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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1-03-03 08:01
K-2 '흑표' 차세대 주력 전차‥차기 정권에서 개발
 글쓴이 : ROK
조회 : 3,027  

K-2 '흑표' 차세대 주력 전차‥차기 정권에서 개발


흑표는 엔진이 과열되면  기름 유입량이 절반으로 줄어 속도가 느려지고 변속기의 냉각팬 기능이 떨어져 엔진까지 손상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방사청은 설계를 바꿔봤지만 지난달 31일 최종 시험에서 또 다시 개선에 실패했습니다.

방사청은 양산 계획을 백지화하고 차기 정권인 2013년 6월 이후로 국산 엔진 개발을 미뤘습니다.

흑표 개발에 투입된 국방 예산은 3천 백억 원.

예산 낭비는 물론 방산업체들의 도산도 우려됩니다.


http://media.daum.net/politics/others/view.html?cateid=1020&newsid=20110215225436983&p=i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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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2 전차 - MTU 엔진 100대 수입 2012년 6월 양산 -2013년 6월 이후분은 두산 엔진.  밀리터리 사진  2011/02/20 06:34

 http://blog.naver.com/ichuka/122615575


 

http://bemil.chosun.com/nbrd/bbs/view.html?b_bbs_id=10040&pn=1&num=61028

 

 

작성자 고구려 궁수

제목 K-2 전차 - MTU 엔진 100대 수입 2012년 6월 양산 -2013년 6월 이후분은 두산 엔진.

홈페이지 http://blog.naver.com/ichuka/121348459

 

 

 


차세대 전차 흑표의 심장 '수입하느냐 개발하느냐' 갈림길


2011.02.17

 

 

방위사업청에서 2009년 제시한 방안은 K2전차 엔진개발이 최초 계획대비 ▲10개월 지연 때는 사업이 1년 지연돼 2012년에 초도 전력화 추진 ▲15개월 지연되면 2013년 전력화


▲엔진을 해외서 도입해 2012년 첫 양산하고 2013년에 국내개발 엔진을 장착하는 방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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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표전차 파워팩 수입대체 추진

 


2011-02-16 오후 12:51:23 게재

 

 

K-2 흑표전차는 시험평가에서 결함이 발견된 파워팩을 수입으로 대체하는 방향으로 급선회하고 있다.

 

방사청은 17일 사업분과위를 개최해 흑표전차의 초도 양산분 100대의 파워팩을 독일에서 수입하는 안을 상정할 예정이다. 이달말 방위사업추진위를 거쳐 3월에 현대로템이 독일과 일괄계약을 체결하면 15개월 후 납품을 받을 수 있다는 계산이다.

 

 

 

--------->MTU에서 일정물량을 요구했다길래 390대 전부이거나 최소한 절반 이상이라서


국산은 개발성공해도 물량이 너무 줄어들거나 아예 사장되는줄 알았는데


그정도 숫자는 아니었고 100대였군요.

 

 


3월달에서 15개월이니까 2012년 6월부터는 K-2 전차 양산...


2013년 6월까지 두산 엔진 보완 성공하면 그이후는 두산 엔진으로...

 

 


그렇다면 예전부터 비밀에서 많이들 주장했던


전차 엔진 개발이라는게 진짜 어려운 일이고 K-2 양산 전력화 일정도 포기할수 없으니


정 그렇다면 초도물량분은 수입해서 양산 전력화하고


그렇게 번 시간동안 국산 엔진 포기하지 말고 개발하자는 의견들과 일치하는것 같네요.


이렇게 될수만 있다면 좋겠습니다.

 

 


100대라는 수량은 라이센스 생산하기는 너무 적은 수량으로 보이니


라이센스 생산이 아닌 직도입일것 같네요.

 

 


2013년 6월까지도 두산 엔진 개발이 성공하지 못하면


결국 나머지 분량도 직도입이든 라이센스 생산이든 MTU 엔진을 달게되겠군요.


제발 성공하기를...

 

 

 


===============전세계 넘사벽 디젤 엔진 MTU도 삽질을 통해서 오늘날에 이른것.


삽질을 두려워하지말고 국산 개발에 성공한다면...


혹시 아나요? 수십년후 두산, STX등이 MTU를 넘어설지도 모르지요...


한국이 조선, 반도체 처음 진출할때 비웃었던


당시 전세계 최고 일본 업체들의 오늘날처럼...

 

 

 

 


펌-디시 기갑갤

 

http://gall.dcinside.com/list.php?id=arm&no=72471

 

 

이 름 ㅂㅂㅂ

 

제 목 흑표엔진 문제 많다는데....

 

 


K-1엔진도 문제가 많았다.

 

이건뭐, 툭하면 기동중에 엔진 서버려 사고날뻔하고...너무 흔해서 나중엔 그려려니.


냉각수 터지는건 너무 흔해서, 기동중에 상판열고(스페어깡 물로 보충하고)


밋션 툭하면 고장나고.....


기타 자질구레한 고장 많앗엇는데, 저 두가지가 대표적이다.

 

 

문제는 저 엔진이 레오파드엔진이라는거.


그래서 문제발생해서 A/S할때보면 독일놈이 와서 고치고 그랫는데..


옆에서 지켜보면 주로 전자부품에 말썽부리는듯햇다.


물론, 엔진블록이나 접합부 누수도 좀 있고.

 


독일이 추운지방 아닌가? 여름에 특히 엔진 말썽 많이 나서


어째 수냉식엔진이 공냉식보다도 못하냐 하고 투덜거리곤 했지.

 

 

당시 느낌으로는 레오파드탱크도 거품이 좀 있구나 생각이 들고


독일이 기계분야는 발전했지만 전부분야는 좀 취약하구나 하는 느낌이 들엇다.

 


나름 쓸만해진게 거의 한 10년 지나고 부터인거 같은데, 그전엔 욕먹느라 정신없던게 독일엔진.

 

 

하튼, 요즘 흑표엔진으로 시끄러운데.


과거 MTU레오파드엔진에 비하면 양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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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산무기 K-21장갑차 엔진정지 사고
도하훈련중 물 스며들어..軍 "설계결함.조종미숙 등 조사"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09/12/18/0200000000AKR20091218205100043.HTML?did=1179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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軍 “조사단 구성, K-21 침몰원인 규명”


군 당국이 전남 장성에서 발생한 육군 K-21 장갑차 침몰 사고의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 방위사업청 등과 함께 합동조사단을 구성했다.

군의 한 관계자는 30일 “방위사업청, 국방과학연구소(ADD), 제조업체인 두산인프라코어 등이 참여하는 합동조사단을 꾸렸다”면서 “K-21 장갑차의 사고원인이 장비 결함으로 드러날 경우 제조업체 측에 장비 보완을 요구할 것”이라고 말했다.

 

http://economy.hankooki.com/lpage/politics/201007/e2010073013323093140.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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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몰한 K-21 장갑차, 알고보니 '설계결함' 때문


지난 7월29일 전남 장성의 기계화학교에서 발생한 K-21 장갑차의 침수사고가 설계결함 때문인 것으로 드러나 파장이 일고 있다.

군사전문잡지 <디앤디포커스>(www.dndfocus.com)에 따르면 사고 당시 K-21에는 약 600Kg의 물이 차체로 유입되었는데 들어온 물을 퍼내는 배수펌프가 작동하지 않아 침수사고가 발생했다.

