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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ch] 박정희, 일본 식민사관을 뒤집을려고 경주 발굴을 지시
등록일 : 11-05-11 17:11  (조회 : 11,406) 글자확대/축소 확대 축소 | 프린트

박정희, 일본 식민사관을 뒤집으려고 경주 발굴을 지시[05/10]

역사 바로세우기는 광복 이후 대한민국의 오랜 과제였다. 50년 전인 1961년 문화재청의 전신인 문화재관리국이 설립되면서 문화유산으로 한반도의 역사를 증언하는 시대가 열렸다.

제2대 문화재관리국장을 지낸 정재훈(73·사진) 한국전통문화학교 석좌교수는 “일제시대엔 일본의 문화재만이 국보가 될 수 있었다. 조선 땅에선 일본 역사에 부합하는 것만 사적(史蹟)으로 지정됐다. 박정희 대통령은 식민사관을 뒤엎기 위해 경주의 고고학적 발굴을 지시했다”고 증언했다. 중앙일보가 문화재청 50년을 기념해 마련한 인터뷰에서다.

정 교수는 “문화재관리국이 생기기 이전 우리 문화재를 설명하는 가장 오래된 책이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였다. 사진만 있고 설명이 빈약했다. 일제가 주도한 발굴에는 조선인은 한 사람도 낄 수 없었다”고 말했다.

문화재 정책은 박정희 전 대통령 재임 시절 탄력을 받았다. 박 대통령은 우리나라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기 위해 경주종합개발을 전략적으로 택했다. 71년 수립된 경주 개발을 위해 세계은행(IBRD) 차관을 들여와 288억원을 투입했다. 경부고속도로 438㎞ 건설에 429억원이 들었던 시대였다.

천마총·황남대총·안압지 등 엄청난 발굴이 이어졌다. 신라 문화의 높은 수준이 한눈에 드러났다. 일례로 황남대총에서만 철기 수천 점이 쏟아져 나왔다. 천마총의 천마도, 여러 고분에서 쏟아져 나온 황금 유물은 한민족의 자긍심을 고취시켰다.
 
유물은 거짓말하지 않았다.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4세기 후반에 일본이 한반도 남부 지역을 지배했다는 일본 측 주장)의 흔적은 우리 땅에서 나오지 않았다. 출토 유물은 가장 먼저 일본에 가져가 전시했다. 일본이나 중국과는 다른 우리만의 5000년 역사가 있음을 보여주려는 의도였다.

정 교수는 “박정희 대통령은 울산에 공업단지, 포항에 제철소를 넣고 해외 바이어가 오면 경주에서 묵도록 지시했다. 우리가 공업만 하는 나라가 아니라 신라 때부터 뛰어난 제련 기술이 있었던 나라임을 보여주려는 전략이었다”고 설명했다.

이경희 기자


중앙 일보 2011/05/10
http://japanese.joins.com/article/article.php?aid=139810&servcode=400

사진
http://japanese.joins.com/upload/images/2011/05/20110510101428-1.jpg


 

2011/05/10(화) 15:57:35.20 ID:u4wikiLG
>일본이나 중국과는 다른 우리만의 5000년 역사
일본이나 중국과는 다른 우리의 「굴욕의」 5000년의 역사가 맞는거다.

2011/05/10(화) 15:59:35.23 ID:t3l8HP0E
우선은 그 연대의 유골과의 DNA 감정을 권장한다.

2011/05/10(화) 16:00:41.68 ID:d9npR2ft
박정희 재평가의 하나인가? 독재자를 좋아하는가?

