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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D] 해외네티즌 "한국의 역사를 알아보자" 해외반응
등록일 : 18-09-13 17:01  (조회 : 35,228) 글자확대/축소 확대 축소 | 프린트

자신을 아제르바이잔 유투버로 소개하는 채널에 올라온 “한국의 역사”라는 영상을 본 해외 네티즌들의 반응입니다. 13분 가량 되는 영상인데 고조선부터 조선까지 이르는 우리 민족의 역사를 중국과 일본, 두 이웃 국가들과의 지정학적 관점에서 압축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많은 댓글들이 달렸지만, 영상 내용에 다소 편향적이고 부족한 측면이 있어 논쟁을 유발시키는 군요. 역시나 중,일등 주변국가 네티즌들이 몰려와 집요한(?) 관심을 보여주시고 있습니다. 그럼 즐겁게 감상 부탁 드립니다.   






<댓글>

dimsum97972
한국은...아시아의 폴란드지


ㄴFuzzy Dunlop
그다지 나쁜 비교는 아닌 거 같은데, 내가 한국을 그리 잘 아는 게 아니라서 글쎄다. 여튼 다른 나라의 상황의 비유해서 드는 건 항상 불확실함이 있지.  


 ㄴRodigo Duterte
맞아. 근데, 이순신장군이 살아 있던 시절 한국의 무기는 폴란드의 무기보다 기술적으로 더 진보해 있었어.


ㄴDay Y.
폴란드와 달리, 한국은 강한 이웃들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이용했어. 예를 들어, 이 비디오에선 언급이 안됐지만, 이 비디오는 이순신 장군이 대규모 중국 지원 함대와 함께 항해했고, 장군의 목숨을 앗아간 결정적인 전투에서 중국 장수도 죽었지. 그리고 영토적인 측면에서 손실이 있었던 폴란드와 달리, 두 한국은 자신들 핵심영토를 여전히 보유하고 있지. 특히 남한은 아시아의 “호랑이 경제”라 간주되지만 폴란드는 EU내 에서도 경제적으로 별로인 국가지. 


ㄴPapi Uno
저게 남한/북한군이 오늘날에도 강력한 이유로군. 이젠 저런 위협이 반도 내부에서 서로에게 진행되고 있지만, 과거와 같이 전통적으로 강력했던 이웃 국가들로부터의 위협은 더 이상 없을 거야.


ㄴ G3oNinja
맞는 말이야. 폴란드가 항상 러시아와 독일 이라는 두 강대국 사이에 끼어 고생했듯, 한국도 중국과 일본의 헤게모니 싸움에 갇혀있는 형국이지.


ㄴ Strgar Strgar
훌륭한 비교야! 또한 두 국가 모두 그러한 지정학적 핸드캡에도 불구하고 영광스런 역사를 가지고 있지. 한국과 마찬가지로 폴란드도 부상중인 국가이고 EU의 다문화주의 수용 요구를 거절하고 있는 유럽에 몇 남지 않은 건강한 국가지.


ㄴKitty Genovese
한국인은 동양의 아일랜드인이라고 알려져 있기도 해. 모욕하려는 건 아닌데, 둘 다 술 마시고 싸우는 걸 좋아하지. 한국인들은 또 유머 감각이 좋아. 


ㄴ BYC
고대 일본을 강대국이 전혀 아녔어. 중국에 댈 수준은 절대 아녔고 심지어 한국도 일본이 기술과 자원이 부족하다고 경멸했지. 한국은 중국과 더 가깝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대부분의 시간 동안 일본보다 강력한 나라였어. 그렇기 때문에 두 강대국에 끼인 샌드위치 같다는 표현은 부적절 해.



Jerry Su
한국은 일본과 중국의 세력 균형에 갇혀 있었던 적이 없어. 메이지 유신 전까지 역사적으로 항상 중국은 일본이 비벼볼 수 없을 정도로 힘있는 이 지역의 지배세력이었어.  한국은 자신들이 중국 공자의 동생 국가라 생각했었지만 일본은 야만인 침략자 취급하며 거들떠도 안 봤지. 한국은 역사 내내 중국의 영향력 하에 있었기 때문에 균형을 이뤘던 적이 없었어. 한국은 일본을 상대로 중국과 연합해 수많은 전쟁을 치뤘지만, 합병되기 전까지 일본과 연합했던 적은 결코 없었다는 사실만 봐도 그래.


ㄴ Michael Park
일본은 대부분이 작은 섬으로 이루어진 섬나라라 강한 세력을 가지고 영향력을 끼치거나 하진 못했던 나라야. 영향력을 놓고 봤을 때 중국이 아시아의 로마라고 할 수 있지. 


ㄴ ar ra
엄밀히 말해 중국은 “동”아시아의 로마라고 해야 해. 남아시아나 동남아시아에 그렇게 큰 영향력이 없었거든.


ㄴ Jefe Hoptosh
메이지 유신 동안, 중국은 단지 만주제국의 일부였지.


ㄴ R
많은 사람들이 역사 내내 일본이 중국과 라이벌 관계를 형성하며 항상 강대국 위치에 있었다고 생각하는 걸 보니 웃기는군. 일본은 말야 개화한 후 19세기 돼서야 지역의 리더가 되었을 뿐이야. 그 전엔 고립돼 있었고 아무도 관심 가져주지 않는 외톨이 국가였어. 게다가 일본의 왕은 거의 8세기 동안 국가에 대한 지배력이란 건 없다시피, 단지 말 그대로 정치적 인질에 불과한 존재였어. 이 영상은 엉터리야.



hemli hem
일본은 메이지 유신 전엔 아무것도 아녔어. 그냥 혼자 자급자족하면서 고립돼 있던 나라였을 뿐이었지. 중국과 한국은 일본이 1592년 실제로 침략을 가하기 전까진 위협적인 존재로 인식 조차 안하고 있었음..


ㄴ Coneja
맞아 2, 3 세기 전까지만 해도 저게 그들의 현실이었어. 지리적 이점때문에 18//19세기까지 단 한번도 외세의 침략을 받지 않았고 미국에 의해 운 좋게도 일찍 운이 따라왔을 뿐이야. 일본인들이 한국의 수천년 역사를 모욕하는 건 스스로 자기들 얼굴에 침 뱉는 짓 일 뿐임. 


ㄴ August Hayek
원나라 이후로 한국은 거의 천년을 중국에 의존했어. 합병 전에 너희들 조상이 어떻게 살았는지 알고 싶다면 서양인 방문자들이 쓴 책들 읽어봐. (그리고 이사벨라 버드의 서울에 대한 부정적 묘사가 가득한 책 내용 인용.. )


ㄴ F. OPE
그 책은 식민지 시절 맥락에서 쓰여진 책이라는 걸 항상 명심해라.


ㄴConeja
웃기는 소리 하네. 불쾌함과 무질서의 상징인 중국이 감히 이웃 국가도시에 냄새 난다는 말을 하네. 주제를 알고 좀 말해라.


ㄴ123 123
원나라 시절, 고려는 그래도 중국보다 더 나은 상황이었어. 중국은 몽골에게 완전 정복당했지. 고려는 그래도 반 정도는 독립된 상태로 고유의 문화를 지켜낼 수 있었지.  왕은 몽골 군주들과 동등한 대우를 받았고. 근데 중국 황제랑 중국 문화는 어떻게 됐더라? 아 맞다, 몽골인들에게 아주 발려 버렸지.


ㄴAugust Hayek
고려랑 고구려는 한국인의 국가가 아냐. 그들은 만주족의 나라야. 너희들은 원나라 시절 한족들과 같은 처지였고.


ㄴ 123 123
그럼 너 고구려와 고려의 후손들이 중국을 정복하고 청나라를 세웠다는 데 동의하는 거지?


ㄴ August Hayek
청나라도 물론 만주족의 나라지 하지만 반드시 고구려/고려, 그 두 나라의 후손들인 건 아냐. 


ㄴ 123 123
어쨌든 만주인들은 한국을 그들의 모국이라 여겼고 항상 중국보다 한국에 더 호의적이었어.


ㄴ August Hayek
거짓말이야. 일제 강점기 때 만주에 넘어 온 한국인들은 차별을 받았어. 그래서 한국인들은 일본인의 성을 따랐지. 근데 이제 와선 일본식 이름 쓰는걸 강요 당했다고 거짓말을 하고 있어.  


ㄴ 123 123
그럼 왜 만주인들은 중국애들한테 변발을 강요한거냐? 한국인들은 그냥 놔두고 말이야. 


ㄴ August Hayek
왜냐면 한족들은 그들 국가 안에 사는 사람들이었고 한국인들은 아녔으니깐. 한반도는 아무도 거들떠도 안 봤어. (끝까지 헛소리 작렬하는군요. 이 후 댓글들에서도 빠지지 않고 등장해 트롤링을 합니다.)
 


The Hunter x Hunter 2011 Dickriding Association
충무공 이순신 장군에게 깊은 존경을!


ㄴ JeriCurl
그의 군 경력에 있어 최대 위협은 일본이 아니라, 조선의 단결을 약화시켰던 내부적 정치 갈등이었어. 그는 주코프(구 소련군 원수)와 같은 취급을 받았지.  



Sim W8ing
세계 최초로 종이 책을 인쇄하는 이동형 타입의 인쇄기술은 중국 북송시대 발명됨. 그 후 1377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 인쇄본인 직지심경이 고려시대에 한국에서 만들어졌지.
(이후 댓글 곳곳에서 인쇄술 원조 논쟁 계속) 


Roshan B
이순신 제독에게 깊은 존경과 경의의 마음을 표함.


ㄴ August Hayek
이순신은 일본과의 전쟁에서 졌고 또 전사했어.
(이 어그로꾼 댓글은 이 후 모두 생략하겠습니다.)


ㄴ Roshan B
그는 배 몇 척으로 일본과 싸워 이겼어. 일본인들은 겁이나 도망가기 바빴고. 책 좀 읽어라. 바보처럼 굴지 말고.



dokkiro
난 일본이 아시아 역사에서 두각을 나타낸 게 얼마 되지 않았다고 생각해. 일본은 가야연맹 덕분에 청동기 시대를 훌쩍 뛰어 넘었지.

.

Roshambo
저 영상 이후 한국의 현대사 요약 : 로켓맨과 케이팝



DeepDark Fantasy
(폴란드와 비교한 댓글에) 폴란드는 적어도 유럽에서 가장 큰 나라였던 역사(폴란드-리투아니아 연맹)가 있는데 한국은 그렇게 강했던 적이 없었어.


ㄴ jow14281
글쎄다.. 고구려는 현재의 만주지역을 다 지배했었고 국토가 일본 열도보다 더 컸어.



Kochigachi
참고로, 고대 일본은 절대 유력 국가가 아녔어. 더 컸던 한국의 왕조들에게 전적으로 의지했던 국가였지. 



ippos_khloros
한국이 해야할 일:
- 통일
- 공식적으로 한국으로 국호 통일
- 서울을 수도로 유지
- 정부기관들을 남쪽에 위치시킴
- 남쪽 자본에 털리지 않도록 북쪽 사람들에 대한 보호 대책 수립
- 일본과의 관계 개선


ㄴ James Tang
내 생각엔 한국인들이 일본과의 관계 개선을 원할 것 같진 않아. 



John Dela Cruz
내가 보기엔 중국이 강력하고 안정적이던 시기엔 한국에도 평화와 번영이 있었어. 반면 중국이 약할 땐 일본이 중국의 약해진 틈을 타 한국을 침략했고.


ㄴ paul han
고조선과 이후 삼국시대 땐 그렇지 않았지. 그러나 통일 신라 시대 이후로는 그런 경향을 보여 왔어. 또한 한국은 일본보다 북쪽의 유목민들에게 천년 이상 더한 고통을 당했어. 


ㄴ Wandrative
완전 틀렸어. 그거 반대가 맞아. 고조선, 고구려 그리고 백제 모두 중중국이 약해졌을 때 번성했어. 



Der Kugelfisch
관심 있는 사람들은 명랑이라는 영화 있는데 정말 대단해. 이순신은 위대한 제독임..



UmmahTube
일본인은 끊임없이 로마 제국을 침략, 약탈 했던 문명화 되지 못하고 무자비한 유럽의 고대 게르만족의 아시아 버전인 것처럼 보이는군. 한국인과 중국인들 입장에선 골칫거리였겠어. 믿지 말아야 할 게 있다면 그건 바로 일본인들임.


ㄴ BYC
그런 비유엔 일본보단 몽골이랑 투르크인들이 더 맞을 듯 해. 일본은 실제적으로 중국에 위협으로 간주되던 몽골만큼 전혀 강력하지 못했어.



Coneja
댓글들을 보니깐, 무지한 유럽인들이 억지로 자신들의 역사에 한국을 끼어 넣으려고들 노력 중이군. 물론 한국은 극동의 작은 반도 국가고 지정학적으로 열악하며, 그저 시시한 국가로 생각되는 경우가 많은 건 사실이지. 하지만 한국은 몇 천 년을 넘는 역사를 가지고 있는데도 필요 이상으로 과소 평가됨. 특히, 중국과 일본인들이 열심히 사실을 왜곡하고 끊임없이 거짓 정보를 퍼뜨리고 있어.




Grant Liu
와우, 이 영상은 매우 유익해. 세계사에 관심이 많은 중국인으로서, 난 한국인들이 친절하면서도 터프하다는 걸 느껴. 또, 매우 영리하기도 하지. 수세기 동안 중국과 일본 사이 세력 투쟁에 시달려 왔고 지금도 여전히 두 이데올로기를 맞대고 최전선에서 맞서고 있어. 중국과 한국은 모두 과거에 많은 고통을 겪었어. 난 한중일 모두가 미래엔 잘 지내면서 서로에 대한 증오를 멈추고, 평화롭고 서로 번영하는 관계를 구축 시킬 수 있기를 진심으로 희망해. 



Comments
요약하자면:  한국 역사를 통틀어 일본인들은 한국인들에게 저주스러운 존재여 왔다..


ㄴ F. OPE
그런 식의 프레임은 웃기는군. 왜냐면 500년 간 한국 일본 간 전쟁은 두 번 뿐 였거든. 반면 유럽에선 이웃해 있는 나라들 역사를 보면 아마 20년 마다 쉬지 않고 전쟁질을 반복해 왔을 걸.


ㄴ Comments
두 번 보단 훨씬 더 많아. 일본은 동양의 바이킹 같은 애들이어서 적어도 천년 이래 중국과 한국의 해안을 약탈했었어. 2차 대전 때 미국에 항복하기 전까지 일본은 항상 병영 국가였지. 



Steven Zheng
사실 일본군의 침투 양상은 중국 명군이 한반도에 들어 왔을 때 전환점을 가졌지. 이순신 장군은 일본 해군을 괴멸시키고 전쟁의 종결을 향해 결정타를 날렸어. 한편 육지에선 권율 장군이 많은 기여를 했지. 어떤 이유에선가 그는 이순신만큼 존경 받지 못해.



S Baek
좋은 동영상이긴 한대 한국의 삼국시대는 신라, 백제, 가야가 아니라 고구려, 백제, 신라야. 가야는 그리 오래 가지 못했고, 가야가 멸망한 후 삼국 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거지.



undertakersarmpit
이성계가 수도를 오늘날의 서울로 옮겼을 때, 수도 이름은 서울이 아녔고 아마 한양 이었을 거야. 그리고 영상 중 발음 지적인데, 세이쇼대왕이 아니라 세종대왕이야.



F. OPE
좀 솔직해 지자. 한국은 유럽, 북아프리카, 서아시아 그리고 동남 아시아 어느 국가들 보다 훨씬 더 평화롭고 안정적인 역사를 구가했어.


ㄴ A1 A1
맞는 말이야. 한국의 과거 왕조들은 500년 이상을 모두 유지했었어. 신라(992년) > 고려(474년) > 조선(600년).  (다른 문화권에선) 어떤 왕조나 나라도 500년 이상을 바뀌지 않고 지속된 적이 없었어.
심지어 고려 - 조선 전환기도 중국의 왕조 교체기와 비교하면 꽤나 평화로운 편이었지. 그래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최근 2차 대전때까지 끊임없이 국경이 바뀌던 유럽과 역사적으로 비교해보면 한국의 지역적 안정성은 꽤나 높았다는 거지.


번역기자:둥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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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신자 18-09-13 17:05
   
잘 봤습니다.
황룡 18-09-13 17:07
   
잘봤습니다~!
추구남 18-09-13 17:07
   
한국 역사 다루는 것 솔직히 잘 안 올라오는 데.. 역사를 잘 아는 분은 가서 팩트로 잘 설명해 줬으면..
이런 영상에 하도 날조를 해대서...
     
