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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5-03-20 00:06
[밀리역사] 참혹한 역사의 흔적. 최후의 군사요새.제주도
 글쓴이 : 스마트MS
조회 : 4,3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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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는. 태평양전쟁 말기부터. 광복직전까지. 제주도민이 고통받던 지역중 하나였습니다.

1944년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대한민국에서 가장큰 섬. 제주도에 주둔하던 일본군은


200명 남짓이였지만.  태평양전쟁의 종결이 다가오던. 1944년 후반.


정확히 1944년 10월 미군에 의해. 필리핀을 잃은 일본군은..

일본군은 제주도의 방위를 매우 심각한 문제로 여기기 시작하였으며.

1944년 12월 일본방위총사령부는 미군의 제주도 공량을 상정, 제주도를 전략상 요지라고 인식후. 본격적인 움직임을 보여.

일본 군부에서는 막료를 파견하여 제주도를 시찰하게 하고. 연안진지의 요새-보루-포대-참호 등을 구축하라는 지시를 내리게 됩니다.

이에 따라

1945년 초부터 제주도에 임시 포대의 엄호와 상륙방어를 위한 해안가 진지구축 작업이 시작되었고

1945년 2월 9일 일본방위총사령관은 미군과의 본토 결전에 대비하여 7개방면의 육-해군 결전작전 준비를 명령하게 됩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제주도 방어작전으로서,

이른바 '결(決) 7호 작전'이 존재하며. 이는 곧. 제주도의 참혹의 역사를 시작하는. 시점이 됩니다.

윗 사진속. 해안 동굴기지는.

바로.

1945년 2월 부터는 제주 - 고산 - 서귀포 - 성산포 - 모슬포 등 해안절벽 곳곳에 동굴을 파서 만든 특공기지를 건설하기 시작하였으며. 완성된

이들 기지는 폭탄을 싣고 미 연합군의 함선에 돌진하여 그대로 부딪히는 또 다른 xx특공대.

'신요 [震洋]' 특공보트 및 '카이덴 [回天] 특공어뢰정을 숨기기 위한 목적이였습니다.

이와 같은 군사시설 공사에는 많은 제주도민들이 동원되어.

'혹사'를 당했으며.

7만 대군이 전도를 요새화하는 과정에서 도민들이 겪었던 고생은 다른 어느지역보다도 가혹한 것이라 생각됩니다.

일제가 일반적으로 '국민 직업능력 신고령'에 의해 강제 동원된 노무자의 나이는

만 16~50세 사이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수많은 군사시설 공사를 해야할 제주에서는 이 기준이 지켜지지 않았으며.

마을별로 인원이 할당되면 예순 살, 일흔살 노인들까지 동원되는 일도 흔했다고 하니..가혹한 공사에 동원된 노동력의 근원은 제주도민이며. 노동으로 인한 고스란히. 제주도민에게 몰리게 된것이죠.


(진해경비부 소속 제45-119-120  진양대가 제주도에 진출되었으며.

제45 진양대 무라야마 부대 50여척 188명

제119 진양대  다나카 부대 26척 187명

제120진양대 오노부대 26척 191명이  각각 성산포-서귀포-수월봉 해양에 배치되어. 미군함정 격침용으로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위의 동굴은. 카이덴 용 동굴기지로서..송악산 해안 일대에 15여개 가량있다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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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밖에.제주도 서부지역 대정읍 모슬포에 1937년 중일전쟁 발발과 함께 중국남부를 폭격하기 위한 거점으로  알뜨르 해군비행장이 건설되었으며.

이후 전쟁말기 1944년 5월제주시 용담동 정뜨르. 육군 서비행장이 완공되었읍니다.

비슷한 시기에도.진드르 육군동비행장과 내륙지역 교래리의 육군 비밀 비행장이 완공되어.


종전 무렵에는 제주도내에만.  80여만평의 토지에. 일본군 비행장이 세워진것이죠.

(현대까지도 그 당시 콘크리트로 만든 구조물. 격납고가 남아있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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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_1024_121470562964989.jpg천혜의 요새.

