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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4-08-11 08:47
[뉴스] 러시아가 역사를 언급하니
 글쓴이 : 벌레
조회 : 2,141  


우크라이나도 역사를 언급하며 "특별작전"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러시아 혁명 전까지 쿠르스크, 벨고로드, 브랸스크는 우크라이나의 일부였습니다. 사실 수자는 소비에트 우크라이나의 수도였기도 했구요. 이쪽을 정상화하고 모스크바와 최단거리를 유지한 채로 대치하고 싶어하네요
러시아는 급히 쿠르스크 원전을 방어하려 방어선을 치고있고 압박을 차단하려 하고있네요
1차 침투조는 급히 후퇴했습니다
그 와중에 우크라이나는 이미 쿠르스크 원전의 전력중계소를 파괴하여 현재 쿠르스크 원전은 전력을 배달하지 못하고있습니다
우크라이나도 적당한 선에서 교두보를 마련하고 방어선에 구멍이 있는 벨라루스 방향으로 영토를 넓히려하네요. 쿠르스크 주 테트키노 방면으로 엄청난 포격을 하고있는 지금이라 왼쪽도 내일모래쯤이면 상당한 국경침투 예상됩니다
MLRS에 의한 콘보이 트럭이 많이 당해서 병력이동에 조심하는 러시아입니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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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원남자 24-08-11 12:29
   
옛고토를 탈환한건가..전후에 저영토 수복한얘들 명예훈장 달달하게 받을듯
o아님 24-08-11 13:08
   
600억달러 지원받으거+병력2~6천명 올인했던대.. 결과 안좋을듯

이건 1센치 땅도 양보못함 망언할때랑 비슷한급 실수인듯
     
천추옹 24-08-11 13:19
   
이미 2만5천 투입했슴.
     
꿈결 24-08-11 15:02
   
어쩌면 생각보다 오래 버틸수도 있어요. 러시아 언론들이 말하길 러시아 군이 저곳에 폭격을 꺼린답니다. 우크라이나 땅에서야 폭격으로 건물이 무너지든 말든 상관 안했지만 저기는 러시아 땅이라 고스란히 러시아 국민들 피해로 잡힌다고 주저 한다네요.
     
어부사시사 24-08-11 21:50
   
~듯 ~듯..

(쌩구라 미확인 러시아 대본영 발표 믿고??) 인디언 기우제 지내시나요??

* 요기 아래 게시글에도 ~듯 ~듯 희망고문성 인디언 기우제????!! 지내셨군요..ㅋㅋㅋ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military&wr_id=838313
다잇글힘 24-08-11 13:58
   
그 이전부터 소련시대까지의 우크라이나라는 나라의 영토는 따지는 것이 의미가 없습니다. 우크라이나라는 나라자체도 역사적으로 보면 완전체로는 1991년 벨라베자 조약이전까지는 실질적으로 없었다고 보면 됩니다. 단지 정체성 측면에서만 존재했죠. 물론 일시적으로 잠깐 독립국을 선언하거나 공국이나 세력의 형태로 존재했던 적은 있습니다만 지속적인 국가형태라기보다는 군벌이나 집단정도로 존재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우크라이나의 영토는 그냥 러시아가 넓혀준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우크라이나인이 쟁취한것이 아니라 러시아의 일부로서 러시아의 행정구역 내지 자치공화국 형태로 붙었다 떼었다 한것입니다. 우크라이나는 영토적으로만 보면 철저히 러시아에 의해 확장된 국가입니다. 아마 그걸 우크라이나인은 인정하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마치 러시아에서 루스의 역사가 바이킹 집단을 받아들인것에서부터 시작된걸 인정하고 싶지 않은것처럼.
     
마술 24-08-11 17:05
   
러시아가 북한과 군사동맹에 준하는 동맹을 맺은 것은 
우리에게 좋은 기분이 아닙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땅을 확장했더라도,
옛부터 키에프(키이우)는 중요한 중심 지역이었습니다.

키에프 공국이 러시아의 모태라고 하나,
쳐들어온 몽골 제국이 킵차크한국을 세웠을 때
키에프(키이우) 지역은 몽골 제국에 강력히 저항을 했습니다.
그러나 노브고로드 공국과 모스크바가 가까운 지역은 덜 저항했다고 알려졌습니다.
그리고 소련 시절 기근이 있었을 때 
곡창지대인 우크라이나는 오히려 굶주렸으며, 아사했습니다.

