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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3-01-13 19:54
[질문] 과거의 한국중국과 지금의 한국 중국의 경우..
 글쓴이 : 온전
조회 : 2,644  

과거 조선과 청나라 (시기는 북벌정책 임금있을때로)

그리고 

지금의 남한과 중국

둘이 붙으면 어느쪾이 더 승산이 있을까..
(다른 나라 안도와준다는 생각하에)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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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MS 13-01-13 19:59
   
정조 시대라면 모를까

국초. 강성한 활동력과. 오랑캐 이족으로서. 뛰어난 군주란 평가를 받는. 강희제를 상대하기엔
시기적으로 상당히 어려운 전쟁으로 진행될듯
     
온전 13-01-13 20:02
   
그럼 정조시대를 기준으로 하면 조선시대때가 더 승산이 있음???
          
스마트MS 13-01-13 20:18
   
흐음. 뭐라 말을 해야 할지..

북벌이란 단어처럼. 선제공격적인 의미. 국경선 너머로 진격 진군같은
상황을 발생시키고. 인조의 굴육을 되갚아주고 고토회복은 벌일 정도까진 모르겟으나
적어도
정조 이산은
효종때 부터 이어져온 국방강화 군사력분야의 발전을 노력해 왓고 결과물을 만들고 잇던 중이라
적어도 쳐들어오는 군세를 격퇴할수잇는 전력은 보유햇을듯
장용영를 중심으로 군 시스템이 완비 되엇다먄. 흠. 뭐 그냥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일뿐
참고만 하시길
쿠르르 13-01-13 20:45
   
지금이 송나라 이후로 가장 격차가 적은 시기이겠죠.

원 청은 정말 ㅎㄷㄷ한 국력이고(지금의 미국?), 그나마 송대가 가장만만했던듯(지금의 인도). 그때는 북방민족이 더 무서웠던
     
천리마 13-01-15 19:53
   
가장 근접한 답인것 같군요. 역사 적으로 보면 송조대의 군사력이 가장 약했지요. 요,금은 말할것도 없고 서하 에게 마저 졌으니 약햇다고 말할수 있지요.
이지스 13-01-13 20:49
   
지금은 바퀴벌래 약이 성능이 많이 좋아졌고, 살충제도 있어서 예전하고 틀릴듯.
모래곰 13-01-13 21:45
   
송나라, 고려는 사실 군사력은 오히려 고려가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원나라는 쿠빌라이 이후 좀 비리비리한 것 같은데 고려도 그땐 많이 부실해졌고.
명나라 주원장은 시절은 몰라도 영락제 때만 무서울 때고.
그 후로는 마찬가지로 비실거리죠. 황제가 포로로 잡히고 북경이 털리기 직전까지 갔다고 구사일생하고.
청나라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 때는 아마 당시 세계에서 가장 강하지 않았을까 생각되네요.
그런데 또 그 후로는 비실거리지 않나요.
중흥군주가 없지 않나 생각합니다.
효종때 북벌은 어렵겠고 정조 때는 다른 나라의 침략은 그냥 막았겠죠.
     
천리마 13-01-15 20:08
   
영락제 다음인 선덕제 때도 강했습니다. 선덕제는 지 할애비인 영락제를 따라 막북 원정에도 참여 하였는데 과감한 면도 있고 나름 용맹 하여 군비를 충실히 하였지요. 토목의변때 영종인 포로로 잡혀 망신을 산건 내시 왕진이(영종스승임) 함부로 작전을 변경하여(왕진 고향이 울주 인데 지고향으로 지나가면 보리밭을 망친다고 계획없이 군사를 돌려 기습받아 패배함)황제가 포로가 된것이죠. 만청의 후대에 팔기군이 약해진 것은 사실 이지만 우리는 더약했으므로 비교할바가 아님니다.
굿잡스 13-01-13 23:18
   
청은 한족 명나라 쳐바르고 정복한 왕조인데요 ㅋ. 

지금으로 치면 몽골이 현 짱궈 지우고 국호 세운 대변혁 ㅋ


그리고 조선도 언제적 국력으로 여진족(만주족)과 붙느냐죠.

