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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7-03-29 18:08
[기타] 중국의 국경분쟁, 전쟁
 글쓴이 : 관심병자
조회 : 3,213  

중국 - 인도 국경분쟁 - 1959년~1962년


이전 영국의 식민지였던 인도는 중국과는 네팔과 부탄을 끼고 긴 국경을 접하고 있었다. 거의 전역이 히말라야 산맥이 있는

고산지대여서 정확한 국경이 확정되지 않아 사실상 독립하여 달라이라마의 통치하에 있던 티베트에 중국측의 실효지배는

미치지 못하여 양국의 국경분쟁은 1914년의 심라회담의 결렬 이후, 거의 거론되지 않았다.


그 후, 국공내전을 거쳐 1949년에 세워진 중화인민공화국이 중국대륙을 지배하면서 1950년에는 티베트 침공을 계기로 인도는

국경의 해석문제를 둘러싸고 대립했다. 중국 공산당은 청나라가 러시아 및 그 외 열강들에게 영토를 빼앗긴 경험에서 군사적

실력이 없던 시기에 국경선을 확정한 것은 무효라는 방침을 세웠다.

저우언라이(周恩来)가 네팔과 평화 5원칙을 체결하자, 인도는 중국에 대해 강한 경계감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1959년 9월에 인도와 중화인민공화국의 양군사이 무력충돌이 발생하여 1962년 10월부터 대규모의 충돌로 발전했다. 이 시기는

쿠바위기가 일어나 세계의 관심이 쏠린 가운데 중국 공산당이 계산한 행동이었다는 견해가 크다.

10월 20일에 시장(西藏), 신장(新疆)의 인민해방군 약 8만명이 카슈미르와 그 동부지역인 아크사이친 및 라다크, 잔스카르, 발티스탄,

부탄의 동쪽인 동북변경지구에서 사전에 준비한 대로 선제공격에 들어가 승리를 거두면서 국경을 인도쪽으로 전진시켜 나갔다.

인도의 보호국이던 시킴왕국에선 나툴라 고개를 낀 지역에서 소규모 전투가 벌어져 고개 서쪽은 중국영토가 되었다.


한편, 1950년대 후반부터 표면화된 중소대립의 영향으로 소련은 인도를 지원했다. 또 인도 - 파키스탄 전쟁에서는 파키스탄을 중국이

지원함으로서 중소양국의 대립색채가 극명히 나타났다. 11월 21일에 인민해방군은 아크사이친에 진주하며 이곳을 중화인민공화국의

실효지배 지역으로 편입했다.


무력에서 밀린 인도는 해당지역을 내줄수 밖에 없었는데, 이 분쟁은 정전 후 인도가 핵무기 개발에 나서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파키스탄은 이 분쟁의 영향으로 1965년 8월에 무장집단을 인도 지배지역으로 보내어 제 2차 인도 - 파키스탄 전쟁을 일으키게 되었다.

이후 인도와 중국간의 직접적인 교전은 없었지만 중국의 파키스탄 지원은 인도에게 적대감을 심어주게 되었다.


2010년 9월에 인도는 핵탄두의 탑재가 가능한 중거리 탄도미사일<아그니2>를 파키스탄과 중국을 향하여 배치가 완료되었다고 표명했다.

현재 개발중인 <아그니5>는 사거리가 6,000km에 달하기에 인도 본토에서 직접 중국을 향해 발사가 가능하다고 한다. 2013년 4월 15일에

중국군 약 50명은 인도 지배지역에 10km 정도 침입하여 야영지를 건설했다.


인도군도 중국군의 야영지 근처에 부대를 파견하여 긴장이 높아졌지만 5월 5일에 양국군이 철수를 약속하면서 사태는 해결되었다.

하지만 현재도 인도는 중국을 상대로 국경지대 및 남중국해에서 중국견제에 나선 국가들과 함게 견제협력을 계속하여 실시하고 있다.


[출처] 중국 - 인도 국경분쟁|작성자 도위창



중소국경분쟁 - 1969년

 

 

1950년대 후반부터 니키타 흐루시초프 수상에 의한 스탈린 비판 이후, 소련과 중국간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스탈린 격하운동으로

중국은 중국공산당 창시때부터 스탈린을 맹주로 추종했는데 1956년의 헝가리 반소봉기 이후 소련의 위상이 흔들리면서 중국은

소련의 서방근린외교에 대해 마오쩌둥이 수정주의자라며 비난했다.

