부의 주장은 옳다고 볼 수 없다. 한국어는 분명 고구려어를 계승한 언어이다.
 
 
3.국호 Korea

  세계에 고구려의 국호를 나라의 국호로 사용하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 Korea는 고려에서 나왔고, '고려'는 고구려 중엽 이후 고구려인들이 직접 사용했던 고구려의 국호였다. 오늘날 '고려'라 하면 왕건의 고려만을 생각하는 경우가 많지만 이는 잘못된 것이다. 삼국유사에서 일연은 고구려라는 단어 대신 '고려'라는 말은 고구려라는 의미로 썼고, 오늘날 한국과 중국에 남아있는 많은 지명들에서는 '고려'라는 명칭이 고구려의 뜻으로 많이 쓰이고 있다. 한국은 오늘까지도 고려(고구려)라는 나라 이름을 쓰는 나라이다.
 

4.계승 의식

 고구려 멸망 후 통일 신라, 발해 시대에도 고구려 계승 의식을 유지했고, 이는 고려 시대를 거치면서 더욱 강화되어 오늘날 한국에 까지 이어졌다. 고구려 계승 의식이 계속 전승될 수 있었던 큰 이유 중 하나는 고구려 계승 의식을 가진 고구려 유민들이 통일 신라 사회, 발해 사회에서 영향력 있는 귀족의 지위를 어느 정도 유지했다는 점이다. 발해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남북국시대 신라에서도 고구려 귀족은 백제 귀족들보다 더 높은 대우를 받았다. 백제 귀족이 4, 5두품으로 몰락한 반면 고구려 귀족은 6두품 신분을 계속 유지했고, 고구려인의들의 탄탄한 세력은 이는 결과적으로 태조 왕건의 고려라는 나라가 세워질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고려 건국의 주축 세력이 과거 고구려의 영역이었던 패서 출신이었다는 점을 본다면 적어도 초기 고려의 귀족들은 상당수가 고구려 혈통을 지닌 사람들이었다고 보아야 옳다. 패서 지역은 고구려 시기 고구려 3경(평양, 국내, 한성) 중 한 곳이었던 한성(재령, 장수산성)이 있었던 곳이고, 고구려 계승 의식이 매우 강했을 수도 평양과 강 하나를 두고 있는 지역인 만큼 순수 고구려 혈통을 지닌 사람이 많은 곳이었다. 이들은 고구려 변방의 고구려 계승 의식이 적었던 거란, 말갈(여진)인들과는 달랐다. ㅡ 이런 까닭에 오늘날에도 만주족들은 발해에 대한 계승 의식은 밝힐 지언정 고구려에 대한 계승 의식은 거의 갖고 있지 않다. ㅡ태조 시기 황해도 평산, 봉산 지역을 뿌리로 삼으며 등장하여 이후 고려의 귀족들이 된 성씨들의 경우 고구려인의 혈통과 상관이 있다고 보는 것은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발해 멸망 후 발해의 유민들이 고려 귀족들에 합쳐지면서 이런 고구려의 계승 의식은 한층 강화되었다. 오늘날 한국인들이 고구려의 후손을 자처하는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4.평양이라는 도시

 평양은 한국 역사에서 가장 유구한 전통을 지닌 도시이다. *오늘날 학계 연구를 보면
평양은 고유 명사보다 일반명사로 보이면서 여러 군데가 존재하는 듯 하며* 평양은 동천왕 시기 일시적으로 고구려의 수도인 적도 있었고, 고국원왕 시기에도 잠시 수도로 삼은 적이 있었다. ㅡ 물론 고국왕왕 시기 평양 동황성을 오늘날 평양이라고 확정할 수는 없다 ,ㅡ 427년 장수왕이 평양으로 천도를 한 후 평양은 한국 역사상 최강국이던 고구려의 전성기 시절을 보낸 곳이었다.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고구려의 유명인들인 연개소문, 을지문덕, 온달, 영양왕, 보장왕, 연남생 등의 고구려인들은 평양을 무대로 활동했고, 고려 시대에는 평양을 수도 중 한 곳인 서경으로까지 삼아 매우 중시하게 됐다. 조선조에도 평안도 지역에서 오늘날로 치면 광역시, 거점 중심 도시일 '부'(평양부)의 자위를 받은 평안도 지역의 유일한 도시이기도 했다. 이러한 정서는 오늘날 한국인에게까지 고구려의 수도이자 북방 지역의 중심지 '평양'이라는 인상을 강하게 각인시키고 있다. 분단된 북한 지역의 수도가 평양이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평양이 한반도 북방의 중심지였던 것은 적어도 수천년 전인 고조선, 고구려, 고려의 서경 시기와 그 연원이 닿아있는 것이다. 오늘날의 평양은 분명 고구려가 한국에게 물려준 큰 고구려의 유산임이 분명하다.
 
5.거문고

 한국 국악의 양대 현악기는 거문고와 가야금이다. 가야금이 남방의 가냘프고 여성적이며 섬세한 음률은 내는 악기라면, 거문고는 북방인의 단단하고 거칠고 투박한 음을 내는 악기이다. 왕산악이 만든 이 악기는 고구려의 소리를 전해주는 악기이다. 오늘날까지 한국인들은 거문고를 한국의 중심 전통 악기로 계승 발전시켜왔다. 고구려 멸망 후 거문고는 전라북도 남원 지역에 거주하던 고구려 유민에게서 전수돼 온 한반도로 퍼져나가 계승됐다고 한다. ㅡ 출처 : 위키ㅡ  옥보고는 고구려의 거문고에 많은 곡들을 붙여 명실상부한 한반도 전체의 악기로 확립하는 역할을 했다. 고구려의 악기를 사용하는 나라는 세계 어디에도 없다. 오직 한국뿐이다. 한국은 분명 고구려의 음악을 계승한 나라이다.
 
 
6.해서탈춤(복식)

 

한국의 황해도 일대에서 전승돼 오는 봉산 탈춤과 같은 춤들은 본래 해서 탈춤에서 유래했다고 알려져 있다. 봉산탈품은 약 200년 전 생겼지만 그 연원은 훨씬 오래 전인 고구려까지 추측해볼 수 있다. 봉산 탈춤의 춤사위는 무용총에 그려진 한삼을 손목에 잡고 춤을 추는 고구려인의 춤사위와 매우 닮아있다. 한국 춤에만 남아있는 한삼은 부드러운 선을 표현하는 춤 도구로서 한국 이외에는 없는 매우 독특한 춤 도구이다. 어떤 방식으로든 한국인의 느린 3박자의 전통 춤사위는 고구려인의 춤과 관련이 있다고 보아야 옳을 것이다.
 
 7.온돌

  오늘날 세계적으로 퍼져있는 온돌은 본래 부여와 고구려 등 만주와 북부 한반도에서 쓰이던 난방 장치였다. 이후 한반도 전역으로 전파됐다. 이 특이하면서도 매우 효율적인 장치 온돌은 일본이 빼앗아간 조선 건물에 하룻밤을 묵던 미국인이 너무나 효과적으로 난방을 하는 조선 건물의 온돌이라는 장치를 보고 오늘날 현대식 보일러의 영감을 얻었다고도 알려져있다. 전 세계인이 지금은 향유하는 이 온돌은 중국, 일본에는 본래 없는 고구려인의 요소를 계승한 한국의 전통적인 난방 장치이다.
 
*오늘날 고고학적 상황에선 고조선시대 우리 열국중 하나인 북옥저에서 온돌의 기원으로
보는 비중의 무게가 높으며 이 북옥저는 이후 고구려에 흡수되어 고구려의 전통 난방양식으로 나아가 오늘날 우리 고유의 난방으로 현대에까지 이름.

 8.별주부전

별주부전은 한국의 대표적인 전통 서사 작품이다. 이 이야기는 김춘추가 연개소문을 만나러 평양을 방문하여 위기에 처했을 때, 목숨을 건질 수 있게 귀띔을 해준 고구려 사람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이다. 별주부전이 고구려에서(아마 신라에서도) 널리 퍼져있는 이야기였던 것으로 보이며, 이후 별주부전은 한국 서사 문학 작품으로 고려, 조선 시대를 거쳐 오늘날 한국에까지 이어져왔다.
 
 

이밖에도 문학면에서 고구려는 한국 한문학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한시 황조가, 여수장우중문 시 등 뛰어난 고구려의 한시 작품은 오늘날 한국 한시의 거의 시조격으로 평가받는 작품들이다. 한국인들의 고려, 조선 시대 시기 뛰어난 한문학 실력은 고구려인에게도 물려받은 면이 있다고 할 것이다. 고구려인은 매우 문학적인 사람들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들이 입으로 아님 글로 남긴 여러 서사 문학 작품들과, 벽화에 나타나는 별과 천체에 대한 고구려인의 상상력은 한국인의 우수한 언어 감각, 과학적 상상력 등으로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다고 볼 수 있다.
 
 9.한국성의 '치'

조선조 까지 한국 성에는 ‘치’라는 독특한 구조물이 있었다. 치는 본래 고구려의 성에 있는 시설로 적을 사방에서 포위하여 공격할 수 있는 시설이다. 이러한 시설은 조선조 시기 지어진 수원 화성에도 잘 나타나는데, ‘치성’이라는 구조물로 남아있다. 한국 축성술에는 과거 우수했던 고구려의 축성 기술이 이어져 왔다고 볼 수 있으며, ‘치’와 같은 축성법은 중국, 일본성과는 차별되는 한국의 전통 축성 기술이다. 이러한 축성술의 계승은 당연히 통일 신라, 고려 시대 고구려 축성술을 아는 고구려인들을 통해 전수됐을 것으로 생각된다.
 
*치는 앞선 요하 고조선 선대 신석기 홍산문화에서 이미 그 원형이 나옴.

 
10.씨름, 태권도(수박도)

고구려 각저총 벽화에는 현재 한국의 전통 투기 종목인 씨름으로 보이는 힘겨루기 경기 장면이 나온다. 각저총에 나오는 자세로 겨루기를 하는 경기는 한국, 중국, 일본에서 한국의 씨름이 거의 유일하다. 세계에서 고구려의 각저총에 나오는 씨름을 하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 요새 침체기를 맞고 있는 전통 씨름은 본래 한반도 전역에서 널리 행해졌던 전통 투기 종목이었다. 한국의 전통 씨름은 분명 고구려에서 유래한 것이 분명해 보인다. 한국의 국기 태권도의 기원 역시 고구려에서 찾을 수 있다. 안악3호분 벽화에는 마치 오늘날 택껸을 하는듯한 자세로 손으로 무예를 겨루는 장면이 나온다. 수박도는 고려, 조선 시기에도 행해졌고, 오늘날 태권도의 성립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1.삼국, 삼한 -역사기록

중국, 일본의 어느 전통적인 사서도 고구려를 자국의 역사로 기술한 역사서는 없다. 한국의 삼국사기, 제왕운기, 삼국유사 등 고려 시대 쓰여진 사서에서는 고구려를 분명한 한국사의 일부로 기술하고 있다. 이렇듯 사서에 고구려를 자국사로 서술한 것이야말로 고구려가 한국사의 부정할 수 없는 역사의 일부이며 20C 후반에 들어와 중국에 내새운 고구려가 중국사라는 논리가 얼마나 허구적인 것인지를 분명히 꼬집는 증거이다. 이런 사서의 증거 때문에 중국에서도 고구려가 한국사가 아니라는 것을 완전히 부정하지는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ㅡ 가령 중국인들이 쓴 중국어판 위키백과를 보니 조선의 역사의 일부로 고구려를 분명히 기술해 놓았더라.
 
http://islmoa.blog.me/120132382482
     
빈빈 18-03-25 18:00
   
소중한 글 감사합니다.
중국인들이 한국을 가오리 빵즈라고 하는데
고려 몽둥이라는 말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고려인들한테 몽둥이로 많이 맞았다는 데서 유래 되었다고 합니다.
          
구름속의해 18-03-25 18:39
   
언제부턴가 가오리라는 말을 안쓰고 그냥 빵즈라고만 하더군요. 동북공정이 어느정도 정착된건가 싶은 생각이 듭니다.
호밀빵 18-03-25 17:12
   
그럼 명나라 이전은 중국역사가 아니네. 만주족 청나라가 명나라를 멸망시켰으니... ㅋㅋ..
모든 것은 만주족과 청나라의 역사일뿐...
굿잡스 18-03-25 17:12
   
세종실록 45권, 세종 11년 7월 4일 무신 6번째기사 1429년 명 선덕(宣德) 4년 

예조에서 삼국 시조에게 제사지낼 것을 건의하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신라·고구려·백제의 시조(始祖)에 대해서는 이미 사당을 세웠으니, 청하건대 사전(祀典)에 기재(記載)하고 치제(致祭)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禮曹啓: "新羅、高句麗、百濟始祖, 今已立廟, 請載祀典致祭。" 從之。



세종실록 51권, 세종 13년 1월 10일 을해 5번째기사 1431년 명 선덕(宣德) 6년 

호조에서 백제·고구려·신라 시조의 제전을 2결씩 급여하다
 
호조에서 아뢰기를,

"충청도의 백제(百濟) 시조(始祖)와, 경상도의 신라(新羅) 시조(始祖)와, 평안도의 고구려(高句麗) 시조(始祖)의 제전(祭田)을 각기 2결(結)씩 급여하시기를 청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戶曹啓: "忠淸道 百濟始祖, 慶尙道 新羅始祖, 平安道 高句麗始祖祭田, 請各給二結。" 從之。


세조실록 22권, 세조 6년 10월 17일 기미 1번째기사 1460년 명 천순(天順) 4년 

영숭전·단군·고구려 시조·기자전에 나아가 제사를 행하다
 
임금이 친히 영숭전(永崇殿)에 제사하고, 마침내 단군(檀君)·고구려 시조(高句麗始祖)·기자전(箕子殿)에 나아가 제사를 행하였다. 승지(承旨) 홍응(洪應)에게 묻기를,
 
"고구려 시조가 누구인가?"하니, 홍은이 대답하기를,
"고주몽(高朱蒙)입니다."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삼국(三國) 중에서 고구려가 막강하였다." 하였다.


