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흥무관학교이전에는
사실상 근대화적 군대가 없었다고 보는것이 옳음.
일본의 군대의 진입으로 인해서 무장을 시킨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군대의 해산 및 와해를 목적으로 진행시켜왔음.
그후 신흥무관학교에서 지휘자의 교육과 근대화무장 및 전술을 토착시키는데 일조했읍니다.
봉오동전투는 일본이 근대화되지 못한 임오군란의 상태의 무장으로 생각하고 있어서..
사실상 1차대전의 양상인 참호전을 목적으로 전술을 피는 형태를 가지고 있었읍니다.
우선은 포로 점령지 폭격후 소총부대의 전진을 하는 일종의 로마식군단개념의 전술을 피고 있었읍니다.
근데 봉오동전투에서 점령지의 산악골짜기 형세를 상당히 이용하여 이러한 당시 무장개념을 상당히 탈피하고
유인책과 치고 빠지기를 번목하면서 유인책에 걸려든 적을 포위섬멸하는 소수 집결식의 형태로 전술을 하고 있었죠.. 이부분은 손자병법을 응용한 전략으로 유명합니다.
소수의 병력으로 사단급규모의 적을 막았다라는데서 상당한 효과가 있었고...
특히 일제강점기후 첫번째 승리라는데 사실상 의미를 찾을 수 있읍니다.
그후 몇개 사단으로 구성된 일본군이 토벌작전이라는 이름으로 본격적인 공세에 나오게 됩니다.
이때 다시 유인책으로서 맞서게 됩니다.
군세는 분명 일본이 10배나 되는 병력이지만,
나폴레옹이 패전한 워털루전쟁의 복사판.
얕으막한 능선고지 점령을 위해서 무조건 돌격한 일본의 위세는 한마디로
정신병자같은 무조건적인 돌격으로 인해서
고지만 올라가만 승리한다라는 이상한 신념으로 무조건 낮고 좁아지는 능선에서
화력을 집중해서 상당부분 병력을 손실...
우선은 포격을 시작했으나 방사형으로 퍼지며 대기하던 독립군은
포격피해를 거의 받지 않았고..
빠른 이동과 포격에 대비한 비트구축으로 인해서 주력화망을 구성하는 물자를 보존할수 있었읍니다.
계속된 유인책 치고 빠지는 소규모게릴라전에서 계속된 전진에 의한 피로누적과 자만심등으로 인해서 ..
특히 추운겨울날씨로 인해서
일본측으로 빠른 결과를 보려한것이 패배의 원인입니다.
당시 일본으로서 봉오동전투에 대한 상당한 자존심을 입은 상황에서
지도부에서 상당한 압박을 진행했던것으로 알려져 있었고
당시 지도부는 임오군란당시의 무장력으로 생각해서 실제적으로 학살에 가까운 전투라고 생각한 상황이였읍니다.
실제로 독립군은 러시아에서 들여온 상당한 근대적인 물자를 보유하고 있는 상황이였고.
청산리전투를 일본의 처참하리만큼의 패배로 돌아갔읍니다.
실제적으로 당시 전력으로 다시 침공했다고 한다면 또다시 패배할 위험이 상당히 높았다고 보는 것이 역사적인 관점입니다.
지형지물, 기온 보급로에 대한 연장선등... 실제로 참호전을 펼치기에는 정말로 최악의 상황의 지형이였기 때문입니다.
낮지만 험한 지형. 가는 골짜기 마다 있는 좁아지는 골짜기형 도로
거기에 추운기온, 전략적 식량보급의 문제점등.
이후 일본 침공하지 않고.............................만주사변을 일으키게 됩니다.
현재 자꾸 중국의 난징학살을 이야기하지만,
실제로 더 처참한것은 보로 이 만주사변입니다.
그들은 이미 인간이 아닌 처사로 전쟁 말살책을 선택하게 됩니다.
그후 민족열사들의 대거.. 전향이 이뤄집니다.
특히 기독교를 대표하는 인물들이... 전향하는 사항이 이뤄지게 됩니다.
그당시 청산리전투로인한 일본군의 위압감은 실제로 엄청난 부담을 지게 되었다라는 게 만주사변을 통해서 나타나게 되죠...
그후 이야기는 김좌진장군예하는 만주사변을 보고서 거주지 이전을 한것이 아니라...
당시 러시아는 혁명으로 인해서 소비에트연방으로 바뀌는 와중에
이미 러일전쟁에서 패전하고 다시 일본과의 협상에서 독립군을 고립시키는 외교적인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던 상황.....
물자보급을 해준다라는 이유로 물자보급하러간 곳에서 김좌진장군 예하 많은 독립군들이 여기서 참살당하고
나머지는 이주정책에 희생자가 됩니다.
근데 문제는 여기서 만주사변에 피난간 수많은 이주민의 수가 장난아니게 많았다라는 것이죠.
위의 분 말처럼 과장된 전과아니라는 말은 쉽게 말해서 아닙니다.
당시 군세로 볼때 만주사변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일본의 근대화된 무장의 포획으로 인해서 사실상 감당하지 못할 무장세력으로 성장하기 일보직전인 상황이였읍니다.
마치 임진왜란당시 한산대첩후의 일본의 정세를 만들수도 있던 상황이였읍니다.
러시아왕조가 10년만 더 버터줬으면.. 아마도 러시아왕조는 독립군을 통해서 일본을 제압하려 하고
러시아가 동북아에서 상당부분의 영향력을 가질려고 했을지도 모르죠......
그리고 동북아공영이라는 침략전쟁의 서막은 내려갔겠죠.....
한마디로 역사가 바뀌었던 상황에서 소비에트연방의 배신으로 인해서 모두 물거품이 되어버렸던
세계역사의 희생물로 남겨진 아주 뼈아픈 역사입니다.
근데 광복군 등록의 숫자가 없던것은 당시 모두 러시아에서 학살당하고 이주 당했기 때문입니다.
역사는 당시 우리에게 너무도 아픈 시련을 남겨준 시간이였읍니다.
마지막희망을 꺼버리는 아주 뼈아픈 사건이였죠...
지금도 만주사변은 난징대학살에 묻혀서 회자되는 수가 적습니다.
역사를 자세히 알려면 우선은 만주사변에 대한 일제의 잔악함과 교활함을 잊지말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