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명 흑하사변(黑河事變). 1921년 6월 28일, 노령 자유시(알렉셰프스크)에서 3마일 떨어진 수라셰프카에 주둔 중인 한인 부대인 사할린 의용대를 러시아 적군 제29연대와 한인보병자유대대(이하 자유대대)가 무장해제시키는 과정에서 서로 충돌, 다수의 사상자를 낸 사건.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과 상해파 고려공산당의 파쟁이 불러일으킨 한국 무장독립전사상 최대의 비극적 사건이다.
사할린부대·이항(尼港)군대 라고도 불린 사할린 의용대는 이항(니콜라예프스크)에서 트라피친의 적색 빨치산과 함께 일본군을 대파한 한인부대로서, 이들이 일본군의 추격을 피해 자유시로 들어왔을 때, 당시 자유시에는 자유대대 외에도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최진동의 도독부군 등 간도지방에서 이동해온 한인무장 부대가 집결해 있었다. 사할린 의용대의 실력자 박이리아는 자유대대의 오하묵(吳夏默)·최고려(崔高麗) 등과 군통수권을 둘러싸고 대립하게 되었다. 자유대대는 원래 대한국민의회 휘하의 무장부대였다가 러시아 극동공화국 인민혁명군 제2군단에 편입된 한인부대이며, 대한국민의회는 상해 임시정부와 이동휘의 상해파 고려공산당에 대해 비판적인 이르쿠츠크파계였다.
그러나 당시 극동공화국 한인부에는 상해파의 이동휘계 인물인 박애(朴愛)·장도정(張道政) 등이 활동하고 있었다. 박이리아는 군통수권 장악을 위해 이르쿠츠크파와 반목하는 이들 상해파와 손을 잡고, 휘하부대와 간도에서 온 독립군부대를 자유시 근처 마사노프로 이동시켰다. 코민테른 동양비서부는 양 파의 대립을 조정하기 위해 고려혁명군정의회(高麗革命軍政議會)를 결성, 적군 빨치산 영웅 갈란다라시윌린을 의장 겸 총사령관에 임명하고 군통수권을 책임지도록 했다. 박이리아는 이에 불복했으나, 홍범도·안무(安武)의 부대가 마사노프에서 자유시로 빠져나오자 점차 고립되었다. 설득에 실패한 갈란다라시윌린은 29연대를 동원, 6월 28일 수라셰프카로 이동해 있던 사할린 의용대에 대해 무장해제를 단행했고 이때 자유대대도 29연대와 함께 행동했다.
또한 이 전쟁은 일제강점기 당시 만주-연해주 지역에서 활동하던 독립군 진영의 분열을 일으키는 데에 한 요인이 되기도 했다. 그 결과가 바로 자유시 참변(...).
다만 자유시 참변이 일어나기 전엔 이 러시아 내전으로 인해 독립군이 뜻 밖의 소득을 거두기도 했다. 위에 언급된 체코 병력은 시베리아 철도를 타고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해 선박으로 귀국했는데, 이 과정에서 이들이 상당량의 군사 장비를 북로군정서 등 독립군 측에 매각한 것. 템뿌리기 이는 청산리 전투 등의 후에 벌어질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큰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일본은 이 전쟁을 계기로 연해주 일대와 중국 일대에서 자기들의 세력을 넓혀가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그때까지 일본의 뒤를 봐주던 미국의 반감을 사게 되어 1930년대에는 미일의 관계가 전쟁만 없을 뿐이지 서로를 가상 적국으로 상정하게 되었고 결국 제2차 세계대전에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