막걸리한잔 18-09-14 09:28
   
송나라 원나라도 고구려  후예들은 고려라고했고..
요나라와도 고구려 옛영토를 서희의 담판으로 돌려받고...
송나라 원나라도 고구려 후예를 고려라고 했고..
명나라 청나라도 고구려 후예를 조선이라 했는데.
짱골라새끼들은 뇌피셜이 너무 쩌네...
만주족?
이성계 휘하장수출신에 먼터무 6대후손이면서 조선인출신 이성량 요동총병 밑에 있었던 누르하치가 독립해서 만든게 만주족인데..
또 조선초기 요동사람들은 우리나라 사람이라고 기록된점과 요동총병이 조선에 와서 요동사람들은 조선을 본향이라고 한다는점..등등..
잠든공룡 18-09-13 17:17
   
댓글처럼 논란이 될 영상인것 같네요.

처음 소개 문구처럼 중국과 일본사이에서 균형을 이루려고 고군분투했다는거나 북부가 고대 중국영향을 주로 받았다는 등 앞부분만 봤지만 결코 우리가 아닌 다른 나라들의 편협된 시선으로 바라본 역사를 그려낸듯 합니다
ㄱㄹㅊ극혐 18-09-13 17:19
   
ㄴ August Hayek
이순신은 일본과의 전쟁에서 졌고 또 전사했어.
(이 어그로꾼 댓글은 이 후 모두 생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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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에 졌다? 개소리도 풍년이네 ㅋㅋ
한국사 배웠던 사람은 외국인들조차 무패 기록을 알며 넬슨보다 낫다고 하는구만.
전사도 이게 선조의 성격을 알고 전사한 것처럼 꾸민 거라는 이야기가 있음.
실제로 이순신장군의 후손들이 15년후에 장군의 묘를 이장한 기록이 있음.
갑자기 왜 15년 후에 이장을?
추론은 각자의 몫.
     
힘나님 18-09-13 18:59
   
확실하지 않은건 자신 혼자만 알고 있는게 나을거 같네요
미스트 18-09-13 17:20
   
와.. 이젠 우리나라가 이렇게까지 알려졌고, 또 주목 받고 있군요. 감동입니다. ㅠㅠ
     
붉은깃발 18-09-13 17:44
   
1단계 : 케이팝 및 한류의 영향이 동남아로 확대

2단계 : 한류팬 및 한뽕 탄생

3단계 : 한국 좋아하는 세력들이 관련 영상을 여러 사이트에 게시

4단계 : 더 많은 외국인이 한국에 대해 좋은 이미지가 생김

5단계 : 한류팬 및 한뽕의 세력이 증가

6단계 : 한국이 트롤짓 안 하면 이 행동이 계속 반복
ㄱㄹㅊ극혐 18-09-13 17:21
   
ㄴ A1 A1
맞는 말이야. 한국의 과거 왕조들은 500년 이상을 모두 유지했었어. 신라(992년) > 고려(474년) > 조선(600년).  (다른 문화권에선) 어떤 왕조나 나라도 500년 이상을 바뀌지 않고 지속된 적이 없었어.
심지어 고려 - 조선 전환기도 중국의 왕조 교체기와 비교하면 꽤나 평화로운 편이었지. 그래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최근 2차 대전때까지 끊임없이 국경이 바뀌던 유럽과 역사적으로 비교해보면 한국의 지역적 안정성은 꽤나 높았다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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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제 678년  고구려 705년은 왜 빼냐
뭐 같은 민족이라 완전히 박살내지는 않고 유지시켜줬다는게 크긴 하지.
     
ashuie 18-09-13 18:53
   
대표적으로 병자호란..
아직도 왜 조선을 멸망안시키고 인조를 놔줬는지 의문.
여진족(고구려땐 우리 부속민족이었고, 말갈이라고 불렀음)과 우리는 둘다 백두산을
민족의 뿌리로 생각하는 같은 민족이었기에 그런걸까요..?
          
cz1324 18-09-13 19:36
   
후금(청나라로 이름을 바꿈)을 세운 누르하치의 조상이 이성계의 휘하에 있던 사람(이름은 '먼턴무'이고 그 6대손에 해당)임. 당시 이성계가 여진족의 일부부족세력을 거느릴 정도로 여진족에 대해서 영향력이 굉장히 컸다고 하네용 ㅋㅋㅋ
          
성당턴스님 18-09-13 20:27
   
애신각라(금나라 왕족의 성씨)
사랑 애, 새 신, 깨달을 각, 새그물 라.

풀이
애신은 만주어로서, 우리말로 金(금, 김)이고 각라는 우리말로 성씨에 해당하므로, 김씨, 김가네를 나타냄. 만주어로 읽으면 애신각라가 된다고 함. 淸(청) 태조 누루하치가 난 만주족의 한 부족의 이름. 후에 淸朝(청조)의 姓(성)으로 되었음. 금나라, 후금(나중에 청이 됨) 등은 우리나라 신라시대 이후 만주로 건너간 김씨들이 세운 나라를 나타내므로, 여진족은 우리나라 계통이고 遙(요), 金(금), 淸(청)나라는 한민족의 후예들이 주체가 되어 세운 나라임을 알 수 있음. 愛親覺羅(애친각라). 출전 金史(금사).
[네이버 지식백과] 애신각라 [愛新覺羅] (한자성어•고사명언구사전, 2011. 2. 15., 이담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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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수도..
          
200원 18-09-13 21:32
   
그동안은 조선중심으로 바라봐서 조선때문에 청이 침략했다고 했었는데요.
조선 보단 청의 내부사정 때문이라는 게
개인적으론 더 설득력 있어보여요.
청이 관리할 인구는 많아졌는데 이상기후로 대흉작 국가 위기상황이었어요.
명은 아직 건재하고 청입장에서 조선을 친다는건
국가존망을 걸고 시행한거예요.
그래서 최단기로 전쟁을 끝내려 했고,
실제로 겨울철 2달만에 전쟁이 끝나요. 
물론 언젠가 조선을 손봐야겠다고 생각도 했기에
경제적이유 + 덤으로 조선도 손보는 이유.

이런 상황에서 조선을 아예 합병하려 들면,
장기간으로 길어질거고.
조선이 무서운게 중압집권국가라 멸망시키기
쉽지 않은 국가였어요.
조선이 발목잡고,
이러면 가뜩이나 내부상황 어렵고 자원은 계속 떨어지는 상황에 뒤에서 명이 뒷통수치면 청은 망하는거죠.
조선을 병합시킨다해도 조선의 그 많은 인구를 먹여살리는 것도 힘들어요.
그런 이유로 멸망까진 안시킨 것 같아요.

누르하치는 조선에 우호적이긴 했어요.
임진왜란 때 조선에 원군 보낸다고 했었는데 거절당하기도 하고.
사실 여진족이 한반도 변경 지역에 살기도 했고,
조선이 당근과 채찍으로 관리했어요.
땅이나 집도 주고 관직을 주기도 하고,
반대로 예방전쟁한다고 조선군이 여진인들
밭 갈아엎고 소금 뿌리기도 했어요.
오래 전 부터 여진은 선조들과 얽혀 살아서 여러 감정들이 있었을지도요 모르기도 하죠.

그리고 조선이 멍청하단 것도 결과론적인 이야기거든요.
여진은 명조선의 밥이었고 저렇게 될 지 몰랐고.
번번히 산해관 넘기도 못했거든요.
인조도 외교적으론 광해군의 중립외교를 유지했다는 반론들도 있어요.
그래서 청의 내부사정으로 인한 침략과
조선의 현상유지라고 생각해요.
          
촐라롱콘 18-09-13 22:05
   
숙신, 읍루-물길-말갈-여진-만주로 계승관계가 이어진다고 보았을때
이미 지금으로부터 1,500년 이전의 동이족들에 대한 기록인 후한서 동이전,
삼국지 위지동이전 등의 기록에서.....
우리 민족의 전신인 예맥계통의 여러 부족국가들과 숙신-읍루는 말과 풍습이 완연히 다른
이질적인 존재들이었습니다.

제3자인 중국인들이 우리민족과 여진의 진신인 퉁구스계 부족들을 다른 존재로
본 것 뿐만 아니라.. 우리 또한 그들(여진의 전신)을 우리와 다르게 인식했으며...
그들(여진) 또한 우리를 이질적인 존재로 여겼습니다.

후금-청의 태조인 누르하치가 몽골부족들을 회유할 목적으로 당시 차하르부의 수장인
릭단칸에게 보낸 서신에 의하면.... 만주와 몽골이 언어, 생활양식 등에 유사성이 크고
명과 조선이 만주-몽골 사이처럼 서로 비슷하여... 조선을 만주와는 다른 완연히
이질적인 존재로 여겼습니다.   
.
.
우리와 여진을 같은 민족이라고 하는 것은 너무 나가신것 같네요....!!!
우리민족의 일부와 여진 또는 여진의 전신부족들 가운데 일부가 고구려-발해 등을 매개로
한때 교집합이었던 적이 있었다고 해서... 서로간에 같은 민족이라 하는 것은 비약입니다.

이는 마치 오늘날 한민족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않은 조선족이 중국의 관할하에 있다고 해서
한민족 전체가 중국에 속한다는 논리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리고 적어도 건주여진과 견주여진을 계승한 만주족은 백두산을 영산으로 여겼지만....
우리나라에게 백두산이 영산으로 부각된 것은 그보다 훨씬 늦은 조선말기에 이르러서였습니다.

당시 전 세계를 휩쓸었던 내셔녈리즘의 영향을 받아.. 또한 일본이 후지산을 영산으로 여기는
현상까지 큰 영향을 끼쳐... 이전까지는 지리적인 관점 이외에 관념적인 대상과는 거리가
멀었던 백두산이 민족의 영산으로 부각된 것입니다.
예를 들면 백두산 정상부근의 칼데라호인 '천지'의 명칭 또한 19세기말~20세기초 청나라 말기에
청나라사람인 유건봉이 명명한 명칭입니다.
               
로얄블루 18-09-13 23:15
   
백두산은 고려시대 훨 이전부터 영산으로 여겼는데 이 명예일본인께서 또 헛소리하네요

중종(1525) 때 만들어진 혼일역대국도지도에서도 백두산은 크게 강조해서 그리죠

후지산 드립은 참신했다

[http://www.koreanhistory.org/upload_img/1205476452.jpg]

 “13세기 고려의 중 일연(1206―1289년)이 쓴 ‘삼국유사’에서 인용한 ‘고기’의 단군전설기록에서는 단군의 아버지 환웅이 하늘세계에서 지상으로 내려온 곳과 단군이 출생한 곳이 태백산이라고 했다”면서 “일연은 이 태백산을 묘향산으로 해석했으나 그보다 앞선 ‘삼국사기’에서는 고구려시조 주몽전설에서 압록수와 함께 보이는 태백산은 백두산이었다고 했다”고 알렸다.

태백산 백두산 개마대산 장백산 모두 백두산의 시대별 이름이고
단군시조, 고구려 시조에서도 백두산이 배경인데 후지산을 숭배하는 것애 영향을 받아 백두산을 영산으로 여기기 시작했다고 구라치고 있네
                    
촐라롱콘 18-09-13 23:28
   
[[백두산은 고려시대 훨 이전부터 영산으로 여겼는데....]]....???
.
.
.
뇌피셜도 이 정도면 증상이 좀 심한 축에 들지요...^^

고려시대 이전에 백두산이 영산이었다는 근거자료가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

고려시기에 처음 등장하는 백두산에 대한 기록도 영산의 개념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그냥 무미건조한 지리적인 지식의 나열에 불과한데....

만약 단군신화에 나오는 태백산을 백두산을 염두한 것이라고 한다면

그 개념 또한 조선말기에 이르러 확립된 개념입니다.

이전까지는 태백산, 또는 묘향산이 단군신화의 태백산으로 오랫동안 인식되었습니다.
                         
로얄블루 18-09-13 23:29
   
뇌피셜 헛소리 지꺼리고 싶으면 디시 역갤로 가라
                         
꼬마러브 18-09-13 23:57
   
숙신-읍루-말갈로 이어지는 민족에 대해서는

일본과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역사를 보면 남만주 지역은 한반도와 같은 문화권을 이루지만

북만주와 연해주 지역은 그 문화와 민족이 촐라롱콘님이 지적하셨듯이 우리와는 다릅니다.

다만 군사적으로나 기타 다른 부분들에서...

남만주-한반도 세력이 말갈족보다는 우위에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진출하고 또, 영향력을 끼치며 지배계층으로서 군림했던 경우가 많습니다.

일왕이 백제계이듯이요.

이러한 교집합 때문에
딱 선을 긋고 이건 니 역사 이건 내 역사하기가 애매하기도 합니다. (금나라 같은 경우)

말갈의 전신인 숙신도 바로 조선의 다른 이름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생각합니다.
                    
촐라롱콘 18-09-13 23:34
   
님이야말로 뇌피셜 헛소리 지꺼리고 싶으면 환빠들 노는 곳으로 다시 가시던지.....^^
                         
막걸리한잔 18-09-14 09:19
   
또 등장했네 어디 삼국유사 이야기하니까 환빠찾고 있나 이 양반아.
 역사이야기만 나오면 고구려 역사 왜곡못해 안달난 우마오당 처럼 날조짓 열심히 하더니..
                         
굿잡스 18-09-14 09:26
   
중세 고려시절의 신라계 완안부 금나라와 

1635년 즉 17세기 등장한 만주족은 시기나 개념이 다름. 

만주족이란 홍타이지에 의해 몽골 칸에까지 추대되면서 당시 명나라밖 동북방의 여진 몽골등을 아우르면서 등장한 족명에 만주라는 지역명도 이에 유래. 

중세 고려시대의 금나라는 북방의 발해가  무너지고 이후 끊임없는 발해부흥국들이 들어서다 우리 북방 발해 지역의 변방지역에 있던 신라계가 흑수말갈을 중심으로  발해 지배 세력까지 흡수하면서 탄생한 나라이면서 이후 몽골 칭기즈칸에 의해 멸망.

우리 학계에서도 숙신에서 말갈 여진으로 이어지는 단일 계통이 아닌 오늘날 이원적 계통으로  보는 추세가 대세임.

이미 한반도 뿐 아니라 압록강 이북 즉 요하 연해주  흑룡강 일대등은 신선기 시대부터 거의 단일 생활 문화권으로 고조선 시대에도 고조선의 대표적 비파형동검이나 토기 묘제등이 출토, 고구려시대에도 이런 말갈은 부용세력이나 혹은 백성들로 중세 고려의 천하관에서도 다르지 않았고 조선 전기도 다르지 않았음. 그러다 점차 유교적 화이관과 임진왜란 이후 이런 여진족 세력이 동북아 대전의 혼란기를 틈타 강성해지면서 몽골 세력까지 흡수하면서 후금 이후 다시 청으로 개칭. 무시못할 독자적 힘을 가지게 된 상황. 

후금 청 당시 몽골과는 풍속이 비슷하고 조명은 다르니 어쩌고는 본인 스스로가 적어놓았듯 당시 조선은 임진대전으로 체력이 약해져있던 때라 불필요한 전쟁을 꺼려했지만 기본 명과는 서로 우방관계였고 후금은 몽골을 회유 연합해야했던 상황에

기본적으로 우리 고조선 고구려 동방문명권도 반농반목 즉 정주문명을 구가하면서도 수렵등 기마문화도 공유 국내 학자도 말갈을 그래서 변방 수렵생활이 강한 소위 시골 촌놈같은 문명적 생활이나혜택이 약한 이들을 부르는 고구려 시골백성의 멸시어라는 주장도 있듯

결국 조명의 풍습은 현대로 치면 현대화된 도시문명인들이니 유사하고 수렵이나 유목기질등 기마적 문화 성향이 두드려진 여진 몽골 서로간에는  풍속등이 비슷하다는 점은 어찌보면 자연스러운 표현등.

단지 여기서 유념할것은 앞서도 언급했듯 우리 민족 역시 요하 즉 만주일대를 터전으로 이미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로 이어지는 요동을 수천년 생활 지배하며  정주문화뿐 아니라 기마문화까지 공유하다 점차 중세 고려와 조선으로 오면서 한반도 내지로 농경이 깊어졌다는 전후  흐름과 이전 실위 후대 몽골이나 특히나 말갈 여진의  부족은 동북방에서 수천년 우리에 신속 혹은 백성으로 교류하고 있어서 변방의 풍속이 문명화 되지 못한 부족도 있지만 그리고 언어의 이질성도 있겠지만 우리가 제주방언을 상당히 이질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것처럼 그렇다고 이 동북방의 부족들도 우리와 서로 교류 공유하면서 언어적 유사성이 우리와 마냥 없다고 할 수 없다는 점도 그리고 서로가 기마적 문화권으로 역시 공유하고 있는 부분들이  존재함도 인식할 필요가 있을 것임. 그리고 언어의 특징도  문화가 높은데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듯 열도에 우리 옛 고어들의 흔적들이 많이 남아있듯 이들 변방 부족들도 오랜 문화적 역사적 교류와 공유 지리적 인접성으로 언어의 교집합과 융합, 시대에 따른 다층적 변화들 역시도 간과해서는 안될 것임.