2011/05/10(화) 16:01:08.38 ID:pYxQCtUm
최초의 전방 후원분은 히미코의 무덤이라고 말을 듣고 있는 하시하카(箸墓) 주변이었는지
한반도 남부의 전방 후원분은 그 수세기 후에 출현하고 있다
한국인은 여러가지로 변명하고 있지만
(역자주) 1. 히미코 : 일본 고대 야요이[彌生] 시대의 무녀(巫女)로 야마타이국[邪馬台國]의 여왕으로 추대되어 일본 역사 상 최초의 여왕이 되었다. 당시 소국들 간의 갈등을 수습하고 중국 및 한반도와 친선관계를 맺었다고 전해진다.
2. 하시하카(箸墓) : 일본에서 발견된 전방후원분중 가장 오래된 것은 나라(奈良)縣 하시하카(箸墓)고분이나 이고분은 3세기말경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전방후원분이 북한에서도 발견되었는데 발견된 곳은 압록강 남쪽 기슭의 자강도초산과 자성(慈城)으로 초산(楚山) 고분은 하시하카 고분보다 시대적으로 2백여년이나 앞선 것으로 추정된다.

2011/05/10(화) 16:01:59.02 ID:7phoT2jB
춍에 있어서 문화나 역사는 겨루는 것이다.
완전히 이해하기 어렵다…
그리고, 자주 우위성이라던지 지껄이지만, 승부만이 평가 기준인가? 춍에게는

2011/05/10(화) 16:02:17.17 ID:vmEUfpFg
>임나일본부설(4세기 후반에 일본이 한반도 남부 지역을 지배했다는 일본측 주장)의
>흔적은 한국의 땅에서는 나오지 않았다.
일본의 매장 방식의 고분이 발견되고 있지 바보야

2011/05/10(화) 16:03:40.55 ID:rtfiK1lb
같은 셋집에 살고 있던 전의 거주자의 실적을 자신의 실적이라고 우긴다
바보 춍씨의 생각은 역시나 입니다

2011/05/10(화) 16:04:51.59 ID:Y/Eb0XuZ
이와테에서 카고시마까지 존재하는 전방 후원분이 한국 남부 밖에 없는 것은 어떻게 생각해도 일본인이 진출했었기 때문에 조선 북부에는 전혀 존재하지 않아요

2011/05/10(화) 16:07:58.28 ID:DfoKqY8c
대체로 5000년은
세계가 인정하지 않는 것

2011/05/10(화) 16:09:01.31 ID:u53wILon
>임나일본부설(4세기 후반에 일본이 한반도 남부 지역을 지배했다는 일본측 주장)의
>흔적은 한국의 땅에서는 나오지 않았다.
백제왕의 석실에는 일본에서 부르는 이름으로 이름이 쓰여지지 않았는지?

     2011/05/10(화) 18:25:22.84 ID:W7EN9Udz
     시미키시인 무령왕이군요.
     간무 천황의 외가의 선조 같습니다.
     (역자주) 백제의 가수리왕(개로왕)이 동생인 곤지에게 ‘너는 일본으로 가서 천황을 섬겨라’고 했다. 이에 곤지가 ‘원하건데 임금님의 부인을 내려 주시고 난 후 저를 보내주십시오’라고 했다. 가수리왕은 임신한 부인을 곤지와 결혼을 시킨 뒤 ‘지금 나의 아내는 이미 아기를 낳을 때가 가까워졌다. 만일 일본으로 가는 도중에 아기를 낳게 되면 부디 같은 배를 태워 속히 돌려보내라’고 했다. 곤지는 일본으로 출발했고, 임신한 부인은 쯔꾸시(筑紫)의 카가라노시마(各羅島·加唐島)에서 아이를 낳았다. 그래서 아기의 이름을 시마키시(島君·섬의 임금님)라고 했다.”

2011/05/10(화) 16:11:03.50 ID:if3+DlQp
5000년 전부터 이렇게 바보같았던가.

2011/05/10(화) 16:13:14.33 ID:czoKQK6W
> 포항에 제철소를 건설해
돈도 기술도, 전부 일본이 낸 것이지만,

2011/05/10(화) 16:13:47.51 ID:wlpB36Sa
어쩐지 굉장한 아이러니한 것이 널려있는 기사지만···
이것으로 기분이 풀렸는지?

