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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3-16 12:34
[기타] 1300년 전 신라 경주 시내 복원 CG ~
 글쓴이 : 별찌
조회 : 8,7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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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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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아리쓸빠 18-03-16 12:37
   
와우!!!
홀로장군 18-03-16 12:40
   
근데 많이 과하다는 생각이...
신라가 아니고 조선시대라 해도 못 믿겟그만...
     
소인배out 18-03-16 12:43
   
그러게요.
약 40년 전만해도 서울, 대구같은 곳에서도 초가집이 적지 않았다는 걸 안다면..
          
로마전쟁 18-03-16 21:48
   
오히려 신라시대가 더 화려했습니다. 신라와 고려시대는 화려함의 극치죠. 조선시대가 오히려 소박함을 강조한 시대였죠. 도자기도 무늬없는 백자의 시대였교 장신구 조차도 신라 백제 고려 시대의 화려함을 조선시대때는 찾아볼수 없었죠. 의복도 신라백제시대가 훨 화려합니다. 건축물도 말할필요가 없죠. 궁궐빼고는 2층건물이 조선시대에는 없는데 신라백제에는 화려하게 많이 드러섰었다고 하죠. 저 시뮬레이션이 판다지가 아니고 고증해서 비슷하게 만든거라고 함. 과한게 아니에요.
신라시대때 유리식기만 검색해봐도 지금유리식기에 뒤떨어지지 않는게 신기할정도.
          
헬리건 18-03-16 22:52
   
통일신라시대때 수도의 도시 그림이 있던데...

얼마나 믿을 수 있는건지는 몰라도...

완전 계획도시 저리가라던데요?
          
TimeMaster 18-03-16 23:00
   
경주시내에는 초가집이 한채도 없었다고 합니다. 밥을 해먹을때도 모두 숯으로 해먹었다는 기록과 당시 숯을 공급하던 경주 외곽의 숯가마터도 여럿 발견됨.

오히려 금택이라고 하여 집을 금으로 금박한 집들만해도 수십채가 있었음.
          
ultrakiki 18-03-17 03:21
   
대구는 원래 작은 곳이였어요.

경주 상주가 가장 으뜸되는 도시였고

그래서 앞글자 따서 경상도입니다.

저당시에는 대구따위와 비교할 곳이 못됩니다.

그리고 서울은 초가집은 거의 없었습니다.

4대문 안만 서울이였고 대부분 기와집이였습니다.
     
메로나 18-03-16 13:09
   
신라때 어마어마 했어요.
통일신라 경주지역은 로마 황금기때처럼 엄청 부자였고 사치가 만연했었습니다.
조선은 오히려 유교사상때문에 주택을 과하게 못 짓게 했지요.
     
새끼사자 18-03-16 14:31
   
과하다고 생각이 되지만....일본애들 뻥카치는 거 보면 저 정도는 용서가 됨...
신라뿐만 아니라 조선의 한성 고려, 고구려 백제까지도 멋들어지게 만들어서 선전할 필요 있음...
     
kuijin 18-03-16 17:46
   
조선시대가 서민들 가까이 기술들로는 더 퇴보적이지 않았을까요.....진짜 조선 중기부터 완전 헬게이트던데.
     
50드론러쉬 18-03-16 18:47
   
"경주"만 그랬던거에요

신라 말기는 사치와 향락의 시대였습니다
어느정도냐면 금을 쳐바른 집도 35채나 있었습니다.
오죽하면 왕이 사치 금지령을 내리겠어요
소수의 진골 귀족들이
백성들 고혈 빨아 먹는게 아주 극에 달했던 시대였거든요

다시 말하지만 경주만 그랬어요
국가의 모든 재물과 재화를 수도에서 다 빨아들였거든요
경주 밖의 지역은 빈곤하게 살았고요
수도와 소경 외 지역은 사람 취급도 잘 안해줬습니다

