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기문명과 진보된 철기문명의 충돌이라고 봐야죠...
저 당시 남북아메리카에는 말도 없었죠...
2m위에서 플레이트아머를 장비한 기병은 석기 무기를 든 잉카인에게는 매우 공포스러웠을 겁니다..
거기에다 화약무기까지 있었으니...
그리고... 아즈텍이나 잉카제국은 지역적으로 문명이 일어나면서 부족간의 전면전을 통해
성장한 게 아니라 한 곳의 강력한 세력이 영역을 넓혀가면서 주변 부족들을 모조리 흡수해 가면서
노예제사회로 성장했다고 하죠...
그러니 대규모 전투같은 것은 경험해 보지 못했을 겁니다..
솔직히 아무리 문명의 차이가 4000년이 나더라도
압도적인 병력수는 극복하기 힘든 겁니다..
원거리 궁시나 투석전만 전개했어도 피사로는 전멸했을 거에요...
물론, 철기때문에 많은 희생은 있었을지언정...
두 지도자가 얼굴을 맞대고 미처 몇 분이 지나기도 전에 피사로가 대뜸 아타우알파를 사로잡아 버렸던 것이다. 피사로는 그로부터 8개월 동안이나 이 인질을 붙잡아 놓고 나중에 풀어준다는 약속 하에 역사상 가장 많은 몸값을 뜯어냈다. 피사로는 가로 6.7m, 세로 5.2m에 높이 2.4m가 넘는 방을 가득 채울 만큼의 황금을 몸값으로 받은 후에 약속을 저버리고 아타우알파를 처형하고 말았다.
아타우알파를 생포한 것은 유럽이 잉카 제국을 정복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물론 스페인의 무기가 더 우수했으므로 어차피 결국에는 스페인의 승리로 끝났겠지만 아타우알파를 사로잡은 덕분에 정복 과정이 훨씬 더 쉽고 신속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타우알파는 잉카족이 태양신으로 숭배하는 존재였고 절대적인 권위를 지니고 있었으므로 백성들은 그가 사로잡힌 상태에서 내리는 명령에도 무조건 복종했다. 아타우알파를 죽일 때까지의 몇 달은 피사로가 탐험대를 파견하여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잉카 제국의 다른 지역들을 마음껏 돌아다니게 하고 파나마에 원병을 요청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따라서 아타우알파를 처형한 후 드디어 스페인인과 잉카족의 싸움이 시작되었을 때 스페인의 병력은 전보다 막강해져 있었다.
한마디로 본격적인 전쟁은 얍삽하게 황제 붙잡고 협박하고 어쩌고... 한 그 뒤 8개월 후에나 시작했단 얘기
게다가 인터넷을 조금만 뒤져봐도 잉카군이 스페인군을 기습하여 500명을 죽이고 어쩌고, 포로를 끌고갔다느니 하는 얘기가 버젓이 나오는데... 무슨
이 글이 전쟁이야기라서 군사기술 위주로 이야기한거에요
서양에서 들여온(짭카피) 조총때문에 식겁했지만 전체적 화포의 질은 조선이 우월했으니
그때 기술 정도면 정신차리면 서구에 크게 밀릴 정도는 아닐법한 바탕이 있다는 의미로 쓴건데
님은 사회 전체적인 부분을 이야기하신듯 ㅇㅅ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