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종개수실록 7권, 현종 3년 7월 28일 기해 2번째기사, "수 명의 전남 무안 백성이 폭풍우를 만나 유구국에 갔다가 돌아오다" 제목으로 해당 내용이 있네요.
"전남도 무안현(務安縣)의 백성 남여 18명이 섬에 들어가 고기잡이를 하다가 갑자기 폭풍을 만나 표류하여 유구국(琉球國)에 이르렀다. 그 곳 사람들은 혹은 삭발을 하고 혹은 장발을 하였는데, 말이 통하지 않아 어느 나라 사람인지 알지 못하였다. 그들이 북 하나를 갖고 앞에 나와 손으로 북치고 춤추는 시늉을 하기에 우리 나라 사람들이 그 뜻을 알아 차리고 노래를 부르고 북을 치며 춤을 추니, 비로소 고려인이라 일컬었다. 그리하여 집을 만들어 거처하고 쌀을 주어 밥을 짓게 하는 등 상당히 관대한 뜻을 보였다. 오랜 뒤에 왜국 살마주(薩摩州)로 이송시켰고 다시 대마도로 옮겨갔다가 본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본몬과 내용면에서 대동소이한데, '조선인'이라고 알아본 게 아니고, '고려인'이라고 오키나와인들이 조난당한 어민들을 칭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아마도, 오키나와에는 예전부터 한반도 어민들이 여러번 조난당해 왔었는데, 오키나와 사람들은 '일본인' 및 '중국인'과 구별하여 (조선이 아니라 그 이전 왕조인)'고려인'이라고 불렀던 것 같습니다.
또한, 북을 두드리는 법이라든가 좋아하는 음악 등이,
자기들(오키나와인)과 다르면서도, 자기들을 복속시킨 일본 사쓰마인과도 다르며, 중국인들과도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당시 오키나와인은 1609년 이래 사쓰마에 복속된(琉球侵攻) 상태라서, 조난당한 사람의 국적이 어디인지 파악하는 것이 (일본인이라면 빨리 사쓰마에 보고해야 하므로) 중요했을 거라고 추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