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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2-02-07 05:15
자동차 폭탄의 역사
 글쓴이 : 던킨스타
조회 : 3,435  



 "레바논 갈등은 궁극적으로는 냉전이라는 큰 틀 속에서 이스라엘 대 시리아 간 역내 분쟁과 이란 대 미국 간
대리 전쟁이 존재하고, 그 안에서 마론파 기독교인 대 무슬림과 두르즈 간 종파 전쟁이 있고, 그 속에서 다시 시아파 대 팔레스타인인들 간의 내전이 있으며, 마지막으로 그 내전 속에는 아부 니달 대 아부 이야드 혹은 프란지에 대 게마일 구도의 파벌 간 전쟁이 있었다. (…) 수많은 사람들이 각기 다른 이유로 서로 죽이려 들면서, 마치 열대우림이 식물과 곤충에게 있어 진화의 장인 것처럼 베이루트도 도시 폭력 기술에 있어서 진보의 장이 되었다." (88~89쪽)

"1981년 늦여름부터 1983년 초까지 18개월 동안 지옥 같은 체스 게임이 벌어졌다." (90쪽) "레바논에서의 폭탄 공격 물결은 1981년 9월 17일 항구 도시 시돈에 위치한 팔레스타인-레바논 좌파 연합 본부 밖에서 차량 한 대가 폭발하면서 시작됐다." (90쪽) '외세로부터의 레바논 해방
전선' 일련의 테러에 대해 자신들의 소행임을 주장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PLO)는 즉각 이 단체의 이름이 레바논에서의 이스라엘의 활동을 숨기기 위해 사용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90~91쪽)



"샤피크 와잔 레바논 수상은 대통령 궁에서 열리는 회의에 참석하러 가는 도중 오늘 폭발이 '이스라엘 요원들'의 소행이라고 비난했다." (92쪽) "레바논 경찰 통계에 의하면, 그 해 말까지 이스라엘의 공격, 내분으로 인한 무력 충돌, 차량 폭탄 테러 등으로 인한 사망자가 2100명에 달했다." (92쪽)

"1982년 2월 23일 두 개의 차량 폭탄이 몇 분의 간격을 두고 폭발해 해안 도로 근처의 노후한 노천 재래시장을 초토화시켰다. (…) 무슬림 주민에 대한 대규모 테러를 행하고자 하는 자라면 누구라도 탐낼 만한 목표물이었다. (…) 이 폭발로 인해 약 200대의 차량이 피해를 입고, 주유소가 파괴되었다. 지역 내 병동은 피해자들로 가득 찼다. 그럼에도 계속 부상자들을 실어 나르는 구급차가 쇄도하면서 지역 민병대원들이 자동 소총을 흔들며 공중에 발포해 구급 차량이 지나갈 길을 터주었다." (92~93쪽)
또 한 번 의문의 레바논 해방 전선이 이 사건을 자기들의 소행이라고 주장했다.



아리엘 샤론이 등장할 차례다. "그 해 6월 이스라엘이 베이루트를 포위 공격하고 있을 당시, 무슬림 구역에 대한 이스라엘 공군의 집속탄과 이스라엘 포병의 백린탄 공격에 차량 폭탄 테러가 더해져 주민의 공포가 배가되었다. (…) 7월 샤론 장군이 '레바논의 난민 캠프와 20만 명의 팔레스타인인들의 대규모 추방'이라는 목표를 강행하면서 또 다른 차량 폭탄 공격이 발생했다." (93쪽)



PLO도 가만있지 않았다. "PLO의 지도자 아라파트는 서베이루트를 '아랍의 스탈린그라드'로 만들겠다고 공언했다." (93쪽) "이스라엘은 8월에 PLO 수뇌부를 동시다발적으로 암살하려 시도했다. 이스라엘 공군이 PLO가 사용하던 아파트 건물을 공습했다. (…) 아라파트가 생존자들을 위문하기 위해 현장에 도착했을 때도 숨겨진 차량 폭탄이 폭발했다. 아라파트는 간신히 폭발을 피할 수 있었다." (93~94쪽)



