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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5-03-17 01:44
[엽기] 임진왜란떄 일본에 잡혀갔던 조선 장인들의 최후
 글쓴이 : 운마
조회 : 7,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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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나 지금이나 아직까지도~앞으로도


기술직를 무시 하는건 걍 매한가지...ㅎㄷㄷ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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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달라 15-03-17 01:55
   
조선부터 한국은 잘못됐다.
jirall 15-03-17 01:57
   
이런 일뽕들 논리는 언제쯤 사라질까?
개떡 15-03-17 01:57
   
이런건 동아게에
RealGTA 15-03-17 02:05
   
일뽕인걸 떠나, 정말 있던 일이라고 합니다 ㅋㅋ
당시 일본은 조선의 기술을 무척 경외시 했거든요.
납치라고는 하지만, 애지중지 모셔간거나 다름 없죠.
아롱사태 15-03-17 02:22
   
조선으로 돌아 가려해
못가게 하려고 준거지
일본이 좋와서  눌러 산게 아닌데
버킹검 15-03-17 02:27
   
이게 진실이려면 돈이고 땅이고 나발이고 다 필요없다 부모님과 마누라 자식들 때문에 조선으로 돌아가겟다...
라고 했을 때 조선으로 돌려보낸 장인들이 있느냐가 이 글의 실체적 진실을 알려주겠죠??
실제로 땅을 줬을수도있고 대접이 더 좋았을수도 있지만...그래서 강제가 아니라는 증거는 아니겠죠...^^;;
똘똘2 15-03-17 02:31
   
어차피 조선에 있었으면 밥그릇이나 만들다 끝났을텐데 저 사람들한텐 잘 된거임.
도공들이 전부 일본에 끌려간 갓도 아닌데 동시대에 조선에서 이름을 남긴 도공이 전무한 것은
이 나라가 도공이 성공할 여건이 안되는 나라였다는 얘기임.
노예신분(이었지만 영주 직속이라 대우가 좋았다고 함)으로 시작됐지만 잘 돼서 지역유지가 된 사람도 있고
심지어 도자기의 신으로 떠받들어지는 사람도 있음.
애국보수 성님들 중엔 조선을 버리고 일본에 붙은 매국노!!! 라면서 부들부들 떠는 사람들도 있는데
조선에 해를 끼친것도 아니고 자기 능력으로 그냥 잘 되었을 뿐임.

실제로 전후 조선통신사가 재개되어서 방일한 통신사 일행이 포로송환을 위해 수소문 했는데
고국에서 온 통신사라 해서
'만나고자 하는 사람들은 많았으나 돌아가고자 하는 이는 극히 적었다'
라고 기록이 남아있음. <--- 우리측 기록임
돼지콜레라 15-03-17 03:29
   
16세기 조선과 일본의 도자기 기술은 상당한 격차가 있었는데 조선에서는 평범한 도공이었던 사람도 일본에서는 첨단 기술을 가진 도공이 되는거니까 대우가 다를수 밖에요.
조선의 막사발이 일본으로 건너가면 이도다완이라는 최고의 명품으로 취급되던 것도 일본이 조선 도공을 특별히 대우했던 이유죠.
기능공을 경시하던 조선의 폐습으로 볼게 아니라 낙후된 기술력을 가진 일본이 조선의 선진 기술 도입을 노린 일종의 투자였다고 봐야죠.
jirall 15-03-17 04:08
   
위에 자꾸 헛소리하시는데. 실제 일본에 끌려간 대다수는 평생 노비로 살다 죽습니다.  일뽕들 레파토리가 조선에 자발적으로 돌아오지 않은 도공 운운하는 건데 애초에 인신이 구속된 노비들인데 무슨 돌아오고 말고입니까?일뽕들 보면 동사록이나 부상록 등에서 소수의 글귀만 끌어내 일본이 살기 좋았다는 망상을 하는데 그런 짓은 이제 그만. 영주직속 노비라 살기 좋았다는 헛소리도 우습고.  한국측 학계에서는 대략 10여만명 일본측에서는 대략 2~3만명으로 추산하는데 1607년  회답겸쇄환사란 명목으로 사절들이 건너가 이후 총 3차례 송환을 시키는데 대략 1400여명쯤 되는 것 같은데 끌려간 자들에 비해 보수적으로 잡아도 소수입니다.