선조실록 39권, 선조 26년 6월 5일 무자 5번째기사 1593년 명 만력(萬曆) 21년 

유 원외를 접견하고 관의 설치, 중국군의 주둔 등을 논의하다

.
또 말하기를,

"귀국은 고구려 때부터 강국이라 일컬어졌는데 근래에 와서 선비와 서민이 농사와 독서에만 치중한 탓으로 이와 같은 변란을 초래한 것입니다. 지금 천조는 귀국을 금구 무결(金甌無缺)한 국가로 삼으려고 하는데 귀국은 이를 알고 있습니까?"
 하였다.

又曰: "貴國自高句麗, 號稱强國, 邇來士民, 唯事耕田、讀書, 馴致此變。 今天朝使貴國爲金甌, 貴國知否?


고종실록 36권, 고종 34년 9월 29일 양력 2번째기사 1897년 대한 광무(光武) 1년 

김재현 등 716명이 황제로 칭할 것을 연명으로 상소문을 올리다


우리나라는 지역 경계가 중국과 잇닿아 있고 나라가 나누어지고 통합된 것이 일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신라(新羅), 고구려(高句麗), 백제(百濟) 세 나라는 각각 그 땅의 주인으로 다같이 왕의 칭호가 있었으며 심지어 송양(松讓), 가야(伽倻), 예맥(濊貊), 여진(女眞), 탐라(耽羅) 등의 작은 나라들도 각기 왕으로 불렀습니다. 고려 때 통합하여 다만 묘호(廟號)만 썼으며 본조(本朝)에서는 옛 관습을 그대로 물려받았습니다. 이것은 당(唐) 나라와 송(宋) 나라 이후 그 나라들이 멀리서 존호(尊號)를 견제하였기 때문입니다.
 .
그러나 우리나라는 삼한(三韓)의 땅을 통합하여 영토는 사천리를 뻗어있고 인구는 2천만을 밑돌지 않으니 폐하의 신민(臣民)된 사람치고 누군들 우리 폐하가 지존(至尊)의 자리에 있기를 바라지 않겠으며 지존의 칭호를 받기를 바라지 않겠습니까? 옛 것을 인용하여 오늘에 증명하고 여정(輿情)을 참작하고 형세를 헤아려 보아도 실로 시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라건대 폐하는 여정(輿情)을 굽어 살피셔서 높은 칭호를 받아들여 만국에 공표하여 천하에 다시 새로운 관계를 세우신다면 종묘 사직(宗廟社稷)을 위하여 더없이 다행하고 신민에게 더없이 다행이겠습니다."
 

고종실록 36권, 고종 34년 10월 13일 양력 2번째기사 1897년 대한 광무(光武) 1년 

국호를 대한으로 하고 임금을 황제로 칭한다고 선포하다

반조문(頒詔文)에,

"봉천 승운 황제(奉天承運皇帝)001) 는 다음과 같이 조령(詔令)을 내린다. 짐은 생각건대, 단군(檀君)과 기자(箕子) 이후로 강토가 분리되어 각각 한 지역을 차지하고는 서로 패권을 다투어 오다가 고려(高麗) 때에 이르러서 마한(馬韓), 진한(辰韓), 변한(弁韓)을 통합하였으니, 이것이 ‘삼한(三韓)’을 통합한 것이다.
 
우리 태조(太祖)가 왕위에 오른 초기에 국토 밖으로 영토를 더욱 넓혀 북쪽으로는 말갈(靺鞨)의 지경까지 이르러 상아, 가죽, 비단을 얻게 되었고, 남쪽으로는 탐라국(耽羅國)을 차지하여 귤, 유자, 해산물을 공납(貢納)으로 받게 되었다. 사천 리 강토에 하나의 통일된 왕업(王業)을 세웠으니, 예악(禮樂)과 법도는 당요(唐堯)와 우순(虞舜)을 이어받았고 국토는 공고히 다져져 우리 자손들에게 만대토록 길이 전할 반석같은 터전을 남겨 주었다.
 
짐이 덕이 없다 보니 어려운 시기를 만났으나 상제(上帝)가 돌봐주신 덕택으로 위기를 모면하고 안정되었으며 독립의 터전을 세우고 자주의 권리를 행사하게 되었다. 이에 여러 신하들과 백성들, 군사들과 장사꾼들이 한목소리로 대궐에 호소하면서 수십 차례나 상소를 올려 반드시 황제의 칭호를 올리려고 하였는데, 짐이 누차 사양하다가 끝내 사양할 수 없어서 올해 9월 17일 백악산(白嶽山)의 남쪽에서 천지(天地)에 고유제(告由祭)를 지내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국호를 ‘대한(大韓)’으로 정하고 이해를 광무(光武) 원년(元年)으로 삼으며,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의 신위판(神位版)을 태사(太社)와 태직(太稷)으로 고쳐 썼다. 왕후(王后) 민씨(閔氏)를 황후(皇后)로 책봉하고 왕태자(王太子)를 황태자(皇太子)로 책봉하였다. 이리하여 밝은 명을 높이 받들어 큰 의식을 비로소 거행하였다. 이에 역대의 고사(故事)를 상고하여 특별히 대사령(大赦令)을 행하노라.
 


결론> 중세 고려(KOREA)는 이미 삼국시대 고려(고구려) 계승 의식으로 역사관과 영토,문화, 천하관을

가지고 국호를 통해서도 분명히 드러내었고 이후 조선시대에 와서도 고조선 단군과 삼국 시조의

사당을 모시어왔고 이후 근대 시기 고종의 대한제국의 이 대한(大韓)

역시 고구려 백제 신라의 큰 삼한을 이어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이후 임시정부의 대한민국은

이런 대한제국의 국호를 다시 계승해서 오늘날 국민이 주인인 대한민국으로 도도히 이어져 왔군

요. 서토 역시도 지금의 일당 독재 공산당의 동북공정질 쳐하기 이미 고대부터 고구려를

우리 역사로 인식해왔고 이는 여러 문헌 및 금석문등 고고학적 부분에서도 다르지 않는 주지의 사실.
딸기파이 18-03-25 17:14
   
단순히 세뇌당한 중국인이 문제가 아니라

아시아 전문가를 양성한다는 명목으로
중국 장학생, 일본장학생들을 저 나라들이 양성하는데
은근슬쩍 다른나라 특히 한국을 깔아뭉갬...

지난 평창 올림픽에서 한국을 비하했던 그 해설자도
전형적인 <일본장학생>이었는데... 찾다찾다 없어서
"아시아 전문가"라는이유로 초빙된거...

그 만큼 한국 전문가는 수가 적고 또 관심도 적은편임.
정부에서 적극적으로 이런 홍보를 해야하는데...
중국,일본만큼 홍보의 역사가 길지 못함;;;

이런 국가 이미지가 만들어지기위해서는
뿌리깊은 선입견(?)이라는게 생겨야 하는데.

60~80년대 외신으로 알려진 한국 뉴스라고 해봤자
남북의 독재자가 서로 나눠져서 헤게모니싸움이나 해대는
한심한 나라라는 이미지라... ㅠㅠㅠ

그나마 지금의 외국 20대들이 느끼는 한국은
젊고 역동적인 나라 K-POP과 삼성의 나라라는 이미지는 있는거 같긴함.
아날로그 18-03-25 17:15
   
5,000 년 역사를 2,000 년으로 줄여버렸네?
제대로 모르는 사람들은 저런거 좀 만들지 말지.
바로그것 18-03-25 17:18
   
아니 애초에 지네들의 마지막 황제까지 이민족의 황제였는데 뻔뻔스레 우리역사라는 말이 입에 담아지나?? 지네들 마지막 황제 죽은지 100년도 안되지 않나요? 그 주제에 우리역사??? 이건 뭐 거의 정신병자들일세 ㅋㅋㅋㅋㅋㅋㅋㅋ
섬나라호빗 18-03-25 17:21
   
본인들의 역사가 부끄러워 만리장성까지 늘리는 피지배민족이 현재의 중국 ㅋ
만리장성 밖은 전부 중국이랑 관계 없다고 보면 된다
니들 역사서에 항상 고구려는 외국으로 기록해놨다.
고구려 역사를 가지고 싶으면 다시 문화대혁명 일으켜서 본인들 역사서부터 불태워라
굿잡스 18-03-25 17:31
   
Lawrence Lee
 
한국어는 2천년이상동안 중국어로 쓰여졌어.

>>???? ㅋㅋ

상형 표의 문자인 한자와 한국어 발음의 한자어는 전혀 다른 것.

그리고 애초에 고대의 한자는 유럽의 표음문자 라틴어격인 동아시아 공용문자이지 서토 내륙

전형적 농경문화권인 황하 하한족이 발명했거나 그들만의 소유물이 전혀 아니였음.

우리나라는 이런 상형 표의 문자를 사용하다 우리의 격조사등 발음과 맞지 않자 한자의

뜻보다는 발음을 위한 향찰, 이두등을 재차 발명하고 사용하다

이후 왕조시대에 세계사에서도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백성의 애민사상에 입각하여 백성을 위한 표음문자인 한글을 발명해서

오늘날에 이른 것이고 이런 변화 과정으로 개소리 쳐할거면

지금 짱국애들 사용하는 간체 자체는 고대 동아시아 범용 한자인 번체와는 거의 다른 형태의

문자로 변화되어 지금의 짱개 인민들은 이런 고대 번체자들을 제대로 읽고 쓰지도 못하는 게 현실.

이런 상황에서 지들이 고대 한자를 짱국어 어쩌고 지들만의 소유 문자라고 떠들수 있남??한심.


서토 최초의 정치체 왕조로 보는 상나라(Shang dynasty)자체가 만리장성 밖

동북방에서 내려와서 서토 내륙 하한족을 정복하고 세운 선진 이민 동이족의 정복사(Conquer History)


한자의 원형을 동이족 상나라 갑골문으로 보는데 이런 거북이등 뼈에 뭔가를 새기는 문화

자체가 서토 내륙 하한족에게는 나오지 않는 우리 요동(만주)과 한반도에서 성행하던 동이족 문화.

(더구나 이런 갑골문은 상나라가 전쟁시에 점을 치든 내용들이 새겨져 있던 점복신앙이 강한

문화로 이 역시 서토 내륙 하한족에서 보이든 것이 아니라 신권(神權)문화가 강한 우리 고조선

문명권에서 보이든 문화들 )


갑골문화 분포도

http://blog.daum.net/pance73/5509


 서토 내륙 농경 하한족을 정벌하고 세운 최초의 이민 정복왕조 동이족 상나라

고고학자 쑤빙치(소병기·蘇秉琦)는 “은(상)의 조상은 남으로는 옌산(연산·燕山)에서 북으로는 백산흑수(백두산과 헤이룽강)까지 이른다”고 단언했다.
 
또한 <그 유명한 안양 인쉬(殷墟) 유적 발굴을 총지휘했던 푸쓰녠(부사년·傅斯年)은 일찍이 “상나라는 동북쪽에서 와서 흥했으며, 상이 망하자 동북으로 갔다”고 단정했다. 중국 학계도 이런 쑤빙치와 푸쓰녠의 관점이 가장 정확한 것이라고 인정하고 있다
 
인쉬 유적에서는 상나라 귀족들의 묘가 발견되었는데, 발굴된 대다수의 시신들이 동북방 인종의 특징을 갖추고 있었어요. 인골들의 정수리를 검토해보니 북아시아와 동아시아인이 서로 혼합된 형태가 나타난 거지. 이것은 황허 중하류의 토착세력, 즉 한족(漢族)의 특징과는 판이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됐어요.”
 
또하나, 인쉬(은허) 발굴자들이 인정했듯 상나라 사람들이 동북방의 신앙을 존숭했다는 것이다. 즉 상나라 왕실에서 고위층 귀족들에 이르기까지 동북방향을 받들었는데, 이는 고향에 대한 짙은 향수와 숭배를 나타난 것이라는 해석이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802151715165&code=210000


“군사를 일으킬 때 소를 잡아 제사 지내고 소의 굽으로 출진 여부를 결정했다. 굽이 벌어져 있으면 흉하고 붙어 있으면 길하다.

