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세출의 시인으로 당송팔대가 중 한 사람인 소식의 호 ‘동파거사(東坡居士)’에서 이름을 따왔지요. 우리에게는 소동파라는 이름으로 더 친숙합니다.
백여 가지에 달하는 차와 술, 요리를 개발해서 《동파주경(東坡酒經)》이라는 책까지 쓴 요리전문가였습니다.
동파육도 그중 하나로 중국 음식점에서는 고급요리에 속하지요. 그가 동파육을 어떻게 만들고 먹었는지 짐작할 수 있는 시가 있습니다.
항저우의 맛 좋은 돼지고기
값은 진흙처럼 싸지만
부자는 거들떠보지 않고
가난한 이는 요리할 줄 모르네
적은 물에 돼지고기를 넣고
약한 불로 충분히 삶으니 그 맛 비길 데 없어
아침마다 배불리 먹네
그 누가 어찌 이 맛 알리오
소식, 〈식저육시(食猪肉詩)
돼지고기는 중국인들이 즐겨 먹는 대표적인 식재료지만 송나라 때만 해도 먹지 않는 고기였습니다. 대신 양고기를 즐겨 먹었다고 하지요. 소식도 중앙 정부에 몸담고 있을 때는 돼지고기를 먹지 않았을 것입니다. 1079년,
호북성의 항저우로 유배를 떠났습니다
외부와 완전히 관계를 끊고 은둔했습니다. 그러기를 5년, 항저우 동쪽 산비탈의 황무지를 사서 ‘동파’라 이름 붙이고 스스로를 ‘동파거사’라고 불렀습니다. 이렇게 다시 태어난 소동파는 호방하고 재미있는 성격에 요리까지 잘해서 어디를 가든 인기 만점이었지요. 특히 돼지고기를 즐겨 요리하고 먹은 이유는 앞서 소개한 시에 들어있습니다. 값은 진흙처럼 싼데 맛이 좋았기 때문입니다.
불교는 태생이 종교라서 정치간섭의 한계가 있었는데
유교는 태생이 정치이념이라 정치가 종교까지 같이되버리니 노답
고대 카톨릭도 태생이 종교라서 시간이 지남에따라 정치적 영향력이 점점 줄어들었는데
미친 유교는 시간이 지날수록 강해져서 다른 종교는 커녕 유교 이외의 다른 모든 생각조차 거부함
집권세력이 피지배층 억압하면서 천년만년 해먹는걸로는 유교만한게 없음
고려시대만 해도 여자들 권리가 있었는데, 오늘날 남녀문제를 유교가 만들어줌
페미니스트들은 당장 들고일어나서 유교적 이념을 때려잡아도 모자랄판인데, 오히려 그 안에서 여자의 권리를 주장함 ㅋㅋ
유교도 이미 삼국시대에 들어와서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었고 조선이 정치적으로 유교 받아들이기전까지는 노답정도는 아니었죠...경국대전에 평등상속법이라는것도 있어서 조선 중기까지도 남녀 구분없이 재산상속받았고 결혼해도남자쪽이든 여자쪽이든 선택해서 살면되고 제사도 형제끼리 돌아가면서 했었죠...이황.이이같은 대학자들도 나왔었고...근데 갑자기 조선 후기부터 중국식 유교 받아들이면서 엄격하게 바뀌죠...재산이고 결혼이고 남성 중심으로 바뀐거죠..
정확히는 성리학이 문제였고, 실리적인 훈구파까지는 괜찮았는데
성리학이라면 눈까뒤집고 숭배하는 사림파가 잡기 시작하면서 미쳐돌아감.
오히려 중국은 양명학 등 새로운 사상들이 나왔는데, 한국은 사림들이 힘을 합쳐서 새로운 사상이나 세력이 자리잡는걸 마을단위에서 원천적으로 차단하려고 노력함.
성리학 자체가 워낙에 피지배계층 억압에 특화된 미친 사상이라서 이걸 에도막부가 받아들여서 몇백년간 아주 잘 써먹음
명나라가 양명학으로 망하다뇨?
양명학은 관학이 아니었는데요.
그냥 일부 재야 학자가 만들고 받들었지
국가적인 차원에서 뭘 어쩐 게 아니란 말입니다.
오히려 양명학은 성리학보다 훨씬 진보적이고
실천적인 성격이 강한 학문이었어요.
명나라에서 양명학을 관학으로 삼았다면
어찌 됐을지 가정해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겁니다.
시조시인 노산 이은상이 어느 식당에 갔다가
<적벽부> 액자가 걸려 있는 걸 보곤
"소동파가 어떤 놈인데 그런 놈 글을 거냐"고 난리를 쳐서
떼어내게 한 적이 있답니다. 자기가 쓴 수필에 따르면요.
그런데 이은상은 친일 행적 때문에 말이 좀 있는 사람이었거든요.
그래서 후세인들에게 '지나 잘할 것이지' 하고 비웃음을 받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