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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6-04-28 22:21
[기타] 잘못된 역사의 일부.......
 글쓴이 : 달보드레
조회 : 2,459  

ㅡㅡ;


6줄 요약.

 

1. 6.25전쟁때 중국의 인해전술에 당한게 아니다.

 

2. 일본군 육사출신 지휘관 한명의 잘못된 판단으로 지금의 38선까지 밀렸다. (누구처럼 사병들을 남겨두고 도망침)

 

3. 이일을 계기로 전시작전권이 미국으로 넘어갔다.

 

4. 그 지휘관은 훗날 박정희때 국방장관까지 했다.

 

5. 훗날 노무현정권 전작권 환수때, 반대 대표자였다. (그의 황당한 짓거리로 빼긴걸, 본인 스스로 반대함)

 

6. 그는 어떠한 심판도 받지 않고, 늙어서 죽었고, 국립묘지에 뭍혀 있다.

 





001.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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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ltrakiki 16-04-28 22:30
   
전형적인 왜나라 장교답네요.
마음울림 16-04-28 22:59
   
그러게요 안보안보 하면서 6.25 패착에 대해서  왜 제대로된 교육을 안하는지;;
sunnylee 16-04-28 23:22
   
당시 한국군 장군인데 한국말 전혀못해
일어 통역관을 대동해야 작전회의가 가능했던 영혼까지 친일파 장군..
저 패전에도 장군직을 유지한것도 아부지 와 동기인 일본군관학교 출신들떄문..
이승만이후 박정희때는 쿠테타에 참가,
국영기업사장, 외국대사까지 역임하면 평생 부귀영화 누리며
국가 유공자로 국립묘지에 영면...

 일제에서는 학도병 모병,6 .25에선 연이은 참패,군사독재정권 탄생시 쿠테타 가담..
평생 한국에 민폐만 끼친 전형적 기회주의자.
나무와바람 16-04-28 23:47
   
6.25 전쟁사를 공부하다보면 참 속터지는 일들이 한두가지가 아니죠...
전투 경험도 거의 없는 무능한 고위장교들이 군대를 지휘했었다 보니 아주 그냥...에휴...
검푸른푸른 16-04-28 23:52
   
애초에 저런넘을 청산못한 당시 정부의 우매함이 원인.
당장 목아지를 쳐도 시원찮을 판에...독립군 후손은 바닥을 기는 생활을 하고
친일파는 국립묘지에 안장되고 ㅡㅡ; 이게 나라냐.
저런 무능력한 놈도 친일파 시절 경험살린답시고 한자리 시켜줬다는거에 더 학을 뗀다 진짜.
기껏 저런넘 앉힐거면 그냥 친일파 청산하고 새로 시작했어도 별 차이 없었을거 같구만.
태강즉절 16-04-28 23:53
   
전작권 어쩌구 할때...반대 성명에 나선..전직 국방 장관이라는 것들..
사진 속 횡대로 죽~~~~나열한  허풍 당당한 인물들..
알기론 그 중에...한 분(?)인가만 빼곤....몽조리..."전과자"....(성우회가 아니라 빵우회?)
각종 군 비리 부정으로 쇠고랑차고 달려서리..콩밥 먹었던 시키들! (진짜 뻔뻔도 하지..)...존경을 금할수없었다는..
이거이 또한 매우 잘못된 소사지여..ㅎ
없습니다 16-04-29 00:07
   
2,3,4,5,6은 별문제 없지만, 1번은 아니라고 봐야합니다. 중공군이 인해전술을 구사한건 맞으니까요. 중공군의 병력이 압도적으로 많아서라기 보다 전술적인 집중을 잘 구사해서 개별 전투에서는 항상 한국군보다  압도적인 병력 우위하에서 공격해 왔었습니다.

윗글에 나와있는 7사단 덕천영원전투의 경우 중공군 2개군 5개사단이 7사단을 집중공격했죠. 그것도 연대나 대대별로 하나하나 분리시킨후 집중 포위공격했으니 당하는 7사단 장병입장에서는 쏴도쏴도 몰려온다라는 비명이 나올수 밖에 없는거죠. 그게 바로 인해전술입니다.
     
구름위하늘 16-04-29 13:08
   
조금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미군이나 한국군이 무너진 건 숫자의 우세가 아니라
후방을 포함한 포위상태가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서 발생했기 때문이죠.

