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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1-02-01 23:22
무서운 무기, 죽창(竹槍)에 대해 알아봅시다
 글쓴이 : 22
조회 : 1,979  


1. 개요

죽창은 중국의 제갈량이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창으로 20자 길이의 대나무에 창날을 부착한
무기이며, 손잡이 위 부분은 채색을 하였다.

2. 모양과 사용법

죽창 자루는 일반 나무가 아니라 대나무로 만들었으며, 그 길이가 20척으로 장창보다 길었다.
머리날이 4촌, 손잡이가 5척이며, 손잡이 이상은 물감을 칠했다.
 장창과는 달리 석반(錫盤)이나 준(鐏)이 없었다.

죽창에 대해서는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 권1, 「죽장창」조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죽창은 그 길이가 20자, 머릿날이 4치, 손잡이가 5자이며, 손잡이 윗부분은 채색을 하였다.
 특히 중국 제갈량은 고죽창(苦竹槍)을 만들었는데, 그 길이가 2장 5척이었다.
고죽은 백엽죽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한 가지에 백 개의 잎이 달린 것을 뜻하며 사람이
백엽죽에 상하면 반드시 죽는다고 전해지고 있다.
 또 《대명회전(大明會典)》에는 “홍치 16년(1503) 남방에 있는 위소에 영을 내려 죽장창을
모아 나무자루로 고치도록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수창(殳槍)은 대나무 여덟 쪽을 모아서
병차를 만들 때 사용하였다. 비(秘)는 대나무를 모은 것(積竹)이다. 즉 적죽이라는 것은
대나무의 흰 부분을 깎아내고 겉의 푸른 부분을 모아서 그 다듬어진 것을 취한 것을 말한다.
죽비(竹秘)는 대나무로 만든 창자루를 의미하기도 한다. 여기(慮器)는 적죽으로 만든 지팡이를
말한다. 극(戟)과 긍(矜) 과 같은 무기 역시 적죽을 사용하였다.

 죽장창은 나무자루로 된 장창에 비해서 가벼운 장점이 있었으나, 중간이 휘어지는 약점이 있었다.
그러므로 일본에서는 이러한 단점을 보완하여 대나무를 쪼개서 이것을 모아서 아교로 붙여 굳게
하고 옻을 칠했던 것이다. 따라서 일본 죽장창은 길이가 20척에 달했음에도 불구하고 부드럽고
굳센 날이 매우 견고하고 날카로운 장점이 있었다. 이 창은 적은 힘을 들이고도 매우 깊이 찌를
수 있었으며, 허리부분을 잠시 굽혀 놓아도 곧바로 펴지는 탄력성을 지니고 있었다.

 죽장창의 기예 자체는 다른 것에 비하여 비교적 단조로운 편이나 병장기가 길고 창끝의
날카로운 날로써 좌우로 파상적인 공격을 감행하여 다수의 적을 압도할 수 있다.

3. 역사적 사실
 우리나라에서 죽장창은 조선후기에 들어서야 사용하였다. 원래 창은 긴 장대를 이용하여
상대방을 공격하는 무기로 조선 전기에는 모(矛), 극(戟), 창(槍) 등 3가지 종류의 창이 있었다.
또한 창은 긴 장대를 이용하여 내뻗는 힘으로 적을 살상시키는 무기였기 때문에 원래 평지에서
사용될 때에 보다 그 효용성이 증대되었다. 따라서 화약병기가 출현하기 이전까지는 평지에서
접근전의 주무기는 창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비해 모는 짧은 창의 일종으로 모의 머리부분의 예리함에 의존하는 무기로 초목이
무성하여 다른 무기를 사용할 수 없는 지형에서 사용하는데 유리하였다.
 극은 고대의 전투 무기였던 창과 모의 장점을 살려 만든 무기로 잡아당기고 찍고 찌를 수 있는
세 가지 기능을 갖춘 살상력이 높은 무기였다. 그러나 극은 갑옷의 발달로 그 효용성이 줄고,
창의 찌르는 기능이 더욱 중시되자 점차 그 기능을 잃게 되어, 조선시대에는 전투무기가 아닌
하나의 의전용(儀典用)으로 사용되기에 이르렀다.

 한편 조선 전기의 창술은 보병용이 아닌 기병용인 기창(騎槍)의 형태로 발달하였는데,
이에 따라 무과(武科)나 무사(武士)의 선발 과목에 기창이 포함되었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무과 초시 및 복시의 기창 시험에 사용된 창의 길이는 15척 5촌이었고,
무게는 30근이었다. 그러나 이 기창은 그 크기가 커서 무사들 중에도 사용하는 사람이 드물다고
기록되었기 때문에 실제 전투용으로 사용된 창은 이보다는 훨씬 가벼웠을 것으로 보인다.