 일본에 끌려간 조선인들의 삶은 크게 보면 1. 인신이 완전 구속된 노비 2. 주인의 눈에 들어 첩이 된 여성들 3. 소수의 기술자와 학자들 4. 어린나이에 끌려가 조선말을 전혀 모르는 자들 로 나뉘고  대부분 쇄환사가 왔어도 이미 인신이 구속되어 자발적으로 올 수 없는 경우,  조선사절의 에도왕복로와 거리가 너무 멀어 올 수 없었던 자들이 대부분.
게다가 최초의 쇄환사가 왜란후 10년 뒤이고 이후 10여년 단위로 쇄환을 하지만 그때쯤이면 이미 끌려간지 10~40년씩 지난 자들이니 시간이 지날수록 이런저런 이유로 조선으로 올 수 없는 경우는 늘어날 수밖에 없음.

물론 조선조정이 송환에만 초점을 맞추고 그 이후 그들의 삶을 신경쓰지 않았다는 것은 안타까운 사실이나 이건 한국이 북송포로들 낙인찍고 살길 열어주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 그러니 이런 사실로 말미암아 일본이 더 살기 좋았다는 식으로 일뽕들 물타기로 흐르는 것은 웃긴 것임

주목해볼만한 것은 일본에 끌려간 대부분은 당연히 노비로 살았고 또 많은 수가 기독교에 귀의하는데 성리학적 가치관과 전혀 생소한 종교에 귀의할만큼 그들의 삶이 좋지 않았다는 말이기도 하고 그들이 당시 일본사회에 쉽게 녹아들 수 없었다는 당연한 말. 일뽕들의 환상과는 전혀 다르게.
두번째 주목할 것은 끌려간 자들중 도공이나 학자등 자신의 세대에서 어느정도 일본에 성공적으로 정착한 소수들조차 그들의 정체성과 생활, 습성, 그리고 그들의 후손의 정체성은 조선인으로 유지하며 살았으며 조명채의 <봉사일본시문견록>에는  왜란 후150년이 지난 후에도 스스로 일본인과 다르게 머리털과 수염을 깍지 않고 조선인 후예임을 자랑스럽게 외모부터 나타내고 다니는 자들이 나옴 . 이것은 당시 조선과 일본의 위상을 보여주는 것. 이런 위상 변화는 메이지 시기 조선인 후예들이 스스로 조선인 후예임을 숨기기 시작하는 것을 보면 역전되었다고 보임. 반대로 말하자면 한국에서 일본에 대한 과장된 역사 이미지 대부분이 메이지 시기 일본의 국뽕이 높은 수준으로 올라오면서 일제 이후 한국인과 그 후예들. 일뽕들에게 전염된 것임.
     
똘똘2 15-03-17 04:22
   
애국보수성님 풀발기해서 도공 얘기하는데 일반 포로들의 일로 물타기 하시네...
'도공' 얘기 하고 있는 중임. 발기는 다른 데 가서 하셈.
          
솔로윙픽시 15-03-17 05:31
   
아니 이게 누구야? 연예인 보고 얼굴은 동남아에 몸은 서양녀라고 한 그 고학자 아니신가? 퉤엣.
     