 

이에 소련은 중국을 교조주의자라 비판하며 중국의 팽창식 공산주의 노선을 탐탁치 않게 생각했다. 이러한 양국의 갈등으로 인해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두 나라는 군사 및 과학분야의 교류가 중단되고 소련에 유학중이던 중국유학생들이 대거 귀국했다. 이리하여

공산권의 맹주를 놓고 중국과 소련은 서로 대치했는데 이러한 중소간의 국경분쟁은 19세기로 그 기원이 거슬러 올라간다.

 

아이훈 조약과 베이징 조약 등, 당시 러시아 제국이 청국으로부터 영토할양을 받아냈던 시대에 만들어진 조약으로 하천 상류의

국경확정에 관한 미비한 부분이 많은 것도 불안요소였는데, 이 때문에 중앙아시아에서 극동에 이르는 중소국경지대에 귀속이 불분명한

지역이 많았으며 중소간의 견해도 일치하지 않았다.

 

만주국 시절에도 칸차즈섬(乾岔子島)사건과 장고봉 사건 등 분쟁이 있었는데, 중국은 제국주의 시대에 부당한 영토약탈을 당했다는

피해의식이 있었고, 소련은 인구가 많은 중국에 대한 공포가 있었다. 양국간의 정치노선과 영토문제로 인한 갈등은 1969년 3월 2일에

극동의 우수리 강에 있던 전바오섬(珍宝島, 러시아명 타만스키 섬)에서 양국 병사들의 충돌로 비화되었다.

 

당시 소련측 경비병과 중국인민해방군 병사들은 섬의 귀속문제를 둘러싸고 패싸움을 벌였는데 소련측에 밀린 인민해방군이 무술로

단련된 특수부대원을 배치하여 목봉으로 구타하자 소련군 병사가 발포하면서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졌다. 이에 대해 쌍방모두 상대가

먼저 공격을 걸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7월 8일에는 중소 양군이 헤이룽장성(黒竜江省) 통장현(同江県)에 속한 헤이룽강(러시아명 아무르강)의 파차다오(八岔島, 러시아명

코르진스키 섬)에서 무력충돌하여 8월 13일에는 신장 위구르 자치구 타르바가타이(塔城)의 테레쿠치(鉄列克提)에서도 충돌했다.

극동 및 중앙아시아에서 잇다른 교전에 양군은 최악의 사태에 대비하여 핵무기를 사용할 준비를 시작했다.

 

그러던 중 1969년 9월에 북베트남의 호치민 국가주석이 사망하면서 소련의 알렉세이 코시긴 수상은 하노이의 장례식에 참석한 후,

베이징으로 넘어가 중국의 저우언라이(周恩来)수상과 회담하여 정치적 해결의 길을 모색하여 군사적 긴장은 완화되었다. 국경문제는

거론되긴 했지만 최종적인 해결에는 이르지 못하고 양국모두 국경에 병력배치를 계속했다.  


당시 중국인민해방군은 민간인, 농민, 가축 등에 부대로 포위하면서 전진하는 전술을 채택했는데 중국측의 기록에는 소련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히고 자군의 사망자가 적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화력에서 앞선 소련군이 중국군에게 더 큰 피해를 입힌 것으로

보고있다. 중국측은 파손된 신형 T-62 전차를 노획했는데 강선이 없는 활강포를 처음보고는 불량품으로 여겼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약 4,380km의 국경선 양쪽에는 658,000명의 소련군 부대와 814,000명의 중국인민해방군 부대가 서로 대치했는데, 당시 베이징 소재

소련대사관에 홍위병들이 습격하고 국경지대에서 가끔 소규모의 충돌이 있긴했지만 본격적인 군사충돌로는 이어지지 않았다. 냉전이

한창이던 이때, 중국은 문화대혁명이 한창일 때 일어난 이 군사충돌을 계기로 소련과 대립하던 미국과 물밑접촉을 갖기 시작했다.

 

당시 소련과 대립하던 미국도 베트남 전쟁에서 손을 떼기위해 중국과의 접촉을 노려, 1972년에 미국의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베이징을

방문하여 마오쩌둥과 회담하면서 우호관계를 구축했다. 그 후 정식국교는 체결되지 않았지만 카터 정권하의 1979년 1월 1일에 양국은

국교를 수립했다. 이 때, 미국은 장제스(蒋介石)의 중화민국(대만)과 국교를 단절했다.

 

중소양국의 국경문제에 대한 협의와 회의는 1970년대부터 이어졌는데, 소련을 적대시한 중국은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다. 1980년대

후반에서야 중소당국은 국경문제의 협상을 비밀리에 재개하여 1989년에 미하일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방중하여 중소국교가 정상화된

뒤에야 드디어 전면적인 국경문제의 절충이 시작되었다.