국방분야에 정통한 소식통은 장갑차에 물이 들어왔는데도 배수펌프가 작동하지 않은 것은 K-21이 전진할 때 엑셀레이터를 연속적으로 밟게 되는데, 엑셀레이터를 밟는 동안에는 배수펌프가 작동을 하지 않는 문제점이 있다고 지적했다. 즉, 수상도하 시에는 엑셀레이터와 배수펌프 중 하나만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엑셀레이터만 사용하면 장갑차가 가라앉을 수 있고, 배수펌프만 사용하면 떠내려갈 위험이 있어 장갑차의 수상도하를 매우 어렵게 하는 요인이 된다는 지적이다.

더 큰 문제는 관계 당국이 이러한 문제점을 파악하고 있으면서도,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발표를 늦추고 있다는 점이다.

군 소식통은 "K-21의 개발 주체인 국방과학연구소와 제작사인 두산DST, 관리감독을 맡은 방위사업청 모두 이번 사고가 설계결함인 것으로 조사 결과가 드러나자 그 책임을 서로에게 떠넘기고 있다"며 "이해당사자들이 ‘폭탄돌리기’를 하고 있다"고 비꼬았다.

 

http://www.vop.co.kr/view.php?cid=A00000314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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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8월에 과거사 청산의 움직임에 대해 김진홍 뉴라이트 전국연합 준비위 대표는 현 정부는 너무 과거에만 매달리고 있다며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부일 민족 반역자가 세운 기업 두산그룹의 상무는 누가 진실한 심판자가 될 수 있는가가 문제라며 정치적으로 악용되면 진실 규명은 기대할 수 없다고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뉴라이트 핵심세력 자유주의연대는 자의적이고 불공정한 친일 명단 발표를 중단하라고 하였고, 뉴라이트 핵심세력 반핵반김국민협의회 과거와 단절함으로써 도덕적 우월성을 과시하는 현 정권의 정치적인 판단에 따른 것 같다며 정치적 음모설을 제기하하며 나섰습니다.

 

 


이런 뉴라이트를 후원하는 사람들은 누구인가요? 2003년 보수 우익단체의 6·25 국민대회에 삼성그룹에서 1억원, 전경련이 4,000만원, 상공회의소가 3,000만원 등을 지원한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기업들 중 과거 부일 행위에 대해 자유로울수 있는 기업이 극소수라는것은 알만한 사람들은 압니다. 친일이 곧 이들의 연결고리인셈이죠.

 

http://blog.daum.net/smilesun/15956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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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오:두산그룹 회장
일제식민지 시대에 있음.이들의 조부 "친일 상인 자본가 "박승직"(1864 - 1950),1894년 박승직 상점 개정 일제 면포수입:조선 면포산업 잠식 1907년 공익사(면제품 판매) 창립 1919년 친일 단체 조선 경제회이사 소화 기린 맥주 이사 1938년 국민 정신 총동원 조선연맹 이사 1940년 총력 조선 연맹 평의원 두산그룹 창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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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패재벌두산과 친일파후손 박용성 퇴진시키자
 
 작성자 : 독립군  2009-06-15 14:11:06   조회: 776   
 
 
 
중앙대학교를 새로 인수한 박용성 부패두산그룹회장이 교수와 학생들을 완전 개조시키겠다고 발언했다는데
학교를 부패기업처럼 일괄적으로 통치하겠다는 독재발상이며
박용성 부친이 친일매국노로 매국댓가로 차린 기업을 형제인 큰형을 내쫏고 기업을 차지한 부패한 박용성
노조탄압과 회사돈횡령등 부패적인물로 학교도 부패학교로 만들려는것이고
친일파 뉴라이트교수와 연계해 왜곡된 역사로 학생을속이려할것이니 퇴진시키자

 

http://cauon.net/bbs/list.html?idxno=10368&table=bbs_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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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통일고문 9명 추가위촉, 뉴라이트 대표 포함돼

이명박 정부의 통일고문 9명이 17일, 추가 위촉됐다. 뉴라이트 단체 대표가 위촉되는 등 '보수 일색'이라는 평이다.

 


이번에 추가된 통일고문에는 (두산그룹회장) 박용성 대한체육회 회장(중앙대 이사장)을 비롯해 이명박 대통령인수위 국가경재력강화특별위원장을 맡은 바 있는 사공일 무역협회 회장, 김평우 대한변호사협회 회장과 이명박 정부 첫 통일부 장관인 김하중 전 장관이 포함됐다.

특히 뉴라이트 단체 대표로는 처음으로 정정택 뉴라이트 전국연합 수석상임대표가 추가 위촉됐다. 정 대표는 이명박 대통령 후보 선대위 특별보좌역을 수행한 바 있다
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854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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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박용성)
 
출생 1940년 9월 11일(1940-09-11) (70세)
서울특별시
거주지 서울특별시
국적  대한민국
학력 경기고등학교, 뉴욕대학
직업 기업인
자녀 장남 박진원. 장녀 박진수
부모 아버지 박두병. 어미니 정정숙

박용성(朴容晟, 1940년 9월 11일~)은 두산그룹의 창업주인 박두병의 삼남으로, 현재 제37대 대한체육회의 회장이자, 중앙대학교의 이사장이다.

 

==생애==
박용성은 1940년 9월 11일에 일제 강점 하의 경성부에서, 박승직(朴承稷)의 손자이자 박두병의 아들로 태어났다. 1959년 3월에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65년 2월에는 서울대학교 경제학과를, 1969년 6월에는 미국 뉴욕 대학교의 경영 대학원을 졸업했다.

 

==경력==
[경영]
1973년 6월에 한국투자금융의 상무가 되었고, 1984년 2월에 동양맥주의 대표이사 겸 사장직을 역임했다. 1990년대 초반인 1991년 2월에는 한국상업은행 이사회에서 회장이 되었으며, 1993년에는 두산그룹의 부회장, 2001년 3월에 두산중공업(옛, 한국중공업)의 대표이사 겸 회장, 2005년 4월에는 두산인프라코어의 대표이사 겸 회장이 되면서 두산 가(家)의 요직을 두루 지냈다.

[재계]
그는 재계 활동에도 열심이었다. 서울 올림픽이 열렸던 지난 1988년 4월에 서울상공회의소(商工會議所, 상의)의 부회장이 되었고, 1998년 1월에는 국제상의(ICC) 한국위원회(KNC)의 의장을 지냈다. 2000년 5월에는 대한상의의 회장을 맡는 한편, 서울상의의 회장을 재역임했으며, 2005년 1월에는 국제상의의 회장이 되었다.

[체육계]
한편, 그는 체육계에 투신하기도 했다. 1986년 1월에 대한유도협회(大韓柔道協會)의 회장과 1989년 2월에는 대한올림픽위원회(KOC, 현 대한체육회) 부위원장, 1995년 9월에 유도 창시자 가노 지고로 친손자인 일본의 가노 유키미스 당시 아시아유도연맹 회장을 꺾고 국제유도연맹의 회장이 되면서 한국 체육계의 핵심적인 주요 인사로 발돋움하게 된다. 2000년대의 행적을 살펴보면, 2002년 2월에 국제올림픽위원회(IOC)의 위원이 되었고, 2009년 2월에는 대한체육회의 회장이 되었으며, 동년 5월에는 2011년에 개최되는 대구세계육상선수권의 조직위원회 위원장이자 조직위원회 고문이 되었다.