"이스라엘 정부가 이런 대학살에 대해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책임이 있었을까? (…) 붙잡힌 운전사들이 잇달아 공개 자백을 함으로써 이스라엘-팔랑헤 연합군이 차량 폭탄 테러를 PLO를 쫓아내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했음이 분명해졌다. (…) 적대 세력의 정보기관이 적극적으로 이 사건에 개입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 영국 언론인 로버트 피스크는 붙잡힌 차량 폭파범 가운데 한 남자가 '이스라엘인들이 형제를 납치했고, 폭탄 설치를 돕지 않으면 형제를 죽이겠다고 협박했다'고 전했다." (94~95쪽)

시리아 대통령 하피즈 아사드는 레바논으로 진격해 미국과 이스라엘을 돕는가 싶더니, 돌연 이집트-이스라엘 평화 협정(캠프 데이비드 협정)을 비난하면서 아야톨라 호메이니가 등장한 이란 편에 선다. 중동은 순식간에 소련-이란-시리아를 한편으로 하고, 미국-이스라엘-이라크를 다른 한편으로 하는 숨 가쁜 격전장으로 바뀐다.

시리아 내에서 아사드와 철천지원수 지간인 무슬림 형제단이 미국, 이스라엘, 이라크의 지원을 등에 업었음은 물론이다. "아사드 대통령은 이스라엘과 CIA, 요르단, 이라크가 무슬림 형제단을 지원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 무슬림 형제단의 은신처에서 이스라엘과 미국의 표식이 찍힌 첨단 장비들이 발견되었다." (96쪽)

아사드는 무슬림 형제단의 테러 공격에 우선적으로 이라크를 응징하기로 한다. 목표는 베이루트 주재 이라크 대사관이었다. "다른 적대 세력들이 맞이할 운명의 예고편인 것처럼, 7층 높이의 이라크 대사관이 xx 차량 폭탄 테러에 의해 사라져버렸다. (…) 이라크 대사와 65명의 대사관 직원이 목숨을 잃었다. (…) 건물이 완전히 무너져 내려 구조대원들이 잔해 속에서 시신을 전부 발굴해 내는 데 27일이 걸렸다. (…) 당시 사담 후세인의 군대와 사투를 벌이고 있던 이란이 공모했을 가능성도 있었다." (97쪽)

"아사드 대통령은 무슬림 형제단을 소탕하면서 비밀리에 프랑스와 전쟁을 펼쳤다. 역사적으로 레바논 내에서 마론파 기독교 세력의 주도권을 확립한 프랑스는 1978년 유엔 평화 유지군이 티르에 배치되었을 때 파병 국가의 자격으로 레바논에 다시 돌아왔다. 1981년 프랑스 정부가 다마스쿠스에서 벌어진 테러를 배후 조종하고 망명해 버린 용의자들의 인도 요구를 거부하면서 두 나라의 관계가 악화됐다. 그 해 9월 베이루트의 프랑스 대사가 시아파 무장 괴한들에게 암살당했다. (…) 식견 있는 레바논인들은 프랑스 대사의 암살이 시리아의 소행이라는 것을 기정사실로 여겼다. 1982년 3월 서베이루트의 프랑스 문화원 인근 지역이 잿더미로 변했다." (98~99쪽)


"5월 25일 베이루트 주재 프랑스 대사관이 대사 비서의 차량에 숨겨진 폭탄이 터지면서 폭파되었다. 전 주말에 누군가가 50킬로그램의 폭발물을 비서의 차 트렁크에 숨겼고, 그녀가 아무런 의심 없이 월요일 아침 대사관으로 차를 몰고 갔다. …… 이전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았던 '자유나시르주의 단체'가 이 극도로 정교하게 기획된 테러를 자신들의 소행이라고 주장했다."(p. 100) 하지만 이 말을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프랑스가 "이스라엘의 물리적 보복 선례"를 따라 행동에 나섰을까? "최소한 시리아의 아사드 대통령은 분명히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p. 100)

"9월 아사드 대통령의 또 다른 적인 레바논의 새 대통령 바쉬르 게마일과 추종자들이 팔랑헤당의 동베이루트 본부에서 폭사했다. …… 이 사건으로 사브라와 샤틸라의 팔레스타인 난민 캠프에서 대학살이 벌어졌다. 전직 모사드 요원 빅토르 오스트로프스키는 시리아 인민당의 주도 하에 시리아 정보부에 의해 행해졌다고 전했다(다른 시나리오는 모사드가 팔랑헤당과 공모해 게마일을 직접 살해하거나 시리아에 먹잇감으로 던져줬다는 것이다)."(pp. 100~101)