그래서 지방 호족들의 쿠데타가 빈번했던거구요
     
팬더롤링어… 18-03-16 23:42
   
당시 기록으론  비를 한방울도 안맞고 기와 처마 서라벌 전체를 돌아 다닐수 있을 정도 였다 하니 저게 거짓 이라고만 할순 없죠.. 그당시 신라의 서라벌은 세계적으로 따져도 10손가락 안에 들어갈 정도였으니까요
winston 18-03-16 12:40
   
싹 다밀고 저렇게 환원홥시다!!
추적60초 18-03-16 12:41
   
이대로 계획도시 만들어도 좋겠네요
김억삼 18-03-16 12:42
   
설마 저렇게 잘살았을리가..
나메크성인 18-03-16 12:54
   
이거완전 솔직히  조작이다..난 대구에사는데  경주자주가서잘알아..저시대에 고증문헌보면 초가집도 상당히 많았거든....근데 저사진은 초가집하나도 안보이고  깨끗하고 아름답고 웅장하게  만  보이는데......내가 이런말한다고 욕해도좋아...하지만 우리는 진실을 받아들이고 거짓에 환호 해서는 안돼  ...

솔직히 저사진 매우 보기 좋아  .하지만 너무 비주얼을 강조해서 실제적인 모습은 감추어져있어
     
50드론러쉬 18-03-16 18:51
   
근데 고서에 적힌대로면
실제로 저정도 쯤 됩니다
대체 어느시대 어느 문헌을 말하시는지 모르겠는데
그리고 저건 '신라 말기'이고
초기의 신라는 말그대로 부족 국가 수준이었죠
그 때는 초가집 수준이겠어요? 가난하면 움집에서도 살았죠

내용을 대충만 적어보면

'사치와 향락이 극에 달해
수도 경주엔 기와집이 아닌 집이 없었고
금을 쳐바른 집도 35채가 있었으며

진골귀족들이 사는 곳을 벗어나면 초가집에
백성들은 빈곤한 삶을 살았다'

삼국유사에 나온 경주 스펙은 17만 8936호, 1360방, 55리, 35개의 금입택
전부 기와집


본인이 모른다고 조작이라니 ㅋㅋ
앳지 18-03-16 12:55
   
건물배치상태가 뉴욕 수준이네요
ByuL9 18-03-16 13:08
   
오바한 거 아닌가 모르겠네요 당시에 ㅋㅋ 전부 저런 지붕이었다고?ㅋㅋㅋ
     
빈빈 18-03-16 23:59
   
기록에 그렇게 나온답니다.
표현이 누각이나 전각이 기러기 떼 날아가는 것 같다고 표현해놨으니
활인검심 18-03-16 13:13
   
서울이 1000년간 번성했다고 생각해 보세요.
신라는 세계 역사상 몇 안되는 1000년 이상의 역사를 지닌 나라임
그나라 수도라면 대형 건물은 모르더라도 집들이 많이 모여있는건 맞을거구요
저런 기와집만 있는 도시가 아니라 초가집도 섞여있는 그런 도시였겠죠
그렇지만 규모는 대단했을거라 생각됩니다.
경주가 과연 서울의 신라였냐는 의문이 있을정도임...
     
50드론러쉬 18-03-16 19:22
   
번성도 번성이지만
신라 = 경주 이기 때문에 가능했죠
나머지 지역은 거의 식민지 수준이었고요
그리고 말기에는 전부 기와집 맞아요

귀족들과 그에 딸린 노비및 식솔들이 모여 살던 곳이 경주고
그 외곽에서 귀족들한테 줄 재화를 납품하는 곳

이렇게 이분법적인 사고방식과 정치 구조를 갖고 있던 나라였습니다.
수도의 진골 귀족들만 다 해먹는 구조라서 가능했던거죠
달리다가 18-03-16 13:29
   
허허허허ㅓ억
화끈하게 18-03-16 14:15
   
현실감 1도 없는 개뻥 CG임.

걸어가다 똥마려우면 길바닥에 싸는 시대임. 

삼국시대 전 인구 모아다 살아도 집 남겠다.
     
