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 그 이상의 미디어, 조선일보>(조선일보 90년시사편찬실, 2010)에는 “6월 26일 조선일보 안에 지하조직으로 있던 좌익세력들이 실체를 드러내면서 회사 분위기도 급변했다. 신문사에 들어서는 사장 방응모에게 ‘지금이 어떤 세상인데 때도 모르고 나타나느냐’고 막말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적혀있다. 조선일보 내에 북한지지 세력이 존재했다고 풀이할 수 있는 대목이다.
<태평로일가>(조선일보사, 1983)에 따르면 방일영은 방응모와 함께 6월 26일 조선일보사를 찾아갔을 당시 분위기를 이렇게 전했다. “…세상이 달라진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때까지도, 조부를 가까이 모셨던 총무부장 김석택이나, 또 신문사에 꽤 오래 근무했고 가깝다고 생각해 왔던 사람들이 이미 지하조직을 구성해 놓고 있었던 사실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만저만 상심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피난을 가지 않고 신당동 자택에 머물던 조선일보 사주 방응모는 그해 7월 6일 납북됐다. 그는 1884년 평안북도 정주 출생으로, 언론사 최초로 취재용 비행기(Salmson 2A2)를 구입한 재력가였으며 1946년 8월 한국독립당(위원장 김구) 중앙상무위원으로 선출된 정치인이기도 했다. 방응모의 납북 후 행적은 “1950년 9월 28일 트럭에 실려 가다 미군기의 공습을 받아 사망했다”는 증언만 있고 확실히 밝혀진 것이 없다. <조선일보 사람들>(랜덤하우스 중앙, 2004)에 따르면 조선일보에서는 전현직 직원 20여명이 전쟁 기간 중 납북됐다.
방응모는 왜 피난을 떠나지 않았을까? <방일영과 조선일보>(방일영문화재단, 1999)에서 전택보씨는 “방응모씨가 피난을 가지 않은 것은 전체 상황을 잘못 판단한 원인도 있지만, 또 다른 이유는 자기가 은혜를 베푼 사람들을 지나치게 믿었기 때문이다. 방응모씨는 조선일보를 경영하면서 서중회라는 장학회를 조직하여 성적이 우수하지만 가정이 빈곤해 고생하는 학생 60여명을 도왔는데, 그들 가운데 대부분이 좌익이 되었고 월북한 사람도 여럿 있었다”고 밝혔다.]
(*민족주의란 표현은 넓게 이승만 계열, 김구 계열 등을 통 묶어서 좌익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그냥 씁니다. 원래 그래요 엄밀한게 아니지만 사학에서 통상적으로 이렇게 씁니다. 엄밀하게는 김구계열과 이승만 계를 구분해야 하지만 어차피 김구 계열이 집권을 못하고 이승만이 우익을 대표하게 되어 문제는 없습니다.)
해방 직후에는 사회주의자들이 더 많았습니다
제국주의에 맞서서 끝까지 항전하던 사람들은
민족주의자들이 아니라 사회주의자들이었거든요
명분도 사회주의자들한테 더 많았습니다
이러다보니 이승만이 남한 단독선거에 목을 멘거였고
미국과의 이해관계도 맞고 당시 un소총회에서 소련이 불참하면서
단독선거가 결정되고 이승만의 바램대로 민족주의자들이 집권을하고
제헌국회 선출로 이승만이 대통령이 된거고
여기서 이제 현재까지 이어지는 정체성이 나타나는거죠
조선일보는 민족주의계 라인을 탔고
당시 민족주의 진영의 대빵은 이승만이고
이승만은 개인의 욕심으로 움직이는 사람이다보니
자신의 기반이자 뿌리인 반공을 우선하고
일제 청산은 되든 말든 관심 없고
오히려 자신에게 득이된다 싶으면
부일매국자들을 애국자로 둔갑시키고 이에 반발하는 사람들은 공산당원으로 만들어버리죠
이렇다보니 이 쪽에 줄을 선 조선일보의 성향이 현재 우리가 보는 성향으로 이어지는거죠
한국전 당시의 조선일보는 사실 연관지어 생각할게 없습니다
남한도 사회주의가 혼재하던 사회라
엉뚱한걸 가지고 잘못 비판하면
맹목적으로 비난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고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다른 정당한 비판도 설득력이 약하게 받아들여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말귀를 못 알아 듣는지…ㅉㅉㅉ
광복 후 이승만이 입국 했을때 초기에는 이승만 라인 잡은게
동아일보 김성수 이고 그에 반해 조선일보 방사장은 한발 늦어
뒤늦게 입국한 김구 라인 잡아 한독당 입당,명예직 까지 앋었다는 거
그러니 탈당 후 이승만 라인 못 잡고 조소앙 과 사회당 결성
그리고 또 탈당 후 무소속 출마,한달 후 6.25 터짐
이런일이 벌어진 기간이
1945~1950년 5년 기간
== (광복-제헌국회-이승만취임-북한정부수립-한국전쟁)
혹시 순서를 몰라서 그러시나 싶어서 ==
풉ㅋ 너 님이 장황하게 순서 적은게
1945-1950 5년 기간
- 조선일보는 김구 선생과 방응모가
아주 가까운 사이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곁에서 지켜본 바로는 어땠나.