똘똘2 15-03-17 04:25
   
그리고 영주직속노예 라고 하니까 진짜 노예인줄 알고 계시나본데 좋은 기술이 있으니 인신이 구속되어져있지만 그냥 자유민임. 그리고 16세기 말 그러니까 임난전후로 일본에서 노예제는 금지되서 사라졌음. 무슨 조선 포로들이 노비로 평생 살다 죽어 빤타지 소설 쓰고 계시네
          
jirall 15-03-17 05:04
   
내가 애국보수면 님은 일뽕좌빨임?
단어 선택 하는 거 보면 역사를 인터넷 일뽕 블로그로 배운 거 같은데 나중에 이불킥이나 실컷 하길 ㅋㅋㅋ 지역유지 ㅋㅋㅋ16세기 후 노예제 사라져 ㅋㅋㅋ 자유민 ㅋㅋㅋ이름 남긴 도공이 없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솔직히 저런 단어 몇개만 해도 각각 커다란 주제임. 무식해서 현대식 조어를 그대로 역사에 투영하고 있지만 ㅋㅋㅋㅋ 내가 판타지 소설은 못 써도 님은 딱 보니 양판소는 제대로 쓸 듯. ㅋㅋㅋㅋㅋㅋ
               
너끈하다 15-03-18 03:22
   
애국보수는 좋은겁니다. 자칭보수 상대방 좌빨딱지 붙이기가 나쁜거죠 .
     
자기자신 15-03-18 02:44
   
아 그리고 KBS역사저널 그날에도 일본놈들이 조선인들을 서양에다가 노예로 팔아버리기도 하죠 돈까지 받고선 그리고 서산대사인가 사명대사하는 스님이 조선인포로3.000명을 데리고 조선으로 데리고왔다고합니다
초콜릿건빵 15-03-17 04:36
   
조선도공들이 왜나라에 끌려가면서 울고 끌려가서도 울었다지요.
끌려가면서 울었던 거는 부모형제를 두고 고향을 떠나 왜나라로 끌려가는 아품에 울었고
왜나라에서 울었던 거는 자기가 고향을 떠나오면서 울었던 걸 후회하면서 울었다지요.
     
한큐님 15-03-17 09:18
   
지하에서 통곡하며 울겠지요. 자신들의 이야기가 왜곡된걸 보면서 말이죠..
크라바트 15-03-17 07:12
   
저 때는 뭐 사농공상의 유교 때문에 그랬다치고, 지금은 왜 기술직을 무시하는 거임? 유교도 없는데..
그리고, 그렇게 기술직을 천시했는데, 어떻게 저렇게 대우받았던 곳보다 기술이 뛰어날 수 있었던 거임?

혹시 이런 쪽으론 생각해봤는지 모르겠는데, 지금처럼 돈이 최고인 사람들 생각으론 대우만 잘해주면 나라 바꾸는 게 일도 안닌 것처럼 느껴질 지는 몰라도 저 때 조상들은 그렇게 나라를 생각하는 개념이 님들처럼 가볍지가 않았다는 것 정도는 좀 생각하고 말해주길 바람.

만약 조선시대에 지금 사람들이 다수였다면 의병 따윈 안 일어났을 거임..
의병은 고사하고 다 국적 바꾸고 나라 탈출하기 바빴겠지..
카티아 15-03-17 07:26
   
잘못된 식민 사관이 이렇게 큰 폐해를 낳습니다..
조선시대 사기장(도공이란 말은 일본말)은 꽤 좋은 대우를 받았습니다. 관청에서도 함부로 대할 수 없고, 생활도 제법 괜찮았어요..
 도자기 자체가 조선에서도 엄청난 고가의 물품이고 귀한거라서, 도자기를 만든다는 자체가 국가에서 관리할 수 밖에 없는 것..
 그리고 일본에서 대우를 잘 받았다는 건 거짓입니다. 일본에선 사기장들이 거의 개인 노예와 같았어요.. 열등감과 발달된 조선문화를 갖고 싶은 영주들의 개인소유와 마찬가지였습니다. 매일 죽지 않기 위해 도자기를 만들고, 강제로 일본인과 혼인시켜서 아예 조선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만들었는데 무슨...
 우리나라가 배우는 현재의 역사 대부분이 일제시대때 정리된것들이라 상당부분 식민사관에 의해서 기록된 글입니다.