아라파트도 다마스쿠스의 분노를 피해 갈 수 없었다. 1983년 1월 일련의 차량 폭탄 테러가 발생했고, "시리아의 통제 하에 있던 한 팔레스타인 분파 조직은 야세르 아라파트를 암살하겠다고 공개적으로 위협했다."(p. 101) "물론 PLO는 공식적으로는 이스라엘과 이스라엘이 후원하는 레바논 해방 전선이 테러의 배후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노련한 전문가들은 이 폭탄 테러가 아마도 하피즈 아사드 대통령이 추진한 냉혈한 복수극의 정점이라고 믿는 편이다."(pp. 101~102)

"1982년 11월 11일 헤즈볼라 전사 셰이크 아흐마드 카시르는 레바논 남부 티르에서 이스라엘군의 8층 본부를 공격해 141명의 이스라엘인을 살해 또는 부상시켰다. 이 공격은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치명적인 테러 공격'이었다. …… 셰이크 카시르가 xx 차량 폭탄의 선구자로 유명세를 탄 것은 헤즈볼라가 작전을 녹화하는 새로운 방식을 도입한 덕을 보았다고 할 수도 있다."(pp. 103~104) 질산암모늄유제(ANFO)라는 강력한 폭약에 가미카제 방식이 추가되면서 자동차 폭탄은 미국마저 패퇴시키는 막강한 무기로 거듭난다.

"시아파의 xx 폭탄 공격수는 대부분 아리엘 샤론이 정교하게 만든 창조물, 즉 프랑켄슈타인 괴물이라고 할 수 있다. 1982년 6월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 시리아 공군 기지에 대한 폭격, 베이루트 무슬림 지역에 대한 무차별 집속탄 사용, 8월 베이루트 외곽으로의 이스라엘 공수 부대 진입 등 이스라엘의 대대적인 공세 속에 레바논과 인근 지역의 적대 세력들이 재결합했다. (…) 레바논 남부와 베이루트에서 부상, 재산 피해, 혹은 체포를 당하지 않은 레바논 가정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이런 그의 가혹한 전략 속에 레바논 인구의 약 40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는 시아파가 이스라엘의 비공식 동맹 세력에서 단호하고 교묘한 적으로 거듭났다." (104쪽)

"1982년 중반 이슬람 아말(아말 운동의 분파)과 다른 친 호메이니 소집단들이 연합해 헤즈볼라라는 시아파 무장 조직이 탄생했다. 이란 혁명 수비대로부터 훈련과 자문을 받고 시리아의 통제 하에 있던 베카 계곡에 근거지를 둔 헤즈볼라는 시아파 마을과 슬럼가에 깊은 뿌리를 둔 토착적 저항 운동인 동시에 이슬람 혁명의 정신을 이어받는 이란 외부의 조직이었다. (다른 이론도 있지만) 이슬람 아말과 헤즈볼라 연합 세력은 이란과 시리아의 기술적·재정적 지원을 바탕으로 1983년 베이루트에서 미국과 프랑스군에게 치명적인 공격을 가한 장본인으로 여겨진다. (…) 헤즈볼라는 중동 내 세력 균형의 틀을 바꾸기 위해 xx 폭탄 차량 공격 방식을 이용했다." (105쪽)



"명목상으로는 PLO의 안전한 철수를 보장하기 위해 주둔하기 시작한 다국적군(MNF)이 무슬림 및 드루즈 다수파와 내전을 펼치던 마론파 기독교 정부의 공식적인 동맹 세력으로 부상한 이후, 미국과 프랑스는 헤즈볼라와 그 지원 세력인 시리아 및 이란의 공격 목표가 되었다. (…) 다국적군은 1983년경 공공연하게 이스라엘군과의 관계를 인정하고, 미국을 통한 이스라엘-레바논 비공식 평화 조약을 독려하던 팔랑헤 행정부를 지지했다. (…) 마론파에 대한 워싱턴의 이 같은 노골적인 지원에 무슬림들은 1983년 4월 18일 보복 작전을 감행했다. 2000파운드의 ANFO 폭약을 실은 픽업트럭이 베이루트 소재 미국 대사관을 폭파했다." (105~106쪽)



책에는 로버트 피스크의 목격담이 나온다.

