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히려 신라시대가 더 화려했습니다. 신라와 고려시대는 화려함의 극치죠. 조선시대가 오히려 소박함을 강조한 시대였죠. 도자기도 무늬없는 백자의 시대였교 장신구 조차도 신라 백제 고려 시대의 화려함을 조선시대때는 찾아볼수 없었죠. 의복도 신라백제시대가 훨 화려합니다. 건축물도 말할필요가 없죠. 궁궐빼고는 2층건물이 조선시대에는 없는데 신라백제에는 화려하게 많이 드러섰었다고 하죠. 저 시뮬레이션이 판다지가 아니고 고증해서 비슷하게 만든거라고 함. 과한게 아니에요.
신라시대때 유리식기만 검색해봐도 지금유리식기에 뒤떨어지지 않는게 신기할정도.
서울이 1000년간 번성했다고 생각해 보세요.
신라는 세계 역사상 몇 안되는 1000년 이상의 역사를 지닌 나라임
그나라 수도라면 대형 건물은 모르더라도 집들이 많이 모여있는건 맞을거구요
저런 기와집만 있는 도시가 아니라 초가집도 섞여있는 그런 도시였겠죠
그렇지만 규모는 대단했을거라 생각됩니다.
경주가 과연 서울의 신라였냐는 의문이 있을정도임...
신라의 전성기에 신라의 수도 경주는 매우 번영하는 대도시였다.그당시 경주는 인구가 100만 명이 넘었는데 그 정도 규모의 도시는 그당시에 경주 외에는 당 제국의 수도 시안(그당시의 이름은 장안),아바스 칼리파국의 수도 바그다드,동로마 제국의 수도 이스탄불(그당시의 이름은 콘스탄티노플)의 세 도시밖에 없었다.
그래서 경주,시안,바그다드,이스탄불을 8세기 4대 도시라고 한다.
그당시의 경주 규모는 지금보다 컸으며 그당시 경주의 도시명은 왕경이었다. 경주의 귀족들은 금으로 만든 그릇을 썼고 금실로 집을 치장했다.그리고 그당시 신라 귀족들은 매우 부유하고 사치스러워 개의 목줄이나 원숭이의 목걸이도 금으로 만들었다.
그당시에 귀족들은 원숭이를 키웠는데 일본과 활발히 무역하며 원숭이도 수입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라의 무덤에서 흙으로 빚은 코끼리와 개미핥기 모양의 작은 조각상이 나온 것으로 보아 동남아시아 지역과
무역하며 수마트라 섬에 살던 코끼리를 사들인 것은 물론 남아메리카까지 무역하여 개미핥기를 수입한 것으로 보인다.
그외에도 실크로드를 통해 중앙아시아와도 무역했다.이런 활발한 무역으로 신라는 이란 지역의 양탄자나 각지의
보석들을 수입하게 되었다.
신라의 전성기였던 남북국 시대에는 한옥 중에도 다층 건물이 많았다.황룡사 9층 목탑은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일종의 건물로 경주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신라의 왕궁 월성에도 월망루라고 하는 높은 누각이 있었다.
이런 다층 건물들은 고려시대와 조선 전기까지 남아있었으나 조선 후기가 온돌이 많이 퍼지면서 온돌을 설치할 수 없는
다층건물은 짓지 않게 되었다.
신라 시대의 경주에는 39개의 화려한 저택들이 있었는데 이 저택들은 금으로 도금된 집들이라서 금입택이라고 불렸다.
금입택들은 고려시대에 더욱 화려해져 마루나 기와까지 금으로 도금하는가 하면 순금으로 만든 용의 조각상까지
달았다.이 금입택들은 제3차 고려-몽골 전쟁으로 불타기 전까지 존재했다.
경주에는 초가집은 없고 전부 기와집만 있었으며 나무가 아니라 숯을 연료로 썼기 때문에 도시에 연기가 나지 않았다.