 조선 전기 일반 병사들이 기본적으로 휴대하고 있었던 무기는 바로 이러한 창이었을 것이다.
조선은 일반 번상(番上) 농민병의 무기를 국가가 준비하여 지급한 것이 아니라 농민 스스로 각자
마련토록 하였다. 국가는 농민병에게 도검류나 혹은 궁시류와 같이 재정적 부담이 컸던 무기류의
무장 요구가 곤란하자, 이 보다는 재정적 부담이 적었던 창으로 무장시켰던 것이다.
 그나마 창술이 무과시험과 일반 병사의 시취(試取;선발)에 포함되어 있어서 어느 정도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결국 조선 초기의 창의 격식(格式)은 전투무기로서 손색이 없었으나, 임진왜란 직전의 조선
군사들이 갖추었던 창은 장기간의 태평세월로 인해 무기에 대한 관심이 없어졌고, 또 자루 길이도
짧아져 전투용으로서 기능이 상실한 상태라 외국인의 눈에 비웃음이 될 정도였다.
 이는 1587년 대마도 사신으로 조선에 왔던 귤강광(橘康廣)이 인동에서 조선군의 창을 보고
 “너희들이 가진 창은 자루가 몹시 짧구나.”라고 지적한 데서 잘 알 수 있다.
(《징비록(懲毖錄)》 권1)
 다만 창술은 장병술(長兵術)의 발달로 인해 궁시에 비해 그 비중이 떨어지기는 하였지만
임진왜란 당시에도 창술은 어느 정도 발달해 있었던 것 같다. 스페인 신부 루이스·데·구스만은
임진왜란 당시 참전했던 선교사들의 「1592년 일본 연례보고서 부록」을 참고하여 “꼬라이 병사들은
일반적으로 짧고 두께가 얇은 칼을 사용하며 미늘창도 아주 능숙하게 사용한다. 그래서 중국
사람들도 그들에게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Luis de Guzmán, 《선교사들의 이야기》, 1601)라고
당시 조선군이 창을 매우 잘 다루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조선은 임란을 계기로 단병기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으며, 특히 도검 및 창류가 단병기 중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졌다. 특히 1593년 12월 파병해 온 제독 이여송(李如松)의 명군(明軍)
으로부터 중국의 각종 무기를 접하게 되었는데, 명나라 군이 사용하던 일반무기는 대체로
조선군과 차이는 없었으나, 그 종류가 다양했으며 그 기예가 뛰어났었다.

 이후 단병기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어 조선 정부는 중국 척계광(戚繼光)의 기효신서(紀效新書)의
도입으로 보병전술(步兵戰術)인 단병기(短兵技) 무예의 사용법을 파악하고, 필요한 무예를 정리
해서 보급할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끼게 되었다.
 이에 선조(宣祖)는 훈련도감 낭청 한교(韓嶠)에게 명하여 우리나라에 출정한 중국 장수들에게
자문을 구해 무기 교범을 만들도록 하였다. 그 결과 선조 31년(1598)에 한교(韓嶠)는 6가지의
병기(兵器)와 세보(勢譜)를 실은 조선 최초의 무예서인 《무예제보(武藝諸譜)》를 간행하였다.
 이 《무예제보》에는 《기효신서(紀效新書)》에 나와 있던 당파(鎲鈀)을 비롯하여 곤봉(棍棒)
등패(藏牌)·장창(長槍)·낭선(狼筅)·쌍수도(雙手刀) 등이 포함되기에 이른다.

 이후 영조 35년(1759)에는 《무예신보(武藝新譜)》가 발간되었는데, 여기에는 기창도 도입
되기에 이른다. 당시 추가된 기예에는 기창(旗槍)을 비롯하여 죽장창(竹長槍) · 예도(銳刀)
 · 왜검(倭劍) · 왜검교전(倭劍交戰) · 월도(月刀) · 협도(挾刀) · 쌍검(雙劒) · 제독검(提督劒)
 · 본국검(本國劒) · 권법(拳法) · 편곤(鞭棍)등이 있었고, 이로써 18기로 정립되어 통상
 무예 18반이라 칭하였다. 이러한 조선의 18반 무예는 중국의 18반(18기) 무예와는 그 내용에
있어서 다른 독창성을 지니고 있다.

