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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P] (JW) 일본 위키피디아/다케시마(시마네 현) [독도] 1부
등록일 : 11-09-09 05:35  (조회 : 6,994) 글자확대/축소 확대 축소 | 프린트

※이것은 일본 위키피디아 내용을 역자가 직접 번역한 것입니다.
※여기서는 일본 위키피디아를 JW라고 표시합니다.
※일본 넷우익의 망상병이 그대로 드러났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내용이 일본인을 대표하진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냥 재미로만 읽읍시다.

 

 

빡침 주의 : 일본인 입장
에서 서술되다 보니 읽다
보면 빡칠 수 있음.



워낙 양이 많아서 분할해서 번역하니 양해바람.

 

 

 

다케시마 (시마네 현)


다케시마는 일본해 남서부에 있는 섬으로 북위 37도 15분, 동경 131도 52분에 위치한다.

 

 

 

 

 

 

목차


1. 개요

2. 지리/자연

3. 영토 문제

 

3.1 다케시마 영유 분쟁 발생

3.2 한국에 의한 국제사법재판 위임 거부

3.3 김종필에 의한 독도 폭파 제안

 

4. 한국에 의한 군사점령

 

4.1 이승만 라인과 한일 기본 조약

4.2 한일 양국 분쟁의 평화적 해결에 영향을 주는 교환 공문.

4.3 한국군이 행한 일본인 어민 살해와 일본 어선 나포

4.4 현재 점령의 상황



1. 개요


1905년(메이지 38년) 1월 28일, 일본 정부는 오키 섬 도사의 소관은 다케시마라고 각의 결정하고 이후, 다케시마는 행정구획에서는 시마네 현 오키군 오키노시마쵸 다케시마 국유 무번지로서 정식으로 일본 영토에 편입되었다.


일본이 포기한 지역으로 다케시마를 넣어달라는 한국의 요구가 연합국에 의해 거부되어, 일본령으로 유지되는 것을 결정한 센프라시스코 강화 조약 발효 직전의 1952년(쇼와 27년) 1월 18일,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은 이승만라인을 일방적으로 설정하고 다케시마를 점령했다.

1965년 (쇼와 40년) 한일 기본 조약 체결까지 한국에 의해 이 라인을 넘었다는 것을 이유로 일본 어선 328척이 나포, 일본인 44명이 사망, 3,929명이 억류되었다. 해상 보안정 순시선이 행한 총격 등의 사건은 15건에 가까우며 16척이 공격 당했다.

2011년 현재도 한국 측이 무력으로 점유하고 있어, 일본과 영토분쟁이 일어나고 있다. 대한민국 행정 구분에서는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에 속한다.

 

2. 지리/자연


다케시마는 북위 37도 14분 30초, 동경 131도 52분에 위치한다.

동도(여도), 서도(남도)라고 불려지는 2개의 작은 섬과 이 주위의 총 37개의 암초로 이루어져 있고, 총 면적은 약 0.23km로 도쿄 히비야 공원의 1.4 배, 도쿄돔 5개 크기의 섬이다. 최정부는 서도가 해발 168m, 동도가 해발 98m. 주위는 낭떠러지 절벽으로 마실 물이 모자라고, 보통은 인간이 주거 가능한 환경이 아니다.

일본령 오키와 다케시마 양 섬 사이의 가장 가까운 거리는 약 157km, 한국령 울릉도와 다케시마 양 섬 사이의 가장 가까운 거리는 약 87km다.

 

생태계


다케시마 주위의 해역은 쓰시마 난류와 북에서 오는 리만 해류의 접점이며 어류, 조개류, 조류가 풍부하고 훌륭한 어장이다.

다케시마는 이즈제도와 같이 일본 강치(니혼아사카/Zalophus californianus japonicus)의 주요한 번식지 중 하나였지만, 1975년에 목격된 것을 마지막으로 이후 목격 사례는 보고되고 있지 않으며, 거의 절멸했다고 여겨진다. 다케시마에서 절멸한 원인은 같은 섬을 점거하고 있는 한국에 의한 다케시마 요새화에 따른 자연 파괴 때문이라는 설명도 있다.

