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가 일제에저항하다가 폐간후 총독부에서 사람을 파견해서 관리감독해서 황군폐하 만세라는 기사가 나오는거지 그런건 쏙빼놓고 저렇게올리나 ㅎㅎ
[조선일보 역사중 발췌]
초기의 반일적 논조 때문에 1920년대만 4차례 정간되었다.
1924년 9월 신석우(申錫雨)가 경영권을 인수하면서 민족의 지도자로 추앙받던 이상재(李商在)가 사장, 신석우가 부사장, 김동성(金東成)이 발행 겸 편집인, 그리고 이사진에 안재홍(安在鴻)·백관수(白寬洙)·이상협(李相協) 등이 취임하여 ‘조선 민중의 신문’이라는 표어 아래 경영과 제작에 혁신을 단행하였다. 그뒤 신석우·안재홍·유진태(兪鎭泰)·조만식(曺晩植) 등이 사장을 맡았으나, 경영면에서 안정을 기하게 된 것은 1933년 방응모(方應謨)가 인수·운영하면서부터였다.
이 신문은 창간된 지 반 년도 못 되어 30여 차례의 기사 압수처분을 받았다. 그 후, 강우규(姜宇奎) 의사의 사형선고에 관한 대대적인 보도와 강압에 대한 조선인의 항거를 막을 수 없다는 뜻을 담은 ‘자연의 화(化)’라는 논설이 치안 방해를 선동한다 하여 총독부로부터 우리나라 민간지 등장 이후 최초로 1주일간의 정간 처분을 받았다. 이 정간이 풀리던 날 다시 “우열(愚劣)한 총독당국은 하고(何故)로 우리 일보(日報)에 정간을 명하였나뇨.”라는 논설을 9월 5일자 신문에 실어 곧바로 무기정간 처분을 받았다. 2개월 후 정간조치가 풀렸으나 경영난으로 12월 24일까지 발행을 하지 못하다가 겨우 속간하면서 1921년에는 ‘골수에 맺힌 조선인의 한’이라는 10회에 걸친 연재기사를 싣는 등 항거를 계속하여 4차까지 정간 처분을 받았고, 그 가운데 한국 신문사상 가장 긴 1년 4개월의 정간 처분을 받은 적도 있었다.
1930년대 『조선일보』는 민족지로 부를 수 없는 모습을 보였다. 변모의 원인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일제의 통제에 놓여 사실상 언론자유가 없었다. 둘째, 일제강점 이후 20여년이 흘러 지식인 사이 항일의식이 다소 무뎌졌다. 셋째, 항일투쟁 노선이 분열하며, 지식인 역시 분열하였다. 넷째, 상업성에 치우치며 언론의 사명을 잊었다. 그 결과 1930년대 들어서면 조선일보는 총독부기관지와 구분이 힘들 정도로 변모하였다. 태평양전쟁이 일어난 이후 1940년 8월 10일 지령 6,913호로 강제 폐간 당하며 총복부에서 대신 조선일보를 발행하기도했다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 방응모 사장이 납북되고, 인쇄시설도 일부 파괴됨으로써 신문 발행이 중단되었다. 수복 후 서울에서 속간하였으나 곧 철수, 1951년 2월 1일 부산에서 전시판(戰時版)을 발행함으로써 신문의 명맥을 겨우 이어가는 등 한동안 신문을 제대로 발행하지 못하였다.
전쟁때 인민군이 조선일보사를 점령하여 김일성 찬양 기사를 발행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