50드론러쉬 18-03-16 19:03
   
무식하네 모르면 가만히라도 있지
     
별명없음 18-03-17 10:41
   
신라시대 건축물 터만 가봐도
로마시대처럼 물이 흐르던 수세식 화장실이 있는데 뭔 헛소린가 ;;
zzag 18-03-16 14:16
   
조선시대 서울만 해도 초가가 거의없고 기와주택들이었습니다.
2히힛 18-03-16 14:32
   
건축 양식이 죄다 조선시대같은데 저때 양식은 지금 남아있는게 없나...
깁스 18-03-16 14:53
   
천년도시이고 황금의 땅이라 불리긴 했죠
미월령 18-03-16 15:45
   
신라의 전성기에 신라의 수도 경주는 매우 번영하는 대도시였다.그당시 경주는 인구가 100만 명이 넘었는데 그 정도 규모의 도시는 그당시에 경주 외에는 당 제국의 수도 시안(그당시의 이름은 장안),아바스 칼리파국의 수도 바그다드,동로마 제국의 수도 이스탄불(그당시의 이름은 콘스탄티노플)의 세 도시밖에 없었다.
그래서 경주,시안,바그다드,이스탄불을 8세기 4대 도시라고 한다.
그당시의 경주 규모는 지금보다 컸으며 그당시 경주의 도시명은 왕경이었다. 경주의 귀족들은 금으로 만든 그릇을 썼고 금실로 집을 치장했다.그리고 그당시 신라 귀족들은 매우 부유하고 사치스러워 개의 목줄이나 원숭이의 목걸이도 금으로 만들었다.
그당시에 귀족들은 원숭이를 키웠는데 일본과 활발히 무역하며 원숭이도 수입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라의 무덤에서 흙으로 빚은 코끼리와 개미핥기 모양의 작은 조각상이 나온 것으로 보아 동남아시아 지역과
무역하며 수마트라 섬에 살던 코끼리를 사들인 것은 물론 남아메리카까지 무역하여 개미핥기를 수입한 것으로 보인다.
그외에도 실크로드를 통해 중앙아시아와도 무역했다.이런 활발한 무역으로 신라는 이란 지역의 양탄자나 각지의
보석들을 수입하게 되었다.
신라의 전성기였던 남북국 시대에는 한옥 중에도 다층 건물이 많았다.황룡사 9층 목탑은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일종의 건물로 경주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신라의 왕궁 월성에도 월망루라고 하는 높은 누각이 있었다.
이런 다층 건물들은 고려시대와 조선 전기까지 남아있었으나 조선 후기가 온돌이 많이 퍼지면서 온돌을 설치할 수 없는
다층건물은 짓지 않게 되었다.
신라 시대의 경주에는 39개의 화려한 저택들이 있었는데 이 저택들은 금으로 도금된 집들이라서 금입택이라고 불렸다.
금입택들은 고려시대에 더욱 화려해져 마루나 기와까지 금으로 도금하는가 하면 순금으로 만든 용의 조각상까지
달았다.이 금입택들은 제3차 고려-몽골 전쟁으로 불타기 전까지 존재했다.
경주에는 초가집은 없고 전부 기와집만 있었으며 나무가 아니라 숯을 연료로 썼기 때문에 도시에 연기가 나지 않았다.
또한 하수도관이 있고 수세식 화장실이 존재했다.이 화장실은 용변을 보면 하수도관을 통해 오물이 바다로 빠져나가는
구조로 이 덕분에 경주는 청결하고 질병이 적은 도시였다.

[출처] 신라 시대의 경주|작성자 다스 베이더의 헬멧
고지호 18-03-16 15:49
   
개뻥 아닙니다.
당시 서라벌의 가구수는 5만호.
그 5만호가 전부 기와집.
그리고 단 한군데에서도 연기가 올라오지 않음. 즉, 모두 나무가 아니라 숯을 구워 요리를 해서 연기가 올라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전성기에는 무료 17만호가 있었다고도 함(삼국유사 기록 - 수도에 17만8936호, 1360방, 55리와 35개의 금입택(金入宅)이 있었다)
위 기록에 대해서 어떤 역사학자는 5만호가 실제 서라벌 인구고 나머지는 위성도시, 즉 서라벌에 숯이나 생필품을 공급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주변도시의 인구를 합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어쨌꺼나 당시 세계적인 규모의 대도시였고 바둑판 처럼 만들어진 계획도시 였으며 전성기에는 부와 사치가 넘쳐 흘렀던 도시임에는 틀림없습니다.
17만호설이 진짜라면 인구는 90만이었고 이는 당시 세계 2위의 대도시였습니다. 물론 그 정도 규모가 아니라 위성도시를 합하였다는 것이 보다 신빙성 있는 주장이라고 생각합니다.
뚱쓰뚱쓰 18-03-16 16:07
   