2011/05/10(화) 16:15:54.52 ID:4qNet4Jt
이 사람의 평가 요리조리 바꾸지 말아라
몇년전인가에는 친일로 인정되어었고
그 전에는 경제성장의 주춧돌을 쌓아 올렸다고 평가되기도 했고

2011/05/10(화) 16:16:59.58 ID:eGfYdbal
아무튼~역사를 Koreate인가

2011/05/10(화) 16:19:31.54 ID:2UGfsFZ3
우리나라 기원이 새로운 형태
지금 여기에 「우리나라 사관」이 탄생했습니다

2011/05/10(화) 16:19:31.69 ID:4GqvIM8v
>한국의 땅에서는 나오지 않았다
나왔지만, 사정이 좋지 않기 때문에 묻어버렸다고 하는 한심한 사실.

2011/05/10(화) 16:22:27.73 ID:JgKy+trG
어떻게하던 좋지만 일본이 없으면 한국은 존재하지 않는다.
당시의 북쪽과의 경제 격차는 확연하게 있었다.
전쟁이나 경제에서는 큰 것에 정복되는 것이 상식.
큰 나라인 일본이 한국의 국력에 많은 영향을 준 것은 숨길 수 없어.

2011/05/10(화) 16:23:36.83 ID:MhXaVFsM
그리고, 저 합성 사진은 뭐야?

2011/05/10(화) 16:28:03.19 ID:YkOA42YQ
5000년의 역사의 증거는?
그렇게 역사 있을 리 없는 한반도
조선의 역사는 속국의 역사

2011/05/10(화) 16:31:44.40 ID:Nd/v2BDW
역사 발굴에 관해서는 일본측도 너무 잘난듯 한 일을 말할 수 있는 전례가…

2011/05/10(화) 16:32:08.05 ID:J6Gqpude
내지와 조선에서는 시행되는 법률이 달랐으니까
>일제시대에는 일본의 문화재만이 국보가 되었다
는 잘못된 것으로, 내지의 국보 보존법에 상당하는 조선보물 고적 천연기념물 보존령이
(다만 내지의 국보 보존법은 후자보다 후에 시행)
총독부로부터 나와 문화재 보호를 하고 있었다

>임나일본부설(4세기 후반에 일본이 한반도 남부 지역을 지배했다는 일본측 주장)의
>흔적은 한국의 땅에서는 나오지 않았다.
고분이라든지 무기라든지 지천으로 나오고 있고, 조선 전통의 환두칼도 가장 낡은 형태는
지금의 하북, 랴오닝성 근처로에서도 나오고 있는 거 아닌가

2011/05/10(화) 16:38:22.96 ID:Y/Eb0XuZ
원래 식민지 사관이라든가 말하지만, 고작 30년 정도로 역사가 바뀌지는 않지
아무것도 없는 나라였기 때문에 겨우 30년만에 일본에게 말끔하게 치워 없어져 버렸던 거 뿐이야
인도는 200년 이상 영국의 손으로 희롱해졌지만, 역사가 바뀌었어?
중국도 똑같이 동북부는 일본만이 아니라 러시아에도 점령되고 있지만 역사 바뀌었어?
원래 뛰어난 역사가 없었다.
단순한 통과하는 길, 차도입명을 위한 가는 길에 지나지 않았다
(역자주) 차도입명(借道入明) :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중국(당시의 명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조선에 길을 빌려달라(借道)고 억지를 부리고 조선을 침공한 명분

2011/05/10(화) 16:42:52.44 ID:Y/Eb0XuZ
한국사전은 1/3이 일본어에서 유래
원래 그 단어의 의미에 해당하는 단어가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그렇게 되었을 뿐

2011/05/10(화) 16:44:31.66 ID:UChHew/N ?2BP(11)
종전 직후의 조선 진주군의 일을 알고 있을까?
4000명 이상의 일본인 시민이 학살되었어, 그런데도 여태껏 피해자이면!!
이것은 재일 조선인의 사이에서는 터부가 되어 있는 일이다.
일본이 포츠담 선언을 받아 들이면 일본 각지에서 부녀 폭행, 절도, 폭행, 살인, 약탈, 경찰서의 습격, 공공기관에의 습격, 토지 건물의 불법 점거, 철도나 음식점에서의 불법 행위 등과 같은 조선인에 의한 범죄가 다발했다.
자칭 「전승 국민」(정확하게는 전승 국민은 아니다)이다고 주장하면서, 스스로를 「조선 진주군」이라고 자칭해 각지에서 무리지어 날뛰는 사건을 일으켰다.
연합군총사령부의 자료에 있는 것만으로도 최저 4000명의 일본인 시민이 조선 진주군의 희생이 되어 살해되었다고 여겨지고 있다.
많은 설에서는 1만명 이상이었다고도 말해지고 있다.
이래도 피해자인척인가, 재일 조선인 범죄자 모두가!!!!!!!!!!!!!!