 

소련이 붕괴하기 직전인 1991년 5월 16일에 중소국경협정이 체결되어, 극동의 대부분의 국경이 확정되어 1992년에 비준되었다.

특히 이제껏 쌍방이 관리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분쟁의 원인이 된 전바오섬은 중국측으로 귀속이 합의되었다. 소련붕괴 후, 러시아는

협상을 이어받아 1994년에 중앙아시아 부분에 대한 중러국경협정을 체결하여 1995년 10월 17일에 비준했다.

 

중러국경의 서부 미확정부분 54km가 확정되면서 중앙아시아의 국경문제는 완전히 해결되었다. 소련에서 독립한 중앙아시아 각국과

중국과의 국경협정은 개별적으로 체결되었다. 나머지 미확정부분(총면적 375평방km)은 1991년의 중러동부국경협정에서 거론되었던

아르군강의 섬(볼리쇼이섬, 중국명 아바가이토 섬), 아무르강과 우수리강의 합류점에 있는 2개의 섬(타라바로프 섬, 우수리 섬)으로

합의에 곤란을 겪었다.

 

이들 3개의 섬에 관한 협의도 진행되어 푸틴 대통령과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이 만난 자리에서 2004년 10월 14일에 최종적인

중러국경협정이 체결되었다. 이 협정에서 아무르, 우수리 합류점의 부분에 대해서는 분쟁지를 이등분하여 분할해 타라바로프 섬

전체와 우수리 섬의 서쪽 절반은 중국, 우수리 섬 동쪽의 하바로프스크 시에 접한 부분은 러시아로 귀속하게 되었다.

 

또, 내몽고자치구 측의 볼리쇼이 섬은 중러양국에 의해 이등분하기로 결정했다. 중국의 전국인민대표대회의 상무위원회는 2005년

4월 27일, 러시아 연방의회 국가원(하원)은 2005년 5월 20일에 이를 비준해 6월 2일에 양국 외무상들이 서명했다. 2008년 7월 21일에

중러외무상이 동부국경확정에 관한 협정서에 서명하면서 중러국경은 완전히 확정되었다.  

 

[출처] 중소국경분쟁|작성자 도위창


중월전쟁


중월 전쟁(中越戰爭) 또는 중국-베트남 전쟁(中國越南戰爭)은 1979년 2월 17일 국경분쟁을 시작으로 일어난 중화인민공화국과 베트남 사이에 일어난 전쟁이다.

1.배경

1975년 북베트남의 베트남 전쟁 승리로 베트남은 공산 통일되었고, 그 여파로 인접국인 캄보디아와 라오스도 공산화되었다. 베트남 공산당은 전쟁 중에 중국으로부터 많은 지원을 받았으나, 역사적으로 베트남인들의 대중국 감정이 좋지 않은 데다가 공산 정권이 남베트남의 상권을 장악하고 있던 화교를 탄압하여 양국관계는 험악하게 되었다.

이와 동시에 친중국계 캄보디아와 베트남의 관계도 악화되었으며, 급기야 베트남-캄보디아 전쟁이 발발하였다. 베트남의 이웃 나라 캄보디아는 1975년 4월 론놀의 친미 군사 정권이 전복되었고, 1976년 1월 폴 포트가 이끄는 크메르 루주가 정권을 잡고 민주 캄푸치아의 성립을 선언했다. 그러나 폴 포트 정권은 대량 학살을 수반하는 공포 정치를 실시하였고, 통일 베트남과의 대립이 격화되어 1978년 1월에 국경 분쟁으로 국교를 단절하기에 이르렀다.

캄보디아 내의 베트남계 주민에 대한 폴 포트 정권의 박해와 공포 정치가 극에 달하고 캄보디아와의 미확정 국경 문제로 인해 크메르 루주의 국경 침범과 도발이 반복되자, 통일 베트남 정부는 캄보디아에서 망명해 온 크메르 루주군 사령관 헹 삼린 등을 지원하는 형태로 캄보디아를 침공하였고, 1979년 1월에 프놈펜을 점령하여 헹 삼린을 수반으로 하는 친(親)베트남 캄보디아 정권을 세웠다. 이에 중국 정부가 후원했던 폴 포트는 밀림 지대로 도망쳤다.

