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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1-08-02 14:19
월맹군 1개 연대가 청룡(해병대)1개 중대에 궤멸 "한국군 만나면 피하라
 글쓴이 : skeinlove
조회 : 4,345  

군대는 군대다워야 하며 군인은 군인다워야 한다고 봅니다.

본전 생각일는지 모르겠으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수많은 선배님이 지금 후배들의 그 자리에서 지금보다 수배.수십 배는 더 힘든 실무생활을 해왔다는 겁니다. 그러니 지금 당장 힘들다고 낙담하지 말고 기운내기 바랍니다.

때론 억울한 일도 있고 부당한 지시.대우를 받을 수도 있다는 거. 군필자 그 누군들 모르겠습니까만..

살아보니 군 생활 보다 사회생활이 더 많이 힘들고 어렵습니다.

2년의 군 생활도 견디지 못하는 나약한 정신상태로는 사회에 나와도 견뎌내지 못합니다.

군대는 밑바닥부터 상위까지 단기간에 모두 경험할 수 있는 사회생활의 축소판이라고 생각합니다.

군인이라고 전투기술만 중요한 것이 아니며 그 안에서의 인간관계를 통한 처세술을 배우는 곳이기도 하다는 것도 명심하기 바랍니다. 하기 싫다고 안 하고 보기 싫다고 안 볼 수도 없다면 저런 사람에겐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방법을 터득하는 것도 하나의 공부인 겁니다.

 

지금의 해병대는 골병이 들었고 그걸 지켜보는 제 가슴엔 피멍이 들었습니다.

영원한 해병으로서 할 말은 많으나 나 같은 예비역이 더 이상 떠들어봤자  무엇하겠습니까.

다만 선임으로써 현역에 있는 후배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아래의 기사를 통해 우리 선배님들이 피와 땀으로 이룩한 해병대 명성을 다시는 더럽히지 말아 주길 바랍니다.

그런 거 관심이 없다면 그런 사람은 해병대 안 갔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해병 모병 기준 또한  반드시 바뀌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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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맹군, 1개 연대가 청룡(파월 해병대) 1개 중대에 궤멸되자 "한국군 피하라" 지령

 

영원한 사령관 채명신의 '내가 겪은 전쟁'] [下·끝]
당시 美 언론들 극찬 - "2차대전 후 최고의 승전보"… 닉슨 대통령도 나서 "쾌거"
강군 토대 닦은 베트남戰 - 64년부터 8년간 31만명 파병, 맹호·청룡부대 등 승리 신화한 치의 땅이라도 더 가지려는 혈전(血戰)이 전쟁 말 곳곳에서 벌어졌다. 텍사스고지, M1고지 전투가 그 대표적인 현장으로 상대는 중공군이었다. 1953년 7월 27일, 3년 2개월에 걸친 포성(砲聲)이 멈췄다. 당시 나는 60연대장이었다.

1948년 제주 4·3사건부터 시작된 나와 공산주의의 싸움이 5년을 넘겼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1965년 3월 김용배 육군참모총장이 나를 호출했다. 육군작전참모부장으로 발령 내면서 1964년 터진 베트남전 연구를 지시했다.

좌익·종북주의자들은 지금 한국의 베트남전 참전을 '미제의 용병'이라 폄하한다. 새빨간 거짓말이다. 당시 미국은 한국이 참전하지 않으면 주한 미2·7사단을 빼려 했다. 당시 미군 1개 사단 전력은 국군 수개 사단에 맞먹을 만큼 강했다.

베트남에 파병된 해병 청룡부대 용사들이 고노이섬에서 작전을 벌이기 위해 헬기에서 내리고 있다. 청룡부대는 월남전에서 ‘귀신잡는 해병’신화를 재확인하는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북한은 1962년 4대 군사노선으로 군비를 증강했다. 우리 전력은 6·25전쟁 때만큼이나 열세였다. 김일성은 "전쟁이 터지면 잃는 것은 휴전선, 얻는 것은 조국통일"이라고 종종 큰소리쳤다. 그런 때 미군 2개 사단의 이탈은 국가 위기였다.

결국 우리는 1964년 9월 외과병원 장병 130명, 태권도 교관 10명을 파병했다. 1965년 1월 8일 2000명의 군사원조단을 보냈고 비둘기부대·육군 맹호부대·해병 청룡부대를 파견하게 됐다. 8년간 연인원 31만2853명이 참전하게 됐다.

1972년 3월 사령부가 철수할 때까지 한국군은 월남에서 신화적인 무공을 세운다. 그중 내가 제일 자랑하고 싶은 것은 '두코 전투'와 해병 신화(神話)를 세운 '짜빈동 전투'다. 맹호6호, 오작교, 암행어사작전도 그에 못지않다.

‘자유통일 위해서 조국을 지킵시다~’라는 노래로 유명한 맹호부대 용사들. 성대한 환송식이 열렸다는 당시 조선일보 기사다.

