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1년 후 UN에서 희생이 많다고 전쟁을 그만두라고
압력이 많이 들어 왔습니다. 정전협상이 논의가 되었고
그래도 전쟁을 하면서 결국 정전이 되었죠. 이승만은 삐져서
참가안하고요.400만 명이 희생이 되었다고 하네요 썩을
일본이 반으로 갈라져야 하는데 한반도에서 대리전쟁이
터져서 동족상잔이 벌어진거죠
왜 한반도가 반으로 분단이 되어야 했나요.
독일처럼 일본이 전범국이니 분단이 되어야 맞는거죠.
서독은 미국이 먹었고 동독은 소련이 먹었죠.
미국이 온전히 일본을 먹었고 일단 무슨 선언인가 해서
김일성이 그거 믿고 밀고 내려온거죠. 남한의 공산당 20만 명이
당원이 있으니 호응도 해줄거라는 믿고 현실은 미국이 일단이라는 전제를
놓아서 전쟁에 참여를 한거죠. 한반도가 분단이 된거 자체가 이치에
맞지 않다는 겁니다. 일본이 반으로 갈라져야죠. 그럼 미국이 한반도
정책을 새롭게 수립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북한이 소련보다 강대국이여서 소련이 북한의 주장에 굴종한건가요? 북한이 요구를 하든 말든 소련 본인들 사정에 따라 정책을 하는거지 계속 반대 해서 무기 안줬으면 김일성이 전쟁 일으켰을까요? 스탈린과 김일성의 의견이 합치됐기 때문에 무기 지원을 한거지 북한이 무슨 소련에게 어거지로 무기 받아낼만한 힘이 있어서 무기 받았습니까?
무슨 말도안되는 얘기를 하시는건가요? 6.25는 소련의 스탈린과 김일성의 뜻이 합치해서 벌어진 전쟁입니다. 김일성은 한반도를 일통하려는 야욕에, 스탈린은 이 전쟁에 미국과 중국을 끌어들여서 서로의 힘을 소진시키자는 뜻에서 이루어진 야합입니다.
2차세계대전, 독소전의 결과, 그 전장이 된 소련의 국토는 피폐해졌고 사상자수도 수천만에 달하는등, 국력이 많이 소잔되었습니다. 때문에 중국을 통일한 모택동의 중공과 미국의 힘을 두려워해서 이들의 힘을 깍아내고싶어했죠. 그 전장이 바로 한반도인것입니다.
때문에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중국의 참전약속을 받는걸 조건으로 남침을 용인했는데, 당시까지만해도 북한의 김일성과 중국의 모택동은 사이가 좋았습니다. 국공내전이 한창이던 40년대말, 중국공산당의 주요 지휘관들의 처자식들은 모두 북한의 평양으로 외교관 신분으로 와서 편하게 지냈습니다. 이게 다 김일성이 받아주었기때문입니다.
해서 1세대인 김일성과 그 휘하인 빨치산출신들과 모택동 및 그 휘하의 지휘관들 사이엔 끈끈한 전우애 비슷한것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김정일인 2세대까지는 유지되었죠.
아무튼, 이런 호의로 중국의 참전을 약속받고서는 한창 농사짓기 바쁜때에 새벽 기습남침을 시도한것입니다. 이런 사실들은 모두 90년대 초반, 소련이 해체되는 과정에서 나온 자료들이 서방에 전해지면서 알려지게되었습니다.
6.25전쟁 중후반이면...
이미 휴전협상이 한창일 때라 한뼘의 땅이라도 먹겠다고 한국과 북한은 고지 하나를 두고
피터지게 싸우고 있었지만, 미군이야 빨리 휴전협정 맺고 집에 가면 그만인데 무리하게
상륙작전 같은 걸 할 이유가 없었죠.
6.25가 3년 내내 싸운 것 같지만 1950년 6.25일 전쟁 발발, 같은해 9월15일 인천상륙작전 및
9월28일 서울 수복, 신나게 북한으로 쳐들어가다가 중공군 참전으로 다시 밀려서 서울을 뺐긴게
1951년 1월4일입니다. 이후 국군과 유엔군이 재반격해서 서울을 되찾고 현재의 휴전선까지
올라간 후 교착상태에서 휴전협상에 돌입한게 1951년 7월입니다.
불과 1년 남짓한 사이에 큰 사건은 다 일어났고, 그 후 2년은 지루한 휴전협상이 이어지면서
앞에서 말한 고지탈환을 위한 소모전만 이어지고 있었죠. 이런 상황이었으니 북한군과 중공군이
인천에서 된통 당해서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상륙작전을 다시 하기는 힙들었을 겁니다.
제2의 상륙작전 보다는 차라리 맥아더가 건의했다 트루먼에게 퇴짜맞았던 중공에 대한 핵무기
사용이 현실적이지 않았을까요.
