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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3-01-01 15:22
[기타] [대만글 번역] 한국전쟁이 대만에 갖는 의미 편
 글쓴이 : 노닉
조회 : 4,935  

https://www.storm.mg/article/4665551?mode=whole


영화 'Devotion은 6.25 전쟁 당시 공중전을 배경으로 미국의 흑백 통합 문제를 다룬 영화지만, 사실 중화민국이 공식적으로 참여하지 않은 한국전쟁은 대만인들에게 미국 못지않은 심리적 영향을 미치고 있다.오늘날 단순히 통독, 청록, 혹은 친미, 친중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국민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중국 공산당의 '항미원조' 사관을 채택하고, 민진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미국의 한국전 사관을 채택할 것이라고 쉽게 판단할 수 있다.


심지어 인터넷에서도 민진당을 지지하는 일부 네티즌은 Devotion을, 민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대륙의 영화 장진호를 보며 공감대를 찾는 것을 봤다. 이 논점은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너무 독단적이다.


도대체 중국 국민당의 한국전에 대한 공식 입장은 무엇인가. 중화민국 정부가 1954년 이래 1월 23일을 '자유의 날'로 정하고 매년 14,000명의 반공의사가 대만에 온 것을 기념한다는 점에서 볼 때, 중국 국민당은 한국전을 중국 공산당과 절대적으로 대립하고 있다는 걸로 인식중이란걸 알 수 있다. 


1981년 출간된 공식 문서인 '삼민주의 빛과 대륙'은 이른바 '항미원조(抗美为了朝)'에 대해 "중공은 소련의 신뢰와 원조를 얻고 소련에 대한 종속관계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기 위해 민국 39년 10월 스탈린의 지시에 따라 한국전에 출병했다 .그 결과 100만 명 이상의 사상자와 100억 달러의 비용이 들었다.동시에 '반미'와 '항미' 운동을 전개하여 대륙과 자유세계의 관계를 타파하고 자유와 민주적 사상 경향을 탄압하였다' 라고 서술하고 있다.


물론 저 서적이 발간된 당시, 대만 국민당의 공식적인 입장은 중국 공산당을 소련의 꼭두각시로 간주하는 것이었지만 이것이 오늘날 국민당의 입장이 여전히 같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결국 14,000명의 반공 순교자들이 모두 자발적으로 대만에 온 것도 아니고 그들이 반공주의나 공산주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대만에 오기를 선택했다고 해서 그것이 '항미원조'의 긍정적인 의미를 전면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대만 현지인들의 인식은 더 복잡하다. 정치에 참여하지 않거나 정부를 지지하는 대부분의 대만인들은 당연히 국민당의 선전에 따라 움직였지만, 40년대 말부터 국민당 반대 운동에 뛰어든 기성세대들에게 '항미원조'는 '대동아전쟁' 이후 '황색인종 해방'을 목표로 하는 두 번째 '위대한 전쟁'일 수 있었다. 서약선 주연의 영화 '운수요(雲水謠)'는 중국 인민지원군으로 한국전에 참전한 대만 현지인들이 그만큼 많다는 증거가 될 수 있다.




한국 전쟁이 대만에 갖는 의미


중국인이든 대만인이든 통일파든 독립파든 한국전쟁이 대만에 끼친 가장 큰 영향이 중공의 무력침범을 막았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제7함대의 개입과 해리 트루먼 대통령의 대만해중립화 선언으로 중국 공산당은 대만해방의 기회를 완전히 잃었다. 장제스가 대륙을 역습하든 대만을 방어하든 미국의 협조가 필요한 시점이었고, 한국전쟁을 중공의 시각에서 바라보기란 더더욱 불가능했다.


그러나 1950년 10월 중국 공산당이 참전하기 전까지 미국은 공산당을 소련 진영에서 몰아내려는 환상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오랫동안 미국 군사고문단을 대만에 파견하지 않았다. 중화민국을 중국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공식 인정하지 않고 협력하지 않았으며, 중화민국과 양자 공동방어조약을 체결하지도 않았다. 대일 평화조약 협상을 담당한 덜레스(John F. Dulles)는 '대만 지위 미정론'을 주장했을 뿐 아니라 장제스에게 유엔 주재 중국 대표단 자리를 중국 공산당에 내줄 것을 요구했다.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대만군 참전을 주장하고, 장제스가 육군 52군을 한반도에 파견할 준비를 하고, 쑨리런(孫立人) 장군이 주재하는 제4군관 훈련반 졸업생 중 일본어를 할 줄 아는 간부를 골라 한국에 파견했지만 이는 결국 일방적인 희망에 불과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이미 제한적 전쟁만 치르기로 결정했으니 대륙 반격을 노리는 장제스를 한반도에 출병시켜 한국전쟁이 제3차 세계대전으로 확대되는 것을 피하고자 했다.


