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꼭 궁수가 사람을 상대 할 이유도 없으며 (숲에서 사냥을 할 경우 동물을 쫒아 달려야 할 경우도 있습니다.) 추격전이라면 숲에서 뛰어 갈 수 있습니다.
2. 총 나오기 전의 전투는 다 밀집해서 평원이나 성 같은데서 대열을 이뤄서 했어요.
화살통 당연히 지니고 다녔겠죠.
- 과거 전투가 모두 대규모 전투만 있던게 아닙니다. 소규모 전투나 유격전 또한 존재 했고 이런 전투의 경우 대열을 갖추기보단 소수가 서로 매복이나 엄패하여 충분히 싸울 수 있습니다.
3. 옛날에는 동서양 막론하고 기본적으로 무기는 군대가 가진 것이고 개인은 귀족이 아닌한 소지 자체가 허락 안됐죠. 귀독의 특권...
- 이 글은 정말 황당하군요. 과거엔 현대보다 개인의 무기 소지가 더욱 심했습니다.
지금이야 법으로 총이나 일정 크기의 칼을 소지하는데 제약을 두었지만, 과거엔 그런 법따위 존재하지도 않았습니다.
간단하게 글쓰신 분의 말은 청동기 시대까지 한에서입니다. 청동의 경우 동이 매우 귀하기때문에
(현재도 비쌉니다.) 일반인들이 소지하기에 가격이 비싸 못했지만,
철기 시대 이후 철은 매우 구하기 쉽기에 일반 평민도 무장을 할 수 있는 수준이 되었죠.
간단하게 고려시대 내란의 가장 큰 이유가 개인이 사병을 두기 때문이였는데요.
또한 가까운 조선시대만 해도 일반 백성인 사냥꾼들도 칼과 활 후기엔 총까지 무장을 했습니다.
그 시대 무기에 대한 국가의 재제가 지금처럼 강력하지 못 했지요. 당장 행정이 근대보다도 한참 떨어지는데 이런것이 잘 됐을리 없죠.
위 영상의 분이 하는 주장이나 행동은 충분히 납득할 만하고 오히려 사실에 가깝다 할 수 있습니다.
이유는 영상에서 나오듯 수 많은 옛 기록(그림과 문서)과 그것을 행한 실제 영상을 찍었기 때문이죠.
오히려 TV속 고증도 되지 않고 자기들 입 맛에 맞게 해석한 영상에 보고 거짓을 믿은건 반대인거 같군요.
당연히 다수와 다수가 야지에서 서로를 상대한다면, 궁수들은 서로 진형을 짜고 일제 사격을 했겠지요 이게 정석입니다. 일반적 궁수들이 사용하는거고요.
하지만, 이분이 말하는건 일반적 궁수가 아닌 좀 더 실력이 뛰어난 궁수를 의미하는거 같군요.
솔찍히 저정도 궁술을 일반 궁수들이 썼을리도 없고요. (어느정도 타고 나기도 하고 연습도 많이 해야 하고요.
하지만, 속사는 예전에 매우 중요한 궁술임은 확실합니다.
가장 확실한 증거는 연노의 존재입니다.
연노는 삼국지의 제갈량에 대해서도 나오고 중국 뿐만 아니라 우리 나라에서도 연노와 비슷한 무기체계가 있습니다.
그런데 연노는 정말 활이라 보기 보잘것 없는 무기 입니다. 활대의 힘이 약해 사실상 사거리도 매우 짧고 관통력도 약하기 때문이죠. 하지만, 연사력 하나만큼은 숙련도가 낮은 병사가 써도 최고였습니다.
연노라는 무기는 기본적으로 수성전때 사용하는 무기입니다.
일반적으로 수성은 적보다 높은 위치에서 다수의 적을 상대하고 방어에 취약한 공성중인 적을 상대하다 보니 힘보단 속도와 물량이 중요했기에 개발된게 연노입니다.
그리고 과거엔 우리 생각보다 보병들의 무장정도가 그리 튼튼하지 못했습니다. 화살을 막는 갑옷도 사실상 장수나 기병대 또는 어느정도 돈이 많거나 직급이 되야 입는거지 일반 보병은 가죽 정도가 대부분이였기에 화살을 맞으면 충분히 부상을 유발해 전투력에 손실을 줄 수 있었으니까요.
이상으로 충분히 속사는 과거에서 매우 중요한 궁술이였다 생각합니다.
다만, 궁수가 적을 근접에서 상대한다는건 궁수가 노린게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상황이나 되겠죠. 굳이 가까이에서 싸울 이유가 없으니까요.
그러나 결론적으로 영상에서 주인이 강조하는 속사와 사격의 정확성은 다양한 상황에서 활의 사용등은 매우 중요한 사항이고 궁수의 생존력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은 부정 할 수 없습니다.
