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게 그 소리인데 뭔 개소리 운운이냐 ㅋㅋ
우리가 늘상 수비였자나 쳐들어오는건 늘상 짱깨쪽이고
니말대로 수성전 위주로 싸웠으니 원거리 무기 위주였고 텅빈하늘님 말대로 다수짱깨 상대로 싸워온거잖아ㅋㅋ
오히려 저 말을 뒷받침하는 근거를 내밀어주면서 개소리라고 거품무는게 개그야ㅋㅋ
그렇게 강한 정예 강병이 왜? 일본한테 쳐 맞고 나라 빼앗겼나요?? 그렇게 못싸우는 일본은 어떻게 청나라와 러시아를 격파하고 동남아시아의 유럽 세력들까지 몰아낼 수 있었을까요?? 뇌피셜 고만 하시죠? 일본한테 나라 빼앗기기 직전까지 우리는 흙으로 집을 짓고 초가 지붕에 살았으며 길거리는 똥만 가득했고 배수 시설조차 없었습니다.
만일 한국군이 전 월남을 장악하였거나
미군들이 "고보이" 교훈을 배울 수 있었더라면 월남전은 벌써 이겼을 것이다.
칠흙같은 어둠속을 96키로나 자동차로 달려도
총격도 복병기습의 기미도 전혀 보이지 않는다.
월남 지역의 그 어느곳에서도 그와 같이 할자는 한국군 이외는 아무도 없다.
- 런던 타임즈 -
※ "고보이 교훈"이란?...
맹호부대 포병대대가 퀴논(Qui Nhon)근처 고보이(Go Boi)평야에
건기에도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고보이댐을 건설해주는 공사를 했습니다.
열대지방 베트남의 2모작 농사에서 3모작이 가능하게한 퀴논 영구댐이었죠.
전투부대가 대민지원을 하는것을 보고 영국기자가 놀랐나 봅니다.
월남의 모든 사람을 다 제쳐놓고 60만 한국군에게 전쟁을 맡겨 보는 것이 어떨까? 5만에 불과한 한국군은 적의 구정 공세 기간중 전술 책임구역 내에 침입한 적을 단 하룻만에 격퇴했다......
베트콩의 항불전쟁 이래 베트콩에 장악되어 있던
중부 해안 지대가 지금은 한국군에 의하여 완전히 통활되고 있다.
- 1966.3 미국 에반스빌 저널-
월남에 있는 미국인들은 전투에 있어서나 평정사업에 있어서나
한국군을 최고로 높이 평가한다.
사실 한국군과 함께 작전을 수행해본 일부 미군들은 미군이 한국군의 방법(전술)을 배워도 좋으리라고 믿게 되었다.
"마치 미국은 한국이라는 비범한 학생을 가르치는 선생이 된 거와 같습니다.
어느날 아침 교실에 와서 선생님 미국보다 학생인 한국군이 앞서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과 같읍니다" 라고 한 미국 관리는 심각하게 말했다.
- 1967.4.10 뉴스 위크-
공산군이 38선을 넘어 남침할 당시 이 한국군은 지금의 월남군과 같았다.
그러나 17년이 지난 지금, 한국군은 얼어붙은 압록강을 떠나,
철원의 고지를 떠나, 그리고 인천항, 부산항을 떠나 수천만리 이역땅에서
다시금 공산주의자와 싸우고 있다.
- 옵저버 1967. 5.24 -
노획한 베트콩 문서에 의하면 베트콩은 100% 승리의 확신이 없는 한
한국군과의 교전을 무조건 피하도록 지시가 되어 있다.
한국군은 모두 태권도로 단련된 군대이니 비무장한 한국군인에게도
함부로 덤비지 마라.
- 1966.7.22 뉴욕 타임지-
미국은 한국이라는 귀한 동맹국을 찾아 내었다.
그들은 건강한 투사,그 이상이다.
싸우는 정치인들로서 한국인은 동양에서 월남인들과 가장 친근해졌을 뿐더러
미국은 어떤 교훈을 한국으로 부터 배울 수 있으리라 느끼게 되었다.
- 뉴스 앤드 월드리포트 1967. 5.15 -
한국군은 우군 피해에 대해서 15:1 이라는 비율로 적을 사살했으며,
프랑스와 월남이 20년간 시도하다 실패한 빈딩성의 늪지 해안으로부터 적을 추격, 격파시켰다.
기본적인 한국인의 특성으로 지적할 만한것은 불굴의 정신이다.
맹호,백마,청룡용사들에 대하여 적이 조심하고 있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는 것이다.
노획된 베트콩이나 월맹군의 문서에 의하며 한국군과는 가급적 접전을 피하도록
전 병사들은 명령 받고 있는 것이다.
- 사이공 포스트 1968년 3월 20일 -
한국군이 주둔하고 있는 중부는 가장 안전한 곳이다.
한국군은 아주 특술한 전술을 가진 적에 대하여 방심하지 않고 경계를 하고
있는 대담한 군인이다.
또한 지방 농민과 잘 어울리고 농사일에는 모도 심어주고 우수한 군의관은
대민 진료를 열심히 해주고 있다.
- 월남 띠엔.반 지1968. 2.17 -
자유 월남의 장래를 위한 한국이 이룩해 온 커다란 공헌은 17년전 미국이 한국에 심었던 신뢰와 협조가 헛되지 않았다는 확실한 증명이 되고 있다.