[수상]
박용성이 받은 상훈은 아래와 같다.

1)체육계
1986년 12월, 대한민국 체육 훈장 맹호장
1988년 9월, 대한민국 체육 훈장 청룡장
1989년 10월, 대한민국 체육상(진흥부문)

2)산업 훈장
1987년 3월, 은탑 산업 훈장
1996년 11월, 금탑 산업 훈장

3)외국
2000년 12월, 벨기에의 왕립 훈장
2003년, 프랑스 공화국의 최고 훈장인 레지옹 도뇌르

4)기타
그 외에 그는 2008년 6월에 중앙대학교의 이사장이 되면서 학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고, 1999년에는 서울엔젤그룹의 초대 회장으로 추대된 경험도 있다.


==가족 관계==
할아버지 : 박승직
아버지 : 박두병
형님 : 박용곤
조카 : 박정원
조카 : 박지원
형님 : 박용오
조카 : 박경원
본인 : 박용성
아들 : 박진원
딸 : 박진수(대학교수, 작가)
손자 : 박용진
손자 : 하승완
손자: 박종원
동생 : 박용현
조카 : 박태원
조카 : 김은솔
동생 : 박용만
동생 : 박용욱


http://ko.wikipedia.org/wiki/박용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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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직

박승직(朴承稷, 1864년 6월 22일(음력)/양력 7월 25일 ~ 1950년)은 두산그룹의 창립자이다. 호는 매헌(梅軒)이다.

==생애==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난 박승직은 전남 지방을 중심으로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상행위를 하다가 1890년경 ‘박승직 상점’이라는 상호로 배오개(지금의 종로4가)에 진출하였다. 한성상업회의소 재직시절인 1907년에는 한성상업회의소에 재직중이었는데, 당시 1300만원의 일본차관의 상환을 위해 거국적으로 전개된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여 운동주체였던 대구의 광문사에 70원을 기부했다.

1916년부터 부인 정정숙의 건의를 받아들여 화장품을 만들어 팔았다. 1920년 그것을 박가분이라는 상표로 등록한다.[1] 이후 1925년에는 회계처리를 근대화하는 체제로 바꾸면서 상호를 주식회사 박승직 상점으로 변경했다. 배오개의 거상으로 불리우며 고종, 순종의 승하 시 앞장서서 상인봉도단을 결성하고 단장으로 활동하는 등 한국인 상인계의 리더로서 행동하였다.

1933년에 일본인이 설립한 ‘소화기린맥주(昭和麒麟麥酒)의 주주로 참여했다가 1945년 8월15일 광복 이후 아들 박두병(朴斗秉)이 이를 인수하여 동양맥주를 설립했다. 이듬해인 1946년 박승직 상점을 ‘두산상회’로 재개업함으로써 두산그룹의 시초가 되었다.[

http://ko.wikipedia.org/wiki/%EB%B0%95%EC%8A%B9%EC%A7%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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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 창업주 친일파 파문 ③ “애국기업이라더니 친일장사치?”
 

친일인명사전에서 눈에 띄는 또 다른 인물은 두산 창업주 박승직(1864년~1950년)씨이다.

1864년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난 두산 창업주 박승직씨는 1882년부터 송파장에서 포목 행상을 시작해 거상으로 성장한 인물이다. 이후 1905년 7월 상업계의 유력자로서 한성상업회의소 설립 발기인으로 참여한 뒤 1906년 1월 상의원을, 1909년 상임위원을 맡았다.

1906년 11월에는 안중근 의사에게 처단된 이토 히로부미를 추도하기 위해 조직된 국민대추도회의 발기인과 위원을 맡기도 했다. 1922년에는 조선실업구락부 발기인으로 참여해 이후 평의원 등의 임원을 지냈다. 조선실업구락부는 1920년 3월 한상룡 등 유력 경제인들이 친목을 도모하고 일선융화를 철저히 하기 위해 결성한 단체다.

박승직씨는 또 1924년 4월에는 반일운동 배척과 일선융화를 표방하던 친일단체 동민회의 평의원에 선임되기도 했다. 이후 그는 1925년 2월 배오개에서 설립했던 상점을 주식회사 박승직 상점으로 개편, 사세를 크게 확장했고 1934년 2월에는 경성상공회의소 회장에 선출되었다.

그는 1938년 1월 1일 신년을 맞이해 ‘매일신보’가 사회 저명인사들을 초청해 ‘조선인의 진로와 각오’라는 주제로 마련한 좌담회에서 중일전쟁의 책임은 전적으로 중국에 있음을 강조하는 한편 조선인들이 보여준 거국일치의 ‘애국정신’에 찬사를 보냈다. 이어 조선통치에 있어 조선총독부의 시정이 적절하므로 개선이 전혀 필요없음을 강조했다.

같은 해 2월에는 조선지원병 제도 제정축하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하기도 한 그는 매일신보 2월 23일자 지원병 제도 실시를 축하하는 담화를 통해 ‘지원병제도 실시는 내선일체의 구현이며 조선인도 제국 신민으로서 의무와 권리를 갖추게 된다’며 환영하는 내용을 싣기도 했다. 그리고 8월에는 전시체제를 강화하고 조선인의 전쟁 협력을 이끌어내기 위해 조직한 조선 최대의 관변 단체인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의 발기인으로 참여해 평의원에 선임되었고 국민정신 총동원 경성부연맹 상담역을 맡았다.

그는 또 이 조직이 국민총력조선 연맹으로 확대 개편된 뒤에도 1940년 10월 평의원을 맡았다. 박승직씨는 1939년 11월 일제가 전시체제 강화와 유도황민화를 위해 조직한 조선유도 연합회의 평의원에 선입되었고 1940년 6월 경성경제통제협력회의 상임이사에 위촉되기도 했다.

1941년 3월에는 박승직 상점을 미키상사주식회사로 개편하고 사장에 취임했으며 같은 해 12월에는 경성부 총력과를 직접 방문해 해군 국방헌금으로 1만원을 헌납했다. 또 1943년 2월에는 방공협회를 통해 방공감시대 위문금 100원을, 5월 육군에 국방헌금 200원을 헌납했다.

해방 후 1945년 10월에는 임시정부 요인들을 맞기 위한 한국지사 영접위원회 위원에 위촉되었으며 1946년 10월에 일본식 상호였던 미키상사를 박승직 상점으로 환원했다가 다시 두산상사로 바꿨다.