결국 중국 공산당 참전과 함께 중국 인민지원군이 파병되어 장진호에서 미군 제1사단과 직접 싸웠고, 미국 정부는 공산당에 대한 모든 환상을 버리고 중화민국을 중국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공식 인정하고 대만이 유엔에서 중국을 계속 대표하도록 허용함으로써 타이베이와 워싱턴의 동맹관계는 비로소 확정되었다. 대만군은 한국전 참전을 허용되지 않았지만, 미군은 대만에서 통역관과 심문관 200~300명을 한국으로 불러 중공군 포로들을 심문함으로써 대만은 한국전에 개입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또한 200명 이상의 통역관과 심문관의 노력으로 20,000명의 중국군 포로들이 개인의 의사에 따라 대만으로 오거나 본토로 돌아가기로 결정함으로써 중화민국은 선전 분야에서 멋진 승리를 거두었다. .14,000명의 반공의사들이 대만에 와서 자유중국의 사기를 진작시켰을 뿐만 아니라, 대만이 남한, 남베트남, 태국, 필리핀 등의 반공국가들을 규합하여 '아시아인민반공연맹'을 결성할 수 있게 하여, 대만은 한때 동아시아 민족 전체의 반공 선봉장이 되었다.




반공, 반러의 기치를 높이 들다


모처럼 제2차 세계대전의 미·중 동맹관계로 위상이 개선된 중국계 미국인의 위상은 중공의 한국전 참전으로 미국 사회에서 밀려날 뻔했다 .다행히 대만에 중화민국이라는 다른 정권이 존재한다는 이유 때문에 중국인들은 또 다른 자유 조국에 의지할 수 있었다. 뉴욕 차이나타운의 중국 음식점은 한때 중국 공산당의 참전으로 미국 민간인 공격의 표적이 됐으며, 이들이 계산대에 미군들을 위한 모금함을 놓아도 소용이 없었다.


결국 중국인들이 미국인들의 공격에서 벗어나도록 돕는 유일한 방법은 중화민국을 상징하는 청천백일홍 국기를 게양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미국인들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자유중국을 대표하는 깃발에 대부분 동의하기 때문이었다. .미국 차이나타운이 아직도 중화민국 국기를 게양하는 이유는 한국전쟁의 역사적 유산이라고 할 정도로 중화민국의 존재는 북미지역 교포들을 행복하게 했다. 중공의 참전으로 중화민국은 전화위복으로 유엔에서 22년간 중국을 대표할 수 있었다.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4월 28일 대만은 중국을 대표해 일본과 중일 평화조약을 체결함으로써 대만과 펑후의 영유권이 중화민국에 있음을 확인했다. 중화민국은 대한민국과의 친형제 관계를 이어갈 수 있었는데, 예를 들어 육군 제23군을 따라 대만에 온 판창파(潘長發)는 한국에서 주한 미 7사단 제1여단 제17대대의 대령 대리 대대장을 지냈으며, 한미 및 태국 군부와도 깊은 교류가 있었다.


1966년 남한으로 파견된 판창파는 미군이 그를 평등하게 대했을 뿐 아니라 당시 대만이 도입하지 않은 M60 전차를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줬다고 회고했다. 그의 아래에는 미군 장병 말고도 미 육군 예하 한국군(Korean Augmentation To the United States Army), 즉 미 육군에 입대한 남한 군인들도 있어 그들을 지휘했다. 자연스럽게 판창파 등 정통 교육 출신의 대만군인들이 미국에 대해 악감정을 갖지 않고 북한, 중공에 대해 호감을 갖기 어렵게 될 수밖에 없었다. 