2011/05/10(화) 16:46:51.64 ID:GPvwJa9c
중앙일보로부터 이런 뉴스가 나온다 라는 것은 다음의 대통령은 박으로 결정인가

2011/05/10(화) 16:49:11.97 ID:JUYi+4jL
>>일제 시대에는 일본의 문화재만이 국보가 되었다
그러한 사실은 없습니다.

2011/05/10(화) 16:50:47.69 ID:WFoQP9Qu
이 인물은 얼마 안되는 뛰어난 지도자야.
그 나라는 영리한 독재자가 아니면 발전할 수 없었기 때문에.

2011/05/10(화) 16:53:05.66 ID:JUYi+4jL
>>일제가 주도한 발굴에는 조선인은 한 명도 포함되지 않았다
당연히 발굴한 것을 훔쳐 팔아 치우는 녀석에게 맡길 수 없지.

2011/05/10(화) 16:57:10.00 ID:Y/Eb0XuZ
조선인과 백제가 같은 민족이라면, 왜, 백제왕은 일본에 도망쳐 왔는지?
코마자스코나 背奈福徳라는 고구려 왕족이 일본에 도망쳐 왔는지?
(역자주) 1. 고약광(高若光 : 高麗若光) : 보장왕의 아들 일명 코마왕 쟈코오(高麗王若光), 또는 코마자스코(高麗若光)라고 하며 현재 코마(高麗)씨의 시조라고 한다
2. 복덕(福徳) 고구려 보장왕 때의 장군으로 668년(보장왕 27) 당나라 장군 이적(李勣)이 이끄는 당군에 의하여 고구려의 평양성이 함락되고 고구려가 멸망하자, 일족을 거느리고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망명 후 고구려인들이 집단으로 거주하고 있는 무장국(武藏國) 고려군(高麗郡) 지역에 터전을 잡았으며, 성씨를 배나(背奈)로 바꾸었다.
그의 후손들은 일본조정의 요직에 진출하여 손자인 복신(福信)은 산위종삼위 고창조신(散位從三位高倉朝臣)으로 봉직하다 789년에 81세로 죽었다.

2011/05/10(화) 16:57:27.66 ID:pYmy3KC+
뭐, 한국의 역사감은 그런 것이겠지.
자신들의 무례한 것은 보지 않았던 것으로.

2011/05/10(화) 16:58:17.71 ID:lnb74L8I
한국의 역사 교과서.
http://livedoor.2.blogimg.jp/newskorea/imgs/d/2/d26c570f.jpg
아시아는 거의 한국이 지배.
(역자주) 이것을 한국역사책이라고 믿고 있는 멍청이가 아직 있네요.

2011/05/10(화) 17:01:47.15 ID:JUYi+4jL
>임나일본부설(4세기 후반에 일본이 한반도 남부 지역을 지배했다는 일본측 주장)의
>흔적은 한국의 땅에서는 나오지 않았다.
유적과 일본 지나 고구려의 문헌이 보기 좋게 일치한 세계사적으로도 드문 예야.

2011/05/10(화) 17:02:26.34 ID:u8shUXzE
반도에는 전방후원분 수십기 있던 것 같지만 이 이야기는 모르는 체 하네.

2011/05/10(화) 17:07:29.41 ID:XQ4PjpbT
반도에 있던 일본 정부의 존재는 중국의 고서에도 실리고 있었던 아닌가?