우리는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의 역사라는 러시아의 역사관도 생각할 수 있지만, 
우크라이나가 생각하는 역사적 관점을 무시할 수도 없을 것 같습니다.
          
다잇글힘 24-08-11 21:40
   
참고로 러시아의 모태는 키예프 공국이 아니라 키예프 루스입니다. 이 부분을 사람들이 많이 헷갈려하죠. 키예프 공국은 시기적으로도 다른 키예프 루스에서 갈라져나온 공국중에서도 나중에 만들어졌습니다.

당시 키예프루스는 지중해무역의 이탈리아의 베네치아나 제노바같은 나라들의 발전으로 흑해지역을 통한 무역이 쇠퇴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역시나 번영한 지역입니다. 그 지역이 저항이 컸던건 몽골이 그만큼 탐을 낼만한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구조건이 말도안되는 수준었고 그걸 거부하면서 그리된거죠.

그리고 홀로도모르도 밑에 다른분의 댓글로도 남겼지만 그것이 우크라이나인의 러시아에 대한 반감을 키운 것이 아닙니다. 스탈린과 소련 공산당체제에 대한 반감을 키웠죠. 이것도 사람들이 많이들 오해하는 부분입니다. 이미 오래전 우크라이나는 많은 부분 러시아화가 되어있던 상태입니다.

전 역사관이라는 표현을 그리 좋아하지 않습니다. 거기엔 정치적인 부분이 들어가기 마련이고 역사를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보고싶은 부분만 보려고 하는 경향이 강해지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위에서 언급했지만 러시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슬라브의 역사는 솔직히 초기발생시점에서 보면 들쳐내기가 꺼려지는 부분들이 많아요. 여기서 들쳐내기 꺼려진다는건 도덕적으로 나쁜짓을 해서라기보다 그들의 주변민족사이에서의 인식이나 위치가 형편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부분을 러시아나 우크라이나나 현대에 들어서 좀 윤색시키려는 경향들이 있습니다.
               
마술 24-08-12 11:49
   
키에프 루스(루시)이든 키에프 공국이든
아주 오래 전부터 노르만족이 거주하게 되었고,
오늘날로 말하자면 러시아 제국 또는 구 소련의 서쪽 지역에 살게 되었는데,

현재의 우크라이나는 모스크바 쪽에 좋은 감정은 아니라는 것은
러우전쟁으로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bf109 24-08-11 18:15
   
???
근대에 2년 넘게 존속하면서 소련과 전쟁한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이 우스워요?
          
다잇글힘 24-08-11 21:17
   
우습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우크라이나에게 그 나라는 역시나 실질적으로 보면 진정한 독립국가라고 보기는 힘듭니다. 러시아혁명기시 만들어진 조직이고 가뜩이나 러시아가 침입하면서는 서쪽지역을 폴란드에 팔아먹기도 했기에 우크라이나인들에게는 부정적인걸 너머 우크라이나가 독립된 이후에도 거의 잃어버린 역사 취급한 시기입니다. 최초의 우크라이나 국가라면 적어도 독립이후에는 자신들 정체성을 위해서라도 숭상해야하지만 인식면에서 존재감이 없었죠. 최근에서야 러시아의 차별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주목받는것 뿐입니다. ^^
               
bf109 24-08-11 21:35
   
그거야 님 주장이고요
그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이 멸망 후 외국으로 망명한 망명정부가 있었고, 우크라이나 독립 후 어떤 사람에게 망명정부의 정통성을 이양하면서 소멸하는데, 그 사람이 바로 우크라이나 초대 대통령이에요
님이 말하는 관점은 어디까지나 극단적인 민족주의자들 관점이지, 엄연히 현대 우크라이나에 그 명분과 적통을 이은 국가랍니다
                    
다잇글힘 24-08-11 21:44
   
우크라이나인들에게 최근이전까지는 그 역사가 그리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았던것이 중요합니다.