有軍事亦祭天 殺牛觀蹄 以占吉凶 蹄解者爲凶 合者爲吉


魏略曰:其國殷富,自先世以來,未嘗破壞。

위략 왈 그 나라는 매우 부유하며, 선대로부터 오늘날까지 한번도 파괴당한 적이 없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 부여조


장발영(張發潁)의 저서 <봉황토템 동이인 및 그 문화의 공헌>- <시회과학집간>2001년 2기- 에서

동이문화의 유적분포는
- 연산(燕山)의 남북과
- 료녕(遼寧)의 부신사해문화(阜新查海文化)를 포함해서
- 심양(沈陽)의 신락문화(新樂文化),
- 산동의 대문구문화(大汶口文化), 하무도문화(河姆渡文化)와

그 후의
- 조보구(趙寶溝), 흥륭와(興隆洼), 우하량(牛河梁) 및
- 은상문화(殷商文化)까지

동이문화는 봉황(鳳凰)을 토템으로 하였다.
통일된 문화체계는 아니지만 문헌에 기록된 이후의 생활은 이 지구(地區)의 조상들의 범칭(광범위한 동이문화)이다.
 
봉황을 모(母)토템으로 삼고 각종 새들을 자(子)토템으로 하는 북방 봉황토템 동이의 조상들이 널리 퍼져 있었다.

이들은 모두 연산산맥(燕山山脈)의 동이문화권을 중심으로 발전되어 왔다.
복희(伏羲)에서 하상(夏商) 2대까지 동이문화가 주도적인 역할을 해 온 것이다.

동이족 사람들은
- 깃털달린 활과 화살을 발명했으며,
- 문자를 창조했으며,
- 청동기를 제작하고,
- 철을 단련했으며,
- 배(舟)와 수레(車)를 만들었고,
- 농업을 발전시키고 치수(治水)를 하였다.


東海之內 北海之偶 有國名曰 朝鮮

"동해(서토 동해안) 안쪽, 북해(발해) 모퉁이에 조선이란 나라가 있다”


君君子國在其北 衣冠帶劍 食獸 使二大虎在旁 其人好讓不爭 有薰華草 朝生夕死 一曰在肝楡之尸北 [海外東經]

군자국이 그 북쪽에 있는데 옷을 입고 관을 쓰고 칼을 찬다. 짐승을 잡아 먹고 두 마리 큰 호랑이를 부려 옆에 둔다. 그 사람들은 양보하기를 좋아하고 다투지 않는다. 훈화초(현 대한민국의
 
국화(國花)인 무궁화의 옛이름)라고 있는데 아침에 생겼다가 저녁에 진다. 혹은 간유시의 북쪽에 있다고 한다.

靑丘國在其北 其狐四足九尾 一曰朝陽北 [海外東經]

청구국이 그 북쪽에 있는데 그 곳의 여우는 네 개의 발과 아홉 개의 꼬리가 있다. 혹은 조양의 북쪽에 있다고 한다.

有靑丘之國 有狐 九尾 [大荒東經]

청구국이 있는데 여우가 있어 꼬리가 아홉 개이다.

-산해경



又東五百里 日丹穴之山 其上多金玉 有鳥焉 其狀如鷄 五采而文 名日鳳凰

다시 동쪽으로 500리를 가면 단혈산이 있어 그 위에 금과 옥이 많다.

새가 한 마리 있는데 닭같이 생겼으며 오색무늬가 있어 봉황이라 부른다.

그의 머리 무늬(首紋)는 덕, 익문(翼紋)은 의(義), 배문(背紋)은 예(禮), 응문(膺紋)은

인(仁), 복문(腹紋)은 신(信)을 나타낸다. 이 새는 자연물을 먹으며, 스스로 노래하고 춤춘다.

이 새가 나타나면 천하가 태평해진다.”

-산해경(춘추전국시대에서 늦어도 한초기 사이에 편찬)

봉(鳳)

봉은 신조(神鳥)이다. 동방의 군자국(君子國)에서 나는데, 사해(四海)의 밖에서 날아올라, 곤륜산(崑崙山)

을 지나서 지주(砥柱)에서 물을 마시고 약수(弱水)에서 깃을 씻고, 저녁에는 풍혈(風穴)에서 잔다. 이 새가

나타나면 천하가 크게 태평해진다. <설문(說文)>

 

맹조(孟鳥)

맹조는 맥국(貊國)의 동북쪽에서 나는 새의 이름으로, 그 새의 무늬는 적색, 황색, 청색이다.

<산해경(山海經>


고조선, 삼국시대에서 조선시대에고 새숭배(하늘숭배)의 토템을 간직한 우리의 전통적 조우관(새의

깃털장식을 한 관모)이나 솟대 문화등으로 면면히 이어져 오늘날 우리 대통령의 상징 역시

새숭배(하늘숭배)의 봉황에 모든 생명의 시작과 광명을 상징하는 동방의 뜻을 내포.
G마크조심 18-03-25 17:32
   
고려라는 나라. 아울러 지금 영어명으로 불리는 코리아 자체조차 고구려에서 온건데 대체 뭔 개소리냐고 저 미개한 놈들은 . 중국어가 아니고 한자겠지 언어랑 문자도 구분 못하는 븅쉰들 아이고 진짜 삼족오도 모르는 것들이 무슨 고구려를 넘봐 . 주몽 방송할때 이해나 갔냐 볍진들 ㅋ 지네나라 고대 역사사극이니 왜 이해해 보지?ㅋ ㅋㅋ
푸른능이 18-03-25 17:33
   
대충 잘 만들기는 했는데 내용이 아무래도 시간때문인지 부족하고 영어라 중간중간 못 알아듣겠습니다.
유어마인 18-03-25 17:35
   
짱깨들 부들부들대는거 보니 한번 봐줘야 될듯 ㅋ
웅컁컁컁 18-03-25 17:38
   
고조선 영역이 왜 저렇죠.
royo 18-03-25 17:46
   
댓글에 팩트폭행 시전하는 고수들이 꽤 있네요 ㅎㅎ
댓글러123 18-03-25 17:47
   
더럽고 추잡하며 냄새나고 미개한 중국인들이 몰려왔군요 마치 바퀴벌레처럼
굿잡스 18-03-25 17:49
   
동북아 최강대국, 독자적 동방문명권을 구축한 고조선 고구려문명권.


신석기 혁명, 빗살무늬 토기의 발명지.

유라시아의 동쪽, 한반도가 가장 앞선 지역이었던 이유
 
http://www.sisapress.com/journal/article/171669
 
 

고조선 비파형 동검과 고인돌등 분포도

https://blog.naver.com/itcoms0/220344390104?proxyReferer=http%3A%2F%2Fsearch.daum.net%2Fsearch%3Fw%3Dimg%26q%3D%25EA%25B3%25A0%25EC%25A1%25B0%25EC%2584%25A0%2520%25EC%2584%25B8%25EB%25A0%25A5%25EB%25B2%2594%25EC%259C%2584%26docid%3D33MvZ9OeFqASojmtT-%26da%3DIIM%26rurl%3Dhttp%253A%252F%252Fblog.naver.com%252Fitcoms0%252F220344390104
 

서토보다 앞선 동아시아 최초의 고조선 금속갑옷

http://cafe.daum.net/luck5194/MFUT/283?q=%B5%BF%BA%CF%BE%C6%20%B0%A9%BF%CA%C0%C7%20%BF%F8%C1%B6%20%B0%ED%C1%B6%BC%B1-%20%B0%ED%B1%B8%B7%C1
 

고대 한류로서 갑옷문화의 국제적 위상(1)
고조선 갑옷이 중국에 준 영향

http://www.breaknews.com/sub.html?section=sc5§ion2=������/문���


고조선, 고구려의 뛰어난 제강기술력.

http://hyala.tistory.com/247
 
http://cafe.daum.net/gjgumdo/36Hr/27?q=%B0%ED%B1%B8%B7%C1%20%BF%EC%BC%F6%C7%D1%20%C1%A6%B0%AD%B1%E2%BC%FA


魏略曰:其國殷富,自先世以來,未嘗破壞。

위략 왈 그 나라는 매우 부유하며, 선대로부터 오늘날까지 한번도 파괴당한 적이 없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 부여조


고구려와 백제는 전성시에 강병이 100만이고 남으로는 오(吳), 월(越)의 나라를

침입하였고, 북으로는 유주,연,제,노나라를 휘어잡아 중국의 커다란 위협이 되었다.

수(隨) 왕조의 멸망도 요동 정벌에 의한 것입니다."

高麗百濟 全盛之時 强兵百萬 南侵吳越 北撓幽燕齊魯 爲中國巨 隋皇失馭 由於征遼

-삼국사기 <최치원전>


(북위)세종이 이르기를,“고구려가 대대로 상장(上將)의 직함을 가지고 있으면서 해외(海外)를 모두 제압하여 사나운 오랑캐인 구이(九夷)를 모두 정벌하였다
 
《후위서》


其地後漢時方二千里。至魏南北漸狹,纔千餘里。至隋漸大,東西六千里。
 

그 땅은 후한때에 사방 2천리였다. 위나라 때 남북이 점점 좁아져서 겨우 1천여 리였으며,
 
수나라 때 점점 커져서 동서가 6천리가 되었다.ㅡ통전
 


도표로 한눈에 보는 천년 사직 고구려의 위엄.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ch1002&logNo=30152299778
 

동북아 최강대국 고구려의 역대 전적.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58906&sca=&sfl=wr_subject%7C%7Cwr_content&stx=%EA%B3%A0%EA%B5%AC%EB%A0%A4+%EC%A0%84%EC%A0%81&sop=and&spt=-5409&page=1
 

근현대 독소전쟁 이전

고대사 세계 최대 대전인 2차 고수전쟁 수나라의 300만 대군은 얼척의 과장인가?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78013&sca=&sfl=wr_subject%7C%7Cwr_content&stx=%EC%88%98%EB%82%98%EB%9D%BC+400%EB%A7%8C&sop=and
 


고구려 초기 2대 유리왕시절 축조되기 시작한 환도성

앞 궁궐 건물지 무려 90미터.

http://mnews.joins.com/news/article/article.aspx?Total_Id=343393
 


고구려  5세기
 
<안학궁 남삼문(南三門) 중 남중문(南中門) 38m 앞면 7칸

안학궁 남궁 1궁전(정전) 62m 앞면 11칸

안학궁 중궁 1궁전(편전) 87m.  앞면 19칸 >
 
 
7세기에 세워지고 확장된 당나라의 최대궁전인 대명궁의 정전인 함원전 정면 길이가 67.33m
 
북경  자금성에서 가장 큰 건물 태화전 정면 64m


동대사 크기는 높이 48m, 가로 57m, 세로 50m라오. 안의 대불은 15미터  =>우리 백제인에 의해 건립.



인도의 타지마할의 기단 크기 94m, 건물 크기 57m

남북국 시대 발해의 상경용천부 제2궁전 기단 크기 120m, 건물 크기 93.5m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56234&sca=&sfl=wr_subject%7C%7Cwr_content&stx=%ED%83%80%EC%A7%80%EB%A7%88%ED%95%A0&sop=and
 

 
고구려는 안학궁으로부터 750m 떨어져 있는 유사시를 대비한 배후 산성이
 
대성산성으로 전체 9km가 넘고 둘레는 7km가 넘으며 남문이 있는 골 안에서는 2
 
중으로,주작봉과 국사봉 골 안에서는 3중의 겹성에 내부에는 연못이 자그만
 
치 170여개가 존재.
 
http://blog.naver.com/bestchoi21/20018007630 -> 대성산성 사진


우리나라의 고대 도시 축조 역량과 위엄.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111385&sca=&sfl=wr_subject%7C%7Cwr_content&stx=%ED%83%80%EC%A7%80%EB%A7%88%ED%95%A0+%EB%B0%9C%ED%95%B4&sop=and
 

북위의 권력을 쥔 고구려인

http://blog.naver.com/csred7/80130397982
 

우리나라는 문물과 예악이 흥행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으며 장삿배가 연이어 내왕하여서 값진 보배가 날마다 들어오니, 중국과 교통하여도 실제로 소득이 없을 것입니다. 거란과 영구히 절교하지 않을 터이면 송 나라와 교통함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하니 따랐다.
  <고려사절요 문종 12년>
 

“예군 묘지명에 적힌 ‘日本’은 ‘百濟’지칭”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3042301032430074011
 

“일본은 원래 백제땅 일컫는 말이었다”

일 교수, 678년 ‘예군 묘지명’ 근거
“실제 일본은 해좌·영동으로 표기”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536435.html
 

‘大原眞人. 出自諡敏達孫百濟王也. 續日本紀合.’

대원진인, 그의 조상은 시호가 민달(비타쓰(敏達))이라는 백제 왕족이니라. ‘속일본기’ 기록에도 부합한다.

-신찬성씨록(서기 815년 일본 왕실이 편찬한 왕과 귀족 족보)


"제30대 비타쓰 천황(敏達·572~585 재위)은 나라(奈良)에 ‘백제대정궁(구다라오이궁 :百濟大井宮)’을 지었다”

비타쓰왕의 친손자인 제34대 조메이왕(舒明·629∼641 재위)도

"(우리나라 할때)나라의 ‘백제천(구다라강:百濟川) 옆에 백제궁(구다라궁; 百濟宮)과 백제사(百濟寺)라는 큰 가람을 지었다. 조메이왕이 구다라궁에서 살다가 서거했을 때 ‘구다라노오모가리(百濟大殯)’로 장례를 치렀다’"
 
-일본 서기


토쿄대  이노우에 교수
"일본은 고대 한국인이 세운 나라이다. 일본은 임나일본부 설치를 날조했을 뿐 아니라 오오진(應神)왕이 백제계 부여(夫餘) 후왕인 의라(依羅)이며, 기토라 고분의 40대 텐무(天武)왕은 신라 김다수(金多遂)임에도 일본인으로 변조했다. 최초로 일본을 지배한 천황은 백제인의 후손인 15대 오우진(應神·4세기)천황과 16대 닌토쿠(仁德·5세기)천황 부자다.  오우진 천황이 백제 복식을 입었다는 기록이 ‘일본서기’에 나온다. 이들 천황 부자에 의해 고대 일본의 가와우치(河內)왕조가 세워졌다.
 