또한 하수도관이 있고 수세식 화장실이 존재했다.이 화장실은 용변을 보면 하수도관을 통해 오물이 바다로 빠져나가는
구조로 이 덕분에 경주는 청결하고 질병이 적은 도시였다.
개뻥 아닙니다.
당시 서라벌의 가구수는 5만호.
그 5만호가 전부 기와집.
그리고 단 한군데에서도 연기가 올라오지 않음. 즉, 모두 나무가 아니라 숯을 구워 요리를 해서 연기가 올라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전성기에는 무료 17만호가 있었다고도 함(삼국유사 기록 - 수도에 17만8936호, 1360방, 55리와 35개의 금입택(金入宅)이 있었다)
위 기록에 대해서 어떤 역사학자는 5만호가 실제 서라벌 인구고 나머지는 위성도시, 즉 서라벌에 숯이나 생필품을 공급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주변도시의 인구를 합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어쨌꺼나 당시 세계적인 규모의 대도시였고 바둑판 처럼 만들어진 계획도시 였으며 전성기에는 부와 사치가 넘쳐 흘렀던 도시임에는 틀림없습니다.
17만호설이 진짜라면 인구는 90만이었고 이는 당시 세계 2위의 대도시였습니다. 물론 그 정도 규모가 아니라 위성도시를 합하였다는 것이 보다 신빙성 있는 주장이라고 생각합니다.
ㅋㅋㅋㅋㅋ 진짜 아무것도 모르시는 댓글내용인데 진실이라는 점이 웃기네요. 지금의 낙동강인지 어딘지 몰것는데 신라지역이 저 시대엔 주요한 금산지였습니다. 강에서 사금을 채집했다는거 같던데.. 그래서 황금 장신구나 공예가 대단히 발달했던게 신라고 황금의 나라라고 불렸지요.
그리고 기본적으로 신라는 골품제에 진골이상만 일정이상 관직을 독점하는 강력한 신분제 사회였습니다. 사실상 점령한 선에서의 한반도 내의 자원이나 부를 대부분 소수집단이 독점했어요. 그래서 어찌보면 이후의 왕조들보다도 화려할 수가 있는거라고 생각합니다.
역사 교육이 강조 되고 반필수가 되면 뭐합니까
사람들은 무식하게 구라라는 소리만 하는데
애초에 저게 백성들 고혈 빨아서 이룬거니 아주 자랑스러울 것도 아닙니다
과장할 필요도 없고요 정말 딱 고서에 나온 대로만 한거 같은데요?
집에는 녹이 끊이지 않았다. 노동이 3천 명이며, 비슷한 수의 갑병이 있다. 소, 말, 돼지는 바다 가운데 섬에서 기르다가 필요할 때 활로 쏘아 잡아먹는다. 곡식을 남에게 빌려주어 늘리는데, 기간 안에 갚지 못하면 노비로 삼아 부린다. <신당서>(중국 송나라)
신라의 전성기에 수도 경주에는 17만 8936호, 1360방, 55리, 35개의 금입택이 있었다.<삼국유사>
집을 여러개 두고 봄에는 동야택, 여름에는 곡량택, 가을에는 구지택, 겨울에는 가이택에서 계절별로 지냈다. 제 49대 헌강대왕 때에는 성 안에 초가집이 하나도 없었고 집의 처마가 서로 닿고 담장이 이어져 있었으며, 노래와 피리 소리가 길에 가득 차서 밤낮으로 끊이지 않았다. <삼국유사>
헌강왕 6년 9월 9일에 왕이 좌우의 신하들과 함께 월상루에 올라가 사방을 둘러보았는데, 서울(수도를 서울이라 부름) 백성의 집들이 서로 이어져 있고 노래와 음악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왕이 시중 민공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내가 듣건데 지금 민간에서는 기와로 덮고 짚으로 잇지 않으며, 숯으로 밥을 짓고 나무를 쓰지 않는다고 하니 사실인가?"라고 물었다 <삼국유사>
위 복원도에 신빙성따위 없습니다
기와가 크다는게 건물이 더 크다는 증거가 될수도 없고 말이죠
오히려 처마의 하중을 제대로 분산시킬 수 없어 무너질 가능성이 더 큽니다
고서를 증거로 주장하시는 분들이 계시는데
이런 분들은 삼국지나 마르코폴로 동방견문록 같은 소설을 그대로 믿을분들임
다시말해 결국 자신 입장에 맞게 과거를 형편좋게 해석하는 것일뿐..