위에서도 군벌이나 조직이라는 말을 사용했지만 쉽게말하면 20세기초 중국에서의 군벌들과 같은 조직입니다. 국민들의 열망을 담아 만들어졌고 국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 유지되었다기보다 그냥 소수 민족주의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조직이고 그들이 단지 러시아 혁명이후의 혼란기를 틈타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적백내전의 혼란이 마무리되는 시점 우크라이나를 침공할때 제대로 힘한번 못써보고 와해되버린거죠. 우크라이나인들의 큰 지지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조직이 아니니. 이미 러시아화가 오래전에 진행되어서 보편적인 독립의식이라는것이 희미해졌기 때문에 그럴수도 없었고.

오늘날과 한번 비교해보세요 ^^
                         
bf109 24-08-12 04:35
   
그거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공격적으로 대하기 이전의 이야기고요

우크라이나의 러시아화가 진행되었고 서로 그렇게 밀착되었다는 소리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공격한 순간부터 헛소리가 되는 겁니다
러시아화 진행이 안 됐고 밀착이 님이 주장하는 것만큼 안 됐으니까 벨라루스처럼 안 됐던 거고, 러시아가 외교적으로 정치적으로 해결을 못 보고 총칼을 들이민 거겠죠?

그리고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은 군벌 수준이 아니라 엄연히 독립을 선포한 후 한 차례 소련의 침공을 막아내기까지 해서, 그 소련이 조약으로 독립을 인정까지 했었던, 군벌과는 엄연히 다른 국가입니다.

뭐 국가가 있었고 없었고를 따질 거면 핀란드도 스웨덴이나 러시아의 정당한 영토가 되겠네요? 최초의 핀란드 국가도 소련 혼란기에 나타났으니?

애초에 우크라이나엔 나라나 민족 개념이 어쩌고 하는 러시아의 역사적 주장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겁니다. 엄연히 우크라이나의 정체성이 존재하고, 그랬기에 소련 내에서도 우크라이나SSR이 따로 있어서 거수기로나마 UN에 따로 가입시켰던 거고요.

침공할 때 힘 한 번 제대로 못 써봤다고 했는데, 키이우를 따이긴 했어도 이후 그 키이우를 한 번 탈환하기도 했고, 다시 밀린 다음엔 폴란드와 함께 맞서싸우면서 엄연히 일축을 담당했습니다. 이후 버려져서 그렇지.
                         
다잇글힘 24-08-12 06:39
   
자 한번 생각해봅시다.

우크라이나가 그렇게나 독립을 열망했다고 해보죠. 그리고 새로 만들어진 정부가 좀 삽질을 하고 실수도 하고 아님 힘이 약해서 힘싸움에 좀 밀릴 수 있었다고 쳐봅시다. 그렇게 한번 무력으로 밀리고 나서 그럼 우크라이나 국민들은 왜 그 이후 저항다운 저항을 해보지 못했을가요? 국제사회를 향해서 호소를 하기를 했나요? 아님 무장투쟁을 통해서 계속해서 볼셰비키 정부에 대항을 해보기라도 했나요?

그런거 없어요. 그냥 관계자들도 망명하고 끝.

애초 해당 정부도 우크라이나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고 만들어진 정부도 아니고 거기에 반대하는 다른 정파들도 존재했습니다. 즉 권력투쟁이 내부적으로 있었다는 뜻입니다. 언급했듯이 러시아혁명의 혼란한 상황에서 만들어진 정당이나 세력 군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만약 그들이 그 상황을 이겨내었다면 실질적인 국가가 완성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못했어요. 쉽게말해 내전과정의 일부로서 만들어진 지역임시정부입니다. 그래서 군별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한거고. 쉽게말하면 적백내전에서 러시아의 백군과 같은 유형의 우크라이나의 정치세력일뿐입니다.

그래서 위에서도 분명히 언급했지만 계속해서 "실질적인" 이부분을 강조하는것이 이런 이유입니다. 그것이 또한 후일 우크라이나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면 모르겠지만 그들의 성격이나 행태가 시대정신이나 민중과 괴리되기 때문에 거의 공중으로 떠버리게되고 존재감이 거의 미미해진거고.