USA캘리포니아대학 제러드 다이아몬드 교수
 
고대 한국인의 선조가 일본의 원주민 [조몬인],[야요이인(한국을 제외한 대륙민족)], [아이누족]을 정복하므로서 일본이라는 나라를 탄생 시켰다.

카큐슈우인대 오오노 스즈무 교수
 
"한국인은 일본인에게 금속 사용법을 가르치고, 야금·금공 기술을 전했으며,
염색·피혁제조·베틀 직조·기와 제조·의학·역법·천문학·조불(造佛)·사찰 건축·조탑 등 모든 것을 가르쳤다”(‘日本語の 世界’, 1980)
토부기 18-03-25 17:52
   
지들이 한국인을 부를때 가오리빵즈라고 부르면서 거기에 쓰인 가오리의 기원이 뭔지도 모름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댓글중에 정답이 있네요. 중국의 역사는 그들이 만든 중국제 물건과 같다. 명불허전 메이드인 차이나ㅋㅋㅋㅋㅋㅋㅋ
브레드 18-03-25 17:53
   
아 짱개들...;;; 우리 역사상 두개의 고려를 후대에 구분하기 위해 옛구를 넣어서 고구려라 한건데 고려가 코리아의 어원인건 다들 알테구;;; 장난까냐?;; 니들이 우리를 부르는 가오리 그게 고려다 빙딱들아;;;
NAFTA 18-03-25 17:59
   
요즘보면 나라가 짱깨에 사대의 예를 지키려고 염ㅡ병을 하는 것 같음 진짜...
일본이 500년의 적이라면 짱깨는 한반도 역사의 처음부터 끝까지의 적일것임;
중국가서 굴욕외교하고 외교부가 국방부도 안통하고 지 맘대로 이것 안하겟습니다, 저것 안하겟습니다, 말 잘듣겟습니다. 이런 말 씨ㅡ부리고 오고 대통령은 짱꺠년들 앞에서 한국보고 작은나라라고 하지않나 ㅋ
굿잡스 18-03-25 18:02
   
남북국시대(발해-신라)

동북아 해상무역을 장악한 신국(神國)의 신라.

성덕왕(聖德王) 30년,
일본국 병선 300척이 바다를 건너 우리의 동쪽 변경을 습격하였는데, 왕이 장수를 시켜 군사를 내어 이를 크게 깨뜨렸다. (日本國兵船三百?, 越海襲我東邊, 王命將出兵, 大破之.)
 
- 제대로 상륙도 하지 못하고 박살난 일본, 결국 용서를 빌기 위해 서기 742년에 사신을 파견하지만‥

애장왕(哀莊王)
5년 여름 5월에 일본국이 사신을 보내와 황금 300량을 바쳤다. (五年夏五月, 日本國遣使, 進黃金三百兩.)

- 이를 기특하게 여긴 신라는 드디어 일본을 용서하고 속국으로서 인정한다. 서기 806년 속국에게 하교하는 신라.

애장왕(哀莊王) 7년,
봄 3월에 일본국 사신이 왔으므로 조원전(朝元殿)에 불러 접견하였다. 교서를 내려 말하였다. 『절을 새로 짓는 것을 금하되, 다만 수리하는 것은 허락한다. 또 수놓은 비단을 불교 행사에 사용하는 것과 금과 은으로 만든 그릇의 사용을 금한다. 마땅히 담당 관청으로 하여금 이를 널리 알려 시행하도록 하라.』(七年春三月, 日本國使至, 引見朝元殿. 下敎禁新創佛寺, 唯許修葺. 又禁以錦繡爲佛事, 金銀爲器用, 宜令所司, 普告施行.)
 
- 사찰을 수리하는 것조차 '종주국' 신라의 허락이 없으면 감히 하지 못했던 일본. 이후 '속국' 일본에 대한 종주국 신라의 사랑은 계속되고… 신라의 어버이와 같은 사랑에 감동한 일본은 서기 882년, 보답한다.
 
헌강왕(憲康王) 8년,
여름 4월에 일본국 왕이 사신을 보내 황금 300량과 야광주[明珠] 10개를 바쳤다. (八年夏四月, 日本國王遣使, 進黃金三百兩·明珠一十箇.)


성종 28권, 4년(1473 계사 / 명 성화(成化) 9년) 3월 13일(계묘) 3번째기사
일본국 경극전 경조윤 좌좌목씨 등이 사람을 보내 와서 토의를 바치다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commu07&wr_id=624145&sca=&sfl=wr_subject%7C%7Cwr_content&stx=%EC%A1%B0%EC%84%A0+%ED%99%A9%EC%A0%9C&sop=and
 

유럽의 최대 도시라는 로마를 상회하는 세계 4대 대도시인 신라 서라벌의 위엄.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jurassicgump&logNo=220915736774
 

중국의 동쪽에 신라라는 나라가 있는데,
그곳에 들어간 사람은 공기가 맑고 부가 많으며 땅이 기름지고 물이 좋을 뿐만 아니라, 주민의 성격 또한 양순하기 때문에 떠나려 하지 않는다

-창세와 역사서<마크디시(al-Maqdi shi>


그곳(신라)을 방문한 사람은 누구나 정착하여 나오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곳이 매우 풍족하고 이로운 것이 많은 데 있다.

그 가운데서도 금은 너무나 흔해 그곳 주민들은 개의 사슬이나 원숭이의 목테도 금으로 만든다.

-이드리시(이슬람 지리학자)-1154년에 신라가 포함된 지도를 만듬


신라는 중국의 맨 끝에 있는 대단히 좋은 나라다.

그들의 집에 물을 뿌리면 용연향(龍涎香 - 아주 좋은 향기)이 풍긴다고 한다.

전염병이나 질병은 드물며 파리나 갈증도 적다.

다른 곳에서 병에 걸린 사람이 그곳에 오면 곧 치유된다.
 
 
-무슬림이 남긴 것이라고만 전합니다-


중국 저쪽에 산이 많은 ‘신라(Shila)’라는 나라가 있는데

금이 풍부하고 물 맑고 공기가 좋아

한번 간 무슬림은 돌아오지 않는다

후르다드베(Ibn Khurdadbeh)의 '제 도로와 왕국 총람' (이슬람)


신라 서라벌에는 약 17만호의 가구가 있었다. 이는 대략 90만-100만의 인구가 거주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훗날 조선의 한양보다 4-5배나 더 많은 인구가 살았던 것으로, 혹자는 콘스탄티노플, 바그다드, 장안과 함께 서라벌을 당시 세계 4대 도시로 꼽는다.
 
 인구가 많다고 세계적 도시로 꼽는 것이 아니다. 신라, 특히 서라벌에는 초가집이 없이 모두가 기왓집이었다. 온통 금으로 뒤덮은 집도 수십채나 되었다. 그들의 부유함을 짐작할 수 있다. 여기서 또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신라는 차도와 인도가 나란히 잘 정비된 도로를 갖추고 있었다는 점이다. 인도 옆에 마차가 수월하게 다닐 수 있도록 바퀴 자국에 맞춘 도로의 흔적이 아직까지도 뚜렷이 남아 있다. 그리고 그 도로 옆으로는 배수구의 흔적도 함께 남아 있다.
 
 우선 서민층 거주 지의 경우, 집집마다 우물 하나씩을 소유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발굴을 통해 밝혀졌다. 이처럼 서민층에서도 각 집마다 우물을 하나씩 갖고 있을 정도면, 당시의 서라벌이 얼마나 위생이 청결한 곳이었는지 충분히 짐작해 볼 수 있다. 당시에는 온돌을 사용하지 않고 숯으로 난방을 했는데 이를 뒷받침 해주기라도 하듯, 대규모의 숯 가마가 발견되기도 했다. 숯으로 난방을 할 경우, 매캐한 냄새가 나지 않고 그을음도 생기지 않으니 당시 사람들의 주거환경은 상당히 쾌적했을 것이다. 상류층 거주 지역의 경우에는 본채 건물 외에도 별채와 화장실까지 구비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처럼, 계획적으로 잘 정비된 도시였던 서라벌은 마치 바둑판과도 같은 형태로 도시 주거지를 이루고 있었는데, '방'으로 나뉘어지는 이러한 거주 구역은 한 방당 약 8천평 규모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골목마다 출입문이 있어 치안상태도 좋았다. 그래서 '몇번째 골목, 몇번째 집' 하는 식으로 주소만 알면 집을 찾는 일도 매우 쉬웠다. 따라서 인구조사 또한 치밀하고 완벽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가구당 가축의 수까지 세세히 기록해 놓았다.
 
 
천년 전의 도시가 오히려 지금의 대도시보다 더욱 계획적으로 잘 정비되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KBS 역사 스페셜>


해동성국 발해 영역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63072&sca=&sfl=wr_subject%7C%7Cwr_content&stx=%EB%B0%9C%ED%95%B4+%ED%8A%B8%EB%A1%9C%EC%9D%B4%EC%B4%88%EC%BD%94%EC%98%88&sop=and
 

인도의 타지마할의 기단 크기 94m, 건물 크기 57m

남북국 시대 발해의 상경용천부 제2궁전 기단 크기 120m, 건물 크기 93.5m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56234&sca=&sfl=wr_subject%7C%7Cwr_content&stx=%ED%83%80%EC%A7%80%EB%A7%88%ED%95%A0&sop=and
 


요, 송을 멸망시키고 동북아 패자가 된 금나라 황실 조정내의 고구려계(발해인) 파워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18543&sca=&sfl=wr_name%2C1&stx=%EA%B5%BF%EC%9E%A1%EC%8A%A4&sop=and&page=4
 

고구려 5부를 이은 발해 5경중 상경용천부.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163495
Korisent 18-03-25 18:05
   
역사 전쟁 이거 장난아니에요. 한국식민빠 떼문에 고구려도 중국역사로 인식 되버렸어요. 그리고 환빠들도 도움 안됌. 일본.차이나. 그리고 미국.영국에서도 고구려가 한국역사 아니라고 합니다. 이거 심각한 문제임. 그냥 북칸을 이젠 중궈에 넘길날만 남았음니다. 벌서 부요.백제 도 한국역사 아니라고 식빠들이 외국에도 설쳐고 있네요. 신라역사도 한국역사 아니라고 하는 한심한 넘들도 있음. 그럼 남은역사는 고려.조선.
     
G마크조심 18-03-25 18:12
   
당신 국적이나 말해. 이걸 지금 한국어라고 쓴거야? 참나 ㅋㅋㅋ 이것들이 아주 그냥 눈 가리고 아웅하네ㅋㅋㅋ
짱깨 앞잡이 노릇한 조상 두니 좋냐? 두고 봐라 짱깨 분열될때 니들은 너네 본토로 쫓아내줄께.
친한파 조선족들 흑룡강쪽에 많다는데 그치들 불러서 연변 다 먹어버린다음 우리가 흡수해줄께.
기다려 . ㅋ 멀지 않았어.
     
kkuk1129 18-03-25 18:14
   
닥쳐 쓰레기같은 짱꺠새끼야
     
깁스 18-03-26 09:10
   
먼 헛소릴 이리 장황가세 미친나
하늘치 18-03-25 18:11
   
노예의 역사는 한족의 역사고 ㅋㅋㅋㅋㅋㅋㅋㅋ 지금와서 그동안 오랑캐 취급을 하던 놈들을 중화민족이니 뭐니 하면서 허구의 개념으로 한족과 묶으려고 하는 것 같다만 역사적으로 계속 소수민족과 한족과 분리되서 봐줘왔으며 근대 시기에도 멸만흥한을 부르짖는 등의 부정할 수 없는 증거가 널렸구만 노예로서 한족의 역사에 대해서 부정하기 바쁘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날으는황웅 18-03-25 18:16
   
일단 고조선이라는 말부터 고쳐야됨 정확히 시대를 구분하는 古자를 국호앞에 붙인게 잘못임 그럴려면 이성계가 세운 국호를 후조선이나 근대조선으로 해야 맞음 그러면 저 짱깨들이 말하는 고조선이나 고구려가 우리의 역사가 아니라는 뻘짓을 못함.
저 영상에서도 말하듯이 고조선이라 말하면 그게 국호인지 앎
처음부터 조선이라고 하면 후대의 조선을 보고 아~! 새로운 나라가 아니고 예전의 조선이 다시 부활했다는 생각을 하게 될것임
그리고 저기 짱깨가 말하는 한문으로 쓰여진 우리의 역사는 중국어가 아님 왜? 그건 지덜이 더 잘앎 지금의 일반짱깨는 한문으로 씌여진 고서를 읽을줄 모르는것은 매한가지임.
굿잡스 18-03-25 18:19
   
중세

새로운 남북국 시대 돌입.