베트남 공산당이 소련-중국 분쟁에서 소련측을 지지한데다가 베트남군의 침공으로 캄보디아에서 중국이 지원하던 폴 포트 정권이 붕괴되고 친베트남 정권이 들어서자, 중국 지도부(덩샤오핑과 화궈펑)는 캄보디아 전선에 머물던 베트남군의 주력을 철수시키기 위해서 베트남의 북부를 침공하기로 결정하였다.

2.전쟁 과정

1979년 2월 17일 국경 지대인 윈난 성에 집결한 중국군은 베트남과의 국경을 넘어 공세를 시작하였다 그런데, 베트남 북부는 열대 산악 지형으로 중국군이 대규모 병력을 이동시키는 데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당시 베트남군은 주력 부대가 캄보디아에 있었기 때문에, 중국 침공군에 맞선 병력은 민병대와 국경 수비대뿐이었다. 그러나 베트남군은 수십 년 간의 실전 경험이 있었고 현지 지형에 익숙했던 반면, 중국군은 1960년대와 1970년대를 중국을 뒤흔든 문화대혁명 때문에 장비나 통신면에서 근대화가 지체되어 있는 상태였다. 이 때문에 중국군은 전쟁 중 많은 사상자를 내는 희생을 치렀는데, 그 와중에도 계속 전진하여 3월 6일 국경에서 40 km 정도 떨어진 요충지인 랑선을 점령하였다.

이후 중국은 일방적으로 "징벌적 목적을 달성했으므로 철군한다"고 발표하여 랑선을 철저히 파괴하고 철군하였다.

3.결과

중국군은 "목표를 달성했다"고 주장하며 철군하였으나, 캄보디아 주둔 베트남군을 철군시키려던 당초의 전쟁 목적을 전혀 달성하지 못했다.

중국과 베트남은 1980년대 내내 국경선 획정을 두고 산발적인 전투를 계속 벌였다. 1989년 베트남군이 캄보디아로부터 철군하자, 양국 사이에 평화 협상이 시작되어 1999년 중국-베트남 간 육지 국경선을 획정하는 국경 협정이 체결되었다. 이 와중에 1980년대 내내 베트남에서는 해상로를 통한 화교들의 탈출이 계속되어 보트피플이 동남아 해상을 떠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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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개요

1975년 남부 베트남을 함락시킨 통일 공산베트남은 전통적으로 反中감정을 갖고 있는데다가 소련과의 탄탄한 연대력을 갖고 있어 중국으로서는 베트남을 매우 위험스레 보게 된다.

게다가 사회주의 체제를 뿌리내리려했던 베트남으로서는 베트남에 거주하는 화교들의 영리행위가 전형적인 자유경제행위를 주도하고 있었으므로 화교에 대한 탄압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러나 중요한 외화획득원의 하나였던 화교에 대한 탄압정책을 중국정부로서는 도전으로 받아들인다

2.일지

1978년 가을 부터 베트남과 중국의 대립은 매우 빠르게 악화되었고, 매스컴을 통한 비난 성명전도 강도를 더욱 높여가게 된다.

1979년 초부터는 국경지역에서 작은 충돌들이 일어나면서 사상자가 나오기 시작하며, 양국의 상대방에 대한 비난 강도는 더욱 높아지면서 국경선에는 군대가 증강배치 된다.

중국군 수만명이 운남성(雲南省)에서 베트남의 국경지대로 이동하는 것이 미국의 인공위성에 의해 확인되기 시작했으며, 이어서 국경선상의 십여 군데에서 포연과 화염이 일어나는 것도 포착하여 서방세계에 알리게 된다.

중국군은 5개사단 약 7만명의 병력으로 구경선으로부터 20-30Km 떨어진 인구 3~5만 정도의 작은 도시인 베트남의 몽카이, 하치만, 라이차우 3도시를 목표로 주공격 루트를 삼아 공격 한다.

1979년 2월 18일 중국은 '베트남에 대한 징벌이며, 영토에 대한 야심은 없다' 성명을 발표한다.

이에 베트남의 Hanoi 방송은 중국의 침략에 항의하며 항전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한다.

1979년 2월 20까지 중국군의 침공군 병력은 더욱 늘어나 63형 전차 수백대를 포함하여 10만명 이상으로 늘어난다.

중국군은 후방에 580만명의 병력이 있었지만, 이들 모든 병력을 운남성 일대로 집결 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국경선 일대는 주로 1,000~1,500m에 이르는 산악과 아열대림 지역으로 대규모 병력의 이동이 어려울 것으로 예측 되었으나, 중국군은 인해전술에 기초하여 아열대 산림을 벌채하가면서 길을 뚫고, 이 뚫린 길로 병력을 투입하는 제파공격으로 베트남군의 진지를 압박한다.