아래글에서 중앙라다=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독립선언을 한 세력)

After the Russian Revolution of 1917, several factions sought to create an independent Ukrainian state, alternately cooperating and struggling against each other. Numerous more or less socialist-oriented factions participated in the formation of the Ukrainian People's Republic among which were Bolsheviks, Mensheviks, Socialists-Revolutionaries and many others. The most popular faction was initially the local Socialist Revolutionary Party that composed the local government together with Federalists and Mensheviks.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여러 파벌이 우크라이나 독립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서로 협력과 투쟁을 번갈아 가며 노력했습니다. 볼셰비키, 멘셰비키, 사회주의자-혁명가 등 다소 사회주의 지향적인 수많은 정파가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 수립에 참여했으며, 그 중에는 볼셰비키, 멘셰비키, 사회주의자-혁명가 등 여러 정파가 있었습니다. 가장 인기 있는 파벌은 처음에는 연방주의자 및 멘셰비키와 함께 지방 정부를 구성한 지역 사회주의 혁명당이었습니다.

Immediately after the October Revolution in Petrograd, Bolsheviks instigated the Kiev Bolshevik Uprising to support the revolution and secure Kiev. Due to a lack of adequate support from the local population and governing anti-communist Central Rada, however, the Kiev Bolshevik group split. Most moved to Kharkov and received the support of the eastern Ukrainian cities and industrial centers. Later, this move was regarded as a mistake by some of the People's Commissars (Yevgenia Bosch). They issued an ultimatum to the Central Rada on 17 December to recognise the Soviet government of which the Rada was very critical. The Bolsheviks convened a separate congress and declared the first Soviet Republic of Ukraine on 24 December 1917 claiming the Central Rada and its supporters outlaws that need to be eradicated. Warfare ensued against the Ukrainian People's Republic for the installation of the Soviet regime in the country, and with the direct support from Soviet Russia the Ukrainian National forces were practically overrun. The government of Ukraine appealed to foreign capitals, finding support in the face of the Central Powers as the others refused to recognise it. After the Treaty of Brest-Litovsk, the Russian SFSR yielded all the captured Ukrainian territory as the Bolsheviks were forced out of Ukraine. The government of Soviet Ukraine was dissolved after its last session on 20 November 1918.

10월 페트로그라드 혁명 직후 볼셰비키들은 혁명을 지지하고 키예프를 지키기 위해 키예프 볼셰비키 봉기를 선동했습니다. 그러나 지역 주민과 반공주의 성향의 중앙라다의 지지를 제대로 받지 못해 키예프 볼셰비키 그룹은 분열했습니다. 대부분은 하르코프로 이주하여 우크라이나 동부 도시와 산업 중심지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나중에 이 움직임은 일부 인민위원(예브게니아 보쉬)에 의해 실수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들은 12월 17일 중앙라다에 최후통첩을 보내 라다가 매우 비판적인 소련 정부를 인정하라고 요구했습니다. 볼셰비키는 별도의 대회를 소집하고 1917년 12월 24일 중앙라다와 그 지지자들을 근절해야 할 무법자라고 주장하며 최초의 소비에트 우크라이나 공화국을 선포했습니다. 우크라이나에 소비에트 정권을 설치하기 위해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과 전쟁이 벌어졌고, 소련 러시아의 직접적인 지원으로 우크라이나 민족 세력은 거의 전멸했습니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다른 국가들이 이를 인정하지 않자 외국 자본에 호소하여 중앙 강대국들의 지원을 얻었습니다.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이후, 볼셰비키가 우크라이나에서 쫓겨나면서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은 점령한 우크라이나 영토를 모두 반환했습니다. 소비에트 우크라이나 정부는 1918년 11월 20일 마지막 회의를 끝으로 해산되었습니다.

After re-taking Kharkov in February 1919, a second Soviet Ukrainian government was formed. The government enforced Russian policies that did not adhere to local needs. A group of three thousand workers were dispatched from Russia to take grain from local farms to feed Russian cities and were met with resistance. The Ukrainian language was also censured from administrative and educational use. Eventually fighting both White forces in the east and Ukrainian forces in the west, Lenin ordered the liquidation of the second Soviet Ukrainian government in August 1919

1919년 2월 하르코프를 재탈환한 후, 두 번째 소비에트 우크라이나 정부가 수립되었습니다. 이 정부는 현지의 요구와 맞지 않는 러시아 정책을 시행했습니다. 러시아에서 3천 명의 노동자를 파견하여 현지 농장에서 곡물을 가져와 러시아 도시에 공급하려 했지만 저항에 부딪혔습니다. 우크라이나어 또한 행정 및 교육에서 사용되지 못하도록 금지되었습니다. 결국 동쪽의 백인 세력과 서쪽의 우크라이나 세력 모두와 싸운 레닌은 1919년 8월 소비에트 우크라이나 2기 정부의 청산을 명령했습니다.