발해부흥국(금나라)- 고려


남북국시대 이후

발해 부흥국들이 북방에서 난립하면서 이어지다

신라에서 고려로 왕조가 교체되면서 일단의 무리가 북으로 올라가 발해 유민을

규합 즉 신라계황제+발해 유민의 반요사상의 금나라로 마침내 통합되면서 요를 멸망시켜버리고 압박해오던

서토 송나라까지 멸망시켜 버리면서 동북아 패자로 군림. 이후 서토를 지배하기 위해 고구려계 장호가 북경에 중도

를 건설하며 팽창가속)


발해 부흥국.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167493&sca=&sfl=wr_subject%7C%7Cwr_content&stx=%EB%B0%9C%ED%95%B4&sop=and&page=2


그 경계선의 서북쪽은 당나라 이래로 압록강을 경계로 하였고, 동북쪽은 선춘령을 경계로 하였다.
대개 서북쪽은 고구려에 미치지 못하였으나 동북쪽은 고구려의 경계를 넘었다.
 
-《고려사》


중세 고려

우리나라는 문물과 예악이 흥행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으며 장삿배가 연이어 내왕하여서 값진 보배가 날마다 들어오니, 중국과 교통하여도 실제로 소득이 없을 것입니다. 거란과 영구히 절교하지 않을 터이면 송 나라와 교통함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하니 따랐다.
  <고려사절요 문종 12년>


근자에 사신이 그곳에 가서 물어보고 알았지마는, 임천각(臨川閣)에는 장서가 수만 권에 이르고, 또 청연각(淸燕閣)이 있는데 역시 경(經)ㆍ사(史)ㆍ자(子)ㆍ집(集) 4부의 책으로 채워져 있다 한다.국자감(國子監)을 세우고 유관(儒官)을 선택한 인원이 완벽하게 구비되어 있었으며, 횡사(黌舍 학교를 말함)를 새로 열어 태학(太學)의 월서계고(月書季考)하는 제도를 퍽 잘 지켜서 제생(諸生)의 등급을 매긴다. 위로는 조정의 관리들이 위의가 우아하고 문채가 넉넉하며, 아래로는 민간 마을에 경관(經館)과 서사(書社)가 두셋씩 늘어서 있다. 그리하여 그 백성들의 자제로 결혼하지 않은 자들이 무리지어 살면서 스승으로부터 경서를 배우고, 좀 장성하여서는 벗을 택해 각각 그 부류에 따라 절간에서 강습하고, 아래로 군졸과 어린아이들에 이르기까지도 향선생(鄕先生 자기 고장의 글 가르치는 선생)에게 글을 배운다. 아아, 훌륭하기도 하구나!
 

-송나라 서긍의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 1123년의 내용)-


왜국은 일본국이다.
본래 이름인 왜를 부끄러워 했는데, 극동에 있어서 스스로 일본이라 부른다.
지금 고려에 신하로서 속하고 있다.

-도화견문지(1080년경에 송나라의 곽약허가 지은 책)


“옛 사서(역사책)에 따르면 고려의 풍속은 사람들이 모두 깨끗 하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지금도 여전히 그러하다. 

그들은 항상 중국인이 때가 많은 것을 비웃는다. 

(고려인들은) 아침에 일어나면 먼저 목욕을 한 뒤 집을 나서며, 

여름에는 하루에 두 번씩 목욕을 한다.”  -고려도경


(윤 5월) 갑자일에 거란에서 오윤판관 야율골타를 파견하여 동북 여진으로 가는 길을 빌려달라 하였으나 이를 승인하지 않았다.
 
-고려사 5권, 현종 17년
 
​​(원풍 5년) '선조 시기에는 여진이 등주에 와서 항상 말을 팔았는데, 뒤에 마행도가 고려에 속하게 되어 막혀서 끊겨 오래도록 오지 않았다고 들었다.
  지금 조정이 고려와 왕래를 하는 데, (고려)왕에게 조서를 내려 여진이 만일 중국에 말을 팔고자 하는 자가 있으면, 마땅히 길을 허락하도록 하겠다.'라는 조서를 내렸다. 그러나 끝내 여진의 사신은 오지 않았다.
 

-속자치통감장편
 

동북면병마사가 다음과 같이 건의했다.
“삼산·대란·지즐 등 9개 촌락 및 소을포촌의 번장 염한과 소지즐의 전리 번장 아반이와 대지즐의 여나기나오, 안무이주의 골아이 번장 소은두 등 1238호가 와서 호적에 편입시켜 달라고 요청해 왔습니다. 대지즐로부터 소지즐 요응포 해변까지는 700 리에 걸쳐 장성이 수축되어 있으며 지금 오랑캐들이 줄을 이어 귀부해오고 있는 마당에 관방을 설치하여 그들을 막아서는 안 됩니다. 해당 관리로 하여금 주(州)의 명칭을 정해 보고하게 한 후 밀봉한 공문을 내려 주십시오.”
  왕이 이를 허락했다.
 
-《고려사》, 문종 27년 6월
 
 
​한림원에서,
“동여진의 대란 등 11개 촌락에서 귀부해온 자들이 자기들의 거주 지역을 빈주·이주·복주·항주·서주·습주·민주·대주·경주·부주·완주 등 11개 주로 정해줄 것을 요청해 왔으니 그들에게 각각 밀봉된 공문을 내려 귀주와 순주에 소속시켜 주십시오.”
  라고 건의하자 왕이 이를 허락했다.
 
-《고려사》, 문종 27년 9월
 
 
​​서북면 병마사가 아뢰기를,
"서여진의 추장 만두불 등이 동번(동여진)의 예에 의하여 주•군을 나누어 설치해 달라고 청하며
평로진 근처의 유원 장군 골어부 및 멱해촌의 요결 등 역시 부적하여 영원히 번병이 되겠다고 원하므로 호수가 35호이고 인구가 252명입니다. 청컨대 판도에 등재하소서."
 

-《동국통감》, 문종 27년 5월
 

동북면 병마사가 아뢰기를,
"삼산, 대란, 지즐 등의 마을 번장이 1238호를 가지고 와서 부적해주기를 청하니, 청컨대 유사로 하여금 주호를 아뢰어 정하게 하고 또 주기를 내리소서."
 
-《동국통감》, 문종 27년 6월
 
 
​서북면 병마사가 아뢰기를,
"장성 밖에 개간한 전답 11494 경은 청컨대 가을 수확을 기다려 군량에 보태게 하소서."
하니, 제가하였다.
 
-《동국통감》, 문종 27년 2월

송을 멸망시키고 서토를 지배하기 위해

북경에 세운 중도(중도대흥부 (中都大興府)) 건설의 총지휘자.

금나라 국무총리격인 장호(張浩)

금나라 요양(遼陽) 발해(渤海) 사람. 자는 호연(浩然)이고, 본성은 고(高)씨다. 경사(經史)에 정통했고, 특히 시에 뛰어났다. 태조에게 책략을 올려 어전문자(御前文字)를 담당하도록 명받았다. 태종 천회(天會) 8년(1130) 진사급제를 인정받고 비서랑(秘書郞)에 올랐다. 해릉왕(海陵王) 때 호부상서(戶部尙書)와 참지정사(參知政事), 상서우승(尙書右丞), 평장정사(平章政事), 상서령(尙書令)을 역임했고, 연경(燕京)의 성곽과 변경(汴京)의 궁실을 증축하는 일을 전담했다. 세종(世宗) 때 태사(太師)와 상서령을 지냈다. 저서에 『화표산인집(華表山人集)』이 있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707698&cid=42981&categoryId=42981
 
몽골제국의 5대칸이자 서토를 정복하고 원을 세운 쿠빌라이는

북방의 요와 이런 금나라 즉 신라계황제+발해인 연합의 도시문명과 인력의 강북 발판하에서

몽골의 칸에 오르면서 남송을 정벌,노예로 삼고 세계제국을 경영하는 중추 기반이 됨.




연해주 조선식 산성.

러시아과학원 극동지소 역사학고고학민족학연구소 아르쩨미예바 연구원은 17일 인천광역시 인하대 60주년 기념관에서 인하대 고조선연구소 주최로 열린 학술회의 발표를 통해 "요(遼)나라나 금나라의 유적으로 알려졌던 수류봉(峰) 산성(山城)에서 전형적인 한국식 타날(打捺·두드림) 문양의 기와들을 발견했다"며 "이 산성은 출토 유물과 성벽 축조 기법으로 보아 조선 초기에 6진 설치로 북쪽 국경이 확정될 때 방어 전초기지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고 주장했다.
 
수류봉 산성은 연해주 하산 지구의 중국과 러시아 국경에 위치해 두 나라에 걸쳐 있다. 전체 둘레 길이는 727.5m이고 높이는 1.5~2m이다. 러시아 조사단은 작년부터 남문 터 안쪽에 4개의 초석이 있는 구역을 발굴했다. 두드려 낸 반호(半弧) 모양의 문양을 가진 기와와 옹기 조각이 대량 나왔고, '대왕(大王)'이란 한자 명문(銘文)도 발견됐다. 아르쩨미예바 연구원은 "수류봉 산성은 연해주 일대의 요·금나라 성벽과는 구조와 유물이 다르다는 데 중국 학자들도 동의하고 있다"고 말했다
 
http://m.news.naver.com/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23&aid=0003330568
 



금나라 황릉의 모델은 고려 황릉(왕릉)이었다.’ 12세기 북중국을 장악했던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1115∼1234) 황릉이 고려 황릉과 형제처럼 꼭 닮았다는 비교 연구가 국내에서 처음 나왔다. 금 태조 완안아골타(1068∼1123)가 10세기에 건국한 고려를 ‘부모의 나라’라고 불렀던 것을 감안하면, 당대 사회적 문화적 역량을 총집결시켰던 국책사업인 황릉 조성을 한반도에서 벤치마킹했던 것이다
 
장경희 한서대 문화재보존학과 교수는 최근 학술지 ‘동방학’에 게재한 논문 ‘12세기 고려·북송·금 황제릉의 비교 연구’에서 “고려와 금 황릉은 양식적으로 매우 유사하며 같은 시기 북송 황릉과 뚜렷이 구별된다”고 주장했다.
 
http://news.donga.com/3/all/20140313/61666261/1
 

女真酋長乃新羅人 (송막기문- 남송기록)
("여진의 지도자는 신라인이다")
"其初酋長本新羅人" (몽골  금지(金志))
(여진의  초기지도자는 신라인이다.)
"金之始祖諱函普,初從高麗來,年已六十餘矣" (금사 (金史))
(금의 시조  함보는 처음에 고려에서왔을 때  60세였다.)


  "만주족은 신라로부터 나와..."
  因滿族自新羅、
  "신라성씨 김이 금나라의 원류이다."
  新羅王金姓則金之遠派
  "금의 시조 함보는 처음에 고려로부터 왔다."
  金之始祖諱哈富(舊作函普)初從髙麗來

-청황제 칙령의 만주원류고 중


续资治通鉴 卷二百一十四 元纪三十二》记载:“后亦多畜高丽美人,大臣有权者,辄以此遗之,京师达官贵人,必得高丽女然后为名家。自至正以来,宫中给事使令,大半高丽女,以故四方衣服、靴帽、器物,皆仿高丽,举世若狂。”
 
 

"황후도 역시 고려미인으로 삼아, 대신유권자는 곧 이를 귀하게 여겨, 수도

고관귀인은 반드시 고려여자를 얻은 후에야 명가가 된다. 그렇게 된 이래,

궁중급사사령, 대반이 고려여자이며, 이런 이유로 사방의 의복, 신발과 모

자, 기물 모든것을 고려를 모방해, 온 세상이 미친 것 같다.

[속자치통감 제이백일십사 원기삼십이]

 

《菽园杂记》::“马尾裙始于朝鲜国,流入京师……于是无贵无贱,服者日盛。至成化末年,朝臣多服之者矣。阁老万公安冬夏不脱……。大臣不服者惟黎吏侍淳一人而已。此服妖也,弘治初始有禁例。”
 
마미군은 조선국(고려)에서 시작되어, 수도로 유입됬으며......귀천을 가리

지 않고 복식이 날 로 성했다. 성화말년에 이르러, 조정 신하들도 입게 되었

다. 각로만공안이 겨울에도 여름에도 벗지 않았다.....이 복식은 요사하므로,

홍치 초시에 금지되었다. 

[숙원잡기]

 

《寓圃笔记》:"发裙之制,以马尾编成,系于衬衣之内。体肥者一裙,瘦削者或二三,使外衣之张,俨若一伞。",

치마를 넓히는 제도는, 말꼬리를 옷안에 엮어서 만든다. 몸을 비대하게 만든

하나의 치마로, 마른사람은 혹 두개 세개를 입는다, 옷을 바깥으로 넓게 퍼

지게 만드는데 쓰는데, 우산과 같다."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74179&sca=&sfl=wr_subject%7C%7Cwr_content&stx=%EA%B3%A0%EB%A0%A4%ED%92%8D&sop=and
 


 ‘고려비색(高麗翡色)  천하제일(天下第一)’

-송나라 태평노인의 ‘수중금(袖中錦)’ 중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soullaw&logNo=220476237900 (중세 고려청자 사진)
 

동아시아 독보적 경지에 올랐던 고려 회화(불화)

http://cafe.daum.net/indelamang/1SaH/538?q=%B0%ED%B7%C1%20%BA%D2%C8%AD%20%B1%E2%BC%FA%B7%C2
 
http://blog.daum.net/migiro/1210
 

세계 최초 고려 금속활자 (세계 활자 종주국 고려)

http://cafe.daum.net/mujuseonwon/2lvx/7406?q=%B0%ED%B7%C1%20%BC%BC%B0%E8%C3%D6%C3%CA%20%B1%DD%BC%D3%C8%B0%C0%DA
 


고려 조선의 발달한 천문학.