판창파는 한국전쟁을 돌이켜보며 안타까운 일이라며 중화민국은 이미 한국 전장을 지원하기 위해 2개 보병사단을 파병하기로 결정했다고 회고했다. 트루먼 대통령이 맥아더 장군의 제안을 채택할 용기가 있었다면 중화민국군이 참가한 유엔군은 북한과 중국 공산당이라는 두 아시아 공산정권을 동시에 전복시킬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될 것이었다. 그는 1967년 대만으로 돌아온 뒤에도 남베트남 주둔 미군과 교환해 베트남전에 참전할 것으로 예상했지만 미국이 자유중국을 반대해 베트남전에 개입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항미원조(抗美朝朝)를 인정하는 외성인


반창파는 항일전쟁 말기부터 청년군에 참가해 안후이 산간지역에서 게릴라전을 펼쳤던 구세대 국군으로 중화민국의 품에 대한 높은 공감과 결연한 반공투사였더. 그가 대표하는 사상은 대일전쟁부터 냉전 시대까지 중화민국 국군 장교의 정통 사상이자 그 시대의 주류 사상이었다. 1950년대로 돌아가면, 특히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부터 1953년까지, 감히 중국 공산당이 항미원조(抗美朝朝)를 치렀다고 칭찬하는 사람은 누구나 약하면 뤼다오 향(대만 정치범 수용소가 있는 섬), , 심하면 마장정(馬場町, 당시 총살형이 집행되던 장소)으로 직송되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에겐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중국 공산당이 "항미원조"를 내세우며 침공한 일을 은밀히 칭찬할 만한 것이었다. 항미원조(抗美朝朝)를 은근히 긍정하는 이들에는 당시 한반도로 파병 준비중이던 제52군을 지휘할 대만군 청년 간부들까지 포함됐으며, 현재 창화(化的化)에 거주하고 있는 강흥주(兴興周) 선생도 포함돼 있다. 장쑤(江省)성 북부 하이먼(海門)현에서 태어난 강흥주는 항일전쟁 기간 중 왕정권과 평화건국군과 중공신4군이 서로 밀고 당기는 삼불관지대(三不關地帶)에 있었다.


점령지에서 자라 일본어를 조금 아는 강흥주는 한반도에 파견돼 제52군의 대륙 반격을 지휘하려는 간부 중 한 명이 됐고, 결국 트루먼 대통령이 대만의 참전을 반대해 직접 한국전에 뛰어들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같은 소북 출신 군 간부들과 함께 북한 전장의 정세를 계속 주시하면서 중공에 대한 시각을 조금씩 바꿔 나갔다 .중공군이 미군을 압록강에서 38도선 이남으로 몰아갈 수 있는 능력을 갖추면 국군의 대륙 반격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어려서부터 100년 국치 교육을 받고 자란 이들에게 중화민족이 미국과 전쟁을 치르는 중국 공산당의 지도 아래서만 통일이 가능하다는 믿음을 갖게 됐다. 중화인민공화국의 화해를 주장하는 자신들의 생각이 대륙 반격을 목표로 하는 국군에서는 더 이상 몸둘 곳이 없음을 깨닫고, 세 사람은 어떻게든 군에서 조기 제대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그 백색 공포의 세월, 강흥주(兴興周)의 동창이 경찰의 눈에 띄어 5년 동안 감옥에 갇혔다.




항미원조에 참여한 걸 자랑스럽게 여기다


강흥주의 사례는 그해 군에 발탁돼 유엔군 지원작전을 준비하던 대만군 간부들 가운데 민족주의 정서에 영향을 받아 중공의 '항미원조(抗美朝朝)'에 동조했다는 증거다. 중국 인민지원군 사령관 펑더화이(德德「)가 "서방 열강이 몇 개의 포를 쏘면 한 나라의 민족을 침략할 수 있는 날은 돌아오지 않는다"는 말은 이데올로기를 뛰어넘어 일부 반공 중국인들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열강의 중국 침략은 중국 국민당과 중국 공산당이 태어나지도 않은 아편전쟁에서 시작됐기 때문에 서구인을 배척하는 정서는 국공(國共)에 포함되지 않는다.. 쑨원의 뒤를 이은 왕징웨이가 1942년 8월 29일 아편전쟁 100주년 기념행사를 확대 개최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항일전쟁 때 적지 않은 중국인이 일본에 가담했는데, 이는 중국인을 학살하고 있는 일본인과 협력하여 영미에 대항하고자 위함이었다.


미국은 중국을 그리 심하게 침략하진 않았지만 결국 영국과 동문인 앵글로색슨인이었고, 미국이 2차 세계대전 승리 후 영국의 지위를 대신했기 때문에 미국을 이긴다는 의미는 중국의 많은 민족주의자들에게는 영국을 이긴 것과 같은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하물며 16개 한국전쟁 참전국 가운데 영국도 포함돼 있으니 항미원조보다 중국인의 100년 국치를 더 씻을 전쟁이 어디 있겠는가.