그리고 기본적으로 말갈이라는 용어도 범칭된 용어로 여기에는 우리 한민족 계통으로 분명히 보는 부여를 속말말갈이나 백산 말갈등이 있었고 일반적으로  구분하는 흑수말갈은 이런 우리 고구려 발해시대에 역시나 일부 소수 인구. 

이후 여진족이라는 명칭도 발해  말기 발해가 점차 쇠퇴하면서 발해 변경 소수 인구의 신라계가 통합한 흑수말갈에서 나오던 용어가 발해 멸망 이후 우리 발해 지역의 발해 일반 백성에까지 범칭화. 

그리고 금나라의 황위는 신라계 여진이 주도했다면 황후 외척에는 100여년 길지 않은 기간 발해계 즉 우리 고구려계  황후가 4명이나 포진할 정도로 무시못할 외척 세력에 발해계 주요 인사들이 금나라 주요 행정에서  대국을 운용하는등 신라계 황제+발해인 연합이 금나라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은 나라.
이는 아래 장경희교수의 연구내용도 있지만 고대 왕조시대에 황릉 조성은 매우 중요하고 특히나 그 지배계층의 정체성이나 문화의 집대성이라는 점에서 그런 아골타의 황릉이 서토보다는 우리 고려와 매우 유사하다는 점 역시 이런 역사적 맥락들에서 기인한 부분이 크다고 볼 수 있을 것임.

왜 여직(진)발해본동일가(女直渤海本同一家)라고 했을까?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88992&sca=&sfl=wr_subject%7C%7Cwr_content&stx=%ED%95%9C%EA%B7%9C%EC%B2%A0&sop=and

금나라 황실 조정내의 고구려계(발해인) 파워

http://blog.naver.com/knightblack/10106493129

금나라 황릉의 모델은 고려 황릉(왕릉)이었다.’ 12세기 북중국을 장악했던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1115∼1234) 황릉이 고려 황릉과 형제처럼 꼭 닮았다는 비교 연구가 국내에서 처음 나왔다. 금 태조 완안아골타(1068∼1123)가 10세기에 건국한 고려를 ‘부모의 나라’라고 불렀던 것을 감안하면, 당대 사회적 문화적 역량을 총집결시켰던 국책사업인 황릉 조성을 한반도에서 벤치마킹했던 것이다  
   
장경희 한서대 문화재보존학과 교수는 최근 학술지 ‘동방학’에 게재한 논문 ‘12세기 고려·북송·금 황제릉의 비교 연구’에서 “고려와 금 황릉은 양식적으로 매우 유사하며 같은 시기 북송 황릉과 뚜렷이 구별된다”고 주장했다.  
   
http://news.donga.com/3/all/20140313/61666261/1��
                         
막걸리한잔 18-09-14 09:30
   
말갈은 고대 맥족에서 나왔다는건 기정사실이고..
춘천에 맥국을 건설한 고인돌 세력이 맥족의 핵심인데..
그게 마한 말갈이 되는건데 뇌피셜은 님나라에서 부리셈...
                         
굿잡스 18-09-14 14:09
   
만주어 노래 가사와 우리말과의 비교

Šongkoro 
숑코로
송골매

šanggiyan alin  de, 
샹기얀      알린  더
새햐얀      오름  에 (백두산에)

gukiong nimanggi be fehume tuwaci,
구컹      니만기    버   퍼후머   투와시
깨끗한       눈      을    바라      보니,

leli   abka  na de,
럴리  압카  나 더
너른  하늘  땅 에 

mini  deyere enduri    šongkoro bi.
미니   떠여러  언두리   숑코로    비
나의  떠오르는   신      송골매   있네

weji  i   hafu  yome,
워지 이  하푸  요머
수풀 의  길을 지나가니

abkai mangga beri darambi.
압캐    망가     버리  다람비
하늘이 강한     활      주네. 

mangga beri   darara   age,   ==> age (아거) : 황자,임금, 지도자 : 우거, 우야고
망가       버리  다라라   아거
강한       활      지닌   황자여,

coktolome  yabuki.
속톨로머    야부키
교만하게도 분주하구나.

šanggiyan alin serengge,
샹기얀      알린   서렁거  
새하얀      오름   저것은 (백두산 저것은)

musei manju i   fulehe  da.
무서이  만주  이 풀러허  다
우리    만주  의  뿌리    다

sahaliyan ula  serengge,
사할리얀  울라   서렁거
새카만    강      저것은  (흑룡강 저 것은) 

muse i manju i   fulehe  da.
무서  이  만주 이  풀러허 다
우리 의   만주 의  뿌리    다.

šongkoro deyeme,
숑코로     떠여머
송골매     날으며

bolgo  na be  coktolome tuwambi.   ==> bolgo na (볼고 나) ==> 불구+내 ==> 밝은 땅, 성스러운 땅
볼고    나  버   속톨로머    투왐비
빛나는 땅  을   교만하게   바라보네.

colkon be dasihime,
솔콘    버    다시머
큰파도 를  덮어버리고,

coktolome iserakū.
속톨로머   이서라쿠
교만하며 두려움 없네.

age  sujumpi,
아거  수줌피
황자  달리며,

boconggo gerhen be  sihambi.
보쏭고        거런   버   쉬암비         ==> gerhen (거런) / 빛 (거란의 어원)
다채로운     빛      을  내리쪼이네.

batu         katun      kiriba    mujingga,==> batur/batar (바투르/바타르 : 영웅 , 배달)
바투          카툰     키리바      무징가
용감하고 거뜬하며 참아내며    정직한,

akdacun banjiha.
신앙을 만들어내네.

šun mukdeke  dergi    ergi     de,
슌     묵더커   더르기  어르기  더
해     떠오르는  동        쪽     에

alin hada  ula   bira,
알린 하다 울라 비라
산, 봉우리 강,   물

fafuri    niyalma   be   ujime    hūwašabumbi.
파푸리   니얄마    버    우지머   화사붐피
부지런한 사람들  을        길러내네.

tese  i  hethe,
떠서 이  허더
그들 의 가업이,

šun i   gese  eldengge.  ==> šun (슌 :태양) 
슌  이  거서    얼던거
해 와   같이    빛나네.

bi coktolome, 
나 교만한 땅,

imbe manju seme hūlambi.
그것을 일컬어 만주라고 부르네.

 

몽골어와 한국어의 계통적 위치

   필자는 여러가지 옛 문헌조사를 통하여 몽골어와 한국어와 만주어의 동질성과 친근성을 발견하여 이들이 같은 계통의 언어라는 추정을 하게 되엇다. 그래서 이들 언어가 지리적으로 동북아시아에 위치한 언어군이라는 점을 고려하여 몽골어와 만주어와 한국어는  "동북아시아어족"이라는 가설을 주창하는 바이다. 이것은 언어학적 증거를 비롯하여 역사, 지리학적, 체질인류학, 민속학, 고고학 등의 인접학문을 통하여 몽골어와 한국어의 관계를 계통적으로 증명하고자 한다.ㅡ최기호 교수

http://m.cafe.daum.net/hanchi21/3RRb/4?q=주어 고구려 유사성&
                         
촐라롱콘 18-09-15 16:06
   
한국어가 주변의 만주어,몽골어,일본어와 계통적으로 유사하다는 알타이어계설은
오늘날에는 폐기처분된거나 마찬가지인데요....???

한국어는 주변 언어들과 유사성이 떨어지는 고립어라는 것이 오늘날 학계의 대세입니다.

그리고 굿잡스님이 위에 예시하신 한국어와 만주어 비교를 설마하니 서로 유사하다는
관점에서 올리신 것인가요....??? 도대체 어디가 유사성이 높다는 것인지...???

설마하니 송골매-송코로 같은 몇몇 어휘들 가지고 유사하다고 하시는 것은 아니겠지요..??

고려시대 100년 가까이나 몽골-원의 영향하에 있다보니 적지않은 몽골어가 한국어에도
영향을 끼쳤고... 한국어 뿐만 아니라 당시 만주지역 또한 몽골의 지배하에 잇었고..
이후로도 만주의 여진-만주족은 몽골족들과 청나라시기까지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기 때문에
여진-만주어에는 한국어의 경우보다 더욱 많은 몽골어가 차용되었습니다. 

또한 여진-만주가 청으로 발전하여 중원까지 지배하게 되면서... 이전까지 여러 분야의
발전단계에서 중국 한족에게 미치지 못하여 여러 제도, 기술분야에 걸쳐 이전에
여진-만주어에는 없다가 새로 도입된 신조어들은 한자어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한국어와 만주어에 발음상 서로 비슷한 어휘가 있다면 계통이 같아서가 아니라
몽골어, 한자어에서 차용된 어휘의 영향을 한국어와 만주어가 다같이 받았거나
또는 한국어-만주어 또한 서로간에 이웃한 언어들이다보니 서로간에 차용된
몇몇 어휘들에 한해서 유사성이 존재할 따름입니다.

만약 계통적으로 같은 갈래에서 나왔다면 설령 천 년 이상 교류가 없이 떨어져 살았다
하더라도 기본어휘와 수사에 있어서는 유사성이 높을 수 밖에 없는데....

(서아시아, 중앙아시아, 시베리아에 뿔뿔이 흩어져있는 투르크계통의 민족들간의
언어들과.... 넓은 태평양상에서 천 년 ~2천년 이상에 걸쳐... 또한 수 천Km이상 떨어져
살아왔음에도 하와이 원주민과 뉴질랜드 마오리족의 경우처럼 서로간에 유사성이 높은
폴리네시안계통의 언어들이 좋은 예입니다.) 

한국어와 만주어는 천 년 이천 년을 서로 이웃하다시피 했음에도 불구하고
기본어휘와 수사에서조차도 완연히 이질적인 언어들입니다.
                         
굿잡스 18-09-15 16:52
   
오늘날 한국어나 일본어를 독립 언어 어쩌고 혹은 한일언어로 따로 분류하는게 추세
이긴 한데 그렇다고  알타이어족의 특징이 없는게 아님.

즉 술어가 뒤에서 나오고 조사와 어미 같은 문법 형태소들이 나타나는 거나 모음 조화, 음성 상징어의 발달등

단지 위에서도 지적했지만 언어도 생명력을 지녀서 시대에 따른 다층적 변화를 겪게
되고 우리도 지난 고어와 시대로 가면서 한국식 한자어가 섞이면서 한국어라는 독립 언어계통으로 정착되었다는 의미로 봐야 할 것임.

그러나 이런 부족시대를 오래 살았던 여진족 민족들에는 옛고어의 흔적들이 여전히 많이
남아 있고 학자들의 주장에는 우리 부여의 옛 고어가 여진족 언어에도 문화, 정치, 지리적
인접으로 어느 정도 영향력을 주었다는 주장이 설득력이 없지는 않다는 점에서
우리도 아직 옛 고어에 대해 정확한 데이타가 부족한 상황에서 마냥 극단적 이분법으로
아니다라고 몰고가기 보다는 좀더 지속적 연구와 관심히 병행되어야 할 것으로 보이는 사항.
병든성기사 18-09-13 17:31
   
영상의 내용과 댓글은 어찌 되었든....
영상 편집은 잘 했네... 아름답게 잘 찍혔어.
레떼느님 18-09-13 17:37
   
일본과 중국의 왜곡에 외국인들의 눈이 멀어버렸네.
조상님들의 평화주의 때문에 한순간에 무너진 역사가 안타깝다
칼까마귀 18-09-13 17:38
   
한류가 인가가 많으니 역사 조작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것 같습니다. 한국에 관심을 가질수록 거대한 고조선
고구려 역사의 진실이 들어나니까요
북창 18-09-13 17:40
   
내용이 완전 엉터리에...일부 왜곡된 내용이 많네요;;;
하여간...양놈들 잘 모르면 만들질 말던가...이런 영상 보면 화딱지 나 죽을 거 같음...

유투버 중에...가장 객관적으로 한국 역사를 소개한 사람은...매튜 케릭이라고...임진왜란을 주제로 9편의 영상을 올린 분이 있었는데...어떤 놈의 신고 때문인지...수십만 조회수의 영상이 저작권을 이유로 짤리면서...다시 돌아오겠다는 말만 남기고 떠났음...그 때 얼마나 화가 나던지...ㅠㅠ
여담이지만....9편 중에...8편은 다운을 받아놨는데...가장 처음에 짤렸던 마지막편이 없네요..
혹시 마지막편 영상 있으신 분은 말씀좀 부탁드려요. 소장용으로 꼭 가지고 싶습니다 ㅠㅠ
     
할게없음 18-09-13 20:19
   
예전에 가생이에도 소개 됐었던 그 영상 말씀하시는거군요. 정말 좋았는데
이궁놀레라 18-09-13 17:42
   
역시 한류가 강해서 그런지 외국인도 한국사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군요.

중국,일본의 양아치 역사도 알려졌음 좋겠네요.
악당너구리 18-09-13 17:44
   
고려랑 고구려는 한국인의 국가가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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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뭔소리지 왜 korea 인지 모르는군 ㅋㅋ
     
ashuie 18-09-13 18:57
   
근래들은 최고급 개소리네요ㅋㅋ
없쇼 18-09-13 17:44
   
재밌당 잘읽고 갑니다. .요새 해외사이트에서보면 일본인 댓글은 자폐아 취급 당하는 수준이더군요.  (brain wash 였던가?)반박은하되 너무 빡칠필욘없을듯
설설설설설 18-09-13 17:50
   
진지하게 일본이 국제무대에 나온것도 얼마안되고 애초에 우리나라는 일본이 야만국가라고 철처하게 무시했음.

가끔 외국인들이 우리나라를 중국 일본 사이에 낀 국가라고 인식하는데 빨리 통일이라도해서 인식 변환시켜야됨.

역사를 보면 중국 한국을 두고 변방에 위치한 왕따일본 이게 딱 맞음.
철이 18-09-13 17:52
   
새삼 신라가 천년 왕국이라는게 멋있게 느껴지네요.
몽골이나 일본만 아니었으면 지금까지 많은 유적들이 파괴되지 않고 남아있을텐데 아쉽네요
     
Junny 18-09-14 09:42
   
신라때문에 한민족의 영토가 광활한 만주벌판을 잃었고 반도역사로 찌그러졌습니다. 당나라에게 이용당해서 우리의 국토 상당부분을 중국에 넘겨준 역사가 멋있다니요? 멋있는 역사가 다 얼어죽었나 봐요.
그나마 고려시대 조선시대 조금씩 넓힌 영토가 압록강-두만강 지금 영토입니다. 그것도 허리가 잘려 남북한으로 잘려있죠.
바두기 18-09-13 17:57
   
잘봤습니다.
직장인 18-09-13 18:00
   
번역 수고하셨습니다
우디 18-09-13 18:04
   
잘 봤습니다.
굿잡스 18-09-13 18:04
   
그 해법으로 나이든 학자들은 일본사람 밑에서 공부했기에 그렇다 치더라도 젊은 학자들, 아무에게도 빚지지 않은 이들은 박차고 일어나 진실을 밝혀야 한다고 했습니다.부여기마족이 일본으로 건너가는 것을 시작으로 두 나라 사이의 문화적 관계의 흐름은 99프로 한국에서 일본으로 가는 일방적 흐름이 지속되었고 그 영향은 그림, 건축, 도자기 등 수많은 미술품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으며 실제로 책속의 많은 사진과 그림을 통해 생생하게 입증하고 있습니다. 
  
"일본학자들은 물론 한국학자들도 일본식 교육의 주입 아래 진실을 밝히는 데 지나치게 겁을 먹고 있다" 
"8세기 역사학자들의 첫 번째 임무는 이러한 부여족의 일본 정복을 은폐하고 부여족이 이룩한 중앙집권 국가를 당대 일왕네 조상들이 만든 것처럼 바꿔치기 하는 것이었다. 글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던 시대였으면 이런 작업이 그다지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나는 한국의 가야사가 분명하게 확립되는 것을 볼 때까지 오래 살고 싶다. 

- Jon Carter Covell(존 카터 코벨)  


USA 캘리포니아 대학. 제러드 다이아몬드 교수“discover誌“1998년 6월호「일본인의 뿌리」 
”고대 한국인의 선조가 일본의 원주민인 조몬인.아이누족을 정복하므로서 일본이라는 
나라를 탄생 시켰다.” 