 역사 바로세우기를 하는 이유도, 이런 일제의 만행으로 잃어버린 올바른 역사관을 세우기 위함이기도 합니다.
넷즌 15-03-17 09:00
   
현실의 기술직 차별대우는

현직의 대통령 이하 주요 관직들에, 기술직 출신이 전멸이라는 겁니다.
웬 그지새끼들 같은
검사, 판사 출신이 그렇게 많은지... 결국, 이런 나라는 "명분"만 찾는 쓰레기 국가가 되는 겁니다.

최소한 기술직이 국가 중요관직의 50% 이상을 차지해야, 그나라가 발전을 제대로 합니다.
황금의사자 15-03-17 11:47
   
당시 도공들은 스카웃 된게 아니라 인신매매, 즉 납치된 겁니다..

당시 끌려간 젊은 도공의 노모는 아들생각에, 편히 눈 감을순 있었겠습니까??
날이 추우면 어디서 떨고 있지 않을까, 밥은 제때 잘 먹고 살까..

좀 생각들을 하시고 댓글 다시길..
coooolgu 15-03-17 12:34
   
아 좀 알아보고 글을 쓰던가 노예같은소리하네 진짜.

실제로 히데요시가 죽고 도쿠가와 이에야쓰가 정권잡았을때
조선과 국교를 회복하려고 조선통신사를 다시 재개 시키면서
강제로 끌려온 조선 도공들 어느정도 돌려보내려 했던건 역사적 사실임.
그리고 조선으로 돌아가지 않고 남은 도공들에게는 상당한 대우를 했고

그 조선 도공들의 피가 섞이지 않도록 도공들 마을을 따로 만들어서
허가없는 일본인은 조선인 마을에 접근조차하지 못하도록 했음.

아니 조금이라도 알아보고 쓰던가 노예?? 주인의 맘에들면 조선여자를 자기 침실로 끌여들여??
이게 무슨 개소리야.

도공들에게는 어느정도의 계급과 그에 걸맞는 평균이상의 생활을 보장했고 일본인의 접근을 차단하여 차별을 미연에 방지하는등의 노력은 했지만 단! 그들에게 자유가 없었던건 사실임. 도공의 자식으로 태어나면 자식도 도공일을 강제했음. 일본인이 접근을 못하게 했지만 조선인도 지역 밖으로 나가는건 금지했음.
     
굿잡스 15-03-17 13:03
   
그리고 조선으로 돌아가지 않고 남은 도공들에게는 상당한 대우를 했고

그 조선 도공들의 피가 섞이지 않도록 도공들 마을을 따로 만들어서
허가없는 일본인은 조선인 마을에 접근조차하지 못하도록 했음.
>>?? ㅋㅋ

이게 좋게 말한거지 뭰 잽인들도 조선마을에 접근 못하게 했다는 말은 함부로 조선인도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거주 이전의 자유를 구속했다는 말 아님? 그리고 왜인들 입장에서

도자기는 당시 최첨단 하이테크 제품인데 돌려 보낸다고 이런 고급 기술자를 제대로 돌려

보냈겠음요? 이건 뭔 아 다르고 어 다르게 왜국입장에서 미화하군. 쯧.
          
coooolgu 15-03-17 13:12
   
후...인터넷에서 줏어들은 정보만으로 난 많이 안다 라고 헛소리 하지마시고
부탁이니 나가셔서 책좀 읽으세요.

도자기 관련서적 좀 읽으면 자주 나오는 이야기니깐
               
굿잡스 15-03-17 13:14
   
후...인터넷에서 줏어들은 정보만으로 난 많이 안다 라고 헛소리 하지마시고
부탁이니 나가셔서 책좀 읽으세요. >??? ㅋㅋ 어이없는.

coooolgu >본인 말하시남요?ㅋ

어디서 어줍잖게 주워 들어서리. 본인 글에서 아를 어로 뒤집어

잽 빨면 그게 역사적 실상이고 지식임?? 기초도 없이 뭔 헛소리나 남발하시남요?
coooolgu 15-03-17 12:41
   
미야마에서 태어난 도고는 4살 때까지 박무덕(朴茂德)이라는 한국이름으로 불렸다. 메이지 유신 이후 조선도공 보호정책이 폐지된 뒤 그의 아버지가 도고라는 성을 사서 이름까지 일본인이 되었다.