베트남으로서는 이 국경산악 지대가 돌파 당하면 국경지역으로부터 160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수도 Hanoi가 위태로워지며, 이 산악지대를 벗어나면 Red river의 삼각주에 위치한 Hanoi까지는 방어가 불가능한 평야지대가 펼쳐지는 지리적 약점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베트남군으로서는 이 산악지대에서 중국군의 주력에게 타격을 입힐 필요가 있었다.

무식할 정도로 병력을 대량투입하여 무조건 전진돌파하는 중국군의 전술에 맞서 베트남군과 베트남 지방 예비군들은 민간인들을 대피 시키고, 산의 능선을 중심으로 북사면에 견고한 방어진지를 구축하여 완강히 항전한다.

중국군은 엄청난 병력의 손실을 감수하고라도 베트남 진지를 공략하기 위하여 많은 전차와 보병을 투입하지만, 오히려 개전 24시간만에 63형 전차 13대를 격파 당하는 수모를 겪는다.

이들 63형 전차는 대개 베트남군 보병이 발사한 소련제 싸가 대전차 미사일에 의해 파괴 되었다.

중국군과 베트남군은 쌍방간에 포병의 많은 화력을 동원하기도 하였지만, 산악과 삼림으로 이루어진 지리적 특성상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

이에 초조해진 중국군은 2월 20일 현재 까지 중국군은 목표한 대부분의 베트남군의 방어진지를 돌파하는데 실패하면서, 추가로 10만명의 병력을 투입하게 된다.

1979년 2월 24일에는 결국 20만명의 대공세 앞에 베트남의 돈단과 몽카이 방어진지가 돌파 당한다.

그러나 중국군은 이 작은 도시를 점령하기까지 2,000명의 전사자와 40대 이상의 전차와 차량을 잃게 된다.

이에 반해 베트남군은 완강하고도 적절한 작전을 펼쳐 엄청난 공격에도 불구하고 중국에 비해 1/3 수준인 840명 사상이라는 병력손실에 그칠 수 있었다.

1979년 2월 27일부터 베트남은 반격에 나선다.

1979년 2월 28일 베트남군은 중국군에게 빼앗겼던 돈단市을 다시 탈환한다.

베트남 병사들이 중국군의 숫적 위력 앞에 결코 두려워하지 않고 항전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중국 수뇌부에게 이 탈환 소식은 엄청난 충격이 되었다고 한다.

공군의 동원은 전면전으로의 확전을 우려한 탓인지 양측에서 많이 동원되지는 않았지만, 중국군의 J6(Mig-19의 중국형)와 베트남군의 A-37이 일부 출격하여 주로 소규모 대지 공격에 투입되었는데, 중국군의 J6이 15대 이상 격추 된데 비하여 베트남군이 1/3수준인 5-6대 정도를 잃었다.

1979년 3월 1일부터 중국군은 6.25때 투입되었던 정예의 325사단과 338사단을 주축으로 란손市를 점령하기 위해 공격을 강화한다. 중국군은 6.25 때처럼 인해전술에 기초한 제파공격으로 베트남군 진지를 파상공격하여 차례로 공략하게 된다.

베트남군은 몇몇 거점에서는 전멸상황까지 가면서도 항전하면서, 전략적 철수를 병행하는 전술을 구사하였는데, 이는 중국군에게 가능한 한 많은 손실을 강요하면서, 지탱할 수 없을 때에는 퇴각하는 방법이었다.

60,000명 이상의 병력을 집중하여 란손市를 점령한 중국군은 이 도시를 철저하게 파괴 한다.

1979년 3월 2일에는 국경선에 위치한 Laokai도 중국군에게 점령 당한다.

1979년 3월 2일 소련은 전쟁이 장기화할 경우 베트남에 대규모 의용군을 파견한다는 발표를 한다.

1979년 3월 3일 국경선으로 부터 30Km 거리를 어렵게 점령한 중국군은 '징벌'을 달성하였다고 성명을 발표하고 철수를 시작 합니다. 이에 베트남군도 휴전을 전한다.

1979년 3월 15일 중국의 국방장관 화국봉은 베트남에서 완전철수 하였다고 발표 한다

3.결과

이 전쟁에 중국군은 20만명의 병력을, 베트남은 10만명을 동원하였다.

이 후 베트남은 중국군 41,705명 섬멸, 전차와 차량 421대 그리고 화포 66문을 파괴 또는 노획하였다고 발표한다.