하야시 세이고(林靑梧)는 그의 저서 <일본서기의 암호>에서 “일본 왕통 혈족의 만세일계(萬世一系) 세습제부터가 날조이며, 일본 개국왕은 김수로왕 후손임은 상식인데도 이를 부정, 징구왕후라는 유령을 내세웠다”고 밝혔다. 또 “임나일본부 설치를 날조했을 뿐 아니라 오오진(應神)왕이 백제계 부여(夫餘) 후왕인 의라(依羅)이며, 기토라 고분의 40대 텐무(天武)왕은 신라 김다수(金多遂)임에도 일본인으로 변조했다”  

하니하라 가주로(埴原和郞) ... 나라시대(奈良時代- 제50대 칸무(桓武) 왕이 784년 헤이안(平安)으로 천도하기 이전)까지도 한복을 입고 한국음식을 먹었으며 심지어는 한국말까지 사용했는데 고사기(古事記), 일본서기, 만엽집(万葉集) 등에 아직 조작되지 않은 부분은 한국어의 한국식 한자용어가 남아있다”고 말해 전체적으로 일본고사기들이 조작되었음을 밝혔다. 

고바야시 야스코(小林惠子) 교수, “26대 게이타이 천황,백제 무령왕 친동생”  

  
가토 에이코(加藤瑛子)교수 “26대 게이타이 천황,백제 무령왕 친동생”  

 우에다 마사아키(上田正昭 1927∼ ) 교토대학 사학과 명예교수는 일본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국보급인 고대 ‘신찬성씨록’을 자택 서재에 보관하고 있다. 우에다 교수는 “비다쓰 천황은 백제 왕족입니다”라고 확언했다(2004년 7월11일). 

"제30대 민달(비타쓰)천황(敏達·572~585 재위)은 나라(奈良)에 ‘백제대정궁(구다라오이궁 :百濟大井宮)’을 지었다”    

비타쓰왕의 친손자인 제34대 서명(조메이)왕(舒明·629∼641 재위)도    

"(우리나라 할때)나라의 ‘백제천(구다라강:百濟川) 옆에 백제궁(구다라궁; 百濟宮)과 백제사(百濟寺)라는 큰 가람을 지었다. 조메이왕이 구다라궁에서 살다가 서거했을 때 ‘ 백제대빈(百濟大殯 : 백제의 3년상 장례의식; 百濟大殯)’로 장례를 치렀다’"    
     
-일본 서기
     
후아앙 18-09-13 19:22
   
이게 확립되어야 맞다고봅니다... 유튜브나 다른 사이트 영상및 설명들보면 대부분 일본이 한국을 지배했니 마니 영향을 받았니. 중국은 말할것도없고...  중국 일본 아류처럼 설명을 해놨음. 대부분 영상들이.. 이제 나서야 할때라고봅니다.
          
굿잡스 18-09-13 20:19
   
그렇게나 말이지요ㅋ.

도리어 서토 최초의 정치체 왕조로 보는 상나라 자체가 황하유역의 하한족들이 주체가 아니라 만리장성 밖 우리 고조선문명권에 있던 동북방의 선진 동이족이 남하 내륙 하한족을 정복하고 성곽, 예악, 점복, 제천의식,청동,옥기등 다양한 도시문명부터 한자의 원형 문자인 갑골문등을  발명한 외래 정복왕조사에서부터 시작.  마지막 청 역시 만주족이 서토인들을 대규모 학살을 하면서 세워진 정복사로 범벅.

4대 문명 어쩌고하는 황하 앙소문화의 채색토기  또한 우리 고조선 선대 요하일대에서 500여년 앞서 나온 채색토기의 영향을 받았다는 쑤빙치 학자의 보고도 있군요.

 “은(상)나라는 동북쪽에서 와서 흥했으며, 망한 뒤에 동북으로 돌아갔다” 
 -고고학자 푸쓰녠(부사년) 

동북아 최강대국, 독자적 동방문명권을 구축한 고조선 고구려문명권.  


신석기 혁명, 빗살무늬 토기의 발명지.  

유라시아의 동쪽, 한반도가 가장 앞선 지역이었던 이유  

https://news.v.daum.net/v/20171015140004655?rcmd=rn&f=m
   

   
   
고조선 비파형 동검과 고인돌등 분포도  

https://blog.naver.com/itcoms0/220344390104?proxyReferer=http%3A%2F%2Fsearch.daum.net%2Fsearch%3Fw%3Dimg%26q%3D%25EA%25B3%25A0%25EC%25A1%25B0%25EC%2584%25A0%2520%25EC%2584%25B8%25EB%25A0%25A5%25EB%25B2%2594%25EC%259C%2584%26docid%3D33MvZ9OeFqASojmtT-%26da%3DIIM%26rurl%3Dhttp%253A%252F%252Fblog.naver.com%252Fitcoms0%252F220344390104��
   

서토보다 앞선 동아시아 최초의 고조선 금속갑옷  

http://cafe.daum.net/luck5194/MFUT/283?q=%B5%BF%BA%CF%BE%C6%20%B0%A9%BF%CA%C0%C7%20%BF%F8%C1%B6%20%B0%ED%C1%B6%BC%B1-%20%B0%ED%B1%B8%B7%C1��
   

고대 한류로서 갑옷문화의 국제적 위상(1)  
고조선 갑옷이 중국에 준 영향  

http://www.breaknews.com/sub.html?section=sc5§ion2=������/문�������� 


고조선, 고구려의 뛰어난 제강기술력.  

http://hyala.tistory.com/247��
   
http://cafe.daum.net/gjgumdo/36Hr/27?q=%B0%ED%B1%B8%B7%C1%20%BF%EC%BC%F6%C7%D1%20%C1%A6%B0%AD%B1%E2%BC%FA��


魏略曰:其國殷富,自先世以來,未嘗破壞。  

위략 왈 그 나라는 매우 부유하며, 선대로부터 오늘날까지 한번도 파괴당한 적이 없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 부여조  


고구려와 백제는 전성시에 강병이 100만이고 남으로는 오(吳), 월(越)의 나라를  

침입하였고, 북으로는 유주,연,제,노나라를 휘어잡아 중국의 커다란 위협이 되었다.  

수(隨) 왕조의 멸망도 요동 정벌에 의한 것입니다."  

高麗百濟 全盛之時 强兵百萬 南侵吳越 北撓幽燕齊魯 爲中國巨 隋皇失馭 由於征遼  

-삼국사기 <최치원전>  


(북위)세종이 이르기를,“고구려가 대대로 상장(上將)의 직함을 가지고 있으면서 해외(海外)를 모두 제압하여 사나운 오랑캐인 구이(九夷)를 모두 정벌하였다  
   
《후위서》  


其地後漢時方二千里。至魏南北漸狹,纔千餘里。至隋漸大,東西六千里。  
   

그 땅은 후한때에 사방 2천리였다. 위나라 때 남북이 점점 좁아져서 겨우 1천여 리였으며,  
   
수나라 때 점점 커져서 동서가 6천리가 되었다.ㅡ통전  
   


도표로 한눈에 보는 천년 사직 고구려의 위엄.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ch1002&logNo=30152299778��
   

동북아 최강대국 고구려의 역대 전적.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58906&sca=&sfl=wr_subject%7C%7Cwr_content&stx=%EA%B3%A0%EA%B5%AC%EB%A0%A4+%EC%A0%84%EC%A0%81&sop=and&spt=-5409&page=1��
   

근현대 독소전쟁 이전  

고대사 세계 최대 대전인 2차 고수전쟁 수나라의 300만 대군은 얼척의 과장인가?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78013&sca=&sfl=wr_subject%7C%7Cwr_content&stx=%EC%88%98%EB%82%98%EB%9D%BC+400%EB%A7%8C&sop=and��
   


고구려 초기 2대 유리왕시절 축조되기 시작한 환도성  

앞 궁궐 건물지 무려 90미터.  

http://mnews.joins.com/news/article/article.aspx?Total_Id=343393��
   


고구려  5세기  
   
<안학궁 남삼문(南三門) 중 남중문(南中門) 38m 앞면 7칸  

안학궁 남궁 1궁전(정전) 62m 앞면 11칸  

안학궁 중궁 1궁전(편전) 87m.  앞면 19칸 >  
   
   
7세기에 세워지고 확장된 당나라의 최대궁전인 대명궁의 정전인 함원전 정면 길이가 67.33m  
   
북경  자금성에서 가장 큰 건물 태화전 정면 64m  


동대사 크기는 높이 48m, 가로 57m, 세로 50m라오. 안의 대불은 15미터  =>우리 백제인에 의해 건립.  



인도의 타지마할의 기단 크기 94m, 건물 크기 57m  

남북국 시대 발해의 상경용천부 제2궁전 기단 크기 120m, 건물 크기 93.5m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56234&sca=&sfl=wr_subject%7C%7Cwr_content&stx=%ED%83%80%EC%A7%80%EB%A7%88%ED%95%A0&sop=and��
   

   
고구려는 안학궁으로부터 750m 떨어져 있는 유사시를 대비한 배후 산성이  
   
대성산성으로 전체 9km가 넘고 둘레는 7km가 넘으며 남문이 있는 골 안에서는 2  
   
중으로,주작봉과 국사봉 골 안에서는 3중의 겹성에 내부에는 연못이 자그만  
   
치 170여개가 존재.  
   
http://blog.naver.com/bestchoi21/20018007630��-> 대성산성 사진  


우리나라의 고대 도시 축조 역량과 위엄.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111385&sca=&sfl=wr_subject%7C%7Cwr_content&stx=%ED%83%80%EC%A7%80%EB%A7%88%ED%95%A0+%EB%B0%9C%ED%95%B4&sop=and��
   

북위의 권력을 쥔 고구려인  

http://blog.naver.com/csred7/80130397982��
   





우리나라는 문물과 예악이 흥행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으며 장삿배가 연이어 내왕하여서 값진 보배가 날마다 들어오니, 중국과 교통하여도 실제로 소득이 없을 것입니다. 거란과 영구히 절교하지 않을 터이면 송 나라와 교통함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하니 따랐다.
 <고려사절요 문종 12년>

 

왜국은 일본국이다.
본래 이름인 왜를 부끄러워 했는데, 극동에 있어서 스스로 일본이라 부른다.
지금 고려에 신하로서 속하고 있다.
-도화견문지(1080년경에 송나라의 곽약허가 지은 책)

명사: 

천순 3년 변경 장수가 보고하길 건주삼위의 도독이 몰래 조선과 결탁하였습니다. 이에 두려워하여 중국이 병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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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실록 

야인과 왜인들은 모두 우리의 번리이고 우리의 신민이니 왕된 자는 똑같이 대우하고 차별을 없이하여 혹은 무력을 사용기도하고, 내가 즉위한 이후에 남만, 북적, 이것은 하늘의 끌어들이는 바이지, 나의 슬기와 힘이아니다. 흑룡강, 속평강, 건주위, 올량합, 이만주 동창등 심처 야인과 삼위 달자가 관문을 두드리고 입조하기를 청하거든, 그 종인을 줄여서 후대하여 올려보내라 
  
단종 10권, 2년(1454 갑술 / 명 경태(景泰) 5년) 1월 6일(무오) 5번째기사 
김우을두합 등이 야인들이 세조를 알현하고자 원함을 아뢰다 


요동 도사(遼東都司) 왕상(王祥)이 말하기를, ‘요동사람들이모두말하기를, 

「수양대군(首陽大君)은 대장(大將)의 의모(儀貌)가 있었는데, 이제과연 발란 반정(拔亂反正)2142) 하였다.’ 하고 탄상(嘆賞)하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그때 세조(世祖)가 농사에 힘쓰고 학교를 일으키고 군사를 양성하기를 일삼아서, 궁병(弓兵) 백만을 길러 오랑캐[夷狄]를 제압하려고 결심하고 진법(陣法)을 익히고 군사를 훈련하니, 왜인과 야인들이 모두 위덕(威德)을 흠모하여 다투어 와서 조현(朝見)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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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 40권, 12년(1466 병술 / 명 성화(成化) 2년) 11월 2일(경오) 3번째기사 
  
시무8조에 관한 대사헌 양성지의 상소문 


우리 나라의 인민(人民)은 무려 1백만 호(戶)나 되는데 그 중에서 활을 잘 쏘는 병졸이 30만 명이고, 정예(精銳)한 병졸이 10만 명이며, 용감한 군사가 3만 명입니다. 

◈성종 32권, 4년( 1473 계사 / 명 성화(成化) 9년) 
일본국 인백단 삼주 태수 원교풍이 양영서당을 보내어 선물과 글을 올리다 

 “공경히 생각하건대, 황제 폐하(皇帝陛下)께서 보위(寶位)에 오르시어 천운(天運)을 이어받으시니, 구방(舊邦)이 유신(維新)하며, 덕(德)이 하(夏)나라·은(殷)나라의 초정(初政)보다 뛰어나시고 도(道)가 요(堯)임금·순(舜)임금보다 위에 짝하시니, 지극히 축하하고 지극히 축수합니다. 신은 선조(先祖) 이래로 가세(家世)에서 상국(上國)3198) 에 빙문(聘聞)을 통하지 아니한 적이 없기 때문에, 경인년3199) 가을에 일개 암자승(菴子僧)과 석도문(奭都聞) 등을 차견(差遣)하여서, 옛날의 맹세를 닦으며, 또 토의(土宜)의 미미한 정성을 바쳤습니다. 다행히 금상 황제(今上皇帝)3200) 께서 왕위(王位)를 이어받으시는 초정(初政)을 만나서, 눈으로는 한(漢)나라 관리의 위의(威儀)를 보겠고, 귀로는 주(周)나라 시(詩)의 가송(歌頌)을 듣겠으니, 아아, 성대(盛大)합니다. 실로 문무(文武)의 나라인지라 영우(榮遇)하기가 너무나 크옵니다. 전사(專使)3201) 가 일을 끝마치고 동쪽으로 돌아오게 되매, 화로 동반(火爐銅盤) 1개와 동경(銅磬) 1개를 더하여 내려 주시니, 이미 후한 은혜를 받았으므로, 감격하고 기쁜 마음이 지극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지금 만복사(萬福寺)의 주지(住持) 양영 서당(亮瑛西堂) 등을 보내어 바다를 건너가서 박(薄)한 폐물(幣物)을 바치어 오로지 황제께서 왕위를 이으신 것을 배하(拜賀)하게 합니다.
  
JAP,아리타 도자기의 시조(始祖)격으로 조선인 사기장 이삼평. 

『일본 도자기의 신, 사기장 이삼평』 

http://cafe.daum.net/gwansan/KAN1/516?q=%C0%CF%BA%BB%20%B5%B5%C0%DA%B1%E2%C0%C7%20%BD%C5%20%C1%B6%BC%B1%C0%CE%20%C0%CC%BB%EF%C6%F2
 
“일본 도자는 조선 도공 이삼평으로부터 시작됐다.” 

ㅡ독일 드레스든 박물관 안내 문구


에도막부, 조선통신사 일행에 극빈 대접 

“한해 쌀 수확량 12% 접대비로 사용” 

옥스퍼드大 루이스 교수 논문 

“일본이 조선통신사의 한 차례 방문에 쓴 접대비용은 (일본의) 한 해 쌀 수확량의 12%를 넘었다.” 


http://news.donga.com/3/all/20090202/8690797/1
          
굿잡스 18-09-13 20:32
   
女真酋長乃新羅人 (송막기문- 남송기록) 
("여진의 지도자는 신라인이다") 
"其初酋長本新羅人" (몽골  금지(金志)) 
(여진의  초기지도자는 신라인이다.) 
"金之始祖諱函普,初從高麗來,年已六十餘矣" (금사 (金史)) 
(금의 시조  함보는 처음에 고려에서왔을 때  60세였다.) 


  "만주족은 신라로부터 나와..." 
  因滿族自新羅、 
  "신라성씨 김이 금나라의 원류이다." 
  新羅王金姓則金之遠派 
  "금의 시조 함보는 처음에 고려로부터 왔다." 
  金之始祖諱哈富(舊作函普)初從髙麗來 

-청황제 칙령의 만주원류고 중 


续资治通鉴 卷二百一十四 元纪三十二》记载:“后亦多畜高丽美人,大臣有权者,辄以此遗之,京师达官贵人,必得高丽女然后为名家。自至正以来,宫中给事使令,大半高丽女,以故四方衣服、靴帽、器物,皆仿高丽,举世若狂。” 
  
  

"황후도 역시 고려미인으로 삼아, 대신유권자는 곧 이를 귀하게 여겨, 수도 

고관귀인은 반드시 고려여자를 얻은 후에야 명가가 된다. 그렇게 된 이래, 

궁중급사사령, 대반이 고려여자이며, 이런 이유로 사방의 의복, 신발과 모 

자, 기물 모든것을 고려를 모방해, 온 세상이 미친 것 같다. 

[속자치통감 제이백일십사 원기삼십이] 

  

《菽园杂记》::“马尾裙始于朝鲜国,流入京师……于是无贵无贱,服者日盛。至成化末年,朝臣多服之者矣。阁老万公安冬夏不脱……。大臣不服者惟黎吏侍淳一人而已。此服妖也,弘治初始有禁例。” 
  
마미군은 조선국(고려)에서 시작되어, 수도로 유입됬으며......귀천을 가리지 않고 복식이 날 로 성했다. 성화말년에 이르러, 조정 신하들도 입게 되었다. 각로만공안이 겨울에도 여름에도 벗지 않았다.....이 복식은 요사하므로, 홍치 초시에 금지되었다.  