전후 미국은 세계 제일의 강대국이었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은 기껏해야 마이너 강대국이었다 .미국을 이긴 것은 중국의 민족 자신감을 높이는 데 있어서 일본을 이긴 것과는 비교가 안 된다. 필자가 방문한 한국전 반공의사 장서기 선생은 1949년 태원 보위전에서 포로로 잡힌 옌시산 군벌 소속 노병으로 지원군인 제63군 제189사단을 따라 한국전에 참전했다가 다시 미군에 포로로 잡힌 뒤 대만에 자원입국한 100% 반공의사다.


장선생은 중국 공산당이 실제로 미국을 이긴 것이 아니라 기껏해야 미국과 비겼을 뿐이라고 말했지만, 중국이 '8개국 연합군'에 의해 유린당한 역사를 고려할 때, 그는 지원군이 유엔의 '16개국 연합군'과 비기기란 쉽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장선생은 비록 중국 공산당에 호감을 갖고 있지는 않지만, 대만에 와서도 '딩위산(丁玉山)'이라는 필명으로 타이위안(太原)에서 공산군과 싸운 자신의 경험을 소개했지만, 여전히 '항미원조'에 참가했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




대동아 전쟁의 연장


게다가, 미국이 얄타회담에서 중화민국을 배신하고, 내전 기간 동안 대만군에 대한 무기 지원을 중단했다. 중국 공산당이 "미국을 혼내주자"는 걸 지지하지 않는 많은 다른 지방 사람들은 본질적으로 "항미원조"를 지지하지 않았다. 그래야 미국이 중공의 무서움을 조기에 인식해서 대만에 대한 지원을 강화해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백 년의 국치를 설욕하려는 욕구와 미국을 혼내주자는 민족주의적 마음가짐은 모두 지닌 다른 지방 사람들이 항미원조 전쟁에 공감했다.


대만 현지 사람들, 특히 국민당에 반대하는 대만 사람들은 다른 지방 사람들보다 '항미원조'에 대한 지지가 높았다. .얼마 전 개봉한 영화 유마구 15호(流麻溝十五號)에서도 뤼다오 항에 수감된 대만 출신 정치범들이 미군이 한반도에서 공산군을 격파할 것을 우려하는 장면이 나온다. 다시 말해 '유마구 15호'는 한반도에서 일어난 일은 아니지만 넓은 의미의 한국전쟁 영화로 볼 수 있다.


반국민당 성향의 대만인들에게는 그들의 입장이 통일이든 독립이든 간에,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미 해군 7함대의 대만을 순시함에 따라 장제스, 장징궈 부자의 대만에 대한 위권통치를 공고히 하는 걸 목격했다. 수많은 대만 출신 정치범들이 미국이 중화민국 정부를 지지하는 정책이 수립된 후 몰살당했다는 점에서만 봐도 기성세대 반정부 대만인들이 미국과 같은 나라를 좋아할 것이라고 상상하기 어렵고, 자연스럽게 소련과 중국 공산당에 더 많은 기대를 갖게 될 것이었다.


중화민족주의에 대한 추구때문에 실제로 많은 대만 반대 운동가들이 중국 공산당에 참가하기 위해 중국 본토로 갔고, 심지어 중국 인민지원군에 입대하여 전쟁에 참전했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발발한 5년 전으로 시간을 더 미룬다면, 대만인들은 일찍이 일본 식민지 피지배인으로 대동아전쟁에 뛰어들어 동남아시아로 건너가 영미동맹군과 크게 싸웠었다. 그들에게 '항미원조'는 '대동아전쟁'의 연장선상에 있으며, 황인종과 백인종 간의 인종 간 전쟁이었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초기에 일본과 소련이 일소중립조약을 체결하였음을 감안하여, 대만 현지 출신 좌1익 항일인사들도 모두 모스크바의 요청에 따라 일본의 '대동아공영권' 선전에 협력하였다. 일찍이 농민조합 운동을 이끌며 대만 총독부에 대항했던 간길(簡吉)조차 태평양전쟁 때 가오슝 황민봉공회의 서기를 맡았을 정도로 반미는 당시 대만 좌우의 민족주의자들의 최대 공약수였다.