 


3. 영토문제


일본과 한국, 북한이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 일본의 행정구획은 시마네 현 오키군 오키노시마쵸.

● 한국, 북한 측에서는 독도(Dokdo, 獨島、トクト、トクド)라고 호칭, 행정구획에서는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


현재 해양경찰청을 아래에 두고 있는 대한민국 해양수산부의 관리 아래에서 한국/북한은 독도를 자국의 최동단의 영토라 주장하고 있지만, 일본은 국제법상 합법적인 일본 고유의 영토라고 주장하고 있다.
 
비당사자나 다른 나라는 중립적 입장에서 1849년에 프랑스 사람이 명명한 리앙쿠르 암초(Liancourt Rocks)라고 호칭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3.1 한일 양쪽 주장의 개요

 

 

●일본정부는 다케시마 문제가 1952년 1월 18일에 한국 대통령 이승만의 해양주권선언에 근거하여 어선출입금지선(이른바 이승만라인)에 따라서 다케시마가 한국의 지배 아래에 있다고 일방적으로 선언한 것이 시작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승만라인 일반적 통보에 대해서는 이후의 한일기본조약에 따라 폐지되는 것이 합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이후에도 불법으로 계속해서 군사점령하고 있다.

 

●한국정부는, 1905년 1월 28일에 일본정부가 다케시마를 자국에 편입한다라고 각의로 일방적으로 결정한 것이 시작이었다고 주장하며 일본에 의한 다케시마 편입이 이후, 한국병합의 시작이었다고 하며 「유사영토분쟁을 꾸며내는 것은 일본이다」라거나, 「일본과의 영토문제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며 국제사법재판소에 위임하는 것을 계속해서 거부하고 있다.

 

 

 

3.2 다케시마 영유권 분쟁의 발생.


1952년 1월 18일에 이승만라인이 일방적으로 이끌었고, 일본정부는 같은 달 28일에 「공해상의 선긋기를 항의하는 동시에, 다케시마에 영토권을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헛소리는 인정하지 않는다.」라고 했다. 이 때 다케시마를 점유하고 있던 한국이 정말로 영토권을 주장하고 있었는지 어떘는지 대해선 부정확하지만, 2월 12일 한국의 반론이 게시되고 이후, 양국 간에 문서교환을 실시하게 된다.


 

 

3.3 한국에 의한 국제사법재판 위임 거부


다케시마 영유권 문제에 관련하여, 지금까지 일본정부는 몇 번이나 국제사법재판소(ICJ)에 위임을 한국 측에 제안했지만, 언제나 한국 측은 계속해서 거부하고 있다.


●일본정부는 1954년 9월 25일에 한국에 대하여 국제사법재판소(ICJ)에 위임을 제안했지만, 한국은 거부.

 

●1962년 3월에 실시한 한일외상회담 때에도, 코사카 젠타로 외무대신이 ICJ 위임을 제안했지만, 한국은 거부했다.

 

●1962년 11월에 방일한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에 대하여, 오오히라 마사요시 외상이 다케시마 문제를 ICJ에 맡기는 것을 제안했지만 이번에도 한국 측에서 거부했다.


여전히 그 당시 한국은 국제연합에 가맹하고 있지 않았지만, 가맹하지않은 나라에서도 국제사법재판소에 위임하는 일이 가능하다.
국제사법재판소(ICJ)에 위임하는 것은 분쟁당사국이 일방적으로 거부하면 심판을 하지 못한다. 즉 강제관할권은 없다. 따라서, 한국정부가 동의하지 않는 이상 다케시마 영유권 분쟁을 ICJ로 해결할 수 없다. 그런 탓인지, 영토 문제를 ICJ로 해결했던 사례는 16건 정도다.


한국 측은 ICJ에 위임 거부를 1954년 10월 28일 공문에서


분쟁을 국제사법재판소에 위임하겠다는 일본정부의 제안은 사법적인 가장에 허위의 주장을 하는 한가지 기획에 지나지 않는다.
한국은 독도에서 시작되는 영토권을 가지고 있으며, 이 권리에 대한 확인을 국제사법재판소에서 구해야만 이유는 인정할 수 없다.
어떠한 분쟁도 있지 않은데 유사영토분쟁을 만들어내는 것은 분명 일본이다.