이 전쟁에서 중국군은 징벌의 목적을 달성하였다고 성명을 발표하였지만, 피해는 예상외로 커서 중국 수뇌부에게 많은 충격을 주었다.

중국의 11개 사단이 괴멸적 또는 중대한 손실을 입는 예상외의 타격을 받은데에는 베트남군이 열세한 병력에도 불구하고 숫적 열세에 대한 두려움을 갖지 않았고, 미국제 M113장갑차와 소형무전기 같은 상대적 첨단 장비를 효과적으로 이용하였기 때문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79년 발행된 중국군의 보고서는 보병의 돌격에 의한 인해전술은 현대전에 적합하지 않은 과거의 전법이며, 중국군 역시 과거의 군대에 불과하다고 자체 평가를 하게 되며, 1982년 부터 중국군 현대화 작업에 들어가게 된다

http://blog.daum.net/007nis/15870673

티베트 침공 - 1950년



티베트는 유라시아 대륙의 중앙부에 위치한 험준한 티베트 고원에 위치하여, 독자적인 문화권을 구축해왔다. 그러나 청나라때

일시 청국군의 주둔을 받아들여 보호국이 되었다. 또 19세기에는 영국의 세력하에 들어가 1904년에 영국군은 라사에 주둔했다.

신해혁명 후 티베트는 자립하여 제 2차 세계대전시엔 중립정책을 유지했다.


하지만 대전시 티베트는 중립정책을 표방했어도 영국군 및 미군 등 연합군과 중화민국으로의 병참선을 제공했다. 당시 티베트의

지도자는 제 14대 달라이 라마였는데, 1945년에 전쟁이 종결되자 인도와 중화민국에 대표단을 파견하여 티베트의 주권을 확립하려

시도했지만 중국 국민당 내부의 강경파가 저항하여 실패했고 곧이어 발발한 국공내전의 여파로 독립으로의 길은 미루어졌다.


마오쩌둥(毛沢東)이 이끌던 중국 공산당은 국공내전에 승리하여 1949년 10월 1일에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을 선언했다. 그 6주 후,

중국인민해방군이 티베트의 영역인 동부 국경부근에 집결했다. 이는 티베트 세력으로의 침공을 위한 전초였다. 1950년 1월 1일에

중국 국제방송(라디오 베이징)은 판첸라마 10세의 요청으로 중국인민해방군이 티베트를 해방시킬 준비가 되었다고 방송했다.


삼동 린포체 및 달라이 라마 14세는 이것을 <중화인민공화국의 일방적인 약속이다>라고 주장했다. 1월 7일에 중국인민해방군은

<티베트의 동포해방을 개시한다>라고 선언하여 중국의 침공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중국의 티베트 침공의 움직임에 미국 정부는

영국의 대표단을 만나 국무성에서 회의를 열고 티베트에 대한 지원을 논의했지만 한국의 정세가 급박하고 자국의 권익과 그다지

관계가 없는 분쟁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미국은 8월에 티베트에 인도를 경유한 극비원조만을 실시했다.


1950년 3월 7일에 티베트 정부대표단이 중국과의 대화에 나서, 영역보전과 안전보장을 위해 제 3국인 인도의 칼린퐁에서 만나,

티베트, 인도, 중국, 영국의 대표단이 개최장소를 놓고 토론을 벌였다. 티베트는 싱가포르나 홍콩에서의 개최를 희망했고 영국은

인도, 인도와 중국은 베이징을 지지했다. 티베트 대표단은 최종적으로 1950년 9월 16일에 델리에서 중국측 대표단을 만났다.


중국측 대표인 위안쭝시안(袁仲賢)은 <티베트는 중국의 일부이다, 중국이 티베트의 국방, 외교, 무역을 담당한다>라고 하면서

이를 받아들이면 평화적인 해방이 될것이며 거부하면 전쟁이 될 것이라 경고했다. 티베트는 달라이 라마 및 여러 장로들이 모여 곧

긴급회의를 열었는데, 이를 논의하던 중, 인민해방군이 국경을 넘기 시작했다.


1950년 3월에 인민해방군은 티베트 국경에서 훈련을 마치고 먼저 캄의 다르셋(현재의 캉딩시)으로 진주했다. 다르셋은 중국인이

많은 도시라 별다른 저항은 없었다. 4월에 약 3만명의 인민해방군이 다르셋을 지나 캉제까지 이르는 자동차도로 건설과 지형정보

수집에 나섰다.


