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터키를 함부로 대할 수 없다는 인식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인식의 근원엔 바로 보스프러스 해협이란 지정학적 요충지가 있지요. 간단히 말해 터키란 국가가 없어서야 러시아의 지중해 진출을 막아낼 수 없다는 것인데요. 확실히 이런 인식은 과거엔 딱 들어맞는 말이긴 합니다.
보다시피 냉전시기 세력구도를 보면 러시아의 지중해 진출을 막아내는 건 온전히 터키와 그리스의 몫입니다. 보다시피 매우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터키가 한국에 비해서 매우 높은 대우를 받았고, 훨씬 더 관대한 군사원조 프로그램의 수혜를 입었습니다. 그러니 터키 국방비가 한국의 절반에도 못 미치지만 이럭저럭 비슷한 군사력을 유지할 수 있었지요.
그런데 말이지요. 이런 구도는 어디까지나 먼 과거의 일입니다. 요즘도 터키가 러시아를 견제할 수 있는 유일한 말인가? 하면 이젠 그렇지 않거든요.
과거 소련의 "고기방패" 처지였던 동유럽 국가들이 죄다 NATO에 가맹했습니다. 지중해를 틀어 막는 임무를 터키 혼자서 하는 게 아닌 상황입니다. 그에 더해 바르샤바 조약 지상군을 막기 위해 터키의 지상군이 필요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조지아는 반러 국가이고, 우크라이나도 마찬가집니다. 러시아가 과거처럼 지상군을 끌고 억지로 지중해로의 관문을 열어제낄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이런 상황에서 터키의 역할은 과거처럼 중요할 수가 없습니다. 남는 게 있다면 흑해함대를 틀어 막는 것인데, 보다시피 흑해함대 전력이 과거와는 비할 바 없이 쪼그라 들었습니다.
더구나 루마니아와 불가리아가 나토에 가맹함으로서 터키 아니어도 흑해로 항공력을 투입하는 것이 가능해진 상황입니다. 이제 NATO, 미국은 우크라이나라는 거대한 종심을 사실상 확보한 상황에서 과거처럼 수세적으로 해협을 틀어막아야 하는 상황이 아닙니다. 지상군까지 동반한 공세를 막아내야 하기에 해상차단에까지 여력을 쓸 수 없었던 과거와 달리 흑해 일대에 과감히 항공력을 투사할 수 있게 된 상황입니다.
이러니 미해군이 수상함을 흑해에 파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루마니아와 불가리아가 가진 흑해 연안의 기지를 활용할 수 있고, 지상 항공기의 우산을 집어 쓸 수 있는 상황이며, 흑해함대의 전력은 과거 같지 않거든요.
그러니 터키의 전략적 가치는 과거에 비해 많이 떨어진 상황입니다.
더구나 터키가 엇박자를 내기 시작하자, 미국은 그리스에 무게를 실어주기 시작했습니다.
"지난봄에는 비무장 MQ-9 리퍼 드론들을 그리스 라리사 공군기지에서 운용하기 시작했다."
미군의 한 관계자는 이와 관련해 터키 인시를리크 공군기지에서 이뤄지고 있는 미 공군 작전을 대체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라며 확대 해석을 경계했다.
네, 강한 부정은 긍정이란 말 들어보셨죠? 사실상 터키에서 수행하던 임무를 그리스 기지로 돌리던 게 작년 실정입니다. 이미 차근차근 터키의 역할을 줄여가고 있는 것이 미군의 실정입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굳이 터키 아니어도 러시아 함대 차단은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터키가 설사 보스포루스 해협을 통과시켜준다 하여도 다르다넬스 해협을 추가 통과해야 합니다.
물론 다르다넬스 해협 역시 터키의 영역입니다만. 그 출입구의 통제권은 그리스가 가지고 있습니다. 보다시피 에게해 모든 도서 지역은 그리스가 가지고 있습니다.
더구나 크레타엔 미 6함대 기지가 존재하므로 터키 아니어도 러시아 수상함대를 틀어막을 수 있는 선택지는 당장. 흑해연안의 동맹국 기지에서 발진하는 항공력, 그리스의 에게해 전력, 크레타의 미국과 나토 합동함대까지 거름망이 여럿입니다.
터키의 지정학적 조건은 이제 충분조건이지 필요조건이 아닌 것입니다.
문제는 터키의 독재자가 자기 자신이 보고 싶어하는 현실만 보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더 이상 예전 같은 지정학적 가치를 가지고 있지 못한 상황에서 배짱을 튕기면. 미군은 당연히 플랜 B를 찾아 나설 수 밖에 없습니다. 특히 터키가 러시아와 가까워지면 가까워질 수록 터키의 지정학적 가치는 줄어드는 정도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비수가 되어 돌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최근 IS전쟁을 치루면서 이라크 정부는 터키의 야욕을 크게 경계하고 있는 형국입니다. 장기간 전쟁을 함께 치루며 합동전투 능력을 배양하고, 네트워크를 결속시킨 미국이 양념만 쳐줘도 이라크는 얼마든 터키를 견제하려고 들 것입니다. 거기에 더해 걸프만의 맹주 사우디 아라비아는 이미 카타르 사태를 계기로 터키와 적대하는 상황입니다. 거기에 영토를 갈취당한 시리아 역시 터키라면 이를 가는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까지 등을 돌린다면 터키에겐 러시아만 남게 됩니다. 이것이 터키에게 유리한 상황일까요? 아마 절대 그렇지 않을 겁니다.(오히려 그리스는 터키 독재자의 삽질에 쾌재를 부르고 있을 겁니다.)
미국은 터키를 어르고 달랠 생각이 없습니다. 그래야 할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P . S
에르도안 이 멍청한 양반이 EU/미국과 척을 지는 선택지를 하며 시리아에서 깡패짓을 하는 이유엔 대터키 경제투자 상위권에 중동 이슬람 국가들이 대거 포진하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즉, 예전처럼 유럽에 대한 경제의존도가 많이 떨어져 배짱을 튀길 수 있었던 것인데, 이번 카타르 사건으로 사우디 아라비아와 척을 지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막대한 오일머니가 터키를 빠져나가는 상황이 연출되고 있습니다. 이를 카타르가 막아주고 있는 상황인데, 글쎄요.
유럽과 미국에게 대놓고 엇나가고 있으며, 사우디 아라비아와 대적하는 터키가 카타르, 이란, 러시아 정도를 믿고 밥 숟가락 뜨고 살 수 있을까요? 결코 그렇지 않을 겁니다. 실제로도 터키는 엄청난 경제공황에 시달리고 있지요.
터키의 외환보유고는 고작 280억 달러에 불과합니다. IMF직전 한국의 외환보유고가 200억 달러 수준이었다는 걸 고려하면 놀랍도록 가소로운 수치입니다. 특히나 한국이 장단기 합쳐 1700억달러의 외채를 가진 데 반해 터키는 단기외채만 1180억 달러 수준입니다. 총 외채는 3130억 달러고요. 사실상 유럽과 미국이 만기를 미뤄주거나 이런 저런 조치를 통해 호흡기를 붙여주는 꼴입니다. 그나마 세속정권들이 쌓아온 외교적 자산 때문에 살아 남은 것입니다. 만일 유럽이 일본 같은 비정함을 가졌다면 터키는 진즉에 IMF구제금융을 신청해야 했을 것입니다.
아직도 주변국(EU)의 자비에 빌붙어 밥숟가락을 뜨고 있는 가운데, 멍청한 독재자를 축출하지 못한다면 터키의 미래는 꽤나 험난해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