가장 간단한 보충 설명을 하나 더 하자면, 영상에서 말하는거 처럼 양궁은 화살을 활의 왼편으로 시위를 겁니다.
이건 현대 양궁때문에 변질 됀것이라 말은하는데요. 서양은 모르겠고 우리나라는 확실합니다.
오른손잡이라면 국궁은 화살을 활의 오른편에 시위를 걸기 때문이죠.
그래서 가끔 국궁 영상에 외국인이 댓글 다는것 중 황당한 말이 왜 시위를 거꾸로 거냐는 댓글입니다. -_-;
옛날에는 농사짓는 농부 아니고서는 군인이나 기타 해적이나 뭐 기타 직업에서는 시간이 남아서 하루종일 심심하면 무술연마나 저런 기술 연마 했다면 저런게 가능했을거라 생각됨.
그리고 근접력 저지력도 떨어지지 않는다고 생각되네요. 쉽게 생각해도 상대가 짱돌 들고 던져도 엄청난 위협되는데요..상대가 엄청난 속도로 연사 날리면 아무리 칼 들고 있고 근거리라도 쉽게 못갈거 같음.
그리고 영상보니깐 관통력이나 정확도도 상당한데요?
대규모 전투 아닌 다음에는 여러모로 쓸모가 상당한거 같네요
저 정도의 숙련된 병사를 키우고 유지할려면 과거 군비로 가능할까요? 산업혁명 이전의 사람들의 생산력과 물자는 정말 유럽, 중국도 그 다지 풍부하지 않았습니다. 기계의 힘을 빌려 유효 인력이 생기고 여력이 남으면서 그 때서야 다른 생필품을 생산하기 시작했지 그 이전에는 왕족 귀족들 말고는 모두 살기위해 농사나 기타 노동에 모두 참여를 해야 가능했죠. 아니면 남의 물자와 인력(노예)을 빼앗아야 하는 정복 전쟁을 해야 하거나요.
즉 일부 호위 직업 군인(기사)은 있었지만, 과거에도 숙련된 병사를 대량으로 키우기 힘들었고, 특히나 숙련된 궁병은 더욱 힘들었죠. 몽골이야 태어날 때부터 말을 타고 활을 쏘는게 생활이니 따로 군사훈련이 필요없이 양질의 병사를 유지할 수 있었던거구요.
게다가 근접전에서 화살을 쏜다는 발상은 3발을 쏠 수 있다해도, 어차피 전투는 다수대 다수의 결전입니다. 화려하게 공중에서 3명 쓰러뜨리고, 착지하면 칼이나 창에 찔려 죽겠죠. 차라리 최 근접적이 아니면 창이 더 효율적이었고, 실제도 그러했습니다.
평소 마을마다.
활쏘기를 장려하고. 활을 가까이하는 모습을 만들어나갔으면.
저러한. 활쏘기. 사법射法이 발전할수도 있었을듯 하네요.
단적인 예로.
옛 영국VS프랑스의 전쟁속 영국군에 소속된 장궁병들은. 상비군 성향보다는. 징집병이였던걸로 기억나기도 하며.
한반도의 역사속. 삼국시대.고려시대 조선시대내에서도. 곳곳에서. 활쏘는 풍습. 사풍을 장려한 흔적이 많은걸로 알고 있습니다.
(전국곳곳에. 활터가 무수히 많았지만. 갑오경장 이후. 옛풍속이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할 무렵 경성을 시작으로.
활쏘는 풍습또한 위협을 받기도 하였죠)
3:49에 전문 궁수/ 사냥꾼만 가능하다 -라고 언급되는것으로 보아. 저러한 묘기 샷(...)은
일부 활쟁이만 가능했어나 보네요.ㅎ
예전에 시골산에가면 가끔씩 몇백미터 떨어진 노루 봅니다..
동영상속에서 쏘는식으로 쏴서 몇백미터 떨어진 짐승 잡을수 있을까요
기껏해야 사거리 몇십미터겠죠..
하지만 노리고쏘는경운 500미터까지 사거리 됩니다....
상황에 맞춰서 하는거죠..
저런식으로 활쏘는 사람도 드물게있긴 하겠죠..
하지만 활의 최고 장점은 사거리라 보네요..
저런식으로 활 사용하는거보단
현대식으로 활쏘게된 가장 큰 이유는..
사거리 늘리기 위해서라 보네요..
그럴 듯 하네요.
이퀼리브리엄이 나오기 전엔 총도 원거리용인 줄로만 알았잖아요.
활이라고 근거리용으로 쓰지 말란 법은 없겠죠.
게다가 불가능한 환타지성 기술이라면 몰라도 저렇게 영상으로 찍을 정도로 가능한 방법인데, 과거에 없었을 거라곤 생각하기 힘드네요.
다른 사람들이 검을 익히고, 단검술 익혀서 다른 사람과 싸웠듯이 궁술도 배워서 저런 식으로 싸웠겠죠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