Eventually, after the creation of the Communist Party (Bolshevik) of Ukraine in Moscow, a third Ukrainian Soviet government was formed on 21 December 1919 that initiated new hostilities against Ukrainian nationalists as they lost their military support from the defeated Central Powers. Eventually, the Red Army ended up controlling much of the Ukrainian territory after the Polish-Soviet Peace of Riga. On 30 December 1922, along with the Russian, Byelorussian and Transcaucasian republics, the Ukrainian SSR became one of the founding members of the Union of Soviet Socialist Republics (USSR)

결국 모스크바에서 우크라이나 공산당(볼셰비키)이 창당한 후 1919년 12월 21일 세 번째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정부가 구성되었고, 이들은 패전한 중앙 열강으로부터 군사적 지원을 잃게 되면서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에 대한 새로운 적대 행위를 시작했어요. 결국 폴란드-소련 리가 평화 협정 이후 붉은 군대는 우크라이나 영토의 대부분을 장악하게 됩니다. 1922년 12월 30일,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은 러시아, 비엘로르 공화국, 트랜스카카시아 공화국과 함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소련)의 창립 멤버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결론: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은 소련붕괴이후 그것도 최근과 같은 러시아와의 전쟁상황이라면 의의가 있겠지만 적어도 소련해체 이전까지만해도 그렇게 그들에게 큰 의의가 있었던건 아닙니다. 오히려 오늘날 독립으로 연결되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건 볼셰비키 혁명입니다. 볼셰비키 혁명이후 우크라이나는 소련연방의 자치공화국으로서 그 존재를 인정받았고 그것이 소련해체때 독립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죠.  이와 대조되는 경우가 바로 체첸입니다.
^^
                         
bf109 24-08-12 18:21
   
님이 없다고 주장하는 그 사이의 '독립운동'도 꾸준히 전개되었는데요
UVO, OUN, OUN-B, OUN-M 등으로 갈라지고 세분화되면서,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에도 50년대 중후반까지 활동하면서 체포 기록이 등장합니다.

저항다운 저항을 했나? 했음. 키이우도 한 번 탈환하고 이후 폴란드와 손잡고 싸움
국제사회를 향해 호소했나? 했음. 님이 모른다고 없는 게 아님.
무장투쟁으로 소련에 대항했나? 했음. 22년에 먹혔는데 58년까지 무장투쟁하다가 체포당한 기록이 있으면 된 거지 언제까지 해야 인정해주는 거임?

뭐 우크라이나인들도 그 중요성을 재평가하고 그 기록물들을 여태까지 보존하고 있는데 님이 혼자 군벌이네 뭐네 평가하면 뭐함?
엄연히 국가로서 소련과 전쟁도 두 번이나 치렀고 중간에 나치즘이 묻고 반유대주의가 묻긴 했어도 무장투쟁도 계속 이어나가서 폴란드, 소련, 나중엔 나치 독일을 상대로도 게릴라전 펼쳐서, 50년대 중후반까지 계속했던 사람들이고
무엇보다 소련 붕괴 후 독립투표에선 압도적인 찬성표로 독립했던 국가임
러시아화? 그딴 건 푸틴이나 주장할 거고, 러시아화가 안 됐으니까 결국 푸틴도 무력으로 쳐들어갔는데 아직도 그런 말을 주워담고 있으면
어휴
     
벌레 24-08-11 20:52
   
홀로도모르를 일으킨 러시아인데 우크라이나에게 감히 인정하고말고를 말해요?
아르메니아와 터키가 친한 친구사이라고 할 양반이네
그런 관점은 백날 토해봐야 한국전쟁은 븅신전쟁이란 것밖애 안되고 일본이 원하는 역사관이란 걸 모르고 살고있소?
          