1073년과 74년 <고려사>는 서양에서는 관측하지 못한 ‘신성’ 기록을 남겼다. 그뿐이 아니었다. 1592~94년 사이에도 역시 서양인들의 눈에 띄지 못한 객성을 4개나 관측했다. 특히 한 개의 객성은 15개월간 두 번의 연속된 기간에 걸쳐 관측됐다. 이 객성을 끈질기게 관측한 조선 천문학자들은 이 별은 나타났다 사라지는 신성이나 초신성이 아니라 고정별(항성)이라 판단했다. 그 판단은 옳았다. 그 별은 신성이나 초신성이 아나라 자체적으로 별이 밝아졌다 어두워졌다를 반복하는 변광성이었다. 이뿐이 아니다. 조선의 천문학자들은 1572년 덴마크의 천문학자 티코 브라헤가 관측한 이른바 ‘티코 초신성’도 동시에 보았다. 또한 1604년 독일의 천문학자 요하네스 케플러가 발견했다고 해서 ‘케플러 초신성’이라 명명된 초신성도 관측했다. 오히려 케플러보다 4일이나 먼저 관측하는 개가를 올렸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709130916001&code=960100#csidx5886a16c17d6a568c85a6ae9120d139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kalefarmer&logNo=221094800169
 

왜구 500여척을 몰살시킨 세계 최초의 고려 화포함대해전-진포대첩

http://gunsan.grandculture.net/Contents?local=gunsan&dataType=01&contents_id=GC05700012
 

세계 도시와 비교한 고려의 도시규모 포스!!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137014
 
고려 문화의 포스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137015
룬희 18-03-25 18:53
   
시진핑이나 좀 어떻게 하고 역사를 말하시지.

언제나 그렇게 세력에 휘둘려서 천지분간 못하고 있는 꼴이

귀엽네
zzag 18-03-25 18:55
   
초대 문교부장관이었던 안호상박사가 중국의 임어당을 만났을때 사담중에 중국의 한자 때문에 골치가 아프다고 하자 임어당이 무슨 소리냐 한자는 당신들 조상이 만든 문자인데 그것도 모르고 있었느냐고 한적이 있죠. 한자가 만들어진 은나라가 동이족의 나라였습니다.
팬텀m 18-03-25 19:18
   
이영상 오늘 오전에 봤었는데 고조선 영토 보고 왜 저따구로 표시했지? 했는데
굿잡스 18-03-25 19:21
   
근세조선


명사:

천순 3년 변경 장수가 보고하길 건주삼위의 도독이 몰래 조선과 결탁하였습니다. 이에 두려워하여 중국이 병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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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실록

야인과 왜인들은 모두 우리의 번리이고 우리의 신민이니 왕된 자는 똑같이 대우하고 차별을 없이하여 혹은 무력을 사용기도하고, 내가 즉위한 이후에 남만, 북적, 이것은 하늘의 끌어들이는 바이지, 나의 슬기와 힘이아니다. 흑룡강, 속평강, 건주위, 올량합, 이만주 동창등 심처 야인과 삼위 달자가 관문을 두드리고 입조하기를 청하거든, 그 종인을 줄여서 후대하여 올려보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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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실록


누가 조선을 일컬어 예의를 아는 나라라고 하였는가? 이 일은 태산을 끼고 북해를 건너뛰는 따위가 아닙니다. 어찌 무례하기가 이와 같습니까?

(명나라 사신이 조선한테서 박대받고 한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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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 10권, 2년(1454 갑술 / 명 경태(景泰) 5년) 1월 6일(무오) 5번째기사
김우을두합 등이 야인들이 세조를 알현하고자 원함을 아뢰다


요동 도사(遼東都司) 왕상(王祥)이 말하기를, ‘요동사람들이모두말하기를,

「수양대군(首陽大君)은 대장(大將)의 의모(儀貌)가 있었는데, 이제과연 발란 반

정(拔亂反正)2142) 하였다.’ 하고 탄상(嘆賞)하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그때 세조(世祖)가 농사에 힘쓰고 학교를 일으키고 군사를 양성하기를

일삼아서, 궁병(弓兵) 백만을 길러 오랑캐[夷狄]를 제압하려고 결심하고 진법(陣

法)을 익히고 군사를 훈련하니, 왜인과 야인들이 모두 위덕(威德)을 흠모하여 다

투어 와서 조현(朝見)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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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 40권, 12년(1466 병술 / 명 성화(成化) 2년) 11월 2일(경오) 3번째기사
 
시무8조에 관한 대사헌 양성지의 상소문


우리 나라의 인민(人民)은 무려 1백만 호(戶)나 되는데 그 중에서 활을 잘 쏘는

 병졸이 30만 명이고, 정예(精銳)한 병졸이 10만 명이며, 용감한 군사가 3만 명입

니다.


대개 성곽을 쌓을 때 높은 산을 베고 있다. 가끔 언덕이나 산기슭을 나와,

또한 구불구불 둘러 있는 것이 보인다. 큰 것이 날아갈 듯 치첩이 솟아 있고,

작은 것도 우뚝하게 표관이 웅장하다.
 

환취(황해도 봉산군에 있는 누각)는 날아갈 듯 아름답고, 총수(산 이름)는 구름이 이어졌다.
 
보산(관<關> 이름)에는 서기가 날아오르고, 금암(관<關> 이름)에는 시내가 통과한다.
 

[개성은] 봄바람에 술집 깃발이 나부끼고, 달밤에 음악소리 들린다.

그 민물(民物)은 풍성하여 실로 다른 고을에 비길 것이 아니고,

풍기(風氣)는 밀집하니 또한 서경(평양)에 견줄 바가 아니다.
 


[서울은] 트인 길과 통한 거리는 바르고 곧아서 구부러짐이 없고,
 
잘라낸 듯한 처마에 우뚝 빛나는 집이다.

모든 집은 높은 담이 있어서 바람과 불을 막고,

방마다 북쪽 창을 뚫어 더위를 피한다.
 



[서울에는] 종고라는 다락이 있다. 성 안의 네거리에 있는데 매우 높고 크다.
 
서울 안에 우뚝 솟았고, 길가에 높고 높도다.

시끌벅적 수레와 말 소리가 울리고,  끝없이 어룡 유희가 나온다.
 
식기는 금, 은, 동, 자를 섞어서 쓰고, 품물(品物)은 바다와 육지의 진기한 것이 고루 많다.
 
경기 안의 경치로는 한강이 제일이다.
 
누대는 높아 구름을 막고, 물은 푸르러 거울처럼 비춘다.
 
나루로는 양화도가 있는데, 물산(物産)이 또한 번성하다.
 
활은 중국의 제도에 비하면 조금 짧다. 그러나 화살은 매우 잘 나간다.
 
 -명(明)의 동월(董越)이 1488년의 조선을 보고 1490년에 쓴 조선부[朝鮮賦]-

 
이 나라는 풍요하여 많은 쌀과 보리가 나고, 과일로는 배, 호두, 무화과, 밤, 사과, 잣,

그리고 무진장한 꿀, 약간의 비단, 다량의 면화와 베를 생산하고 있다. 지하자원으로는
 
금과 은 광산은 적다고 한다. 하지만 많은 말과 소, 양질의 노새, 당나귀, 게다가 전 국토에 걸쳐

수많은 호랑이가 서식하고, 그 밖에 갖가지 다양한 동물이 있다. 그들이 만든 공작품은

정교하고 아름다워서 그들이 솜씨가 좋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 사람들은 피부색이 하얗고
 
건강하고 대식가들이며 힘이 세다. 그들은 터키 인의 활과 같은 작은 활을 매우 잘 다루고,
 
독을 바른 화살을 사용한다고 한다.



역대의 조선 국왕들은 가장 훌륭하고 중요한 도시에 큰 궁전을 지었는데,

그곳에 수많은 가신을 거느린 관청이 있었다. 서민들의 집은 대부분 기와지붕이며,
 
그 밖에는 초가지붕으로 그다지 청결하지는 않다. 그렇지만 귀인과 부호들은
 
결이 고운 식물로 짠, 정교한 장식이 있는 극히 질 좋고 광택이 나는 돗자리를
 
집안에 깔고 있는데, 일본인이나 일본에 오는 포르투갈 인들은 그것을 매우 진귀하게 여겼다.
 


우리는 나가사키에서 조선으로부터 들여온 몇 벌의 백의를 보았는데, 그 옷에는
 
더할 나위 없이 섬세하게 공을 들인 자수를 해 놓았다. 그것은 어떤 부분은 짠 것인지
 
아니면 실과 바늘로 꿰맨 것인지 여간한 시력이 아니고서는 구별이 불가능 할 정도였다.
 
이상의 내용들이 조선을 여러 차례 방문했던 사람들을 통해 관백의 궁정이

조선에 대해 입수했던 정보의 요약이다.
 

 -루이스 프로이스(Luis Frois, 1532~1597년)의 일본사(Historia de Japam)-



[개성은] 봄바람에 술집 깃발이 나부끼고, 달밤에 음악소리 들린다.

그 민물(民物)은 풍성하여 실로 다른 고을에 비길 것이 아니고,

풍기(風氣)는 밀집하니 또한 서경(평양)에 견줄 바가 아니다.

 -명(明)의 동월(董越)이 1488년의 조선을 보고 1490년에 쓴 조선부[朝鮮賦]-


3,300여칸에(혹2600여칸) 달하는 시전행랑이 1414년에 완성했습니다.
 
이제 조선을 건국한 시점이고...조선 후기보다는 고려시대와 가까웠던 시절입니다.
 
그리고 동월이 본 술집깃발은 고려시대의 문화입니다. 그리고 조선 전기에도 짧은 기록에까지 남아있을 정도로 여전히 번성했음을 알 수 있고, 당시 개성이 매우 발달했음을 알 수 있군요.

세종실록 28권, 세종 7년 6월 23일 신유 6번째기사

전 판나주목사 정수홍(鄭守弘)의 진언은,

"전조(前朝) 사재(司宰)의 어물고(魚物庫)가 송도에 있었사온대, 겨우 단층 3간뿐이었사오나, 그래도 5백 년 동안 국가에서 소용되는 데 모자란 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사재감에는 이층 창고가 서너 채가 있어 높고 크기가 굉장하오나, 그래도 다 들여넣을 수 없어서 가창고(假倉庫)를 많이 짓기까지 하였습니다."
 

성중의 사찰이 민가보다 더 많았으며, 그 중에도 크고 웅장하며 높고 특출한 전각은

지금까지 오히려 그대로 남아 있으니 그 당시의 존숭함이 지극하였던 것을 상상할 수 있다.

-연복사탑 중창기(演福寺塔重創記, 1393년)-

 

십천교(十川橋)를 지나 연복사(演福寺)에 이르니 절 가운데 5층 누각이 높이 솟아

주위의 성문을 누르듯이 서 있었다. 누각의 벽면과 모서리에 채색 그림이

그려져 있는 참으로 웅장한 건물이었다.

-유송도록(遊松都錄, 1477년)-


 (5월 3일) 술시(戌時) 조선의 도읍 동대문으로 진입, 거기서 황성(皇城)의 모습을 바라보니 옥루금전(玉樓■x殿) 늘어선 기와집,

널따란 성벽들의 조형미는 극치에 달하고 수천만 헌(軒)과 늘어선 대문들, 보귀로운 모습은 이루 말로 다할 길이 없다.

그런데도 막아 싸우려는 병사들은 보이지 않고 대문은 굳게 닫혀 있어 온통 적막하였다.

(중략) 내리(內裏) 안으로 들어가 보니 궁전은 텅 비었고 사대문은 제멋대로 열려있었다.

그제야 전각을 자세히 살펴보니 궁궐은 구름위에 솟아있고 누대는 찬란한 빛을 발하여

그 아름다운 모습은 진궁(秦宮)의 장려함을 방불케 하더라.

(중략) 후궁(後宮)에는 화장품 향기가 감돌고 산호의 대상(臺上)에는 화려한 거울이 덧없이 남아있다.

난 향기는 전각 밖까지 풍기고 사람 살던 자취도 그렇거니와 하염없는 구슬로 장식한 침상들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건물마다 문이 열려 있고 궁문을 지키는 자 없으니 어디를 보아도 처량하기 짝이 없다.

그토록 용맹한 고니시도 천자(天子)의 옥좌(玉座)에 절을 하고 신성하고 고아한 분위기에 휩싸여 두 눈에 눈물이 괴니

소오스시마, 아리마, 오무라도 따라 눈물을 흘리었다.