[숙원잡기] 

  

《寓圃笔记》:"发裙之制,以马尾编成,系于衬衣之内。体肥者一裙,瘦削者或二三,使外衣之张,俨若一伞。", 

치마를 넓히는 제도는, 말꼬리를 옷안에 엮어서 만든다. 몸을 비대하게 만든 하나의 치마로, 마른사람은 혹 두개 세개를 입는다, 옷을 바깥으로 넓게 퍼 

지게 만드는데 쓰는데, 우산과 같다."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74179&sca=&sfl=wr_subject%7C%7Cwr_content&stx=%EA%B3%A0%EB%A0%A4%ED%92%8D&sop=and
  


 ‘고려비색(高麗翡色)  천하제일(天下第一)’ 

-송나라 태평노인의 ‘수중금(袖中錦)’ 중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soullaw&logNo=220476237900(중세 고려청자 사진) 
  

동아시아 독보적 경지에 올랐던 고려 회화(불화) 

http://cafe.daum.net/indelamang/1SaH/538?q=%B0%ED%B7%C1%20%BA%D2%C8%AD%20%B1%E2%BC%FA%B7%C2
  
http://blog.daum.net/migiro/1210
  

세계 최초 고려 금속활자 (세계 활자 종주국 고려) 

http://cafe.daum.net/mujuseonwon/2lvx/7406?q=%B0%ED%B7%C1%20%BC%BC%B0%E8%C3%D6%C3%CA%20%B1%DD%BC%D3%C8%B0%C0%DA
  


고려 조선의 발달한 천문학. 

1073년과 74년 <고려사>는 서양에서는 관측하지 못한 ‘신성’ 기록을 남겼다. 그뿐이 아니었다. 1592~94년 사이에도 역시 서양인들의 눈에 띄지 못한 객성을 4개나 관측했다. 특히 한 개의 객성은 15개월간 두 번의 연속된 기간에 걸쳐 관측됐다. 이 객성을 끈질기게 관측한 조선 천문학자들은 이 별은 나타났다 사라지는 신성이나 초신성이 아니라 고정별(항성)이라 판단했다. 그 판단은 옳았다. 그 별은 신성이나 초신성이 아나라 자체적으로 별이 밝아졌다 어두워졌다를 반복하는 변광성이었다. 이뿐이 아니다. 조선의 천문학자들은 1572년 덴마크의 천문학자 티코 브라헤가 관측한 이른바 ‘티코 초신성’도 동시에 보았다. 또한 1604년 독일의 천문학자 요하네스 케플러가 발견했다고 해서 ‘케플러 초신성’이라 명명된 초신성도 관측했다. 오히려 케플러보다 4일이나 먼저 관측하는 개가를 올렸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709130916001&code=960100#csidx5886a16c17d6a568c85a6ae9120d139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kalefarmer&logNo=221094800169
  

왜구 500여척을 몰살시킨 세계 최초의 고려 화포함대해전-진포대첩 

http://gunsan.grandculture.net/Contents?local=gunsan&dataType=01&contents_id=GC05700012
  

세계 도시와 비교한 고려의 도시규모 포스!!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137014
  
고려 문화의 포스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137015
          
굿잡스 18-09-13 20:40
   
대개 성곽을 쌓을 때 높은 산을 베고 있다. 가끔 언덕이나 산기슭을 나와, 또한 구불구불 둘러 있는 것이 보인다. 큰 것이 날아갈 듯 치첩이 솟아 있고, 
작은 것도 우뚝하게 표관이 웅장하다. 
  

환취(황해도 봉산군에 있는 누각)는 날아갈 듯 아름답고, 총수(산 이름)는 구름이 이어졌다. 
  
보산(관<關> 이름)에는 서기가 날아오르고, 금암(관<關> 이름)에는 시내가 통과한다. 
  

[개성은] 봄바람에 술집 깃발이 나부끼고, 달밤에 음악소리 들린다. 

그 민물(民物)은 풍성하여 실로 다른 고을에 비길 것이 아니고, 풍기(風氣)는 밀집하니 또한 서경(평양)에 견줄 바가 아니다. 
  


[서울은] 트인 길과 통한 거리는 바르고 곧아서 구부러짐이 없고, 잘라낸 듯한 처마에 우뚝 빛나는 집이다. 

모든 집은 높은 담이 있어서 바람과 불을 막고, 
방마다 북쪽 창을 뚫어 더위를 피한다. 
  



[서울에는] 종고라는 다락이 있다. 성 안의 네거리에 있는데 매우 높고 크다. 
  
서울 안에 우뚝 솟았고, 길가에 높고 높도다. 

시끌벅적 수레와 말 소리가 울리고,  끝없이 어룡 유희가 나온다. 식기는 금, 은, 동, 자를 섞어서 쓰고, 품물(品物)은 바다와 육지의 진기한 것이 고루 많다. 
경기 안의 경치로는 한강이 제일이다. 
  
누대는 높아 구름을 막고, 물은 푸르러 거울처럼 비춘다. 
  
나루로는 양화도가 있는데, 물산(物産)이 또한 번성하다. 
  
활은 중국의 제도에 비하면 조금 짧다. 그러나 화살은 매우 잘 나간다. 
  
 -명(明)의 동월(董越)이 1488년의 조선을 보고 1490년에 쓴 조선부[朝鮮賦]- 

  
이 나라는 풍요하여 많은 쌀과 보리가 나고, 과일로는 배, 호두, 무화과, 밤, 사과, 잣, 그리고 무진장한 꿀, 약간의 비단, 다량의 면화와 베를 생산하고 있다. 지하자원으로는 금과 은 광산은 적다고 한다. 하지만 많은 말과 소, 양질의 노새, 당나귀, 게다가 전 국토에 걸쳐 수많은 호랑이가 서식하고, 그 밖에 갖가지 다양한 동물이 있다. 그들이 만든 공작품은 

정교하고 아름다워서 그들이 솜씨가 좋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 사람들은 피부색이 하얗고 
  
건강하고 대식가들이며 힘이 세다. 그들은 터키 인의 활과 같은 작은 활을 매우 잘 다루고, 독을 바른 화살을 사용한다고 한다. 



역대의 조선 국왕들은 가장 훌륭하고 중요한 도시에 큰 궁전을 지었는데, 그곳에 수많은 가신을 거느린 관청이 있었다. 서민들의 집은 대부분 기와지붕이며, 
  
그 밖에는 초가지붕으로 그다지 청결하지는 않다. 그렇지만 귀인과 부호들은 결이 고운 식물로 짠, 정교한 장식이 있는 극히 질 좋고 광택이 나는 돗자리를 
  
집안에 깔고 있는데, 일본인이나 일본에 오는 포르투갈 인들은 그것을 매우 진귀하게 여겼다. 
  


우리는 나가사키에서 조선으로부터 들여온 몇 벌의 백의를 보았는데, 그 옷에는 
  
더할 나위 없이 섬세하게 공을 들인 자수를 해 놓았다. 그것은 어떤 부분은 짠 것인지 아니면 실과 바늘로 꿰맨 것인지 여간한 시력이 아니고서는 구별이 불가능 할 정도였다. 
  
이상의 내용들이 조선을 여러 차례 방문했던 사람들을 통해 관백의 궁정이 조선에 대해 입수했던 정보의 요약이다. 
  

 -루이스 프로이스(Luis Frois, 1532~1597년)의 일본사(Historia de Japam)- 



[개성은] 봄바람에 술집 깃발이 나부끼고, 달밤에 음악소리 들린다. 

그 민물(民物)은 풍성하여 실로 다른 고을에 비길 것이 아니고, 풍기(風氣)는 밀집하니 또한 서경(평양)에 견줄 바가 아니다. 

 -명(明)의 동월(董越)이 1488년의 조선을 보고 1490년에 쓴 조선부[朝鮮賦]- 


3,300여칸에(혹2600여칸) 달하는 시전행랑이 1414년에 완성했습니다. 이제 조선을 건국한 시점이고...조선 후기보다는 고려시대와 가까웠던 시절입니다. 
  
그리고 동월이 본 술집깃발은 고려시대의 문화입니다. 그리고 조선 전기에도 짧은 기록에까지 남아있을 정도로 여전히 번성했음을 알 수 있고, 당시 개성이 매우 발달했음을 알 수 있군요. 

세종실록 28권, 세종 7년 6월 23일 신유 6번째기사 

전 판나주목사 정수홍(鄭守弘)의 진언은, 

"전조(前朝) 사재(司宰)의 어물고(魚物庫)가 송도에 있었사온대, 겨우 단층 3간뿐이었사오나, 그래도 5백 년 동안 국가에서 소용되는 데 모자란 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사재감에는 이층 창고가 서너 채가 있어 높고 크기가 굉장하오나, 그래도 다 들여넣을 수 없어서 가창고(假倉庫)를 많이 짓기까지 하였습니다." 
  

성중의 사찰이 민가보다 더 많았으며, 그 중에도 크고 웅장하며 높고 특출한 전각은 

지금까지 오히려 그대로 남아 있으니 그 당시의 존숭함이 지극하였던 것을 상상할 수 있다. 

-연복사탑 중창기(演福寺塔重創記, 1393년)- 

  

십천교(十川橋)를 지나 연복사(演福寺)에 이르니 절 가운데 5층 누각이 높이 솟아 주위의 성문을 누르듯이 서 있었다. 누각의 벽면과 모서리에 채색 그림이 

그려져 있는 참으로 웅장한 건물이었다. 

-유송도록(遊松都錄, 1477년)- 


 (5월 3일) 술시(戌時) 조선의 도읍 동대문으로 진입, 거기서 황성(皇城)의 모습을 바라보니 옥루금전(玉樓■x殿) 늘어선 기와집, 

널따란 성벽들의 조형미는 극치에 달하고 수천만 헌(軒)과 늘어선 대문들, 보귀로운 모습은 이루 말로 다할 길이 없다. 

그런데도 막아 싸우려는 병사들은 보이지 않고 대문은 굳게 닫혀 있어 온통 적막하였다. 

(중략) 내리(內裏) 안으로 들어가 보니 궁전은 텅 비었고 사대문은 제멋대로 열려있었다. 

그제야 전각을 자세히 살펴보니 궁궐은 구름위에 솟아있고 누대는 찬란한 빛을 발하여 

그 아름다운 모습은 진궁(秦宮)의 장려함을 방불케 하더라. 

(중략) 후궁(後宮)에는 화장품 향기가 감돌고 산호의 대상(臺上)에는 화려한 거울이 덧없이 남아있다. 

난 향기는 전각 밖까지 풍기고 사람 살던 자취도 그렇거니와 하염없는 구슬로 장식한 침상들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건물마다 문이 열려 있고 궁문을 지키는 자 없으니 어디를 보아도 처량하기 짝이 없다. 

그토록 용맹한 고니시도 천자(天子)의 옥좌(玉座)에 절을 하고 신성하고 고아한 분위기에 휩싸여 두 눈에 눈물이 괴니 

소오스시마, 아리마, 오무라도 따라 눈물을 흘리었다. 

-에도시대의 문헌 "조선정벌기 (朝鮮征伐記)"에서-  

조선 도시의 포스와 에도시대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136980
  
조선 후기 상업의 발달과 성시(城市)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137001
  
18세기 평양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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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8년 일본을 여행한  gustafv kry torner가 남긴 동양기행기 에서 당시 일본인의 여러모습중 인상깊은 부분과 특히 수도 도쿄에 대한 설명. 
  

[실제로 가면 기대한 것만큼 실망하게 된다  도쿄는 큰마을 정도의 느낌이다 그리고 도시에 널려있는 빈약한 목조주택  가운데 우뚝 솟아있는 왕의 거처도 궁전이라기 보다는 단순한 성벽같은 모습에 매우 초라했다. 
  
그리고 이보다 더 심각한 모습은 바로 통치자의 행태이다 바로 민족의 낮은 수준을 그대로 방치하고 근절하는데 전혀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문화의 발전은 가장 핵심 공중도덕에 있다 하지만 일본인에게 
  
공중도적은 조금도 존재하지 않는다 길거리에서 옷을 벗고 다니고 아무데서나 소변과 대변행위를 한다 한 마디로 공중도덕 완벽히 결여되어 있는것이다. 
  
이런 점에서 일본인의 사고방식은 유럽인과 너무 차이가 난다 일본은 방문하는 사람들은 유럽과는 일거수 일투족이 전혀 다른 모습들을 늘상 목격하게 될것이다 어떤 도시든 
  
마을이든 목욕탕이 있고 그곳에서는 어김없이 남녀가 한곳에서 목욕을 하는 모습을 발견할수 있다 그리고 특히 일본의 시골은 모두가 전혀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한다 그래서 너무나 비참한 모습들이다] 
  

반대로 한국을 부정적으로 묘사했던 대명사로 알려진 이자벨라의 조선의 수도 즉 한양에 대한 구절 

[지금 서울은 어느나라의 수도 에 비교하여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아름다우며 자신만의 모습을 보여준다 특히 근대 이 전통문화에서는 세계 최고의 수준을 간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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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j12 18-09-14 20:48
   
가생이 최고의 유사역사학 신봉자 굿잡스는 오늘도 열심히 전세계 어느 공식적인 학계에서도 인정하지 않는 사실을 마치 사실인 마냥 말하고 있군.
은나라가 한민족이 세웠다는 확실한 유물이나 기록은 단 하나도 없고(굿잡스 이놈은 갑골을 보고 점을 쳤다는 기록을 가지고 그림을 보고 점을 치니 관습은 현재 중국 한족에게는 없고 한민족 고유의 풍습이니 은나라=한민족 국가리고 비약이나 펼치는데 현재 설령 그런 관습이 중국의 한족에게는 없다고 해도 지금은 한족에게 흡수되고 없는 옛날 은나라를 세운 소수 민족이나 아니면 남아있는 소수 민족이 그런 관습을 가졌을수 있고 그게 사실이라면 서로 교류나 민족의 이동으로 인해 민족이 달라도 일부분은 같은 관습을 가지고 있을수 있지, 애초에 한중일이 전부다 민족은 달라도 조상을 존중하고 제사를 지낸다는 같은 문화권을 형성하듯이.
그리고 고대 일본에 도래인이 건너가서 일본 형성과 문화에 많은 영향을 준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그걸 가지고 마치 너처럼 옛 도래인들이 열도로 건너가 왜(일본)이라는 나라를 세웠고 고대 일본은 백제의 담로(요새 의미로 식민지)중 하나였다고 말하는 것도 지나친 비약중 하나
애초에 고대부터 일본 왕실에 백제피가 흐르는 것도 고대 일본으로 간 도래인들이 일본의 고위층이 유력 가문으로 된 경우가 굉장히 많아서 일본왕실과 일본 고위 도래인들관의 결혼이 성행했기 때문이고(아무리 그래도 일본왕실이 일반 평민하고는 결혼 할수도 없는 노릇이니)
그리고 정말 고대 일본이 니 주장처럼 무슨 백제의 담로국중 하나였다면 일본이 한나라 위나라한테 정식 국가로 책봉받고 일본이 백제의 담로국인데도 중원왕조에게 자신들의 왕을 백제,가야,신라를 지배하는 왕으로 책봉해달라고 하고 백제가 우호의 의미를 고대 일본(왜)에게 볼모를 보내고 김춘추가 백제에게 자신의 딸 잃자 복수심에 일본에게 가서 같이 백제 좀 치자고 설득 했는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냐?
그리고 일본이 조선에거 황제니 황상이니 하면서 조공 바친것도 조공무역으로 이득을 보기 위해 지방 다이묘들이 한 것에 불과하고 세조과 여진인들과 왜인들에게 신민이니 차별을 없애고 관리하나 이렇게 말한것도 엄엿이 조선에 귀순해 살고있는 왜인과 여진인들에게 한 말에 불과함(실제로 조선은 일본과 여진에게 조선에 귀순해 오는 자들에게는 받아들이고 관직도 주는 방식으로 유화책을 많이 섰으니)
따라서 이걸 가지고 무슨 그때 일본이 조선의 종속국이라고 말하는 것도 개그에 불과하고
그리고 마지막에 19세기 서양인 여행자가 조선을 칭찬한 내용만 일본을 비판한 내용만 골라 편협하게 올리는데 애초에  19세기 서양인 여행자들중 조선 거리를 똥 천지라고 혹독하게 비판한 글도 엄청 많음
                    
굿잡스 18-09-15 15:34
   
??? ㅋㅋ 참나.
yj> 회원 번게도 제대로된 근거 한줄 없이 고고학적, 사서에, 여러 학자들 견해에 대해 무식하면 용자라고 이런 말본새의 허접 댓글이나 다는 수준으로 어쩌고 본인이 부들부들 쳐하면 무시되는 건가??? 무시해야하고??ㅋㅋ
그리고 번역기 쳐돌리는지 난독증인지 그런 일본과 해외 학자들의 견해 소개가 나의
주장임?? 초딩 한글 독해력도 없는건가??? ㅋ 한심한 말본새에 한심한 한글 독해력. 쯧.

