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故 오원철 前 경제수석비서관의 회고를 바탕으로 함.
[배경]
1972년 4월, 당시 한국군의 포병 주력은 미국이 공여한 미제 M2와 M101 곡사포였는데 수량도 적었고, 1930년대에 양산된 구형들이라 이미 노후화가 심각했음.
당연히 북한군의 포병 전력에 크게 뒤떨어졌기에 한국 정부는 105mm 곡사포를 양산해서 현역은 물론 당시까지 60mm 박격포만 사용하던 예비군까지 배치할 계획을 세움.
당시 ADD(국방과학연구소) 개발진들은 90, 106mm 무반동총까지는 개발까지는 성공했음.
[전개]
그러나 105mm 곡사포 개발은 오차가 1/10000인치(= 1/400cm) 미만의 초정밀 가공 기술이 필요했고, 이는 당시 한국의 기술 수준을 크게 상회하였음.
이에 ADD에 파견된 미국의 하딘(Hardin) 기술고문단장에게 도움을 요청했는데 그는 껄껄 웃으며 이렇게 말함.
"105mm 곡사포는 카빈총과 다르다. 필요한 기술재료는 방 하나를 채울 정도이고, 재료 검토에만 1년은 걸린다. 한국은 기술이 부족해서 소화할 능력이 없다."
그래도 한국 개발진은 포기하지 않고, 하딘 단장을 졸라서 주한미국대사관 측에 문의해달라고 했는데 대사관 측은 이렇게 답변함.
"No Gun Never!" (= 대포 절대 안 돼!)
그리고는 되려 하딘 단장에게 '한국 측의 곡사포 개발을 막으라.'고 지시했는데 이는 당시 중국과의 관계 개선을 모색하는 미국의 정책 방향에 따른 것이었음.
사실 미국 측은 1970년에 한국이 ADD를 설립하자 그 때부터 '월남 파병 대가로 KIST(한국과학기술연구원)를 세워줬으니 무기가 필요하면 KIST에서 연구하거나 미국에서 수입하면 되는데 왜 별도의 기관을 세웠는가.'라며 못마땅하게 여겼음.
이에 ADD 개발진은 기존에 한국군이 보유한 105mm 곡사포들을 자로 재서 역설계하고, 비공식적인 경로를 통해 최대한 관련 도면과 사진이 실린 기사들을 수집했음.
심지어 일제강점기 당시 조병창 근무자를 수소문하여 그의 조언을 토대로 강선제작 기계를 만들었고, 1973년 3월에 105mm 곡사포 시제품을 제작하여 발사 시험까지 성공함.
그로부터 불과 3개월 후인 1973년 6월, 하비브(Harbib) 주한미국대사가 오 수석을 식사 자리에 초청했음.
그 자리에서 하비브 대사는 '한국의 105mm 곡사포에 문제가 많다고 들었는데 실무자의 의견을 들어보라.'면서 JUSMAG-K(주한미합동군사업무단)의 몽고메리 고문단장을 부름.
몽고메리 고문단장은 두꺼운 자료철을 가져와서 펼쳤는데...
놀랍게도 한국이 개발한 105mm 곡사포 시제품의 상세 제원이 담겨 있었음.
몽고메리 단장은 이를 조목조목 설명하면서 '미군의 규격과 맞지 않는다.'며 미제 대포를 수입해서 쓰라고 우회적으로 권했지만 오 수석은 이렇게 말함.
"미군 규격에 안 맞는 것은 당신들이 도면을 안 줘서 우리가 자체적으로 개발했으니 당연하고, 우린 어떻게든 도면을 확보해서 화포를 국산화하겠다."
[결과]
결국 미국은 11개월만에 105mm 곡사포 시제품을 제작할 정도로 한국의 방산 발전 의지가 확고하다는 것을 파악하고, 관련 정책을 재고하게 됨.
1973년 9월, 한미연례안보회의를 통해서 미국은 105mm 곡사포를 포함한 각종 무기 기술 자료들을 한국에게 제공하여 한국의 방위산업 발전에 큰 도움이 되었지만 이 와중에도 미국은 다음과 같은 제약을 둠.
ㆍ미국 방산업체와 공동 생산하는 무기에만 기술 지원을 허가한다.
ㆍ한국은 미국의 기술이 적용된 무기를 수출하려면 반드시 미국의 사전 승인을 받는다.
한편 미국은 하딘 단장이 이끄는 ADD 기술고문단을 '한국에게 너무 많은 기술적 도움을 줬다.'면서 철수시켰고, 대신 JUSMAG-K에서 ADD에 인원을 파견하여 한국의 무기 개발 동향을 감시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