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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3-01-01 14:05
[사진] 1982년 4월, 포클랜드 제도
 글쓴이 : 노닉
조회 : 2,234  


1965년부터 UN은 영국과 아르헨티나를 불러서 양국간의 영토분쟁을 해결할려고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함,

당시 영국 외무/영연방부는 포클랜드 제도를 포함한 남극쪽의 섬들을 아르헨티나에 할양할 계획이 있었지만,

1968년 이 계획이 까발려지자 포클랜드 제도를 포함한 할양 대상 섬 주민들이 로비로 할양 계획이 무산됨,

1977년 영국 총리였던 제임스 캘러한은 아르헨티니가 점령한 서던 툴레 제도에 비밀리에 2척의 호위함과 핵잠수함을 보냄,

이는 아르헨티나가 서던 툴레 제도를 전진기지로 삼아 포클랜드 제도를 침공할수 있다는 경각심에 결정된 작전으로,

결과적으론 아르헨티나군은 서던 툴레 제도를 포기하지 않았고 캘러한 총리도 무력을 사용한 퇴거를 거부함으로 아르헨티나군은 계속 주둔함,

아르헨티나 본국에선 1976년 군사정권으로 집권한 정부의 태도의 불만을 가진 시민들을 무작정 체포한뒤 고문하는 속칭 "더러운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고,

이는 1981년 집권한 레오폴드 갈티에리 정부의 경제 계획 실패와 합쳐저 정부의 정통성이 바닥을 치던 상황으로,

레오폴드 갈티에리 대통령은 이런 상황을 포클랜드 제도의 침공으로 만회할려는 계획을 세움,

아르헨티나 신문지 "라 프렌사"는 1982년까지 단계적으로 포클랜드 제도로 가는 생필품의 공급을 끊은뒤 최종적으로 침공이라는 결론을 내놓음,

1982년 3월에는 아르헨티나 해병들이 탑승한 고물수거선 1척이 영국 소유였던 사우스 조지아섬에 상륙하여 아르헨티나 국기를 내걸음,

이는 영국 정부가 북극 조사선인 HMS Endurance를 파견하는 결과를 낳았으며 아르헨티나 군부는 침공 작전을 앞당김,

1982년 4월 1일 만우절, 포클랜드 제도 총독인 렉스 헌트 경은 외무/영연방부에서 아르헨티나군의 침공이 임박하다는 긴급 전문을 받음,

당일 이루어진 2명의 왕립 해병대 지휘관들과의 회의에서 마이크 노먼 소령이 총지휘관이 되고 게리 노트 소령이 총독 보좌관으로 임명됨,

사우스 조지아섬 사태로 파견된 HMS Endurance의 조사팀 11명도 지휘관이던 크리스 토드헌터 대위가 섬 방위에 참가하면서,

총 병력은 66명의 왕립 해병대원과 11명의 무장선원들로 구성되었음, 후에 포클랜드 제도 방위군 25명이 소집되면서 증가함,

또한 포클랜드 제도의 아르헨티나 국적인들을 만약에 대비해 구속하기 시작했으며 이는 대위 리차드 볼이 담당했음,

아르헨티나군이 로사리오 작전으로 명명한 포클랜드 제도 침공은 4월 1일 밤 9시경 수도였던 포트 스탠리 남부에 특수부대가 상륙하며 시작됨,

아르헨티나 해병대는 미리 상륙한 특수부대원들이 공항 근처에 확보한 교두보에 미국산 AAV 장갑차를 이끌고 상륙함,

미리 침투한 특수부대원들은 포클랜드 동쪽의 무디 브룩 주둔지 건물에 비록 아무도 없었지만 수류탄을 까던지고 깽판을 치기 시작함,

물론 해병대원들은 포트 스탠리와 총독부를 중심으로 방어선을 구성했기에 당연히 아무런 피해도 없었고,

이는 노먼 소령에게 아르헨티나군이 상륙했다는 정보를 뿌린것이 되었음,

(사진 좌측 D로 표시된 부분의 건물 3채가 무디 브룩 주둔지로 침공 당시 비워진 상태였음)

포트 스탠리 동쪽 공항에선 20대의 LVTP-7A1 장갑차들이 상륙하여 총독부와 시내로 접근하고 있었고,

2개의 해병 중대도 장갑차들과 함께 행군하던중, 미리 매복하고 있던 왕립 해병대의 중기관총과 대전차분대의 기습을 받지만 숫자빨로 밀어버림,

장갑차 1대는 무려 97발의 기관총탄을 맞고도 궤도 한짝이 날라가는걸로 끝났음, 66mm 로켓(아마 M72 LAW 종류)가 측면을 관통했지만,

아르헨티나 해병대원들은 이미 하차한 상태로 대응사격중이었기에 아무런 피해를 입히진 못했음,

기습에도 불구하고 아르헨티나 해병대와의 화력에서 밀린 왕립 해병대원들은 시내로 후퇴하며 아르헨티나군을 저지할려고 시도했지만 실패함,

아르헨티나군은 이제 포트 스탠리를 점령하고 총독부를 완전히 포위하기까지 8시간이 걸린 가운데 숫적으로나 화력으로 열세였던 왕립 해병대원들은 항복함,

작전중 유일한 전사자는 해병대 소령 페드로 지아치노로, 자신의 부대를 이끌고 총독부를 공격하던중 부상을 입고,

아군 의무병이 자신을 구할려다가 수류탄과 총격에 부상을 입고 후퇴하는걸 보자 수류탄을 꺼낸뒤 안전핀을 뽑은 상태로,

3시간동안 왕립 해병대원들의 항복 권유를 거부한채 포클랜드 제도의 전면 항복 이후 스탠리 시내의 병원으로 후송되었지만 과다출혈로 사망함,

항복 이후 지아치노 소령의 부관이던 디이고 퀴로가 대위도 팔의 총상을 게리 노트 소령의 응급처치를 받은 이후 후송되어 살아남,

에르네스토 구르비나 상병도 스탠리 초입에서의 기습 이후 부상을 입은채로 방치되었다가 혈장 수혈을 받고 안정됨,

항복 이후 왕립 해병대원들은 그 유명한 범죄자식 구속자세로 비무장 당한뒤에 렉스 헌트 총독과 기타 섬 관리직들과 함께 영국으로 추방됨,


(항복 직후 왕립 해병대원들이 바닥에 엎드린채로 비무장당하는 모습이 영국 뉴스에 전파되며 확전 여론에 힘을 실어주게 되었음)

영국 본토는 4월 2일 포클랜드 제도 통신소에서 전달받은 마지막 전보에서 포클렌드 제도가 항복했다는 소식을 받고 대책회의에 들어감,

(포트 스탠리 교회와 경찰서 옆의 아르헨티나군 LVTP 수륙양용장갑차)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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