다잇글힘 24-08-11 21:21
   
그 사건은 소련이 붕괴하기 이전까지는 우크라이나인에게 스탈린과 소련체제 쉽게말해 공산당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강하게 심어준거지 러시아로부터 우리가 독립해야지라는 인식을 심어준것은 아닙니다. 오죽하면 우크라이나가 독립하고 현대까지도 동부는 물론이고 남부지역의 경우 친러시아계가 많았겠습니까. 사실상 이번전쟁이 그 지역의 경우는 혼란스런 정체성을 끝내는 계기가 되어버렸죠

참고로 소련이 분리될때 러시아,벨라루스,우크라이나 3국중 소련해체를 가장 망설였던건 우크라이나입니다. 옐친이 심지어 우크라이나가 결정을 안내리면 소련해체를 강행하지 않을거라 했었죠. 우크라이나는 그 결정을 투표로 결정하겠다고 끝까지 미루었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러시아에 대한 그들만의 독자적인 민족의식이 강했다면 이런식으로 뜨뜨미지근하고 조심스럽게 나올 이유가 없었죠.

^^
               
력삼동 24-08-11 23:23
   
이 개소리를  우크라이나 사람 앞에서 해봐
 한국도  진정한 독립국이 아니라는 중국놈하고 이리 똑같이 단정적으로 아는 척을하지?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EU가 되고 싶어해  미친놈
               
력삼동 24-08-11 23:26
   
이런 멍멍이 같은 소리를  우크라이나 인 앞에서 해봐
유튜버도 있으니 그리 아는 척하고 인증글 남겨봐

너가 우크라이나 역사책을 한번이라도 봤니?  아니 책을 읽기나 하니?
 아님 유럽은 가서 사람들과 이야기를 해봤니?
 뭔데  정신나간놈 처럼 단정적으로 니가 안다하지?

  우크라이나도 폴란드도 벨라루스 인 모두  러시아인과 엮기기 싫어해
               
다잇글힘 24-08-11 23:42
   
현대 역사에서 소련의 의미를 알지 못하면 위와 같은 멍멍이 소리를 할 수 있습니다.

소련은 러시아와 다릅니다. 물론 러시아혁명으로 제정 러시아가 붕괴되면서 소련이 만들어진 것입니다만 소련은 엄밀히 말해 연합국가입니다.

소련이 연합국가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볼세비키 혁명 와중의 혼란한 상황에서 이전에 러시아에 편입된 여러 민족들이 떨어져나갈 위협을 차단하면서도 그들을 적백내전에서 자신들의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공산주의 전파라는 측면에서도 중요한 수단이기도 하고.

애초 볼셰비키 혁명도 러시아는 말할것도 없고 전세계를 하나의 시스템으로 묶는것을 목적으로 출발한 것입니다. 초국가적인 성격이 초기엔 강했어요. 마치 중세유럽을 크리스트교 하나로 묶어낸 교황청처럼. 코민테른같은 조직이 바로 이러한 초기 소련의 초국가성을 상징하는 조직입니다. 단순히 제정러시아에서 소련이라는 나라로 이름을 바꾸고 정치체제만 바꾼 수준이 아니에요.

러시아혁명으로 러시아는 소련연방에 소속된 여러 자치공화국중 하나가 된 것입니다. . 그러니 조지아의 한 청년이 소련의 최고수장이 되어서 러시아인 수백만명을 죽이고 여러 민족들을 거느릴 수 있는 위치에 오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걸로 그분 사후 후일 러시아인들이 조지아인들을 보복한일도 없고 탄압한것도 아니고.

우크라이나도 러시아처럼 소련의 여러 자치공화국중 하나이고 홀로도모르는 우크라이나라는 자치공화국내에서 소련공산당 정책에 반발을 하니 식량을 끊는 방법으로 탄압을 한 것입니다. 러시아가 탄압한게 아니라요. 그러니 당연히 반러시아가 될수가 없는것입니다. 반소련은 될수 있어도.

이게 사람들이 엄청나게 착각하는 것입니다. 소련과 러시아를 구별하지 못하면 애초 벨라베자 조약이라는 것이 왜 이루어지고 소련해체라는 과정이 왜 이루어졌는지 전혀 이해를 할수가 없는 것입니다.

러시아가 일개공화국이 아닌 소련의 본체라면 굳이 소련을 해체시킬 필요자체가 없었습니다. 러시아입장에서 왜 자치공화국을 독립시킵니까? 그냥 소련에서 러시아로 이름만 바꾸고 그대로 이어받으면 되는데?

소련이 연합국가이기에 해체라는 과정을 만든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러시아도 마찬가지로 우크라이나처럼 소련에서 떨어져 나가 독립한 것입니다.

