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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2-01-24 13:04
미국의 또 다른 침공, 그레나다 1983. 10. 25
 글쓴이 : 던킨스타
조회 : 3,290  

 1983년 10월 25일 미국이 자메이카등 친미적인 카리브 6개국(도미니카,바베이도스,세인트루시아,세인트빈센트 그레나딘,앤티가 바부다,자메이카)의 요청에 따라
그들 국가와 공동으로 카리브해의 작은 나라인 그레나다정부의 내전에 미국시민의 안전확보, 민주주의및 법질서 수호를 명목으로
미국군 6500명과 그외 6개국군 800명이 파병되었다.

그레나다는 그에 비해 너무나 약했다. 6개국군을 빼고 미군만해도 6500명인데다 무기는 물론 수적으로도 훨씬 열세여서

 그레나다정규군은 1,500명, 쿠바에게 지원을 요청했으나 겨우 쿠바지원군은 722명뿐이었다. 교전시작 후 겨우 5 ~ 6시간 지나기 무섭게 섬은 미군에 의해 장악되었다. 미군측은 19명 전사, 116명 부상당했고 그레나다 군인 52명과 민간인 27명이 사망했고 쿠바측은 124명 전사, 69명 부상, 535명이 포로로 잡혔다. 

  그레나다는 1498년 포르투갈의 콜럼버스에 의해 처음 발견되었다. 이 당시 호전적인 카리브 인디언들이 먼저 이주해와 살고있던 아라와크족을 몰살시키고 그레나다를 지배하고 있는데, 콜럼버스가 섬을 발견한 이후 150년간 카리브인이 그레나다를 다스리게 되었다. 1650년 프랑스총독 마르티니크가 프랑스회사로부터 그레나다섬을 매입하고 현재의 수도인 세인트조지스에 주거지를 세웠다. 여러 서방 세력들의 다툼이 있었지만 1674년 프랑스령이 되었다. 이어 1763년 파리조약으로 영국연방에 편입되었으나, 1779년 프랑스가 다시 정복하였다. 그러나 1783년 베르사유조약에 따라 영국에 재귀속되어 18세기후반부터 19세기까지 영국의 통치를 받게 된다. 1833년엔 흑인노예들이 해방되었고 1958년에는 서인도제도연방에 가입하였다. 1962년 연방이 해체되면서 영국령 윈드워드제도에 편입된다. 1967년 자치권을 획득하여 자치정부를 수립하였다. 

