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격전이 그저 임기응변일 뿐이라니요, ㅎㅎㅎㅎㅎㅎㅎ
한국전쟁 당시 전략을 짠 장본인이 스탈린 이었고,
당시 스탈린의 전략은 신속하게 수도 서울을 점령한 후 이승만에게
항복 서명을 받아 냄으로써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미군의 개입 이전에
전쟁을 끝낸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북한과 소련은 에치슨 라인에서 남한이 배제된것을 기회로 한국 전쟁을
기획하긴 했지만 미군의 개입이 없을거란 확신은 없었고, 해서 최대한 신속하게
전쟁을 끝내려 했던 것입니다, 바로 전격전 이었지요,
이것은 임기응변 따위가 아닌, 에초부터 그렇게 기획된 전쟁이었습니다,
오히려 전쟁이 장기화 된것이 북한군과 소련군의 실수였지요,
임진왜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에초 왜군은 선조를 붙잡아 항복을 받아냄으로써
신속하게 전쟁을 끝내려 했었지요, 당시 왜군의 전략 또한 현대의 전격전과 다름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조가 북으로 튐으로써 왜군의 전략에 차질이 생겼던 것이지요,
임진왜란 또한 에초 단기결전의 전격전으로 기획된 전쟁이었지만 왜군의 판단 미스로
장기전이된 전쟁이었습니다,
몇가지 사례만 찾아봐도 전격전이란것은 분명히 존재하는 전략입니다,
임기응변 따위가 아니에요 ㅎㅎㅎㅎㅎ
생각외로.
한국전쟁 개전초기에 북한군의 남침에 동원된 기갑전력은.전격적이라 할만한 기동력은 보여주지 못한걸로 알고 있어요.
북한측 계획상. 105기계화 사단 예하 107/109 땅크연대와 603차량화 저역연대 가 주공으로 적절하게 설정되었지만. 이러한 전력들은 제대로된. 기동력을 발휘하지 못하여.
당시.1개 땅크대대만이 북한군 3보병사단과 합류하여 의정부까지 내려간것으로..알고 있습니다.
전체적으로는 북한군의 기갑.기계화전력은 의정부까지. 적극적으로 전투에 참가하지 못할정도로.
별로. 그다지...
무기와 병력 모두 질적/양적으로 북한군에 비해 열세인 상황에. 38선에 집중된 군을 제외하고 경기도 이남으로는 충분한 후방지역내 예비병력.부족등이. 문제였을듯 하네요.
그렇기에 서울점령 이후 북한군의 기갑전력이. 이후 수원-병점-천안-대전-공주-대구까지는 기동한걸로 알고 있네요.
전격전이라는 것은 세계2차대전에서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할때 쓴전술을 최초로 이르는 말입니다.
당시 전차라는 물건은 세계1차대전에서 참호전을 기본으로 해서 참호돌파를 목적으로 만든 어찌보면 단순한 물건입니다.
덩치크고 속도느리고 사방에 사각없는 포격각등이 주 특징이던 전차가..
독일의 1호 2호전차처럼 거의 기총에 가까운 20밀리 포를 탑재 중량도 가볍고 소형이고,
포탑을설치 포격각이 상대적으로 넓고...
특히 소형이면서 빠른...당시로서는 3배정도 빨랐죠....
폴란드 기병대를 전멸시키게 되죠....
(뭐 창들고서 창으로 전차를 찍어보니..강판........멘붕...그대로 다전멸....
이당시 기병대는 당시 유럽최고의 기병대라고 일컬는 폴란드였고, 당시 기병대의 군기나 자부심은 하늘을
찌를듯해서 사실상 후퇴라는 것자체를 염두해두지 않고 돌진하게 되었죠..
후퇴보다는 죽음을...라는 정신무장이 된 기병대였음....._)
세계1차대전이후 독일의 군수제제에 따라서 전차를 생산하지 못하게 되자.
훈련용이라고 해서 일반 차량에 강판대기...혹은 캔버스천을 전차비스무레하게 만들면서
장교훈련을 시켰죠...
그러면서 1호전차를 훈련용이라고 속여서 배치하기 시작했고..
당연히훈련용이였기 때문에 소형이고 무장도 기총하나....
당시 전차를 가지고 있는 국가에서 볼때 1호전차는 거의 훈련용 차량이라고 생각하기 충분했음..
그러나 실상은 달랐음 속도를 바탕으로 진격전을 펼칩으로 인해서..
폴란드를 위시로.........프랑스의 마지노선까지 돌파당하게 되었죠....
예전에는 전선을 구축...전면방어 전면공격진을 구사....하여.. 참호전의 양상을 보엿던 상황에서..
원포인트에 모든 전력을 집중시켜서 돌파해버리고 모든 참호와 전선을 무용지물로 만들게 되어버린상황이
되었죠.......
여기에 공정여단이라는 공수특임대가...이래저래 거점확보하면서...
상당히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전쟁의 전술이 완전히 변모하는 상황이 되었죠...
