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진실이려면 돈이고 땅이고 나발이고 다 필요없다 부모님과 마누라 자식들 때문에 조선으로 돌아가겟다...
라고 했을 때 조선으로 돌려보낸 장인들이 있느냐가 이 글의 실체적 진실을 알려주겠죠??
실제로 땅을 줬을수도있고 대접이 더 좋았을수도 있지만...그래서 강제가 아니라는 증거는 아니겠죠...^^;;
어차피 조선에 있었으면 밥그릇이나 만들다 끝났을텐데 저 사람들한텐 잘 된거임.
도공들이 전부 일본에 끌려간 갓도 아닌데 동시대에 조선에서 이름을 남긴 도공이 전무한 것은
이 나라가 도공이 성공할 여건이 안되는 나라였다는 얘기임.
노예신분(이었지만 영주 직속이라 대우가 좋았다고 함)으로 시작됐지만 잘 돼서 지역유지가 된 사람도 있고
심지어 도자기의 신으로 떠받들어지는 사람도 있음.
애국보수 성님들 중엔 조선을 버리고 일본에 붙은 매국노!!! 라면서 부들부들 떠는 사람들도 있는데
조선에 해를 끼친것도 아니고 자기 능력으로 그냥 잘 되었을 뿐임.
실제로 전후 조선통신사가 재개되어서 방일한 통신사 일행이 포로송환을 위해 수소문 했는데
고국에서 온 통신사라 해서
'만나고자 하는 사람들은 많았으나 돌아가고자 하는 이는 극히 적었다'
라고 기록이 남아있음. <--- 우리측 기록임
16세기 조선과 일본의 도자기 기술은 상당한 격차가 있었는데 조선에서는 평범한 도공이었던 사람도 일본에서는 첨단 기술을 가진 도공이 되는거니까 대우가 다를수 밖에요.
조선의 막사발이 일본으로 건너가면 이도다완이라는 최고의 명품으로 취급되던 것도 일본이 조선 도공을 특별히 대우했던 이유죠.
기능공을 경시하던 조선의 폐습으로 볼게 아니라 낙후된 기술력을 가진 일본이 조선의 선진 기술 도입을 노린 일종의 투자였다고 봐야죠.
위에 자꾸 헛소리하시는데. 실제 일본에 끌려간 대다수는 평생 노비로 살다 죽습니다. 일뽕들 레파토리가 조선에 자발적으로 돌아오지 않은 도공 운운하는 건데 애초에 인신이 구속된 노비들인데 무슨 돌아오고 말고입니까?일뽕들 보면 동사록이나 부상록 등에서 소수의 글귀만 끌어내 일본이 살기 좋았다는 망상을 하는데 그런 짓은 이제 그만. 영주직속 노비라 살기 좋았다는 헛소리도 우습고. 한국측 학계에서는 대략 10여만명 일본측에서는 대략 2~3만명으로 추산하는데 1607년 회답겸쇄환사란 명목으로 사절들이 건너가 이후 총 3차례 송환을 시키는데 대략 1400여명쯤 되는 것 같은데 끌려간 자들에 비해 보수적으로 잡아도 소수입니다.
일본에 끌려간 조선인들의 삶은 크게 보면 1. 인신이 완전 구속된 노비 2. 주인의 눈에 들어 첩이 된 여성들 3. 소수의 기술자와 학자들 4. 어린나이에 끌려가 조선말을 전혀 모르는 자들 로 나뉘고 대부분 쇄환사가 왔어도 이미 인신이 구속되어 자발적으로 올 수 없는 경우, 조선사절의 에도왕복로와 거리가 너무 멀어 올 수 없었던 자들이 대부분.
게다가 최초의 쇄환사가 왜란후 10년 뒤이고 이후 10여년 단위로 쇄환을 하지만 그때쯤이면 이미 끌려간지 10~40년씩 지난 자들이니 시간이 지날수록 이런저런 이유로 조선으로 올 수 없는 경우는 늘어날 수밖에 없음.