항미원조에 참가한 대만인


그래서 50년대 한국전에 중공군을 선택해 참전했던 대만인들은 국공내전에서 포로로 잡혀 전선에 강제 투입되어 포탄 사료로 갈려나간 된 옛 국군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지원병들이었다. 이들 중에는 광복 이전부터 중국에 정착한 구세대 좌1익 항일 인사들뿐 아니라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 일본에 체류하며 일본 교육을 제대로 받은 대만 출신 엘리트들도 적지 않았다. 그들은 중국 공산당이 정권을 수립한 후 일본에서 대륙으로 건너가 새로운 중국 건설의 품에 안기며 '미제 타도' 전쟁을 끝까지 진행할 것을 맹세했다.


일부는 중화민국 정부의 수배를 받은 정치범으로, 일부는 대만이 중화인민공화국의 지배로 "복귀"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일부는 대만이 완전히 독립하여 중국과 상호 종속되지 않는 국가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미국이 중화민국을 중국의 유일한 합법적 대표로 인정하던 시절, 중국 공산당은 의심할 여지 없이 대만 반체제 인사들에게 장씨 부자를 대만에서 몰아낼 유일한 희망이었고, 통독 양파 모두 그러했다.


따라서 많은 대만인들이 '항미원조' 전쟁에 참가하고 있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그들은 이것을 '대동아공영권'을 재건하기 위한 희망으로 보고 있으며, 모든 황인종들이 단결하여 유럽과 미국에 대항하는 데 달려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들은 중국 공산당이 한반도에서 거둔 승리로 중국 국민당의 대만 통치를 종식시킬 수 있기를 희망했다. 당시 미국을 비롯한 자유세계는 중화민국 정부가 대만과 펑후를 영구 통치하는 것을 지지했기 때문에, 중국 공산당의 패배는 본토파의 패배와 다름없었다.


조선에 참전을 지원한 대만인들은 대부분 일제 강점기에 일본의 고등 교육을 받았으며, 중국 공산당은 이들을 전선에 포탄사료 보내지 않았다.예를 들어 타이난에서 온 황행은 후방에 남아 일본어로 옛 조선 국적의 일본병이 주체가 된 대한민국 국군을 상대로 심리전 방송을 실시하고, 화롄에서 온 천쿤산은 운전병으로 근무하며 펑더화이를 운전하기도 했다. 영화 '운수요'의 남자 주인공처럼 지원군 부상병을 위한 의료봉사를 하는 대만인도 여럿 있었다. 


항미원조(抗美朝朝)에 참가한 대만인의 상당수는 대동아전쟁에 참전한 대만 출신 일본군이다. 후쿠오카현립공업학교를 졸업한 난터우인 천쓰루)는 전쟁 당시 '쇼난(南南)'으로 개명된 싱가포르로 가서 일본군의 트럭 운전을 담당했다. 그는 국공내전 기간 동안 동북에서 중국 인민해방군에 자진 투항한 뒤 다시 운전병으로 '항미원조'에 투신했다.대동아전쟁과 항미원조(抗美朝朝)의 연속성은 천쓰루에서 일목요연하게 드러난다.




한국전쟁이 양안에 가져온 이해득실


대만 현지 사람들이 다른 성인들보다 한국전 참전에 더 적극적이었기 때문인지, 한국전 때 포로로 잡힌 대만인 지원군 3명 가운데 이란 출신의 천칭빈(陳慶选择)은 본토로 돌아가 고향으로 돌아갈 기회를 포기했다. 중국 공산당이 최전선에 고기방패 보낸 대만인이 적다는 걸 고려하면, 그들 대부분은 중화민국이 한국에 파견한 통역과 심문요원처럼 후방에서 근무하며, 유엔군에 포로로 잡혀 다시 반공의사로 전향할 수 있는 기회는 당연히 다른 성의 사람들보다 훨씬 낮았을 것이다.


게다가, 대만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다른 지방 사람들보다 "항미원조"에 대한 인식이 더 높기 때문에, 포로가 되더라도 다른 지방 군인들보다 더 사기가 높고,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나중에 자원 송환 원칙에 따라 본토로 돌아올 것이다.특히 '2·28사건'과 다른 학생운동에 참가하여 수배를 받은 대만인들은 자신들이 자유중국으로 돌아간 뒤 곧바로 자유를 잃을 거기때문에 붉은색 중국의 품에 안기는 결정을 내릴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홍콩과기대 인문학부 부교수인 창청(常成)의 연구에 따르면, 이미 3명의 대만 지원군이 한국전 기간 동안 연합군에 포로로 잡혔다는 것을 확인했지만, 얼마나 많은 대만인이 중국 인민 지원군으로 참전했는지에 대해서는 중국 측이 더 많은 사료를 공개해야만 밝혀질 수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현재의 통일, 독립 이분법적 사고방식으로 72년 전 대만인이나 중화민국 군민이 한국전을 보고 '항미원조'라는 개념을 규정한 것은 분명 과도한 '이분법'의 오류를 범한다는 사실이다. 