6월에 인민해방군은 캉제의 앞에 있는 뎅고의 티베트군 기지에 600명의 조사대를 보냈다. 티베트 민간인들이 살해당하긴 했지만

티베트는 군 자체가 없었기에 큰 저항없이 이를 점령했다. 티베트인이 살해당했다는 소식에 티베트의 토착 부족장들이 800명의 무장한

수하세력을 이끌고 반격에 나서 600명의 인민해방군은 전원 살해당하였다.


그러나 인민해방군에 있어서 병사의 목숨은 중요하지 않아, 점령에 있어 충분한 정보를 모았기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1950년 8월까지

캉제까지의 자동차 도로가 완성되자 상인들은 이를 환영했다. 인민해방군은 캉제를 점령하고 캉제에 거점을 설치했다. 당시 공산당

제 1서기였던 덩샤오핑(鄧小平)의 서남국(西南局) 산하의 인민해방군 제 18군이 가을부터 본격적인 침공에 착수했다.


1950년 10월 7일 밤에 인민해방군은 장궈화(張国華)장군을 지휘관으로 하여 라싸의 동쪽 100km 위치까지 침공했다. 인민해방군의

병력은 약 4만명 남짓으로, 동쪽에서 세 갈래로 동시에 진군했다. 이에 대해 티베트는 의용군을 포함한 약 8천명의 병력이 저지에

나섰다. 덩커우(磴口)에선 무자 다본이 이끄는 티베트인 부대가 영국군이 남기고 간 브렌 303 경기관총으로 응전했다.


하지만 인민해방군은 티베트인 부대 50명을 전멸시키고 란삼의 티베트군 주둔지를 향해 진군했다. 그리고 약 200km 남쪽에서는

인민해방군이 양쯔강을 도하하여 마캄 가투크 주둔지를 습격해 250명의 티베트인 부대를 전멸시켰다. 티베트 북쪽에서 무자 다본이

소규모 부대를 이끌고 도하저지에 나섰지만 란삼의 티베트인들이 후퇴하면서 고립되고 말았다.


10월 8일에 인민해방군의 파상공세를 힘겹게 막아내던 무자 다본은 더 이상 싸울 수 없을 정도로 병력이 감소하자 야간에 부대를

해산했다. 결국 무자 다본도 휘하의 몇명만 데리고 라싸 방면으로 후퇴했다. 10월 16일에 차무도(현재의 창딩시)에서 행방불명되었던

응가포 응가완 지크메 지사를 발견한 무자 다본은 그에게 전력을 집중하여 라싸로의 교통로를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응가포는 이에 반대하여 10월 17일에 인민해방군에 투항해버렸다. 10일간의 저항 끝에 티베트측은 패배하여 인민해방군은

10월 24일에 티베트군에게 완정승리하여 차무도를 점령했다. 티베트의 수도 라싸에서 파견된 병사들도 결국 후퇴해버려 티베트군은

약 6천명이 전사했다고 추정된다. 인민해방군의 피해는 114명이 전사했다.


차무도가 긴급히 무선을 라싸정부에 보냈지만 당시 지도부는 휴가기간이었고 다른 나라들도 이 사태를 몰랐다. 라싸정부는 어디까지나

중앙 티베트만을 지키며 사태가 중앙 티베트로 번지는 것을 막으려고만 생각했다. 그리고 인도의 매스컴이 티베트 대표단에게 중국의

침공에 대해 묻자 <그런 사실이 없다>며 부정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의 태도를 묵인하는듯한 행동을 취했다.


한편 인민해방군은 환영모습과 항복조인을 하는 모습의 사진을 언론에 내보내며 선전활동에 열을 올렸다. 1950년 10월 25일에

중화인민공화국은 중국인민해방군의 티베트 진주를 선언했다. 이것은 차무도 침공에서 17일이 경과한 후였다. 다음날인 26일에

인도정부는 이를 <침략행위>라고 비난성명을 내고 영국정부도 이를 지지했지만 양국은 실제 티베트에 대한 군사지원에 나서진 않았다.


11월 7일에 섭정이던 타크타 린포체 가완 순라푸는 은퇴하고 덴진 감쵸가 16세에 본인의 희망과 상관없이 국왕이 되어 친정을 개시했다.

하지만 라싸회의의 요청에 따라 인도 국경의 야톤으로 피난했다. 티베트의 라싸정부는 UN에 인민해방군의 침공을 제소했지만 UN은

UN군이 관련된 한국전쟁의 대응에 바빠 티베트에 개입할 여유가 없었다.