그의 조상은 정유재란 남원전투 때 사쓰마(薩摩) 영주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군에 포로가 되어 끌려간 80명 도공의 지도자 박평의(朴平意)였다. 시마즈는 도공 마을을 일본인 사회에서 격리시키고, 일본인과의 결혼마저 금했다. 조선 도자기의 명맥을 이어가기 위한 순혈주의 정책이었는데, 그것이 세계적인 도자기 브랜드 '사쓰마 야키(燒)'의 오늘을 만든 원동력이다. 시게노리도, 14대 심수관도, 100% 한국인 피를 이어받은 내력이기도 하다.
.....
강제로 일본인과 혼인을 시키다니 이게 무슨 역사왜곡이오?
굿잡스 15-03-17 13:06
   
조선에서 사기장들을 천시했다?? ㅋㅋㅋ 어이없는.

이런 잽극우들 논리를 아직도 신봉하고 정설마냥 알고 있는 사람이 있다니 참으로 개탄스러운.

조선시대 사옹원(司饔院)이 뭐하던 국가 중요 직속 관청이고 그기서 일하던 사기장이고 좀 제대로 공부부

터 하고 어쩌고 하길.

이건 뭔 예전 인조이 재팬에서 잽극우들 쳐하든 논리가 아직도 무분별하게 찌라시마냥 떠도는

참..
굿잡스 15-03-17 13:12
   
조선는 예의 나라였고 제례는 국가의 중요 행사이기에 이관련 음식을 담는 그릇이고 왕실의 생활에서도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 졌기에 이런 사옹방(司饔房)이 1467년(세조 13)에 사옹원으로 조선 초기

이미 경국대전에서 그 조직 체계와 위상이 명시되어 중요하게 다루어졌었음. 그기에 후기로 가면

그 분원만 400여명에 이를 정도였고 일찍히 분업화에 우리 도자기에만 나타나는 독특한 달항아리나 철화같

은 백자들이 이런 국가 공인 사옹원에서 발전,탄생, 제작되어졌던 것이고.
굿잡스 15-03-17 14:07
   
참고로 유럽에서 나온 부르조아 (Bourgeois)라는 말이 중세시절에는 도시가 성곽을 중심으로 둘러싸여

보호되고 있어 프랑스어의 부르(Bourg)라는 말도 성안에 있는 사람으로 이런 부유한 상공인들을 부르면서

나온 말임. 조선시대에 우리가 말하는 중인 집단 즉 이런 상인 및 수공업 장인 기술자들이 다름 아닌

유럽으로 치면 부르조아 계층입니다. 조선에 앞선 고려시대에는 거대한 4경 도시 체재로 수도인 개경과

고구려의 거대 평양성을 다시 복원한 서경 그리고 전통적 100만의 대도시인 신라의 서라벌을 동경으로 전쟁

없이 흡수하고 남경(서울)을 중심으로 중소도시를 거닌 도시위용을 보임. 이런 개경의 인구는 전성기

5,60만에 육박할 정도로 당시 유럽의 최대 도시라는 로마나 콘스탄티노플보다 훨 큰 도시 규모를 보이는데

개경의 특징이 농사를 짓기에는 불리해서 일찍히 상업대도시로 발전한 곳입니다. 그러다 조선이 건국되고

개경 토착 호족세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기존 남경을 정치적 수도인 한양으로 발전시키면서 조선전기 태종

이 한양에 2027칸의 거대한 시전행랑을 구축하면서 개성일대의 상업이 위축되는 듯 하다

불과 몇년 안되어 태종 1409년 개성 유후의 건의를 받아들여 개성은 한양과 더불어 상계의 두톱 체재로 지

속적인 상업대도시로 구가를 하게 됩니다. 특히나 이 개경일대의 귀족들이 정계의 입문이 제한을 받으면서

고급 인재들이 상계로 진출하다보니 질은 더욱 높아졌고 거상들이 대거 등장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들

은 전국적 유통망과 행상을 조직하고 신용장거래와 은행업등을 겸하면서 어음의 표권들도 유통시키고 있었

고 나아가 명과 왜등에도 공사,밀무역까지 대외무역을 주도하게 되군요.