이 같은 사실에 대해 두산그룹 관계자는 <시사코리아>와의 통화에서 “과거 일제시대에 부역한 사람들은 모두 친일인가. 그 당시에 살지 않은 우리가 10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역사에 대해 단죄를 물을 수는 없는 일이다. 기업은 기업으로서 당시에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박승직 대표의 애국행적 또한 많으므로 그 당시 사실에 대해 왈가왈부할 사항이 아니다”고 답변했다.


http://www.sisakorea.kr/sub_read.html?uid=4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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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직 (두산 그룹 창시자)

* 朴承稷, 창씨명 三木承稷, 1864~1950


* 1864년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남

* 1882년부터 송파장에서 포목 행상을 시작해 거상으로 성장함

* 1905년 7월 상업계의 유력자로서 한성상업회의소 설립 발기인으로 참여

* 1906년 1월 한성상업회의소 - 상의원

* 1906년 11월에는 안중근 의사에게 처단된 이토 히로부미를 추도하기 위해 조직된 국민대추도회의 발기인과 위원을 맡음

* 1909년 한성상업회의소 - 상임위원

* 1919년 조선경제회 이사

* 조선실업구락부는 1920년 3월 한상룡 등 유력 경제인들이 친목을 도모하고 일선융화를 철저히 하기 위해 결성한 단체

* 1922년 조선실업구락부 발기인으로 참여해 이후 평의원 등의 임원직 활동

 


* 1924년 4월에는 반일운동 배척과 일선융화를 표방하던 친일단체 동민회의 평의원에 선임

* 1934년 2월에는 경성상공회의소 회장에 선출

* 1938년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발기인 겸 상담역

* 1938년 박승직은 1월 1일 신년을 맞이해 ‘매일신보’가 사회 저명인사들을 초청해 ‘조선인의 진로와 각오’라는 주제로 마련한 좌담회에서 (중일전쟁의 책임은 전적으로 중국에 있음을 강조하는 한편 조선인들이 보여준 거국일치의 ‘애국정신’에 찬사를 보냈다. 이어 조선통치에 있어 조선총독부의 시정이 적절하므로 개선이 전혀 필요없음을 강조)

* 1938년 2월에는 조선지원병 제도 제정축하회의 발기인으로 참여

(매일신보 2월 23일자 지원병 제도 실시를 축하하는 담화를 통해 ‘지원병제도 실시는 내선일체의 구현이며 조선인도 제국 신민으로서 의무와 권리를 갖추게 된다’며 환영하는 내용을 싣기도 했다.)

 


* 8월에는 전시체제를 강화하고 조선인의 전쟁 협력을 이끌어내기 위해 조직한 조선 최대의 관변 단체인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의 발기인으로 참여해
* 평의원에 선임
* 국민정신 총동원 경성부연맹 상담역

*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이 국민총력조선 연맹으로 확대 개편된 뒤에도 1940년 10월 평의원을 맡았다.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 http://www.koreakjh.com/kjh/read.cgi?board=bt2_3&y_number=10)  - {조직의 활동내역: 일본군 국방헌금, 일본군 위문방문}

 


* 1939년 11월 일제가 전시체제 강화와 유도황민화를 위해 조직한 조선유도 연합회의 평의원에 선임
* 1940년 6월 경성경제통제협력회의 상임이사에 위촉

* 1941년 3월에는 박승직 상점을 미키상사주식회사로 개편하고 사장에 취임
* 1941년 12월에는 경성부 총력과를 직접 방문해 해군 국방헌금으로 1만원을 헌납
 
* 1943년 2월에는 방공협회를 통해 방공감시대 위문금 100원을, 5월 육군에 국방헌금 200원을 헌납
 매판 상인자본가의 전형

* 해방 후 1945년 10월에는 임시정부 요인들을 맞기 위한 한국지사 영접위원회 위원에 위촉

* 1946년 10월에 일본식 상호였던 미키상사를 박승직 상점으로 환원했다가 다시 두산상사로 바꿨다.

 


http://www.sisakorea.kr/sub_read.html?uid=4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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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헌금 바치고, 전쟁 찬양하고…

 http://www.sisapress.com/news/articleView.html?idxno=5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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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일제강점기 단체)  [國民精神總動員朝鮮 聯盟]

총독부가 일본제국주의의 대륙침략에 인적·물적 자원을 동원하기 위해 정책에 협력하는 민간단체들을 조직하여 만든 단체.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b02g2548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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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정신총동원연맹과 국민총력연맹

http://blog.naver.com/taijisun14/110042362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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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國民精神總動員朝鮮聯盟)는 1938년에 동아일보의 김성수, 조선일보의 방응모, 이화여대의 김활란 등이 결성한 전시동원 선전조직으로 그 회원의 수가 삼만여 명에 이루렀다. 이들은 전국에 감시망을 만들어 전쟁 동원 조직을 형성하였다.

이 조직에 이광수, 최남선, 서정주, 모윤숙, 김동환 등의 작가들이 가세하였다. 이들은 1939년에 공표된 국민징용령에 맞추어 조선인들을 일본의 탄광과 공장으로 보내는 데 앞장섰으며, 자원입대와 일본군 위안부 모집에 열을 올렸다.

그들은 일상 생활에서 일본화를 주장했는데, 일본어로 대화하고 일본 음식과 일본 옷을 입고 일본 노래를 부르기를 권유하였다.


http://ko.wikipedia.org/wiki/%EA%B5%AD%EB%AF%BC%EC%A0%95%EC%8B%A0%EC%B4%9D%EB%8F%99%EC%9B%90%EC%A1%B0%EC%84%A0%EC%97%B0%EB%A7%B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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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위안부
 
1931년 만주사변1)과 1937년 중일전쟁2) 을 일으키면서 대륙침략을 시작했고, 1941년에는 진주만3)을 기습공격하고 태평양전쟁4) 을 도발하여 제2차 세계대전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1932년 만주국 수립 이후 일제는 이미 만주에 일본군을 위한 위안소 경영을 허용하고 있었으며, 1932년 상하이에서는 일본 해군이 위안소를 설치하여 관리하였다.

중일전쟁 이후 1937년말 난징점령5)때 일본군이 대대적으로 민간인을 학살하고 여성들을 강간하였다. 이에 대한 국제적인 비난이 일자 일제는 일본군의 성을 체계적으로 관리할 필요를 느꼈다. 전쟁이 확대되고 장기전으로 들어가자, 일제는 강간과 성병확산을 막을 필요성은 더욱 절실해졌고, 이에 따라 일제는 군위안소 제도를 확대하기에 이르렀다.
군위안소 제도의 설립은 군의 사기 진작 등 효과적인 군사활동을 꾀하려는 또 다른 중요한 목적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보다 구체적으로 일본군이 병사들의 성욕구를 해결하기 위해 위안소제도를 만든 중요한 역사적 배경으로 일본의 오랜
공창제도6)를 들 수 있다. 이러한 공창제도는 일본뿐 아니라 이후 대만, 조선에도 그대로 도입되어 중국여성과 조선여성들 역시 일본 공창제의 저변으로 편입되었다. 이런 배경에서 성립한 일본군위안소 내에서 이루어진 강간 행위는 강제로 위안부 피해자가 된 수 많은 여성들에 대한 성폭력으로 여성을 비인간화하였다.