신라가 망한이유가 사치와 향락이 가장 크게 봤으니 가능할듯..금으로 만든 집도 몇채 있었다고 하니...못믿을것도 없음..
cafeM 18-03-16 16:28
   
신라 경주기 때문에 충분히 가능함.

지금의 주택가랑 규모가 다른게 그 당시 기와집 평수가 지금의 주택들보다 훨씬 큰데
그게 수만가구가 있었음.
odroid 18-03-16 16:57
   
신라가 어디서 저런 부를 축적한것인지...어디 금맥이라도 있었나??미스테리...어떤경로로 입수한것인지 모르나 해외에 진기한 보물이 나온경우도 있으니..신라의 경주 도대채 얼마나 잘살았던건지..당시 경주가 잘나갔다는건 유적으로도 대충 짐작이가는거라...
     
아비요 18-03-16 18:00
   
ㅋㅋㅋㅋㅋ 진짜 아무것도 모르시는 댓글내용인데 진실이라는 점이 웃기네요. 지금의 낙동강인지 어딘지 몰것는데 신라지역이 저 시대엔 주요한 금산지였습니다. 강에서 사금을 채집했다는거 같던데.. 그래서 황금 장신구나 공예가 대단히 발달했던게 신라고 황금의 나라라고 불렸지요.
그리고 기본적으로 신라는 골품제에 진골이상만 일정이상 관직을 독점하는 강력한 신분제 사회였습니다. 사실상 점령한 선에서의 한반도 내의 자원이나 부를 대부분 소수집단이 독점했어요. 그래서 어찌보면 이후의 왕조들보다도 화려할 수가 있는거라고 생각합니다.
     
50드론러쉬 18-03-16 18:59
   
경주의 진골 귀족들만 저렇게 살았음

나머지 거의 전부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님이 상상하던 그 모습으로 살았고요
좋은여행 18-03-16 17:36
   
여기 저기 흔하게 발견되는 고분만 보더라도, 그 부유함을 짐작할 수 있죠.
장미여관 18-03-16 18:14
   
경주 출신들은 알꺼야

땅만  파면 기와가  나왔다.
50드론러쉬 18-03-16 18:58
   
역사 교육이 강조 되고 반필수가 되면 뭐합니까
사람들은 무식하게 구라라는 소리만 하는데
애초에 저게 백성들 고혈 빨아서 이룬거니 아주 자랑스러울 것도 아닙니다
과장할 필요도 없고요 정말 딱 고서에 나온 대로만 한거 같은데요?

집에는 녹이 끊이지 않았다. 노동이 3천 명이며, 비슷한 수의 갑병이 있다. 소, 말, 돼지는 바다 가운데 섬에서 기르다가 필요할 때 활로 쏘아 잡아먹는다. 곡식을 남에게 빌려주어 늘리는데, 기간 안에 갚지 못하면 노비로 삼아 부린다. <신당서>(중국 송나라)

신라의 전성기에 수도 경주에는 17만 8936호, 1360방, 55리, 35개의 금입택이 있었다.<삼국유사>

집을 여러개 두고 봄에는 동야택, 여름에는 곡량택, 가을에는 구지택, 겨울에는 가이택에서 계절별로 지냈다. 제 49대 헌강대왕 때에는 성 안에 초가집이 하나도 없었고 집의 처마가 서로 닿고 담장이 이어져 있었으며, 노래와 피리 소리가 길에 가득 차서 밤낮으로 끊이지 않았다. <삼국유사>