라고 했다.

그렇지만 분쟁의 존폐는 객관적 판정 또는 비당사자 간의 합의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며, 분쟁당사국이 일방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고 분쟁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ICJ 판결에서도 국제영토분쟁의 존폐는 객관적으로 판단되어야 한다는 것이 확인되고 있다.


 

 

3.4 김종필에 의한 독도 폭파 제안


1962년 10월 오오히라 마사요시 외상과의 회담에서 김종필 중앙정보장은 ICJ 위임을 거부했지만, 미국 국무성 외교문서집에 의하면 김종필 중앙정보국장은 일본 측에게 독도 문제의 해결안으로서 독도 파괴를 제안했다고 한다.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은 도쿄에서 이케다 하야토 총리 및 오오히라 외상과의 회담 후, 미국을 방문했다.

1962년 10월 29일 딘 러스크 국무장관과의 회담에서 러스크 장관이 「독도는 무엇으로 사용되고 있습니까?」라고 묻자, 김부장은 「갈매기가 똥이나 싸지를 뿐입니다.」라고 답하며, 독도 파괴안을 자신이 일본 측에 제안했다고 밝혔다.

 

사후에 한국 국내에서 「독도폭파제안설」이 문제로 떠올랐을 때에는, 김종필 자유민주연합총재는 「일본에게 절대로 독도를 넘겨주지 않겠다는 의사표시였다」라고 변명했다.

또한 2010년 조선일보 취재에 대하여 김종필은 「국제사법재판소에서 일본의 것이라고 판결이 나와도, 모든 것을 파괴해 아무 것도 남지 않을지라도, 당신들의 손에는 넘겨주진 않겠다.」라고 격정적인 발언을 했다고 회상하고 있지만, 이것은 미국 국무성 외교문서집 「동북아시아 1961-1963」수록 관련 회담기록의 모습과는 다르다.


 

4. 한국에 의한 군사점령


1951년 (쇼와 26년) 8월 10일에 러스크 서한에 따라 「다케시마는 일본의 영토」라고 하는 미국정부의 의향을 한국정부에게 전했다.

 

6개월 후 1952년 (쇼와 27년) 1월 28일,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이 자국의 지배 하에 있다고 일방적으로 선언한 뒤, 같은 시각에 근해를 포함한 이승만라인을 일방적으로 설정.

1952년 7월 26일, 미국정부와 일본 정부는 다케시마를 미국군의 훈련지로서 일본국이 제공한 것을 약속했다고 협정을 체결.

 

다음 1953년 1월 12일에 한국은 「이승만라인」내에서 고기잡이한 일본어선들을 철저히 나포하고, 같은 2월 4일에 제 1 대방환사건이 발생, 선장이 한국군에게 총격을 받아 사망.

 

같은 4월 20일에 한국 독도 의용수비대가 다케시마에 처음으로 주둔한 뒤, 이후 계속해서 점거를 유지하고 있다.

이로 인해, 현재에도 일본정부의 시정권은 독도에 미치지 못 하고 있다.

 

일본정부는 애초부터 한국 측이 불법점거를 하고 있다고 성명을 내어 계속해서 항의를 하고 있으며, 또한 몇번이나 한국에겍 국제사법재판소로 위임을 요청하고 있지만 한국 측은 「영토문제는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여전히 위임 거부를 고수하고 있다.

 

2006년에는 우리당 김원웅 의원이 국제법상의 영토 분쟁화를 주장했지만 진전은 보이지 않았다.

1954년 이래 일본이 지속적으로 요구한 「국제적인 해결」을 한국이 받아들이는 형태가 될 터였다.

 

4.1 이승만라인과 한일기본조약


이승만라인은 센프라시스코 조약으로 폐지된 맥아더 라인의 후속이라며 한국이 일방적으로 선언한 것이며, 일본정부도 미국도 이것을 국제법상 부당한 것이라며 항의하고 있다.


