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건 잘못된 이야기에요. 머리카락 안잘랐습니다. 손발톱 마져도 깍아서 버리지않고 모았다가 무덤에 같이 묻어달라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부모가 준 신체라고 생각했죠.그래서 함부러 자르거나 버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수염은 다듬는 정도였다고 하네요. 아마 저런 탈모가 가려져서 가운데 밀었다는 말도안되는 설이 나돈거겠죠.
사실 일생동안 기른 머리카락[4]의 양은 엄청나서 미관까지 고려한 예쁜 크기의 상투를 트는 것이 힘들다. 실제로 상투를 틀 때는 머리카락을 잘랐다. 아니, 신체발부는 수지부모라며? 구한말 상투 튼 사진을 보면 간혹 삐져나온 뒷머리가 짧은 건 이 때문이다.사극에서 고문받는 장면의 봉두난발 길이를 생각해보자 딱 상투 틀 정도만 남기고 자르는 것. 이렇게 자른 머리는 소중히 남겨두었다가 가발을 만들거나 조상 신위 앞에 바쳤다. 이렇게 하기 전에는 상투가 자체 컸다. 고분벽화를 보면 고대에는 상투 크기가 컸던 경우를 볼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옛 사람들은 상투를 하나만 틀어다고 여기는데, 이러한 편견과 달리 머리숱이 많으면 쌍상투를 틀기도 하였다. 대부분 젊을 때 머리숱이 과하게 풍성하면 쌍상투를 틀었다가 나이가 들어 머리카락이 가늘어지고 숱이 적어지면 일반 상투를 틀었다. 즉, 또한 누구나 배코를 친 것은 아니며, 고려시대에는 오히려 쌍상투가 흔했다.
조선시대에 들어 달걀만한 상투가 미의 기준이었기에 머리를 자르거나 길러서 크기를 조절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마저 덥고 불편하다 여긴 이들은 ‘백호(혹은 '배코')친다’고 하여 정수리부분의 머리를 작게는 동전 크기만큼, 크게는 손바닥의 반 크기 만큼 자르고서 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정수리 부근의 가운뎃 부분에 있는 머리카락을 잘라 통풍이 되도록 하고, 남은 머리를 올려서 상투를 트는 것이다. 그렇지만 대머리와 같이 머리카락을 밀지는 않았는데, 손바닥 반 정도만 조금 밀어 민 부분이 보이지 않도록 하였다. 즉 상투를 풀면 마치 빵꾸난 머리가 되는 것이다. 이는 웹툰 조선왕조실톡에도 실상이 소개되어 있다. 이런 행위는 사사롭게는 행해졌으나[5] 유교 원칙이나 미관 상 전혀 좋게 여겨지지 않았다.단발령 때 반응을 보면.. 애초에 머리를 자르고 상투를 트는데, 여기서 정수리 부분의 머리까지 밀면 상투의 크기가 작아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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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머리카락을 안자를수는 없다.
상투가 너무 커지면 불편하므로
고려시대는 쌍상투도 일반적이었지만
조선시대는 머리를 잘라서 상투의 크기를 조절했으며
배코를 친다는 식으로 정수리를 밀기도 해서, 계란만한 상투 크기를 유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