"이 폭발 사건으로 인해 미국인들은 베이루트에서 더 이상 정보 수집을 할 수 없게 됐다. 베이루트 주재 프랑스 대사관이나 멀리 떨어진 키프로스의 영국 정보부로부터 정보를 구걸할 수밖에 없었다."(107~108쪽)

국방부, 국방부 산하의 국가 안보국(NSA), CIA, 공식적으로는 존재 여부를 밝히지 않고 있는 펜타곤의 정보 지원대(ISA)가 베이루트를 방문해 사건을 조사했고, 사건의 배후와 함께 더 심각한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경고를 내놓았다. 하지만 존 배시 합참의장은 보고서의 경고를 묵살했고, 미국은 앞으로 일어날 사상 최대 규모의 차량 폭탄 공격을 예견하지 못하게 됐다. (이스라엘이 향후 일어날 공격에 대한 중요한 정보를 의도적으로 미국 측에게 숨겼을 가능성도 있다는 사실이 오스트로프스키의 회고록에 나온다.)

설상가상으로 "로버트 맥팔레인 레이건 대통령 국가 안보 담당 보좌관은 미 구축함에 드루즈 민병대를 포격할 것을 지시했다. (…) 이 포격 사건으로 미국은 보수파 아민 게마일 정부의 편에 서게 되어 레바논의 파벌 갈등에 휘말리게 됐다. (…) 미국인들이 팔랑헤와 연합해 레바논 무슬림들과 전쟁을 벌이기 시작한 것이다. '평화 유지' 군대라는 명분을 스스로 깨버린 셈이었다." (108~109쪽) "헤즈볼라의 작전 지휘관이자 세계 최고의 차량 폭탄 공격 전문가인 이마드 파이즈 무그니야가 시아파 버전의 진주만 공격을 계획했다." (109~110쪽)

'베이루트 힐튼'이라 불리던 미군 막사가 그렇게 폭파됐다. xx 폭탄 트럭에는 자그마치 1만2000파운드의 헥소겐(Hexogen) 고성능 폭약과 폭발력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의 부탄 혹은 프로판이 적재돼 있었다. 폭발 물리학에 대한 모든 교과서를 다시 써야 했다. "해병대원과 해군의 최종 사망자 수는 1945년 태평양에서의 이오지마 전투 이래 최대 인명 피해인 241명이었다."(111~112쪽) 계속해서 서베이루트에 위치한 프랑스 막사가 공격당했고, 쿠웨이트 소재 미국 대사관도 트럭 폭탄의 공격을 받았다.



"다국적군은 1984년 2월 레바논에서 철수하기 시작했다. 이는 레이건 행정부의 가장 충격적인 지정학적 패배였고, 알제리 혁명의 승리로 프랑스가 철수한 이후 아랍 세계에서 발생한 서방 열강의 가장 큰 패배였다. 본질적으로 꼬리를 내리고 레바논에서 도망쳐 나온 격이었다. 1만2000파운드의 다이너마이트와 도둑맞은 트럭이 미국의 위상을 추락시켰다. (…) 아민 게마일 대통령은 서방의 후원자로부터 버림 받은 신세가 됐고, 결국 이스라엘과의 조약을 폐기하고 시리아로 건너가 아사드 대통령의 용서를 구했다." (114쪽)

"하지만 미국과 프랑스는 안전한 그들의 항공모함과 전함을 이용해 여전히 시리아와 드루즈, 헤즈볼라를 괴롭혔다. 미국은 이스라엘이 시아파가 대다수인 레바논 남부 지역을 무력으로 점령한 것을 비난하는 유엔 결의안에 지속적으로 거부권을 행사했다. 레이건 행정부는 이슬람 혁명에 성공한 이란과 끝없는 피의 전쟁을 벌이던 이라크에게 인공위성 정보 등 군사적 지원을 시작했다. 미국과 이라크의 친선 관계는 1983년 럼스펠드의 이라크 방문과 사담 후세인과의 회담으로 더욱 노골화됐다." (114~115쪽)



