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대 일본에 회자되어 공포심을 불러일으키고
조선 출정을 앞두어 백방으로 설계도를 입수하려 노력해보았지만
포기할 수 밖에 없었던 미혹의 화포.
'비격진천뢰'
그림은 235mm 구경의 중완구.
대완구와 더불어 진천뢰 발사관으로 활용됨.
설치와 운반이 쉽도록 손잡이 달림.
무쇠 재질로 내구성 최상.
짧은 포신으로 활용성 극대화.
주둥이 부분에 포환을 넣고 발사하는 방식으로 구조가 간단명료.
조선 병사들이 쉽게 사용법을 익힐 수 있어 효율적.
해상전이나 공성전에 효과 탁월.
손잡이 두 개의 대완구.
중완구 보다는 대구경으로 사료됨.
구경이 약 280-300mm 내외일 것으로 추측.
유효사거리 600m.
포환이 적진영에 떨어지면 심지의 불씨가 내부 화약에 옮겨 붙어 폭발.
철편과 철구의 조각들이 비산해 인마살상.
조선시대 과학기술 수준을 감안하면 당시로서는 매우 혁신적인 무기임을 알 수 있다.
사실상 오늘날의 포탄과 구조적으로 별 다른 점이 없을 만큼 선진적인 무기체계.
과연 왜놈들이 두려워할 만함.
각각의 부품.
신관역할을 하는 심지와 화약으로부터 심지를 보호하는 대나무통.
철구와 철구 내부에 채워지는 화약과 철편으로 되어 있다.
대구경의 육중한 포환이기 때문에 화약이 터질 때의 폭압만으로도 적을 제압하기에 충분했을 듯.
당대에 이런 최첨단 무기를 동양의 작은 나라 조선에서 만들어 전투에 활용했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로, 우리조상님들의 장인정신과 기술 응용력이 대단했다는 것을 알 수 있음.
실제 이 비격진천뢰가 전장에서 어떤 효과를 발휘했는지 조선왕조실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음.
1592년 9월1일
박진(朴晋)이 경주를 수복하였다. 박진이 앞서 패하였다가 다시 군사를 모집하여 안강현(安康縣)에 주둔하다가 밤에 몰래 군사를 다시 진격시켜 성 밖에서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
를 성 안으로 발사하여 진 안에 떨어뜨렸다. 적이 그 제도를 몰랐으므로 다투어 구경하면서 서로 밀고 당기며 만져보는 중에 조금
있다가 포(砲)가 그 속에서 터지니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고 쇳조각이 별처럼 부서져 나갔다. 이에 맞아 넘어져 즉사한 자가 20여
명이었는데, 온 진중이 놀라고 두려워하면서 신비스럽게 여기다가 이튿날 드디어 성을 버리고 서생포(西生浦)로 도망하였다. 박진이 드디어 경주에 들어가 남은 곡식 만여 석을 얻었다.
포탄이 발사되자,
경주성 적진 한복판에 떨어지고
이를 신기해 하던 왜군이 가지고 놈.
적장을 포함 20여 명이 즉사.
왜놈들이 놀라서 성을 버리고 도망.
조선군의 사기는 분기탱천.
이순신 장군도 해상에서 사용했으며
임진년 7월 고경명 의병군이 금성을 공격할 때,
계사년에 우배선 의병군이 향교의 일본군을 공격할 때,
계사년의 2차 진주성 전투와 정유년 남원성 전투에서,
계사년 2월 24일 안동 의병대는 반암의 야지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비진천뢰를 운용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는 기록도 있음.
혁혁한 공을 세운 비격진천뢰가 언제 발명되었는가는 약간의 논란이 있으나
일본 기록이나 1592년 6월 용인 전투 패전을 논하면서
친하게 지냈던 이장손이
수년 전에 비진천뢰를 만들어 쏘고는 했다는 이야기를 한 것을 보면,
실제 비진천뢰 발명 시기는 임진년 이전이 될 확률이 높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