2011/05/10(화) 17:11:18.04 ID:P2qV7klP
박정희는 한국이 발전하는 기초를 굳힌 대통령이야.
군사 정권으로 독재자였지만.
조선 민족에게는 드물게, 일본인의 교육(육군 사관 학교 출신이고)을 받은 인물이지만, 국가라고 하는 개념에 대해 세련된 생각을 가지고 있던 인재였다.
일본이나 미국에서 한 원조금을 인프라라고 하는 형태로 국민에게 전화하고,
경제발전이나 국제사회에의 참가에 진력했다.
그러나, 북한에서 보면 역시 박대통령은 방해였던 것 같고, 일본내에서 교화한 재일 한국인을 이용해 암살시킨 거지.

     2011/05/10(화) 17:16:57.29 ID:3GnNYGUC
     재일 조선인 사주해 암살하려고 했지만, 실패하고 아내가 죽었다.
     박이 죽은 이유는, 아마 나카가와 쇼이치 실각과 같다.
     직전의 교섭으로 미국측 담당자가 매우 초조해 했다.
     그리고, 머지않아 KCIA에 의한 암살이니까.
     (역자주) 나카가와 쇼이치(中川昭) 는 홋카이도 출신의 일본 정치인으로 G7회의에 참가했다가
     기자회견에서 횡설수설로 인하여 사임한 거물 정치인이다. 10월 4일 자택 2층 침실에서 사망
     한 채로 발견되었다. 죽음에 대해서는 xx과 타살 등 설이 분분하다.

2011/05/10(화) 17:11:30.73 ID:IG1XVlcG
고대 중국에 의한 식민지 문화를 자랑해서 어떻게 한다

2011/05/10(화) 17:17:36.09 ID:G7G1ANpX
>역사를 바로잡는 것은 광복(해방) 후의 대한민국의 과제였다.
여기가 한국의 역사 기점이니까
사실은 일본은 아닌 어느 나라로부터 독립했는가
진짜 독립의 연월일은 몇 년의 몇월 몇일이었는가
거기로부터 진실을 가르치자

2011/05/10(화) 17:25:13.75 ID:8uMImYQA
「속국의 역사는 없다」 「병합 된 역사는 없다」라고 주장하지 않으면 안되겠지
더 훌륭한 한국사를 창조할려면

2011/05/10(화) 17:25:41.87 ID:lnb74L8I
옛 지도이니까 축척이 이상해도 허락하자.
그리고, 이쪽은 근년의 지도다.
http://livedoor.2.blogimg.jp/newskorea/imgs/3/a/3a839aa6.jpg

     2011/05/10(화) 17:37:18.87 ID:eSOGaTRb
    이것은 일본인의 컬럼였던가•••
    혐한 초딩들에게는 기분 나쁘겠네.

2011/05/10(화) 17:33:18.09 ID:ylljrG+Y
그러니까, 그 신라의 제4대 국왕은 일본인이야.
일본인이 국왕이 될 수 있는데 춍이 위였다는 있을까 바보 춍들.

     2011/05/10(화) 17:38:05.08 ID:3GnNYGUC
     그 국왕의 성이 박이었다던가····

2011/05/10(화) 17:35:09.99 ID:TpcfjMLx
고분은 없었던 갓으로 하고 있는지
이런 일이니까 젊은이가 해외의 영어권에 내서 알리고 싶어하지.

2011/05/10(화) 17:44:05.04 ID:YMUZ9lOE
조선에 고고학같은 건 없었고, 당연히 고고학자도 없었다. 대학도 일본이 만들 때까지는
춍의 유학(儒学)의 망상대학 밖에 없었다. 당연히 발굴은 일본인이 했고, 국보의 지정의 제도
까지 만들어 보호해 주었다.

2011/05/10(화) 17:44:45.98 ID:1h0Vtv++
>제2대 문화재관리국장을 지낸 정재훈 한국전통문화학교 석좌교수는
>“일제시대엔 일본의 문화재만이 국보가 될 수 있었다.
>조선 땅에선 일본 역사에 부합하는 것만 사적(史蹟)으로 지정됐다."
똥같은 이승만이 그런 것 허락할리 없지

     2011/05/10(화) 17:47:22.91 ID:3GnNYGUC
     서울의 남대문이 국보가 된 이유를 당시의 내무 관료가 수기에 남기고 있다
     “조선에 아레 이상 훌륭한 건물이 없었습니다··”

2011/05/10(화) 17:46:01.68 ID:b5BNc/eX
>「일제가 주도한 발굴에는 조선인은 한 명도 포함되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그것은 단지 조선인안에 고고학이나 발굴을 할 수 있는 기술자나 전문가가 없었던 것 뿐···

2011/05/10(화) 17:53:48.78 ID:r5VeHmN3
거짓말에 거짓말을 덧붙여 거듭하고 전세계로부터 비웃음받아도 날조는 멈추지 않는다.