500여년을 간 왕조이기에 흥망성쇠가 존재할 수 밖에 없고.


과거 숙신는 부여에 신속하고 이후 말갈은  우리 고구려의 부용 휘하 세력으로 더 오래 존재했습니다. 금나라 시기에도 신라인 황제와 고려인 연합 세력속에 존재했고.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 역시도 일개 고려의 장수에서 조선을 세운 무력적 뒷받침에도

여진족을 휘하에 둔 당시의 고려가 심양왕과 고려왕을 동시에 겸하면서 만주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고려말의 시대적 흐름속에서 나온 것임.


이후 이들 여진족은 조선에서 벼슬을 지냈고 세종 대왕 시기에는 여진족의 반이

조선내로 귀속되거나 복속.
     
천리마 13-01-15 20:11
   
명을 멸망 시킨것은 이자성의 군대 이고, 만청의 섭정 다이곤이 오삼계를 포섭하여 이자성을 멸망 시킨 것이지요.
          
굿잡스 13-01-16 01:02
   
명은 이미 부패한 상황이니 이자성이 도화선이 되었지만 과거 금처럼 얼마든지

한족들은 남하해서 과거 남송처럼 남명을 세울 넓은 땅을 가지고 있었음.

그러나 만주족의 철혈 배심은 양주에서 저항하는 한족 80만을 철저히 도륙하면서

소수의 만주족이 다수의 한족을 일어서지 못하게 무지막지한 도륙을 감행하는 등

이런 만주족의 강력하고 과감한 정복전쟁에서 자금성은 단순히 시작에 불과했음.

이후 어느 정도 안정된 시기에는 철저한 이원적 분리 체계하에 고도의 강온정책을 구사.
굿잡스 13-01-13 23:24
   
우선 이에 앞서 요동이라는 단어는 우리가 부른게 아니라
 
서토 왕조 특히 한족 왕조에서
 
서토 내륙에 쳐박혀 대대적으로 특정 국경을 말하는게 아니라
 
먼 동쪽 낯선 곳의 의미로 요동을 이야기 합니다.
 
(고구려가 요동의 강자로 실질 지배하면서 요동, 발해란 말도  다 우리 고려(고구려) 지칭)
 
글자 그대로 서토의 한족들에겐 영향력이 늘 미치지 못한 지역을 말함.
 
 
 
-- 짐이 보건대 지금 천하에서 자기의 인민과 사직을 가지고 왕위를 누리는
 
나라는 오직 삼한(고려)뿐이다. 우리의 선왕 때로부터 그 후 거의 100년 가
 
까운 기간에 부자가 계속 우리와 친선관계를 맺고 있으며 또 서로 장인과 사
 
위관계로 되었다. 이미 공훈을 세웠고 또 친척이 되었으니 응당 부귀를 누려
 
야 할 것이며 어떤 나라보다 먼저 국교를 맺었으니 추숭하는 예절을 어찌 늦
 
출 수 있겠는가 --
 
 
 
 사람들이 원제국 시기에 고려의 생산력이 완전히 박살 난 상황에서 공물만
 
바치는 거의 속국처럼 이해하는데 현재는 이런식으로 보지 않습니다. 도리
 
어 무인 100여년시기에 가면서 특정 무인가문을 지키기 위해 군사가
 
사병화 되면서 고려의 전성기 중앙 군사력의 기반이 약화 붕괴되고
 
도리어 강화도에 쳐박혀 있거나 일부 무인들이 남아 대몽항쟁질 한다면서 
 
내륙까지 민간인들의 실질 피해가 많았음.(이들을 끌어 내기 위해
 
몽골이 내륙까지 휘젖어 버림)
 
도리어 충선왕때 세계를 경영하던 원의 부마국이 되면서 당시 1계급
 
몽골에 견주는 1.5계급의 대우를 받았던 게 고려입니다.(한족은
 
당시 최하층 노예계급)
 
나름 자주권도 주어졌고 생산력도 회복되어 어느정도
 
돌아간 상황이였음.
 