이건 다른 나라에 비유하자면 현재의 미합중국을 해체하고 지금 존재하는 개별적인 50개주로 독립하는것과 같습니다. 50개주중 어느 한 주가 미국의 본체가 아닌것처럼 소련의 본체는 러시아가 아닙니다. 단지 러시아혁명으로 소련이라는 나라가 이전의 제정러시아가 여러 자치공화국형태로 해체모여진 것이고 소련의 해체는 이렇게 만들어진 자치공화국이 각기 독립된 나라로 떨어져나간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의문이 생길수도 있습니다. 그럼 체첸같은 경우 왜 독립국가로 인정해주지 않았냐? 그건 체첸은 소련연방 산하의 자치공화국이 아닌 러시아공화국 산하의 자치체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소련해체후 CIS로서의 자격도 주어지지 않은것입니다.

단순히 뉴스만 보고듣고 아님 주변사람들이 하는 소리만 듣는수준에 의존하면 정치인들이나 먹물들한테 놀아나기 쉬운거에요. 우크라이나전쟁을 바라볼때는 서구미디어나 또는 서구미디어의 논지를 받아쓰는데 급급한 한국의 주류미디어에 전적으로 의존해서는 안됩니다. 평소에 러시아나 우크라이나 역사에 대해서 좀 알고 계셔야 합니다.

^^
                    
대충123456 24-08-12 05:42
   
이 인간 볼때마다 친구없을거같은데, 전형적인 자기 믿고싶은것만 믿는 유형이고 히틀러, 무솔리니 같은 인간임

참고로 소련이 분리될때 러시아,벨라루스,우크라이나 3국중 소련해체를 가장 망설였던건 우크라이나입니다. 옐친이 심지어 우크라이나가 결정을 안내리면 소련해체를 강행하지 않을거라 했었죠. 우크라이나는 그 결정을 투표로 결정하겠다고 끝까지 미루었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러시아에 대한 그들만의 독자적인 민족의식이 강했다면 이런식으로 뜨뜨미지근하고 조심스럽게 나올 이유가 없었죠

옐친도 고르바초프와 함께 반독립 캠페인을 벌였다. 1991년 8월 쿠데타가 실패로 끝났을 때만 해도 옐친은 여전히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카자흐스탄 및 기타 중앙 아시아 공화국을 아우르는 연방을 유지하기를 희망하였다. 고르바초프와 옐친 모두 우크라이나가 독립 국가가 될 수 없다고 주장했고 옐친과 고르바초프가 실시한 반독립 캠페인은 우크라이나 내정에 대한 중대한 간섭으로 여겨졌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독립을 어떻게든 방해하려고했고, 우크라이나 분리 찬반 국민투표에서 찬성 90% 넘게나왔다. 없는 사실 지어내지말고 차라리 투표가 조작이라고 말해
어디서 이상한거 퍼와서 글 길게쓰면 설득력있고 똑똑해보이는줄 아는듯하네. 글쓰는게 완전 똑같은데 강남토박이 마르티넬리 부계정이냐? ㅋㅋㅋ
                         
다잇글힘 24-08-12 06:22
   
이왕 쓸거면 본 아이디로 쓸거지 굳이 새아이디파서 뭐가 그리 자신의 존재를 숨기고 싶었을까? ㅋㅋ

벨라베자 조약
https://namu.wiki/w/%EB%B2%A8%EB%9D%BC%EB%B2%A0%EC%9E%90%20%EC%A1%B0%EC%95%BD#s-2

우크라이나 독립 투표는 소련 시대에 종지부를 찍었다. 국민투표에 참여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운명뿐만 아니라 세계 역사의 방향도 바꾸어 놓았다.

우크라이나는 아직 모스크바에 종속되어 있는 나머지 공화국들로부터 자유로워졌다. 옐친은 1991년 12월 8일 벨라루스 벨라베자의 사냥 휴양숲에서 크라프추크(우크라이나 초대대통령)를 만났을 때 한 번 더 새 연방조약안에 서명하도록 설득했다.

크라프추크는 크림 반도와 동부를 포함한 우크라이나 모든 주의 국민투표 결과를 언급하며 이를 거부했다. 만일 우크라이나가 연방조약안에 서명하지 않는다면, 러시아도 서명할 수 없다고 옐친은 새로운 대통령에 선출된 크라프추크에게 말했다.

