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전투기는 근본적으로 원하는 곳에 날려서 쏠 수 있는 정밀한 대포에 가깝습니다. 이 하늘을 날아다니는 대포로 상대편 대포를 때려잡을 건지, 상대편 대포를 운용하거나 막아내기 위해 구축된 곳을 칠 것인지, 상대편 대포가 오는 것을 감시할 것인지, 상대편 대포가 아닌 상대편의 지상 전력을 대포로 타격해줄 것인지가 전투기가 맞게 되는 대략적인 임무 상황입니다.
2. 문제는 어떻게 항공전력을 구성하는 것이 가장 전시에 효율적인가인데, 여러 시도가 있습니다. 유럽의 경우 대체로 임무 중심적이거나, 아니면 단일한 다목적 플랫폼을 쓰고 싶어했습니다. 미라지와 쉬페르 에탕다르를 통한 공대공/공대지 전투조합에서 넘어온 것이 라팔이라는 다목적 플랫폼입니다. 영국의 경우 파나비어 토네이도는 보통 공대지 공격용으로 알려져 있습니다만 실제로 다양한 변종이 있고, 유로파이터는 파나비어 토네이도의 공대지 공격능력 때문에 '원래는 만능 전투기로 만들어지려 했으나' 공대공을 우선시하되 트렌치 3에서는 완전한 멀티롤 단일 플랫폼으로 재탄생되는 구조였죠. 물론 보다시피 유로파이터는 그게 이루어지진 않았습니다만 뭐 여튼..
3. 미국의 경우, F-14와 F-15를 개발하는 데까지는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둘 다 크고, 복잡하며, 비쌌죠. 그 당시 이 기종들은 충분히 미친 가격을 자랑하고 있었고, 또한 '전투기 마피아'라 불리던 미군 내 소장파 그룹에 의해서 고기동과 숫자를 앞세운 소련 전투기들을 상대하기에는 F-15가 충분한 소티를 확보하지도, 충분하게 압도적인 교환비를 보여주지도 못할 것이란 견해가 힘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주간 중심의, 민첩함을 살려 미친듯이 밀고 들어올 소련의 전투기에 WVR로 맞붙기 위한 경량 다목적 전투기를 개발하게 됩니다. 그게 F-16이고, 어떻게 말하면 하이로우 믹스는 여기서 시작됩니다.
4. 하이로우 믹스는 구태여 공대지/공대공으로 나눌 수 있는 개념은 아닙니다. 정확히 말하면 고성능의 기체가 상대편 전투기를 상대로 몸빵을 하는 동안 저성능이지만 수량이 더 많아 소티 확보가 용이한 저성능의 기체가 공대지 공격으로 상대의 전력을 분쇄하거나, 역으로 저성능 기체들이 격투를 벌이며 항공전력의 공격을 막고 고성능 기체들이 방공이 잘 되어 있는 고위험 표적(레이더, 비행기지 등)을 정밀 타격해 적의 뼈를 치는 등의 수법을 말하죠. 이 방식은 하나의 전제를 깔고 시작합니다. 어중간한 전투기는 어차피 고위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하이급보다 많은 수량이 필요해 비효율적이고, 소티가 필요한 임무에서는 로우급에 비해서 소티를 확보하는데 드는 비용이 더 커지므로 비효율적이니 그냥 어중간한 기체는 아예 쓰지를 말고 하이급과 로우급을 능률적으로 배분하는 것이 가장 용이하다는 생각이죠. 이 생각은 82년 이스라엘이 벌인 베카 계곡에서의 전투로 적중합니다. 즉 미들급이라는 전술적 개념을 사장시킨 것입니다.
그리고 조기경보기를 선진적으로 도입한 미군은 일방적으로 상대방의 위치를 먼저 파악하고 아예 원하는 대로 전장을 꾸릴 수 있었고, F-15에 의해 적 항공전력이 도살당한 전장에서 F-16은 폭탄이나 주렁주렁 끼고 공대지 임무나 수행하면 장땡이었습니다. 폭장량은 F-15가 앞섰지만, 상대 항공전력이 이미 소멸해 버렸는데 아무런 소용이 없었기 때문이죠.
