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을 멀리 또 특별하게 보지만
친일은 흔하고 친숙한 각 개인 처세의 한 축이다.
우리가 학급에서 팀에서 조직에서 모임에서 말하는
대세 실세 라인 뒷배 계파 등으로 불리는
권력에 빌붙고 눈치보며 알아서 눈에 들려는 일련의 행위.
그것이 단지 정권 혹은 타국 혹은 이념 혹은 사조로
휘몰아쳤을때 우연찮게 일본이 되었을뿐이며
그 모든 상황에서 그들을 욕하면서도 한편 시기하던
대다수를 차지한 방관자가 우리의 역할이었으므로
우리가 경계할 것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발생하는
권력에 꼬여드는 무리를 욕하기보다
대놓고 저항까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그 유혹과 협박에 굴해
굴종하지는 않도록 마음과 행동을 가다듬는 것이다.
각자의 교실과 사무실에서.. 자신이 속한 집단안에서.
더불어민주당은 뿌리를 1955년 창당된 민주당으로 규정하고 매년 창당 기념 행사를 열고있다.[23] 다만 엄밀히 말하면 1955년 민주당은 1961년 5.16 군사정변에 의해 해체됐고 1960년대~1970년대 박정희 정부의 카운터 파트너였던 신민당도 1980년 5.17 내란 때문에 해산됐으며 옛 신민당 인사들을 주축으로 1985년 창당한 신한민주당도 1987년 창당한 통일민주당에 바톤을 넘겨줬다. 그리고 통일민주당은 1990년 3당 합당을 통해 국민의힘 계보로 흘러들어갔다. 따라서 계보적으로 보나 정치적인 이념의 계승으로 보나 실질적인 기원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1987년에 창당한 평화민주당, 1995년에 창당한 새정치국민회의, 노무현 전 대통령으로 대표되는 부울경 출신 민주계 인사들이 유입된 1991년에 창당된 민주당 중 하나에서 찾는 경우가 많다.[24][25]
5.16은 육군 및 해병대 주도로 이루어졌고, 해군과 공군은 제외되어 있었다. 그러나 쿠데타를 지지해 계속 공군참모총장 직위를 유지하였고, 국가재건최고회의에도 참여하였다. 박정희는 협력의 대가로 1962년 남산에 백범 광장을 조성하고 김구에게 건국공로훈장 중장을 수여함으로써 극진한 예우를 했다.
전역 후에는 중화민국 대사를 거쳐[17] 교통부 장관, 유신정우회 국회의원,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회 이사장 등 힘든 길을 걸어온 아버지와는 달리 군과 정/관계의 원로로서 순탄하게 활동했다. 덕분에 백범일지 간행 등 아버지와 관련된 각종 사업들이 활발하게 전개될 수 있었고,[18] 오늘날 김구가 가장 대표적인 민족지도자겸 독립운동가로 기억되는데 크게 영향을 끼쳤다.
민족주의 계열의 세력들은 통합에 합의해서 9월 4일 ‘한국민주당 창당준비위원회’를 구성했다. 여기에는 원세훈(元世勳)・조병옥 등의 고려민주당(高麗民主黨)과 김병로・백관수(白寬洙) 등의 조선민족당(朝鮮民族黨), 백남훈(白南薰)・장덕수・윤보선・장택상(張澤相)・허정(許政) 등의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이 참여했다. 이들은 충칭[重慶]의 임시정부가 유일한 정권 수임 기관이 되어야 한다는 임정봉대론(臨政奉戴論)을 주장하며, 9월 8일 “우리는 독립운동의 결정체이고, 현재 국제적으로 승인된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에 소위 정권을 참칭(僭稱)하는 일체의 단체 및 그 행동은 그 여하한 종류를 불문하고 이것을 단호히 배격한다”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리고 9월 16일 서울의 천도교회관에서 100여 명의 대표자들이 창당대회를 열어 정식으로 한국민주당을 창당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한국민주당 [Korea Democratic Party, 韓國民主黨]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한민당은 친일 부종세력이다 O 한민당이 해방 이전 국내에서 머물던 엘리트(지주같은)들이 다수인데 그들이 친일에 부역하지 않고, 좋은 삶을 유지할 수 있었겠음? ㅋㅋㅋ
민주당은 한민당이 뿌리이다 O 1955년 민주당 자체가 구 한민당 출신이 다수.
김신 장군이 민주당 좋아했으면 516가담했겠음?
박정희가 속한 만주군 자체는 어용적인 군대라서 형식상의 군대였음. 애당초 만주군 자체가 항복한 만주군벌 부대 위주로 편성된 군대라 일본 관동군에서도 별로 신뢰하지 않던 부대임. 그리고, 중국 팔로군이 뭔 조선 독립군? 오히려 국공내전에 더 열심히 참여했던게 바로 공산군들임. 항일은 형식적이었고, 만주는 박정희 이전에 싹 다 정리된 상태였음. 오히려 만주 일본군은 소련군에게 무장해제 당했음.
국민의 힘의 뿌리인 자유당에 대해서 검색 해보시면 기절하시겠네. ㅋ
선생님이 언급하신 부분은 뉴라이트를 근간으로 하는 친일역사연구에서 주장하는 것이죠.
어쩔 수 없이 근대화를 위해서 일본과 합병은 좋은 것이고 합법적이었다는..........
김신장군은 공군이었습니다. 쿠테타 이후 동조한 것이지 쿠테타 정권에 충성하고 쿠테타에 가담한게 아닙니다. 당시 많은 단체들이 각자의 이익과 생존을 위해서 그러했지만
장준하 선생님은 이를 거부했다가 피살되었죠.
그리고 박정희는 만주군 당시 엘리트였다고 하죠. 당시 증언들은 싹다 무시하고 자리만 차지했다는 논지는 근거가 상당히 부족하다고 하네요.
또한 당시 독립군들은 각 국가의 지원을 받기 위해서 민주와 공산 진형으로 나뉘었고
이에 많은 지원을 받아서 항전했습니다. 그러한 진형에 속하지 않았을때에는 일본에 이어
중국, 소련에게도 공격을 당했었죠.
독립군 내에서도 사회주의와 민주주의에 대해서 많은 논의가 있었지만 항일이 우선이라는 것에 공감했다고 하죠. 해방 이후 사상적인 문제가 불거지긴 했지만요.
윤봉길 의사의 의거 전까지 국민당에서도 독립군을 국민당 산하 부대로 하려고 했었죠.
윤봉길 의사의 의거 이후로 국민당의 많은 지원이 있었다는 것만 보아도 당시의 상황을
예측할 수가 있다고 봅니다.
독립군은 연합군에 참전하였고, 공군지원과 스파이 등에 자원했으며, 많은 일본군 정보를
연합군에 제공를 하여 태평양 전쟁에 많은 공훈을 쌓았습니다.
이건 미국, 영국에서도 인정한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