이후 공민왕의 개혁은 이전의 실질적 동북아 3강의 황제국의 자주권 실현의
 
도모였지 고려가 막장에서 급격히 피치를 올려다는 식이 아닙니다.
 
 
 
이는 원래 일본 원정을 준비하고 실행하기 위해 고려에 설치되었던 기관이었다. 정식명칭은 정동행중서성(征東行中書省)이다. ‘정동’은 일본정벌을 뜻하는 것이고, ‘행중서성’은 중앙정부 중서성(中書省)의 지방파견기관을 뜻하는 것이다. 원은 지배지역에 지방행정기관으로 행중서성을 설치했다. 이것이 현재까지 성(省)이라는 행정단위로 남아 있다.
지금까지는 일본 원정을 포기하면서 필요 없어진 정동행성이, 고려를 통제하는 기관으로 변했다고 보아 왔다. 그러나 최근에는 정동행성이 고려를 통제하기 위해 설치된 기관이라고 보지 않는다. 고려에 대한 통제 기능은 일시적으로 발휘되는 경우가 있었을 뿐, 대부분의 시기에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점은 정동행성의 구조와 여기서 활동한 인물들의 성격에서 나타난다. 정동행성에는 기관의 수장으로 승상(丞相 : 종1품)이 있고 그 아래 평장정사(平章政事 : 종1품)·우승(右丞 : 정2품)·좌승(左丞 : 정2품)·참지정사(參知政事 : 종2품)·낭중(郎中 : 종5품)·원외랑(員外郎 : 종6품)·도사(都事 : 종7품) 등이 있었다. 이런 구조에서 정동행성의 수장인 승상에는 고려왕이 임명되었다.
또 몇 년 동안을 제외하고는 평장정사 이하 참지정사까지의 고급직위(종1품에서 종2품까지)에 대한 임명은 없었고, 낭중·원외랑·도사와 같은 하급직위(종5품 이하)만이 채워져 있었다. 하위직 마저도 대부분 고려인으로 충원했고, 원의 관리가 임명되는 평장정사·좌승·우승·참지정사 등의 요직을 비워두는 것이 관례였다. 더욱이 원(元)이 간섭할 필요가 있는 문제가 생기면 정동행성을 통하지 않고 사신이 직접 와서 처리하는 일이 많았다. 내정간섭을 위해 설치된 기관이라면 이런 식으로 운영되었을 리가 없다.
정동행성보다는 그 부속기구인 이문소(理問所)가 폐단이 더 컸다. 원나라의 다른 행성들에도 설치되어 있던 이문소(理問所)는, 본래 개경에서 원과 관련된 범죄행위를 다스리는 업무를 맡았다.
 
http://dk7117.egloos.com/2364101
     
굿잡스 13-01-13 23:25
   
1279년, 충렬왕은 고려에서 대도에 이르는 교통로에 고려인 촌락을 세우려고

원 쿠빌라이칸에게 청원하여 심주와 요양 사이  압록강 내에 고려 주민 400호

를 이주시키고 이르겐(伊里干=백성)이라는 특수 촌락 3개를 세우는데 이들 이르겐은

고려의 관할이었는데 훗날 이것이 충선왕이 고려왕이자 심양왕이 되는 기반으로 작용하면서

이후 고려인들이 몰리게 되었고 그에 앞서 철령위 위치등이고 한반도 내로

보지 않는 시각들이 학계에서 나오기 시작함.


고려시대 국경은 요동지역까지 였다

 

http://cafe.daum.net/cybershinsi/57cm/1228?docid=xWj0|57cm|1228|20110718143103&q=%C3%B6%B7%C9%C0%A7%20%BA%B9%B1%E2%B4%EB
 
 
참고로 이것도 읽어 보길.
          
굿잡스 13-01-13 23:25
   
우리가 아는 부여가

흔히 말하는 말갈족(후대 여진족)입니다. 예맥 말갈.  이들이 발해 건국의 주도세력이였고

이후 동만주 일대고 건재했던 여러 고구려인과 합세해서 발해 세움.