전겨전은 폴란드 침공을 위시로 해서 각국을 점령하면서 익힌 전술이기에
한순간의 일개지휘관의 임기응변식으로 발전하지는 않았읍니다.
기본모토는 속도라는 개념을 집어넣으면서 거점점령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구축한 상황이였기에..
상당히......인상깊게 그리고 현대전에서도 전선의 확대를 최소화하는
개념이 바로 이개념에 의해서입니다.
폴란드가 기병대 창기병 숫자가 유럽최대 숫자로 보유하고 있었읍니다.
수만에 달했다고..하고..아직도 그숫자가 왔다리 갔다리 하고 있읍니다.
당시 참호전이고, 유럽의 낮은 구릉지조건에서 창기병의 효과는 가시적인 효용성이
있었다고 합니다.
독입의 전격전에 완전히 와해되었고, 후에 창기병은 완전히 역사속으로 사라져버렸읍니다.
위에 언급했듯이 독일의 캔버스 덧씌운 차량으로 전차연습했기에..
당시 전차가 바로 캔버스로 위장한 차량이라고 생각해서 창기병으로 돌격한후에..
강판이라는 사실을 알고 경악을 했고, 바로 전멸을 했죠.
그후 다른 국가들은 폴란드의 전력의 전멸소식을 듣고, 대부분 약소국들이라서...
독일의 진격초기에 대부분 항복하게 되엇죠...오스트리아, 체코 북유럽국가등...
대부분은 항복하고..
프랑스만이 마지노선을 두고 저항하게 되엇읍니다.
특히 저 기병대의 말들은 수송작전에 투입 되어서 독일의 전격전에 최고의 파트너로
작전을 완수했다는 것은 아주 유명한 일화중하나입니다.
위의 분 말처럼 독일 일반보병처럼 총기로 무장하고 참호전을 준비하는 보병이였읍니다.
이동수단은 도보였죠.... 말은 기병대만의 기본 무장이엿읍니다.
그러나 보병들은 이미 슈투카의 심리적 폭격에 산산이 흩어진후...전차로 밀고왓죠
전차로 밀고올때 마지막 보류로.. 저기병대가 출격하게 되죠......
당시 폴란드군 이보유한 기병대의 무장은. 5발 7.92m Wz98 카빈에 기병도騎兵刀 였습니다.
어떠한 자료를 바탕으로 이야기 하시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러한 전투사례는 극히 이례적인것이 아닐까 생각되네요.
원거리에서 사격을 가하면. 충분히 캔버스로 덮힌 위장차량이건. 전차성능의 유무를 가릴수 있는데. 굳이.기창騎槍 기병돌격으로 할 이유가 없을듯 하네요.
그리고 폴란드 군 역시. 구형.구세대이긴 하지만. 장갑열차를 비롯하여 전차/장갑차를 이미 1939년대에 1000여대 가까이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영국제 빅커스 6t전차를 국산화한 7TP 전차나 프랑스제 르노 R전차 그밖에 TK3/TKS등 꼬마전차 탱켓을 수백대 주력삼아 운용할 정도인데. 전차의 방어력에 대해 강판두께에 대한 사전지식이 전무한채..결코 무지한채로. 기병돌격을 가할 이유는...
그리고 폴란드 기병의 돌격은 이후. 작전상 독일군의 포위망돌파를 위한 어쩔수 없는 작전상의 돌격이였을뿐. 기병에 대한 향수에 젖어있던. 이들의 잘못된 작전은 아니였다고 합니다.
정말 극치의 기병돌격의 끝판은. 코사카 기병의 독일전차대 돌격이 아닐까 생각되네요. 야사인지는 모르겠으나. 승마선수이자 메달리스트인 애마가인 ^^;독일군 지휘관이 슬퍼하였다고 하니 말이죠. ㅎ 코사카 기병이 죽는것보단..말이 죽는게 슬퍼서..;;
2차대전 당시에 폴란드는 독일이 전차가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고 합니다
베르사이유조약으로 독일은 전차를 가질수없었거든요
이 조약으로 독일군은 캔버스 전차(종이전차)로 군사훈련을 했었다고 하는데요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했을때 폴란드는 전차들을 보고 캔버스 전차겠지 하고 생각했었다더군요
창과 칼 물론 무장을 했겠지요
그런데 제가 들은바로는 폴란드 기병도 대전차 무기를 갖고 있었다고 하는데요?
물론 폴란드 지휘부는 독일군 전차의 존재유무에 대해서 오판할 가능성도 일부 존재할수는 있겠지만. 글쎄요.
그 이전 이미 1936부터 시작된 스페인 내전이라는. 하나의 국가에서 선보인. 독일/소련/이탈리아등 국가에서 투입한 전차/항공기등의 시험장 성격의 전쟁을 통해 이미 노출되었을 가능성과.1938년즈음. 합병된 체코의 우수한 주력 전차 LT-35와 신형전차 LT-38 (독일군 제식명 35/38t)을 흡수한 기갑전력과. 스페인내전에서 선보인 1호 A형과 (2호 추가투입설)의 존재감이라면. 폴란드군 정보력이 놓칠정도는 아니지 슾으네요.