애초에 1300년 전의 도시를 유물 몇점과 신빙성이 있는지도 의심스러운 기록에 의존해 복원할려는 것 자체가 무리수라고 생각하지않나요?
대체 구조물을 어떤 목적으로 만들면
고작 기와 무게를 버티지 못해서 무너집니까 ㅋㅋ
그리고 하중이 커지는데 구조물이 왜 더 안커집니까??
구조를 벽식으로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하중이 커지면 작을 때 보다 당연히 커집니다
이건 역학을 배우고 말고가 아니라 사람이면 그냥 알아야 하는건데...
우리보다 사이즈가 훨씬 더 큰 중국의 건축물들은
어떻게 그 긴시간을 버티고 남아 있나요
게다가 중국은 우리보다 2층 3층 층층이 쌓는걸 더 좋아했습니다
중국도 필요없고 우리 궁궐이나 옆나라 일본만 봐도 아실텐데요?
그리고 사료는 발견이나 발굴 되면
의무적으로 제일먼저 내적, 외적 비판이 들어갑니다
다른 기록물, 유물과 비교 검증을 통해 저자의 주관을 파악하고
신빙성을 판단하는 겁니다. 이걸 논리적으로 입증하지 않으면
백번 논문 써봐야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아요
학회가서 집중 폭격만 맞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여기서 다른 기록물들은 국내 뿐만 아니라 중국, 일본, 서역 등
외국의 모든 관련 자료가 포함되는거고요
대표적으로 이런 과정을 통해 임나일본부설이 일본 내에서도 거의 사장 된겁니다
삼국유사의 신라의 기록은 국내 다른 문헌들과는 물론
중국의 신당서 등의 문헌들과 비교햇을 때
무리없는 담백한 기록이라고 널리 인정되는 기록입니다 ㅡㅡ
하 그리고 암 어처구니가 없는게
왕명을 받아 학자들이 집필한 역사서들랑
현대의 일개 작가가 쓴 판타지 소설, 개인이 쓴 기행문 하고 비교를?????
어이가 ㅋㅋㅋㅋㅋㅋㅋ 에라이
정사와 야사에 대한 개념 조차 없는 양반일세
남을 함부로 정신병자라고 인신공격하는 대목에서 님의 저급한 인성을 볼수있네요 ^^;;
요즘 삼국유사의 내용을 있는 그대로 믿는 사람이 있나요?
아 곰이 우리민족의 조상이라 말하고 고구려와 백제보다 늦게 건국되게 쪽팔려서 건국년도 고쳐쓴 그 책 말입니까?
애초에 삼국유사가 집필된시기가 고려후기입니다
그당시에서도 신라에 관한일은 500년이상 더지난 옛날이야기..
더군다나 그당시는 외세에 대항해 자국민을 하나로 뭉치기위해 국뽕한사발 마시던 때입니다 자국의 역사,정통성을 강조하기위해 다소 뻥을 적어넣어놓을 가능성도 염두해둬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보다 큰 다층 건물을 가지고 있는 중국이나 일본의 기와의 경우 오히려 한국보다 작습니다
중국식 대방양식은 건물의 하중을 견디는데 적합하지 않죠
때문에 가능한 처마을 얇고 넓게 만들어야지만 더 높은 건물을 짓기 용이합니다 아마 경주에서 발견한 그 기와는 그러한 사실을 모르는 발전초기에 물건일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