1966년 7월 맹호기갑연대 3대대는 미군의 '파울리비아'작전을 지원하러 캄보디아쪽 국경 4㎞ 지점의 두코(Duc co)로 이동했다. 이때 우리는 대규모 인원과 화력을 동원하는 미군과 달리 중대(中隊) 위주 전술기지 방어 개념을 도입했다.

8월 9일 밤 10시 40분부터 다음날 새벽 4시 30분까지 월맹군 2개 대대가 인해전술로 아군 1개 중대를 기습했다. 적의 맹렬한 기관총과 박격포 공격을 교통호 속에서 견디던 맹호용사들은 미군 전차 2대가 지원해주는 틈을 타 반격에 나섰다. 백병전 결과는 대승이었다. 아군은 7명이 전사했지만 월맹군 189명을 사살하고 6명을 포로로 잡았고 기관총·로켓포·실탄 수만 발을 노획했다. 미군사령관은 현장을 찾아 "보지 않고는 사실이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의 압승"이라고 했다.

당시 공격부대는 월맹군 88연대 2개 대대 700명 병력으로 아군보다 6배나 많았다. 공산주의자들은 후퇴 때 꼭 시체를 챙겨 가는데 그럼에도 200명가량을 남긴 걸 보면 500명 가까이를 잃은 게 분명했다. 한마디로 궤멸적 패배를 당한 것이다.

다음 날 현장을 찾은 외신기자 중 1년 후 이스라엘의 국방장관이 된 모세 다얀이 있었다. 그는 당시 통신사 기자였는데 두코전투의 포병전에 주목했다고 한다. 그는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1967년 6일전쟁 때 전격전(電擊戰)의 신화를 이끈다.

큰 전과를 올렸지만 월맹군의 보복이 걱정됐다. 다섯달 후 마침내 우려가 사실로 드러났다. 파월한국군 가운데 가장 북쪽에 위치한 청룡부대 11중대가 타깃이 된 것이다. 청룡부대 주둔지 주변의 부락민들은 거의 적색(赤色)분자였다. 월맹군은 한국군의 손발을 묶으려는 듯 아이와 어린아이들을 맨 앞에 내세우며 공격해 왔다. 1967년 2월 14일, 짧았던 구정(舊正) 휴전이 끝나는 칠흑처럼 어두운 밤이었다. 당시 11중대 1소대장이 지금 재향군인회 신원배 사무총장이다.

월맹군은 화염방사기까지 동원했다. 적 수백 명이 달려들었지만 2분대장 이중재 하사가 화염방사기 사수(射手)의 뒤통수를 개머리판으로 쳐 무력화시킨 뒤 이진 병장, 김용길 중사가 수류탄으로 적 대전차유탄포·로켓 진지를 무너뜨렸다. 피가 튀고 살이 찢기는 백병전은 다음 날 새벽까지 계속됐다. 결과는 적 사살 243명, 포로 2명. 적 1개 연대 공격을 우리 해병 1개 중대가 막아내자 미국 언론들은 제2차 세계대전 이래 최고의 승전보라 평가했다.

닉슨 대통령도 나섰다. "17년 전(6·25전쟁 때) 미국이 한국에 심었던 신뢰와 도움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확실하게 증명해준 쾌거입니다!" 이 전투 후 뉴욕타임스가 월맹의 지령문을 보도했다. '100% 승리의 확신이 없는 한 한국군과의 교전을 무조건 피하라.'

월맹군은 한술 더 떠 한국군을 이렇게 평가했다. '한국군은 모두 태권도로 단련된 군대니 비무장 한국군에게도 함부로 덤비지 말라.' 전투에 참가한 병사 전원이 1계급 특진했다. 대한민국 훈·포상법 제정 이래 처음있는 일이었다. 한국은 월남에서 유례가 없는 전과를 올렸다. 난 이게 절대적인 전력 열세 속에서도 조국을 지켜낸 6·25전쟁의 경험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6·25전쟁과 베트남전을 거치면서 한국군은 세계가 무시할 수 없는 최강의 군대로 재탄생했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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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왁 11-08-02 16:28
   
으어어 글 읽는 내내 소름이 쫙!

해병대 포스가 좔좔이네요...ㄷㄷ
쿠플 11-08-02 17:30
   
살상레이트 16:1의 무시무시한 전투.

아마 이 기록은 못갈아치울겁니다.
압스 11-08-02 17:43
   
해병대 훌륭하죠. 솔직히 평균 일반 병 보다 훈련도 더 강하고 지원해서 간 청년들이니깐요.

아마 전투력도 일반병보다는 많이 높겠죠.

하지만 제가 지금까지 해병으로 밝힌 사람을 몇명 만나봤는데 극과 극입니다.

대학교 MT가서 해병대 체육복 입고 오는 사람 ㅡㅡ;;  (2004년도였음)

우월감을 느끼는 건 좋은데 그걸 표출하거나 다른 병과를 우습게 보는 행동. 전에도

네이버 뎃글에 " 너내들을 가고 싶어도 못가는 곳 가는 사람들 부러워 하지 말라!."