2011/05/10(화) 17:54:09.96 ID:Vso6wnrQ
조선은 일본보다 먼저 영국으로부터 조선(造船)이나 근대적 군대를 도입했다구.
그러나, 일본쪽이 먼저 조선(造船) 국산화를 완수해, 조선(朝鮮)은 일본으로부터 군함을 수입하는 사태가 되어 있었다.
어째서 그렇게 되었지····.

     2011/05/10(화) 17:57:58.09 ID:CGItGPm5
     중국인이나 일본인도 처음은 사거나 했지만
     구조를 이해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조선은 그대로 사용하려고 밖에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2011/05/10(화) 17:58:33.22 ID:3GnNYGUC
     일본에는 밖에서 본 것만으로 내용을 추측해 만들 수 있는 직공과 제공되는 자본이 있었지만,
     조선에는 그러한 소양이 있는 인간이 없었고, 위정자도 쵸우센진이었다.

2011/05/10(화) 17:57:13.38 ID:Ib0j9N4p
임라의 조사하는데 경주 발굴은 바보같은 짓이지.

2011/05/10(화) 18:02:47.40 ID:/kFrr2ue
조선수군은 진관 체제를 토대로 경남, 통영에 위치한 통제영을 최고 지휘 기구로서 경상·전라·경성·강원·충청도 등에 수군기지를 설치해 해안 방어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1883년 12월 이러한 기존의 수군체제의 대신을 하기 위해서 인천 부평에 통제영의 기능을 수행하는 기연해방영을 설치해 민영목를 기연해주 경호에 임명합니다. 기연해방영 부하에게는 강화에 해연총제영을 만들어 강화 우수 및 나라시대의 관직을 겸하는 해연총재사가 경기 연해 및 인천 연안의 해안 방어를 총괄하도록 했습니다. 경기에는 해군영과 총제영 학당도 설치되어 해군 사관을 양성하는 계획을 세웠습 니다.
1892년 12월 고종은 근대 해군 교육을 실시하기 위해서 영국 총영사에게 해군 교관 파견을 요청해1893년 3월에는 해군 학교 설치령을 반포합니다. 통제영 학당은 지금의 강화도 강화읍 갑곶니에 세웠다고 추정됩니다.
1893년 9월부터는 15세이상 20세이하의 학생 38명과 수병 300명 정도를 모집해 정식 개교 후 훠  치선(W. du F. Hutchison)(으)로부터 영어 교육을 받기 시작합니다.
한편 영국정부에서는 1893년 6월 해군 교관 파견을 승인했고 이것에 수반해서 군사 교관의 콜월(W. H. Callwell) 대위와 조교 커티스(J. W. Curtis) 하사를 파견합니다. 그리고 다음 해 4월부터 이들에 의해서 본격적인 군사 훈련이 시작됩니다.
조선이 근대 해군을 건설하기 위한 본격적인 노력을 기울이자마자 침략의 기회를 노리고 있던 일본은 이것을 경계하게 됩니다. 1894년 3월 일본 해군 대위 미나미·요시치카가 정찰을 목적으로 강화도의 해군 관청을 시찰해 보고서를 작성합니다. ※일본 방위청 자료관에 보관중의 미나미 대위의 첩보 문서에 의하면, 가까운 시일내에 조선해군교사 영국해군대위 칼웰씨 도착 밖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
이와 같이 근대 해군 사관을 양성하기 위한 교육을 한 걸음씩 시작해 가지만 국내·외적의 압박이 격렬해짐에 따라 1894년 6월 해연총재영과 함께 통제영 학당은 폐지되어 심영으로 운영이 이관되었고 그 해 7월 청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사실상 유명 무실인 교육기관으로 전락하게 되고, 결국1894년 11월 폐교됩니다.