-1967.12.17 리처드 닉슨 -
"한국군을 만나면 무조건 피하라! 특히 "맹호"를 만나면 모든 작전을 취소하고 철수하여 병력과 장비등 인민의 재산을 보존하라! (호지명)
"대체 한국군은 어찌이리 용맹한가? 백마의 병사들은 자신의 목숨조차도 아깝지 않단말인가?, 나는 이것을 단순한 "군인정신"이라 인정할 수 없다! (호지명)
"12년간 수백만발의 포탄을 쏘아대고, 수천명의 전사자를 냈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스군과 월남군, 미군에게마저 실패와 좌절을 안겨준 공산군의 요새를 한국해병대가 단 두시간만에 점령했다, 대체 우리연합군에게 무엇이 문제였단 말인가?" 2시간의 전투결과보고는 단 세마디.. “목표제압완료, 아군피해 무, 생포한 적 압송중!”
- 르몽드 -
한국군의 전술과 미군 전술과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한국군은 적으로부터 사격을 받으면 즉각 2개 내지 그 이상의 방향에서 공격을 가하여 베트콩이 도망칠 기회를 주지 않았다. 미군은 적으로부터 사격을 받으면 뒤로 물러나 포병지원을 요청하거나 공중폭격을 요청한다. 그 다음에 공격을 하게 되니 적은 이미 자취를 감추고 만다.
- 미국 하원의 증언록에 실려있는 하원 국방위원장의 증언 -
1966.두코전투.
베트남전에 파병된 한국군은 미군과 작전권을 두고 고질적인 마찰을 빚었다. 한국군은 직접 지휘하려는 미군에 맞서 자율권을 주장. 이 와중에 한국 기갑연대 제 3대대는 미군 아래배속, 그러나 미군으로부터 기관총이나 포탄보급을 전혀 받지 못하고 두코지역에 주둔. 어느날 밤, 3대대 9중대 기지를 목표로 적군 기습, 격전. 당시 한국군 주무기는 M1, 적은 AK로 화력에서 월등히 불리했다. 기습소식에도 밤 사이 폭우로 미군 헬기 및 포대지원도 불능, 다른 지역의 한국군과 미 사령관들은 모두 9중대의 괴멸을 예상...했으나...
이춘근 대위의 지휘하에 9중대는 밤 사이 격전에서 187명 사살, 6명 생포, 박격포 6문+대전차포12문+각종 소총/포탄 수백발 포획이라는 믿을 수 없는 전과를 올린다(참고로 아군 전사자 7명). 이 기적적 승리에 미군과 해외종군기자들은 경악, 전세계 언론에 대서특필.
1967.청룡부대의 전설.
짜빈동 지역에 주둔하던 청룡 11중대. 2월 15일 포병의 지원을 받는 적 3개 대대의 공격을 받음. 정경진 대위 휘하 청룡부대는 적의 침입을 사전에 인지, 만반의 준비를 하던 상황. 밀려드는 적을 섬멸하고자 포병의 지원하에 화력집중, 하지만 인해전술 앞에 중과부적. 진지 내 침입을 허용하고 육박전을 벌였다. 압도적인 수에 긴장한 여단장은 헬기로 지원부대 파견 명령, 정경진 대위는 아군 증파로 인한 포격지원 중단을 우려, 거절한다. 소총+수류탄+삽+곡괭이로 맞선 처절한 5시간의 혈전. 11중대는 수십배의 적을 압도하고 퇴각하는 적을 추격, 섬멸하는 경이적인 전투력을 과시한다. 전투 후 300여 명 사살(추정)+2명 생포+기관총 2정 획득+자동소총 17정 포획+소총 12정 포획을 이룩한 청룡부대. 전원 1계급 특진 및 미 대통령 부대 표창까지 받는다(아군 전사자 15명). 두코 전투와 함께 이때 전과는 워낙 유명해져 타 부대에서 청룡부대를 견학오는 일도 잦았다.
1967.오작교작전.
베트남 남북을 연결하는 최고 요충지, 닌호아+깜란+뚜이호아에는 1700명이 넘는 적군이 배치, 철통수비를 하고 있었다. 이곳은 중요 보급루트일 뿐 아니라 주변 25만명의 주민과 그들이 생산하는 물자를 확보할 수 있어 엄청난 가치를 지닌 군사요충지였다. 이 지역 점령을 위해 수많은 미군과 월남군이 침공했으나 번번이 패퇴, 결국 한국군이 투입된다. 미군은 한국군에게 작전을 간곡히 만류하지만...
한국군은 닌호아, 깜란, 뚜이호아 지역의 점령군을 남북에서 동시 공격하기로 결정. 북에서 맹호부대, 남에서 백마부대를 진격시킨다. 작전 개시된 3월 8일~4월 18일까지 이어진 전투. 차근차근 적을 섬멸한 한국군은 중간지점에서 합류한다(그래서 오작교작전). 한국군이 장비, 화력, 경험에서 열세임에도 위아래서 적을 압착시켜 궤멸시키고 미군보다도 적은 희생으로 월등한 전과를 올리자 미군은 이 사례를 중심으로 한국군에 대한 연구 보고서를 작성했을 정도.
전사편찬위원회 발간 자료에도 있는 이야기인가요?
군자료는 전투상보라고 해서 중대급 일일자료부터 전부 문서로 남아 있습니다.
A라는 지역에서 모년 모월 날짜별로 수행한 업무와 작전이 다 기록되어 있는데 동일 일시에 수백킬로 떨어진 마을에 가서 양민학살하고 돌아오는 홍길동전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