"두 사람이 개인적으로 가까웠던 것은 사실이다. 거기엔 이유가 있었다.
해방 이후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언론계의 양대 산맥을
이루고 있었는데, 김성수의 동아일보는 이승만과 가깝게 지냈다.
그래서였는지 방응모의 조선일보는 김구 선생에게 접근했다.
환국 초기 방응모와 조선일보는 백범 선생에게 절대적 지지를 보냈다."
- 그렇다면 방응모가 한독당의 당직을 맡았을 가능성도 있지 않은가.
"그렇지는 않았다. 방응모는 당무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
그것만은 분명히 말할 수 있다.
다만 개인적으로 방응모가 백범 선생에게 도움을 준 것만은 사실이다."
- 두 사람이 개인적으로 가깝게 지낸 특별한 이유가 있나.
"방응모는 이북 출신으로 평북 정주가 고향이다.
그런 인연으로 백범 선생은 환국 이후 방응모를 소개받았다.
곁에서 지켜본 바로는 방응모가 그저 개별적으로
김구 선생을 존경한다면서 접근했던 것에 불과했다."
선우진 씨의 증언 중 방응모가 김구 선생에게 접근해
개인적으로 가까이 지냈던 배경이 나오는데,
방일영문화재단이 1999년에 발간한
『격랑 60년-방일영과 조선일보』에도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하는 대목이 나온다.
해방 전만 해도 동아일보가 남한지역에 뿌리를 둔
신문이었던 반면 조선일보는 남한보다는 북한지역에
비교적 많은 독자를 확보하고 있었다.
해방이 되고 나니 38선 때문에 이 같은 쌍벽 균형이 깨지고
조선일보가 불리한 여건에 놓이게 되었던 것이다.
"그때 그 순간엔 달랐다"를 말하고 싶은건가? 저위에 5랩은?
'99개의 잘못이 있다한들 나머지 한개까지 싸잡아 잘못이었다' 라고 보진 많아야 한다는 소리일지도 모르겠는데.
그게 맞다 한들 정작 중요하게 생각해봐야 하는건 오늘날 행해지는 99개의 잘못에 대한 게 아닐까?
'뭐가 중헌디'라는 말이 생각난다는...
뭘 알아야 변명이라도 그럴듯 하지
개승만이가 대통령되서 가장 먼저한게 공산당 잡아죽이는 거였어
어느정도였냐면 깡패들도 공산당 사회주의자들 그냥 때려잡고 다녔어 김두한도 많이 때려잡았지
그때 박정희도 남로당 당원으로 있다 깜방갔어 븅,신들
조선일보는 강점기 시절 쪽본앞잡이였고 광복후 정권잡은놈 똥꼬햙기였어 그 정권잡은놈이 6.25때는 공산당이었지
잠깐 아주 잠깐
그러다 박정희 전두환 군부독재때 지금의 권력기득권을 완성하고 지금까지 친일적폐세력으로 반국가적 행위를
자행하는 개쓰레기 집단
참고로 개승만이가 공산당 사회주의들 때려잡을때
개승만이를 구국의 영웅으로 찬양함 6.25 터지자 지만 살겠다고 서울 탈출 빤스런하며 다리폭파
그러다 김일성이가 서울 잡아먹자 바로 태세전환 그리고 다시 개승만 슬금슬금 돌아와 정권잡자
다시 찬양질 박정희가 권력잡자 바로또 햙짝햙짝
혓바닥에 광이 난다는게 학계 정설
참고로 박정희때 개독교랑 어떻게 붙어 먹었는지 다들 알지??
지금의 개독교탄생에 쪽,발이 왕이라는 놈에게 반자이 반자이 하던 빡정희가 큰 공헌을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