"미국의 무력 외교는 레바논에서 차량 폭탄 테러로 인해 철저히 무너졌다. 이로 인해 레이건 행정부, 그리고 무엇보다 윌리엄 케이시 CIA 국장은 헤즈볼라에 대한 보복에 목말라 있었다. (…) 마침내 1985년 케이시가 사우디와 함께 헤즈볼라의 지도자 셰이크 무함마드 후세인 파들랄라를 제거하기 위해 똑같이 차량 폭탄 테러를 감행할 계획에 착수했다. (…) 케이시는 '테러리스트들이 차량 폭탄과 같은 그들의 무기를 사용하는 것만큼 강력하게, 아니 더 강력하게 이 중요한 문제를 해결해 나갈 것'이라고 다짐했다. 하지만 CIA는 차량 폭탄 공격을 수행할 만한 자체 능력이 상당히 부족한 것으로 드러났다. 결국 케이시는 레바논 현지 전문가들에게 차량 폭탄 공격을 맡기게 되었다. 이들은 전직 영국 특수 부대(SAS) 장교의 지휘 하에 있었다. 주미 사우디 대사인 반다르 왕자는 이 장교를 적임자로 추천한 것은 물론 차량 폭탄 공격을 지원하기 위해 300만 달러를 CIA의 스위스 은행 계좌에 예치했다." (117~118쪽)


"1985년 5월의 어느 화창한 오후 케이시의 고용원들은 트럭에 750파운드의 고성능 폭약을 싣고, 베이루트 남부 시아파 밀집 거주지인 비르 알-아비드 지역의 모스크 인근에 있던 셰이크 파들랄라의 집 건너편에 주차했다. (…) 이 날 공격으로 인한 사망자는 모두 80명으로 기록되었다. 중상자는 256명으로 최종 집계됐다. 하지만 파들랄라는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았다. (…) CIA는 발뺌을 했지만 헤즈볼라는 폭탄의 출처에 대해 한 치의 의혹도 없었다. (…) 시아파 단체의 보복이 잇따랐다. 3개월 뒤 헤즈볼라는 베이루트 공항에서 납치한 TWA 847기의 출입문에서 '비르 알-아비드의 대학살을 잊지 않고 있다'고 외치면서 미 해군 병사의 시신을 밖으로 내던졌다." (119~120쪽)

"윌리엄 케이시는 실패에 굴하지 않았다. 그는 레이건 행정부의 대외 정책 목표를 더욱더 강화하는 데 있어 도시 테러리즘을 이용해야 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이런 그의 관심은 소련과 아프가니스탄 내 소련의 동맹 세력으로 향하게 되었다. 케이시는 소련 연방에 대해 종교적 광신주의를 동원해야 한다는 일관된 비전을 가지고 있었다. 1930년대 대학 재학 시절 에스파냐의 프랑코 총통에 대한 열렬한 지지자였던 케이시는 소련 정부와 그 동맹 세력을 쳐부수는 데 '정치적 이슬람과 가톨릭 교회를 태생적 동맹 관계에 있다'고 여겼다. (…) 케이시는 1986년 레이건 대통령이 국가 안보 결정 명령(NSDD) 제166호에 서명하도록 설득했다. 미국의 군사적 첨단 기술을 아프가니스탄에 투입하고, 이슬람 전사들에게 폭탄 제조 및 파괴 기술 훈련을 더욱더 강화시켜 소련 장교들을 공격 목표로 테러를 감행할 수 있는 새로운 시대가 열린 것이었다." (120~121쪽)

"케이시는 최고 테러리스트로서의 자신의 역할을 숨기기 위해 다시금 분업화된 명령 체계를 구축했다. 조직의 최고 책임자는 케이시와 사우디 정보 기관의 수장 투르키 왕자였다. 그들 아래로는 파키스탄의 독재자 무함마드 지아 대통령과 파키스탄 정보부(ISI)의 총책임자이자 이슬람주의자인 무함마드 유사프 여단장이 있었다. (…) 미국 특수 부대 교관들은 유사프 여단장의 지휘 하에 있는 정보부 장교들을 은밀하게 훈련시켰다. 질산암모늄유제 폭탄 등의 차량 폭탄 제조 방법 및 최첨단 파괴 기술이 주요 훈련 내용이었다. 이들 파키스탄 정보부 장교들은 미래의 알-카에다 지도자들을 포함하여 수천 명의 아프간 전사들과 이슬람권에서 자원한 외국인 이슬람 전사들을 여러 곳의 훈련 캠프에서 훈련시켰다. 당시 대부분의 훈련 캠프는 사우디와 아랍에미리트의 재정적 지원 아래 운영되었다." (121쪽)