「맥아더라인」및 「이승만라인」도 참조.

 

1965년 (쇼와 40년) 한일기본조약 체결까지 한국에 의해, 이 라인을 넘어간 것을 이유로 일본어선 328척이 나포되고, 일본인 44명이 살상되었으며, 3,929명이 억류되었다. 해상보안정 순시선에 의한 총격 등의 사건은 15건에 가까우며 16척이 공격당했다.

 

1965년 한일기본조약 조인에 의해 이승만라인은 양국 간에서 정식으로 폐지되었다. 또한 이 때 「다케시마 문제는 분쟁처리사항이다」라고 기록되었지만, 그 후 한국은 「다케시마 영유문제는 분쟁처리사항이 아니다」라고 하여 한일기본조약을 무효로 할 지도 모른다는 입장을 취하여 교섭에 응하지 않았다.

 

 

4.2 한일 양국 분쟁의 평화적처리에 관련한 교환 공문.


또한, 같은 조약체결에 따른 「한일 양국 분쟁의 평화적처리에 관련한 교환 공문」을 주고 받게 되는데, 이것은 외무부장관 이동원 서명에 의한 한국 측 서관으로서


「양국 정부는 특별히 합의가 있는 경우를 제외한 나머지, 양국 간의 분쟁은 우선 외교 상의 경로를 통해 해결하는 것으로 이것에 의해 해결될 수가 없는 경우에는, 양국 정부가 합의한 절차에 따라 조정에 의해 해결을 도모하기로 한다.」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후 한국정부 대응은 이 공문에 어긋나게 되었다.

 

4.3 한국군이 행한 일본인 어민 살해와 일본어선 나포


한국은 일본과의 영토문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일방적으로 대화를 거절하고 있으며 현재에 와서도 군을 모방한 장비를 가진 한국국가경찰 경북경찰청 독도 경비대의 무장경찰관 40명과, 등대 관리를 위한 해양수산부 직원 3명을 상주시키고 있다.

 

또한 한국해군과 해양경찰청이 이 「영해」해역을 상시 무장 감시하여, 일본 측의 접근을 엄중히 경계하고 있다.

 

이 때문에 일본 해상보안청 선박과 어선은 다케시마 영해 안으로 들어가지 못 하는 상황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으며, 일본정부의 3번이나 걸친 항의에도 불구하고 등대, 헬리포트, 레이터, 선착장, 경비대 숙소를 설치, 서도에는 어민 시설을 건설하고 있다.


●이미 설치된 주요 시설

 

동도 : 경비대 숙소, 등대, 헬리포트, 기상관측대, 선박 접안 시설, 송수신탑

서도 : 어민 숙소


1991년부터는 영유하고 있는 것을 기정사실화 하기 위해, 김성도(キムソンド)/김신열(キムシンヨル) 부부 거주를 인정, 독도 이산 20번지라는 주소가 만들어졌다.

 

2005년에는 시마네 현 다케시마의 날에 반발한 한국정부는 한국인 관광객의 입도를 해금하여, 3월 28일에 일반 관광객이 처음으로 독도에 상륙했다.

 

2005년 4월에는 한국인 결혼식이 독도에서 처음으로 시행된 것 외에, 독도 방위의 일환으로 992명의 한국인이 독도에 호적을 올렸다.

 

독도와 울릉도 사이에 수륙양용기를 이용한 항공로를 개발하려는 계획도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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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원래 독도는 일본 거 -> 근데 이승만이 "껒혀, 센프란시스코 조약 따위 족구하라 그래"하면서 이승만라인을 일방적으로 통보 후 일본 공격, 독도 점령.->지금까지 한국이 지배.

 

이 일본 위키의 결론 : 이승만 죽어라.

 

일본 위키에서 독도를 쳐보니, 상당히 길더군요ㄷㄷ

특히 쟁점 항목이랑, 역사 항목은... ...으어.

그러므로 일단은 분할하며 번역하도록 하겠습니다.



번역회원: 네이버 블로거 달가죽(sungume), 가생이 회원 왱알앵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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