물론 조선조정이 송환에만 초점을 맞추고 그 이후 그들의 삶을 신경쓰지 않았다는 것은 안타까운 사실이나 이건 한국이 북송포로들 낙인찍고 살길 열어주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 그러니 이런 사실로 말미암아 일본이 더 살기 좋았다는 식으로 일뽕들 물타기로 흐르는 것은 웃긴 것임
주목해볼만한 것은 일본에 끌려간 대부분은 당연히 노비로 살았고 또 많은 수가 기독교에 귀의하는데 성리학적 가치관과 전혀 생소한 종교에 귀의할만큼 그들의 삶이 좋지 않았다는 말이기도 하고 그들이 당시 일본사회에 쉽게 녹아들 수 없었다는 당연한 말. 일뽕들의 환상과는 전혀 다르게.
두번째 주목할 것은 끌려간 자들중 도공이나 학자등 자신의 세대에서 어느정도 일본에 성공적으로 정착한 소수들조차 그들의 정체성과 생활, 습성, 그리고 그들의 후손의 정체성은 조선인으로 유지하며 살았으며 조명채의 <봉사일본시문견록>에는 왜란 후150년이 지난 후에도 스스로 일본인과 다르게 머리털과 수염을 깍지 않고 조선인 후예임을 자랑스럽게 외모부터 나타내고 다니는 자들이 나옴 . 이것은 당시 조선과 일본의 위상을 보여주는 것. 이런 위상 변화는 메이지 시기 조선인 후예들이 스스로 조선인 후예임을 숨기기 시작하는 것을 보면 역전되었다고 보임. 반대로 말하자면 한국에서 일본에 대한 과장된 역사 이미지 대부분이 메이지 시기 일본의 국뽕이 높은 수준으로 올라오면서 일제 이후 한국인과 그 후예들. 일뽕들에게 전염된 것임.
내가 애국보수면 님은 일뽕좌빨임?
단어 선택 하는 거 보면 역사를 인터넷 일뽕 블로그로 배운 거 같은데 나중에 이불킥이나 실컷 하길 ㅋㅋㅋ 지역유지 ㅋㅋㅋ16세기 후 노예제 사라져 ㅋㅋㅋ 자유민 ㅋㅋㅋ이름 남긴 도공이 없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솔직히 저런 단어 몇개만 해도 각각 커다란 주제임. 무식해서 현대식 조어를 그대로 역사에 투영하고 있지만 ㅋㅋㅋㅋ 내가 판타지 소설은 못 써도 님은 딱 보니 양판소는 제대로 쓸 듯. ㅋㅋㅋㅋㅋㅋ
잘못된 식민 사관이 이렇게 큰 폐해를 낳습니다..
조선시대 사기장(도공이란 말은 일본말)은 꽤 좋은 대우를 받았습니다. 관청에서도 함부로 대할 수 없고, 생활도 제법 괜찮았어요..
도자기 자체가 조선에서도 엄청난 고가의 물품이고 귀한거라서, 도자기를 만든다는 자체가 국가에서 관리할 수 밖에 없는 것..
그리고 일본에서 대우를 잘 받았다는 건 거짓입니다. 일본에선 사기장들이 거의 개인 노예와 같았어요.. 열등감과 발달된 조선문화를 갖고 싶은 영주들의 개인소유와 마찬가지였습니다. 매일 죽지 않기 위해 도자기를 만들고, 강제로 일본인과 혼인시켜서 아예 조선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만들었는데 무슨...
우리나라가 배우는 현재의 역사 대부분이 일제시대때 정리된것들이라 상당부분 식민사관에 의해서 기록된 글입니다.
역사 바로세우기를 하는 이유도, 이런 일제의 만행으로 잃어버린 올바른 역사관을 세우기 위함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히데요시가 죽고 도쿠가와 이에야쓰가 정권잡았을때
조선과 국교를 회복하려고 조선통신사를 다시 재개 시키면서
강제로 끌려온 조선 도공들 어느정도 돌려보내려 했던건 역사적 사실임.