 피해자들의 증언과 일본측 관련 문서를 통해 볼 때 여성들을 동원할 때 크게 취업사기, 폭력, 협박, 정신대, 보국대 등을 통해 동원되었다. 또한 유괴, 납치, 인신매매 등이 이용되기도 하였다. 동원방식에 관계없이 피해자들은 자신이 위안소로 가게 될 것이라는 것을 몰랐고, 엄격한 감시를 받으면서 동원되었기 때문에 모두 강제연행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총독부7)와 같은 관청이 직접적으로 개입하여 관알선을 하기도 하였지만, 민간업자를 선발하여 그들에게 위안소에서 일할 여성들을 모집하고 연행하도록 하였다.
업자들은 모집인을 이용하거나 자신들이 직접 나서서 여성들에게 접근하여 취직을 시켜준다거나 좋은 돈벌이가 있다고 속여 여성들을 끌어모았다. 연행 당시 피해자들의 연령은 주로 10대였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대부분이 이 말에 따라 나섰다고 증언하고 있을 정도로 이들은 가난한 가정 출신이었다. 특히 이들 중 경상도나 전라도 등 농촌출신이 많았다. 이것은 농촌지역이 일제강점기 동안 더욱 심하게 수탈당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학교나 관청을 통해 근로정신대원으로 여성을 동원했다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가 되기도 했다. 또한 보국대8), 봉사대, 근로대 등 여러가지 이름의 공식적인 동원 조직을 통해 공개적으로 동원된 여성들을 일본군 위안소로 연행하기도 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연행에는 이처럼 일제의 전시 총동원체제9)하의 각종 노동력 동원 제도가 합법적으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기 시작하면서는 군과 경찰이 나서서 폭력적으로 식민지 조선여성을 납치하기도 하였다. 또한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지 현지 여성들을 강제로 연행하기도 했다.

일본군이 군위안소 정책을 만들었던 시점의 식민지 조선 내의 여성들의 상태는 남성중심의 가부장적 가족구조와 가족법, 이중적인 성윤리로 여성의 가정 내 위치는 조선시기 보다 더 열악한 상태였다. 식민지 상태에서 노동을 할 수 있는 기회는 제한된데다 여성노동자는 일본인 남성의 1/4, 일본인 여성의 1/2의 임금을 받았고, 유년여성노동자는 일본인 남성의 1/7밖에 안 되는 저임금에 시달렸다.

게다가 노동자로 취업하는데 이용하던 일종의 직업소개소들은 매춘업에 여성들을 공급하기도 하였다. 소개소업자들이 취업을 희망하는 여성들을 모집하여, 이익이 많이 남는 매춘업으로 소개했던 것이다.

또 일제가 공공연히 매춘을 인정하고 공권력이 감독, 관리하는 공창제도10)를 이식한 후 사기수법에 의한 광범위한 인신매매가 조장되었다.

특히 1929년 세계대공황으로 식민지 조선은 큰 타격을 받았고 이후의 전시체제 아래서 식민지 조선 여성들의 처지는 더욱 악화되었다.

전쟁이 확대되고 군인의 수가 점점 증가하면서 일본군 위안부도 더욱 많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때 일본은 식민지의 여성을 손쉽게 동원함으로써 위안부 부족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다. 옛 일본군 군의관인 아소 테츠오의 증언에 따르면 1938년 12월 상해 위안소에 있던 대부분 피해자들이 조선인이었다고 한다.

일제는 더욱 광범위하게 일반여성의 위안부 동원에 힘썼다. 일반 조선의 젊은 여성들이 성병에 감염되어 있을 가능성이 없다는 사실도 동원의 중요한 이유였다. 일제가 일본군 위안부 정책을 기획하고 수행하는 데 식민지 조선여성을 얼마나 잘 활용했는지 일본군 위안부 연행을 통해서 알 수 있다.
   
http://www.hermuseum.go.kr/sub01/sub01_01.asp?s_top=1&s_left=1&s_deps=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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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주군史 - 자연과 역사: 국민총동원체제의 창출과 사회경제적 수탈
http://history.yj21.net/Theme/Save_View.asp?BC_ID=a0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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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조선을 대륙병참기지로 설정하고, 조선의 인적 · 물적 자원을 침략전쟁에 동원하였다. 1938년 자원 동원을 위한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을 조직하고, 1939년에는 국민징용령을 공포하여 조선인들을 공사장, 군수공장, 전쟁터로 강제 연행하였다. 초기에는 모집형식을 취하였지만 노동력이 부족해지자 강제로 연행하기 시작했다. 태평양 전쟁 개시 후에는 행정력을 총동원하여 근로보국대, 정신대라는 명목으로 공공연히 조선인들을 납치 · 연행하였다. 끌려간 조선인은 광산, 발전소, 도로공사장, 군사기지 등에서 노동자, 포로감시원, 군 ‘위안부’가 되어 살인적 착취와 학대에 시달렸다. 1939년 이후 일제가 강제 연행한 인원은 한반도 내에 약 480만 명, 일본 열도에 152만 명, 군대요원 20-30만 명 등이다.
종군 ‘위안부’는 일제가 일본군 성노예로 이용하기 위해 동원한 여성들이다. 정확한 동원 인원수에 대해서는 당시 관련 자료가 제대로 작성되지 않았거나 패전 이후 일제가 자료를 인멸했기 때문에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8만-20만 명 사이로 추정하고 있다.

중일전쟁 이후 일본군에 의해 강제로 조직적 · 반복적 성폭행을 당했던 피해 여성들은 경찰과 군에 의한 물리적 폭력과 취업 사기로 동원되었다. 식민지이고 전시라는 상황에서 경찰과 군은 조선총독부와 연계하거나 단독으로 필요 인원을 동원하였다. 일제는 전쟁을 일으키면서 군대 성욕 해결, 현지 범행 방지, 성병 예방을 위해 ‘위안부’ 제도를 창설하였다. 일본 군부는 직접 ‘위안부’ 동원 정책을 입안하였다. 처음 위안소를 설치한 시기는 1932년으로 확인되지만 1937년 이후 전쟁이 장기화되고 전선이 넓어지면서 ‘위안부’를 더 필요로 했다.


http://www.ikorea.ac.kr/webzine/0808/sub11.a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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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조협동기업(日朝)의 개척자' - 매판의 길로

 

 

 1905년 11월 경성상업회의소에서는 정부를 상대로 한국폐제 개혁에 관한 청원서를 제출하였다. 이 분서에서 조선 사인들은 격화되어 가는 화폐금융공황의 와중에서 파산하는 조선 상인들의 참상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면서 그 해결책을 호소하고 있다. 1904년 조선 정부의 제정고문으로 한국에 건너온 메가다 쇼타로에 의해서 1905년부터 시행되고 있던 화폐정리사업에 의해서 조선인들의 화폐자산은 결정적으로 축소되고, 그것은 결국 화폐금융공황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그것은 조선 상인들의 파산을 목적으로 한 일종의 제도적인 폭력이었다. 이에 경성의 조선인 상인들은 1905년 7월에 경성상업회의소를 결성하여 대처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조선 상인들 가운데 포목상들이 받은 타격은 심각했다. 1905년이면 벌써 일본의 근대화돈 대규모 생산시설에서 생산되던 값싼 일제 면포에 의해 조선의 재래식 면포시장은 거의 잠식되어 있었다. 특히 일본의 대규모 방직회사들은 폭리를 목적으로 1905년 미에이이라는 판매동맹을 결성하고 그들의 제품을 미쓰이물산에 위탁하여 면포수출을 독점하고 상품가격을 폭등시키고 있었다. 이에 1906년 10월 조선인 포목상 88명이 미에이에 맞서기 위하여 창신사라는 합명회사를 설립하고 소림합명회사와 계약하여 일본 후자가스방적회사 제품을 수입하였다. 그러나 소림합명회사 역시 조악한 물품만을 공급하여 폭리를 취하자 1907년 창신사는 거래를 청산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박승직은 창신사를 탈퇴하고 1907년 8월 면제품을 일본과 직접 거래하기 위하여 합명회사를 설립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공익사이다. 공익사는 창립 당시부터 경성상업회의소의 상담역이었던 일본인 니시하라가 적극적인 알선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고, 1910년이 되면 일본의 대기업인 이토츠 상사가 자본에 참여하게 된다. 공익사를 설립하여 홀동할 즈음에 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제일은행의 일본인 지점장으로 하여금 박승직을 도와 주라고 말했다는 사실은 박승직이 일본인들 사이에서는 믿을 만한 상대로 인정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로써 매우 선구적으로매참자본의 모습을 보여 주게 되는데 이것이 박승직으로 하여금 '일조협력기업의 개척자'라는 영예(?)를 쓰게 하였던 것이다.

