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일 아니라는 듯이 김영감이 털어놨을 때, 박영감은 내심 가슴이 철렁했다. 회사를 나올 때만 해도 노인으로써의 삶이 이렇게 길고 지루할 줄은 몰랐다. 그나마 친구들이 없었다면 진작에 기운을 잃었을지도 모른다. 더 아쉬운 것은 김영감은 어릴 적부터 함께한 죽마고우였던 점이다. 소일거리를 함께 해왔던 노인들이 한 두 사람씩 먼저 떠날 때, 김영감만큼은 자리를 지킬 것이라 박영감은 마음 한켠에 의지로 삼고 있었다. 병원에 들어간다는 말로 보아, 정정했던 김영감 마저 건강 때문에 일주일 뒤를 장담할 수 없게 된 것이리라.
"순이가 보고 싶구먼"
"순이?"
"어 순이, 이 사람이 잊을게 따로 잊지.."
박영감이 무안하게 까맣게 잊고 있었던 이름이다. 기억을 한참 해메고서야 어릴 적에 셋이서 같이 놀았던 것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똘똘했던 순이.. 장기를 배운답시고 둘이서 끙끙대고 있으면, 그 조그만 여자애가 와서는 여김없이 훈수를 두었다. 어느 쪽 편을 더 들어주었는지는 기억에 나지 않지만, 순이가 훈수를 둔 사람이 반드시 이겼던 것 만큼은 기억난다.
"평생 얘기 안하다가 얘기를 꺼내?"
"그냥.. 이렇게 둘만 장기를 둘라니까 적적한가베"
"무튼 걔가 어찌 됐더라?"
"몸이 약했다고 들었어.. 그래서 장기밖에 둘게 없어가지고.."
"그랬구먼"
"우리끼리 둘만 해지니.. 어찌 알고 훈수를 두러 안 오더만"
이 나이가 되어서까지 몰랐던 어릴적 친구의 비보를 듣고, 박영감은 잠시 묵념을 했다. 미안할 따름이었다.
그런데..
"빙시야 거따 두면 우야노?"
두 사람은 귀를 의심했다. 그도 그럴것이, 수십년 전과 하나도 바뀌지 않는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말도 안되는 일, 아니 분명 두 노인이 추억에 흠뻑 젖어 보게 된 환상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