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 포병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는것이 주전장이 월맹 정규군이 포진한 분단선이나 이북의 월맹지역이 아닌 자유월남지역이었고 따라서 포병전을 전개하는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지요.
알려져있다시피 전면전이 아닌 거점을 통한 게릴라전 위주로 상황이 전개되다 보니 대병을 수용하는 거대 기지 하나와 그것을 베이스로 하여 헬기와 장갑으로 나와바리를 카바하는 즉 기동력을 강조하는 미국식보다 방어에 수월한 전방 거점을 미리 점령하여 포병대의 사거리안에 소수로 분산 배치를 해둠으로써 베이스를 벗어나면 제대로된 방어시설물 없이 야간전투에 매우 취약할수 밖에 없던 교전지역 미 보병대보다 적은 자원과 인원으로도 매우 효율적인 방어임무 수행및 수색정찰활동이 가능했다고 봅니다. 물론 적보다 낮은 고지에 기지를 건설했다가 박격포 공격에 노출되 희생자를 다소 배출했던 전투도 있습니다만.
당시 상황에 있어선 아주 맞춤한 선택이라고 볼수 있겠는데 물론 미군의 막강한 물자보급과 우리 포병대
의 현란한 사격술이 있었기에 큰 전공을 세우는게 가능하기도 했겠지요.
암튼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취합해보면 우리 국군의 리즈시절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만약 그정도로 미군과의 협업과 합동전술등이 준비된 상태에서 김일성이 남침을 해왔다면 낙동강까지 떠밀려 내려갈일도 없었을거고 역사는 바뀌었을수도 있었겠다 싶습니다.
음..게시글엔 짜빈동 전투 (1967) 이후 미군이 한국군으로부터 이 전술을 배워가서 교리에 쓰기시작했다고 나오는데
방금 위키피디아에서 보긴 했습니다만 파이어베이스에대해 한국군에 관한 설명은 전혀 나와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미군은 이미 1965년부터 사용했다고 나오는거 같습니다.
"One of the first fire support bases constructed by U.S. troops was built in October 1965. Designated Bill, it was built by the First Cavalry Division in Pleiku Province soon after the division arrived in South Vietnam"
아무나 편집가능하고 자료가 채워진지 얼마안되는 위키보다 월남전관련 전사나 사료들 보는게 더 흥미롭고 제반적인 시대적 상황이 눈에 들어올듯 하네요.
베트남 부수상이 여의도 국회와서 파병요청한거며.. 박정희대통령이 파병까지 걸리는 준비시간 물었을때 각군 사령관들이 어떻게 대답했는지.. 파병되는 국군작전권을 미국이 달라고 했을때 국군지휘관들이 얼마나 극력반대했는지 그 결과로 월남현지에서 국군이 어떻게 성공적인 활동을 벌일 수 있었는지(상기 중대독립기지 운용 포함).. 등등 시간 아깝지 않을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