개성의] 여염집은 만 정(井)이나 되고 곡물은 백 전(廛)이 된다.

(중략) 봄바람에 술집 깃발이 펄럭이고 달 밝은 밤에 피리 소리 들린다.

민물(民物)은 풍성하여 실로 다른 고을에 비길 것이 아니고, 풍기(風氣)도 밀집하여 서경

(西京, 평양)이 견줄 바가 아니다.

-명나라의 문헌, 조선부(朝鮮賦, 1490년)-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 김양경(金良璥) 이 와서 아뢰기를,

“이제 풍덕군(豊德郡) 백성들의 상언(上言)으로 인하여 본부(本府, 개성)의 백성으

로 하여금 서적전(西籍田) 농부(農夫)에 속하게 하였는 바, 신이 보건대 본부(개성)

의 백성은 땅을 가진 자가 적고 비록 간혹 두어 경(頃)의 땅을 가진 자가 있다 하

더라도 항상 성(城) 안에 있으면서 사람을 고용(雇用)하여 농사짓고 오로지 장사

만 일삼는데, 만약 적전(籍田)에 속하게 하면 신은 〈백성들이〉 그 역(役)을

감당하지 못하여 장차 떠나가는 데에 이를 듯합니다.
 
-조선왕조실록 성종 9년(1478년)-


그리고 윗기록에서도 확인되듯 당시 조선시대 개성의 도시 전경도 그렇지만

성내의 사람들의 대다수가 상공업에 종사할 정도로 개성시 자체가 당시 조선시대의

시선에서도 사대부고 백성이고 주직업이 상공업 종사자에  상업 대도시로

번성했던 상황을 알 수 있는 기록입니다.(이들이 유럽으로 치면 이른바 부르조아들인

것이죠.) 이들은 거의 농사도 짓지 않고 이런 농사나 혹은 군역까지도 상공업 활동을

통해 쌓은 부를 가지고 대체하는 식으로 상공업에만 매진한 사람들이고 종사자들입니다.

우리가 보통 후기 개성의 송상이니 전국적 상업망에 주목하지만 최근에는 이런

조선 전기의 개성의 상업도시의 면모에 대한 여러 연구 논문들이 나오면서 인식이 더

욱 소급, 확장되는 상황이군요.


고려시대 인구추정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795387&cid=46634&categoryId=46634
굿잡스 15-03-17 14:20
   
일반사람들이 무슨 막연하게 조선은 상공업을 천시하고 어쩌고 이런 식으로 접근하는데 실제

이들은 정치적 비호를 받으면서 상당한 입지와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했던 집단입니다. 고려말 조선초로

오면서 홍건적 및 왜구의 침입등 각종 전란으로 식량 생산의 기반이 약화되자 중농주의 정책을

펼쳤지만 그렇다고 조선의 상공인들의 대우가 막연하게 천시되거나 비루한 그런 사회가 전혀 아니였음.

위에도 언급했듯 도리어 귀족 계층들이 개경이나 평양일대에는 상계에 초기부터 활발히 진출했고

도성내에 고위 관료들이 사는 북촌이라는 지역도 있었지만 이런 상공업 종사나 직업의

중인들이 더 상당수 남촌이고 도성내에서 살았습니다. 도리어 조선은 향촌 자치형태라서 안동하회마을처럼

사대부들은 시골에서 집성촌을 이루고 향촌에서 후학을 키우고 미풍양속을 배양하는 삶을 더 부러워

했던 시기라 지방 읍성이나 수도 조차도 도성안에는 일반 사대부보다는 이런 중인등 일반 백성의

비율이 훨씬 높던게 조선의 사회 도시 풍경이였음.