그리고 조선으로 돌아가지 않고 남은 도공들에게는 상당한 대우를 했고
그 조선 도공들의 피가 섞이지 않도록 도공들 마을을 따로 만들어서
허가없는 일본인은 조선인 마을에 접근조차하지 못하도록 했음.
아니 조금이라도 알아보고 쓰던가 노예?? 주인의 맘에들면 조선여자를 자기 침실로 끌여들여??
이게 무슨 개소리야.
도공들에게는 어느정도의 계급과 그에 걸맞는 평균이상의 생활을 보장했고 일본인의 접근을 차단하여 차별을 미연에 방지하는등의 노력은 했지만 단! 그들에게 자유가 없었던건 사실임. 도공의 자식으로 태어나면 자식도 도공일을 강제했음. 일본인이 접근을 못하게 했지만 조선인도 지역 밖으로 나가는건 금지했음.
미야마에서 태어난 도고는 4살 때까지 박무덕(朴茂德)이라는 한국이름으로 불렸다. 메이지 유신 이후 조선도공 보호정책이 폐지된 뒤 그의 아버지가 도고라는 성을 사서 이름까지 일본인이 되었다.
그의 조상은 정유재란 남원전투 때 사쓰마(薩摩) 영주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군에 포로가 되어 끌려간 80명 도공의 지도자 박평의(朴平意)였다. 시마즈는 도공 마을을 일본인 사회에서 격리시키고, 일본인과의 결혼마저 금했다. 조선 도자기의 명맥을 이어가기 위한 순혈주의 정책이었는데, 그것이 세계적인 도자기 브랜드 '사쓰마 야키(燒)'의 오늘을 만든 원동력이다. 시게노리도, 14대 심수관도, 100% 한국인 피를 이어받은 내력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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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로 일본인과 혼인을 시키다니 이게 무슨 역사왜곡이오?
일본 애니메이션을 쭉 동경해 오던 한 미국인이 일본에서 애니메이터로 일하는
꿈을 이뤘지만, 지나치게 열악한 일본의 근무환경에 경악해 미국언론에 그 현실
을 고발하다.
"분명히 말하고 싶은것은 일본의 애니메이션 산업은 단순히 어려운 것이 아니라
불법 노동환경 그 자체 입니다. 일본에서 일반 애니메이터들은 최저 임금도 채
지급받지 못하고 현장에서 구토하고 쓰러져 병원으로 이송될 정도로 중노동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마감이 늦어지는 경우에는 무려 50일동안 단 하루도 쉬지
않고 일한적도 있습니다. 평균적으로 주 6.5일을 근무합니다."
"제가 뉴욕에서 애니메이터로 일했을때는 비싼 임대료도 충분히 지불했고, 물건
을 사거나 인생을 즐기는 여유도 있었습니다"
"제가 일했던 일본 애니메이션 회사 피에로의 월급은 12만엔이었고, 심지어 더
심한 곳은 4만엔이 채 안되는 곳도 있었습니다"
일본정부는 애니메이션 사업이야말로 '쿨재팬'의 핵심이자 견인차라고 말합니다.
애니메이션 관련 해외 이벤트에서 언제나 '일본 만세'를 외칩니다.
애니메이션 관련 펀드 국책 주식회사를 만들고, 의미불명의 애니메이션 육성 법인
기구를 만들어서 낙하산 정치인을 자리에 앉힙니다. 하지만 정작 일본에서 실제로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노동자들에 대한 처우개선은 수십년간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실제로 일본의 애니메이션 현장에서 노동자들이 죽어나가도 일본정부는
오로지 해외에 얼마나 애니메이션을 판매하고, 그것이 일본 PR로 연결될수 있는지
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놈의 '쿨재팬' 타령만 하며 해외 PR에만 힘쓰기 위해 일본의 젊은이들을 노예로
일회용으로 소비하고 있는것이 현재 일본 애니메이션계의 현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