헌강왕 6년 9월 9일에 왕이 좌우의 신하들과 함께 월상루에 올라가 사방을 둘러보았는데, 서울(수도를 서울이라 부름) 백성의 집들이 서로 이어져 있고 노래와 음악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왕이 시중 민공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내가 듣건데 지금 민간에서는 기와로 덮고 짚으로 잇지 않으며, 숯으로 밥을 짓고 나무를 쓰지 않는다고 하니 사실인가?"라고 물었다 <삼국유사>
옷이작다 18-03-16 20:02
   
웅장하고 멋지구만요...
sunnylee 18-03-16 20:50
   
저시대에 경주에선..
조리에 숯,갈탄을 사용했단 기록도 있을 정도임..
인생사 18-03-16 21:28
   
숯을 연료로 사용한거는 엄청난 경제력이 없으면 못하는건데.
우훗 18-03-16 21:51
   
흐음...확실히 특이한 도시기는해요 유물이 정말 끊임없이 나오는듯.한국내 어떤 도시들도 저렇게 유물이 많이 나오는곳은 없어요 로만 글라스나 황금칼 같은게 떡하니 나오는 도시였으니 현재 모습만으로 삼국시대 상황을 판단하는건 무리가 있는것 같습니다
우훗 18-03-16 21:56
   
일단 건물끝에 올리는 치미 사이즈부터가 삼국시대와 조선은 넘사벽입니다 치미 크기로 건물 크기를 유추할수가 있는데 신라시대 치미가 조선이나 고려시대 치미의 대여섯배는 커요.금속세공이나 석조기술도 고려 조선보다 삼국시대가 훨씬 수준이 높았구요
질소다 18-03-16 22:21
   
멋지다
TimeMaster 18-03-16 23:06
   
조선시대 초가집 타령을 하는데 조선의 수도인 한성도 사대문안은 대부분이 기와집이었어요. 구한말까지도요.

일본인들이 날조하기 위해 찍은 서울의 초가집 사진들을 자세히 보시면 대부분 성벽을 끼고 있어요. 즉, 서울이라고 구분짓는 나성과 사대문안쪽에 있는 것이 아닌 서울 밖인 성외곽의 가난한 빈민촌의 초가집들이었음. 지금으로 치면 불법건축한 재개발구역이었단 말이죠.
루시엘 18-03-17 01:37
   
박서준주연 화랑에서 묘사를 똑같이한듯하네요
백성들 피빨아 화려한불을 켠도시
아버지가 진골이여도 엄마가 천민이면 도시밖으로 아이를 버리기도하고
 드라마에서  유리잔하고 이층이상 건물 나오는거보고 쑈하네 했었는데
윗분들 뎃글보니 드라마가 제대로 그렸네요
su수 18-03-17 04:58
   
멋지네요.
배신자 18-03-17 05:18
   
당시의 경주는 지금 북한의 평양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신라의 모든 역량을 경주에 모아서 경주만 번듯하게 잘살았던거죠.

근데 저당시엔 고구려, 백제도 다들 그랬음.

수도에 왕이 살았고 수도에 집중했기 때문에 ...
싱그런하루 18-03-17 09:42
   
와 저게 남아 있었다면 진짜
브이 18-03-17 10:37
   
뭐라 말할수없는...
Sulpen 18-03-17 11:30
   
당장 서울권만 해도 실제로는 평양, 개성, 서울 지역이 수도를 나눠서 했던데 비해 경주는 1천년 가까이를 수도로 했었으니 최전성기 시대의 모습이 저럴 수는 있다고 봅니다.
물론 건축양식에 있어서 차이는 있었겠지만요
magnifique 18-03-17 13:25
   
불국사나 다른 문화재 남은것들 보면 저럴수도 있겠구나 싶기도 한데 기록 말고는 남은게 너무 없어서리
스리즈 18-03-17 13:57
   
위 복원도에 신빙성따위 없습니다
기와가 크다는게 건물이 더 크다는 증거가 될수도 없고 말이죠
오히려 처마의 하중을 제대로 분산시킬 수 없어 무너질 가능성이 더 큽니다
고서를 증거로 주장하시는 분들이 계시는데
 이런 분들은 삼국지나 마르코폴로 동방견문록 같은 소설을 그대로 믿을분들임
다시말해 결국 자신 입장에 맞게 과거를 형편좋게 해석하는 것일뿐..
애초에 1300년 전의 도시를 유물 몇점과 신빙성이 있는지도 의심스러운 기록에 의존해 복원할려는 것 자체가 무리수라고 생각하지않나요?
     