특히나 이런 조선의 상공인들의 대우나 영향력이 높았던 이유는 이들에게 조선 조정에서도 혜택을

줌과 동시에 외국 특히 명사신등을 대접하는 비용부터 제반 사항을 수도와 개경을 중심으로 충당했기

때문에 이들의 입지나 영향력은 역사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거나 막연히 알던 사항과는 전혀 달랐다는

말입니다. 후기로 갈수록 대동법이 본격화 되면서 이런 상공인들의 입지나 활동력은 더욱 활발해졌던

시기이고. 고려에서 조선으로 청자나 백자같은 고급 기술력이 무슨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으로 본다면

그야말로 다시금 우리 국사를 제대로 공부해야.
coooolgu 15-03-17 15:00
   
http://www.kmac.co.kr/knowledge/read.asp?board_kind=1&pk=298
http://www.re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60299
아니 정작 후손들의 전해주는 이야기를 부정하는건 도데체 뭔지..

조선시대 모든 도공들이 대접을 받았다? 물론 대접받겠지요...초일류 기술자나 도공들을 관리하는 관리들만
마치 기술직 현장직일하는 사람을 관리하는 관리직만 대우받듯이.

마치 우리나라 현재의 게임산업같이 정작 개발자들은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는데
게임산업이 우리나라를 먹여살린다 게임산업이 미래다 게임회사가 돈을 번다따위의 개소리처럼.

정부에서 게임산업에 수백 수천억을 지원하지만 받는개발자는 없듯이.
     
굿잡스 15-03-17 15:14
   
아니 정작 후손들의 전해주는 이야기를 부정하는건 도데체 뭔지.. >?? ㅋ

왜에 없던 최첨단 고급기술의 도자기 장인들 강제로 쳐끌고 가서리 이동거주 제한 시키고

열심히 뼈빠지게 일시켜 왜국에서는 꿈도 못꾸던 이삼평의 아리타도기가 탄생되면서

부르던게 황금값으로 유럽과 교류하면서 막대한 부를 가져왔는데.

그전에 제대로된 교역 물품도 없어서리  전국시대에 자국 왜인 여성 50만명을 대대적 인신

매매 수출로 쳐팔아서 조총 수입에 혈안이 된 나라에서 그정도도 못해주면 어쩌라고라?


그리고 당신 논리면 잽의 그나마 현재 부심질 하는 애니산업의 잽종사자들의 열악한

환경이나 알고 떠드시남요?(딱보니 지금도 저 정도인데 당시야)


'쿨재팬'때문에 일본의 젊은이들이 죽어나간다
 
일본 애니메이션을 쭉 동경해 오던 한 미국인이 일본에서 애니메이터로 일하는
꿈을 이뤘지만, 지나치게 열악한 일본의 근무환경에 경악해 미국언론에 그 현실
을 고발하다.

"분명히 말하고 싶은것은 일본의 애니메이션 산업은 단순히 어려운 것이 아니라
 불법 노동환경 그 자체 입니다. 일본에서 일반 애니메이터들은 최저 임금도 채
 지급받지 못하고 현장에서 구토하고 쓰러져 병원으로 이송될 정도로 중노동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마감이 늦어지는 경우에는 무려 50일동안 단 하루도 쉬지
 않고 일한적도 있습니다. 평균적으로 주 6.5일을 근무합니다."

"제가 뉴욕에서 애니메이터로 일했을때는 비싼 임대료도 충분히 지불했고, 물건
 을 사거나 인생을 즐기는 여유도 있었습니다"

"제가 일했던 일본 애니메이션 회사 피에로의 월급은 12만엔이었고, 심지어 더
 심한 곳은 4만엔이 채 안되는 곳도 있었습니다"

http://www.cartoonbrew.com/artist-rights/japans-animation-industry-isnt-just-tough-its-illegally-harsh-110074.html

일본정부는 애니메이션 사업이야말로 '쿨재팬'의 핵심이자 견인차라고 말합니다.
애니메이션 관련 해외 이벤트에서 언제나 '일본 만세'를 외칩니다.

