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습니다! 석유화학제품 까지 배제한 제품. 물론 그걸 생산하는 에너지까지는 아니지만 환경주의와 미니멀라이프 진영에선 펄프도 지양하고 세제는 밀가루 베이킹소다 솦베리(무환자열매)로 대체해서 씁니다. 그걸 실천하기 위해 기존의 멀쩡한 물건을 버리고 새로운 소비를 하는 우스운 꼴도 있지만요. 석유화학제품까지 배제한 삶, 할려면 할 수 있습니다. 약간의 모순과 딜레마는 서비스로 따라오지만요.
식물중에 과일은 먹힐의도를 갖고 유혹하는 것으로 생각되지만 그 역시 과일나무에게 직접 듣지 못했기 때문에 많은 동물들의 오해로 인한 상해 또는 살해일 지 모르죠.
포식행위라는건 이렇듯 포식자의 입장에서 받는 유혹과 자극에 의해 발생되고 완성되는 것인데 피식자가 가지고 있는 무엇인가가 포식자를 자극하는지 반대로 포식자 스스로가 알아서 자극받는 것 인지 따지기 이전에 그런 자극과 포식행위는 벌어지고 있는 현상이고 그 자체를 두고 죄를 논하면 그 어떤 포식행위도 정당할 수 가 없음.
그리고 그런 발상은 생물계를 초월한 사고로 본인이 생물계에 속한 사람이라면 완성 시킬 수 없고 논리적으로 반박 당할 수 밖에 없음. 비생물계에서는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생물계에서는 포식활동을 멈출 수 없기에...
지금 급식들이 배우는 7차 교육과정에 소개된 윤리관 중 하나로 쾌고감수성 이론이 있습니다. 우리가 공감이라는 작용을 할 때는 유추라는 논리적 과정을 거칩니다. 내가 배고플 때의 행동과 표현으로 타인의 배고픔을 짐작하는 거죠. 나와 비슷할수록 이 유추의 정확도가 높아집니다. 생물학적 사회적으로 나와의 거리가 멀거나 가까움에 따라 유추의 정확도가 달라지고 공감의 크기도 달라지죠. 그렇다면 사람은 사람의 쾌락과 고통에 가장 크게 공감할 수 있고 그 다음이 포유류가 되겠죠. 반면 식물은 거리가 꽤 멀 겁니다. 같은 포유류라도 사람의 생활권에 들어 온 개나 고양이에겐 다른 포유류보다 더 큰 공감을 하게되겠죠.
사람마다 감수성의 차이가 있어 모두가 같은 크기의 공감은 못 할지언정 각자의 윤리적 책임감에 맞게 실천을 하는 겁니다. 그리고 사회는 각 개인이 모여 구성된 조직인 만큼 사회적 합의에서 도출된 윤리적 감수성의 최저선 또한 현 시대 사회구성원의 감수성에 맞춰지게 됩니다. 채식운동이나 환경운동은 사회의 윤리적 감수성을 더욱 민감하게 하고자 하는 운동이고요. 감수성이 민감해지는 만큼 동물보호법의 테두리 안에 들어가는 동물과 동물에 대한 행위의 범주가 점차 커질겁니다. 이렇게 윤리적 책임감을 공감과 감수성으로 설명하는게 쾌고감수성 이론입니다.
채식주의자나 환경주의자들의 이론적 근거가 그렇게까지 빈약하진 않습니다. 논리적으론 현대 지성의 최첨단에 있죠. 단지 행동으로 설득을 못 할 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