 영조에 이어 즉위한 정조(正祖)도 무예에 관심을 가졌으며 18반 무예를 통해서 시취(試取)토록
하였고, 이들 무예를 정리하여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를 편찬토록 하였다.
 이 《무예도보통지》에는 기존의 18반 무예 외에 기창(騎槍)·마상월도(馬上月刀)·
마상쌍검(馬上雙劒)·기상편곤(騎上鞭混) 등의 4기와 추가적으로 격구(擊毬) 및 마상재(馬上才)를
덧붙여서 총 24기가 완성하였다.

 결국 죽장창은 조선 전기에 사용된 창이 임진왜란을 계기로 그 중요성이 더욱 증가하여 새로운
형태의 창이 일정한 형태로 규격화가 진행되면서 도입되었고, 이를 종합적으로 정리한 것이 바로
《무예도보통지》였다고 할 수 있다.

 다음은 죽장창 관련 실록 기사이다.
《철종실록》권14, 13년 4월 21일(계유)
 전라 가도사(假都事) 민세호(閔世鎬)가 장계하기를, “함평(咸平) 백성 정한순(鄭翰淳)이
도당(徒黨)을 불러모아 기치(旗幟)를 세우고, 각기 죽창(竹槍)을 가지고 동헌(東軒)으로
난입하여 현감(縣監)을 끌어낸 다음 구타하고 갔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지금 이 함평(咸平)의 일은 군사를 일으켜 난동을 부리는 것보다 심한 점이 있다.
설령 관(官)에서 잘못한 것이 있다 하더라도 백성된 도리에 있어 분수를 범하고 윗사람을
능멸하는 것이 이토록 극심한 지경에 이를 수가 있겠는가? 지금은 항리(恒理)와 항법(恒法)으로
책망할 수가 없으니, 구핵(鉤覈)하여 죄의 무겁고 가벼움을 정하는 방안을 묘당(廟堂, 의정부)
으로 하여금 좋은 쪽을 따라 품처(稟處)하게 하라.” 하였다.

4. 참고문헌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
《경국대전》
《징비록(懲毖錄)》
《조선왕조실록》
《대명회전(大明會典)》
《한국무기발달사》 국방군사연구소 1994


자료출처 : 한국의 전통무기와 설화속의 몬스터 중 발췌
 http://koreanmonsters.culturecontent.com/jsp/weapon/textInfo.jsp?itemCode=HC000071&cp=2

구하기도 쉽고 만들기도 쉽기 때문에 옛부터 '민중의 무기' 같은 뭔가 상징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만드는 법도 그냥 대나무를 비스듬하게 절단하면 끝이다. 대나무의 절단면이 엄청나게 날카롭기 때문에 이것만으로도 살상력 있는 무기가 된다.

죽창은 대부분 깊게 찌를 수 있게 마디 아래를 잘라 깊게 찌를 수 있게 만드는 데, 살이 이 빈 공간으로 파고들고 깊게 찔릴수록 나중에 그 압력으로 빼기 힘들어지는데, 동시에 살이 밀려서 2~3차적으로 심한 상처를 줄수도 있다. 거기다 절단면 밑쪽은 대나무 통 즉, 비어있기때문에 살을 뚫고 지나가면 내장이 철철쏟아진다 카더라... 잘 감이 안오는 사람은 죽창이 그 생김새나 안이 비어있다는 점이나 현대의 빨대와 매우 유사하다는 점을 생각해 보자. 사람 몸에 크고 아름다운 빨대가 꽂히는 상황이니까, 더 말할 것도 없이 망했어요.

죽창으로 찔렀더니 살을 뚫고가서 뺐더니 살이 죽창의 빈 곳에 눌려 껴있었다고 한다. 물론 믿으면 골룸. 인간의 살은 그렇게 무르지 않다. 보통 살이 밀려 다 밀지도 못한다. 하지만, 있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좀 거슬러 올라가면 한국의 역사에서 웬만한 민중봉기와 항쟁에는 전부 죽창이 함께했다. 관련된 유명한 말로는 동학 농민군의 위세를 나타내는 '서면 백산 앉으면 죽산'이 있다. 전원이 흰옷 입은 농사꾼이니 서면 다 허옇고, 제대로 된 무기가 없어 전원이 대밭에서 베어온 죽창을 들엇으니 앉으면 죽창만 보여 죽산인 것. 사실 이는 동학군의 집결지 지명이 실제로 백산(白山)이었던 데서 나온 일종의 언어유희다.[1]

자료출처 :http://mirror.enha.kr/wiki/%EC%A3%BD%EC%B0%BD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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