전격전 Blitzkrieg가 독일군의 공식적인 전술교리가 아니긴 하지만,
실제 당시 전장에서 수행된 구데리안의 보병-기갑 연합전술과 공군의 지상지원, 그리고 이어지는 포위섬멸전 그 자체로 이미 하나의 완성된 전술 체제입니다. 당시 최신 병기의 장점을 살려 작전 목표 달성에 적합하도록 짜다보니 자연스럽게 나온 거였죠.
폴란드, 프랑스, 러시아 전선에서 벌어진 대규모 독일 군사작전을 표현하는데 이보다 더 적절한 단어는 아직 없습니다.
없던전술이라고봐야겠는데요?
그게 말로하면 기동전이고 기갑이 하면 전격전인데
뭐 전술적이라기보단 그것을 실행할 물리적인 방법이 없었고 또한 하려하지않았기때문이겠죠
기갑이라는 물리적인 도구가생기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기병으로 기동전하던대로
조직적으로꾸려서 써먹었으니 전격적이죠
즉 기갑이 생기고 그걸 제대로 써먹기위해 조직화하기전엔 없었다고봐야겠죠
그전엔 그게 기마전술이었지 기갑전술은 아니었잖아요 ㅎ
기동전이었지 전격전은 아니었죠 ㅎ
전격전의 기준이 되는 건 기동성과 화력인데, 이것이 실체가 없다 현장 지휘관의 임기응변이란 건 말이
안되는 거죠. 실제 당시 전격전이 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기갑사단의 창설입니다.
이전까지의 전차들은 주력이 아닌 보병부대의 백업역할이 컸습니다. 당시의 대부분의 국가에서 보병사단에
전차중대나 전차대대를 끼어넣는 식으로 부대편성을 했습니다. 프랑스가 2차대전 초기에 독일에 점령당할
때를 보면 프랑스의 전체 전차전력이 상대적으로 높음에도 독일의 기갑사단의 돌파력을 막지 못해서 박살이
나게 되죠. 즉 각개격파 당한 겁니다.
미국에서 전격전을 어떻게 보는지 책한권에 관련된 내용을 인용해서 적어놨군요.
그게 미국전체의 의견입니까? 딱 한권에서 그렇게 얘기하면 대세가 되는건가요?
거기 엔하위키 적어놓은 사람은 전격전에 가까운건 오히려 미국이다? 미국이 기갑사단
을 창설한 년도가 1940년입니다. 아시다시피 독일은 1935년으로 알고 있고 말입니다.
미국이 기갑사단을 창설하게 된 이유와 그런 전략을 실행하게 된 원인이 무엇일까요?
아.. 한가지 전격전이라는게 전술 명칭이 아니라 나중에 그 결과를 보고 나온말이란 건
어지간한 다큐멘타리만 봐도 압니다. 마땅히 부를만한 명칭이 없으니 그냥 본문에 나온
전격전이란 말을 썼을뿐 전격전이 전술이름이란 건 아닙니다.
리델하트는 한국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죠.
"북한군이 8월 하순에 급하게 편성해 낙동강 전선에 투입했던 제16, 제17기갑여단을 사전에 편성해 2차대전 당시 독일군 기갑부대가 했던 것처럼 경부 축선 등 어느 한 방향에 집중 투입해 종심 깊은 돌파와 전과 확대, 그리고 신속한 추격을 실시했더라면 아마도 미군이 한반도에 투입되기도 전에 부산까지 점령할 수 있었을 것이다.”
즉 김일성이 전격전을 벌였더라면 전쟁에 승리했을거라고요. 다시말해 전격전을 못했다는 이야기죠.
분과 초의 차이 정도라고 봐야겠지요, 전격전이란 단기 결전의 단기화 버전으로
전차와 전투기의 등장으로 과거 보다 더 빠른 기동력과 화력을 낼 수 있게된
군대가 과거보다 더 빠른 시간에 효율적으로 적을 제압하고 전쟁을 끝낼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음, , , 아무래도 제가 전략과 전술의 차이를 제대로 이해하질 못하고 있었던거 같습니다,
다시 설명드리겠습니다, , ,
전격전은 전법 내지는 전술의 개념으로 봐야할듯 하고,
단기 결전이란 그보다 상위의 개념인 전략의 개념으로 봐야 할거 같네요,
실제 단기 결전이란 단기간에 전쟁을 끝낸다는 개념만 존재할 뿐,
구체적으로 어떻게 싸워야 한다는 체계가 잡혀 있는 전술은 아니지요, ,
그에 비해 전격전은 그보다는 상대적으로 구체화된 전술 & 전법에 가까운 것이구요, ,
단기 결전과 전격전은 전략과 전술의 차이 정도라 봐야 할거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