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원하는 평화, 하지만 그 평화는 참 어렵습니다. 모두가 평화를 원하지만 그 평화의 방식에는 합일이 아닌 이기와 불합리가 있기 때문이죠.
과거 동북아의 평화는 중원을 차지하는 것이었습니다. 고대부터 동북아에는 유목 민족의 문화와 중원에 큰 강을 중심으로 번영한 농경 문화가 상존했는데 서로가 중원을 차지하느냐, 지키느냐가 동북아 평화의 키였을지도 모릅니다.
중원을 얻은 민족은 패자가 되고 그 질서에 맞게 동북아가 재편되며 안정을 찾곤 했죠.
당나라, 원나라, 청나라 등은 유목 민족이 세운 중원의 질서로 특별히 이 시기는 세계와 소통하며 동북아의 문화와 번영이 뚜렸했습니다.
그러나 한족이라는 수구적 민족이 중원의 패자가 되면 쇄국적인 성향이 컸죠.
이런 동북아의 정세는 전세계적으로도 영향을 끼쳐 문명의 발달과 세계 소통에도 기여했습니다.
19세기가 되면서 과학 기술이 발달하고 동북아에는 중원이 중심이 아닌 태평양을 중심으로 한 다른 맥락이 생기게 됩니다.
미국의 세계 제패와 태평양의 제해권.
러시아의 동진과 부동항
일본의 신흥 제국주의화로 인한 대륙에 대한 야욕
전통적 강자 중국의 혼란
이 사이에 작은 나라 '조선'은 결국 국권을 빼앗기가도 했습니다.
21세기는 또 다른 형국으로 미중 대립이 동북아 평화의 이슈인데 우리도 우리가 살 길을 도모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미중 대립 이전에 동북아에 있던 미소 대립, 미일 대립의 결과 우리는 분단과 이산, 그리고 전쟁을 겪었고, 그 어느 것도 해소할 수 없었습니다.
이제 미중간의 대립에서 우리가 또다시 주체에서 물러나 있다면 우리는 그들의 다툼에, 그들의 평화론에 따다른 희생양이 되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고구려가 북방 유목 민족을 아울러 다스렸던 시대를 배웠습니다.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고조선과 부여로 이어진 북방 유목 민족의 역사를 통합하고 계승자 임을 인정 받았기 때문이며 백두산 폭발로 그 문화적 기반이 상실되면서 북방을 우리는 잃었지만 이제 새롭게 찾아 올 동북아 평화에 대해 우리의 평화론도 작용할 수 있도록 계획하고 방안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동북아 질서에서 중국의 가치와 미국의 가치가 대립하는 것이 문제라면 중국의 질서가 무너지거나 위기 일 때 우리가 그 빈틈을 파고 들어 역사를 바탕으로 한 새로운 가치를 주입해 동북아를 대륙과 해양이 만나는 소통의 창구로 만들고 그 중심에 우리가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말이 어떤 이에게 허황되게 들릴 수도 있으나 인간이 만든 세계는 인간에 의해 변하는 법이니 우리가 우리의 역향을 키워 무엇에 힘을 쓸 것인가를 생각해 본다면 과연 우리가 가야 할 길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할 것이고, 그것이 답을 찾아 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원하는 평화를 우리가 주도할 수 있도록 우리는 생각하고 구체화하고 이를 적용시키고 관철시켜야 할 것입니다.