한국전쟁은 중국과 대만에 득실을 가져왔고, 대륙에게 있어 가장 큰 손해는 1950년 대만을 해방시켜 양안 통일 문제를 완전히 해결할 기회를 놓쳤다는 것이다. 중화민국의 입장에서 미국은 장씨 부자의 대만 지배권을 확보했지만 국군의 한국전 파병은 끝내 허용하지 않아 자유중국은 대륙 반격의 기회를 영영 놓쳤다. 1950년 6월 27일부터 양안은 누구도 통일할 수 없다는 것이 정해져 있었다.


그런 면에서 중공은 한국전쟁에서 미국과 비긴 덕분에 전후 독립한 아시아와 아프리카 국가들로부터 상당한 신망을 얻었고, 일본·한국·필리핀·태국 등 오랜 라이벌들로부터도 진심 어린 인정을 받았다. 대만은 지금까지도 아시아 인민반공연맹에서 유엔 비정부기구인 세계자유민주연합에 의존해 전 세계 민주국가와의 실질적인 상호작용 관계를 유지하고 있어 한국전쟁이 대만에 남긴 가장 큰 역사적 자산이라고 할 수 있다. 



번역 : 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war&no=3135916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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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귀찮아 23-01-01 16:29
   
"항미원조에 참가한 대만인"

흠....... 그러면서 중국이 쳐 들어오면 우리가 도와주길 기대한다고????
맙소사 23-01-01 17:54
   
사실 한국 전쟁에서 한국과 미국이 졌다면,,,대만은 물론이고 동남아 침공 1순위 태국 나머지 필리핀 말레이시아 이런 나라들도 공산당 입장에서 혁명이라면서 난리법석 떠는 내전 혹은 소련과 중공이 직접 참여하는 그런 전쟁들이 발발했겠죠 100000000000000000000%
 한국전쟁에서 미군과 소수의 un이 깨졌으니 막을 수단이 없었겠죠, 대만은 한국 전쟁 덕분에 전쟁을 피한거지 무슨 막대한 역사적 자산은....한국인의 피로 대만은 평화을 누린거지... 고마운 줄 모르는 놈들...

 한국내전, 유럽 동부 지역 내전과 베트남 내전에서 소련 공산권역의 막대한 자원 소비가 사회주의 붕괴의 시작
윈도우폰 23-01-01 20:36
   
우리는 항중원미
돛단별 23-01-01 21:27
   
도찐개찐입니다. 대만이 6.25때문에 목숨을 부지했다면,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윤봉길 의거에 감복한 장제스가 임시정부 지원을 파격적으로 해주고 전쟁말미에 국제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을 지지하는 포지션 취해줘서 태평양전쟁 항복전까지 한국만은 일본의 종속국으로 가져가겠다고 고집부린 일본을 꺾을 수 있었음. 그 당시 일본 내부 의견은 한국을 일본에서 떼어내면 인구 1억이 안되어서 국가존립이 힘들어진다나 뭐라나...하여튼 그랬음.
     
구름위하늘 23-01-02 12:45
   
그게 장제스가 한국의 독립을 지지해서 그런 것이다라고 하기에는
장제스가 취한 포지션은 결국 한국은 일본 것이 아니라 중국 것이라는 의견이 아니던가요?

우리나라의 손해를 전제로 한 중국의 이익을 위해서 주장한 것을 가지고 도찐개찐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적반하장이라면 모를까...
     
구름위하늘 23-01-02 12:48
   
참고로 일본제국이 우리나라에 손을 뻐치기 전에 했던 것 중에 하나가
조선을 자주독립국으로 만드는 것 이었습니다.
실제 내용은 청나라의 영향력을 제거하겠다는 것이었고요.

일제가 주장한 조선의 자주독립 지지 의견을 좋게 볼 수는 없죠.
          
먼저간다 23-01-03 02:44
   
일본. 항복하고 조선은 우리가 계속 가지면 안될까?
미국. 조까는 소리하지말고 사인이나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