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진격의 거인(進撃の巨人)」이라는 애니메이션이 화제입니다만, 번역한 제목이 아무래도 어색합니다. 일본어 'の(no)'를 관형격 조사 '-의'로 단순히 바꾸고 일본어 어순 그대로 직역한 탓에 한국어 어법과 잘 맞지 않습니다.
'進撃の巨人(Shingeki no Kyojin)'을 '진격하는 거인'이라고 풀어쓸 수 있는데, '거인의 진격'이라고 어순을 바꾸어 번역하면 한결 자연스러우면서 일본어 원뜻에 더 가깝기도 합니다.
이건 영어로 번역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進撃の巨人' 영어 (부)제목으로 'Attack on Titan'이라고 따로 있지만, 영어로는 'Advance of the Giants'이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관형격 조사 '의'는 언제부터 썼을까?
내(나-이), 네(너-이), 제(저-이) 등에서 살펴볼 수 있는 것처럼 한국어에서 관형격 조사는 예로부터 'ㅣ'만 썼으나 조선 후기에 '의'가 나타나고, 개화기 지식인들이 일본어 조사 'の(no)' 용법을 흉내 내고, 특히 한글학회 우리말큰사전에서 '내'를 '나의' 준말이라고 언어 변천 순서를 무시한 엉터리 설명을 하면서 지금처럼 일본어식 표현이 굳어졌습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내 집', '내 사랑' 등이 맞는 말이고, '나의 집', '나의 사랑' 등은 일본어를 옮겨 쓰면서 생긴 말입니다. 언어에도 리듬이 있습니다. '내 집', '내 사랑'은 자연스럽게 이어서 발음할 수 있으나 '나의 집', '나의 사랑'을 발음할 때는 리듬이 끊어집니다.
다른 예를 들면, '그녀'도 개화기 이후 신소설 때 일본어를 번역해서 만든 말이고, '그남'이라는 말이 어색한 것처럼 '그녀'도 우스꽝스러운 표현입니다만, 계속 써온 탓에 별로 어색하지 않다고 여길 뿐입니다. 여류 작가라는 말을 요즘 거의 쓰지 않을 정도로 여성 작가 수가 많아졌고, 한국어 바로 쓰기 흐름에 맞추어 방송에서도 '그녀'라고 하지 않고 '그'라고 합니다.
일본어는 띄어쓰기가 없고, 조사 'の'가 없으면 말이 안 되지만…
일문은 한글과 다르게 띄어쓰기가 없습니다. (한문도 그렇죠.) 일본 가나 사이사이에 한자가 있고, 특히 조사 'の'가 자주 오기에 읽을 때 불편하지는 않습니다. 외국어나 외래어를 쓸 때는 'Lady Gaga'를 가타카나로 'レディー・ガガ'로 쓰는 것처럼 띄어쓰기 대신 가운뎃점(·)을 따로 넣기도 합니다.
'서울 한강 다리'를 일문처럼 적으면 '서울の한강の다리'입니다. 이걸 일본어 번역 투로 다시 옮기면 '서울의 한강의 다리'가 되는데, 조사 '의'가 두 번 이어서 오니 확실히 어색합니다.
일본어에서는 조사 'の'가 없으면 말이 안 되지만, 한국어에서는 관형격 조사 '의'가 없어도 말이 됩니다. '서울의 한강의 다리'로 쓰는 건 어색하고, '서울 한강 다리'라고 하는 게 훨씬 자연스러운 한국어 표현입니다.
어째서 그럴까요? 관형격 조사 '의'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한국어에는 원래 없는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집'이나 '나의 집의 문'이나 조사 '의'를 불필요하게 쓴 어색한 말이지만, 두 번 이상 쓰는 건 드물기에 더 어색하다고 느끼기 마련입니다.
일본어와 한국어 어순이 항상 같지는 않다.
세계 여러 언어를 유사성으로 가려서 어족으로 묶을 때 한국어를 고립어로 따로 보거나 그래도 가장 비슷한 일본어를 한국어와 같은 어족으로 분류합니다.
Bing이나 Google 일한, 일영 자동 번역기를 돌려 보면, 일한 번역보다 일영 번역이 오히려 더 잘 됩니다. 비슷한 언어라고, 어순이 거의 같다고 항상 번역이 더 잘 되는 건 아닌 모양입니다.