여기서 이전부터  부들부들 똑같은 소리 드립치는 인간 한명 보이더만 중복 아이디 분신술임? ㅋ 한심한 말본새의 인간하군. 쯧

*백제가 다스린 직할령 즉 담로(擔魯)와 왕,후제도

『송서』 이역열전의 백제조의 이에 따르면 대명 2년(458)에 백제 개로왕이 중국 송의 조정에 사신을 보내면서 우현왕 여기(餘紀) 등 11인에게 장군의 호에 대한 기록. 그 가운데 목금과 미귀 등을 제외하면 모두가 여(餘)씨로, 즉 백제 왕족인 부여씨. 같은 『송서』 이역열전 백제조의 기록에서는 영명 8월(490)년에 백제 동성왕이 사신을 보내 마찬가지로 영삭장군 저근 등 4인에게 작호. 면중왕, 도한왕, 팔중후, 매로왕, 불사후 등의 왕·후의 작호가 보이고 있어, 보다 본격적인 왕·후제도가 실시.
 
*금동관모의 소유자, 백제의 중앙 조정으로부터 왕(王)·후(侯)·장군등의 작호를 수여.

* 지금까지 발굴된 백제의 금동관모 출토지.
 공주 수촌리 고분군 등 중서부지역에서 5점, 전남지역에서 1점, 옥전 M23호분 등 가야지역에서도 2점이 출토. 일본 규슈의 에다후나야마(江田船山) 고분.
 
사진

http://cafe.daum.net/alhc/3Cdg/675?q=%EC%97%90%EB%8B%A4%ED%9B%84%EB%82%98%EC%95%BC%EB%A7%88(%E6%B1%9F%E7%94%B0%E8%88%B9%E5%B1%B1)%20%EB%B0%B1%EC%A0%9C%20%EA%B8%88%EB%8F%99%EA%B4%80%EB%AA%A8
 

일본 규슈 강전선산(에다후나야마江田船山) 고분.

에다후나야마 고분(일본어: 江田船山古墳)은 일본 구마모토현 다마나 시에 있는 고분으로 1873년 1월 4일 발굴된 전방 후원분. 14개의 큰 칼이 출토되었는데, 말의 모습이 은상감된 철제칼도 발견. 이와 함께 금동제관모와 금동제관 그리고 청동거울이 발견되었다. 금귀고리도 출토.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금석문이라고 교과서에 소개.5세기~6세기로 추정.

*에다후나야마 쇠칼에 새겨진 명문 뜻.

이두로 다시 본 칼 글

“천하를 다스리는 확가 이시자 크신 개로 대왕의 누리에 벼슬아치로서 섬긴 ”기리“가 만들다. 八월에 큰 주물솥을 써서 아울은 넉자 큰 칼을 여든 번 불리고 예순 번 후려서 삼재에 가장 좋은 칼이 됐다. 이 칼을 차는 이는 장수하고 자손이 불며, 삼은을 얻을 지이다. 이끄는 나라도 잃지 않을 것이다. 칼을 꾸민 이는 이태리이고 쓴 이는 장안이다”
 
이름에서 석자가 잘 안 보이는 대왕이름은 앞뒤글자와 빠진 글자 수가 서로 같기에 이나리야마 쇠칼에 나오는 확가다기로 와 같은 이름으로 통상 보고 있으며 타당하다고 본다.다만 우리가 풀이하는 바로는 확가란 확고를 거느리는 대왕을 뜻하는 백제 말이고 다(多)는 대(大)와 통하여 크시다는 말이라고 볼 때 이 이름은 기로(기鹵)임을 알 수 있다.이두에 따라 이 이름은 개로(蓋鹵)와 같다고 본다.
 
개로 대왕은 서기 455년에서 475년에 걸쳐 재위했으므로 이 동안에 이 쇠칼을 만든 것으로 된다.

이나리야마 쇠칼을 만든 이는 장수인데 에다후나야마 쇠칼은 벼슬아치 ‘기리’가 만든 것이다. 확고란 백제말로 태수나 후왕에 비길 칭호이다. 고 확고와 마찬가지로 ‘기리’도 확고였다고 짐작 된다. 그 까닭은 개로 대왕의 아우 ‘고니기’(昆支)가 458년에 좌현왕(左賢王)으로 임관되는데 이미 확고인 왜왕고오(興)였다. 같은 해 458년에 ‘기리’(旡利)는 여기(余紀)로서 우현왕(右賢王)에 임관됐기 때문이다.여기서 기리(旡利)라는 이름을 살피자.
 
칼글을 보면 이 이름 첫 자는 우리는 기(旡)라고 보는 것이다. 이때 비로서 이름 여 기와 통하게 되는 것이다.

‘고니기’라는 이름이 상표문에 한자로 적힐 때는 여곤(余昆)이라고 적는데 이름 첫음절 ‘고니’를 외마디 한자 곤(昆)으로 적고 성씨 여를 더한 것이다. 이런 경우가 여럿 있다.
 
도기(腆支)왕도 전(腆)으로 상표문에 적히며 가스리(蓋鹵 또는 慶司)도 경(慶)자로 나오는 관례에 따라 기리(旡利)도 좋은 한자이자 외자인 기(紀)로 상표문에 적히게 됐다고 보는 것이다.
 
다른 문헌에는 ‘기리’가 여기(紀)로 적히는 보기를 들수 없어 장담 하기는 어렵다.

이 명문에 나오는 글쓴이 장안을 보면 장(張)이라는 중국“성”이 주목된다. 왕인(王仁)의 왕씨와 마찬가지로 낙랑의 망명인 후손일 것이 짐작된다.
 
 여기(余紀)가 우현왕으로 임관되다

서기 458년에 송나라에 보낸 상표문에서 개로왕은 열한 명의 배신에게 작위를 제수해줄것을 송나라에 요청하고 있다.

여기서 여곤(余昆)은 좌현왕으로 여기(紀)는 우현왕으로 임명됐다.

북방 유목 민족의 군사 제도를 보면, 왕의 직할지 밖의 왼쪽 영토에는 권력 이인자를 그 영주로 임명하고 있다. 그리고 그 바른쪽 영토에는 우현왕을 임명하기로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余紀)가 우현왕에 임명됐다. 좌현왕 여곤의 이름은 ‘고니기’이고 고니를 외자 곤(昆)으로 상표문에 적고 있다.

고니기는 곤지(昆支)왕으로서 왜나라 가와찌에서 왜왕 고오임을 이미  밝힌 바가 있다. 위치로 봐서 가와찌는 현재 오사까 남부이며, 백제에서 보면 나라 밖 왼쪽에 자리잡고 있게 된다. 따라서 우현왕이 차지한 나라 밖 바른쪽 다무로라면 규슈 다마나 고을이 바로 그곳인 것이다.
 
에다후나야마 쇠칼에는 기리(旡利)가 칼을 만들었다고 적고 있다. 물론 여 기도 확고라는 칭호로 불리면서 구마모도 현 다마나 고을 일대의 다무로를 다스렸을 것이다. 그 지명이 가리키듯이 이 다무로는 다무로 내지 다마라를 지표지명으로 가진 백제 겨레의 한 갈래가 이곳에 살면서 백제가 강성해지면서 자연히 정치인연을 맺게 된 것으로 파악되는 것이다. 북규슈 연안에는 이미 선주민으로 차 있어서 이들은 자연히 그 남쪽으로 밀려 살게 된 것이 구마모도 현 다마나 고을 일대였을 것이다. 그런데 이곳에 흐르는 내에는 구마가와라는 강이 있어서 구마 곧 곰으로 상징되는 백제 겨레가 지은 이름임을 알 수도 있다. 더구나 이 지방은 5세기 이전 까지는 “고마”로 통하면서 한자로는 비(肥)로 표기하고 있다.당시에 고마는 백제를 뜻하는 말이었다고 한다.
 
 가멸진 부장품

우현왕 여 기가 묻혀있다고 생각되는 이 둥글 모난(전방 후원) 무덤은  백제식 옆튼 돌칸 무덤이다. 여기에는 백제풍 집꼴 돌널이 있었고 숱한 백제 공예품이 쏟아져 나왔다.
 
http://b2b.mekia.net/previewEPUB/BK0000183388/OEBPS/Text/Section0003.xhtml

이 고분에 대한 학자들의 여러 견해

김석형은 대도 명문의 서치대왕의 '치'자를 개로왕의 '로'자라고 볼 수 있어 백제 개로대왕이 북규슈의 한 후왕에게 하사한 것으로 해석(기타 일본학자 지지),
 김사엽은 뛰어난 상감기법으로 고구려인으로 추정.
일본학자 직묘효차랑은 금색 찬란한 장신구들을 들어 신라와의 연관성도 높았을 것으로 주장.
최묭룡등 및 기타로 합이나 금관관모, 금동 신발이 익산 입점리 1호분의 금동관모와 매우 유사하며 특히 반구상금구라고 부르는 금동관모 뒷 편에 있는 움직이는 뱀모양의 침금은 두 관모가 거의 동일하다는 점에서 후나야마 고분의 주인은 백제의 봉국인 담로의 지배자로 주장.
 일본학자 을익중룡(乙益重隆)은 토기나 마구등으로 가야와의 연관성 주장.기타 백제 분서왕등.

결론
이런 규슈 일대에 보이는 강전선산(에다후나야마)고분의 출토유물이나 묘제 방식을 볼때
여러 견해들이 나오고 있지만 한결같이 우리 본토쪽과 관련된 유적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으며 특히나 한반도 남부가 백제 삼한 가야등이 섞여 교류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일부의 혼용 견해가 나오지만 사서의 백제 후왕제도, 백제의 담로 지역에 출토되는 중앙 정부가 내리는 금동관모등의 비중있는 무게 유품과 칼의 이두 명문 고찰을 볼때 이 규슈 구마모토일대는 백제의 직접적 행정력이 미친 지역일 가능성이 높다 할 것.


그리고 어그로 쨉빠나 쨉극우들은 무슨 신라 백제 인질 볼모?? 어디서 주워들은건 있어가지고 스테레오 타입의 수준 낮은 글만 내내 무한 반복질하군 . ㅋㅋ 한심한.

우선 고고학적으로 열도의 신석기 곡옥 분포도를 보면
고조선시대 우리 선조들이 대한해협을 사이에 두고 해양을 개척 서열도 큐슈로 진출해서
벼농사와 청동 철기를 전파하기 전까지 인구희박으로 거의 나오지 않은 상황. 열도에  선주민인 조몬인들은 동열도에 주로 거주했고 곡옥 밀집도도 이쪽을 중심으로 분포.

그리고 고분시대를 보면 제대로된 환호유적들이 나오지 않고 거의 산적 수준의 병영기지들이 등장하는데 우리의 삼국시대로 가면서 이런 우리쪽 가야 백제등 여러 군벌 귀족들이
열도에 난립하면서 개척하던 시대 상황.

즉 당시 왜라는 실체 자체도 무슨 미개하던 조몬인들이 아니라 이런 우리쪽 귀족 군벌이 들어가면서 난립하고 있다 5세기를 기점으로 고구려의 본격적 남진으로 한성백제가
끝나고 백제의 남하와 내부 정치적 불안이 맞물리고 가야까지 고구려에 박살나면서
본격적으로 열도에 가야 백제 세력과 인구가 가속화되는 상황에서 이런 왜 어쩌고로
고구려에 대항한 볼모 어쩌고 기록들이 우리쪽에서 나오는 상황.

그런데 정작 일본서기에는 인질이라는 기록이 안나와?ㅋ 왜냐?

근초고왕때부터 황실 외척이였던 백제 진씨는 이런 백제와 정치적 유대를 통해
백제는 이런 고구려에 대항하기 위해 군사력이 필요했고 그에 따른 서로의 동맹 결속
강화를 위해 진씨 귀족에게 보내여 혈맹으로 강화. 이런 진씨쪽에는 자신의 손자였기에
이후 아산왕등이 죽고 왕위에 오를때 도리어 하동까지 땅을 내어주고 호위병력까지 차출.
그리고 무슨 왜라는 글자만 보이면 이게 열도 왜라고 단순 착각하는 무식한 수준의
덜떨어진 쩁빠들이 많은데 왜구가 조선시대로 오면서 일반적 일본을 지칭하기 전 대륙이나 우리 삼한 남부등 왜에 대한 호칭은 다양하게 나타나고 이걸 무식한 쨉극우는 무슨 대륙 정복 어쩌고 쳐하는 황당한 소리는 금물. 그리고 명나라 시기 대륙에서 떠들던 왜도
열도 왜가 아니라 대륙방장왜구 지칭.

그리고 왜의 야마토(大和)의 화라는 글자 자체가 백제 제25대 무령왕의 왕성(王姓) ‘화’(和)씨에서 나온 글자.

“무령왕의 왕자 순타태자(純陀太子)의 직계 후손이 화을계(和乙繼)이며 그의 딸은 화신립(和新笠) 황태후이다. 화신립 황태후는 일본 제50대 간무천황(桓武天皇)의 생모이다”
-속일본기
                    
굿잡스 18-09-15 15:52
   
그리고 무식해서 용어의 기본 차이도 모르나 본데

국가와 문명권의 개념과 차이는 알고 떠드는지?? ㅋㅋ

가령 예를 들면 고구려의 직접적 지배지는 요동과 한반도 북부지만 고구려의 세력, 문명권은 요서와 내몽골 연해주 북만주와 한반도 남부의 백제 신라등에도 영향을 주었든 것처럼

고조선 문명권 역시도 단순히 고조선만이 아니라 이런 고조선으로 대변되는 여러 유물 유적등의 분포도와 영향력등을 보고 이야기 하는 것.그리고 이런 은나라 당시 요하일대에 사서적으로 보이는 중심 국가로 고조선 이외에 제대로 있는지??? ㅋ

그리고 단순히 점복문화가 아니라 은허 유적을 직접 발굴한
부사년의 견해등에 한자의 원형 갑골문의 이런 갑골 즉 뼈에 뭔가를 새기거나 이런 걸
이용해서 점을 치는 문화는 부여등 우리 만주와 한반도 일대에 성행하던 문화라는 것.

갑골문화 분포도
 
http://blog.daum.net/pance73/5509
 

 서토 내륙 농경 하한족을 정벌하고 세운 최초의 이민 정복왕조 동이족 상나라

고고학자 쑤빙치(소병기·蘇秉琦)는 “은(상)의 조상은 남으로는 옌산(연산·燕山)에서 북으로는 백산흑수(백두산과 헤이룽강)까지 이른다”고 단언했다.
 
또한 <그 유명한 안양 인쉬(殷墟) 유적 발굴을 총지휘했던 푸쓰녠(부사년·傅斯年)은 일찍이 “상나라는 동북쪽에서 와서 흥했으며, 상이 망하자 동북으로 갔다”고 단정했다. 중국 학계도 이런 쑤빙치와 푸쓰녠의 관점이 가장 정확한 것이라고 인정하고 있다
 
인쉬 유적에서는 상나라 귀족들의 묘가 발견되었는데, 발굴된 대다수의 시신들이 동북방 인종의 특징을 갖추고 있었어요. 인골들의 정수리를 검토해보니 북아시아와 동아시아인이 서로 혼합된 형태가 나타난 거지. 이것은 황허 중하류의 토착세력, 즉 한족(漢族)의 특징과는 판이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됐어요.”
 
또하나, 인쉬(은허) 발굴자들이 인정했듯 상나라 사람들이 동북방의 신앙을 존숭했다는 것이다. 즉 상나라 왕실에서 고위층 귀족들에 이르기까지 동북방향을 받들었는데, 이는 고향에 대한 짙은 향수와 숭배를 나타난 것이라는 해석이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802151715165&code=210000
 

“군사를 일으킬 때 소를 잡아 제사 지내고 소의 굽으로 출진 여부를 결정했다. 굽이 벌어져 있으면 흉하고 붙어 있으면 길하다.

有軍事亦祭天 殺牛觀蹄 以占吉凶 蹄解者爲凶 合者爲吉


魏略曰:其國殷富,自先世以來,未嘗破壞。

위략 왈 그 나라는 매우 부유하며, 선대로부터 오늘날까지 한번도 파괴당한 적이 없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 부여조


장발영(張發潁)의 저서 <봉황토템 동이인 및 그 문화의 공헌>- <시회과학집간>2001년 2기- 에서

동이문화의 유적분포는
- 연산(燕山)의 남북과
- 료녕(遼寧)의 부신사해문화(阜新查海文化)를 포함해서
- 심양(沈陽)의 신락문화(新樂文化),
- 산동의 대문구문화(大汶口文化), 하무도문화(河姆渡文化)와

그 후의
- 조보구(趙寶溝), 흥륭와(興隆洼), 우하량(牛河梁) 및
- 은상문화(殷商文化)까지

동이문화는 봉황(鳳凰)을 토템으로 하였다.
통일된 문화체계는 아니지만 문헌에 기록된 이후의 생활은 이 지구(地區)의 조상들의 범칭(광범위한 동이문화)이다.
 