통제영 학당을 통해서 근대 해군 교육을 받은 사관을 양성하려고 하고 있던 계획은 실패했지만 고종은 한번 더 신식 군함의 도입을 추진합니다 이것과 함께, 1903년 일본의 미츠이 물산 합명회사를 통해서 3천424톤급의 화물 상선을 구입해 함포와 기관포를 설치해 군함으로 개조합니다. 이 군함이 우리 나라 최초의 근대식 군함인 ‘양무호'입니다. (1년 후에 좌초 침몰)
※미츠이 물산 자료에 의하면들 세이난전쟁 후에 불필요하게 된 폐기 직전선.
그리고 두번째로 1904년 완성된 광제호를 계속 되어 구입합니다. 광제호는 전체 길이 220피트, 폭30피트, 살수기 21짝에 화물 적재량 540t, 총중량 1천56t, 출력 2천483마력, 최대안도 14.77노트의 기선으로 3인치포 3문이 장착되고 있었습니다. 해안 경비의 임무를 수행한 광제호는 1905년 을미 조약의 체결에 의해 대장성 관세국 관할로 소속이 변경되었고 연안 세관 감시선으로 운용되어 태평양전쟁때에는 석탄 운송선으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근대화에 실패한 조선은 결국 일본의 식민지에 전락하게 되어 통제영 학당에 대한 기억도 차례차례 사라져서 갑니다. 1987년 장학근 전 해사 교수의 ‘조선시대 해양 방어사 연구'라고 하는 논문을 통해서 그 존재가 또다시 알려져 해군이 1999년 6월 강화군 청에 통제영 학당의 장소에 대한 문화재 지정을 요청하는 것에 따라 여기는 2001년 4월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49호로 지정됩니다.
해군은 해양 수호 역사에 대한 인식 향상과 해군 정통성 확립을 위해서 작년부터 해군 창설기 주둔지 등 역사·군사적 의미가 있는 장소에 표지석을 설치해 왔고, 2009년 4월29일에는 통제영 학당 표지석이 제막되어 외세 침략하에서도 근대 해군을 건설하려고 하고 있던 해군 선배등의 미래 지향적 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해군의 노력은 계속 되고 있습니다.
(역자주) 윗글에 대해서는 글쓴분이 한국분 아니면 한국에 굉장한 애정을 가진 일본분이라 여겨지고, 너무 긴 글이고 역사적 사실이 많아 변역에 실수가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역자주) 세이난전쟁(西南戰爭) : 정한론을 주장한 사이고는 1873년 조선사절단 파견을 둘러싼 집권부 분열(메이지 6년 정변)로 이와쿠라 도모미[岩倉具視] 등에게 밀려 정계에서 물러난 뒤, 향리인 가고시마에서 사학교(일종의 군사학교)를 세우고 사족의 자제를 모아 교육에 힘썼다. 그러자 폐번치현(廢藩置縣) 후 영주제 폐지 등 근대화의 정책 시행으로 봉건적 특권을 잃고 몰락일로에 있던 사족의 반정부 분위기가 사학교를 중심으로 조성되었다. 1877년 이 학교 학생이 중심이 되어 사이고를 앞세우고 거병, 1만 3000여 명이 구마모토진대를 포위하였으나, 정부군에 의해 진압되고 사이고 등 지도자는 대부분 자결하였다. 이 싸움은 메이지유신 초기 사족의 최대·최후의 반란이었는데, 정부는 이 반란을 제압함으로써 권력의 기초를 확립하게 되었으며, 이후의 반정부운동의 중심은 자유민권운동으로 방향을 선회하였다.[네이버백과사전 참조]

2011/05/10(화) 18:05:53.69 ID:pRB+qUuC ?PLT(14444)
이 기사로 다루어지고 있는 것은 60연대이니까 어쩔 수 없지만, 그 후의 전방 후원분의 발견이나 무령왕의 능묘에 관한 기술이 없는 것은 어째서야?