현대 미 공군은 F-22가 하이급, F-35가 로우급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F-22는 제공 특수임무를 수행하며 F-35가 마치 기갑의 주력 전차(MBT)와 같은 포지션을 맡아 OCA/DCA/CAS 등 다양한 임무에 전부 투입되어야 합니다. 실제로 그럴 능력이 되구요. 그때까지 남아있는 4세대 기종은 CAS나 폭탄 셔틀과 같은 잡업무를 맡게 됩니다. F-22는 180여대밖에 되지 않으며, 지금이야 정신나간 성능으로 몇대만 배치해도 그 주변이 전부 공포에 떠는 전략무기에 가깝지만 10년 뒤엔 아닐 것이고, F-35는 그 10배가 넘는 수량이 존재하기 때문이죠. F-15/F-16은 2020년대 중반이면 전술적으로 가치를 잃어버리구요. 즉 엄격하게 말하면 미군에게 있어 F-35는 '차기 주력 전투기'지, '로우급'은 아닙니다.
5. 국군의 하이로우 믹스의 흐름은 이렇습니다. 우선 태초에 F-4/F-5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F-16이 하이급으로 들어옵니다(원래는 F/A-18이었지만). 그리고 F-15K가 들어오는데, FX사업이 IMF로 짤리면서 수량이 턱없이 부족하게 됩니다. 그래서 F-4와 F-5가 제때 퇴역을 못하고 로우급으로 눌러앉아 버리고, 원래 120기의 F-15가 들어오면 로우급으로 내려갔어야 할 F-16이 실제로는 로우급이 되지 못합니다. 수량이 1/3이 되어버렸으니까요. 그러나 F-15의 상징성이 워낙 강하며 폭장량과 항속거리가 길기 때문에, F-16에 공군은 없었던 보직을 만듭니다. 그게 '미들급'입니다. FA-50은 애초에 F-5를 급한대로 대체하기 위함이니 로우급에 불과하구요. 우리나라 공군은 무슨 독자적인 전술적인 필요성이 있어서 미들급을 만들고 그에 맞춰서 도입사업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애초에 우리나라 공군이 그렇게 대단한 집단도 아니고.
KFX의 미들급이 의미하는 바는 단순합니다. 쌍방의 눈속임이죠. 하이급은 애초에 능력이 안되는 데다 요구되는 예산 자체가 차원이 다르니 차마 얘기하진 못하고, 로우급이라고 하면 FA-50 멀쩡하게 있는데, 혹은 10년 전에 F-50 엎어놓고 공연한 짓 한다고 까일 것 같으니 미들급이라고 해놓고 실제로는 방사청은 돈이 없으니 로우급으로, 공군은 자기 돈 나가는 것 아니니 하이급으로 만들고 싶어하는 거죠. 그게 쌍발-단발 논쟁의 본질입니다. 물론 어떻게 만들든 F-35에 비하면 뼈도 못 추리니, 결국 '상대적 하이'냐 '상대적 로우'냐의 논쟁이 된 것입니다. C103이 상대적 하이를 상징하고, C501이 상대적 로우를 상징하겠죠. 아마도.
일이 이렇게 커진 데는 원래는 F-4/F-5, 특히 F-5와 F-16 초기형을 대체하기 위해 10년 전에 목표로 삼았던 것이 여러 이유로 표류하면서 F-5는 당장 현실이 되고 KF-16까지 시기적으로 대체할 수도 있는 상황에 와버리면서, 종전의 F-5가 맡았던 롤보다 더 큰 것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기 때문이죠. 물론 실제로 미래에 KF-16을 KFX가 대체할 수 있는지 어쩐지는 KFX가 나와 봐야 알 수 있고, 저는 부정적으로 봅니다. 현실에서의 '미들급'이 맞는 최후는 보통 하이급에 버금가는 성능과 로우급에 버금가는 가격(지금 공군과 ADD가 할 수 있고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로우급에 버금가는 성능과 하이급에 버금가는 가격이었기 때문이지요.
솔직하게 말하면, 이런저런 '국산'의 이점을 떠나 이런 상황을 한번에 타개하려면 그냥 F-35나 120대 깔아버리고 나머지는 FA-50으로 채워넣어서 자연스럽게 F-35+F-15K/KF-16+FA-50으로 양분하면 됩니다. 실제로 거기에 들어가는 예산이 진짜로 KFX보다 그렇게 비싸냐고 물어보면 사실 그것도 아니고.. F-35가 싸다기보다는 KFX가 처참하게 비싸질 가망을 보는 편이고. 뭐 그걸 떠나서 저는 한중일 간의 미래 분쟁을 전면충돌보다는 소수의 고성능기가 격돌하는 국지전이 중심이 될 거라고 보고, 그런 임무에 적합한 고성능기의 수량이 최우선적이라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국산이라는 이름에 걸린 입들도 너무 많으니 그렇게 되기는 힘들 거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