옐친은 몇 차례에 걸쳐 미국 대통령에게 우크라이나가 없는 상태에서 연방에 러시아가 남아 있으면 이슬람계 주민들에 비해 수적 열세에 처한다고 말했다. 거대한 에너지 자원을 가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포함되지 않는 연방은 다른 공화국들에게 아무런 정치적·경제적 매력이 없었다.

벨라베자에서 세 슬라브 공화국 지도자인 옐친과 크라프추크, 스타니슬라우 슈스케비치는 새로운 국제적 연합체인 독립국가연합을 창설했고, 중앙아시아 국가들은 12월 21일 여기에 가입했다. 소비에트 연방을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세르히 플로히, 『유럽의 문 우크라이나 : 독립과 생존을 위한 투쟁의 역사』, 허승철 역, (서울 : 한길사, 2022), p.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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댁이 가지고 온 방해했다는 그건 8월 쿠데타 이전 옐친과 고르바초프가 그린 주권국가연맹에 대한 안입니다. 그당시엔 우크라이나가 독자적으로 떨어져나가는걸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건 당연한 것입니다. 이전엔 우크라이나와 같은 개별 자치공화국들의 독립보다는 현존틀안에서 새로운 연방형태로서 존속을 더 원했던 때입니다.

문제는 91년 8월 쿠데타 이후 상황이 완전히 바뀌면서 더이상 고르바초프와 공산당을 안고 갈수 없고 아예 소련체제를 완전히 해체하는 방향으로 나아간거죠. 그대신 해체이후 cis를 만들어서 eu처럼 소련의 자치공화국들로 이루어진 느슨한 연합형태를 만들자고 노선을 바꾼 것입니다. 그러니 그이후엔 자연스레 우크라이나의 독립을 방해할 일이 없는거죠. 위에 언급한 부분은 바로 8월 쿠데타이후 소련해체를 결정한 이후의 언급입니다.

'우크라이나의 독립을 방해할 정도'라는 그 부분을 단지 그 문맥안에서만 읽으니 전체가 눈에 안보이는 것입니다.

^^
                         
대충123456 24-08-12 07:16
   
그 사건은 소련이 붕괴하기 이전까지는 우크라이나인에게 스탈린과 소련체제 쉽게말해 공산당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강하게 심어준거지 러시아로부터 우리가 독립해야지라는 인식을 심어준것은 아닙니다. 오죽하면 우크라이나가 독립하고 현대까지도 동부는 물론이고 남부지역의 경우 친러시아계가 많았겠습니까. 사실상 이번전쟁이 그 지역의 경우는 혼란스런 정체성을 끝내는 계기가 되어버렸죠

방구석 왕따 백수가 긁혔네 ㅋㅋㅋ
우크라이나 사람들이 독립을 원했다는게 핵심인데 그건 빼놓고 혼자 ㄱ소리하지마 ㅋㅋㅋ
찬성 90%가 그렇게 쉽게나오는줄아냐?
그리고 머리가 그렇게좋으면 지금까지 쓴 글 검색만해봐도 새 아이디가 아니라는걸 알텐데?
렙따당한거다 파오후야 ㅋㅋ
                         
다잇글힘 24-08-12 07:16
   
말투를 보니 누군지 알겠네요. 친절하게 자신의 존재를 알게끔 해줘서 감사하네요 ^^
                         
대충123456 24-08-12 07:19
   
니 직업, 면상, 몸무게도 알만함 ㅋㅋㅋ
                         
다잇글힘 24-08-12 07:23
   
내용을 잘 안읽어보신것 같네요.

8월 쿠데타 이전 소련존속여부(91년3월) : 71퍼센트 찬성
8월 쿠데타 이후 소련으로부터 독립여부(91년12월): 90퍼센트 찬성

위에서 언급한건 홀로도모르가 우크라이나인에게 후일 끼친 영향과 관련된 부분입니다. 소련에 대해서도 그런 경험을 했으면서도 정작 소련이 무너지려고할 당시 초반엔 심지어 소련존속에 더 찬성했다는 것. 단지 8월 쿠데타이후 여론이 확 바뀌게 되죠. 그건 우크라이나뿐만 아니라 다른 공화국들도 마찬가지입니다

^^
                         
대충123456 24-08-12 07:24
   
됐고 니얼굴 링크해줌 ^^
https://blog.naver.com/zoturl/223191535060
                         
다잇글힘 24-08-12 07: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