2011/05/10(화) 18:06:59.47 ID:Hu1QowzY
별로 고분이 나와도 괜찮잖아.
스페인에 의하면, 조선은 세계 최장의 속국 문화가 꽃 핀, 몇 안되는 국가다.
스페인지 「한국 4228년간, 중국의 속국」
스페인의 유력지 「엘·문드」의 웹판(
www.elmundo.es)(이)가
「한국은 4228년간에 걸쳐서 중국의 식민지였다」라고 소개했다.
「엘·문드」는 「한반도는 긴 역사 속에서 수많은 침략을 받아 왔다. 중국에 1895년까지 속하고 있었다(약어)
http://japanese.joins.com/article/article.php?aid=56213

2011/05/10(화) 18:19:42.58 ID:53VL7d+8
일본인이여, 역사는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알고 있는지?
승자가 만들고 패자에 따르게 하는 것이 역사야.
그러니까, 전후에 조선 진주군이라 칭하고, 무저항의 일본인을 마구 죽이고,
여자들을 마구 범해 , 목좋은 땅을 빼앗아 파칭코가게를 경영한 것은
일본 역사로부터 예쁘게 지워 없애졌을 것이다.
그 대신에, 일본인이야말로 조선인을 마구 학살했다고 하는 새빨간 거짓말이
일본의 정사로 되었던 것이다.
지금은 진짜 역사는 2채널외에는 말해주지 않는다.

2011/05/10(화) 18:21:48.33 ID:LnM2tiWK
「임나일본부」가 불리하면, 일본 서기나 광개토대왕비문의 유리한 것만을
취하고, 한반도의 고대사를 말하는 것은 이중잣대(더블 스텐다드)이다.
3세기의 일본이 한반도에 만 단위의 군대를 파견할 수 있는 군사 대국인 것은
광개토대왕비문에 명기되어 있다.

2011/05/10(화) 18:26:44.59 ID:lFhxb80A
경주의 유적을 발굴한 것은 식민지 시대의 일본인의 초일류의 고고학자들이었던 것이겠지.
그 불교 유적군을 발굴한 일본인들은 이거야 동양 미술의 참뜻이라고
흥분해 마지않았던 것 같지만.
너희들이 방치해 온 고대사를 발굴해 주어, 조선에도 이런 훌륭한 문화가
만개했었다고 일본인이 가르쳐 준 주제에.

2011/05/10(화) 18:33:05.94 ID:kCPicaI4
> 일제가 주도한 발굴에는 조선인은 한 명도 포함되지 않았다·········
설명하지. 조선인에 가진 고대의 유물은 문화적으로도 더우기 민족적으로도 단절된 것으로,
지금의 조선인과는 관계가 없는 것이다.
그 때문에 일본인 학자와 대등한 박식한 조선인 학자라고 한다
물건이 기대할수 없는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2011/05/10(화) 19:04:03.80 ID:qn1mb496
무엇을 보여도 날조입니다 밖에 말하지 않는 민족이 웃긴다

2011/05/10(화) 19:11:59.95 ID:i89hD0bG
이 스레도 한국어로 번역되어 한국에서 볼 수 있겠구나.

2011/05/10(화) 19:26:00.06 ID:2O/8x50S
박정권 시대에 터무니없이 역사 변조를 해서 지금 그 후유증이 심한거지

     2011/05/10(화) 19:27:12.49 ID:dX7n7mgP
     박정권의 문제가 아니야.
     이조가 그러한 시대였고, 주자학이란 게 그러한 방향으로 벗어나기 쉽다고나 할까.

          2011/05/10(화) 19:34:08.91 ID:2O/8x50S
          대체로 박씨가 「동기의 벚꽃」이 십팔번이니까 하고선
          이곳 저곳에 왕벚꽃나무 심어 버렸기 때문에,
          왕벚꽃나무의 기원은 한국이라고 말하기 시작했어
          그전까지 한국에 왕벚꽃나무는 없었는데
          (역자주) 동기의 벚꽃 : 동명의 일본군가에서 해군비행예과연습생을 벚꽃에 비유한 말로
          일반적으로 동기생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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