-에도시대의 문헌 "조선정벌기 (朝鮮征伐記)"에서- 




동아시아 선진 조선의 불꽃축제

정종 1권, 1년(1399 기묘 / 명 건문(建文) 1년) 6월 1일(경자) 6번째기사
일본국 사신들에게 군기감으로 하여금 불꽃놀이를 베풀게 하여 구경시키다
   
 
일본국(日本國) 사신이 예궐(詣闕)하니 주식(酒食)을 하사하고, 날이 이미 저물게 되자, 군기감(軍器監)으로 하여금 불꽃 놀이[火戲]를 베풀게 하여 구경시켰다. 왜사(倭使)가 놀라서 말하였다.
 “이것은 인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천신(天神)이 시켜서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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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 32권, 4년( 1473 계사 / 명 성화(成化) 9년)
일본국 인백단 삼주 태수 원교풍이 양영서당을 보내어 선물과 글을 올리다

일본국(日本國) 인백단 삼주 태수(因伯丹三州太守) 산명전(山名殿) 소필(少弼) 원교풍(源敎?)이 양영 서당(亮瑛西堂)을 보내어 와서 토의(土宜)를 바치고, 아울러 사서(四書) 각각 1건(件)씩을 바쳤다. 그 서계(書契)에는 이르기를,
 

“공경히 생각하건대, 황제 폐하(皇帝陛下)께서 보위(寶位)에 오르시어 천운(天運)을 이어받으시니, 구방(舊邦)이 유신(維新)하며, 덕(德)이 하(夏)나라·은(殷)나라의 초정(初政)보다 뛰어나시고 도(道)가 요(堯)임금·순(舜)임금보다 위에 짝하시니, 지극히 축하하고 지극히 축수합니다. 신은 선조(先祖) 이래로 가세(家世)에서 상국(上國)3198) 에 빙문(聘聞)을 통하지 아니한 적이 없기 때문에, 경인년3199) 가을에 일개 암자승(菴子僧)과 석도문(奭都聞) 등을 차견(差遣)하여서, 옛날의 맹세를 닦으며, 또 토의(土宜)의 미미한 정성을 바쳤습니다. 다행히 금상 황제(今上皇帝)3200) 께서 왕위(王位)를 이어받으시는 초정(初政)을 만나서, 눈으로는 한(漢)나라 관리의 위의(威儀)를 보겠고, 귀로는 주(周)나라 시(詩)의 가송(歌頌)을 듣겠으니, 아아, 성대(盛大)합니다. 실로 문무(文武)의 나라인지라 영우(榮遇)하기가 너무나 크옵니다. 전사(專使)3201) 가 일을 끝마치고 동쪽으로 돌아오게 되매, 화로 동반(火爐銅盤) 1개와 동경(銅磬) 1개를 더하여 내려 주시니, 이미 후한 은혜를 받았으므로, 감격하고 기쁜 마음이 지극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지금 만복사(萬福寺)의 주지(住持) 양영 서당(亮瑛西堂) 등을 보내어 바다를 건너가서 박(薄)한 폐물(幣物)을 바치어 오로지 황제께서 왕위를 이으신 것을 배하(拜賀)하게 합니다.신은 비록 먼 하늘, 먼 바닷가의 땅에 있어서 위궐(魏闕)3202) 아래에 달려가 마음을 바치지는 못하나, 구구(區區)한 단성(丹誠)3203) 을 엎드려 예찰(睿察)하여 주시기를 빌며, 그리하여 주시면 천만 다행이겠습니다.
 신의 봉지(封地) 안의 백주(伯州)에 만복 선사(萬福禪寺)라고 하는 옛 사찰(寺刹)이 있는데, 허물어져 무너진 지가 세월이 오래 되었으므로 장차 다시 영조(營造)하려고 하여, 저번 때에 상국(上國)에 조연(助緣)3204) 을 구(求)하였으나, 너그러이 용납하여 주심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바라는 바는 대왕께서 관인(寬仁)으로써 포금(布金)3205) 의 봉시를 속히 행하여 주시면, 불각(佛閣)과 승방(僧房)을 일시에 다시 옛날처럼 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길이 성수(聖壽)가 만안(萬安)하시도록 봉축(奉祝)하는 일단이 될 것입니다. 하정(下情)3206) 은 지극히 황공함을 이기지 못하여 변변치 않은 방물(方物)을 별폭(別幅)에 갖추었습니다.”
 
JAP,아리타 도자기의 시조(始祖)격으로 조선인 사기장 이삼평.

『일본 도자기의 신, 사기장 이삼평』

http://cafe.daum.net/gwansan/KAN1/516?q=%C0%CF%BA%BB%20%B5%B5%C0%DA%B1%E2%C0%C7%20%BD%C5%20%C1%B6%BC%B1%C0%CE%20%C0%CC%BB%EF%C6%F2
 
에도막부, 조선통신사 일행에 극빈 대접

“한해 쌀 수확량 12% 접대비로 사용”

옥스퍼드大 루이스 교수 논문

“일본이 조선통신사의 한 차례 방문에 쓴 접대비용은 (일본의) 한 해 쌀 수확량의 12%를 넘었다.”


http://news.donga.com/3/all/20090202/8690797/1
 

조선 도시의 포스와 에도시대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136980
 
조선 후기 상업의 발달과 성시(城市)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137001
 
18세기 평양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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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잡스 18-03-25 19:27
   
1878년 일본을 여행한  gustafv kry torner가 남긴 동양기행기 에서 당시 일본인의 여러모습중 인상깊은 부분과 특히 수도 도쿄에 대한 설명.
 

[실제로 가면 기대한 것만큼 실망하게 된다  도쿄는 큰마을 정도의 느낌이다 그리고 도시에 널려있는 빈약한 목조주택  가운데 우뚝 솟아있는 왕의 거처도 궁전이라기 보다는 단순한 성벽같은 모습에 매우 초라했다.
 
그리고 이보다 더 심각한 모습은 바로 통치자의 행태이다 바로 민족의 낮은 수준을 그대로 방치하고 근절하는데 전혀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문화의 발전은 가장 핵심 공중도덕에 있다 하지만 일본인에게
 
공중도적은 조금도 존재하지 않는다 길거리에서 옷을 벗고 다니고 아무데서나 소변과 대변행위를 한다 한 마디로 공중도덕 완벽히 결여되어 있는것이다.
 
이런 점에서 일본인의 사고방식은 유럽인과 너무 차이가 난다 일본은 방문하는 사람들은 유럽과는 일거수 일투족이 전혀 다른 모습들을 늘상 목격하게 될것이다 어떤 도시든
 
마을이든 목욕탕이 있고 그곳에서는 어김없이 남녀가 한곳에서 목욕을 하는 모습을 발견할수 있다 그리고 특히 일본의 시골은 모두가 전혀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한다 그래서 너무나 비참한 모습들이다]
 

반대로 한국을 부정적으로 묘사했던 대명사로 알려진 이자벨라의 조선의 수도 즉 한양에 대한 구절

[지금 서울은 어느나라의 수도 에 비교하여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아름다우며 자신만의 모습을 보여준다 특히 근대 이 전통문화에서는 세계 최고의 수준을 간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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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국가로 박차를 가하던 대한제국과 고종황제의 광무개혁 및 근대 도시계획 추진(사진)

http://blog.daum.net/yo3oy7979/125
 

고려 '사개송도치부법' 서양보다 무려 2세기 앞선 근현대적 회계 복식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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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이미 와해되어 버린 신분제 (통계자료)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81122&sca=&sfl=wr_subject%7C%7Cwr_content&stx=%EB%8C%80%ED%95%9C%EC%A0%9C%EA%B5%AD+%EA%B4%91%EB%AC%B4%EA%B0%9C%ED%98%81&sop=and&spt=-15549&page=1
 
587년 전 세종이 국민투표를 실시한 까닭은?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nec1963&logNo=220959591555
 
세계최초의 민중? 서명운동, 조선시대 만인소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117828&sca=&sfl=mb_id%2C1&stx=shrekandy&page=1
 
조선과 같은 먼 극동의 나라에서 우리가 경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아주 가난한 사람들의 집에도 책이 있다는 사실이며, 이것은 선진국이라고 자부하는 우리의 자존심마저 겸연쩍게 만든다. 조선 사회에서 문맹자들은 심한 천대를 받기 때문에 글을 배우려는 애착이 강하다. 프랑스에서도 조선에서와 같이 문맹자들을 가혹하게 멸시한다면, 경멸을 받게 될 사람이 허다할 것이다.
 
- 프랑스 해군 장교 주베, 『파란 눈에 비친 하얀 조선』,


조선시대 한글 활자 인쇄본들

http://decentliar.tistory.com/601
 

오늘날 책대여점같은 조선시대 세책점(아녀자도 소설을 읽고 오늘날 넷에서 댓글 달듯

책에 댓글 놀이도 한)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smcschool&logNo=220808791129
 
당시 이정도의 문명률(글을 아는 수준)이면 세계사에서도 탑클래스군요.

(비록 근세 조선이 말기에 우리가 일본이라는 국호와 도시문명까지 건설해주며

수천년 신속하고  살던 왜에 35년 잽강점기의 치욕의 오점을 남긴 왕조이지만

괜히 문에서 선진강대국이자 방대한 인쇄문화에 코리아가 세계활자 종주국이 아니군요)


조선의 과학수사 수준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95129&sca=&sfl=mb_id%2C1&stx=shrekandy&page=3
 



1577년 조선의 <민간인쇄 조보>, 세계 최초 '활판 상업일간신문'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328988&CMPT_CD=P0001
 
이외 근세 조선이 비록 서구의 기계동력 기술과 무기의 교류가 늦어진 부분은 크지만

사회 전반적 문화상은 이미 다방면에서 선진적이였군요.




이미 현금인출카드를 쓰던 조선왕조!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100154&sca=&sfl=mb_id%2C1&stx=shrekandy&page=2
 
중, 일, 베등 동아시아 의학에도 영향을 준 세계 최초 공중보건의서 '동의보감'

문화재청(청장 나선화)은 국가지정문화재 보물이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인 「동의보감(東醫寶鑑)」3건을 국가지정문화재 국보로 승격 지정 예고하였다.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99808&sca=&sfl=wr_subject%7C%7Cwr_content&stx=%EB%8F%99%EC%9D%98%EB%B3%B4%EA%B0%90&sop=and
 

이런 공중 의서의 편찬과 상업의 발달에 따라 조선은 이미 18세기에

의약 분업 즉 진찰은 의원에게 약을 약방에서 찾는 형태가 나오는데 유럽은 이런건

19세기 이후로 가서야 나타나기 시작하는 사회상


조선! 세계 최초의 음식 배달 문화를 시작하다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102181&sca=&sfl=mb_id%2C1&stx=shrekandy&page=2
 

조선시대의 맛집소개서 / 미슐랭 가이드 ‘효전산고’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100027&sca=&sfl=mb_id%2C1&stx=shrekandy&page=2
 


유럽따위 씹어먹는 조선의 빈민구제소 수준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103930&sca=&sfl=mb_id%2C1&stx=shrekandy&page=2
 


황태연 교수
동국대학교 정치외교학과

1800년까지 중국 또는 동아시아의 1인당 국민 소득은 영국과 유럽을 앞질렀다. 그렇다면 조선은?

◇ 숙련노동자의 실질임금 비교


- 조선(1780~1809): 쌀 8.2kg
- 밀라노(1750~1759): 빵 6.3kg
- 런던(1750~1959): 빵 8.13kg

◇ 경작면적기준 총요소생산성 비교(1800년)


잉글랜드 100, 조선 134, 중국(강소성, 절강성) 191.
중국전체의 평균 총요소생산성은 191 이하일 것이나 이 역시 잉글랜드보다 高.

◇ 1인당 GDP 비교(조선 vs. 중국)


1820년 1인당 GDP - 중국: 600달러, 조선: 600달러
┃중국의 1인당 GDP 추이
- 인구의 비약적 증가로 인해 1500년부터 320년간 600달러 수준.
- 1870년 530달러로 추락.
- 1920~30년대 550달러대에서 등락을 반복.
┃조선의 1인당 GDP 추이
- 1870년 604달러로 반등
- 1911년 777달러(아시아 2위)
- 1917년 1,021달러
- 1939년 1,459달러
조선의 생활수준은 16세기말부터 상승하여 18세기 영·정조시대(1724~1800)에 정점을 기록한 후 하락.
- 16~17세기에는 중국보다 낮을 수 있으나 18세기 중국을 추월.
- 19세기(1820년)에는 다시 중국과 비슷한 수준.

◇ 조선의 교육복지


┃세종치세(재위 1418~50) 이후 18세기까지 지방향교, 사학(四學), 성균관 등 모든 유생들에게 무상교육, 무상숙식, 학비지급, 학전(學田)지급, 면세 및 요역면제.
  - "가르침에는 차별이 없다"는 「논어」의 유교무류(有敎無類)의 원칙에 따른 것.
ark87 18-03-25 19:30
   
오구오구 그래요~?
그러면서 산해관을 왜 거기다 맹그렀어요 ㅄ 짱깨들아~
별빛무정 18-03-25 19:46
   
그래서  만리장성  쌓았냐? 고구려가 무서워서? 이늠들  이야기 들으면,  앞 뒤가 안맞아 당췌 소수민족 애들이 먼 한족이네  개 소리를 하는건지...지들이 한족 말살해 놓고 이제와서 지들이 한족이야? 지나가던  개가  웃어 자빠질 일이다.
구르미그린 18-03-25 20:01
   
지금 티베트가 중국역사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세계인은 거의 없습니다.