요즘은 발해 구성원을 단순히 상위 소수만 고구려인 이렇게 보지 않음.

(상당수가 그냥 고구려(고려)인)

중세 고려 말기 심양에 실질적 고려인과 여진족이 혼재하는데

이때의 여진족도 단순히 고려인과 명확히 구분되는 세력보다는

한반도 일대에서 넘어온 고려인과

금나라 당시 만주일대에 살던 금나라 연합 고려인 세력으로

따로 이질적 계통은 아닌것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 싶네요. 이런 가운데

이성계같은 여진족을 휘하에 둔 군벌 세력이 고려 조정의 한축으로 담당하게 된 것이고.
     
천리마 13-01-15 20:17
   
요(遼)란 의미는 요하(遼河)를 말하는 것으로서 중국인의 국경을 말합니다. 따라서 국경의 위치에 따라서 변하는 거죠. 따라서 요동은 국경의 동쪽 이라는 의미 입니다.
          
굿잡스 13-01-16 01:05
   
요동에 대한 견해는 단순히 요하 어쩌고의 개념이 아닙니다.

학자에 따라 대릉하등 여러 견해를 가지고  이후로도 수시로 따라지다 후대에

어느 정도 고착화된 단어임.

오늘날 지도상에서 요동반도를 중심으로 한 현 요하 어쩌고 개념만

은 아니라는 거죠. 즉 요동이란 개념도 국경 변두리 먼 동쪽의 개념이 그나마 적합.

서토에 쳐박혀 춘추전국시대 이전에는 아예 바다라는 개념도 없던 하한족에게

고정된 국경선 어쩌고 이야기 자체는 넌센스죠. 특히나 고대처럼 영토정복이

활발한 시대에.
굿잡스 13-01-13 23:28
   
원제국 시절 한족은 최하층 노예계급으로 분류

청나라 시절도 한족은 무자비한 변발에 복식등이 강제된 채 철저히 만주족이 다스리는 이원적  정치 구조와 체계에서 생활 했음.



청의 팔기군은 초기 무시 무시했죠.

전투력도 전투력이지만 그 무자비한 철혈 배심이랄까?

청 이전까지 티벳이나 몽골 일대는 여러 어려움 속에도 늘 이민족 세력권이였던 걸

청 시기에 만주족이 다 복속 시켜 버렸고.

그런 팔기군도 청 말기에 가면 서구 열강에게 진짜 한심할 정도로 쉽게 털려 버림.

일제에게도 그렇고.


즉 조선도 조선 초기 2,30만 강군을 운용하던 때에 청나라 말기같은 막장 팔기군이면

그냥 쓸어 버렸을 ㅋ
굿잡스 13-01-13 23:37
   
고대 서토 왕조에서 가장 막강한 물량과 병력 공급을 했던 왕조는

실제 수나라입니다. 그기다 이전 남북조 시대 북위 선비족이 가미된 대군의 기병 운용이 실

제적으로 접목되어 막강한 실전 전투력까지 가진 시기 였고.

또한  고구려 정벌을 위해서  몇년동안 군사 훈련도 빡세게 시킨 나라였음.

이런 점에서 고수 전쟁은 진짜 거의 피크 대 피크 끼리 싸운 세계 대전급 전쟁이라고 할 수 있고.

당나라 이세민은 아예 북방 민족까지 복속시키고 요서까지 야금 야금 먹으면서 대단한 전투 전적을 자랑하던 시기에도 고구려에 박살 난 경우죠.