한편 티베트는 UN의 상임이사국인 중화민국이 독립국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자국영토로 취급했기에 정식적인 독립국으로 취급받지

못했고 제소문도 티베트 정부가 인도를 거쳐 발송했기에 제대로 확인되지 못한 점도 있었다. 중국의 티베트 침공에 대해 사라예보와

엘 살바도르가 티베트를 옹호했지만 효과는 없었다.


또 중화민국 정부도 티베트를 <자국영토>로 취급했기에 결과적으로 자신들의 적국인 중화인민공화국에 의한 티베트 침공을 변호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또 UN총회 운영위원회도 <티베트와 중국, 인도에 평화를 위해서도 UN에서 토의하는 것은 걸맞지 않다>라고 하여

심의의 연기를 결정했다.


1950년 11월 9일에 중국 공산당은 중앙 티베트 공략작전의 준비에 들어가 티베트 정부와 협상을 계속했다. 인민해방군이 제압한

동티베트 지역은 12월 15일에 시캉성(西康省) 장족자치구(蔵族自治区), 칭하이성(青海省) 인민정부가 설치되었다. 그러나 이후

차무도에선 친중, 반중부족간의 약탈과 살육이 시작되어 마을이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다.


인민해방군은 중앙티베트로의 군사침공 거점으로 1951년 1월 1일에 차무도를 창두(昌都)로 개칭하고, 인민해방위원회를 설립했다.

1951년에 중화인민공화국은 동투르키스탄(신장위구르), 칭하이(靑海), 창두의 세 방면에서 인민해방군을 라싸로 진격시켜 그 무력을

배경으로 달라이 라마 정권에 17개조 협정을 강요시켜 조인케했다.


중국 공산당은 티베트 정부대표로서 아보 아왕 지그메 등에게 <인민해방군의 창두에서의 철수를 협상하는 권한>을 주어 베이징으로

파견했다. 창두 인민정부의 티베트인 괴뢰였던 아보는 중화인민공화국이 제시한 17개조 협정에 서명하여 5월 23일에 승인하게 했다.

이 17개조 협약에서 티베트 정부는 지방정부로 규정하고 티베트에 대한 중국의 사실상 귀속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1951년 5월 26일에 중화인민공화국 국영방송은 아보에 의한 협정서명을 방송했다. 이 합의로 인해 UN은 1959년에 티베트의 지위에

관한 법률회의를 무효로 했다. 달라이 라마 14세는 티베트 남부의 야톤에 피난했는데 가지고 있던 라디오에서 아보에 의한 티베트어

방송을 듣고 경악했다.


달라이 라마 14세는 협정체결의 뉴스를 듣고 아보의 행위에 충격을 받았지만 판첸 라마는 5월 30일에 달라이 라마에 대하여 중국정부의

지도하에 티베트 정부에 협력한다>고 표명했다. 한편 아보는 이후 티베트에서 중국 공산당의 충실한 대변자가 되었다. 1951년 7월에

인민해방군 라싸주둔사령관인 장징우(張経武)장군이 야톤을 방문해 달라이 라마 14세에게 조약의 유효성을 인정하도록 요구했다.


미국은 달라이 라마 14세에 대해 망명하여 협정의 무효를 외치라고 했지만 많은 승려들이 달라이 라마 14세의 라싸 복귀를 원했기에

결국 라싸로 돌아가 협정에 기초한 개혁에 추진하게 되었다. 9월 6일에 달라이 라마 14세는 9개월만에 라싸로 돌아왔는데, 3일 후

3천명의 인민해방군이 라싸로 진주했다.


10월 24일에 달라이 라마 14세는 <협정을 승인하며 인민해방군의 진주를 지지한다>라는 편지를 마오쩌둥에게 보냈는데, 이 편지는

이후 중국 공산당이 티베트 지배의 정당성을 주장하는데 크게 이용되었다. 그러나 중화인민공화국의 무력적인 제압은 현지 티베트인의

반감을 불러 와 1956년에 티베트 동란이라는 대규모 소요사태로 이어지게 된다.

[출처] 티베트 침공|작성자 도위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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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욱 17-03-29 20:01
   
러중전쟁도 있는데. 러샤침구놈이 이사실을 중국이 쉬쉬 한다고 합니다.
흑요석 17-03-29 20:56
   
이웃 국가와 국경 분쟁이 없는 나라는 거의 없더군요.

특히 중국이나 러시아처럼 거대한 대륙 국가들은 국경 분쟁이 없을 수가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