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는 아니구요. 붕당정치가 발달하고, 여기서 밀려 난 세력들이 지방으로 가서 기존의 지배층의 이념이 성리학이 일반 서민들에게 까지 미치게 되고, 임진왜란으로 인한 사회적 혼란을 성리학적 이념의 강화로 대체하면서, 일반 서민들에게 이런 제도가 강요된 것이라고 알고 있어요. 18세기라기 보다는 17세기에 이런 제도가 등장하고 강화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유교, 특히 교조적이라고 할 수 있는 성리학이 뿌리박히는 조선 중기 이후로,
모든 사회, 경제, 문화에 유교적 사상이 지배하게 되었죠.
이전까지는 유산은 모든 자식들에게 거의 균등하게 상속되었고,
딸도 상속 받았을 뿐만 아니라 족보에 외손자 이름까지 올라갈 정도였음.
조선중기 연산군을 몰아낸 사림이 지배한 중종 이후부터
유교적 가치관이 모든 사회를 지배, 억압하면서,
유교 최고의 가치인 효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제사문화가 강조되었고,
먹고 살기도 빠듯한 상황에서 제사를 준비하려면 많은 제화가 필요했기에,
장손에게 제사를 전담토록 함과 동시에,
이를 뒷받침 할 수 있는 재산을 거의 단독으로 상속케 한거죠.
이 제사가 얼마나 중요했냐면,
전란으로 피난 갈때 다른 무엇보다도 제기만은 잃지 않도록 잘 묻거나 숨긴 후에 피난했다고 함.
또한 제주(제사를 주제하는 사람-장손)가 중요하기 때문에 처자식의 안위보다 장손인 자신의 목숨 보존을 우선해야 조상에 죄를 짓지 않는거라 했음. 그래서 6.25때만 봐도 가장이나 장손만 남쪽으로 피난한 경우가 많았던거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