"차량 폭탄 공격은 파키스탄 북서부 페샤와르 외곽에 위치한 '포교와 성전 대학' 등과 같은 훈련 캠프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 과정 중 하나였다. ISI의 지침에 따라 무자히딘은 가단 폭약을 차량에 장치하는 방법, 소련이 장악한 도시들에서의 낙타 폭탄 공격 등 다양한 훈련을 받았다. 케이시는 일부 CIA 전문가들의 우려와 염려에도 불구하고 이 같은 기술의 전수를 승인했다. (…) 무자히딘은 거의 4년 동안 카불에서 차량 폭탄 공격과 파괴 행위를 감행했다. (…) 베이루트 규모와 유사한 대학살이 카불에서 진행되었다. (…) 나지불라 대통령은 조지 부시 대통령에게 친필 서한을 보내 워싱턴과 이슬라마바드가 '재정적으로, 물질적으로, 그리고 이념적으로 지원하고 있는' 테러 캠페인을 중단해 달라고 사정했다." (122~124쪽)

"케이시는 이런 결과에 상당히 만족해했다. 그건 소련과 투쟁하던 무자히딘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아주 심각한 부정적인 결과도 초래됐다. 아프간 테러 캠페인은 역사상 가장 큰 테러 기술 이전이었다. 아프간의 분노한 이슬람주의자들은 헤즈볼라로부터 차량 폭탄 관련 정보와 기술을 배울 필요가 없었다. 그들은 파키스탄 북부 아프간 접경 지역에 설치된 훈련 캠프들에서 CIA가 후원하는 최고의 도시 파괴 코스에 참여할 수 있었다. 1982년부터 1992년 사이 약 3만5000명의 이슬람권 무슬림들이 그곳에서 파키스탄 정보부로부터 폭탄 공격 관련 훈련을 받았다. 따라서 역풍 혹은 거대한 부작용은 예견된 것이었다. 안보 결정 명령 166호에 따라 막대한 예산으로 건설된 거대한 훈련 인프라, 즉 특별 훈련 캠프, 파괴 훈련 지침서, 전자 신관 등은 10년 후 미국에서 '테러 인프라'로 불리게 됐다. 1993년 첫 번째 세계무역센터 공격을 기획한 람지 유수프와 2001년 두 번째 세계무역센터 공격을 배후에서 조종한 것으로 알려진 그의 삼촌 칼리드 셰이크 무함마드와 같은 파키스탄 정보부 테러 캠프 동창생들은 자신들의 테러 공격 노하우를 전 세계 모든 지역에 전파했다." (124쪽)

"21세기가 도래한 현 시점에서 볼 때 1983~84년 미국의 레바논 개입 실패가 1975년 사이공 함락 당시보다 더 큰 지정학적 반향을 불러일으켰는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을 수 있다. 베트남 전쟁은 미국의 국내 정치에 더욱더 막대한 영향을 미친 대규모 전쟁이었다. 그러나 베트남 전쟁은 냉전 시대의 산물이었다. 미-소 양극의 초강대국 간에 벌어진 경쟁의 한 단면이었던 것이다. 반면 베이루트와 레바논 남부에서 펼쳐진 헤즈볼라의 전쟁은 21세기에 특징적으로 나타난 비대칭적 갈등 양상을 보여주었다. (…) 글로벌 테러와 저항 운동의 중심은 이제 도시와 주변의 슬럼 지역으로 이동했다. 이와 같은 탈냉전 시대의 도시 테러 맥락에서 볼 때 미 해병대 막사에 대한 헤즈볼라의 차량 폭탄 공격은 테러 공격의 최고 모델이 되었다. 2001년 9월 11일에 발생한 공격도 이 전술의 불가피한 확대 적용일 뿐이다. 당시 사용된 무기는 사실상 날개를 단 차량 폭탄이었다." (127~128쪽)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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