애니메이션 관련 펀드 국책 주식회사를 만들고, 의미불명의 애니메이션 육성 법인
기구를 만들어서 낙하산 정치인을 자리에 앉힙니다. 하지만 정작 일본에서 실제로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노동자들에 대한 처우개선은 수십년간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실제로 일본의 애니메이션 현장에서 노동자들이 죽어나가도 일본정부는
오로지 해외에 얼마나 애니메이션을 판매하고, 그것이 일본 PR로 연결될수 있는지
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놈의 '쿨재팬' 타령만 하며 해외 PR에만 힘쓰기 위해 일본의 젊은이들을 노예로
일회용으로 소비하고 있는것이 현재 일본 애니메이션계의 현실입니다.

https://twitter.com/IchigoIchieFilm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commu07&wr_id=469610&sca=&sfl=mb_id%2C1&stx=peraharve
     
굿잡스 15-03-17 15:31
   
그리고 에도시대의 일반 왜인백성들의 대다수 실상이 어떠했는줄은 아심?

일본재이사(日本災異史)에 따르면 수도의 노른자위에 해당했던 에도성과 ‘조카마치’(城

下町)로 불리는 에도성 주변에는 봉건영주와 사무라이 및 그 가족들만 거주. 무

려 6할에 해당하는 에도의 광활한 지역이 이들 몫.이와 함께 나머지 4할 가운데 절반은 다

시 절과 신사가 차지. 결국 나머지 2할 땅에 60만명 이상이 몰려 살았음.

이게 당시 에도뿐 아니라 대표적 대도시라는 오사카, 쿄토고 다르지 않고. 여기에 1865년까

지 발생한 열도의 대형 화재만 무려 1463건에 달할 정도. 이런 대형화재가 왜 빈번했느냐?

지진이 이유지만 이런 전형적 백성들은 생각하지 않는 왜국의 전근대적 정치상에서

수십만명이 밀집 닭장에 허술한 판자가옥에 붙어 지내다보니 한번 화재가 나면 대형화재에

수십만이 매일 쏟아내는 각종 똥,오줌으로 인한 전염병 만연이고.

조선처럼 도리어 일반 백성 상당수가 읍성이나 도성내에 거주하고 시골에까지 반듯한

기와집을 보거나 교육혜택등은 상상도 못했던게 당시 왜의 일반 백성의 낙후된 후진적 사회,생활상이였음.



대화재와 전염병으로 신음하던 에도의 백성(닭장주거)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82613&sca=&sfl=mb_id%2C1&stx=eogkseo&page=2
          
진한참기를 15-03-17 18:45
   
과연 일본글에 안 보이면 섭섭한ㅋㅋㅋㅋ

근데 오늘은 글이좀 짦은거 같아요
후쿠시마 이야기도하고
왜국이 백제한테 조공바친이야기도 하고 그래야죠~ㅋㅋㅋㅋ
               
굿잡스 15-03-17 20:03
   
?? 진한>이건 뭔 이정도면 스토커에 나좀봐달라는 관심종자인가? ㅋ 주제고 별아는 건 없고 시답지도 안는 영양가 없는 댓글짓이나 내내 쳐할려면 본인 일기장에나 끌쩍이고 놀든지(노는 수준이 애처롭구만.)

할일이 그리 없으면 발이나 닦고 일찍 잠이나 주무심.
호주청정우 15-03-17 20:48
   
역시 일본글만 올라오면 풀이렉션을 하시는 님이 있네요
     
굿잡스 15-03-17 20:59
   
그런가봄.ㅋ 왜그로들의 찌라시형 왜곡역사는 진실마냥 통쾌하게 느끼고

정작 사료나 연구내용을 보여주면 불편한 속내로 물타기에 부들 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