곁가지로 말하자면..일제에 광복이 되자마자 소련군이 먼저 평양에 들어왔습니다
미국은 좀 나중에 오고요
소련군이 북한에 온것은 일본군 잔당 무장해제를 시키려왔던 겁니다
소련군이 먼저 온것도 미국은 용인해주었습니다 소련군은 일본 관동군과 싸워서 피를 흘린만큼
소련군 한반도 진입을 인정해주었습니다
소련군은 들어 오자마자 독일에서의 점령군 처럼 행세하지않았습니다
사회주의 진영 인사들이 주축으로 결성된 단체에게 자치권을 부여해주었으며 자주권을 인정해주었습니다
그런데 미군 같은 경우 들어온 즉시 일본군 무장해제는 커녕 일본인들과 자본가들이 빠저나갈수있게
조선인들은 폭동들이다 생각하고...철수때까지...당분간 일본군 무장을 허용해주었습니다
그리고 남한 자치위원회라는 단체를 박살내었죠...일일이 따자보면 미국도 그리 좋은게아닙니다
미국이라는 커다란 동맹국이 눈앞에 있어서 그렇지 분명 명암도 존재해요.3.8 선은 먼저 미국에서 제안한거구요...
이건 또, 왠 말도 안되는 얘긴가요. 소련은 독소전의 결과, 그 전장의 대부분이 자국에서 벌어진터라, 국내의 여러 생산시설등이 파괴되었고 피폐해졌으며 사상자수도 수천만에 이러를정도로 피해를 많이 봤습니다.
때문에 북한 지역에 구 일제가 건설해놓은 이런저런 산업시설등을 떼어갈려고했고 그때문에 북한지역에서는 소련군에대한 여론이 안좋아졌습니다. 이후 신의주 반공학생사건도 나고 해방뒤 들어온 항일독립군들도 자신들이 내세운 김일성에 위협이 될 수 있다는 판단하에 밤중에 기습해서 몰살한 사례도 있습니다.
반면에 미군은 군정을 펼치면서 수많은 밀가루등, 식량을 들여와 남한 사람들은 그 덕을 많이 봤죠. 이승만을 미국의 앞잡이거나 허수아비라고들 비판하는데, 세상에 미국의 유명사립대에서 박사학위까지 따고 70넘어서 들어온 사람이 그러하다면, 이제 갓 서른중반에 들어서서 소련군의 등에 업혀온 김일성에대해서는 어찌 생각해야할까요?
전에 중국에서 연금 받아먹고 사는 해방군 출신 늙은이 하나 우연하게 ..(뭐 지금은 저승갔다 하더만..)
국공 내전후 남경에 주둔하다가 영문도 모르고 창문 가린 열차로 수일간 이동...도착하니...
역에 조선말이 쓰여있어 둥절했는데... 평양역이더라고...일성이가 마중나오고..
그 역에서 조선인민군 군복으로 바꿔있었다고 하더만....불과 수일후 남침때..최선봉에서 내려왔다더만.....
미군 소장인가 체포할때..언저리에서 얼정거려... 훈장도 받았다고 하더만..
인천 상륙적전때 포로로 잡혀 거제도에 수용됐다가..포로 송환으로 귀국했다고..
이미 해방군은 최초 남침때부터 최선봉에 환복하고 참전했다네..이 빠가야로야..ㅎㅎ
일성이가 안쳐들어왔어도 몇년후라도 승만이가 쳐들어갔을겁니다.. 그당시 사람들 인식에 분단된 현실을 인정할수 없었던겁니다... 그리고 전선이 삼팔선 부근에 고정되면서 미국이든 소련중국입장에서 더중요한것은 어떻게 체면있게 정쟁터에서 철수하는게 최우선선택이 되였던겁니다.. 더이상 상륙작전이나 핵무기사용은 이른바 강대국 국익에 부합되지 않죠..
헐... 승만이를 너무 크게 보시네요. 애당초 군비확장엔 관심도 없던 승만이가 대체 왜? 민족주의자도 아닌 이승만을 너무 좋게 보셨네요. 뭐, 민족주의자가 다 옳다는 건 아닙니다만 최소한 당시 한반도 통일을 꿈꾼 건 김구 같은 민족주의자들 뿐이죠. 민중들이야 38선 그어놓았어도 사뿐히 즈려밟고 왕래했을 뿐이고.
이승만은 솔직히 한국 역사상 치부라 생각합니다. 덕분에 아직도 전작권도 없는... 일본이랑 뭐가 다르냐! 싶은 나라로 남아있을 뿐이고... 쯧.
상륙작전을 다시 안쓰는 이유는 상륙작전 자체가 희생이 큰 작전이라는 점과
적이 두번속을 가능성이 낮기 때문이죠.
거점이 없는 적진 한복판에 많은 수의 군인들을 쏟아내어야 하는데...
적의 대비가 철저하거나 작전이 조금만 노출되어도 동원된 군안들은 몰살을 당하게 됩니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 장면만 봐도 얼마나 큰 희생이 필요한지 감이 오실겁니다.
그런데 이미 인천에서 써먹은 상륙작전에 대해 북한이 항구마다 대비를 안하고 있을 가능성은 별로 없었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