이런 글을 좀 기분 나쁘더군요.

아님 술먹을 때 해병대 관련 내용을 너무 자랑스럽게 말하는 사람 등.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도 많아요. 요즘 저랑 같이 술먹고 자주 노는 분도

해병대 나오셨는데 무척이나 겸손하시고 자기 군대 얘기는 다른 사람에게 자랑하려는 말이 아니라

주변 사람을 즐겁게 하려고 말하시고 평소에는 해병대 말을 일체 없으십니다.

그냥... 결론은 몇몇분들 때문에 인식이 좀 안 좋은 것 같아요.



마지막으로 군 생활이 자랑 스러우려면 자신이 말해서 자랑스러운게 아니라 주변에서 그 사람이 그렇게 느낄 때
가 아닐까 싶습니다.
     
깨칠이 11-08-02 20:04
   
나도 해병대가서 고생하고 왔지만 대부분의 떠벌이들은 그나마 쉬운곳에 있다온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나같은경우엔 군시절을 별로 얘기하고싶지도않고 생각하고싶지도 않아서..
          
이리맨 11-08-03 12:16
   
이분 말 동감 ㅡ,.ㅡ 우리형님두 해병대 출신인데 생각만해도 지긋지긋하다고 말도 안꺼냄
     
뻑가리스웨… 11-08-03 22:28
   
가끔 그런애들 있음 내세우기 좋아하는...
시간의눈 11-08-03 00:15
   
좌익·종북주의자들은 지금 한국의 베트남전 참전을 '미제의 용병'이라 폄하한다. 새빨간 거짓말이다. 당시 미국은 한국이 참전하지 않으면 주한 미2·7사단을 빼려 했다. 당시 미군 1개 사단 전력은 국군 수개 사단에 맞먹을 만큼 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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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2사단 지금도 강합니다...
막강한 화력의 우리나라기갑여단과 미군편제 기갑대대와 붙어두 어찌될지...
십수년전 미2사단기갑대대에 기갑대대 중대대표로 방문한적있습니다...
우리대대에서 포수 조종수구분해서 견학갔습니다..
1개소대 편제가 2대의 m-1전차와 2대의 브래들리로 무장하였고...
m-1무섭지만 소대편제에 브래들리 편제가 더무섭죠...30미리였던가에...대공경계헬기잡기도 좋고...
기계화보병까지.. k-6로 헬기 잡는다는분들...
저도 시물레이션 헬기 백발백중 잡아요...실사격 해보면 쉽지 않을겁니다...
그래도 뭐니뭐니해도...OH-58헬기편제죠...
제기억이 맞다면 그리고 우리대대장님 미기갑대대대대장과 왈~
공군으로 따진다면 조기경보기 띄워놓구 기갑전 펼치는거죠...
3~5키로내 전차와 장갑 피아식별기종이 된답니다..
십키로내에는 정확한 기종판별은 안되어두 대수 파악되고요...
그리고...전차포사격...일주일에 두세번하더군요 (거리도 멀지 않더군요)
한번사격나가려면 바리바리 싸들고 임했던 우리하곤 틀리더군요..
우리처럼 연습발광탄이 아닌...
실탄씁니다...물론 대전차 고폭탄입니다
당시 알던 내용은 우리세금이라하던거 같던데;;
어의 없더군요...
경악할 내용은 미군기갑대대 대대장은
완전군장하고 있더군요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미군 무섭습니다...
케골 11-08-03 07:54
   
이런 한국군을  깍아내리려고  종북좌파들은  베트남만행이니  온갖 이상한 말로  혐한들 모습을  보이며  댓글로  초딩들부터  세뇌중...
그레이우드 11-08-03 10:33
   
그 놈의 정신력 타령은 그만했으면 하는데요. 우리나라 병영 문화는 그야말로 제국주의 시대의 일본군 병영 문화를 이어받은겁니다. 정신력을 따지면서 아래로 책임 전가와 구타가 일상화된...절대 강군의 조건이 안 되죠.

나약한 정신?

차라리 적군을 마주하고 있으면, 당연히 쏴죽여도 문제 없고, 이기고 싶겠으나
선임이 증오의 대상이라면??

그건 나약함이 아니고 그냥 끙끙 앓는겁니다. 그걸 이겨내는건 정신력이 아니고, 한 마디로 병.신.짓이죠.
그레이우드 11-08-03 10:36
   
예전이 더 힘들었다. 이런 말은 결과적으로 매번 보수적 해결 방법으로 귀결되게 만들지요.

우리가 더 힘들었으니 너희들은 참아내어야 한다. 뭐 이런 말은 결과적으로 축소 지향적 사고방식이지요. 절대 과거를 벗어날 수 없는...

육체적으로는 그 시절이 힘이 더 들었을 겁니다. 근데 정신적으로는 요즘에 군이 더 괴리감이 큽니다.

월급으로 휴대폰 요금 내면 끝나죠. 그게 진짜 현실이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