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활은 사거리와 위력 뿐만 아니라 시위를 당기고 쏘는 속도 마저 엄청 느려서
활을 쏘던 시대가 계속 되었다면 임진왜란 초기에 우리가 그리 털리진 않았겠죠.
포루투갈에서 총이 일본에 전해지고 일본의 강점인 복제능력을 발휘해서 조악한 총이지만 일본은 단기간에 전세계에서 가장 총기를 많이 보유한 국가가 되고 그 총이 조선 침략에 고스란히 쓰였죠.
위엣분들이 설명 잘 해주셧네요.. 진짜로 임진왜란을 조총때문에 밀렸다.. 이런식의 잘못된 상식은 없어졌으면 합니다 그당시 조총은 활보다 사거리 위력 연사속도 어느것하나 나은게 없었습니다 유일하게.. 기병대에게 조총이 소리때문에 말이 놀라서 대열이 흐트러지는 그런 역할??? 그것말곤 없어요 조선이 밀린건 위엣분 말씀대로 쪽수.. 그리고 백병전입니다 그당시 왜 군은 백년가까이 전쟁을 하고 살아남은 최정예 군사 반면 조선은 백년넘도록 제대로된 전투 한번 못치뤄본 무늬만 군대... 오죽했으면 율곡이이가 왜란 직전 조선 군대상태를 보고 십만 양병설을 주장 했을 정도였을까요??
이러니 당연히 전투 기술에서 차이가 날 수 밖에 없고 쪽수도 불리하니 초반에 그리 허무하게 밀린것입니다
이런거 다 무시해고 식민 사관으로 마치 왜가 그때 과학기술이 발전하여 미개한 조선에 조총으로 압도했다.. 는식의 잘못된 역사관은 버려야 합니다
비슷하지만 저는 생각이 좀 다릅니다. 준비만 잘 되어있었다면, 쪽수는 문제가 아니였어요.
처음 동래성이나, 부산성에서 시간을 좀만 더 끌어줬다면 충분히 준비할 시간이 있었어요. 원래 공성보다는 수성이 더 쉬운법인데, 정말 너무 준비가 안되어있었어요. 2-3일사이에 두성이 무너져버리니까, 대비할 사이도 없이 서울로 일사천리로 직진해버린거죠. 만약 동래성 부산성에서 철저히 준비를 했어서 10-20일 끌어줬다면, 조전조정에서도 충분히 준비를 할 시간이 되었다고 보고, 또 조선수군도 후방에서 위협을 가할수 있었다고 봅니다. 쪽수 문제라기보다는 1. 윗님말씀대로 일본은 100년동안 전쟁을 해온 최정예군, 조선은 200년동안 전쟁한번 없었던 농민군 예비군, 즉 경험의 차이였고 2. 조총.. 물론 사거리나 연발에서 활보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일본은 그것을 전술로 극복했었습니다. 조선에서는 그것들을 처음 보니까 처음에 적응을 못했던것이고, 조선군이 거기에 적응을 해갈수록 조총의 위력은 약해졌습니다. 즉. 전체적으로 쪽수보다는 일본군의 경험과 전쟁전술에 조선이 처음에 밀린거고, 거기에 적응을 해가면서 차음 전세를 뒤집을 수 있었다고 봅니다.
군대가 적은 이유가,
그때 시대에 무관이나 병졸들이 제대로 대접 못받으니 하려는 사람이 없었던것도 있고.
물론 무력을 하찮게 여기고,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은 문관들이 군대쪽을 신경썼을리도 없고.
뭔 일 있으면 중국에 기대느라 제대로 된 병책이 남아 있을리도 없고.
한심한거지.
그런데 평화의 시간이 오래되면 될수록, 군대라는 것에 투자가 덜 해지는고 전쟁에 둔감해지는게 사실입니다.
지금 전쟁난지 70년정도만 지났는데도 벌써 군감축한다, 군복무기간 줄인다, 어떻게든 군 안갈려고 하는 사람들 태반인데 당시 200년동안 전쟁한번 없었던 조선에서는 어땠겠습니까. 게다가 전문군인제도 아니고 농민 개병제였던 조선에서 대립제가 횡행한건 당연할수 밖에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백제와 신라가 세웠다고해도 무방할 일본(왜)의 활 역시 북방의 각궁이었음.
다만 일본의 기후적인 풍토상 각궁으로 대표되는 복합궁의 제조가 어렵고,
수입한다한들 그 형태를 유지하기 어려웠음.->아교가 습도에 녹아 조립된 형태가 풀어짐.
각설하고...
일본의 저 후진 활도 나름 지들 땅에서 가장 최적화되어 무기화한 형태임.
문화에는 다 저마다의 사정이 있음.
그렇다고 일본놈들 활 후진게 바뀌진 않음.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