공세를 나오는 적군의 숫자가 방어를 하는 아군의 숫자보다 많은 것은 자주 있는 일이고,
공산군에서 잘 사용하는 첨입같은 우회전술로 뒤통수에서 적군이 다수 나타나니
전열이 무너진 것이지 숫자가 많아서 무너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기관총으로 대표되는 속사무기가 나온 이후로는 단순한 숫자로 밀어붙이는 것에는 한계가 있으니까요. 저는 오히려 적의 우회전술을 막지 못한 아군의 변명이 '인해전술'이라고 생각합니다.
Marauder 16-04-29 01:10
   
https://namu.wiki/w/%EC%9C%A0%EC%9E%AC%ED%9D%A5#fn-6 나무위키 검색해보니까 이정돈아닌것같은데요
퉁가리 16-04-29 01:43
   
핵을 포기하거나 통일될때 까지는 전작권환수는 당연히 반대해야 맞는거지..
전작권환수 되었다면 무슨 꼴을 당했을지 뻔한거지.
국방을 자력으로만 하는건가?
     
북진멸일 16-04-29 04:50
   
전작권이 환수 되면 무슨 꼴을 당하는지 말씀 좀 해보시길...
사고의 다원화는 좋소만, 말하는 투가 기가 안차서 머리 속 생각을 묻는 거외다.
무슨 꼴을 당하나요?
함 들어 봅시다.
김석현 16-04-29 02:44
   
1번은 틀렸고... 2번도 상당히 왜곡되있고...

본문 내용도 좀 악의적이고..  도망갔다던가 피해내용 과장이라던가 밴플리트와의 대화내용이라던가 중공군의 침투와 맥아더등 미군 상층부의 판단은 제외하고 한 명의 책임으로 몰아가는 부분이라던가...

유재흥을 이용해서 박정희나 뭐 소위 보수진영을 공격하기 위하여 상당히 감정적으로 쓴 편향적인 글인듯?
     
구름위하늘 16-04-29 13:13
   
아니요. 유재홍은 정말 문제 있는 사람입니다.
군인으로서 자격이 없는 분(?) 입니다.
관련 자료를 많아보고 내린 저의 결론 입니다만....

6.25 전쟁에서 가장 큰 손해를 본 전투에서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빠지지 않은 분 입니다.

이건 제가 볼 때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로 생각됩니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연합군이 후퇴할 상황 자체는 맞지만,
그 후퇴가 질서정연한 작전 상의 후퇴이냐
전열이 무너진 무조건 탈주 이냐는 상당히 이후 전쟁 양상에 영향을 주니까요.
김석현 16-04-29 02:50
   
유재흥이 패전의 책임이 있다지만 저 정도의 서술은 조작에 가깝죠 한국군은 장비도 부족했고..

최소한 밀게라면 좀 더 성숙한 반응을 기대하고 싶은데..

이런 프로파간다가 먹히기 때문에 이런 식의 정치공작이 활개를 치는건 아닌지...
중거런 16-04-29 07:01
   
육이오때 인해 전술이라하지만쪽수에서  최대  두배였죠.  그왼  쪽수가  좀많았고 중국애들은총도부족해서  앞에애가죽으면 그총 주벼  했다던데.  미국의 전략물자의  지원으로  압도적군비를 갖고도 줬다더군요.  한마디로 헬월남의  복사판이었다는거. 
우리선조들은  제사밥을 어찌 바다처무글수있는건지.
wndtlk 16-04-29 12:05
   
저 전투 패배의 책임은 10군단장 아몬드 소장이 더 큽니다.
유재흥 3군단장이 10군단 접경지역에 1개 연대를 배치해 초계하려 했는데 아몬드 10군단장이 자기 영역 침범한다고 난리를 쳐서 연대 배치 초계를 포기한 상태에서 중공군이 3군단 10군단 접경지역을 돌파하여 3군단이 포위된 것이 주된 이유입니다.
     
wndtlk 16-04-29 16:25
   
요런사람이 아몬드입니다. 수륙양용 트랙터가 물에 뜰 수 있는가?라고 한 사람.
유재흥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는 않아 보이네요. 맥아더 허리띠 붙잡고 겨우겨우 자리지킨 장군.

Edward Almond
Korean War and X Corps
In 1950, MacArthur split X Corps from the 8th Army then placed Almond, who had no experience with amphibious operations, in command of the main landing force just before the amphibious invasions of Inchon and Wonsan.Template:The Coldest Winter-Halberstrom

Almond earned the scorn of Marine officers when, during the early phase of the Inchon landing, he asked if the amphibious tractors used to land the Marines could float.[7] During this invasion Almond failed to capture most of the opposing North Korean Army as they retreated from the 38th parallel to defensive positions above Seoul.