봉황을 모(母)토템으로 삼고 각종 새들을 자(子)토템으로 하는 북방 봉황토템 동이의 조상들이 널리 퍼져 있었다.

이들은 모두 연산산맥(燕山山脈)의 동이문화권을 중심으로 발전되어 왔다.
복희(伏羲)에서 하상(夏商) 2대까지 동이문화가 주도적인 역할을 해 온 것이다.

동이족 사람들은
- 깃털달린 활과 화살을 발명했으며,
- 문자를 창조했으며,
- 청동기를 제작하고,
- 철을 단련했으며,
- 배(舟)와 수레(車)를 만들었고,
- 농업을 발전시키고 치수(治水)를 하였다.


東海之內 北海之偶 有國名曰 朝鮮

"동해(서토 동해안) 안쪽, 북해(발해) 모퉁이에 조선이란 나라가 있다”


君君子國在其北 衣冠帶劍 食獸 使二大虎在旁 其人好讓不爭 有薰華草 朝生夕死 一曰在肝楡之尸北 [海外東經]

군자국이 그 북쪽에 있는데 옷을 입고 관을 쓰고 칼을 찬다. 짐승을 잡아 먹고 두 마리 큰 호랑이를 부려 옆에 둔다. 그 사람들은 양보하기를 좋아하고 다투지 않는다. 훈화초(현 대한민국의
 
국화(國花)인 무궁화의 옛이름)라고 있는데 아침에 생겼다가 저녁에 진다. 혹은 간유시의 북쪽에 있다고 한다.

靑丘國在其北 其狐四足九尾 一曰朝陽北 [海外東經]

청구국이 그 북쪽에 있는데 그 곳의 여우는 네 개의 발과 아홉 개의 꼬리가 있다. 혹은 조양의 북쪽에 있다고 한다.

有靑丘之國 有狐 九尾 [大荒東經]

청구국이 있는데 여우가 있어 꼬리가 아홉 개이다.

-산해경



又東五百里 日丹穴之山 其上多金玉 有鳥焉 其狀如鷄 五采而文 名日鳳凰

다시 동쪽으로 500리를 가면 단혈산이 있어 그 위에 금과 옥이 많다.

새가 한 마리 있는데 닭같이 생겼으며 오색무늬가 있어 봉황이라 부른다.

그의 머리 무늬(首紋)는 덕, 익문(翼紋)은 의(義), 배문(背紋)은 예(禮), 응문(膺紋)은

인(仁), 복문(腹紋)은 신(信)을 나타낸다. 이 새는 자연물을 먹으며, 스스로 노래하고 춤춘다.

이 새가 나타나면 천하가 태평해진다.”

-산해경(춘추전국시대에서 늦어도 한초기 사이에 편찬)

봉(鳳)

봉은 신조(神鳥)이다. 동방의 군자국(君子國)에서 나는데, 사해(四海)의 밖에서 날아올라, 곤륜산(崑崙山)

을 지나서 지주(砥柱)에서 물을 마시고 약수(弱水)에서 깃을 씻고, 저녁에는 풍혈(風穴)에서 잔다. 이 새가

나타나면 천하가 크게 태평해진다. <설문(說文)>

 

맹조(孟鳥)

맹조는 맥국(貊國)의 동북쪽에서 나는 새의 이름으로, 그 새의 무늬는 적색, 황색, 청색이다.

<산해경(山海經>


고조선, 삼국시대에서 조선시대에고 새숭배(하늘숭배)의 토템을 간직한 우리의 전통적 조우관(새의

깃털장식을 한 관모)이나 솟대 문화등으로 면면히 이어져 오늘날 우리 대통령의 상징 역시

새숭배(하늘숭배)의 봉황에 모든 생명의 시작과 광명을 상징하는 동방의 뜻을 내포.


유럽 지중해 고대인들의 당시 세계관에서 제우스등 그리스 로마의 신화적 세계관이 가미되었다고 그리스 로마라는 엄연한 실체하는 역사가 없지 않았듯 또한 당시 동북방에 하늘 숭배 새토템  특히나 봉황이나 삼족오 조우관등을 고조선부터 고(구)려 근세 조선으로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우리 대통령의 상징으로 도도하고 줄기차게 중심 세계관과 문화,역사로 이어온 나라는 우리 대한민국뿐
                         
yj12 18-09-15 19:51
   
굿잡아 니가 쓴글 다 읽어 보았는데 애초에 유럽국가나 원나라 고려 관계어서도 보듯이 국가관 동맹을 맺기위한 혼인이나 아니면 천자국이 제후국에게 자신의 왕실 세력을 상대방 왕실에 보내 혼인시키는 경우는 굉장히 흔했단다
예로들어 고려같은 경우도 원나라 간섭기때 원나라 황제가 자기 딸내미를 고려왕에게 시집 보냈고 자연히 고려왕들이 그때 전부다 원나라 황제의 외손자였듯이
그랬다고 해도 그걸 가지고 그때당시 고려가 원나라의 식민지였냐?
따라서 그때당시 일본이 백제와 굉장히 긴밀한 관계를 맺었으니 일본 왕들중에서 백제왕관 친척관계인 왕이 나온것도 당연한거지
그걸 가지고 무슨 일본이 백제의 담로국이니 뭐라고 하는건 그냥 지나친 비약인거고
그리고 니말대로 그때당시 일본(왜)가 백제의 담로국이라면 최소한 백제가 본국가 떨어져 있는 점령지에다가 직접 통치하기 위해서 당연히 열도에 통치기관을 세웠을텐데 그런 기록은 단 하나도 없음
이게 말은 된다고 생각하냐?
그리고 김춘추가 대야성에서 자기 딸내미 잃자 복수심에 일본(왜)에 가서 같이 백제 좀 치자고 설득한것도 그때당시 일본이 백제의 담로국이였다면 절대로 설명할수 없고
그리고 너는 왜가 열도 일본만 가리키는 단어가 아니라 다른 대륙이나 삼한내에 왜를 가리키는 단어라고 난생 처음듣는 소리나 쳐하는데 그때당시 왜라는 단어를 사용했는 국가가 야마토(왜)정권 말고는 더 있기나 했냐?
그리고 도화견문지에 왜국은 고려에 속하고 있다고 적힌것도 그때당시 조공무역으로 조공 바치면 신하국,속국이란 전반적인 인식 때문에 그런 기록이 적힌 것에 불과하고( 그 증거로 남제서보면 고구려를 자기들 신하라고 적었거나 실록보면 명,청이 조선을 속국으로 취급하거나 조선 역시 자신들이 황제(명,청)국의 속국으로 생각했는 기록이 많음
그리고 조선시대때 일본이 조선에게 황제니 뭐니 하면서 조공 바친것도 각 번의 다이묘들이 조공무역으로 조선에게서 이득을 취하기 위해 한짓에 불과하고
세조가 야인이나 왜인이니 전부다 신민이니 공평하게 관리하나 어쩌고 한것도 엄엿히 조선에 귀순한 왜인들과 여진인들을 가리켜서 한 말에 불과( 그 증거로 조선같은 경우는 유화책으로 조선에 투행해온 여진인들과 일본인들을 받아들이고 관직도 주었으니)
그리고 굿잡은 교모하게 마지막에 서양인이 조선을 칭창한 것만 골려서 올렸는데 실제로 19세기 서양인들중 조선 한양거리를 똥 천지나, 황무지와 같았다고 혹독하게 비판한 글도 많고
                         
yj12 18-09-15 20:08
   
그리고 굿잡아
애초에 그때당시  중국 북동쪽에 살고 있던 민족이 한민족 하나뿐이겠냐?
애초에 은나라가 세워졌을때는 고조선 초기 단계라 고조선도 처음부터 광할한 영토를 차지한게 아니라 처음에는 수도 근처에 영토에서 시작되었을 거기 때문에 무슨 은나라가 있던 초기부터 중국 북동쪽에 있는 관습은 고조선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라고 중국 북동쪽에 있던 관습이 전부다 고조선의 영향을 받았는 관습이라고 생각해서 은나라=한민족이 세운 나라라고 치부하는건 코미디에 불과하고
그리고 새를 숭배하는 사상은 중국역시 봉황을 신성한 새로 숭배하고 서양에서도 불사조라는 동양의 봉황과 같은 새를 숭배하는 사상이 있기 때문에 단순히 새를 숭배하는 그런 관습이 한민족 고유의 관습도 아님
애초에 중국 북동쪽에는 무수한 소수 민족이 있는데 동쪽에 있는 민족=한민족이라고 치부하는건 웃기지 않니?(애초에 옛날에는 새를 하늘을 상징하는 동물로 여겼기 때문에 새를 숭배하는 관습이 꼭 특정 민족에게만 있는것도 아니였고)
그리고 굿잡스 이 놈은 학문적 근거 드립하는데 조공은 고대부터 무역관계 였고 애초에 과거의 속국과 지금의 속국은 개념이 다르고 또 고대 일본(왜)가 여러 중국 왕조들로부터 책봉받고 자신들을 백제,신라,가야를 다스리는 왕으로 책봉해 달라고 중국 왕조들에게 요구하고 또 김춘추가 왜(일본)에게 같이 백제 치자고 설득하거나  조선이 초기부터 왜와 여진인들이 귀순해 오면 신민으로 받아들이고 관직을 주는 등 유화책을 사용하고 19세기 서양인들이 조선을 혹평한것등 이런 것들은 조금만 책이나 인터넷 찾아보면 쉽게 알수 있는 상식이고
그리고 니 말이 사실이라면 한중일 포함해서 전세계 어떤 학계에서도 인정하지 않고 사이비 취급하겠냐?
어떤 공식적인 학계에서도 인정하지 않고 사이비 취급받는 주장이나 하는 몇몇 외면받는 소수의 학자들의 의견과 주장을 근거랍시고 주장하는걸 보면 기가 찰뿐
(애초에 니가 올린 학문적 근거도 전부다 사이비 유사학자들이 주장한거나 몇몇 기록을 가지고 그걸 자신들 마음대로 편의적으로 해석한 것뿐, 에디후나야마 고분과 쇠칼만 보아도 알수 있는건 일본 왕실에 백제왕실 피가 섞여 있다는 것뿐이고 나머지는 전부다 그걸 가지고 유사학자들이 자기들 마음대로 해석한 내용 뿐이던데)
                         
굿잡스 18-09-20 11:07
   
역사토론에서 그냥  본인 쉰소리 주장만 있지  사료 고고학적 근거 한줄없이 수준 낮은 댓글에 번게도 똑같이 되풀이 하더만 ㅋ

고몽 유럽 결혼 어쩌고 비교 예시도 한심한 수준

영국고대섬 역사로 설명하면 신석기 이베리아인 이후 본격적 갈리아 켈트족 유입 이후 로마제국에 의해 오늘날 런던 고대 론디니움 같은 우리쪽 아스카 나라 문명건설부터 로마 병영기지니 체스터등 열도 고분시대 우리쪽 여러 군벌들이 서열도를 중심으로 난립하던 시대를.

고대 영국 브리튼 섬과 열도의 차이는 
영국은 여러 민족이 유입  이후 로마군을 몰아내고 다시 게르만계를 받아들이면서 국가체재와 통일왕조가 나왔다면 
열도는 우리 선조들의 지속제 유입으로 야요이문명부터 야마토정권 이후 본국 백제가 망하자 아예 백제 유민이 열도에 눌러 앉으면 나라 헤이안 시대를 열고 신정 정치 서열도에서  동열도로 팽창. 

도리어 본토 백제가 망하고 열도에 백제 유민에 의해 나라 헤이안 시대로 국가체재가 나오면서 한반도와 열도 왜간에는  혼인관계도 없었고 우리쪽 관심도 점차 멀어졌던 지역.
                         
굿잡스 18-09-20 11:42
   
그리고 본국 백제가 망하자 황제격인 백제 어라하에 의해 담로로 백제 친왕들은 열도후왕이자 왜왕으로 다스린 연결 고리가 끊기고 본격적 열도에 왕성과 국가체재가 나오면서

편찬된 일본서기등은  백제가 열도에 우리 선조인 삼한 가야보다 후발 주자로 있다보니 상당한 변조로  어디서는 황당서기로 불릴 정도로 일본 학계뿐 아니라 국내학계는 이미 이런 서기에 대한 변조는 정론으로 보는 상황.

대표적 예로 왜왕의 뿌리를 늘리기 위해 실직적 15대  응신왜왕 이전 즉 1대 신무왜왕부터14대 중애왜왕 및 신공황후등은 다 가공된 변조에 한반도 본국 중앙조정의 정치상황이 열도로 공간 이동의 정황묘사등 수많은 변조가 확인. 달리보면 이런 한반도백제 중앙정부인 어라하와 정치변동이 당시  후왕이던 열도 백제 친왕에게도 매우 중요한 현안들이였음을 역설적으로 반증.

이러하기에 일본 고대사는 왜 사서의 변조로 상당한 주의와 여러 사서교차검증에 특히나 당대 고고학적 발굴과 금석문등이 더 실체적 직접적 비중이 큰게 현실.

칠지도(백제 어라하(황제격의 호칭)가 왜왕에 하사)   

<앞> 泰○四年 ○月十六日 丙午正陽 造百鍊[銅] 七支刀 生辟百兵 宜供供侯王○○○○作   
태○사년 ○월십육일 병오정양 조백련[동] 칠지도 생벽백병 의공공후왕○○○○작   

<뒤> 先世以來 未有此刀 百濟王世○ 奇生聖音 故爲倭王旨造 傳示後世   
선세이래 미유차도 백제왕세○ 기생성음 고위왜왕지련 전시후세   

칠지도 명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국립부여박물관 전시 내용)   

<앞> 泰和四年 五月十六日 丙午正陽 造百鍊[銅] 七支刀 生辟百兵 宜供供侯王○○○○作   
태화사년 오월십육일 병오정양 조백련[동] 칠지도 생벽백병 의공공후왕○○○○작   

<뒤> 先世以來 未有此刀 百濟王世子 奇生聖音 故爲倭王旨造 傳示後世   
선세이래 미유차도 백제왕세자 기생성음 고위왜왕지련 전시후세   

태화 4년 5월 16일 병오일의 한낮에 백 번이나 단련한 철로 된 칠지도를 ○○○○가 만들었다. 온갖 적병을 물리칠 수 있으니 제후국의 왕(侯王)에게 주기에 알맞다. 지금까지 이런 칼이 없었는데 백제 왕세자 기생성음이 일부러 왜왕을 위하여 정교하게 만들었으니 후세에 전하여 보이라. 

백제 어라하(황제격 호칭)>>>넘사벽>>>백제 친왕=왜왕=후왕
                         
굿잡스 18-09-20 12:01
   
이런 예는 비단 칠지도에 국한된게 아니라 앞서 규슈일대에서 발굴된 강전선산고분에서도 백제가  담로로 다스리던 지역에서 발견되는 금동관모,신발, 칼 명문 사서 기록등 외에도

칠지도같은 하사품에 백제 어라하와 열도내 백제 친왕이자 어라하의 후왕이며  왜왕에게 준 일본 와카야마현(和歌山県) 스다하치만(隅田八幡) 신사에 소장된 신사 인물화상경(人物画像鏡) 명문(銘文)에도 지위의 상하 차이와 백제 본국 어라하와 열도 백제 왜왕 관계를 알 수 있는 유물.

원문(原文)

 癸未年八月日十大王年寽弟王在意柴沙加宮時斯麻念長奉遣開中費直

穢人今州利二人荨取白上同二百旱作此竟

계미년 8월 10일 대왕의 시대에 율제왕이 의시사가궁(意柴沙加宮)에 있을 때

사마(斯麻)를 영원히 받들어 모시기를 염원하며 보낸다.

개중[오사카]의 비직과 예인 금주리 두 사람 등이 깨끗하고 질 좋은 구리 200한을 골라서 이 거울을 만들었다.


기존 대왕으로 지칭된 사마가 누구를 말하는지 일본학자도 몰랐다가 우리쪽 백제 무령왕의 무덤이 발굴 지석 명문의 사마가 백제 어라하를 지칭함이 밝혀짐.

즉 이는 백제 본국 어라하 무령왕이 열도 백제 친왕인 남동생 계체왜왕 즉 게이타이왜왕에게 준 칠지도와 같은 성격의 하사품.

그리고 새관련 삼족오등도 서토 하남성이나 열도에서도 발견. 그러나 서토는 정작 상고시대 이후 한족의 정체성이 확립되는 한나라시대에 가면 이런 삼족오등은  변형 쇠퇴하는데 비해 우리 고구려 신라 백제는 관모나 벽화등에서 더욱 두드러지는 양상.