 1974년 2월에 독립을 하고, 에릭 게이리(Eric Gairy)가 초대 총리가 되었다. 1979년에는 무혈쿠데타가 발발하여 인민혁명정부(PRG)가 수립되었다. 온건좌익인 모리스비숍(Maurice Bishop)이 주도하는 새보석운동(New Jewel Movement)이 정권을 장악하였다. 그레나다 정부가 쿠바와 소련과 친해지면서 1980년대 초에 친미·친서구적인 라틴아메리카국가들과의 관계가 나빠졌다. 또한 PRG 내부의 불화로 모리스 비숍 총리가 폐위되고 처형당하게 된다. 비숍 수상의 온건좌익노선에 불만을 품은 극좌세력이 유혈쿠데타를 단행하였다. 1983년 10월 13일부터 8일간 쿠바의 조정을 받은 허드슨오스틴장군이 주도하는 내부 쿠데타로 장관들을 포함해 60여명이 처형당하게 되고 극좌노선의 군사평의회를 설치하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1983년 10월 25일에는 미국의 군사개입은 1973년 영국의 지배에서 벗어나, 친미적 성향의 주변 카리브공동시장과는 달리 1979년 집권에 성공한 이래 자주적 민족주의노선으로 미국의 이해를 위협하는 그레나다 인민혁명정부(PRG)와 혁명과정을 일거에 전복하기 위한 무력침략이었다. 1983년 10월 중순 이후 자주적 민족주의 노선을 지향하는 그레나다 혁명지도부의 급진진영와 온건진영 간의 갈등과정에서 온건진영의 비숍 총리를 비롯한 장군 4명이 사형당한 일을 기화로 삼은 것이다.
 1979년 3월 이래 진행된 국민 생활안정과 자주적 민족국가 건설을 내세운 그레나다의 혁명과정은 주위의 카리브해 국가들에도 영향을 끼치면서 미국의 이 지역에 대한 정치, 경제적 지배에 위협이 되고 있었다. 또 이 주변을 상실함으로써 생길 석유를 비롯한 전략물자의 해상운송로에 대한 위험도 우려되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미국은 약소국가에 대한 강대국의 침략행위라는 전세계의 거센 비난을 감수하더라도 약간의 군사만으로 거의 희생없이 막대한 자국의 이익을 지킬 수 있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1983년 10월 25일 침공 즉시 섬을 점령한 미군은 급진파 지도자 오스틴과 인민혁명정부의 요원들을 체포하고 쿠바의 노동자와 군인들을 송환하는 등 내정간섭 조치를 단행하였다. 예상대로 10월 25일 즉각 국제연합(UN)안전보장이사회가 소집되었고 28일까지 진행된 회의 결과 찬성 11, 반대 1, 기권 3으로 채택된 「무력간섭의 즉각 중단과 외국군의 즉시 철수」의 요구안은 미국의  거부권발동으로 무시되었다. 그리고 1984년 12월 총선 이후 미국군에 의해 구출된 퐆 수쿤 총독을 수장으로 한 과도기 임시정부가 안정되자, 미군은 1985년 6월 침공 후 약 20개월 만에 유유히 철수하였다.

 침공이후 정세는 미국과 카리브제국의 평화유지군이 군사적으로 개입하여 1984년 2월 1일 임시정부가 수립되었고
임시정부하에 1984년 12월 민선총선이 실시되어 민주자치정부가 수립되었다. 신국민당(NNP: New National Party)이 총 15석중 14석을 석권하여 블레이즈(Blaize)가 총리로 취임하여 정책노선 이견과 당내 주도권 장악 정쟁등으로 내각을 간신히 이끌어 오던 중 1989년 블레이즈가 사망하자 부총리겸 외무장관인 벤 존스(Ben Jones)가 총리직을 승계하는 등 정세가 매우 불안정하였다.
 1990년 3월 총선에서는 모든 정당이 과반수 의석 확보에 실패하였으나, 최대의석(7석)을 확보한 국민민주의회당(NDC: National Democratic congress)이 그레나다통일노동당(GULP:Grenda United Labour Party) 소속 의원을 영입하여 과반수를 확보함으로써 브래스웨이트( Nicholas Brathwaith ) 총리가 집권하여 비교적 안정적으로 정권을 이끌었으나, 1995년 2월 고령으로 물러나게 된다. 조지 브리잔 당수가 총리직을 승계하였으나 이로 인한 당 지도력 약화, 경제 발전부진, 과다한 실업문제 등으로 1995년6월 총선에서 패배하고 신국민당(NNP)에게 정권을 넘겨주었다.  미첼 총리(Keith Mitchell)가 이끄는 집권 신국민당(NNP)은 1999년1월 총선에서도 그레나다 선거 사상 최초로15석 전부를 석권하는 대승으로 재집권하였으며, 이후 70%에 가까운 국민 지지를 바탕으로 국정을 보다 과감하게 운영하였다. 2003년 11월 총선에서도 다시 재집권에 성공하였으나, 경기후퇴등으로 총 15중 8석을 차지하는데 그쳐 미첼 총리의 입지가 위축된 한편 야당인 국민민주회의(NDC)은 7석을 차지하여 정치의 한축으로 복귀하는데 성공하였다.


(출처:네이버,워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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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과구름 12-01-24 14:01
   
엑박을 점령하는 자만이 세계를 꿈꿀수있다
던킨스타 12-01-24 14:04
   
엑박의 침공 ㅋ
plum™ 12-01-24 15:39
   
잘 보이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