During this time, Almond had many conflicts with Major General O. P. Smith, commander of the 1st Marine Division, which was part of X Corps (and therefore under Almond's overall command) from October until December 1950.

Likewise Almond had a poor relationship with Lieutenant General Walton Harris Walker, commander of the 8th Army.

Historians have criticized Almond for the wide dispersal of his units during the X Corps invasion of the north-eastern part of North Korea, in November–December 1950. This dispersal contributed to the defeat of X Corps by Chinese troops, including the destruction of Task Force Faith, and the narrow escape of the Marines at the Battle of Chosin Reservoir. Almond was slow to recognize the scale of the Chinese attack on X Corps, urging Army and Marine units forward despite the huge Chinese forces arrayed against them. Displaying his usual boldness, he underestimated the strength and skill of the Chinese forces, at one point telling his subordinate officers "The enemy who is delaying you for the moment is nothing more than remnants of Chinese divisions fleeing north. We're still attacking and we're going all the way to the Yalu. Don't let a bunch of Chinese laundrymen stop you." As stated by a close associate: "When it paid to be aggressive, Ned was aggressive. When it paid to be cautious, Ned was aggressive"

Despite these mistakes and partly due to his close relationship with General MacArthur, the new Eighth Army commander Lieutenant General Matthew Ridgway retained Almond as head of X Corps. Ridgway admired Almond's aggressive attitude, but felt he needed close supervision to ensure his boldness did not jeopardize his command. Almond and X Corps later took part in the defeat of the Chinese offensives during February and March 1951, as well as the Eighth Army's counter-offensive, Operation Killer. Almond was promoted to lieutenant general in February 1951.
wepl 16-04-29 13:12
   
제발이런 선동글 정게나 동아게가서 해주세요 나무위키보니까 진짜 저 정도는 아니었는데 이건 너무 박정희를 까기위한 편향된 시각에서의 정치글 같음
<솔까 미국도 인정한 인해전술인데 뭔 중국이 인해전술 않했다는 건지도 모르겠고 유재홍 이분평가를 보니까 정말 재수 없는 사람이었다고 생각되는데 유재흥 이분 보다는 신성모 이자가 진짜인데>

나무위키에 있는 유재흥의 평가중 일부
(대한민국 군인으로서의 업적을 평가하자면, 전반적으로 볼 때 상대와 병력이 유사한 경우에는 잘 싸운 편이었으나 주로 그가 있었던 곳이 주공을 받아 무너지는 경우가 많았음을 감안할 때 실력은 평균보다 좀 더 나은 정도이나 운이 더럽게 없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사실 그의 악명높은 패배 모두가 "대놓고 약한 애를 갑옷 입은 애가 흠씬 두들겨 팬" 싸움이 아니면 "대놓고 약한 애를 아주 큰 애가 단체로 몰려와서 흠씬 두들겨 팬" 싸움이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 다만 그나마 피할 수 있었을 상황을 피하지 못한 경우가 비교적 자주 보인다는 점도 고려는 해야 한다. )
     
구름위하늘 16-04-29 13:17
   
저는 오히려 유재홍이 이런 약점이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적군이 일부러 유재홍을 노렸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면 후방지원은 가능할 지 모르지만 야전사령관으로는 문제가 있는 사람....

전쟁 중에 서로 상대방의 장수를 모르고 전투를 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고,
적장의 성향 파악이 작전 선택에 중요한 요소이니까요.

즉, 재수가 없어서 적 주공로에 그 분이 위치한 것이 아니라
그 분이 거기에 있었기에 적들이 그곳을 주공로로 삼은 것이지요.
     
경이파파 16-04-30 09:07
   
안 좋은 평가를 어떻게든 좋게 쓰려니 저런 평가가 나온걸로 보이네요.
관공서나 기업에서 변명하는 공문이나 서류  문구 잘 보면 이런 문구들이 아주 잘 나타나있죠.
마지막 줄이 딱 그에 대한 평가가 가장 긍정적인거네요.
황다도 16-04-29 16:04
   
다 좋은데 누구나 편집할 수 있는 나무위키글은 인용좀 안했으면 합니다. 참조하기는 좋지만 인용할 만한 위키는 아닌 것 같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