 

 

 

 배오개의 객주로부터 매판상인으로의 변신

 

 

 현재 한국의 재벌로 군림하고 있는 두산그룹의 연원은 1898년경에 설립된 박승직상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따라거 매출액의 규모를 볼 때 50위 이내에 드는 재벌그룹 가운데서 가장 긴 역사를 가진 것이 바로 이 두산그룹이다. 그러나 일제하에 박승직은 일정 규모 이상의 자산가로서 매족행위를 한 사람이면 누구나 한번식은 거치던 그 흔한 중추원 참의 한 번 못한 사람으로, 정치적 의미에서의 친일의 족적이 그리 크지 않은 사람인 것만은 분명하다. 반면에 경제적인 의미에서의 친일을 자본의 매판화라고 한다면 이런 측면에서는 어쩌면 가장 큰 족적을 남긴 사람임이 분명하다. 박승직은 일제시대를 통털어 자신의 자본활동의 영역을 상업활동에만 정확하게 국한시키고 있었고. 상업자본으로서의 자본 축적을 위하여 일제자본과의 협력관계를 교묘하게 유지시키고 있엇던 사람이다.

 

 박승직은 1864년 경기도 광주에서 당시의 세도가인 여흥민 씨의 위토를 부쳐서 입에 풀칠을 하고 있던 가난한 농군 박문회의 아들로 태어났다. 따라서 일찍부터 상업의 길에 나섰던 것인데 처음에는 전남지방을 중심으로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상행위를 하였다고 한다. 이른바 난전의 형태로 상업활동을 영위하다가 지금의 종로4가인 배오개로 진출한 것은 1890년경이다. 이 때 박승직상점이라는 간판을 내건 것으로 보아 이미 상당한 자본을 축적하였으며 1905년까지는 그 자본을 더욱 확대하였을 것이다. 1900년에 성진 감리서 주사, 1905년에 6품 승서, 1906년에 중추원 의관, 정3품에 승시 등 돈으로 산 관직의 목록을 보더라도 당시 그의 부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이미 일본제 포목제품을 취금하여 폭리를 취하고 있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취급품목에서도 종로의 시전상인들보다는 배오개의 객주들이 훨씬 자유로운상태에 있었음이 사실이다. 나아가 이미 1907년에 일본인과 합동으로 회사를 설립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나 앞의 이토가 한 발언 등에 비추어 볼 때도 이전에 일본인들과 친밀한 거래관계를 맺어 놓앗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공익사는 창립 당시 최인성, 김원식, 최경서 등 42명의 객주 출신 포목상인이 1만 원을 출자하여 앨종의 익명조합으로 출발하였다. 그러나 니시하라의 알선에 의하여 일본인 중간상인들을 배제함으로써 경영을 급속히 확대할 수 있었다. 1908년에는 인천, 수원, 개성, 안성, 부산 등에 대리점을 개설하였으며, 이토츠 상사와 거래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1909년에는 면사, 면포뿐만 아니라 위의 수출도 시작하였고, 자본금을 2만 원으로 증자하였으며, 1910년에는 이토츠 상사와 합자하여 자본금은 4만 6000원으로 증자하였다. 단 3년 사에에 자본그을 5배 가가이 늘릴 수 있었던 것이다. 다른 포목상들이 모두 파산하고 있을 때 공익사의 이런 바른 성장은 매우 인상적인 것이었는데 여기에 매판자본의 본질이 있다 할 것이다. 이 때부터 맺은 박승직과 이토츠 상사와의 관계는 일제하의 전기간에 걸쳐 유지되는데, 이 관계는 1920년대에 박승직으로 하여금 조선인 자본과 일본인 자본과의 매우 중요한 매개역할을 수행하게끔 한다.

 

 한편, 1905년에서 1910년 사이에 박승직상점 역시 매우 인상적인 성장을 이루고 있었다. 면포의 판매망을 강원도를 중심으로 전국 각지로 확대하고 있었으며, 취급품목도 늘려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로써 박승직상점과 공익사로 이어지는 판매체계가 형성되는 것인데 이것이 일제의 전기간에 걸쳐 유지되는 매판체계인 것이다. 이에 더하여 박승직은 1905년 김한규가 중심이 되어 토지.건물임대, 창고업 들을 목적으로 설립한 광장주식회사에 이사로 참여하고 있으면서 1905년 경성상업회의소의 의원으로 참여하겨 1911년까지 그 자리를 유지한다. 그러나 경성조선인상업회의소가 일본인상업회의소로 해소되는 것이 1915년인데 박승직이 1911년에 벌써 의원직을 그만두었다는 사실도 그의 매판적인 상행위와 관계가 있을 수도 있는 일이다.

 

 

 

 매판상인으로서의 절대적 지위 확립과정

 

 

 1910년대부터 1920년대 초반까지 공익사의 성장은 매우 눈부신 것이었다. 1914년에는 일약 자본금을 50만 원으로 증자하고 동시에 주식회사로 개편하였는데 이 때부터 이토츠 계열의 주식소유가 반을 상회하게 되었다. 그리고 당시까지 전무로 근무하였던 니시하라는 사임하고 말았다. 1차대전의 활황을 타고 1916년부터는 조선의 북부지역과 봉천, 하얼빈까지 지점망을 넓히고 취급품목도 더욱 확대하였다. 1916년만의 순이익이 5만 원을 상회할 정도였다.

 

 그러나 1919년에는 만주공익사를 창립하고 만주 내의 모든 사업을 거기에 양도하고 말았다. 이로써 조선에서의 공익사의 활동은 이토츠 상사의 만주진출을 위한 징검다리 역할을 한 데 지나지 않았음을 여실히 알 수 있다. 여기에 도한 매판자본의 비애가 서려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과정에서도 공익사의 성장은 계속되어 1920년에는 2백만 원으로 증자하였다가 때마침 닥친 전후불황으로 1921년에 1백만 원으로 다시 감자하였다. 그렇다고는 하나 공익사의 성장은 대단한 것이었다.