역사 기록을 들어 고구려사가 중국사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은 이 문제의 맥락을 잘못 파악한 것입니다.

한국이 지금 추세대로 다민족국가화가 진행되면

북한과 민족적 동질성이 크게 줄어

통일의 원동력이 사라지고

영구분단의 길로 갑니다.

이 경우 한국은 고구려 발해 고조선과 상관없는 나라가 됩니다.

고구려 발해 고조선은 지금 한국 영토에서 일어난 역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도로 망명간 티베트인들이 중국의 티베트 역사 삼키기를 비난해봤자, 현실은 계란으로 바위치기이듯

한국도 중국의 고구려사 삼키기에 그러한 처지로 갈 위험이 매우 크고, 지금 그 길로 가고 있습니다.

게다가 한국내 외국인의 절반 이상이 중국인이라 한국의 다민족국가화는 사실상 중국화입니다.
구르미그린 18-03-25 20:02
   
삼성경제연구소가 "2050년까지 외국인노동자 1159만명 이주시켜야 한다"고 주장한 이래
역대 정부가 그 말대로 외국인 정책을 실시해

국내 외국인 수가 연간 20만명씩 증가 추세입니다.

지금 추세대로 가면 국내 외국인 수는 2021년경 300만, 2030년경 500만, 2050년경 천만 돌파합니다.

반면 한국 연간 신생아 수는 노동시장 악화로 인한 미혼율 급감의 결과로, 90년대에 비해 50퍼센트 감소했습니다.

세계역사상 이토록 단기간에 연간 신생아 수가 감소한 나라는 1차 대전 시기 독일뿐입니다.

지금 추세가 이어지면 한국이 100년뒤 티베트처럼 안 되리라 장담할 수 없습니다.

노무현 정부 시기부터 재벌 세력이
"외국인 대량이주 = 시대의 대세, 진보 VS 외국인 대량이주 반대 = 파시즘, 제노포비아, 민족주의.... 민족주의 = 나치 독일처럼 망하는 길"
"일본은 인구 줄어서 망하고 있다. 독일은 외국인 많이 받아들여 잘 나간다. 한국은 일본처럼 안 되기 위해 독일처럼 외국인 대량이주시켜야 한다"
는 날조 프레임을 언론을 통해 덮어씌웠는데,

한국이 그 독일, 일본보다 크게 망하는 길로 가고 있습니다.
월하정인 18-03-25 20:04
   
동방의 밝고 성스러운 왕 = 동명성왕東明聖王(국적: 대한민국)

짜장들은 닥치고

거란,여진,왜국 꺼지자
지하 18-03-25 20:23
   
고구려가 중국의 역사가 되려면 제일 먼저 작업해야 할 내용이
중국의 교과서와 역사서를 모조리 날조해야 되는데 이 한심한 짱깨야 그건 어떻게 설명할꺼냐

일단 팩트는 중국 교과서와 역사서에는 분명히 고구려는 한국 역사라고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

중국의 교과서
중국의 중학교 역사 교과서 제2권 제1과, 고구려를 한국사로 기술
중국의 교과서 세계사  제2권 제 10과.. 고구려를 한국사로 기술 

중국의 역사서
전한부터 명나라까지 총 24권에 기록된 중국의 역사서에 고구려는 모두 외국 열전이란 항목에 별도 포함.

중국 고대 역사서
삼국지, 진서, 송서, 남제서, 량서, 수서, 남사, 구당서, 신당서,의 외국 열전에
고구려.부여.동옥저.예.한.백제.신라가 외국열전에 포함되어 외국편에 실려있다.
당나라 고종이 백제 의자왕에게 보낸 편지에 해동3국이라고 고구려.백제.신라.라고 명기.
송나라 역사서 구오대사.오대사기의 외국열전에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 라고 기록.
송나라 서긍의 선화봉사 고려도경에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했다고 기록, 

중국 측 문헌인 ’송사’(宋史)의 기록. 송사(宋史) 고려열전(高麗列傳)을 보면
“고려(高麗)는 본래 고구려(高句麗)라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신오대사’(新五代史)에 의하면 당나라 말기에 일어난 큰 혼란을 틈타 고구려 유민이
자립하여 나라를 세웠고 그 나라의 국왕의 성이 고씨라고 기록되어 있다
* 신오대사(新五代史)』중국의 구양수(歐陽修)가 저술한 사서(史書). 74권. 정사(正史)

고려사(高麗史)  제2권 세가2  태조  계사 16년(933) 기록되어 있는 그 내용을 보면
“아! 아!  권지 고려국왕사 ’건’(왕건)은 고구려의 주몽이 건국한 전통을 계승하여 그 곳의 임금이 되었으며..”,
 “당신은 동방의 대족이요 해외의 강국으로서 문무의 재주를 가지고 그 지역을 장악하였으며..”,라고 하여
고구려 주몽과 고려의 왕건이 혈족관계에 있었다
이 기록은  중국 후당 명종이 말한 부분을 적은 기록이다

짱깨야 어디한번 날조해봐라! 왜놈처럼 어디 외국이라도 나가서 자국 역사서 토론하다가 쪽팔리는
경우를 당하기 싫으면 그냥 입다물고 살아
가출한술래 18-03-25 20:23
   
잘 보고 갑니다,.
술담배여자 18-03-25 20:39
   
ㅋㅋㅋ  짱개놈들은 이제 저렇게해야 사회신용을 쌓을수있게되겠지
차가버섯 18-03-25 21:01
   
붉은깃발 18-03-25 21:07
   
고구려는 한자쓰고 한국은 한글쓰니 고구려는 중국역사라고? 당시 백제.신라도 한글 안 썻는데 그 나라들도 중국의 역사냐? 한글이 언제 만들어졌는지 공부하고 짖어라 짱개야 누가보면 한글이 고대사에 만들어진줄 알겠네 지금 니네가 말하는 건 영국이 영어쓰는 모든 나라의 역사는 우리 꺼다 라고 하는거랑 같다 ㅉㅉ
로봇태껸V 18-03-25 21:31
   
짱깨들 혐오 스럽네.
헬로가생 18-03-25 21:45
   
ㅂㅅ 짱개들 절라 많네.
그럼 옛날 모든 문서를 라틴어로 쓰던 유럽은 다 이탈리아 땅이냐?
ekanf 18-03-25 22:32
   
왜곡오지네! 고조선이 한반도 북부일부라고? 그럴바엔 역사로 인정안하든지? 한자를 아직도 중국문자로 알고 있나? (한족도 인정하는 고대동이족문자임) 일부고대역사서엔 흉노를 고조선(고구려 계승)이라고 적고 있고 흉노의 면적만 한의 3배임. 그래서, 이후 선비,거란,몽골,중앙아시아등에서도 단군(약간씩 발음의 차이남),고구려건국신화등을 공유하는 것!
무적자 18-03-25 23:01
   
그냥 김용 소설 읽어보면..
짱께가 북방 민족들한테 털리고..
독립할려고 용쓰는거 잔쯕 나와 있고만요..

영웅문도 그렇고 아만리성에서도 그것 조금 보이고..
녹정기에서도 보이고
천령팔부에서도 보이는고만요...

지들이 써놓은 소설에서 그렇게 독립할려고 용쓰는거 써놓고..
지금 저러면 쪽팔리지 않는 원...
무적자 18-03-25 23:04
   
영웅문 1부는 금나라하고 싸우는것이고..
영웅문 2부는 금나라와 싸우다 몽고하고 싸우고..
영웅문 3부는 몽고에서 독립할려고 용쓰는거고만...
무적자 18-03-25 23:05
   
녹정기는 청나라한테 개털리고
독립할려고 용쓰다 또 개털리는거고..
su수 18-03-25 23:05
   
영상에 사용한 지도의 범위가 작은 것이 조금 아쉽지만 재미난 번역이네요.
잘 보았습니다.
칼까마귀 18-03-25 23:43
   
잘 보고 갑니다.
kuijin 18-03-26 00:14
   
중국인들 참 못되었어. 지들이 대륙을 차지하고 제국행세를 했으면 만족을 알아야지, 다른 민족의 역사들을 자신 것이라고 ㅈㄹ을 하니 대국으로써 대접을 못 받는 것이다.
자기자신 18-03-26 03:03
   
잘 봤습니다
잔잔한파도 18-03-26 03:33
   
중국이 고구려를 자기 역사로 편입 시킨 작업들이 오히려 나중에 부메랑이 되어서 그들의 발목을 잡히게 되길 원합니다.
뭘맨날지려 18-03-26 03:50
   
조아요
필리핀세부 18-03-26 06:00
   
역사의 기록이 중요하나 중국인을 짱개라고 개무시하는 건

광활한 영토를 가졌던 그리고 그것을 기억하는

우리 국민들의 몸안에 이미 오래전 DNA가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ANINY 18-03-26 06:29
   
현재 제대로된 교육조차 받지못하고 독재자에게 휘둘려 행동과 생각을 지배당하고 객관적인 사고와 행동이 불가능한 민족이 어딜감히 세계가 어떻고 역사가 어떻고 다른나라에대해 얘기할수있는지 기가막히고 코웃음밖에 안나옴.
니네코가 석자인데 니들이나 걱정하세요. 엄청 큰 우물안에 갇혀서 지들이 최고라 부르짖는 11억마리의 개구리들아.
최순실 18-03-26 06:49
   
잘 보고갑니다...
발자취 18-03-26 07:57
   
잘 봤습니다~~~
깁스 18-03-26 09:11
   
대부분이 노예사인 놈들이 어디서
헝그리댄서 18-03-26 09:36
   
가생이 지식인들 존경스럽습니다
스카이넷 18-03-26 11:38
   
평창 동계 올림픽에서 고구려는 우리역사란걸 전세계에 각인 시켰지..
멍하니 18-03-26 12:15
   
개같은 짱갸새끼들 가만두면 안되는데
숭구리 18-03-26 12:43
   
짜장이 설치고 쪽빠리가 간혹 튀어 나오는 건지.
쪽빠리가 짜장인 척 설치면서 한국인이랑 싸우니까 중국인이 튀어 나오는 건지는..
모를 일 아닌가?ㅋ

유투브에서 깝치는 놈들은 대부분 쪽빠리였는데 중궈들은 솔직히 한국인이 시비를 먼저 거는 측면이 많아서 한국인과 중국인의 분쟁은 사실 한국인 잘못임.
별 다른 이유 없이 중국인에게 시비 걸면서 욕하는 한국인(?)을 많이 봤고 한국, 한국계라는 이유만으로 욕하는 쪽빠리들을 많이 봤었지..

뭐 요즘은 예전보단 눈에 안 띄지만 ㅋㅋ 뭐 모를 일인가? 내가 요즘 인터넷을 많이 안 하니까..

물론 이걸 개개인으로 나눠 볼 수는 없지만 형세를 판단 했을 땐 그렇다는 말임.
직장인 18-03-26 13:14
   
번역 수고하셨어요

한중 역사 문제에 도대체 일본이 왜 끼어들고 우리를 왜 욕하는데....

영상속 우리의 역사도 축소된 상태인 것 같고..저 미개한 중국인들의 중화사상은 보는 내가 안쓰럽다
소프트쿠키 18-03-26 14:26
   
번역글 읽다가 짜증나서 내림.  ㅅㅂ 짱개 새끼들...  한반도 통일을 전시에도 막고 여전히 막고있는 주범국
연합해서  짱개국 처조지고 갈라 놓아야 한다
호돌조 18-03-26 14:53
   
중국 소수민족이 독립해야...
프리나이트 18-03-26 17:37
   
중국 역사 그냥 지배당하는게 자기들의 자랑인 한의 역사 아닌가?
지배당하면서 매일같이 자기들의 역사가 없으면서 남의 역사도 내꺼다라고 웃기는 말만 하니 안타깝다.
니들이 그렇게 찬양하는 마오쩌둥이 중국 역사 다 파괴했는데 왜 니들이 그 파괴한것을 들쳐내면서 가지려고해?
마오쩌둥 무시하냐?
크렌베리 18-03-26 18:06
   
"중국역사는 중국제품하고 똑같아 ", 이게 팩트네
빨간단무지 18-03-27 01:44
   
원래 역사가 구린애들이 제대로 된 역사를 가진나라 욕하는 거임.
일본 역사 짧은거야 다 아는 사실이고 중국은 미친듯한 내란+통수 이퀄 역사니 한국 역사가 부러운게 사실일듯.

배알꼴려서 씹는거 다 보여서 저는 댓글 편하게 봤네요.
ckseoul777 18-03-28 03:46
   
잘 보고갑니다^**^
국산아몬드 18-03-28 22:49
   
2천년 역사?
명불허전 18-03-29 21:10
   
5분안에 남의 역사를 절반 이상 짤라먹었네.
이용약관 18-04-01 16:04
   
영어 쓰니까 영국이랑 미국이랑 같은 나라네. 브라질을 제외한 거의 모든 남아메리카 국가가 스페인어 쓰는데 다 같은 나라네. 니들 논리 대로 하면 맞는 말 하나도 없다 과장밖에 할 줄 모르는 짱깨 새끼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