즉 이 말은 짱국학자도 이야기하듯 서토문명은 외래 동이족이 하상시대를 주도하면서 황하세력이 영항을 받아서나 이후 정작 자신의 색깔은 아니였다는 것이고 열도 역시 우리쪽 영향으로 출토.

이는 동북아등에 현재 한류가 퍼져 짱국도 한류를 모방하면서 보이고 있으나 그 원류 진핵의 국가와 민족은 우리라는 것과 다르지 않은 맥락.
                         
굿잡스 18-09-20 12:28
   
‘조선건국 고죽위군朝鮮建國 孤竹爲君’(조선이 건국을 하고 고죽이 임금이 되었다)  

-두로영은비문 

 “은(상)나라는 동북쪽에서 와서 흥했으며, 망한 뒤에 동북으로 돌아갔다”   
 -고고학자 푸쓰녠(부사년)   

고죽국 

은(殷)나라 탕왕(湯王) 때 제후국의 하나로 책봉되었다. 군성(君姓)은 묵태씨(墨胎氏)이다. 주나라 초기에 고죽군(孤竹君)의 두 아들 백이(伯夷)와 숙제(叔齊)가 은나라에 대한 충절을 지키기 위해 주나라의 곡식을 먹지 않겠다고 수양산(首陽山)에 숨어 살면서 고사리를 꺾어 먹다가 굶어죽었다는 전설로 유명한 나라이다. 

그들이 우리 고조선문명권과 전혀 다른 문화세력이 아님은 분명.
                         
yj12 18-09-20 17:40
   
굿잡  이 유사역사가 또 낮은 수준을 보이는군
그리고 사이비 유사학자인 니가 학문전 근거 드립치는 것도 웃기지만 니가 올린 학문적 근거들도 일본 왕실에 백제 왕실의 피가 섞여 있다는 것뿐이고 또 백제와 일본이 서로가 서로를 신하국으로 생각했다는 것뿐인데(일본 같은 경우는 칠지도를 오히려 백제가 조공으로 바쳤다고 주장하니)
애초에 넌 무슨 일본왕실에 백제피가 섞여있고 또 백제가 일본을 자신들의 제후국이라고 생각한 것을 가지고 일본=백제 담로국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해석 자체가 무리한 해석이라고 내가 얼마나 설명했냐?(이쯤되면 진짜 말귀를 못 알아 듣는건지)
애초에 담로 자체가 백제의 해외의 식민 통치기관이 아닌지방 행정 기관에 불과했고
애초에 일본이 백제의 분국이라면 최소한 기록이나 유물에 백제의 일본 통치기관이 발견되어야 하는데 그런것 하나도 없고 일본이 초기부터 독립적인 외교를 했다는 것부터가 일본이 독립적인 국가였음을 알수 있으니 당연히 혼인도 국제간의 혼인으로 이해해야 하고
그리고 중국 대륙이 한나라 시대 이후 새토템으로 사상이 도퇴되었다고 해도 그건 한족 한정이고 여전히 그 이후에도 당나라 측천이 봉황을 자신의 상징으로 쓰는 등 다른 소수 민족에게는 새토템 사상이 여전히 남아있음
그리고 잉카나 서양에도 새 토텀 사상이 있는데 그런 식으로 따지면 한민족=서양인=잉카족=선비족 다 같은 민족이냐?
같은 관습 일부를 가지고 있다 해도 다 같은 민족이라는 논리는 코미지지 않냐?
그리고 중국 동쪽에 말걀족, 거란족, 만주족, 선비족 등등 수많은 소수 민족이 살고 있는데 동이족=한민족이라는 논리는 개그에 불과하다고 내가 몇번이나 말했냐?
봉조아 18-09-13 18:05
   
재미나게 잘 읽고 갑니다^^
촐라롱콘 18-09-13 18:09
   
외국인들이.. 특히 서양인들이 저 정도까지 울 나라 역사를 비교적 세부적으로 알고 있다는 것
자체가 신기한 노릇이군요...!!!

저도 개인적으로 소싯적에는 남들 못지않게 밖으로 싸돌아 다니고 외국인들과 많은 대화도 나눠봤다고 자부하는데
적어도 울 나라 역사에 관해서는... 일단 개인적으로 접해본 대부분의 서양인들이 까막눈에 가까웠던지라
울 나라 역사를 주제로는 대화 자체를 오래 지속할 수가 없는 수준이었는데.....

고구려, 백제, 신라, 고려, 조선... 등 지구 반대편 나라 역사의 구체적인 왕조 이름을 알고 구별할 수
있다는 것 자체부터가 대단한 겁니다.
예를 들어 태국의 란나왕조, 수코타이왕조, 아유타야왕조, 톤부리왕조, 차크리왕조...
등을 구체적으로 알고 구별할 수 있는 한국인들이 도대체 얼마나 될 것인지를 가늠해 본다면....

물론 댓글들을 보니 실제 우리 역사와 비교해서 왜곡, 비약, 축소된 부분도 많아 보이기는 하지만....
자중 18-09-13 18:12
   
이제는 고려도 한국 역사가 아니라는 어그로꾼까지 나오넼ㅋㅋㅋ
ashuie 18-09-13 18:28
   
영상에서 고조선강역을 보고 그냥 껐습니다.
어떤 역사서에도 저딴 콩알만한 고조선은 본적이 없네요.
Korisent 18-09-13 18:38
   
이  August Hayek ㅆㄲㄴ 아주 잘 알려진 일뽕넘이죠. 한국 관련 유풉에서 서슴없이 한국인 차별하며 심하게 욕하는 아주 악독한넘임.
ashuie 18-09-13 18:40
   
dokkiro
난 일본이 아시아 역사에서 두각을 나타낸 게 얼마 되지 않았다고 생각해.
일본은 가야연맹 덕분에 청동기 시대를 훌쩍 뛰어 넘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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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아 일본은 대부분 국가가 가진 수천년에 걸친 청동기 문화가 거의 나타나지않은 특이한 국가야.
그들은 쌀농사도 짓지않고 집성촌에서 살다가 단숨에 가야철기를 받아들이고 수십년만에 봉건사회로 변화하지.
이 가야철기와 메이지유신 두번의 역사점핑으로 오늘의 일본이 있는거야.

예술과 문화 불교를 전해준게 백제라면
철제농기구,벼농사법으로 먹고살만하게 해준게 가야지.
     
국산아몬드 18-09-13 20:25
   
전수한 것이 아니라 주민이 교체되었다고 봐야죠. 아무 댓가 없이 기술을 전수하는게 가능하겠습니까?
미월령 18-09-13 18:44
   
왜놈들 또 난립해서 왜곡 날조 하는 거 봐, 안 빠지는 곳이 없네. ㅋ
성운지암 18-09-13 19:01
   
문득 생각해 봅니다.  일단 국내부터 식민사관을 완전히 몰아내고,  제대로 정립된 역사관을 갖춰야 겠다~  라는

한류가 퍼지고, 우리 문화가 알려지면서  잘못된 식민사관 역사가 퍼지는건 원치 않는 일이니까요.
이후후훗 18-09-13 19:17
   
어떻게 일본이 역사적으로 강대국이었단
헛소문이 돈건지 이해불가네
팬티만 입고 살던 애들이었는데
가입 18-09-13 19:19
   
고려=고리어=코리아

정확히 새겨들어라 쪽발들아
순대해장국 18-09-13 19:30
   
일본이 왜 조공을 안바치냐고 열내던 나라였는데 무슨 일본 사이에서 고분분투야 ㅋㅋ
대륙과의 고분분투면 몰라도 ㅋㅋ
유럽에 어쭙잖은 나라들이 우습게 여기는데 중국과 그나마 투닥투닥 한 나라중에 하나인데
우리 민족에 세종때 유럽으로 순간이동했다면 조공받쳤을 나라들이 말이 많네 ㅋㅋ
중국 옆에서 그나마 우리 언어 문자 유지하면서 수천년 살아난거지 유럽 야만인들이 함부로 무시할 나라는 아닌데
솔직히 18-09-13 19:59
   
동아시아 수천년 역사속에 우리에게
중국은 호구, 일본은 쫄따구

우리가 선진국이 아니었던 20세기가 그냥 특이한 세기였을 뿐이고,
근래의 한류니 뭐니가 특별한 게 아니라, 원래 그래야 할 원상태로 돌아가는 사필귀정일 뿐입니다.
가출한술래 18-09-13 20:02
   
잘 보고 갑니다,,,
하늘나비야 18-09-13 20:25
   
고조선 고구려 발해 백제 신라 고려 조선 대한제국 대한민국 다 한국 역사 인데 뭔 헛소린지 언제 부터 고구려인들이 중국 지나족 조상이 된건지 모르겠네요  좋아 보이면 다 지들거라고 우기더니 결국 조상까지 갈아 탔군요
kuijin 18-09-13 20:38
   
진짜 중국이 찢겨던 시대에는 우리나라가 날라다녔죠. 조만간 중국이 5개 국가로 쪼개지길 바라며 일본은 그만 나대고.
내빠진통 18-09-13 20:42
   
폴라드라....일본넘들이 심어놓은 강대국 사이의 약소국 이미지 진짜 징하네......
강대국 같은 소리하고 자빠졌네....정복할 가치가 없어 걍 내 버려논 도적놈들 소굴인데.....
아리온 18-09-13 22:10
   
빨리 제대로 된 나라정립시키고 주변국들의 왜곡질 단디해야 하는데 . 쩝.
유일구화 18-09-13 22:19
   
외국인이 한국인 보다 한국인이다.
하야덴 18-09-13 22:25
   
지금도 친일파가 득시글거리는데도 우리 나라 문화강대국으로 좋아지는거 보면 정말 대단합니다!!!!
qufaud 18-09-13 22:38
   
일본이 예전부터 강대국이라니 미쳤나
미국이 강대해지면서 그 영향 받고 미국에 완전히 밟힐뻔 하다가 미국에 남북전쟁 터지는 바람에
일본이 그 틈을 타서 일본인은 철저히 서양인이 되자는 모토로
서양껄 베끼고 베끼고 해서 동양에서는 제일먼저 서양문물을 받아들여 가내공업으로 돈 벌기 시작해
원래 이 지역에서 제일 뒤쳐졌던 놈이 시운을 잘타서 벼락부자 되어 돈좀 만지게 되었던 것 뿐이지
중국과 조선이 괜히 왜구라 했던 것 아니다 해적질로 노략질이나 하러 다니는 것들이라 그랬던 거
영국 그것들이 러시아 견제한다고 일본을 적극적으로 밀어주는 짓만 안했어도 十 R
     
꼬마러브 18-09-14 00:08
   
현대적인 관점에서 역사를 바라보는 편향은 우리나 서구나 거기서 거기더군요.

역사는 역사 사실 그대로 보아야 하는데 말이죠.
병아리쓸빠 18-09-13 22:49
   
뭔 ㄱㅅㄹ야? -.-
아다겟돈 18-09-13 23:22
   
우리 역사에 대한 잘못된 정보가 인터넷에 마구잽이로 확대 재생산 되고 있는데 이거 바로 잡을 주체는 과연 어딜 가고 없는가? 동북아 역사재단은 오히려 매국질이나 하고 있다. 위키미디어 역사 지도만 봐도 맨 중국 동북공정 지도가 오염시켜놓고 있다. 외국의 석학이란 자들은 한국에 대한 잘못된 역사 지식을 (총독부 관점) 책으로 쓰고 퓰리쳐 수상하고 있다. 한국에 강단 사학은 아무런 대응도 하고 있지 않고 수수방관하고 있다. 심지어 요하문명에 대한 연구조차 그건 중국거라며 안하고 있는 한심한 매국노 식민사학의 후예들이다. 이 상황은 결국 우리의 미래에 우리의 발목을 잡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 숨막혀오고 있는 것이다.
홀마홀트 18-09-13 23:41
   
최근 일본 역사왜곡보다도 중국놈들 동북공정이 더 위협적이라고 느껴짐
이놈들은 우리의 고대사와 뿌리를 송두리째 뽑으려고 하니 원
고조선 고구려 발해등 우리 민족의 북방 역사를 가져가서 우리의 만주에대한 역사의 정당성을 뺏을려고 하는것에 모자라 이제는 고구려에서 갈라져 나온 백제도 지들꺼라고 한다죠? 결과적으로 우리 민족의 역사가 신라에서 출발했다고
조작하는중 고려도 신라에서 나온나라라고 하는중이고
조선족 있다고 우리민족의 것을 지들꺼라고 우기고 있으니 원
북한과 친해지고 나면 이문제에 대해서 중국에 공동대응해야된다고 봄
가생이쩜컴 18-09-13 23:48
   
우리나라랑 일본과의 관계가 좀 더 널리 밝혀져야
우리나라가 왜 일본이라면 그렇게 치를 떨고 싫어하는지
가위바위보도 쪽바리한테 지면 안된다는 말을 하는지 알게 될텐데..
그리고 왜 독도 문제에 대해서 그렇게까지 열 받아하는지도..
약탈과 침략을 밥 먹듯이 했던 새끼들이
21세기에 들어서도 그 버릇을 못고치니 열이 안받을 리가;;
상심 18-09-13 23:56
   
한국이 해야 할 일
1. 남한 주도의 통일
2. 광개토대왕시절의 옛 고구려 영토 회복
3. 2.+발해시절 영토 추가
4. 미국, 중국, 러시아, 캐나다에 이어 대륙급 영토를 가지고 있는 국가로써 성장
5. 4.의 국가들에 이어 세계의 패권국 도전(우리도 다른 나라에 영향력이란 것 좀 행사해 보자)
섬나라호빗 18-09-14 00:07
   
세계유일 청동기 시대를 거치지 않은 일본
윤달젝스 18-09-14 00:07
   
오 신기하다.
한국 내부에는 식민사관에 찌들어
일본인들의 왜곡된 눈으로 한국역사를 말하는
머리털린 학자들이 많은데 저기 댓글에는 그래도 제대로된
한국역사를 말하는 사람이 있네ㅋ
자기자신 18-09-14 02:06
   
잘 보고갑니다
매력 18-09-14 02:34
   
잘보고 겁니다.
Mrleo 18-09-14 10:09
   
댓글에 제대로된 글들도 많은데~~
BTJIMIN 18-09-14 11:23
   
번역 감사합니다
3142389124 18-09-14 14:15
   
무슨 중국 일본사에껴서 고립됰ㅋㅋㅋ 중국한국과의전쟁에서 거들떠보지도않은게일본인대 오히려 백제시대에 미개한일본을 구제해준게 백제인들인대 ㅋㅋㅋㅋ 고려시대 쿠빌라이칸이 일본정벌하로 여몽연합군결성해서 일본가는대 재수없게 태풍으로쓸려서 못처들어간걸 카미카제로엮으며 지네가대승한것처럼 처 분석하곸ㅋㅋㅋ 그때 태풍없엇음 일본열도는 그냥박살낫음
Sulpen 18-09-14 16:08
   
오... 그래도 댓글만 보더라도 외국인들이 한국 역사에 대한 인식이 정말 많이 개선되었네요
식보이 18-09-14 17:12
   
미친 짱개색히들 고려 고구려가 한국이 아니라고
할말을 잃었다
최순실 18-09-14 17:45
   
욕심많은 똘아이 양옆국가때문에 고생좀함
김진실 18-09-14 20:09
   
2천년간이나 중국속국이었죠.
삼국시대에는 백제 신라가 일본의 속국이기도 했죠.
     
하늘치 18-09-15 16:44
   
역시 사람들 관심이 떨어질 때 쯔음 되니까 정신승리 댓글 다네 ㅋㅋㅋㄹㅋㅋㅋㅋㅋㅋㅋ 백제 신라가 일본의 속국?? ㅋㅋㅋㅋㅋㅋㅋ 철기도 6~7세기까지 자력으로 못만들고 가짜 인물 내세운 소설 인물로 정신승리한게 다인 일본서기가 근거의 전부인 소릴 아직도 하네^^
블랙핑크 18-09-15 00:40
   
옛날부터 도움 안되는 양쪽옆나라ㅎ
ParisSG 18-09-15 18:33
   
항상 느끼는거지만 근대부터 잘나가면 장땡인듯
도로롱 18-09-15 21:01
   
정신병자 환빠 = 니뽕 넷우익 = 중뽕 짱궈
ckseoul777 18-09-16 01:59
   
고려가 한국이 이니란다!!! 븅신같은것들
퍼팩트맨 18-09-16 05:36
   
고려가 한국이 아니면 도대체 그 당시 한국인들은 어디에 있었냐?
갑자기 하늘에서 나타났나?..

고구려 고려를 한국과 연관시키지 싫은 마음은 이해하는데..
어찌 되었던 중국민족 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나라는 분명하다..
명불허전 18-09-18 21:10
   
짱깨들이 고구려랑 고려 역사 날조하는 건 동북공정으로 부칸 먹으려는 속셈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