 

 여기에서 1921년의 공익사의 상황을 자세히 살펴보자. 사장에 박승직, 상무이사에 다카이, 다나카, 감사에 최인성, 최경서, 김원식, 다케나카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일본인들은 모두 이토츠 상사로부터 파견되어 활동하는 사람들이었다. 또한 총주식의 3분의 1을 이토츠 상사가 소유하고, 박승직은 겨우 20분의 1을 소유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이로써 공익사의 성격을 명확히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박승직상점 역시 1925년에 자본금 6만 원의 주식회사로 개편하게 되는데 공익사의 차입금으로 박승직이 자본금을 불입하는 대신 공익사에서는 업무감독을 위한 사원을 박승직상점에 파견하는 것으로 하였다. 이로 볼 때 1920년데 초의 불황 속에서 박승직상점의 성장도 여의치 않은 것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는 불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1928년경부터는 경성방직, 조선방직 등 조선 내에서 생산되는 면포류에 대하여 위탁판매를 시작아였다. 이 시기를 전후하여 박승직과 경성방직의 연결이 이루어지고, 박승직은 이전부터 맥고 있던 이토츠와의 관계를 이용하여 경성방직이 이토츠로부터 원료, 기술, 판매 등의 측면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잇는 계기를 마련하여 주었다. 또한 1932년부터는 박승직이 감사를 맡고 있던 조선직물의 인조견을 판매하기 시작하였다. 박승직상점은 이 시기를 전후하여 서서히 활기를 띠게 되었다.

 

 1917년에 박승직은 곡물무역과 정미업을 위하여 공신상회를 설립하였는데 1921년에는 경성곡물신탁의 감사로 취임함으로써 공신상회와 경성곡물신탁으로 이어지는 신매판체계의 또 다른 한 측면을 형성하게 된다. 1916년에는 박승직상점을 통한 면포 판매에 도움이 되게 하고자 '박가분제조본포'라는 분공장을 차리기도 하였다.

 

 이런 상업활동과는 별도로 포목상계에서의 그의 압도적인 지위로 인하여 몇몇 상인들의 친목단체 또는 경제단체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기도 하였다. 1918년 경성포목상조합을 만들어 좝장이 되었다. 그러나 이 단체는 1920년에 일본상인들과 연합하여 경성면사포상연합회로 명칭을 변경하게 되는데 그는 여기에서 부회장이 되었다. '일조협동기업의 개척자'라는 박승직에 대한 평가는 바로 1929년에 있었던 이 단체의 기념식장에서 미쓰이물산 서울지점장이 한 것이었다. 그만큼 그는 일본인들 사이에서 높이 평가되고 있었던 것이다. 1919년 준친일단체인 조선경제회의 이사로 참여한다. 1921년에는 '일선기업의 융합'을 목적으로 열린 산업조사위원회에 대한 대응책을 강구하기 위하여, 조선인들이 개최하였던 조선인산업대회의 지방위원으로 참여한다. 조선인산업대회는 일제에 대하여 조선인 기업가들에 대한 지원과 보호를 요청하는 것이 주요한 임무로 되어 있었다. 1925년에는 상인들의 친목단체인 중앙번영회의 회장을 맡았다. 이 단체는 1931년 경성상공협회로 개명하게 된다. 그가 1919년 고종의 인산일과 1926년 순종의 인산일에 모두 상민봉도단의 단장으로 참가하게 된 것은 이러한 그의 지위로 인한 것이었다. 여하튼 박승직은 매판상인으로서의 그의 지위를 이용하여 경성의 상업계에서 절대적인 지위를 누리고 있었다고 하겠다.

 

 

 

 박승직상점에서 미키상사로

 

 

 박승직은 1933년 소화기린맥주의 이사로 참여하게 된다. 이 때 박승직이 소화기린맥주와 맺은 인연으로 해방 후에 그의 아들 박두병이 소화기린맥주의 관리지배인을 맡게 되고 이것이 오늘날 두산그룹의 모태가 되었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박승직의 입장에서는 대단히 중요한 첫걸음을 내디딘 것이 되는데, 그가 이 기업의 이사로 참여하게 된 경위는 명확하지가 않다. 다만 다음과 같이 추측해 볼 수 있을 따름이다. 소화기린의 대주주는 일본의 2대 맥주회사였던 기린맥주였다. 기린맥주는 애초에 조선에 분공장을 세우려고 하였으나 총독부의 반대에 부딪쳐 뜻대로 되지 않자 땨로 법인체를 설립하고 영등포에 공장을 세웠던 것이다. 그런데 소화기린의 이사로 단지 2명의 조선인이 참여하였는데, 그들이 바로 김연수와 박승직이었고 그들이 가진 주식은 단지 2백주씩에 지나지 않았다. 이런 사실러 미루어 볼 때 소화기린은 유수의 기업가로 성장해 있던 기연수를 통하여 조선 내의 맥주 판매를 도모하고자 하였고 김연수는 그를 위하여 박승직을 소개하였던 것은 아닐까. 어쨌든 박승직이 그 때까지 구축해 놓았던 매판상인으로서의 지위가 그것을 가능하게 하였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라 하겠다.

 

 박승직상점은 일제의 중국 침략 이후에 만주로의 면포 수출이 늘어남에 따라 1938년에는 자본금을 일약 24만 원으로 증자하게 되며, 1943년에는 52만 원으로 증자하게 된다. 이에 따라 순이익도 폭발적으로 늘어나 1939년에는 23만 원을 기록하게 된다. 1940년부터 면제품에 대한 통제가 강화되자 박승직상점은 도매부와 소매부를 분리하여 업무의 원활을 꾀하고자 하였다. 1941년에는 박승직상점 도매부의 이름을 미티상사로 바꾸고, 소화기린맥주의 대리점을 개설하여 맥주의 위탁판매를 미키상사가 겸업하게 된다. 미키 쇼우쇼크는 박승직의 창씨명이다.

 

 한편, 박승직은 전시체제의 와중에 1938년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발기인 겸 상담역으로, 1940년 국민총력조선연맹의 평의원으로 참여하여 일제의 총력전체제에 협력하였다. 그리고 조선은행에 근무하다가 1936넌부터 박승직상점의 상무로 경영에 참여하고 있던 박두병은 1944년 경성호단의 동대문지구 부단단장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정도의 친일 전쟁협력활동은 오히려 한말부터 보여준 박승직의 매판적인 상업활동에 비추어 보면 가벼운 일에 지나지 않는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 윤해동(서울대 강사. 한국사, 반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

http://cafe.daum.net/changsarang-/6gIR/6020?docid=1DDlX|6gIR|6020|20090608093502&q=%B9%DA%BD%C2%C1%F7%20%B1%B9%B9%CE%C1%A4%BD%C5%20%C3%D1%B5%BF%BF%F8%20%C1%B6%BC%B1%BF%AC%B8%CD%20%C0%CC%BB%E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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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산그룹 설립자 박승직

 

3·1 운동 참여 후 친일관료로 변신

 

지난 2003년 1월 창원 두산중공업 노동자 배달호씨가 회사측의 노조탄압에 항의해 분신하였다. 이로 인해 노동계는 두산제품 불매운동이라는 초강수로 대응하며 두산의 기업 이미지에도 상당한 타격을 가한 바 있다.

 

자칭 '민족자본'·'민족기업'을 자랑으로 내세우는 두산재벌이 어쩌자고 이처럼 이름에 어울리지 않게 같은 민족 성원임이 분명한 노동자를 죽음에까지 이르게 만들었을까.

 

더욱이 두산중공업 노조는 2004년 1월엔 고 배달호씨 1주기를 맞아 추모비를 회사 내에 건립하고자 했지만 사측의 반대로 무산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노조는 추모비를 트럭에 싣고 회사 내 진입을 시도했지만, 사측에서 물리력으로 막아 결국 두산중공업 입구 도로 옆 화단에 임시로 추모비를 세워놓고 있다고 한다.