제주도 어승생오름 지역의 토치카와. 고사포 진지 참호등은 아직도 그 흔적을.

지니고 있지요.

제주도58군기지배치도.PNG

제 58군 사령부가.


제주도 결정부대로 신설되어.

지도상의 제주포내에.서남부 서북부 중부 동부에.각각 3개 사단과 1개 여단을 배치.


위장진지21개 전진 거점 18개 주 저항진지 54개 복곽진지 14개등. 총104개의 진지에.4곳의 군용 비행장

5곳의 해군기지가 존재하며.

육군만...

오키나와 전투 병력을 상회하는 8만 4천명을 집결시킬 예정이였으며. 실제 종전직전. 해방직전까지.

제주도에는 일본군만 7만여명에 달하는 병력이 주돈하고 있었습니다.

그 외에도 한라산 중턱에 뚫린 하치마키 라는 도로외에 각 진지와 진지 포구를 연결하는 군사도로도 요소요소에 남아 있다고 합니다.

특히. 제주도 남제주군 대정읍 송악산 일대의 지하 참호는 연 면적 5,7000㎡에 달하는데.

이는 일본내에서 가장 큰 군사시설로 여겨지는 해군 제 1항공시설 공장 (3,4800㎡)과

일왕과 정부기관을 피신시키려 했던 나가노현 미츠시로 대본영의 지하시설 (3,2000㎡)보다 휠씬 규모가 크며. 이것은

즉 현재 일본 국내에 존재하는 일본군이 만든 지하참호 보다도 1.5배 정도 크며 총 연장길이는 15km에 달하는것으로

 일본군이 태평양 전쟁말기 이른바 '본토 결전'을 위해 파 놓은 최대 규모의 지하참호가 일본 바깥에 있었음을 의미한다고 볼수 있는 구조물이라고 합니다.


만약. 미군의 진격로가. 혹은 일부가. 본격적으로 제주도로 향하였다면. 정말. 최악의 상황도 발생할수 있었을듯 보여지기도 하네요.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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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케스트 15-03-20 03:51
   
제주도에서 결전이 벌어졌음 미군 많이 죽었을듯.... 다행..
스마트MS 15-03-20 08:04
   
그렇기도 하지만.
대규모 사망자가 발생한것은..비전투원. 민간인인. 제주도민 이였다고 하네요..

1945년 5월. 대미결전의 최후의 보루로 결정되면서.
제주도내 노년층-어린이-부녀자등 5만여명을 본토(한국)에 대피시키기 위해 소개계획을 실시하던중.

5월 7일  제주도민을 태운 제주도- 목포 간 여객선인  고와마루호가 미군기의 공습으로 격침..

탑승객 전원이. '몰상' 당하는 사건이 벌어져.. 중지된 기록이 있답니다.

추가적으로.

광복이후. 9월  미군의 무장해제팀이 제주도로 직접 내려와. 제주도민이 피땀으로 건설한 군사시설을 파괴작업을 진행하며. 일본군의 재무장 요소를 봉쇄하는 한편. 자신들의 입지를 높게 평가하고자.
제주도를 군사기지로서 높게 평가하는 계기가 되었다고도 하네요.

이 계기는.
1948년 3월. 드래퍼 미 육군성 차관에게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제주도에 미군의 영구 기지를 설치할수 있도록 하겠다" 라는 약속까지 발전하였다고 하는데..흐음..

더욱이 1949년 중공군으로 부터 장개석이 격퇴당해 패망직전이였던 상황속.
국민당 총통 장개석 역시. 제주에

공군과 해군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이승만 정부와 접촉한 사실이 있었다고 합니다

19세기말 이래. 러시아-중국-일본 모두가 제주도를 군사적 거점으로 삼으려 했던 움직임을 복기해보면.
지금. 현대의 제주도 역시. 언제든지. 미-중-러-일 동북아4강의 군사각축장으로 변모될 중요한 거점이라 생각되기도 하네요.

(아. 러시아의 제주도 관심설은.  1985년 영국과 러시아간. 거문도 을 두고 군사기지 확보의 쟁탈점이 바탕이 되었다고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