50드론러쉬 18-03-17 16:36
   
대체 구조물을 어떤 목적으로 만들면
고작 기와 무게를 버티지 못해서 무너집니까 ㅋㅋ
그리고 하중이 커지는데 구조물이 왜 더 안커집니까??
구조를 벽식으로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하중이 커지면 작을 때 보다 당연히 커집니다
이건 역학을 배우고 말고가 아니라 사람이면 그냥 알아야 하는건데...

우리보다 사이즈가 훨씬 더 큰 중국의 건축물들은
어떻게 그 긴시간을 버티고 남아 있나요
게다가 중국은 우리보다 2층 3층 층층이 쌓는걸 더 좋아했습니다
중국도 필요없고 우리 궁궐이나 옆나라 일본만 봐도 아실텐데요?

그리고 사료는 발견이나 발굴 되면
의무적으로 제일먼저 내적, 외적 비판이 들어갑니다
다른 기록물, 유물과 비교 검증을 통해 저자의 주관을 파악하고
신빙성을 판단하는 겁니다. 이걸 논리적으로 입증하지 않으면
백번 논문 써봐야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아요
학회가서 집중 폭격만 맞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여기서 다른 기록물들은 국내 뿐만 아니라 중국, 일본, 서역 등
외국의 모든 관련 자료가 포함되는거고요
대표적으로 이런 과정을 통해 임나일본부설이 일본 내에서도 거의 사장 된겁니다

삼국유사의 신라의 기록은 국내 다른 문헌들과는 물론
중국의 신당서 등의 문헌들과 비교햇을 때
무리없는 담백한 기록이라고 널리 인정되는 기록입니다 ㅡㅡ

하 그리고 암 어처구니가 없는게
왕명을 받아 학자들이 집필한 역사서들랑
현대의 일개 작가가 쓴 판타지 소설, 개인이 쓴 기행문 하고 비교를?????
어이가 ㅋㅋㅋㅋㅋㅋㅋ 에라이
정사와 야사에 대한 개념 조차 없는 양반일세

진짜 심각하네요
상상을 현실로 믿는 망상장애가 의심됩니다
속히 전문의와 상의하시길
          
스리즈 18-03-17 20:45
   
남을 함부로 정신병자라고 인신공격하는 대목에서 님의 저급한 인성을 볼수있네요 ^^;;
요즘 삼국유사의 내용을 있는 그대로 믿는 사람이 있나요?
아 곰이 우리민족의 조상이라 말하고 고구려와 백제보다 늦게 건국되게 쪽팔려서 건국년도 고쳐쓴 그 책 말입니까?
애초에 삼국유사가 집필된시기가 고려후기입니다
그당시에서도 신라에 관한일은 500년이상 더지난 옛날이야기..
더군다나 그당시는 외세에 대항해 자국민을 하나로 뭉치기위해 국뽕한사발 마시던 때입니다 자국의 역사,정통성을 강조하기위해 다소 뻥을 적어넣어놓을 가능성도 염두해둬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보다 큰 다층 건물을 가지고 있는 중국이나 일본의 기와의 경우 오히려 한국보다 작습니다
중국식 대방양식은 건물의 하중을 견디는데 적합하지 않죠
때문에 가능한 처마을 얇고 넓게 만들어야지만 더 높은 건물을 짓기 용이합니다 아마 경주에서 발견한 그 기와는 그러한 사실을 모르는 발전초기에 물건일지도 모릅니다
우디 18-03-17 18:07
   
견훤에게 개박살 났죠.
볼티모어 18-03-19 02:26
   
사치로 망한 신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