 

이에 대해 두산중공업 사측 관계자는 "신성한 작업장에 비석이 들어와서는 안되고 유서 내용도 새겨져 있어 회사 입장에서는 절대 반입할 수 없다"는 입장을 보였다고 한다. '신성한 작업장'이라고. 그럼 과연 자칭 '민족 기업'을 자랑하는 두산재벌의 뿌리가 정말 신성할까.

 

'민족'+'자본'. 이 두 단어가 합쳐 민족자본이라는 온전한 말은 될 수 있으되 그것은 순전히 말이 그렇다는 것이고 실제로 '민족자본', '민족기업'자체가 존재하기 힘든 지경임을 독자들은 다 알 것이다. 결국 민족은 이윤 추구를 위해 기업에 덧칠해진 '박가분'에 지나지 않는다. 이 박가분을 잠시 지우고 두산재벌의 과거를 한번 들춰보자.

 

 

대부분의 재벌들과 마찬가지로 두산도 3대에 걸친 전통(?)있는 족벌기업이다.


두산의 출발은 현재의 오너인 박용성. 박용오 등의 할아버지인 박승직이 1896년 서울 배오개(지금의 종로4가 광장시장 4거리에서 창경궁쪽 코너)에서 면직물을 판매하는 '박승직상점'을 시작하면서부터이다. 이 때 그의 나이 33세. 이를 두고 두산은 어떻게 기록하고 있을까.

 

"한국의 개화가 한창 진행 중이었던 1896년 8월, 당시 33세의 젊은이 박승직은 서울 배오개에 면직물을 주로 취급하는 조그만 점포를 개설하였습니다.


그 무렵 서민들에게 뛰어난 품질과 신용으로 널리 사랑받았던 그 작은가게가 바로 100년 기업 두산과 한국 기업의 근대사를 만들어낸 큰 터, 박승직 상점입니다. 서양의 문물이 물밀듯 밀려오면서 수동적으로 개화가 이루어지던 그 시절, 박승직이 배오개에 상점의 문을 연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습니다."(두산그룹 홈페이지에서)

 

마치 박승직을 시대의 조류를 내다본 선구적 민족 기업가로 묘사하고 있다.


연대로만 보자면 1896년은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아관파천의 치욕적인 해로,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꺾이고, 1895년 을미사변으로 명상황후가 살해되는 등 그야말로 조선이 일본을 비롯한 제국주의 열강에 의해서 서서히 망해가던 와중이었다. 따라서, 한국의 개화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는 표현은 어불성설이다.

 

그야말로 작은 면직물 장사가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매판성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러면 이 시대의 배경을 살펴보자.

 

1905년 일본인 재정고문에 의해 시행된 화폐제도개혁은 조선인 상인들의 파산을 초래했다. 이에 맞서 경성의 조선인 상인들은 [경성상업회의소]를 결성하여 대처하였지만 역부족이었다.

 

더불어 값싼 일본의 면제품이 쏟아져 들어오는 과정에서 조선의 포목상들은 경쟁력을 잃어가며 몰락하고 있었고 박승직을 비롯한 조선인 포목상들은 창신사(彰信社)라는 합명회사를 설립하여 일본의 대규모 방직회사의 횡포에 맞서 또 다른 일본 회사인 후지(富士)가스방적회사와 계약을 맺어 활로는 모색하지만 질 낮은 제품을 공급하므로 결국 창신사는 후지와의 거래를 청산한다.

 

박승직의 수완이 돋보이는 대목은 여기서부터이다.


박승직은 창신사를 탈퇴하고 재빨리 공익사라는 회사를 만들어 일본 대기업 이토추 상사(伊藤忠商社)의 자본을 끌어들인다.


물론 이 과정에서 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도움도 작용하였다는 사실은 박승직의 매판성을 웅변해주고 있다.

 

박승직은 공익사 성장에 힘입어 제1차 세계대전리라는 전쟁특수도 톡톡히 누리며 조선 북부지역과 봉천·하얼빈에까지 사세를 확장하기에 이른다. 또 1916년에는 박가분 분공장을 1917년에는 곡물무역과 정미업을, 1918년 경성포목상조합 조합장이 된 후 1920년에 일본상인들과 연합하여 경성면사포상연합회를 만들어 부회장이 되었다. 1929년에 있었던 이 단체의 기념식장에서 미쓰이물산 서울지점장 박승직을 두고 '일조(日朝)협동기업'의 개척자라고 칭송하였다.

 

1919년 준친일단체인 조선경제회의 이사, 1921년에는 일선기업의 융합을 목적으로 열린 산업조사위원회에 대한 대응책을 강구하기 위하여, 조선인들이 개최하였던 조선인산업대회의 지방위원, 1925년에는 상인들의 친목단체인 중앙번영회(경성상공협회로 개명) 회장, 1938년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발기인 겸 상담역,1940년 국민총력조선연맹의 평의원으로 참여하는 등 자신이 진 빚을 갚기라고 하는 듯 열렬히 일제에 협력하기에 이른다.

 

1933년에는 OB맥주의 전신 격인 소화기린맥주(일본의 대표적 맥주회사였던 기린맥주가 대주주)이사로 참가한 박승직은 일제의 중국침략시기에 최대의 호황을 누린다. 제국주의 침략전쟁이 곧 박승직 상점의 발전으로 이어지는 사실을 보면서 그들이 주장하는 민족자본과 민족기업의 실체는 극명하게 드러나지 않을까.

 

미키 쇼우쇼크(三木承稷)로 창씨개명한 박승직의 장남으로 아버지의 수완을 전수받은 아들 박두병은 1946년 박승직 상점을 두산상회로 이름을 바꾸면서 오늘 날 두산이란 이름을 등장시킨다. 이러한 그들 가계의 역사를 그들은 어떻게 말하고 있을까.

 

"박승직은 또한 기업을 외세의 침략에 맞서는 민족의 힘으로 키우고자 하였습니다.


(중략) 1906년 지금의 한국 전경련 성격을 지닌 한성상업회의소 설립에 참여했는데, 이 회의소는 훗날 대한상공회의소의 효시가 되었습니다. 발전하는 나라, 한국의 힘이 되어온 민족기업, 바로 두산입니다.


(중략) 두산은 구한말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남들보다 한발 앞선 통찰력과 과감한 결단력으로 위기를 극복하고 견실한 기업으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두산의 역사는 바로 한국 기업의 역사이며 또한, 우리의 생활 속에서 함께 해 온 역사이기도 합니다. 끊임없이 변화해 온 두산은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든든한 기업으로 고객 여러분과 함께 성장해 나가겠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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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카포 11-03-03 10:22
   
흐미 길어라..
이거 저장 11-03-03 14:39
   
이야 친일파들 진짜 많구나. 뉴라이트 인물들 봐라. 전부 친일파 후손들이네. ㅉㅉㅉ
Assa 11-03-03 15:18
   
ㅡㅡ;;
skeinlove 11-03-03 15:38
   
ㅡㅡ;;
111 11-03-04 12:16
   
다 못읽겠슴 ㅠㅠ
11-03-11 03:46
   
한번 전쟁나서 전쟁통에 저놈들 죽거나...
저놈들 해외로 도주했을때 종전되고 나라안에 없을때 추방 및 입국 거부, 자산 동결 하지않는 이상 방법 없다는..
단칼에베다 11-04-26 02:07
   
죄송합니다..끝까지 못읽었어요...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