몽골은 징기스칸이 뛰어난 부분도 있지만 참 시기적으로 시대 흐름을 잘 탄 케이스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당나라가 고구려를 어그지 정벌 하려다 중앙 국고가 거덜나면서

중기에 가면 중앙에서 직접적 통치 여력이 안되니 나오는게 절도사인데 이때문에

안록산의 난이나 고구려 유민의 이정기의 제나라등 수십개의 세금을 내지 않는 번국이

생겨나고 이런 가운데 약화된 시기에 거란의 요나라가 성장하고 이후 문치주의의

송나라는 밀려버렸고

 고려는 폭주하는 요를 견제하면서 3강을 만들어 놓다 다시 신라인 황제와 반요사상의

고구려인(발해인) 연합의 금이 요를 부수고 이런 가운데 금나라는 송과 몽골의 샌드위치에

따구리 당하면서 이걸 몽골이 이용해서 손쉽게 금을 무너뜨리고 다시 송나라의 허점을 파고

들어 멸먕시켜 버렸음. 


고려는 무신 시대 무신들 놀음한다고 중앙 군사 체계는 사병화 되어 도리어 약화 개판되어버렸고. 실제 고려는 몽골과의 싸움에서 과거 고요 전쟁같은 대규모 중앙 집중형 군사 편제의

공격이 아니라 거의 일개 성주가 알아서 막았던 식이 대부분임.  좀 안되어 싸우지도 않고

강화도로 들어가서 그기서 지들끼리 팔관회니 뭐니는 다했던 시기로.

도리어 고려황제는 몽골 끌어들여 무신 종결 시키길 더 원했던 이상한 상황.


청이 컨 것도 임진왜란이라는 16세기 변수속에서 여진족을 제어하던 조선의 국력이

급격히 상실되고 부패한 명나라의 국제적 흐름에서 팽창.


동북아는 솔직히 보면 물고 물리는 관계라서 국제적 대전 한번 나면 어떤식으로

다시금 물고 물려 먹고 먹히는 관계가 됨 . 그래서 되도록 미리 전쟁 억지력을 만들어

싸우지 않게 유비무환이 최선같네요.
NDolphin 13-01-14 13:05
   
지금은 20년전의 무기만해도 현재의 무기와 비교가 안될정도로 무기간의 격차가 크기때문에..
전략과 당시 최고?의 무기인 화차가 있던 조선이 가능성있지 않을까요..?
라스푸틴 13-01-14 13:55
   
글쎄요...
제가 보기엔 병력 수와 신무기도 문제겠지만 가장 중요한 전술이 뒷받침되지 않았기에 힘들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쟤들은 태생부터가 약탈하고 정복하고 전쟁했던 애들이에요. 정복이 뭔지, 전쟁이 뭔지 한마디로 아는 애들이죠.
우리는 삼국시대 이후로 정복전쟁따윈 해본 적 없고 수성전이나 국지전, 방어전만 주구장창 했었더랬죠.
전 정말 전술교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무기체계도 정복전에 어울리는 공성무기와 병과 운용 등 말 그대로 전술교리가 정복전에 맞추어져 있죠.
우리에게 공성무기가 제대로 갖춰졌다곤 보기 힘들지 않을까 싶어요.
총통이니 신기전이니 활이니 다 공성전엔 맞지 않는다고 보구요.
     
굿잡스 13-01-14 14:05
   
근데 전쟁이고 진정한 병사나 장수도 전장의 경험을 통해서 발전하는 거지

처음부터 바로 생겨 나는 건 아니죠.

몽골도 과거 실위시절이고 고구려 부용 세력에  거란에도 털렸던 세력이고

(요서 거란 부족들은 고구려 광개토 태왕시기에 가면 완전 복속되어 버림)

몽골의 기병 운용도 보면 신라인 황제와 고구려인 연합의 금나라 기병 전술을(고구려

기병술) 많이 착용했거든요.

공성전이라는 거도 지들 부족끼리 세력 다툼할때야 이동식 천막 짓고 살던 놈인데 제대

로 알턱도 없고 ㅋ.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윤관이 만주 동북방을 곤고히 하기 위해 20만 병력을 출정시켜 동

북방에 9성을 쌓은 거나 고려말까지 이성계가 여진족을 휘하에 두면서 요동 정벌을

성공적으로 이끈 역사, 조선 초기까지 세종대왕시기 여진족의 절반을 복속 아래 두면

서 활용도하고 해서 나름 그래도 과감한 전투력이나 전술을 잃지 않았던 시기로 보이네

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