일한 번역에서도 어순 그대로 직역하기보다 단어 순서를 살짝 바꾸면 훨씬 자연스러워집니다.
이를테면 '北の国から(Kita no Kuni kara)'에서 '北の国'를 '북의 나라'나 '북쪽의 나라'라고 번역합니다만, 자연스럽고 어색하고를 떠나서 일본어 원뜻이 과연 잘 전달되는 번역인지 의문입니다. '북의 나라'를 머릿속에서 일본어로 다시 번역하여 '北の国'로 이해하지 않고, '북의 나라' 그대로 보면 북쪽 나라인지 나라 북쪽인지 애매합니다.
그렇다면 '北の国(Kita no Kuni)'를 어떻게 번역해야 일본어 원뜻을 살리고 자연스러운 한국어가 될까요? '북의 나라', '북쪽의 나라', '북쪽 나라' 등은 모두 일본어 원뜻과는 좀 다릅니다. '北の国'는 한국이나 일본 북쪽에 있는 몽골, 러시아, 캐나다 같은 북쪽 나라를 일컫는 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북쪽 나라'라고 번역하면 뭔가 이상하면서 부족합니다.
한국어에 '남도(南道)'라는 말이 있습니다. 경기도 이남으로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제주도 등지를 뜻하지만, 주로 남해안에 접한 전라도와 경상도 일대를 말합니다. 목포, 여수, 진주, 밀양 등지를 여행할 때 남도 여행이라고 하지 충청도 온양온천 갈 때는 아닙니다.
정치, 외교, 역사 문제로 잃어버린 땅이 되었지만, '북도(北道)'도 있습니다. 북도는 경기도 이북이라는 뜻이지만, 백두산 북쪽 땅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바로 옛 간도 지방입니다.
'北の国(Kita no Kuni)'도 일본 북해도(北海道), 즉 홋카이도를 일컫는 말입니다. 일본 북쪽 나라, 러시아 극동 지역을 말하지 않습니다. '北の国'를 일본어 원뜻을 살리면서 자연스러운 한국어로 옮기면 '일본 북도'가 올바른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의역하면 '북쪽 고향', '북쪽 땅' 등으로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쓸데없이 흔한 일본어식, 영어식 표현
'다섯 개의 손가락', '한잔의 커피'처럼 '-의'를 남용하는 걸 자주 접할 수 있는데, 어디까지나 어색한 번역 투로 부드럽고 세련된 한국어 표현이 아닙니다. '손가락 다섯 개', '커피 한잔'이라고 해야 맞습니다.
영어로 'a pair of gloves', 'a carton of milk' 등은 '장갑 한 켤레', '우유 한 통'이라고 번역하는 게 맞지 '한 켤레의 장갑', '한 통의 우유'라고 옮기는 건 어색합니다.
이 글 처음에서 '進撃の巨人(Shingeki no Kyojin)'을 '진격하는 거인'이라고 하지 않고, 한국어로는 '거인의 진격', 영어로는 'Advance of the Giants'라고 저는 번역했습니다.
관형격 조사 '의'를 무조건 쓰지 말자는 얘기가 아닙니다. 적당히 가려서 잘 쓰면 표현을 더 풍부하게 할 수 있습니다. 에세이에서 종종 볼 수 있는 '겨울의 자취' 같은 표현은 어떤가요?
'진격의 거인'이 직역에 따른 어색한 말이라고 '진격 거인'이라고 하면 무슨 중국 무협지 제목처럼 되고, '진격하는 거인'은 오히려 'Advancing Giants' 같은 영어 제목을 한국어로 번역한 듯한 뉘앙스이고, '거인의 진격'이 정확하면서 그나마 자연스러운 번역이라고 봅니다.
어떻습니까? 일본어 조사 'の'는 일한 번역에서 가장 자주 겪는 걸림돌이기도 합니다. 영어이든 일본어이든 외국어 조금 할 줄 안다고 번역할 수 있는 게 아니고, 한국어를 잘해야 번역을 제대로 할 수 있는 걸 새삼스레 다시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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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은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하고, 많이 써보아야 합니다만, 올바른 지침도 필요합니다. 이수열 선생님 저 「우리말 바로 쓰기」, 국립국어원 편집 「우리말 우리글 바로 쓰기」 같은 책이 있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